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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解題
이유진(숭실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전4권)는 일본 천태종 비예산(比叡山) 연력사(延曆寺)의 제3세 좌주(座主)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 794∼864)이 승화 5년(838)부터 승화 14년(847)년까지 당나라로 구법여행을 출발한 후 귀국하기까지의 사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것이다.
1. 저자 엔닌의 일생
일본에서 처음으로 대사(大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엔닌의 전기는《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정관 6년(864) 정월 신축(14일)조의 졸전(卒傳),《속군서류종(續群書類從)》제8집 하 전부(傳部)권 제211 및《개정사적집람(改定史籍集覽)》제 12책 별기(別記)제 64에 수록되어 있는《자각대사전(慈覺大師傳)》, 그리고 경도 삼천원(三千院)에 소장되어 있는〈비예산연력사진언법화종제삼법주자각대사전(比叡山延曆寺眞言法華宗第三法主慈覺大師傳)〉이라 칭하는《자각대사전(慈覺大師傳)》등이다.
《자각대사전(慈覺大師傳)》에 의하면 엔닌은 연력(延曆) 13년(794) 하야국(下野國) 도하군(都賀郡)(지금의 栃木縣下都賀郡)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임생씨(壬生氏)로 이 성씨는 하야국(下野國)· 상야국(上野國) 등 당시 일본의 동국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탄생지와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 유력한 설로는 하도하군(下都賀郡) 임생정(壬生町)의 자운산(紫雲山) 임생사(壬生寺)에 있는 탄생정(誕生井)과 관련된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삼압산록(三鴨山麓) 진언종(眞言宗) 고평사(高平寺)(원래는 천태종) 관내의 하진원(下津原)에 있는 삼향보관(三香保關)으로 엔닌 탄생의 제산탕(際産湯)인 관와(盥窪)와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는 태어났을 때의 자운 전설이 남아 있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웅창계도(熊倉系圖)》에 의하면 엔닌의 아버지 수마려(首麻呂)는 도하군(都賀郡)의 삼압역장(三鴨驛長)으로서 대자사(大慈寺)(지금의 栃木縣下都賀郡 岩舟町 小野寺 부근)의 엄당(嚴堂)을 건립했다고 한다. 형인 추주(秋主)는 외종칠위하(外從七位下)의 위계를 가졌으며, 추주의 손자인 궁웅(宮雄)는 대자사(大慈寺)의 관음당(觀音堂)을 건립했다고 한다. 계도를 통해 볼 때 엔닌 일족은 대자사와 깊은 연관을 맺은 그 절의 단월(檀越)로, 이러한 가계와의 인연으로 엔닌은 후에 대자사의 승려인 광지(廣智)에게서 불교를 수행하게 된 것 같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9살 때 광지가 주석하고 있던 대자사에 맡겨진 엔닌은 15살이 되자 스승인 광지를 따라 비예산에 올라 최징(最澄)에게 사사하게 되었다. 당시 하야국에는 약사사계단(藥師寺戒壇)이 있어 불교가 융성했는지 일본 천태종에는 엔닌(천태좌주 3세) 이외에도 의진(義眞)(천태좌주 1세), 원징(圓澄)(천태좌주 2세), 안혜(安惠)(천태좌주 4세), 유헌(猷憲)(천태좌주 7세) 등 동국출신의 고승들이 많다. 또한 엔닌을 개기개산(開基開山), 재건재흥(再建再興)으로 하는 사원은 일본 전국에 많이 퍼져 있지만 특히 관동(關東)이북에 많은 것 역시 엔닌이 동국출신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엔닌과 관계가 있는 사원은 일본 전국에 502사 정도이다. 관동에 200사, 동북에 91사, 근기에 88사, 중부에 74사, 중국에 41사, 구주에 5사, 사국에 3사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존사(中尊寺), 모월사(毛越寺), 서암사(瑞巖寺), 입석사(立石寺), 윤왕사(輪王寺), 희다원(喜多院), 고번불동(高幡不動), 천초사(浅草寺), 목흑불동(目黑不動), 삼본사(杉本寺), 신무사(神武寺), 이두국청사(伊豆國淸寺), 장야(長野)의 선광사(善光寺) 등이 유명하다.
엔닌은 弘仁 4년(813) 관시에 급제했고, 다음해인 21세 때에 득도하였으며, 23세가 된 홍인 7년(816)에 동대사(東大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구가 되었다. 다음해(817)에는 스승인 최징의 동국순석(東國巡錫)에 수행하여 상야국의 연야사(緣野寺)에서 최징으로부터 전법관정(傳法灌頂)을 받았다.
