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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의 성격 : 장르, 신학, 구조
양용의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누가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와 분명하게 구별되는 몇몇 두드러진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에는 사회에서 소외당한 자들인 가난한 자, 여자, 사마리아인,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며, 성령에 대한 언급들도 특히 그 도입부(1~4장)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누가복음은 구원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 구원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또한 다른 복음서들과 매우 구별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 중심부를 형성하는 여행 이야기(눅9:51-19:27)는 누가복음의 매우 두드러진 구조적 특징으로서, 누가복음을 적절히 이해하는데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을 포함하여 누가복음을 적절히 이해하는 데 있어 보다 중요한 몇몇 주제들을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I. 누가복음의 장르
누구든지 어떤 작품을 읽고 적절히 이해하려 할 때, 그는 먼저 자신이 읽고 있는 작품의 종류, 즉 장르(genre)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누가복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누가복음의 서론(1:1~4)에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디에게시스(διήγησις, 이야기, 진술, 설명 )’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 만으로 누가복음의 장르를 정확하게 결정하기는 어렵다.
1세기 당시 ‘디에게시스’는 크게 세 종류의 장르를 지칭할 수 있었다. 역사 기술, 전기(傳記), 소설. 역사 기술과 전기는 그 작품들이 다루는 실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는데 반해, 소설은 역사적 실제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는 그의 복음서 서론에서 자신의 작품이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디에게시스’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등). 따라서 누가복음은 소설과는 구별된 장르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역사 기술과 전기의 경우는 어떠한가?
적지 않은 학자들이 누가복음을 다른 복음서들과 함께 그리스-로마 전기 작품의 한 부류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탈버트(C.H. Talbert)와 버리즈(R.A. Burridge)는 복음서가 고대 그리스-로마 전기 작품들과 유사한 특징들을 갖고 있다는 점을 적절히 제시하고 있다(예. Plucarch, Livcs), 물론 이들이 제시한 복음서와 전기 작품들과의 유사성은 인상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복음이 사도행전과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누가복음을 전기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더욱이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누가복음의 관심의 초점이 예수의 생애 자체라기보다는 그의 가르침과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라는 보다 폭넓은 신학적 주제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은 누가복음을 단순히 그리스-로마 전기 작품의 한 부류로 보려는 시도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한편 캐드베리(HJ. Cadbury)의 「누가복음 서론 주석」(Commentary on the Preface of Luke) 출판 이래로 누가복음의 서론인 1장 1~4절은 고대 역사 기술의 문학적 전통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실제로 누가복음은 서론 이외에도 그리스-로마 역사 기술의 특징들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족보(눅3:23~28), 여행 이야기들, 드라마틱한 일화들(예. 눅4:16~30), 요약들(눅4:14, 37, 7:17, 참조. 막1:28)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이러한 유사성들로 미루어 볼 때. 누가복음을(사도행전과 더불어) 그리스-로마 역사 기술의 한 부류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적절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학자들은 누가복음이 그리스-로마 역사 기술과는 구별되는 특징들도 포함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알렉산더(L. Alexander)는 누가복음의 서론이 다른 역사 기술의 서론에 비해 너무 짧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저자가 그의 복음서를 기술해 나가는 가운데 신학적인 문제들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 그리스-로마 역사 기술과 구별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복음이 그리스-로마 역사 기술을 그 기본 장르로 사용하면서도, 그 장르의 틀에 전적으로 얽매이지는 않은 상당히 유연한 문학 양식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아마도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저작하는데 있어서 주로 당대의 역사 기술 장르(그리고 부분적으로 전기 장르)를 기본적인 틀로 사용하면서도,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인 신학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정해진 틀을 무리 없이 벗어나는 자율성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역사가와 신학자’로서의 두 가지 관점을 함께 견지하면서, 그의 복음서를 당대 역사 기술의 한 새로운 형태로 저작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누가가 복음서를 저작해 나가는 가운데 그처럼 중요한 관심의 초점으로 삼았던 그의 신학적 관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II. 누가복음의 신학
2.1. 구원사와 종말론 : 예언의 시대와 성취의 시대
누가복음에 대한 근대적 연구는 1953년에 출간된 콘첼만(H. Conzelmann)의 「시간의 가운데」(Die Mite der Zeit)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콘첼만은 누가의 두 저작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신학적 열쇠가 ‘구원사(Heilsgeschichte, salvation history)’라는 개념에서 발견된다고 제안하였다.
