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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의 유래(由來) 선동마을은 마을 뒤의 "선박골"의 풍경이 아름답고 자연용수가 약수로 이름나 있어 옛날에 선인(仙人)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다녀갔다는 유래로 마을명을 선동이라 하였으며 고려조 현종때(서기1018년)에는 진주군 양전면(良田面)에 속하였으며 1895년(조선조 고종 32년)의 지방제도개정시 고성군 개천면의 나선리로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자 대통령령 제11027호로 구만면 화림리(선동)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1773년경(조선조 현종때)에 전주이씨(李氏)가 입촌하고 그 뒤에 나주임씨(林氏), 김해김씨(金氏), 합천이씨(李氏)등 세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은 전주이씨(李氏)의 집성촌이다. ◎ 마을의 지세(地勢) 선동마을은 구만면의 가장 오지마을로 면소재지에서 3km 거리이나 높은 재 너머에 있는 산골 마을로 동쪽은 가남산(柯南山), 남쪽은 필두봉(筆頭峰), 북쪽은 마봉산(磨峯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동북쪽의 깃대봉(旗台峰:해발 520.6m)을 경계로 마산시 진전면과 경계를 하고 있고 마을 주변의 산록지에 조성된 농경지는 천수답이 많으나 수원은 좋은 편이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19가구에 32명(남자:18명, 여자:14명)이 거주하는 구만면에서 가장 작은 마을로 전주이씨(李氏) 16호가 살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농업을 하고 있으며 산지를 이용한 밤을 많이 생산하고 있고 일부 축산(한우와 산양 등)을 하는 농가도 있다. ◎ 특산물(特産物) 선동마을의 특산물은 산지를 활용한 밤을 들 수 있으며, 매년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에 스레트 등으로 전면 개량을 하였으나 가옥구조는 아직까지도 전 근대적이며 문화시설인 전기, 전화, TV 등은 일부를 제외 하고는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삼효각과 봉산정(三孝閣과 鳳山亭) 전주이씨(李氏) 문중에 삼효각과 봉산정이 있다.
▣ 신계(新溪) ◎ 동명의 유래(由來) 신계마을은 일제시 점촌(店村)마을과 함께 화림리(화촌)에서 본동된 마을로 신계의 고유 동명은 "새내"로 옛날 주평리에서 흐르던 내가 원평(遠坪) 들(서재들)을 지나서 샛담(효대와 신계의 사이에 있었던 마을) 앞으로 흘렀는데 홍수로 유로(流路)가 바뀌어 신계 앞을 둘러서 흐르게 되고 또 이곳에 마을이 새로 생기게 되어 "새로 내가 난곳"이란 뜻으로 "새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고 새내를 한 문화하면서 신계(新溪)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신계마을은 친·척연(親·戚緣)등 혈연관계로 형성된 마을로 한국 마을사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신계마을은 효락리와 접하고 있는 마을로 옛날 홍수시에 주평리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신계마을 앞을 둘러서 흐르게 되면서 새로 마을이 형성된 지대로 마을 앞의 비교적 넓은 들판은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수원도 양호하여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16가구에 31명(남자:15명, 여자:16명)이 거주하는 면내에서도 작은 마을로 거주민의 성씨는 여주이씨(李氏), 양천허씨(許氏), 진양강씨(姜氏), 전주최씨(崔氏), 단양우씨(禹氏), 나주임씨(林氏), 밀양박씨(朴氏), 성산이씨(李氏)등 제씨가 살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농업으로 일부 축산(한우 호당 2∼3두 사육 및 양돈등)을 겸하고 있는 농가도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에 전면 지붕 개량하였으며 가옥 구조도 입식부엌과 수세식변소로 개량을 하고 있고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다. 그리고 전기, 전화, TV 등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냉천서당(冷泉書堂)과 의재 선생 의재 이종홍(毅齋 李鍾弘)선생은 유학자로서 널리 알려진 바 있으며 냉천서당(효대소재)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바도 있고 특히 구만면 3·1독립운동 의거 때에는 동지들과 모의하고 통문을 지어 왜경 몰래 동리마다 돌리고 구만천(국천:菊川) 강변에서 읽은 독립선언문을 짓기도 하였다. 저서로 의재문집(毅齋文集)등 다수가 있다. ◎ 이회서실(以會書室) 신계마을에 있는 서실로 신암 허격(新唵 許格)선생이 이곳에서 문도(門徒)를 길러왔으며 저서로 신암문집(新唵文集) 등이 있다. ◎ 점촌(店村)과 "구만사발"(구만사기) 점촌의 이름은 이곳에서 사기그릇을 굽고 이를 파는 점(店)이 있었다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이곳의 토질이 그릇을 구울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금도 가마터가 남아 있으나 언제부터 그릇을 구웠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리고 그릇의 품질은 우수하지는 못하였으나 "구만사발" 또는 "구만사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 화촌(花村) ◎ 동명의 유래(由來) 화촌마을은 옛날에 마을명을 내원(內院)이라 하였으나 임란후에 마을 뒷산에 함박꽃이 많이 피므로 뒷산 이름을 작약산(芍藥山)이라 칭하게 되고 또 마을 앞 뒤에 각종 꽃이 계절마다 많이 피었으므로 마을명을 "꽃동네"라 부르다가 일제시 동명을 한문화(漢文化)하면서 화촌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서기1519년(조선조 중종)에 밀양박씨(朴氏)가 처음 입촌하였고 다음에 광주노씨(노씨)가 