사홍인 13년(822) 최징이 시적(示寂)한 후에는 수년간 비예산에 머무르며 불법을 설파하고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후 속세로 나가 불법을 전파하였는데 천장 5년(828) 여름에는 법륭사(法隆寺)에서《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고, 다음해(829)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법화경(法華經)》과《인왕경(仁王經)》을 강론하였으며, 북국으로의 순석(巡錫)도 시작하였다. 이후 여법경(如法經)의 행의(行義)를 확립하는 등 불법수행에 매진하던 엔닌은 천장 10년(833) 40세에 시력이 약화되고 병이 들어 횡천(橫川)의 초암에 은거하였으나 현몽에 의해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승화 2년(835)에는 제17차 견당사(遣唐使)에 천태청익승(天台請益僧)으로 임명되어 입당구법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승화 원년(834) 정월 대사에 등원상사(藤原常嗣), 부사에 소야황(小野篁)이 임명된 승화견당사(承和遣唐使)는 이후 각지의 천신지지(天神地祗)에게 제사지내고, 자신전(紫宸殿)에서 배알, 칙어, 하사품 등을 받았고, 대사에게는 절도가 수여되었으며 환송연이 열렸다.
승화 3년(836) 5월 14일 4척의 배에 분승한 견당사 일행은 난파진(難波津)(지금의 大阪)을 출발하여 박다(博多)(지금의 九州 福岡)에 도착하여 선단을 정비하고 순풍을 기다려 7월 2일에 박다를 출항하여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폭풍우를 만나 제1 · 제4박이 침수되어 송포군 별도로 밀려갔고, 제3박은 난파되어 승조원 140여인 중 대마남포(對馬南浦)에 생환한 자가 19명, 9명이 비전국(肥前國) 해안에 표착하고 나머지는 모두 파도에 휩쓸려갔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진언청익승(眞言請益僧) 진제(眞濟)와 진언유학승(眞言留學僧) 진연(眞然)은 입당을 단념하기도 하였다.
다음해(837) 7월 22일에 수리를 마친 견당사선은 재도항을 시도했으나 다시 오도열도(五島列島) 앞에서 역풍을 만나 제1 · 제4박은 일기(壱岐)에, 제2박은 치하도(値賀島)에 표착하였다. 이 두 번의 실패로 추가로 수리박장관(修理舶長官) · 차관(次官)을 임명하는 등 일본 조정은 선박의 제조와 수리에 고심하였다. 세 번째의 출항을 준비하면서 견당대사 등원상사(藤原常嗣)는 전회에 비교적 손상이 적었던 제2박을 제1박으로 삼아 자신이 승선하고, 손상이 컸던 제1박에 부사 등을 승선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부사 소야황(小野篁)은 병을 칭하여 승선을 거부하였고, 지승선사(知乘船寺) · 역청익생(曆請益生) 등 4명이 출항 전에 도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인명천황(仁明天皇)은 격노하여 소야황을 은기국(隱岐國)에 유배시켰다.
엔닌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데(승화 5년 6월 13일) “제1 · 제4박의 사신일행이 배에 탔다”고 하여 제2박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결국 본래는 4척의 선박으로 계획했던 승화견당사는 실제로 2척이 되어버렸고, 제2박은 후에 판관 양잠숙녜장송(良岑宿禰長松)을 선두로 하여 속전록사(粟田錄事), 기통사(紀通事), 계명법사(戒明法師), 신참군(神參軍) 등이 승선 · 출발하여 대사일행과는 별도로 도항하였다.
당의 개성 3년(838) 7월 2일 양주(揚州) 해릉현(海陵縣) 백조진(白潮鎭) 상전향(桑田鄕) 동양풍촌(東梁豊村)에 상륙한 후 견당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구법순례를 위해 당나라에 남기를 원하는 엔닌 등을 산동반도(山東半島) 등주(登州)의 적산(赤山)에 남겨놓고 귀국길에 오른 승화견당사 일행은 험난한 항해 끝에 승화 7년(840) 4월 8일 대우(大遇)에 도착 · 귀국하였다.
견당사 일행과 헤어져 당나라에 남은 엔닌은 구법순례라는 목적을 달성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양주(揚州) 개원사(開元寺)의 전아(全雅), 장안(長安)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원정(元政), 청룡사(靑龍寺)의 의진(義眞) 등으로부터 밀교(密敎)를 배우고, 오대산(五臺山)을 순례하였으며, 상행삼매(常行三昧)의 기초가 되는 법조유념불(法照流念佛)을 배웠다. 그러나 무종(武宗)의 불교 탄압인 회창폐불(會昌廢佛)을 피해 승화 14년(847)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엔닌은 승화 14년(847) 9월 19일 대재부(大宰府) 홍려관(鴻臚館)에 도착하였고 이곳에 머물면서 12월에는 자신이 양주(揚州)를 시작으로 오대산을 거쳐 장안에 이르는 동안 당나라에서 구득했던 경전, 만다라(曼茶羅) 등의 목록인《입당신구성교목록(入唐新求聖敎目錄)》을 작성했다.
