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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 문화탐방 |
한양에서 서울까지
600년의 흔적 속으로
◈일 시: 2010 년 월 일(토) ~ 일(일)
◈장 소: 1일- 수원화성, 수원행궁, 서울대학교, 인사동
2일-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 남산전망대
◐ 준 비 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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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 현장학습 자료(워크북), 필기도구, 세면도구, 여벌옷 등 | |
< 선생님 : 이석민 ☎ 010-9868-3699 > |
◐ 보람찬 역사 ․ 문화기행을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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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는 코스가 많으니 운동화를 신고 옵니다. ☞ 차를 탔을 경우에는 좌석의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으로 손이나 머리를 내밀지 않습니다. ☞ 보고 들은 내용은 그 때 그 때 꼼꼼히 메모해 두세요.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 여러분이 어느 장소에 가든지 여러분과 만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학생답지 못한 행동은 함께 다니기 부끄럽게 만듭니다. ☞ 개인적인 행동은 하지 않고 항상 서로 도우며 생활 합니다. ☞ 공중도덕을 지키며 조용히 관람합니다. ☞ 사람은 집을 떠나보면 성격이 드러난다 했습니다. 현장학습을 통해서 친구들과 마음을 터놓고 서로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 워크북은 선생님께 확인 받도록 합니다. |
☞ 일정표
일정 |
시간 |
일정 |
비고 |
1일차 |
07:00 ~ 12:30 |
수원화성 도착 및 점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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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15:00 |
화성행궁 및 수원화성 관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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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17:00 |
서울대 도착 및 둘러보기 |
규장각 및 캠퍼스 일원 | |
18:00 ~ 20:00 |
인사동 둘러보기 및 저녁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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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22:00 |
숙소 도착 후 청계천 관람 |
워크북 정리 | |
2일차 |
09:00 ~ 10:00 |
국립고궁박물관 관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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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11:30 |
경복궁관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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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 ~ 12:30 |
점심 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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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14:30 |
남산전망대 관람 |
남산 케이블카 | |
15:00 ~ 20:00 |
울산으로 출발 후 도착 |
◉ 조선시대 최고의 성곽, 수원화성
성이란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수원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성이지만, 전쟁을 치르지 않은 성입니다.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기술을 총동원해서 만든 독창적이고도 튼튼한 성곽으로 온 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의 22대 왕(1752~1800)으로 이름이 '산'입니다. 21대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사도세자,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입니다. 어릴 때부터 명석하고 책을 좋아해 다섯 살 때는 자신이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1세 때 사도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후 25세에 왕위에 올라 인재를 골고루 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조선의 문예 부흥기를 이루었습니다.
‘규장각’을 만들었고, ‘장용영’이라는 군대를 만든 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신도시 화성을 건설 하였습니다. 왕이 된지 18년이 되던 해, 어머니 환갑잔치를 화성행궁에서 성대히 열었습니다. 정조는 나이 들어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내려와 살려고 했습니다.
“뒤주 속으로 들어가라!”
“아버님, 살려주소서. 글도 읽고 말씀도 잘 듣겠나이다. 살려주소서.”
“듣기 싫다! 어서 들어가라 !”
세자가 들어가 웅크리자 영조는 자물쇠를 채운 다음 못질을 했어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사도세자는 찌는 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답니다. 그의 나이 피 끓는 28세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는 영특하고 활달하여 영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3세에 「효경」, 7세에「동몽선습」을 마치고 10세에는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을 비판할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영조는 노론에 가까웠기 때문에 소론과 친한 세자는 당파싸움에 휘말렸습니다. 노론은 미운 사도세자를 모함하고, 영조는 세자를 야단치는 일이 점점 잦아져 사도세자는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고 궁녀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들을 죽여야 하는 영조의 마음은 괴로웠지만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1세 어린나이에 아버지의 비통한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했던 정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정조가 왕이 된 후에도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들은 여전히 마음대로 나라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그들이 세력을 떨치는 한양을 떠나 화성에 신도시를 세웠고, 노론의 힘을 꺾고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조선의 힘을 키우려고 했습니다. 젊고 유능한 인재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왕권을 강화시켜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정치를 하는 것이 정조의 꿈이었답니다. 명실 공히 ‘만천명월주인옹’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하늘 높이 솟아올라 수많은 강과 냇물을 비추는 달이 되어 절대적이면서도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쳐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 높은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근거지가 바로 수원 화성이었습니다.