입촌하여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명을 "내원"이라 하였으며 또 그 뒤 임란때 전주최씨(崔氏)가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오늘날의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은 전주최씨(崔氏) 집성촌으로 거주하고 김해김씨(金氏), 밀양박씨(朴氏), 전주이씨(李氏), 황보(黃甫)씨등 제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화촌마을은 마을 뒷산의 "엄나무재"를 경계로 마산시 진전면과 접하고 있으며 마을뒤의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록지대에 자리잡은 마을로 마을 앞의 들판은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이나 산록지에 천수답이 많으며, 소류지가 있으나 수원은 좋지 못하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38가구에 67명(남자:29명, 여자:3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전주최씨(崔氏)가 대성을 이루고 다음이 김해김씨(金氏), 밀양박씨(朴氏), 전주이씨(李氏), 와 황보씨(黃甫氏)가 거주하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미.맥위주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축산(한우 호당2~3두 사육)과 과수(밤,감등)를 겸하고 있는 농가도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에 스레트와 가와 등으로 전면 개량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식 주택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고, 주택구조도 입식부엌과 수세식변소로 개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전기, 전화, TV등 문화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고령토 광산(高嶺土 鑛山) 마을에 백토(白土) 즉 고령토가 많이 생산되고 있어 고령토 광산(광업사)이 있으며 생산품이 건축자재(타일등)로 국내는 물론 외국까지 수출되고 있다. ◎ 서원과 재실(書院과 齋室) - 도산서원(道山書院) : 지방문화재 자료 제35호(1983년 8월 6일지정)로 지정된 서원으로 화림리127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서기 1623년 (인조1년)에 창건되어 의민공 소호 최균(義民公 蘇湖 崔均)과 의숙공 소계 최강(義肅公 蘇溪 崔堈)을 제향하고 있다. - 홍학재(홍岡齋) : 화림리 화촌에 있는 서재로 도산원(道山院) 학도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 재실(齋室) : 전주최씨 문중의 재실과 정(亭)으로 영사재(永思齋)와 화산재(花山齋) 낙열정(樂悅亭)이 마을에 있다. ◎ 순국지사 최정원 선생 창의비(殉國志士 崔正元 先生 彰義碑) 3·1독립운동시 국천(구만천) 광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시는 등 애국하신 최정원(전주최씨)선생의 창의비가 마을에 있다.
▣ 당산(堂山) ◎ 동명의 유래(由來) 당산마을은 조선조때에는 외원(外院)으로 부르다가 임란때 전주최씨(崔氏)가 입촌하여 살면시 마을 중간에 독메(야중임야)가 있어 그 독메를 "당산"이라 하였으며 마을명도 당산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당산마을이 형성된 것은 서기1519년경(조선조 중종때)에 나주나씨(羅氏)가 맨 먼저 입촌하였고 그뒤에 1623년경(조선조 인조때) 안악이씨(李氏)가 입촌하여 살았으며, 1712년경(임란때)에 전주최씨(崔氏)가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전주최씨가 대성을 이루어 살고 있고 그 외 성씨로 함안이씨(李氏), 진양하씨(河氏)등 제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 마을의 지세(地勢) 당산마을은 연화봉(蓮華峰)이 동남으로 뻗어 내려 용암산(龍岩山)과 작약산(芍藥山)을 이루고, 옥녀봉(玉女峰)의 주맥이 흘러내린 산 자락에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로 당산 주변에 형성된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이나 수원이 부족한 지대이다. ◎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56가구에 108명(남자:48명, 여자:6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전주최씨(崔氏), 함안이씨(李氏), 성산이씨(李氏), 진양하씨(河氏), 김녕김씨(金氏)등 제씨가 살고 있다. ◎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미·맥위주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일부 축산(한우 호당2~3두 사육과 양돈등)을 하는 농가도 있으며 최근에는 마을내에 오징어 건조장이 마련되어 주민이 농한기에 노임소득을 올리고 있어 도움이 되고 있다. ◎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에 스레트와 가와로 전면 지붕 개량을 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고, 또 주택구조도 현대식으로 개량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시설인 전기, 전화, TV등 문화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당산쌍정(堂山雙亭) 구만면 당산(堂山) 문중에 농산재(籠山齋)와 영모재(永慕齋), 옥봉재(玉峯齋)가 있고 첨모대가 마을에 있다. ◎ 통샘이(井) 마을 내에 있는 샘으로 옛날에 "구름재를 넘어 흙다리를 건너서 당산통샘이 물을 마시고 당산동리 솔밭에서 휴양하면 일생의 낙이라"하였으며 이통샘이 물은 지하용수로서 한해가 지나 수해가 오나 항상 일정 수온으로 물맛이 일미로 무병장수 양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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