다음해(848) 3월 26일에는 성해(性海), 유정(惟正) 등과 함께 입경하였다. 전등대법사(傳燈大法師)의 위를 제수 받았고, 7월에는 내공봉십선사(內供奉十禪師)에 보임되었으며, 제형원년(齊衡元年)(854년) 연력사(延曆寺)의 주지가 되어 명실상부 제3세 천태좌주(天台座主)가 되었다.
이후에도 계속하여 불법을 수행하였으나 정관 5년(863) 10월 병상에 누워 다음해(864) 1월 14일 72세로 입적하였다. 일본 조정은 그가 입적하고 한 달 뒤인 2월 16일에 법인대화상(法印大和尙)의 위를 수여하였고, 정관 8년(866) 7월 14일에는 ‘자각대사(慈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저서로는《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이외에도《금강정경소(金剛頂經疏)》《현양대계론(顯揚大戒論)》이 있다. .
2. 저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저본은 일본 경도의 동사관지원본(東寺觀知院本)(1291년 겸윤(兼胤)이 필사한 고초본)이다. 이 책은 1907년에 처음으로《속속군서유종(續續群書類從)》(제12집 종교부)에 활자본으로 수록되었다.
이어서 1914년에는 계통을 달리하는 진금사본(津金寺本)(信濃 津金寺, 1805)이《사명여하(四明餘霞)》(제329호 부록)에 수록되었다.
1915년에는 동사관지원본을 저본으로 하고 진금사본을 참고로 수정 · 보완 하여《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의 유방전총서(遊方傳叢書)에 수록되었다.
그 후 1926년에는 동사관지원본이 영인되어《동양문고논총(東洋文庫論叢)》(제7)에 수록되었고, 1939년에는 堀一郞譯《국역일체경(國譯一體經)》(史傳部25, 1963 보정)에도 수록되었다.
1964∼69년에는 小野勝年에 의해《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4권)가 간행되었고(1989 復刊), 1970 · 1985년에는 足立喜六譯注 · 鹽入良道補注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1 · 2가 간행되었다(《平凡社 東洋文庫》157 · 442). 1990년에는 深谷憲一譯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도 간행되었다.
미국에서는 1955년에 E. O. Reischauer에 의해 ENNIN'S DIARY The record of a pilgrimage to China in search of Law 라는 영문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대만에서는 1971년에《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의 복각판이 간행되었고, 1992년에는 李鼎霞 · 許德楠의 修訂校註, 周一良審閱《入唐求法巡禮行記校註》가 간행되었으며, 1998년에는 平釋譯《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中國佛敎經傳寶藏精選白話版94)도 간행되었다.
중국에서는 1986년 顧承甫 · 何泉達點校《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간행되었다.
한국에서는 1991년 신복룡 번역 · 주해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간행되었고(2007 補訂), 2001년에는 김문경 역주《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간행되었다.
3.《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내용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권1은 승화 5년(당 개성 3년, 838) 6월 13일부터 개성 4년(839) 4월 18일까지의 기록으로, 엔닌이 견당사선을 타고 일본 박다(博多)를 출발하여 당나라에 도착한 뒤, 양주(揚州)와 초주(楚州)를 거쳐 다시 귀국선을 타고 해주(海州)까지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승화 5년(당 개성 3년, 838) 6월 17일에 출발한 승화견당사선은 7월 2일 드디어 양주 해릉현(海陵縣) 백조진(白潮鎭) 상전향(桑田鄕) 동양풍촌(東梁豊村)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작은 배로 바꾸어 탄 견당사 일행은 7월 25일에는 양주부에 이르렀다. 대사인 등원상사(藤原常嗣) 등 35명은 양주에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향하고 엔닌 등은 양주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엔닌은 천태산(天台山)에서 스승인 최징(最澄)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하는 천태산(天台山) 선림사(禪林寺)의 경문(敬文)스님을 만나 교유하였고, 숭산원(嵩山院)의 전아(全雅)스님으로부터〈금강계제존의궤(金剛界諸尊儀軌)〉등을 빌려 서사(書寫)하고 금강계대법(金剛界大法)을 배웠다. 이러한 와중에 엔닌은 여러 차례 천태종의 본산인 태주 천태산의 순례를 허락해 줄 것을 양주도독부에 청원했다.
