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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씀)
우리의 호프 존경하는 유대장님의 권유로 상기인의 여행일기 내용을 여기에 옮겨 보았습니다.
주절 주절 개인적인 내용을 기술한 것이라 마치 옷을 발가 벗을 것 같은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색다른 여행(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었습니다.
어떻든 많이 부족하지만 널리 해량(海量)하여 주시길 비옵니다.
태풍을 뚫고 청산도를 향한 질주
2014년 7월 31일(목) 저녁.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우선 잠을 청했습니다.
오늘밤 12시에 이모네 부부와 함께 먼 남녘땅 전라남도 완도군의 청산도를 가기로 했기에 야심한 밤 운전을 하려면 미리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했기 때문입니다.
밤 12시 정각. 서울 용문동을 출발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는 이모네는 아마도 밤 11시쯤에 출발하였을 것이겠지만, 우리집에 들리는 시간과 더불어 성격상 여행짐을 바리 바리 싸느라 어쩌면 잠을 자지도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에 무지 미안하여 내가 운전대를 잡겠다고 했으나, 아이들의 이모부는 중간에 교대하자고 하여 더 고집을 부릴 수 없었습니다.
경부고속도와 천안논산으로 향하는 호남고속도를 타고 쌩쌩거리며 달리다가 새벽 2시쯤 부여백제 휴게소에서 잠시 멈추어 간단한 야식을 먹은 후, 드디어 상기인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회사에서 집이 가까운 나는 퇴근후 야간 운전을 위해 억지 잠을 잤기에 좀 쌩쌩했지만, 아이들의 이모부는 퇴근후 먼곳의 일산 소재의 집까지 이동했고 또 사흘간 묵을 것을 예상하여 많은 짐을 꾸리느라 잠을 전혀 못잔 것이 빨간게 상기된 눈을 통해서도 역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상기인이 운전대를 잡은 그때부터 예고된 태풍주의보 말 그대로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빗길이었으나 다행히 새벽의 고속도로는 비교적 한가하여 운전하기에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야간이고 또 초행 길이라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그대로 운전하다보니 예정했던 것보다 많이 지체된 아침 5시 20분경에 전라남도 완도 여객터미널 앞에 도착하게되었지요.
그런데 그간 이곳 완도까지 새벽길 한적한 도로였기에 안심했으나, 연안여객터미널부두 앞에 와서야 엄청 많은 승용차들이 일렬종대로 줄을 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차량들이 바로 청산도를 가려는 관광객들의 승용차라는 사실을 알곤, 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도데체 청산도를 향하는 배을 타기 위하여 이분들은 몇시에 이곳에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첫배가 8시쯔음에 출항을 한다는데...
그렇다면 우리 승용차 앞에 쫄로리 줄을 맞추어 서있는 이 승용차들의 탑승객들은 날밤을 이곳에서 지세웠다는 이야기인데...
아침 8시에 첫 출항하는 청산도 행 여객선에 승선하지 못할 것 같아 약간은 걱정을 했는데, 아침 7시 25분경, 정말 아슬 아슬하게 우리 승용차를 맨 마지막으로 배에 실을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사건으로 인하여 배를 타는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여름 휴가 피크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태풍 예고를 듣고도 워낙 유명세를 탄 '청산도'이므로 이곳을 선택했나 봅니다.
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가운데, 우리 일행이 탄 여객선은 정각 8시에 청산도를 향하여 긴 기적을 울리며 출발을 했습니다. 그간 말로만 듣었던 청산도를 드디어 가게되어 그저 감개무량했습니다. 수년전 이 청산도 인근의 보길도를 무려 3번이나 다녀갔었지만, 청산도가 이렇게 더 유명세를 크게 탄 곳인줄은 정작 몰랐습니다. 완도연안여객터미널에서 청산도까지는 약 45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습니다.
청산도를 향하는 뱃전에서 '이란에서 온 관광객'을 만났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사실 관광객인지? 아니면 일자리를 찾아온 외국인 노무자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외국인은 인상이 참 좋았습니다. 마치 아라비아나이트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미남이었기에 그냥 둘이 이렇게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그 이란 청년과 상기인은 남들이 보면 일행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둘다 녹색 유니폼을 착용했으니깐요.
남해바다는 곧 태풍이 온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비교적 파고가 없이 그저 잔잔했습니다. 날씨가 맑았다면 주변의 경관이 더욱 아름다웠을 터인데하는 작은 아쉬움뿐,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습니다.