1795년 어머니의 회갑을 맞이하여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정조는 곤룡포대신 군복을 입고, 가마 대신 말을 타고 한양의 창덕궁을 떠난 지 4일 만에 화성행궁에 도착했답니다. 그 후 나흘 동안 이곳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열었습니다. 과거시험, 사도세자 무덤인 융릉 참배, 정조의 참관 아래 밤낮에 걸친 군사 훈련 두 번, 어머니의 회갑잔치, 노인들을 초청하여 양로연,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과 소금을 무료로 나눠주기 등을 실시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는 1946년 8월 27일 공포된“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에 따라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10월에 개교 하였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는 15개 단과대학, 1개 일반대학원, 3개 특수전문대학원으로 정비되었습니다.
◉ 서울대학교 정장
◉ 중앙도서관
7개 분관을 포함하여 6,000여 석을 열람실을 갖추고 300만여 책의 장서와 1만여 종의 학술지, 3만 3천여 종의 전자저널 등의 자료를 소장하여 연구와 학습 활동을 위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 제1공학관
제1공학관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301동’혹은 ‘신공학관’이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1996년 준공된 지상 16층 지하 2층으로 관악캠퍼스의 최고층 건물입니다.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위해 외벽 전체는 유리로 되어 있어 계절마다 관악산의 풍취가 그대로 드러나는 관악캠퍼스의 거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규장각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소장 자료를 영구히 보존․관리하기 위해 고도서의 마이크로필름 제작 및 복본 제작, 고도서 복원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82,000여 점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등을 개최하여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국보로는 조선왕조실록(정족산본, 오대산본),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의궤, 일성록, 삼국유사 등이 있습니다. 또한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판들의 대부분이 한국의 전통 인쇄술이 가장 발달했던 18세기 전후 교서관을 비롯한 중앙 관서에서 제작한 것들로 품질에서 최고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 자하연
자하연은 ‘자줏빛 안개가 내리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지명에서 유래했습니다. 18세기 조선 후기의 유명한 학자였던 신위의 호가‘자하’였고 과천에서 성장한 그는 계곡이었던 이곳 일대를‘자하동천’이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관악산의 불기운이 세다고 해서 산 주변 곳곳에 못을 팠는데 서울대학교의 자하연도 그 중 하나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서울대학교 미술관(모아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은 교문 옆에 자리 잡아 ‘대학과 지역사회의 소통’을 기본개념으로 대학과 지역사회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U-Glass를 외부마감재로 선택하여 철골 트러스 구조가 노출된 미술관 건물은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조각 작품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구조물입니다. 지상 3층, 지하 3층으로 연면적 1,357평의 미술관 내부는 중앙의 나선형 통로와 측면의 두 곳의 통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는 개방형 문화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미술관을 설계한 렘 쿨하스(1944~ )는 현대 도시건축 설계 뿐 아니라 건축이론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건축가입니다.
격동의 개화기 현장인 인사동을 걸어봅시다.
종로에서 안국동까지 비스듬하게 이어져 있는 인사동 거리는 우리의 전통 문화를 한껏 느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민속 공예품들, 곳곳에서 묵 향기를 품어 내는 필방들, 그림이나 조각 등 작가들의 독특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화방들, 그리고 길거리에서 파는 맛있는 여러 가지 음식들……. 볼거리가 많아 걷기만 해도 즐거운 거리입니다.
