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美學
인류가 원시상태로 지구상에 존재할 때부터 인간은 두 발로 서서 멀리보고 빨리 뛰는 것이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었다. 빠르게 많이 움직일 수 있어야 생명 유지에 필요한 먹이를 얻고 맹수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립보행은 인간이 타 동물과 구분되는 특징으로 태초부터 걷는 것, 뛰는 것이 인간 활동의 기본 수단이었음을 알려준다. 인간의 진화 과정을 보면 사람들이 과학의 발달로 탈것을 만들기 전에는 모든 이동이 동물과 자연의 힘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오직 걷는 방법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약 50년 전만해도 기차, 버스, 자전거 같은 교통수단이 있었지만 일반인은 이용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이동을 걸어서 했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왕복 약 6Km, 중학교는 10Km 정도를 매일 걸어 다녔다. 그런 연유인지, 어린나이에 세상살이가 너무 힘겹고 고단해서인지, 먹을 것이 부족하여 영양상태가 안 좋았던 탓인지, 거의 모든 내 또래 아이들의 얼굴에는 버짐이 피고 몸은 말라서 여윈 이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평소 높고 위대한 자연의 웅자, 고봉 설산의 청량한 기운을 그리워했던 나는, 지난 1월에 네팔의 히말라야 산군 중 안나프르나 코스의 마챠프차르(MBC) 4,000m, 5월에는 쿰부 에베레스트의 칼라파타르 정상 5,550m 트래킹을 다녀왔다. 산스크리스트어로 hima(눈)+alaya(머르는 곳)라는 뜻을 가진 히말라야는 랑탕 히말라야 코스까지 포함하여 Three Path로 불리는 세계 제일의 트래킹 명소이다. 그 중에서도 안나프르나 코스를 최고의 백미로 치는데 걸어 올라가며 마주하는 오솔길의 정취가 정겹고 아름답다.
목을 치켜세워야 보이는 설산 고봉의 피크 포인트에서 신이 반겨 손짓할 것 같은 위엄있고 영험스런 산, 그 험하고 거친 히말라야의 품속에서 나고 자란 네팔리들은 고산의 허리에 집을 짓고 거미줄 같은 산길을 다람쥐처럼 잘도 넘나든다. 집짓고 농사짓고 먹거리를 나르는 모든 일들을 남로라는 머리띠 하나에 의지하여 메고 지고 나르며 산다. 길거리에는 허름한 집을 터서 만든 초라한 가게 방이 가끔 보이는데 내 어린 시절, 무던히도 나를 유혹하던 학교 앞 구멍가게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다. 도둑이 들까 문틀 넘어 철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쳐 논 모습이나 진열장 속에 종이로 싼 비과, 눈깔사탕 같은 것에 콜라와 사이다, 환타 같은 음료수 병들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그것이다. 먼 산동네에서 내려 온 어린것들이 먹고 싶어 목을 빼고 쳐다보는 모습도 배고팠던 우리나라의 옛 모습을 연상시켜 애처롭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산허리에 기어든 설광에 그을려 까무찹찹한 피부에 유난히 눈망울이 큰 천진스런 히말라야의 아이들은 슬리퍼 같은 허름한 신발을 신고도 그 험한 산길을 잘도 뛰어 다닌다. 고소와 추위, 피로로 헉헉대는 다른 나라의 트래커들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저렇게 좋은 옷과 신발을 신고 덩치도 큰 사람들이 왜 저리 힘들어 할까? 해맑은 표정으로 연방 콧물을 훔치는 소매위로 겹겹이 쌓인 콧물 자욱이 히말의 찬란한 햇살에 반사되어 섬광처럼 반짝인다. 모든 활동을 두 다리에 의지하는 그들에게 비만과 성인병은 사치스런 그림의 떡이다.
우리나라도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엔 불편하긴 했지만 환경이 어쩌고, 성인병이 어쩌고, 비만이 어쩌고, 칼로리가 어쩌고 하는 얘기는 없었다. 옛날에 비하면 모두가 잘 사는 고도성장의 풍요 속에 먹을 것이 넘치고 가진 것이 많아 함부로 쓰고 버리는 낭비의 세상이 되면서 새로 생긴 부자 병이 그것이다. 여기에다 인간의 양심 없는 이기주의, 끝없는 편익 추구, 자각 없는 자연 파괴와 개발이 급기야 사람을 성인병의 고통과 환경오염, 자연 파괴로 인한 지구재앙을 자초하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환경 파괴의 주범은 자동차다. 여북하면 옛날 포드자동차의 사장도 “자동차 만들기가 무섭다..... 세상을 해칠까봐.“라고 자술 했을까. 사람은 누구나 힘든 것을 싫어하고 편한 것만 찾는 타성이 있다. 거기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유의 빨리 빨리에 익숙하다보니 자연히 가장 기본이 되는 걷는 것을 기피하게 되고 움직이길 싫어해 얼마 안 되는 거리도 자동차를 몰고 타고 다닌다. 그런 나쁜 습관 하나가 지구촌에 온도 상승으로 인한 쓰나미와 지진 같은 인류재앙을 초래하여 제 얼굴에 침밷기 꼴이 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 저지른 가장 큰 인과응보의 사례가 자연훼손과 환경파괴가 아닌가 생각된다.