완도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바라 볼 때 멀리 공제선상에 청산도와 보길도가 보이고 또 그외의 많은 섬들이 눈에 띄었지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완도군은 265개(유인도 55개, 무인도 210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서 형성된 도서군으로 우리나라 6대섬중에 하나입니다. 위치상으로 동북쪽으로 고흥군, 여수시. 북서쪽으로으로 해남군, 강진군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바라들 경계로 제주도와 북제주군과 인접해 있습니다.
청산도의 일반 현황
청산도는 말 그대로 파랗기만 했습니다. 옛날부터 '신선의 섬'이라 불리웠다고 합니다.
청산도(靑山島)는 전남 완도에서 남쪽으로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 해역에 5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으로서 청산도 본도를 비롯하여 여서도, 대모두, 소모도, 장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청산도는 하늘, 바다, 산 모두가 푸르다해서 '청산(靑山)'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섬으로 자연경관이 유별나게 아름다워 옛날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라 불렀고,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무공해 청정지역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청산도의 최고봉은 매봉산(385m)이고, 이외 대봉산(379m), 보적산(330m) 등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으로 솟아있으며 이들 산에서 발원해 사방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연안을 따라 청산도 중앙부와 서부 일부지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이루어져 있답니다. 섬모양은 둥근 소랴형 모양이며 해발 343.4m, 총면적 42.7평방킬로미터, 해안선 길이 98.35Km로 국립해상공원에 속하는 청정수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603년 선조 41년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청산도에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1866년 고종 3년에 청산도에 당리진(堂里鎭)이 설치되어 강진, 해남, 완도 일대를 관장하였으나 1895년 고종32년에 가리포진과 함께 당리진도 해체되었습니다. 이어 1896년 고종 33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 청산도도 완주군에 예속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서를 청산면에 소속 편입시켰고, 1964년 10월 1일 청산면 모도출장소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의 인구는 3,090명(1,412가구 / 남자 1,507명 / 여자 1,,583명)이고, 한때 최고인구는 1993년도 4,021명이었다고 합니다. 행정구역으로는 13개 법정리, 23개 행정리, 79개 동으로 이루어진 인정이 많고 인심이 훈훈한 반농반어촌으로 주요기관 단체로는 면사무소, 보건지소, 파출소, 우체국, 입출항 신고서, 예비군 면대, 농협(하나로 마트), 수협지점, 한전 서비스센터 등이 있으며, 학교 2개교(중학교 1, 초등학교 1)가 있습니다. 병원은 서울에서 큰 병원에 재직중 건강이 안좋아 은퇴하여 이곳에 정착한 연세가 아주 많으신 분이 차린 개인병원인 '중앙병원'이 1개 그리고 작은 한의원이 1개소가 있다고 합니다.
청산도항 도착
아침 8시. 완도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한 우리가 탄 여객선 아일랜드호는 정확히 45분후인 Am 8시 45분 청산도 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청산도 항구에 입항하면서 우선 깨끗한 이곳의 인상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나 흔히 항구에는 비린 생선 냄새와 짠바닷 내음이 요란한 것이 보통인데,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왜 이곳에는 그 흔한 갈매기가 보이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이 이상했습니다.
아마도 생선찌꺼기나 더러운 오물이 전혀 없기에 갈메기떼나 파리 등 벌레가 자연히 없게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이상한 점은 차후 이곳에 사흘간 머물면서 쥔장에게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궁금증은 잠시 가슴에 묻었습니다.
청산항에 도착 즉시, 미리 예야간 '지나네 민박 쥔장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항구에서 불과 10분 이내의 거리라면서 구두로 안내해 주었으나, 초행길의 촌놈이라서 그만 첫날부터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고 어느 좁은 둘렛길(이곳에서는 슬로우 길)로 들어갔다가 한참을 헤메이고 말았지요.
그리고 특히 쥔장이 말한 '보석산장'의 맞은 편 포장된 소로의 아스팔트 길로 약 200m 다리까지 오라고 했는데, 그 다리를 지나 갔기에 그만 막다른 골목길 승용차가 회전하지 못하는 곳으로 들어가 약 30여분이나 뒷빠꾸를 하는 큰 애로를 처음부터 접했습니다. 흑~흑~흑~
우리 숙소는 가정집이었습니다. 쥔장께서는 민박집을 가끔 운영하는데, 가끔이지만 이렇게다로 민박집을 운영해야만 전기세를 비롯한 혜택이 주어지기에 민박을 하는것이랍니다.