◉ 민가다헌(민병옥가) - 천도교 대교당 옆으로 난 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어요. 전통 가옥과는 달리 화장실과 욕실이 집안에 있어요. 서양의 주거 양식을 도입한 우리나라의 한옥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 선생님이 설계하였습니다.
◉ 경인미술관 약 500여 평의 대지 위에 전시실과 아틀리에, 야외 전시장, 각종 행사를 할 수 있는 야외무대와 스크린, 전통찻집(다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문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원들 사이사이에 위치한 조각 및 설치 작품들을 잘 살펴보세요.
지방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던 한옥전시실은 조선조 철종의 후궁인 숙의 범씨(淑儀范氏)가 낳은 영혜옹주의 부마이자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 유명한 박영효의 집입니다. 서울의 8대가 중 하나로 이름난 곳이었지만, 지금은 남산골 한옥마을로 이전되어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알 수 있습니다.
◉ 쌈지길(길은 길이되 길이 아닌 건축물)
골목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사동에 약 500m의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공방과 상가, 공연시설을 인사동 골목길과 짜임새 있게 연결하여 수평적 거리의 골목길을 수직적으로 상승시킨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자 골목길입니다. 쌈지길은 상업과 예술이 만난 아름다운 건물로 “인사동 속의 새로운 인사동”으로 관광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인간문화재가 만든 전통공예품과 현대공예작품, 그리고 한국의 멋이 풍기는 디자인 제품들을 <쌈지길>에서 모두 만나볼 수 있지요. 또한 대표적인 한국 음식인‘전주비빔밥’, ‘불고기’, ‘빈대떡’과 전통차도 맛볼 수 있습니다.
쌈지길에서 재미난 모양의 선글라스를 끼고 사진도 찍고, 엘리베이터 옆에 그려진 재미난 그림들도 찾아보세요.
◉ 인사동의 변천
조선 시대 |
인사동에는 주로 중인들이 살았음. 인사동에서 인왕산 쪽으로 보이는 윗동네는 청계천의 북쪽에 있어 ‘북촌’이라고 하였고. 세력 있는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음. 지금도 옛날 한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북촌 한옥마을’로 불림. |
일제 강점기 |
조선 시대에 평범한 중인들이 살던 이곳은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옛날 책과 미술품들을 파는 거리가 됨. 북촌 마을 사람들이 갖고 있던 오래되고 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팔았음. 이곳에서 문화재의 가치를 알던 외국 사람들은 조선의 문화재들을 싼값에 사들여 감. |
1950년대 |
1950년대 즈음에 인사동에는 떡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낙원떡집’은 인사동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임. 인사동은 궁궐 가까운 곳이어서 궁궐 수라간에서 일하던 상궁들이 나와 떡집을 차리면서 유명해짐. |
1970년대 이후 |
미술관과 공예품 점들이 인사동의 거리에 들어서기 시작하여 1970년대부터 인사동이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게 갖춰지기 시작했음. 이로 인해 옛것과 새것이 함께하는 인사동이 완성됨. |
조선 시대 말 인사동의 주소는 ‘한성부 관인방 대사동’이었습니다. 이때 ‘대사동’이란 큰 절이 있던 곳을 뜻합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대사동의 ‘사’자와 관인방의 ‘인’자를 따서 ‘인사동’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물결 따라 떠나는 시간여행 ♩♪♬♬
청계천의 길이는 3,670m, 최대 너비는 84m이고 본래의 이름은‘개천(開川)’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청계천은 자연하천으로 홍수가 나면 집들이 물에 잠기고, 평소에는 더러운 물이 흘러들었습니다. 제3대 왕 태종이 공사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 사업을 시작하였고, 영조 때에는 본격적인 준설 사업을 시행하여 개천을 직선으로 만들었습니다. 순조와 고종 때 까지 준설 공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이 개천에 놓인 다리는 수표교, 오간수교, 광교, 영미교, 관수교 등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초에는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근대적 도시계획으로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실시되었습니다. 1958년 6월부터 복개공사를 실시하여 그 위에는 삼일고가도로가 만들어졌습니다.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9월30일 까지 고가도로 철거와 복개한 청계천 포장도로를 걷어내어 지금의 청계천이 되었습니다.