그러나 양주도독부는 천태산행은 천자의 칙(勅)이 있어야만 허락할 수 있는 일이라 답변하였고, 장안으로 갔던 견당대사도 엔닌의 천태산 순례를 허락해 줄 것을 당시의 황제인 문종에게 주청했지만 당 조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견당사의 일원으로 입당한 엔닌은 견당사 일행과 함께 귀국해야 하는데 천태산으로 가게 되면 일정상 견당사 일행의 귀국일자에 맞춰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엔닌의 천태산 순례는 좌절되었고, 장안에서 초주로 돌아온 견당대사 일행과 합류하여 귀국하기 위해 양주를 떠나 개성 4년(839) 2월 24일 초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엔닌은 오로지 불법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견당대사에게 당나라에 머물고 싶다는 글을 올리고 견당사선의 신라인 통역인 김정남(金正南)과 상의하여 그 방법을 물었다.
승화견당사일행은 개성 4년(839) 3월 24일에 귀국하기 위하여 드디어 초주를 출발했고, 엔닌 역시 귀국을 위해 준비한 신라선 9척 중 제2선에 올라 귀국길에 올랐다. 4월 5일 초주를 떠난 귀국선은 해주에 이르렀고, 불법으로라도 당나라에 머물기로 결심한 엔닌은 종자 3명과 함께 해주 관내인 동해현(東海縣) 동해산(東海山) 동쪽에 정박 중이던 귀국선에서 내렸다. 엔닌의 확고한 뜻을 이해한 견당대사 등원상사(藤原常嗣)는 금을 마련해 주며 순례비용으로 충당하게 했다.
그러나 엔닌 일행은 하선하고 나서 곧 해안가 산기슭에서 신라인 목탄운송업자들에게 발각되어 신분이 탄로 났고, 당나라 자순군중(子巡軍中)에게 심문을 받고 다시 귀국선에 태워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구하려던 생각을 단념한 엔닌은 견당사 일행과 함께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권2는 개성 4년(839) 4월 19일부터 개성 5년(840) 5월 16일까지의 기록이다. 엔닌이 탄 귀국선은 풍랑에 떠밀려 6월 7일에 다시 문등현(文登縣) 청녕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에 이르게 되었다. 엔닌은 다음날 배에서 내려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들어가 그곳에 기거하면서 원주(院主)인 법청(法淸)스님 등 재당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그 해 겨울을 적산법화원에서 지내며 당나라에 머물 방법을 구하였다.
적산법화원에 머무는 동안 천태산과 오대산을 모두 순례한 신라승 성림화상(聖林和尙)의 권유에 의해 천태산행을 포기하고 천태종의 고승들이 많이 주석하고 있는 오대산 순례를 결심하였다. 엔닌은 재당 신라인들의 원조와 협력으로 마침내 개성 5년(840) 2월 19일 당 조정으로부터 여행 허가를 받아 오대산 순례에 나서게 되었다. 적산법화원을 출발해 등주도독부로 향하던 엔닌은 적산신(赤山神)에게 구법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하고, 귀국 후에 일본에 선원을 건립할 것을 맹세했다. 등주에서 내주(萊州) · 밀주(密州)를 거쳐 청주(靑州)에 이르렀고, 적산법화원을 떠나 2,300여 리를 걸어서 드디어 5월 1일 죽림사(竹林寺)에 이르러 제원(諸院)을 순례했다. 5월 16일에는 오대산 대화엄사(大花嚴寺)에 도착하였다.