맘씨 지극히 좋으신 서울에서 큰 기업체에서 별을 다셨던 분이 퇴직후 수백군데 전국의 바닷가와 섬을 답사하신 후, 이곳이 최적지로 판단되어 귀촌 하시어 아담한 집을 직접 지으시고, 부부가 함께 바닷바람을 쐬면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유롭게 노후를 보내고 계신 곳이었습니다.
청산도에서의 첫 식사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청산도에 가면 민박집에서 식사를 부탁하면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일전 3박4일간(3월 28일~ 4월 2일)간 여수 끝자락의 섬 '연도(소리도)'에 갔을 때 묵은 '해녀민텔'처럼 쥔장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잠시 착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곳 청산도의 민박집은 서울에서 낙향하시어 부부가 함께 이곳에 오신 순수 서울분이셨기에 그런 기대를 한 것은 큰 저의 행정착오였습니다. 특히나 지나 민박 李사장님의 부인께서는 연세가 칠순이신데도 불구하고, 읍내의 문화원에 '소리공부'를 하러 가셨기에 집에는 남편인 李사장님 뿐이었던 것입니다. 어떻든 지나 민박집의 쥔장님(이상진 사장)의 안내를 받아 우리 일행은 숙소에서 가까운 읍내 중심부 해안가 소재의 '푸른 식당'에서 생선백반을 주문하여 위와 같이 민생고를 해결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민박집 쥔장님께서는 '손님들은 지난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시느라 아마 한줌도 못주무셨기에 첫날부터 산행코스를 걷는 것은 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식사후에 승용차에 동승하여 '청산도 순환도로'를 한바퀴 돌면서 주요한 곳만 답사하자고 제의 하셨지요.
'정말로 따봉이었습니다." 고객의 마음을 너무도 잘아시는 최고의 관광가이드로 손색이 없으셨습니다. 하여 우리는 무조건 쥔장의 분부를 이유달지 않고 그대로 따르기로 했지요.
이곳 청산도 해안도로는 약 16.4Km로서 승용차로 돌아본다면 한두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안도로는 도척항 --- 도락리 --- 당리(서편제 촬영지) --- 읍리(고인돌) --- 동부들녘 --- 청계리(범바위) --- 신풍리 --- 양지(구들장논) --- 중흥리 --- 신흥리(해수욕장) --- 상산포 --- 노적도 전망대 --- 진산리(일출) --- 국화리(단풍길) --- 지리(청송해변) --- 도척항 순이며, 10개 마을이 도로와 인접하고 9개 마을은 가까운 곳(50m), 먼곳은 (15Km)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고인돌 유적지 탐방
아침을 겸한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승용차에 승차했으나, 청산도 일대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승용차에 기름을 만땡꼬 넣어야 할 것 같아서 주유소를 찾았는데, 이곳 섬에는 주유소라기 보다는 농협에서 운영하는 아주 작은 간이 이동식 화장실 규모의 박스형 주유탱크 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유를 급히 해야할 그 시각, 주유 담당직원이 점심식사를 갔기에 약간은 기름이 앵꼬 당할까 다소 불안했지만 해안도로를 돌다가 정작 기름 게이지에 빨간불이 켜지면 그때 다시와 주유키로 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주유소를 떠난지 채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한 '고인돌 무덤'에 곧 도착했습니다.
읍리의 고인돌 유적지는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만, 선사시대의 돌무덤인 이 귀한 고인돌을 아마도 오래전 이곳에 거주하던 초기 주민들은 그 고인돌이 지닌 문화적 유산의 깊은 가치를 모르고 들판에 있는 수많은 무덤 덮게인 이 고인돌(신석기 시대의 무덤)을 주워다가 집의 부뚜막이나 또는 구들장 논의 축대 등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지했던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그저 편리한 대로 다용도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불과 몇개 되지 않는 귀한 문화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실정이라 안타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청산도의 범바위
읍리의 고인돌 유적지를 지나, 잘 닦여진 해안 포장도로를 타고 주변의 해안의 절경과 마을풍경 그리고 계단식 구둘장 논 또 돌담장길 등의 아름다운 전경을 차창을 통해 보다가 이정표상에 나타난 '밤바위 가는 길'로 진입했습니다. 이곳은 읍내 중심지에서 불과 승용차로 채 10분도 안되는 거리였습니다.