< 주요 볼거리 >
◉ 가장 번화했던 다리, 광통교 - 광통교는 조선 시대에‘광교’, ‘대광통교’로도 불렸습니다.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였으므로 처음에는 대광통교라 했습니다. 광통교가 경복궁 - 육조거리 - 종루 -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내의 남쪽과 북쪽을 잇는 중심 통로였습니다.
정월대보름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다리 밟기 놀이를 했고, 주변에는 시전이라는 시장이 열렸습니다. 또한 왕이나 외국 사신들이 지나가던 통로이기도 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태종 이방원은 새어머니인 신덕왕후를 아주 미워했답니다. 태종의 아버지인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을 궁궐 가까이에 두고 싶어 했지만, 태종이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1410년 청계천에 큰 홍수가 나 흙으로 된 광통교가 무너져 내렸어요. 그래서 돌로 튼튼하게 다리를 새로 짓기로 했어요. 그때 신덕왕후의 무덤 터에 남아있던 돌들을 가져다 광통교의 난간 기둥과 가로대, 그리고 받침돌 등으로 사용했답니다. 태종은 신덕왕후의 무덤에 사용한 돌들을 다리의 건축 자재로 사용해서 사람들이 마구 밟고 다니도록 한 거예요. 돌에 새겨진 불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다리의 석축을 마음대로 쌓아 올렸습니다. 태조가 신덕왕후의 자식인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 것에 대해 태종이 새어머니의 무덤에 앙갚음을 한 것입니다. |
◉ 정조의 효심이 깃든 장통교 - 이 근방이 조선 시대의 장통방(조선 시대 5부 52방 가운데 하나)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장통교 다리 아래에 타일로 표현한 <정조 대왕 능행반차도> 그림을 볼 수 있어요. 조선 22대 왕인 정조가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1795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화성(지금의 수원)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1,779명의 사람들과 779필이나 되는 말을 그려 놓았다니 대단하지요. 여기에 사용된 타일은 4,960장이랍니다. 크기는 186m. 폭은 2.4m입니다.
원래 정조는 왕이 타는 가마인 정가교에 타고 있어야 하지만 비어 있어요. 전체 그림을 샅샅이 뒤져 봐도 정조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조가 이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당시에는 왕을 반차도 같은 그림에 감히 그릴 수 없었답니다. 그리고 이 날 정조는 가마를 타지 않았습니다. 그럼 정조는 어디에 있을까요? 유난히 경비가 삼엄하고 심지어 어깨에 총을 멘 병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부분 중 사람을 태우지 않은 황금빛 말이 있습니다. 정조는 바로 그 말 위에 타고 있었습니다. 말(좌마)옆에 그려진 비단으로 만든 가리개와 꿩의 깃털을 짜서 만든 부채(용선)로 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가마는 ‘자궁가교(慈宮駕轎)’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마 안에 타고 있으니 얼굴은 볼 수 없답니다. |
나라의 의식에 문무백관이 늘어서는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 홍수를 대비하라, 수표교 - 1420년(세종 2년)에 세운 다리로, 처음에는 소와 말을 거래하던 우마전 앞에 있어 마전교라 불렸습니다. 그러다 1441년(세종 23)에 다리 서쪽에 수표석을 세우면서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청계천에 있는 수표교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장충단 공원에 있는 것을 나중에 복원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수표교의 길이가 지금 청계천의 폭보다 길어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깍쟁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인색하고 얄밉도록 눈치가 빠르다는 뜻입니다. 원래 깍쟁이는 ‘깍정이’에서 유래한 말로 서울에 살던 거지를 뜻했습니다. 실제로 청계천 다리 밑에는 거지들이 간단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특히 광통교와 수표교 아래에 많이 살았는데, 청산리 전투에서 맹활약한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거지들과 함께 생활을 하며 자란 곳도 이 수표교 아래였습니다.