콘첼만은 누가-행전에서 하나님의 구원 활동 영역인 세상의 역사가 세 단계로 나타나고 있다고 제안하였다. 1) 이스라엘 시대 2) 예수 시대 3) 교회 시대이다. 이스라엘 시대는 구약 시대를 비롯하여 세례 요한의 때까지를 포함하며, 예수 시대는 시간의 가운데로서 사단의 활동이 정지되었던 누가복음 4장 13절~22장 3절 사이의 시간을 포함한다. 한편, 교회 시대는 더 이상 종말의 시대가 아니다. 콘첼만에 의하면, 누가는 그의 교회가 재림의 지연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상 끝에 대한 기대의 자리를 교회 시대로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학자들은 콘첼만의 이러한 제안에 적지 않은 난점들이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누가가 그의 저작들로부터 종말론적 기대를 제거해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콘첼만의 제안에 큰 부담으로 남는다(특히 참조. 눅12:35ff; 17:22ff; 21:25ff).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교회 시대를 종말과 무관한 시대가 아니라 종말에 속하는 시대로 간주하였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누가-행전과 관련하여 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편리한 시기적 구분인 것은 인정되지만, 콘첼만이 주목하는 구원사 및 종말과 관련해서는 ‘예언의 시대’와 성취의 시대로 특징지어지는 두 시대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교회 시대는 예수 시대와 더불어 성취의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전반적으로 보여 주는 바로서, 성취의 시대에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 관계가 있다. 누가는 이러한 종말론적 긴장 관계를 잘 인지하고 있으며, 그의 복음서 안에서 그 긴장 관계를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
2.2.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누가는 구원사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으로 제시해 나간다. 이는 물론 누가의 이야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주 언급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이야기 전개의 주된 초점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모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활동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그의 복음서 초두에서 ‘하나님 내 구주(눅1:47)’라는 마리아의 고백을 통해 잘 드러내 보여 준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구원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 되었음에 대한 그의 잦은 기술들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참조. 눅1:67~79; 2:28~33, 3:4~6, 4:16~21). 한편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이시라는 사실과, 예수의 구원 활동 배후에 성령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눅3:21~22; 4:16~21). 누가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 계획 성취에 있어서 예수와 성령의 적극적인 역할을 이처럼 확고히 인지하고 있었다.
2.3. 구원의 시행자로서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루는 누가복음의 중심 인물은 예수이시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주(κύριος, 퀴리오스)라는 호칭을(눅1:38; 2:29~32 등) 예수를 지칭하는 데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물론 1세기 당시 헬라 문학과 유대교 문학에서 ‘주’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었다. 1) 점잖은 존칭 2) 주인 3) 신들이나 천상적 존재들 4) 여호와 하나님이다. 누가복음에서도 ‘주’라는 호칭이 언제나 기독론적 무게를 싣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몇몇 경우들은 명백히 기독론적 무게를 싣고 있다(참조. 눅1:43; 2:11; 12:41~42; 19:8; 24:3, 34, 49). 이러한 용례들로 미루어 볼 때.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기능들을 소유하고 행사하고 계심을 확고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라는 호칭이 예수의 부활과 깊은 연관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참조. 행2:36), 누가는 이 호칭을 부활 이전의 상황에서도 이미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가가 예수를 지칭하는데 역시 자주 사용하는 호칭은 ‘그리스도(Χριστός 즉, 메시아)’이다. ‘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활은 구약의 성취 사상과 더불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행2:23-36, 특히 27,31, 36절). 하지만 누가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도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기능들을 성취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임을 지적한다(눅24:26~27; 참조. 행3:18; 17:3). 한편 메시아의 왕적 요소는 매우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눅1:27; 33~34, 69; 2:4; 18:38).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누가가 제시하는 예수의 왕적 기능은 정치적이거나 군사적 경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참조. 눅19:38; 23:2~4, 36~37).
한편 누가는 예수의 메시아적 기능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그의 선지자적 기능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의 주제 선언적 단락(4:16~21)에 바로 뒤이어 나타나는 나사렛 일화(눅4:22~30)에서 예수는 자신이 엘리야나 엘리사에 비유될 수 있는 선지자이심을 전제하신다(눅4:24). 예수의 이러한 자기 이해는 예루살렘에로의 여행 목적을 밝히시는 가운데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한편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의 이야기(눅7:10~17)는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의 이야기(왕상17:17~24)를 인상적으로 반영하는데, 이야기 말미에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무리의 반응은 매우 시사적이다(눅7:16). 복음서 말미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예수 이해 역시 예수를 구속적 기능을 하시는 선지자로 제시하고자 하는 누가의 관심을 반영해 준다(눅24:19~21).