《그런데《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권2 말미의 개성 5년(840) 4월 28일부터 5월 16일까지의 일기(4월 48일, 4월 29일, 5월 1일, 5월 2일, 5월 5일, 5월 14일, 5월 16일)는《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권3 초두에도 중복되어 기재되어 있다. 권2와 卷3에 중복되어 있는 내용을 비교해 보면 거의 동일하지만, 권2에는 누락된 부분이 권3에는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권3은 개성 5년(840) 5월 17일부터 회창 3년(843) 5월 26일까지의 기록이다. 오대산 대화엄사에서 엔닌은 지원(志遠)스님을 만나 스승인 최징이 귀국한 후 일본 천태 연력사(延曆寺)의〈미결삼십조(未決三十條)〉등을 물었다. 그 후 두 달 가까이 중대(中臺) · 서대(西臺) · 북대(北臺) · 동대(東臺) 등 오대산의 수많은 성적을 순례하고, 지원(志遠) · 원(문)감(元(文)鑒) 등 천태종의 고승들로부터 강론을 들으며《천태교적(天台敎迹)》등 37권을 필사했다. 7월 1일 대화엄사(大花嚴寺)를 떠나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출발한 엔닌은 금각사(金閣寺)와 남대(南臺)를 순례하고 영선(靈仙)스님의 유적을 둘러보며, 8월 22일 장안에 도착하였다. 장안에 도착한 엔닌은 승려와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는 공덕사(功德使)의 관리 하에 당시의 거찰이던 자성사(資聖寺)에 머물며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원정(元政)스님으로부터《염송법문(念誦法門)》을 빌려 필사하는 등 일본에 없는 불경을 필사하고, 원정(元政)스님으로부터는 금강계대법(金剛界大法) · 전법관정(傳法灌頂)을 배우고, 청룡사(靑龍寺)의 의진(義眞)스님으로부터는 태장계대법(胎藏界大法) · 소번지대법(蘇番地大法)을 배우는 등 고승들을 찾아 지념(持念)의 비법을 전수받고 범어도 익혔다. 그러나 장안에 체류한지 2년 만에 당시의 황제인 무종(武宗)에 의한 대대적인 불교 탄압인 회창폐불(會昌廢佛)을 만났다. 회창 2년(842) 10월 9일에 주술 등을 사용하거나 전과가 있는 승니(僧尼)를 환속(還俗)시키고 재산을 몰수하는 칙명(勅命)이 내렸다. 회창폐불이 시작된 것이다.
회창 3년(843) 정월 17일에는 공덕사(功德使)가 제사(諸寺) 승니의 환속을 명했다. 정월 27일에는 관군용사(觀軍容使)가 공문을 보내 외국승들을 소집하였다. 다음 날 남천축(南天竺) · 북천축(北天竺) · 사자국(師子國) · 신라(新羅) · 일본(日本) 등의 외국승 21명이 군용아문(軍容衙門)에 모여 군용인 구사량(仇士良)을 만났다. 구사량은 외국승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권4는 회창 3년(843) 6월 3일부터 회창 7년(대중원년, 일본 승화 14, 847) 12월 14일까지의 기록이다. 회창 4년(844) 3월 불교탄압은 더욱 심해져 무종은 불교 경전을 불태우고 불상을 파괴하라는 칙을 내렸다. 이어서 회창 5년(845) 5월 13일에는 엔닌도 공덕사의 지시에 의해 강제로 환속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5월 15일 엔닌은 그동안 필사한 경전과 불화 등을 몰래 꾸려 장안을 떠나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엔닌의 귀국에 이르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장안을 떠난 엔닌은 낙양(洛陽)을 거쳐 6월에 양주에 도착하였다. 양주를 거쳐 초주에 이르러서는 그곳에서 귀국선을 구하려고 했으나, 초주 관내 산양현(山陽縣)의 관리는 천자의 칙에 따라 허락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엔닌에게 산동반도의 등주로 가서 귀국하라고 하였다. 이에 엔닌은 초주의 재당 신라인인 유신언(劉愼言)에게 장안에서 가지고 온 짐을 맡기고 7월 8일 초주를 출발하여 해주(海州) · 밀주(密州) · 내주(萊州)를 거쳐 8월에 등주에 도착하였다.
등주에 도착한 엔닌은 문등현으로 가서 그곳의 재당 신라인 관리인 장영(張詠)의 도움으로 적산법화원의 장원에 머물며 귀국선을 수소문하였다. 회창 6년(846) 10월에는 엔닌의 제자 성해(性海)가 양주에서 와서 만났고, 성해가 일본에서 가져온〈태정관첩(太政官牒)〉·〈연력사첩(延曆寺牒)〉및 대재소이(大宰少貳) 소야항가(小野恒柯)의 편지와 인명천황(仁明天皇)이 하사한 황금 등을 전달받았다.
남쪽 명주(明州)(지금의 寧波)에 일본국의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배를 타고 귀국하기 위해 회창 7년(847) 윤3월 12일 문등현을 떠나 초주로 향했다. 그러나 엔닌이 6월 5일 초주에 도착했을 때 일본국의 배는 이미 출발했다는 소식만이 남아 있었다. 다시 귀국선을 수소문한 엔닌은 신라인 김자백(金子白) · 흠량휘(欽良暉) · 김진(金珍) 등의 배가 일본으로 간다는 편지를 받고 유신언의 도움으로 6월 19일 다시 김자백 등의 배를 찾아 북쪽으로 출발하였다. 장안을 떠나 2년이 넘는 세월동안 무려 5천리 길을 왕복한 끝에 마침내 재당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7월 20일 유산(乳山)에서 김자백 등의 배를 찾아 짐을 옮겨 싣고 귀국 길에 올랐다.