범바위로 오르는 길은 차량이 진출입하기 좋게 잘 포장되어 있었고, 그곳 주차장과 화장실도 관광지 답게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청산도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꼭 이 범바위는 올랐을 것입니다. 청산도가 자랑하는 최고의 관광명소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범바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부부는 범바위 앞에 서자마자 기념촬영부터 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몹시 궁금하게 여기도 있을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빨리 카카오로 보내고 싶은 욕심 탓이었지요.
범바위 앞에는 현대식의 둥근 돔형으로 건축된 멋진 전망대가 있었지만, 전망대가 아닌 이곳에서도 청산도를 모두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인접된 보적산이 해발 330m인 것으로 보아 이곳 범바위 전망대도 그 정도의 높이로 추정되었습니다.
범바위 앞 광장에서 바라본 바다 한가운데 솓아오른 삼각형 섬이 신비했습니다. 그 섬은 청산도 본섬에서 약 18Km지점에 위치한 여서리(여서도)라고 합니다.
여서도라는 지명의 유래는 고려(원종13년) 목조 1274년,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 왕께서 어느날 여서도 방면을 지나노라니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지고 사면이 캄캄해 지면서 배가 흔들리고 뇌성 벽력 같은 소리와 함께 바다 속에서 한 산이 솟아오르니 그는 이 형상이 임금 왕의 느껴져서 그것이 고려조에는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그곳을 그때부터 여서도라하였다고 합니다. 어떻든 이 여서도는 여러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로서 현재 어린이 2명도 이곳 청산도 여서도 분교에 재학중이라는 신문기사를 얼마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곳 범바위 주변은 난청지역으로 휴대폰 사용이 어려웠습니다. 범바위 앞의 광장뜰에 세겨 놓은 비석의 내용처럼 이곳은 에너지가 넘치는 신비한 곳이었습니다. 이곳 범바위 주변(상도) 지역은 나침반이 빙글 빙글 돌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장(磁氣場)이 강한곳이라고 합니다.
범바위 전망대는 2009년에 착공하여 2010년에 완공했다는데, 전망대 내에는 휴게소가 있어서 아주 편리했습니다. 휴게소 앞에는 느림보 우체통이 있었는데, 우체통에 쓰여진 글의 내용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느림보 우체통은 우편물이 한달 이상이 걸린다고하는 우스게 소리가 적혀있었으니깐요.
이곳 청산도는 '슬로우 길'이라는 이름으로 트래킹 코스를 호칭하고 있었는데, 이는 천천히 자연을 음미하라는 뜻이 담겨있는 듯했습니다. 범바위 전망대와 휴게소 앞은 공기는 안내문에 표시 되어있듯이 전국에서 가장 맑고 깨끗하고 또 그 주변 경관도 너무나 아름다워 그냥 마냥 머물고 싶을 정도로 이곳을 쉽게 떠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편안한 자세로 꾀 오랜시간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이곳 전망대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사먹었지요. 이곳 범바위 전망대 앞까지 차량이 올라올 수 있어서인지 아이스크림과 커피값은 읍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위 범바위는 멀리서 바라 볼 때, 정말 커다란 범(호랑이) 형상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재미있는 범바위 전설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범 바위의 전설)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포효한 소리가 자신의 소리보다 크게 울리자 이곳에 더 큰 호랑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놀라서 그 호랑이는 섬 밖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면서 이곳을 범 바위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무엇보다 이 바위의 모습이 범상으로 보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곳 범바위에서는 남해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상섬과 여서도가 수평선 넘어 아스라이 떠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범바위 맞은 편 높은 곳에는 작은 새끼 범바위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새끼 범바위는 전망대 보다 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남해바다의 더 많은 곳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새끼 범바위 앞에 위치한 전망대 휴게소의 모형 망원경은 큰 범바위를 향하고 있었는데, 이 모형 카메라에 스마트폰을 위치 시키고 큰 범바위를 바라보면 큰 범바위의 세세한 곳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약 1시간 가까이 범바위 전망대에서 머물다가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냥 올방구 치고 앉아 죽치고 싶었는데... 다음 코스는 공용알 처럼 생긴 돌이 바닷가에 쫙 깔려있다는 장기미 해변이었습니다.
이곳 청산도는 근간 영화와 TV드리마 촬영을 하면서 부터 널리 알려졌기에 관광객이 해마다 폭주하고 있는 탓인지? 슬로우 길을 많이 개발했고 이 슬로우 길은 차량통행도 가능하여 쉽게 이동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장기미 해변을 향하여...