뱀을 잡는 사람들을 뜻하는 ‘땅꾼’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나요? 이 말 또한 청계천변의 거지들을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촌과 남촌을 연결하는 주요 다리였습니다. 그리고 왕의 행렬이 지나다니던 주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숙종이 전대 왕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을 참배하고 궁궐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영릉을 출발해 궁궐로 돌아가기 위해 수표교를 건너던 숙종의 눈에 한 아리따운 처녀가 들어온 것입니다. 왕이 지나가는 행렬을 지켜보려고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 여인이 바로 장희빈이었습니다. 숙종은 궁에 돌아가 장희빈을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장희빈은 일개 궁녀의 신분으로 궁에 들어갔지만 후에 숙종의 왕비가 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숙종이 내린 사약을 먹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여인이기도 합니다. 후에 장희빈이 낳은 아들 균이 숙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경종이랍니다. |
◉ 도성 안의 마지막 다리, 오간수교
오간수교는 성벽에 뚫은 오간수문의 자리에 설치된 다리였어요. 청계천이 도성 밖으로 흘러 나가도록 성벽에 무지개 모양으로 뚫어 놓은 다섯 칸의 수문이었습니다. 각 수문에는 사람들이 몰래 드나들지 못하도록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한양 도성의 동쪽 출입문인 흥인지문(동대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지금 오간수교가 있는 곳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만든 오간수교의 난간이 성곽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성벽이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760년 2월부터 영조는 20만 명을 동원하여 준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얕은 바닥을 깊게 만들고 구불구불한 뱀 모양의 물길을 곧게 만들어 물이 빠르게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하천의 양쪽 벽을 돌로 견고하게 쌓았습니다. 이 준천 사업과 석축 공사로 큰비가 와도 제방이 무너지지 않았답니다.
조선의 13대 왕인 명종의 실록 한 부분을 읽어보면 오간수문과 관련된 인물을 알 수 있답니다. 포도대장 김순고가 아뢰기를 “풍문에 황해도의 흉악한 도적 임꺽정의 일당인 서임이 이름을 엄가이로 바꾸고 숭례문 밖에 와서 산다 하여 가만히 엿보다 잡아 범한 짓에 대하여 추문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9월 5일에 우리가 장수원에 모여 활과 도끼를 가지고 밤을 틈타 성 안에 들어가 전옥서의 옥문을 부수고 우리 두목 임꺽정의 처를 꺼내 가려고 하였다. 그런 다음 오간수구(五間水口)를 부수고 나와야 하는데, 그곳을 지키는 군사들이 비록 알더라도 모두 잔약한 군졸들이라 화살 하나면 겁을 줄 수 있었다.” - 명종 15년 11월 24일 굳게 닫힌 채 경비가 삼엄한 성문을 통해서 탈출할 수 없었던 임꺽정은 물이 흘러 나가는 곳인 오간수문의 쇠창살을 뚫고 탈출했습니다. 이렇게 오간수문을 몰래 드나든 사람은 임꺽정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003년 말 공사 당시에 오간수교 아래의 하천 바닥에서 오간수문의 쇠창살 조각과 600닢 가량의 상평통보 꾸러미가 발견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답니다. 오간수문은 조선 시대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도성을 빠져 달아나거나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숨어드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었습니다. |
궁궐의 중심,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습니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었습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경복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 대원군이 다시 세웠습니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옥호루, 을미사변)이 벌어지고,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아관파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습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만들어 궁의 옛 모습을 볼 수 없다가 최근에 복원중이랍니다.