여러해 전 신문에 국립중앙의료원의 의사, 간호사, 청소용역직원까지 전 직원 1,200여명이 ‘운동화 신고 출퇴근하기 운동’을 시작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금연운동가로 소문난 박재갑 원장이 “출근 때부터 운동화를 신으면 운동량도 많아지고 건강해진다”며 양복에도 어울릴 수 있게 검은색 운동화를 나눠주고 운동화를 신고 출퇴근하고 생활 속에서 운동을 하자는 “運出生運” 운동을 펼쳤다는 내용이다.
걸을 때는 우리 몸속에 있는 200여개의 뼈와 600여개가 넘는 근육이 일제히 운동을 하고 뱃속의 장기들도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대신 체중 1.2배를 견뎌야 하는 발은 고달프다. 하루에 보통 500-1,000t에 이르는 무게를 견뎌내야 된다고 하니 딱딱한 통굽 구두 대신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다니면 발은 그만큼 편안해 질 것이다. 요즘은 구두모양의 운동화도 잇따라 개발되고 있어 ‘운동화 출근’바람이 더 많이 번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지는데 한 몫 하기를 기대해 본다. 세계암연구기금은 최근 “걷기만 제대로 하면 매년 5,000여건의 유방암과 4,600여건의 대장암을 막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매일 헬스클럽을 가지 않더라도 하루 30분 이상 심장 박동이 빨라지게 걷는 것만으로도 각종 질병의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세계보건기구도 걷기를 권장하고 있다. 학계의 연구보고도 걷기가 심장질환, 요통, 뇌졸중, 체중조절, 당뇨, 골다공증, 관절염, 우울증, 암 등 성인병 예방에 80%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2007년 새해부터 하루 10,000보(약 6Km) 이상을 걷는 것을 목표로 만보기를 사서 차고 걸어보았는데 그게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그 정도 거리는 내가 어렸을 때 걸었던 거리의 반도 안 되는데 하고 우습게 생각했지만 막상 해보니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힘들었다. 만보를 걷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동안 나도 얼마나 문명에 길들여졌고 과학의 중독자로 편하게 살아왔나 반성도 된다. 하루에 만보를 걸으려면 일상생활을 자가용을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녀도 시간을 내어 따로 걷거나 다른 운동을 1시간이상 하여야 가능하다. 내 딴에는 노력을 한다고 했지만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못 지키는 날이 1/3도 더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작은 노력들로 인해 체중조절이 되면서 전보다 몸도 가벼워지고 배설도 원활해지며 걸으면서 하는 호흡과 명상으로 스트래스 해소에도 많은 도움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종교 단체의 마크를 보면 둥근 ‘무명’의 고리만 가운데 그려져 있는데 사람이 그 고리에 낀 때를 평생을 갈고 닦아도 처음의 맑고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의미라고 한다. 신자가 된 사람이 아무리 수행을 해도 태어날 때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순수로 돌아가기가 어렵다고 해서 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해탈의 경지로, 보살의 경지로, 수행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 구원도 사람이 많이 걷는 것도 어찌 보면 인간 태초의 순수로 돌아가는 것이고 때 묻지 않은 삶의 근본으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닌가? 즉 걷는 것은 인간이 문명이전의 원초적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걷는 것의 아름다움은 이것 말고도 많다. 에너지를 절약하여 가정 경제는 물론 나라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배출가스를 내 품지 않아 지구환경 지키기의 일등공신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걷는 기쁨은 맑은 공기가 폐부를 정화하듯 정갈한 정한수로 가슴을 적시듯 마음을 향기롭게 할 뿐 아니라 당뇨, 혈압, 콜레스테롤 같은 성인병을 조절해주는 건강관리의 해결사다. 힘든 만큼 가장 고귀하고 값진 선물을 자연으로부터 공짜로 선사 받는 것이다.
가까운 산행길이나 공원의 산책길에서 다리를 끌거나 절름거리며 운동하는 중풍 후유증 환자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볼 때마다 저 분들이 좀 더 일찍 걷기를 생활화 했다면 저런 안타까운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 분들의 애처로운 눈빛을 대할 때 마다 걸을 수 있는 몸을 가진 것만으로도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지 아십니까? 하고 되묻는 것 같다. 건강하게 잘 걷는 나를 보며 내가 왜 건강할 때 저렇게 걷지 않았을까? 하고 자신을 원망하는 것도 같다. 아직 건강하게 걸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작은 겸손도 배운다. 걸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편안과 안락에 집착하지 말고 시간 나는 대로 걸으며 몸을 움직여 주자. 걸으면서 모든 것에 감사하고 걸으면서 행복의 밧데리를 충전시키자.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걷다 죽는다는 목표로 걷자. 하긴 걷지도 못하고 누우면 죽음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고 그러다 일어나지 못하면 명줄을 놓는 것이다. 누가 더 오래 걸을 수 있느냐가 자신의 수명이다. 걷는 것이 사는 길이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으면 많이 걸어야 한다.
사람은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다. 나는 거기에다 걷는 것을 하나 더 넣고 싶다. 자연스런 생리작용에서 오는 삶의 기본에다 걷는 데서 오는 생의 충만을 더하면 가장 근간이 되는 ‘원초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행복의 원초적 의문점 앞에 가끔 이렇게 묻고 싶다. "나는 왜 먹고 자는가?"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왜 많이 걸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이다. 거기에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도 함께 생각하며 걸어가는 삶은 더 멋있는 삶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나만의 원초적 행복을 넘어 건강하고 행복한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걷는 길은 아름다운 길이고 걷는 마음은 행복한 마음이다. 우리 모두 가슴을 펴고 걷고 또 걷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