강제로 환속당한 엔닌은 귀국선에 타고 있던 8월 15일에 다시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입었다.
엔닌을 태운 배는 9월 2일 적산포(赤山浦)를 출발해 청해진(淸海鎭)(지금의 완도)을 거쳐 9월 17일 박다(博多)에 도착하였다. 엔닌이 일본을 떠난 지 9년 3개월 만의 귀국이었던 것이다. 귀국한 엔닌은 승화 14년(847) 9월 19일 대재부(大宰府) 홍려관(鴻臚館)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義解篇에는 圓光, 寶壤, 良志, 惠宿, 惠空, 慈藏 元曉, 義湘, 蛇福, 眞表, 勝詮, 心地, 太賢, 法海 등의 전기를 서술하고, 歸竺諸師條에서는 서역구법승에 관해 간략하게 기술했다. 의해편 소재 고승의 전설을 고찰한 경우가 있을 뿐, 의해편을 《삼국유사》의 체제와 관련지어 논의한 연구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이상이《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엔닌의 구법순례여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정을 통해 엔닌은 당측의 정사나 여타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당대의 정치 · 사회 · 경제 · 불교 등에 관해 다양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엔닌이《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신의 견문을 근거로 기록해 놓은 당시 당나라의 상황과 주변국과의 관련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에서 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한 도해의 과정에는 상상할 수 없는 위험과 어려움이 따랐다. 견당사 일행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을 떠나 신불의 가호를 기원하며 순풍(信風)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또한 견당사와 함께 파견된 일행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입당 도해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거나, 견당사의 임무를 마치고 대륙으로부터 입수한 많은 교전 등의 문물과 함께 귀로에 조난을 당해 수몰되기도 하였다.
또한 보다 안전한 한반도 연안항로를 이용하는 데에도 정치적 위험이 내포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라와 일본은 관계가 악화되어 양국의 교류가 단절되어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에 부담을 느낀 일본 조정은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만일 견당사선이 조난을 당해 한반도 연안에 표착하게 되면 그들의 안전을 확보해 줄 것을 신라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사실 승화견당사나 엔닌의 귀국도 신라와 일본 양국의 불안한 정세 속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한반도 연안을 통과하는 항로를 이용하여 비교적 안전하게 일본에 귀착하였다. 무엇보다도 귀국을 위해 견당사 일행이 초주에서 구입한 신라선과 선원들이 안전한 도해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둘째는 엔닌이 당나라에 체류하며 구법순례를 행하는 과정에서 당의 관리들과의 접촉하고 문서 행정을 통해 경험하게 된 당대의 관료제이다. 천태산 순례를 허가받기 위해 양주도독부에 낸 탄원서나, 귀국하는 견당사선에서 불법으로 하선하여 당나라에 남게 되면서 자순군중(子巡軍中)에게 발각되어 심문을 받고 견당사선으로 되돌려 보내지는 과정에서, 엔닌은 사건의 경위와 휴대물품 전부에 대한 목록을 직접 작성하여 문서 형태로 제출하고, 그에 대한 보고와 처분 역시 모두 상세한 문서로 송달되었다. 이후 또 다시 구법순례를 위해 산동연안에서 귀국하는 견당사 일행과 헤어져 적산법화원에 머무르게 되어서도 그 경위에 대해 문등현청(文登縣廳)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의 절차를 밟고 있다. 이러한 과정과 엔닌이 일기에 필사해 놓은 문서 형식 등을 통해 당시 당나라에서는 관료 조직의 정비와 문서 행정을 통해 엄격하게 지방 통제가 실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에 이렇게 치밀한 정치 체제가 확립되어 있는 것은 엔닌이 특히 공험(公驗)을 발급받기 위해 지방 관청과 교섭하고, 그 사이에 제출하고 발급 받은 문서양식을 통해 현 → 주 → 도독부로 이어지는 지방행정 체계가 얼마나 확고하고 중층적으로 확립 · 유지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엔닌이 등주에 체류하던 기간에 목격한 칙서전달의식(勅書傳達儀式)《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권2 개성 5년(840) 3월 5일조)을 통해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을 통제하는 통치력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는 순례의 과정 중에 엔닌이 몸소 체험하고 관찰한 사회 · 경제 전반에 관련된 기록이다. 엔닌은 당시 서민들의 일상 생활을 관찰하여 당나라의 연중 행사나 제사 의례, 국가의례 및 금기와 신화 · 자연 재해 등의 사회상과 당나라의 물가변동 및 시장상황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넷째는 당시 당나라의 지리와 내륙 교통에 대한 기술이다. 엔닌은 순례 기간 동안 내륙 각지의 산야를 걸어서 이동하는 한편, 발달된 운하를 이용하며 완비된 교통 · 운송 시설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또한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이 사원의 시설과 함께 완비되어 있는 것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엔닌 자신이 이동한 지역 간의 거리와 그 과정에서 관찰하게 된 이정표에 대해서도 일본과 비교 · 기술하고 있다.