경복궁은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고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습니다.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강녕전, 교태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로서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경복궁에는 광화문의 해태상을 비롯해 곳곳에 동물상이 있습니다. 근정전에는 동서남북으로 사방신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함께 12지 신상이 있습니다. 궁궐로 들어가는 입구의 영제교 주변부터 자경전 앞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상이 있으니 찾아보세요.
<주요 볼거리>
◉ 근정전(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고 공식적인 대례를 거행하며,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일들이 이곳 근정전과 그 앞마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근정전 건물은 2단으로 된 높은 월대 위에 2층 건물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사실은 근정전은 왕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천장을 높게 만든 1층 건물이랍니다. 천장에 황룡 두 마리가 조각되어 있는 게 보이나요? 이 황룡은 세상의 중심, 즉 왕을 상징한답니다. 이 황룡은 발가락이 일곱 개라서 ‘칠조룡’이라고 해요.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조각입니다.
◉ 사정전(왕의 집무실)
근정전이 왕과 신하의 공식적인 행사 장소라면 사정전은 왕이 편히 앉아서 나랏일을 보는 집무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모여 경연을 하기도 하고,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소를 보고 받기도 합니다. 사정전 건물 양옆에는 동쪽으로 만춘전, 서쪽으로 천추전이 있습니다. 사정전은 마루방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추웠습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사정전 대신 온돌이 있는 만춘전이나 천추전으로 옮겨서 나랏일 보았다고 합니다.
◉ 강녕전(왕이 생활하는 곳)
왕과 왕비는 같은 곳에서 함께 살지 않고 서로 독립된 공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 왕이 생활하는 곳이 강녕전입니다. 이곳에서 왕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가족이나 친척을 불러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신하를 불러 나랏일을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강녕전에는 가구가 없었어요. 가구는 왕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을 복원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가 지었어요. 강녕전의 옛 모습을 보려면 창덕궁의 희정당으로 가봐야 하겠지요.
◉ 교태전(왕비의 생활공간)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으로 중궁전이라고도 해요. 교태전에는 왕비가 왕자나 공주를 낳기 위한 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뒷마당으로 잇대어 있는 건순각이 그곳입니다. 이곳을 지나 북쪽 후원으로 향하는 문의 이름도 건순문입니다. ‘건강하게 순산하라.’는 뜻이 담긴 소박한 이름입니다.
현재 창덕궁의 대조전이 원래 경복궁의 교태전이었답니다.
◉ 자경전(대비의 생활공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고종의 양어머니였던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그런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에 타서 1888년(고종 25년)에 새로 지었답니다. 아름다운 후원은 없지만 아름다운 꽃담에서 전통 문양을 볼 수 있고, 건물 뒤쪽에 있는 ‘십장생 굴뚝’도 챙겨봐야 할 아름다운 곳입니다.
◉ 경회루(하늘과 땅의 조화)
경회루는 왕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흥겨운 잔치를 벌이던 공간입니다. 경회루의 위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지붕의 잡상만 해도 무려 11개나 됩니다.
경회루에서 있었던 가장 슬픈 일은 단종 폐위 사건이에요. 이곳에서 단종의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은 어린 왕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빼앗았습니다.
◉ 건청궁(명성황후가 시해된 곳)
고종이 아버지인 흥선대원에게서 벗어나 나랏일을 주도적으로 해 보려고 지었던 건물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명성 황후가 건청궁 안 왕비를 위한 공간인 곤녕합에 딸린 옥호루에서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한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광화문(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은 태조 때 사정문으로 불렸어요. 그러다 세종 때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어요. 광화문의 ‘광화’는 ‘광피사표화급만방(빛이 사방을 덮고, 감화가 사방에 미친다.)’라는 말에서 따 온 것입니다.
처음 우리나라 전화의 출발은 임금님이 계신 궁궐과 관청에 놓였던 10대의 전화기입니다. 이 전화는‘덕률풍’혹은‘다리풍’이라고 불렀습니다. 전화의 영어발음 ‘텔레폰(Telephone)'을 한자로 옮긴 것입니다.