한편 누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인자’, ‘종’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다각적으로 보여 준다.
2.4. 구원의 원동력이신 성령
누가가 마태나 마가보다 성령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성령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주로 사도행전에 집중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도(특히 1~4장에서) 그 관심은 매우 인상적이다.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 시작에 앞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임한 성령은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될 예수의 사역과 성령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눅3:21~22; 참조. 막1:9~11).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예수 자신의 해석(눅4:16~21)은 자신의 종말론적 해방 사역이 성령 강림의 결과라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 준다.
예수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에서(눅1~2장) 성령에 대한 누가의 집중적인 언급은 매우 괄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성령은 예수의 출생 자체를 가능케 하신다(눅1:35).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그의 잉태 당시 이미 동터 오르는 종말에 가장 깊은 수준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성령은 예수의 출생에 즈음하여 많은 경건한 자들을 감동시키신다(눅1:41, 67; 2:25; 참조. 1:15, 47). 그리고 그처럼 성령에 감동된 자들이 부르는 찬송들은 이러한 성령의 활동과 더불어 시작되는 예수의 시대가 종말론적 성취의 시대임을 강력하게 지시해 준다(눅1:42~45, 46-55, 68-79; 2:29~32).
한편 누가복음 24장 49절과 사도행전 1장 4~5절, 8절(참조. 행2장)에 비추어 볼 때, 교회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은 철저하게 성령에 의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이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것으로 약속된(눅24:49; 행1:4~5; 2:33, 39), 증인으로서의 능력을 부여하시는(눅24:49; 행1:8), 하나님의 선물(행2:38)이라고 밝힌다. 이처럼 누가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메시아로서의 사역과, 교회의 증인됨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적 구원 사역의 모든 과정에 철저히 관여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2.5. 구원의 대상: 소외된 자들
누가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대상들을 제시해 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특히 그들은 대개 사회-경제적, 종교적, 민족적 소외 계층들이라는 점이 괄목할 만하다.
(1) 가난한 자
가난한 자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지나칠 정도여서,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 대해 편애하시는 분이신 것처럼 제시한다. 그의 그러한 관심은 누가복음 4장 16~21절에서 이사야 61장 1~2절로부터 인용된 본문을 예수의 선교 목적으로 제시한데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다(눅4:18)” 사실 가난한 자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마리아 송가(눅1:46~55. 특히 51~53절)와 사복사화(四福四禍, 6:20~26)에서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에게는 축복이 선언되는데 반해, 부자와 배부른 자에게는 화가 선언되고 있는 대조적 선언들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사복사화의 경우 마태복음에서처럼 영적인 가난이나 의에 대한 굶주림이 아닌(마5:3, 6) 물질적 가난과 육체적 배고픔이 언급되고 있음은(눅6:20, 21) 누가에게 있어서 물질적 가난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보여준다.
이에 더하여 누가복음 12장 13~34절; 14장 7~33절; 16장 1~31절에 나타나는 부(富)와 소유에 대한 긴 가르침들은 물질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난과 더불어, 가난한 자에 대한 관대한 나눔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또한 참조. 눅10:29~36; 19:8; 행2:44~46; 4:32~37).
그렇다면 누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누리게 되는 특별한 대상으로 언급한 ‘가난한 자(οἱ πτωχοὶ, 호이 프토코이)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약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구약에는 가난한 자(οἱ πτωχοὶ)로 번역될 수 있는 두 개의 중요한 단어들이 있는데, 곧 ‘아니(עָנִי)’와 ‘아나브(עָנָו)’이다. 이 단어들은 힘이 없고 의존적이어서, 그 결과 힘을 가진 자들의 착취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자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위로해 주실 하나님께 의존하게 된다(시14:6; 25:16; 40:17; 69:29; 86:1 등).
한편 이와 같이 경건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들로 간주된다(참조. 시9:18; 34:18; 82:3; 사57:15 등). 특별히 이 가난한 자들은 종말론적 소망을 표현하는 가운데 언급되기도 하는데(사49, 51, 54, 61장), 이사야 61장 1절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가 이러한 구약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4장 16~21절에서 이사야 61장 1~2절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는 그 경제적인 처지 때문에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적인 자들로서, 그 결과 하나님의 종말론적 축복인 구원의 특별한 관심 대상인 자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가난한 자와 종 말론적 축복 사이의 이러한 긴밀한 관계 때문에, 아마도 누가는 제자도의 기본 요건으로서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하는 문제를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눅5:11. 28; 9:1~6; 10:1~16; 14:33; 18:22).