엔닌은 구법승이라는 신분상 숙박 시설로서 사원이나 민가를 주로 이용하였지만, 특히 오대산을 향해 가는 도중에는 보통원(普痛院)에 머물렀다. 개성 5년(840) 4월 23일 상방보통원(上房普通院)의 이용을 시작으로 유사보통원(劉使普通院), 양령보통원(兩嶺普通院), 과울보통원(菓菀普通院), 해탈보통원(解脫普通院), 정수보통원(淨水普通院), 당성보통원(塘城普通院), 용천보통원(龍泉普通院), 장화보통원(張花普通院), 다포보통원(茶鋪普通院), 각시보통원(角詩普通院), 정점보통원(停點普通院) 등을 이용하며 오대산에 이르렀다. 원래 보통원은 불교의 보통공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순례자를 위해 성지의 참배 길에 설치하여 승속이 함께 쉬며 숙식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시설이다. 대개 20∼30리마다 설치하였고 원주를 두어 이를 관리하게 하였다. 엔닌의 여정을 통해 볼 때 엔닌은 하루에 보통 50리 정도를 이동하고 있으므로, 보통원은 대개 반나절마다 쉴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규모가 큰 곳은 일시에 100여 명이 숙식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오대산 순례를 마치고 장안으로 향하는 길에도 견고보살원(堅固菩薩院), 상방보통원(上房普通院), 호촌보통원(胡村普通院), 송촌보통원(宋村普通院), 관두보통원(關頭普通院), 대간(우)보통원(大干(于)普通院), 백양보통원(日本商), 고성보통원(古城普通院) 등에서 유숙하였다.
엔닌은 또한 오대산을 떠나 장안으로 향하는 도중에 보통원 이외에도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점(店)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점은 당률(唐律)에는 ‘저(邸)는 창고, 점은 상점’이라고 규정되어 있지만, 저와 점은 각각 창고, 상점, 여관 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으므로 ‘복합적인 상용옥사(商用屋舍)’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와 점은 기능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크기 차이로, 저는 대규모로 성시에 존재하는 것이고, 점은 소규모로 향촌이나 초시(草市)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점에는 숙박 시설로서의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당대의 점취락(店聚落)은 물자를 매개로 한 교통의 요충에 발생한 점이라는 시설들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다.《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교통량이 많은 곳에서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상매(商賣)가 성립되고, 숙박업에도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섯째는 승려 엔닌이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불교 교단의 조직이나 의례 등 당시의 불교 전반에 관한 내용과 무종의 회창폐불 과정에 대한 상세한 정보이다. 엔닌은 순례기간 중 자신이 머무는 사원이나 방문했던 사원시설에 대해 기술했고, 당나라 불교 교단의 국가적 조직에 대한 정보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특히 수도 장안의 불교에 절대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공덕사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다. 또한 자신의 입당 목적인 천태종에 대한 학습과 경전 · 불화의 수집 및 밀교의 습득도 열성적으로 수행하였다.
엔닌은 자신이 직접 참여하고 경험한 당나라 각 사원의 신앙의식에 대해서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불교의식 중 재(齋) 및 예불 · 공양 등의 의식 절차에 대해 상세히 관찰 묘사하였는데, 특히 오대산 죽림사에 도착한 개성 5년(840) 5월 5일에는〈죽림사재예불식(竹林寺齋禮佛式)〉의 절차와 내용 및 그 참여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다. 불교의 신앙 의식과 함께 엔닌이 자주 묘사한 불교 행사는 강경의식(講經儀式)이다. 적산법화원에 머물면서 참여하고 관찰한 신라의 불교 의식에 대해 개성 4년(839) 11월 22일의 일기에〈법화원강경의식(法華院講經儀式)〉〈신라일일강의식(新羅一日講儀式)〉〈신라송경의식(新羅誦經儀式)〉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일본이나 당나라의 불교 의례의 차이와 유사점까지 언급하였다.