임금님의 전화를 받을 때에는 반드시 관복을 갖춰 입고 전화기에 3번 절을 하고 엎드려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님과 통화를 하려면 꼭 내관이 바꿔 줘야 했습니다. 한번은 임금이 건 전화를 직접 받은 관리가 귀양을 간일도 있다고 합니다.
전보를 치고 전화를 걸 때 필요한 전신주 또한 구경거리였겠죠? 게다가 전보를 치면 상대방에게 아주 빨리 소식이 전해지니 얼마나 편리하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래서 어떤 시골 할아버지는 서울 아들에게 운동화를 보내 주겠다며 전신주에 걸어 두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왕은 하늘과 같은 귀한 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왕에게만 쓰는 말이 따로 있었습니다. 왕의 몸은 옥체, 얼굴은 용안, 눈은 안정, 눈물은 안수, 콧물은 비수, 입술은 구순, 손톱은 수지, 피는 혈, 대변은 매화, 방귀는 매화향, 옷은 용포, 식사는 수라, 의자는 용상이라고 불렀고, 왕족을 부를 때에는 마마를 붙였습니다. |
1894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군인들과 경찰들이 가마에 대원군을 태우고 경복궁으로 향했습니다. 궁궐을 지키던 부대와 전투가 벌어져 훈련대장 홍계훈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강녕전에 들어가는 동안 일본인들은 건청궁으로 가서, 고종과 세자에게 명성 황후를 폐서인시킨다는 교지에 서명하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말을 듣지 않았고 왕비가 머무르는 곳도 반대로 알려 주었습니다. 일본 무사들은 옥호루로 쳐들어, 지휘하는 일본인은 “여우를 베어 버려라!”라고 외쳤습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막아섰지만 총에 맞고 칼에 베여 쓰러졌습니다. 일본 무사들은 입은 옷과 얼굴을 보고 왕비라고 생각되면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한 궁녀를 잡아서 명성 황후 얼굴에 흉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마침내 왕비의 시신을 찾아 낸 그들은 명성 황후를 홑이불에 싸서 향원정 뒤 정원으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석유를 뿌려 태우고 남은 재는 물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왕이 있었지만 친일 정부가 세워졌고, 왕비를 폐서인시킨다는 교지가 내려졌습니다. 일본은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겨우 100여 년 전 서울에서 이런 일어 벌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
높이 262m. 목멱산·인경산·마뫼 등으로도 불렸으며,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조선 태조 때에 이 산들의 능선을 따라 도성을 축성했으나 현재는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1910년에 처음으로 시민공원이 되었으며, 고종의 친필 비석인 '한양공원'(漢陽公園)이란 공원표지는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산정에는 조선시대 이래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국사당과 통신제도에 중요한 구실을 한 봉수대가 남아 있다. 서울 타워는 산정에 솟아 있는 높이 236.7m의 송신탑으로 사방 50km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휴식·관광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또한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떠 만든 팔각정이 있으며, 산 중턱에는 백범 김구의 동상과 약 1.98㎢ 규모의 백범광장이 있고, 맨 위의 광장에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립남산도서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동상, 이황과 정약용의 동상 등이 있습니다.
◉ N서울타워
서울의 상징이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N서울타워는 1969년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에 송출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종합 전파 탑으로 세워졌습니다. N서울타워의 전파 탑에는 KBS, MBC, SBS TV와 FM 송신안테나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국 가청 인구의 48%가 N서울타워 전파 탑을 통하여 방송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 남산 테디베어뮤지엄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은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적인 국제 도시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변화 발전모습을 테디베어를 통해 보다 쉽게 역사적인 사건과 현재 서울 모습을 구석구석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관 - 서울역사관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대한민국의 서울까지
2관 - 서울특별관
현재 대한민국의 서울 그리고 테디베어와 함께하는 특별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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