(2) 이방인
하나님의 구원의 중요한 대상으로서의 이방인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사도행전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지만, 이미 누가복음에서도 상당히 주목할 정도로 나타난다(눅2:31, 32; 3:6; 4:25~27; 14:16~24; 24:47). 일반적으로는 누가 자신도 이방인이었다고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는 어쩌면 보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하여 이방 선교의 타당성을 입증해 보이고자 그의 두 작품을 저작하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가 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이스라엘의 실패의 결과로 돌렸는가이다(참조. 행13:44~51). 이와 관련하여 예르벨(J. Jervell)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르벨은 이방인 선교가 유대인 선교의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한다(예. 예루살렘에서의 집단적인 개종, 이방인을 위한 초대 유대인 선교사들).
사실 누가가 반-유대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제안은 누가-행전 가운데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강조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 의해서도 지지를 얻는다(참조. 눅2:23, 41~51; 19:47; 24:53; 행11, 15장). 하지만 누가의 저작이 극도로 반-유대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참조. 눅13:26~27; 14:16~24; 19:43~44 등). 만일 동일한 저작에 대해 이와 같이 반대적인 입장들이 가능하다면, 이는 누가가 이 문제에 있어서 경향성이 분명한 일관된 입장을 취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누가가 그의 저작에서 그 때 당시 교회 내에 매우 민감한 문제였던 유대 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주제를 이방인 저자로서 매우 조심스럽고도 고민스러운 자세로 다룬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3) 그밖의 대상들
누가복음에는 그밖에도 다양한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특히 사마리아 인들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매우 놀랍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는 사마리아인을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도 순종하는 데 실패한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하는 자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 유일하게 감사한 문둥병자 이야기(17:11~19) 역시 사마리아인을 유대인들보다 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한 자로 제시한다.
누가의 이러한 관심은 마태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더욱 인상적이다. 마태복음에는 사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 나타나는데(10:5), 사마리아에 전도하지 말라는 명령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사마리아를 중요한 전도 대상 지역으로 언급하고 있고,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에서의 복음 전도를 기술하는데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8:4~25). 이렇게 볼 때, 사마리아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나는 세 비유들은 죄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중요한 대상들임을 점증적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백 마리 중의 하나 → 열 드라크마 중의 하나 → 두 아들들 중 하나, 또한 참조. 19:1~10). 누가는 또한 여자들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도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매우 두드러진다(1:10~20, 26~38; 2:25~38; 4:31~39; 7:1~17; 13:10~17, 18~21; 14:1~6; 15:4~10).
II. 누가복음의 구조
누가복음의 구조 분석은 다양한 관점에서 시도되어 왔다. 누가복음을 연대기적 진행 관점에서 이해할 경우 그 주된 단락 구분은 상당히 명확하다. 1) 탄생 및 유아 시절(1~2장) 2) 갈릴리 선교(3:1~9:50) 3) 예루살렘 여행 (9:51~19:27) 4) 예루살렘 선교, 수난, 죽음, 부활(19:28~24:53). 하지만 누가는 그의 자료들을 언제나 연대기 순으로만 배열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러한 구조 분석은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세부적인 이해에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요소가 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지리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구조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럴 경우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1)갈릴리(1:1~9:50) 2)여행(9:51~19:27) 3)예루살렘(19:28~24:53). 누가복음의 구조에 있어서 지리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지리적 구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갈릴리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위의 두 관점에 의거한 구조 분석은 거의 같은 결과들을 제안한다. 특히, 누가복음 9장 51절~19장 27절을 중앙 단락으로 구분하는 점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누가복음 9장 51절~19장 27절의 이러한 독특한 위치와 기능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의 구조와 뚜렷이 구별된다. 마태나 마가와 달리, 누가는 이 단락의 시작 부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선교에 있어서 목적지인 예루살렘의 중요성이 13장 32~34절에서 인상적으로 강조되고 있다(참조. 17:11). 누가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핍박의 장소일 뿐 아니라, 동시에 궁극적 승리의 장소이다. 하지만 이 긴 단락이 누가의 ‘여행 이야기’로 불리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긴 단락 모두에서 예수의 여행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누가가 이 긴 단락에서 그 여행 이후에 제자들이 맞게 될 상황에 대처하도록 하기 위한 예수의 가르침을 소개하는데 주된 지면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참조. 9:60; 10:3, 16; 17:22~25). 중앙 단락과 관련된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기만 한다면, 누가복음의 전체적 구조는 대체로 아래와 같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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