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작성된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에는 전국에서 체포·압송해 온 408명의 신자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 취조 과정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신앙을 관철했던 신자들은 35%에 이르고 있다.
반면에 신문 과정에서 배교를 선언한 신자는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51%에 이르렀다.
신교와 배교 여부가 미상인 기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였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죽임을 당한 신자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는 순교의 개념을 광의와 협의의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곧 광의의 개념으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 행위 모두를 순교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순교(martyreo)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증언하다', ‘증거 하다', ‘증인이 되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데에
착안한 개념 규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순교라 할 때에는 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교를 협의로 규정할 때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순교자는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하고,
둘째, 그 죽음이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초래되어야 하고,
셋째,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이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사람이어야 한다.
박해 시대의 교회사에서는 무수한 광의의 순교자들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들 가운데 대략 1,800여 명에 이르는 협의의 순교자들을 주목하여,
이들의 죽음, 순교의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나아가서 순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궁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사의 박해 시대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박해 시대에 처형된 신자들 가운데에는 신앙보다는 현실 정치 문제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순교는 초자연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순교는 이성 차원의 합리적 해석도 가능하다.
그들은 평시에도 복음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생활을 해 왔다.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을 생활 안에서 실천해 왔다.
그들은 성사 생활에 철저하고자 했고, 인간을 존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믿음살이와 살림살이를 일치시켜 왔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도 그리고 죽음의 마당에서도 줄기차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한편 그들의 순교에는 다른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그들의 신앙 실천과 순교는 자의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당시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순교는 하느님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었다.
조선 왕조가 자행한 전근대적 사상 통제와 신분제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신분제 질서 안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발견이었다.
순교자의 죽음은 우리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이다.
그들은 신앙과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전선에서 산화한 전사자이기도 한데,
그들의 순교는 신앙 행위였을 뿐 아니라 사회·역사 행위로,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게 되었다.
이 역사 행위를 한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오늘날의 우리처럼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망과 희망을 번갈아 가지며 고뇌하기도 하였지만 참다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평범한 이 사람들이 실천한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주는 것이다.
순교자들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하고 역사화(歷史化)함으로써 순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오랜 박해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사에서는 부정적 측면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박해에 시달린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세상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내세에만 안주해 보려는 도피적 신앙 태도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박해의 여파로 일부 신자들이 복음화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고 실천하기보다는,
이를 성직자에게만 맡기려는 피동적 모습이 간혹 드러났다.
계속되는 박해로 신앙 교육이 어려워지자 일부 신자들은 개인주의적이며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신앙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도 계속 병폐로 남아 있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