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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혼란기 이끈 부산 첫 토박이 시장
영어 능통 미군정 통역 활약… 한국전쟁 당시 국난 극복 앞장
광복 이후 초대 부산시장은 양성봉이었다. 광복과 동시에 미군정기(美軍政期)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그가 정식 시장이 되기까지는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미군정과 초대 부산시장 양성봉
미군정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에서 1개월 뒤쯤이 되는 9월 17일 미군이 부산에 진주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됐다. 그 때 미군정 부산부윤(부윤(府尹) : 당시는 일제강점기 그대로 지금의 부산시를 '부산부'라 하고 시장을 '부윤'이라 했다.)은 미육군 소령 존 P.H 케리였다.
그러나 지역 실정을 잘 모르는 미군이고 보니 지역민이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정 책임자 케리는 양성봉을 10월 10일 부산부 총무과장에 임명했다. 서무과장 내무과장 세무과장 등 행정부서 책임자도 이때 임명됐다. 그 당시는 부산이 경상남도(도청 소재지는 부민동)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상급관청인 경상남도는 국장이 행정부서의 책임자였지만 하급관청인 부산부는 과장이 행정부서를 책임졌다.
그런데 행정책임자인 과장들은 영어가 능통하지 못했다. 통역이 있어 미군과의 통역으로 의사소통을 꾀한다 해도 온전하지 못했다. 총무과장인 양성봉은 영어에 능통했다. 그래서 양성봉을 다른 부서에까지 통할 수 있게 11월 26일 부부윤(지금의 부시장)에 임명했다.
그 뒤 부부윤으로서 행정적 수완을 보인 양성봉은 1946년 1월 24일, 미군정 행정책임자와는 별도로 한국인 부윤에 임명됐다.
영어 능통한 한국인 시장 양성봉
양성봉이 미군정 아래에서 행정적 수완을 보인 것은 영어가 능통했을 뿐 아니라 그 동안 그가 쌓은 노력과 닦은 인간성에서 온 바가 컸다.
양성봉은 1900년 2월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되던 해 부모를 따라 미국 하와이로 갔다가 2년 뒤 부모와 함께 돌아와서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1917년)했다. 상업학교 졸업 후 부산철도국에 직장을 가진 바도 있고, 울주군 서생면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 부산으로 돌아와서 미국인 어빈(한국명 어을빈(魚乙彬))의 제약회사 일을 도왔다. 어을빈은 의사이자 선교사로 지금의 중구 영주동에서 병원을 차려 의료업을 하면서 제약회사도 차려 만병수(萬病水)를 제조했다. 그 만병수를 제조한 어을빈의 부인이 양성봉의 큰 누나였다. 누나가 자형을 도와 달라해서 돕다 업체의 지배인(1934)이 됐다.
그러니 어릴 때 하와이에 살았던 일도 있고, 한때는 호주 선교사에게 우리말 개인교수를 한 적도 있고 미국인 자형과 업무상 대화를 하는 가운데 영어가 능통해진 것이다.
광복 후 혼돈기의 관계(官界)
그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그런 때 미국인 업체에서 일을 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일제의 신사(神社) 참배를 거부한 양성봉이었다. 반일(反日)의 친미파(親美派)로 몰렸다. 태평양전쟁(1941)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경찰에 잡혀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다. 감옥신세는 양한나(梁漢拿·1893∼1976)의 영향도 작용했다.
양한나는 양성봉의 셋째 누나로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으로 임시정부의 자금조달 역할을 하고 있어서 일본경찰의 사찰 대상이었다. 양성봉이 광복을 맞았을 때는 감옥에서 풀려나서 동래 반여동에서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짓고 있을 때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였다. 양성봉이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상위 관청인 경남지사 김철수(金喆壽)에게 출마 의향을 말했다. 김철수 지사는 "지금의 부산 실정으로는 부윤을 할 사람은 양 부윤 밖에 없으니 지역을 위해 부윤직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그 때 김철수 지사가 부산 실정이라 한 것은 광복 후 좌·우익으로 갈린 갈등에서 오는 사회적 혼란과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으로 인한 잡다한 분쟁을 말한 것이다.
김철수 지사의 권고를 받은 양성봉은 국회의원 출마를 단념하고 부산부윤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돌고 돈 양성봉의 인생유전
그런데 1948년 10월 19일 김철수 지사가 물러나고 문시환(文時煥)이 경남지사로 부임했다. 문시환은 모스크바대학 출신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로 전향,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부산시 갑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된 국회의원이었다.
문시환은 경남지사에 취임하자 진주시장으로 있던 정종철(鄭鍾哲)을 1948년 11월 6일 부산시장으로 임명했다. 그 동안 시장으로 있던 양성봉은 해직된 것이다. 그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위관청 책임자가 하위관청 책임자의 임명권을 가진 그 때였다. 날벼락을 맞은 양성봉의 사회적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서울로 올라갔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능한 인재는 유위(有爲·유망, 유능)한 자리에서 일해야 한다고 11월 19일 강원도 도지사에 임명했다. 부산부윤에서 밀려난 지 13일만의 일이었다.
경남도지사로 금의환향
강원도지사로 일한 1년 뒤인 1948년 11월 양성봉은 경상남도 도지사로 전근발령이 났다. 그로서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문시환 지사로 인해 밀려났던 양성봉이 문시환 지사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은 격이 됐다. 1년 전 양성봉 대신 부윤으로 온 정종철도 양성봉 지사가 부임한 몇 개월 뒤 물러났다. 그 무렵 지역에서는 '밀러내고 밀려가는 감독사회'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시환 지사는 양곡정책 잘못으로, 정종철 부윤은 부하직원의 잘못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성봉이 경남지사로 온 7개월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됐다. 부민동의 경상남도 도청은 중앙청이 됐다. 중앙의 여러 공공기관들은 당시의 시장 김주학(金柱鶴)과 양성봉 지사가 직접 지휘·배치했다. 부민동의 도지사 관저는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케 하고 양 지사 본인은 초량동의 자기 집에서 출퇴근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난 극복 맹활약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가 된 부산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양성봉 지사의 역할에서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환도한 후 1953년 10월 농림부 장관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1954년 6월 장관직을 물러난 뒤는 정원과 온실을 갖춘 초량의 옛집에서 살며 부산YMCA, 향토문화연구회, 부산로타리클럽 들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을 계속하다 1963년 6월 3일 뇌졸중으로 63세로 영면했다. 그는 광복 후 부산이 가장 어려웠던 3년간 부산시장으로 일했고, 나라가 국난을 입었을 때는 경상남도 지사로서 4년 동안 슬기롭고도 과감한 행정력을 발휘한 부산 토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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