또한 적산법화원에서는 겨울에 정기적으로《법화경(法華經)》강의와, 여름에는 기타 경전의 연속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적산법화원에서는 일반인도 승려와 함께 강경의식에 참여하였는데 처음에는 40여 명 정도가 참여했지만 마지막 이틀간은 250명과 200명의 신도가 참여하여 보살계(菩薩戒)를 수여하는 것으로 종강의식이 행해지고 있던 것도 묘사하였다.
또한 개성 5년(840) 5월 16일 오대산의 대화엄사에 도착하여서는 당나라의 강격의식인《마가지관(摩訶止觀)》의 강경의례가 행해지고 있던 것을 보고 그 절차도 기록해 놓았다.
이외에도 엔닌은 불교도의 공양의례와 제례의식에 대해서도 자주 기록하였고, 장안에 머물던 기간 중에는 개성 6년(841) 2월 15일부터 4월 8일까지 이루어진 흥당사(興唐寺)의 관정의식(灌頂儀式)과 4월 1일부터 23일까지 이루어진 대흥선사(大興善寺) 번경원(翻經院)의 관정의식(灌頂儀式)에 대해서도 상세히 관찰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귀국 후인 가상(嘉祥) 2년(849) 5월에 엔닌이 천 명 이상의 승려가 참여한 일대 관정(灌頂)의 의식을 주재하는데 기본이 되는 귀중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엔닌은 천태종뿐만 아니라 당에서 습득한 밀교 수행법도 일본에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엔닌은 순례기간 동안 당나라 불교의 흥성과 쇠퇴의 과정을 모두 경험하였다. 회창 2년(842) 10월 9일에 주술 등을 사용하거나 전과가 있는 승니를 환속시키고 재산을 몰수하는 칙命에 의해 시작된 불교 탄압은 회창 5년(845) 절정에 이르렀고, 이 폐불은 불교의 쇠퇴뿐만 아니라 당시 당나라에 존재하던 모든 외국 종교를 일소해 버리고 말았다. 폐불의 기간 동안 엔닌은 수차례에 걸쳐 귀국을 탄원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회창 5년(845) 5월 13일에 이르러서야 공덕사의 지시에 의해 외국승에 대한 강제로 환속이 결정되면서 엔닌도 환속되어 드디어 귀국의 허가를 받게 되었다.
끝으로 엔닌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재당 신라인의 활동상과 장보고(張保皐)(張寶高)에 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엔닌은 일본을 출발할 때 축전국태수(筑前國太守) 소야말사(小野末嗣)가 장보고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가지고 왔다. 물론 견당사선이 양주에 도착할 때 난파되어 소개장을 잃어버렸으므로 장보고에게 그 소개장을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엔닌은 당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장보고나 재당 신라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양주에 머무는 동안 엔닌은 신라인 무역상 왕청(王請)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재당 신라인들과 의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졌고, 적산법화원에 도착하여서는 재당 신라인들의 보호 속에 그곳에 머물며 당에서의 구법순례를 구체화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이후 당나라 체류기간 동안 계속된 재당 신라인과의 교류과정 속에서 엔닌은 초주(楚州)와 연수현(漣水縣)에 설치되어 있는 신라방(新羅坊)과 그 책임자인 총관(惣官)의 주도 하에 자치적 통치를 행하고 있던 기록과 다방면에서의 재당 신라인의 활동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산동반도 연해안으로 이동하면서 해주(海州)의 숙성촌(宿城村), 밀주(密州)의 주마포(駐馬浦), 모평현(牟平縣)의 소촌포(邵村浦), 도촌(陶村), 유산포(乳山浦) 그리고 등주(登州)의 적산촌(赤山村) 등 재당 신라인 촌락과 그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다양한 재당 신라인의 생활상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특히 산동반도에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를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었다.《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전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재당 신라인의 활동과 엔닌의 구법순례 과정에서 보여 준 그들의 물심양면의 전폭적 지원, 그리고 엔닌의 귀국 과정에서 보여주는 재당 신라인 사회의 긴밀하고 조직적인 정보망의 구축은, 엔닌을 비롯한 구법승이나 견당사의 왕래에 있어서 실질적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과 한반도 · 일본사이의 문물과 문화의 유통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청해진(淸海鎭)을 중심으로 장보고가 당에 파견한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나 일본과의 교역을 담당하는 회역사(廻易使)의 존재는 당 -신라 -일본을 연결하는 교역 네트워크의 형성을 통해 엔닌이 입당구법하였던 시기의 동아시아 해상에서 재당 신라인 국제무역상을 중심으로 당상(唐商), 일본상(日本商) 등이 빈번하게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