범 바위에서 장기미 해변으로 향하는 길은 '슬로우 길 코스' 중에 하나입니다. 범바위에서 청계리까지 이어지는 용길은 길이 난 모양이 용처럼 꿈뜰거린다고하여 "용길"이라 부른답니다. 도보로 슬로우 길을 걸었다면 더 실감이 났을 것입니다만, 차량으로 이동하면서도 우린 그저 계속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이동 도중에 "청산도 구들장 논 통수로"를 볼 수도 있었습니다. 청산도에는 이런 '구둘장 논'이 전지역에 있었습니다. 암석지대가 많은 관계로 구둘장 논을 비롯하여 집집마다 담장도 돌담이었습니다.
장기미 해변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집주인 李사장님께서 차를 잠시 멈추게 하더니만, 입에 침을 튕겨가면서 이곳 '구들장 논'의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엿보는 귀중한 역사 현장이라고 하시며, 거듭 강조하시는 모습에서 마치 그분이 학창시절 지리와 역사 선생님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곳 청산도에 거주하신지 어느덧 14년이 되신 그분은 정말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청산도에 대한 남다른 깊은 애정을 지니신 분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어떻든 청산도 구둘장 논은 2013년 1월. 국가 중용농업유산 제1호로 지정된데 이어 2014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 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돌이 많고 흙과 물이 부족한 섬의 특성에 맞춰 만든 것으로 청산도에서만 발견되는 청산도식 맞춤형 농업방식입니다.
이곳의 비탈지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온돌방식에 쓰이는 구들장을 논바닥에 깔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서 부족한물을 좀더 가두어 두어 천수답적(天水畓的)인 불리한 농업환경을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빛나는 농업경영상의 지혜로운 접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미 해변은 오랜 세월 파도에 쓸려 동글 동글해진 돌이 마치 공용알처럼 생겼다하여 공영알 해변이라 불리기도 한답니다. 이 장기미해변은 몇년전에 갔던 인접 보길도 섬의 공용알해변과 흡사했습니다.
장기미 해변의 공용알처럼 생긴 돌에는 철성분이 다량 함유된 광암물질이라서 돌이 자석에 붙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곳 장기미 해변은 청계리 주민들의 삶터이기도 합니다. 농사도 짓고 또 바닷가에서 수산물을 채취하는 등 자원의 보고로 불리는 곳이지요. 그리고 청계리에서는 이 지형탓인지는 몰라도 어느 지역보다 많은 인재가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청계리 출신의 유명한 판검사가 배출되었다고 민박집 쥔장님께서 우릴 안내하면서 몇번이나 강조하신 바 있어 이 기행문을 쓰면서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장기미 해변에는 거대한 암석들이 많았습니다. 이 큰 바위들이 아마도 선사시대에는 고인돌로 사용되었을 것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오래전 태풍 매미로 인하여 포장된 도로가 유실된 것을 아직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현장도 목격 되었습니다. 태풍 매미와 루사가 우리 고향땅 영동지방 강릉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었는데, 이곳 장기미 해안도 그 당시 많은 피해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다랑치길, 신풍리, 부흥리, 양지리
그리고 슬로푸드 체험관을 둘러보는 해안도로
장기미 해변을 나와 청계리 중촌들샘과 다랑치 길(다랑이 논) 그리고 신풍리 마을 앞도로를 경유하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구들장 논이 펼쳐진 전경을 보면서 농토와 물이 부족했던 척박한 땅을 기필코 생산성 높은 논으로 일군 섬사람들의 애환과 열정을 자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수천 수만개의 돌조각을 운반하며 뚝을 쌓아 논과 밭농사를 지으며 보릿고개를 이겨낸 이곳 섬사람들의 그 정신에 잠시 숙연한 마음으로 깊은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신풍리 마을 이정표를 보았는가 싶은데, 어느새 우리 승용차는 '슬로푸드 체험관'이라는 큰 간판이 보이는 멋진 건물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슬로푸드 체험관은 폐교가 된 舊 동중학교를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이곳 청산도의 전통음식들을 아주 싸게 판매한다고 합니다. 즉 청산도의 Slow Food는 오랜 조리 과정과 숙성 기간을 거친 청산도 특유의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햄버거, 피자 등 패스트푸트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잘 포장된 도로를 타고 승용차로 청산도를 한바퀴 도는 차량 드라이브 이기에, 이는 수박겉핣기식의 얄팍한 관광에 불과한지라, 첫날 피로가 곧 회복되면 이곳에 사흘간 머물면서 자세히 견학하기로 마음 먹고 그냥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농촌전경과 바닷가의 절경들만 바라보며 스치듯 지나갔습니다.
승용차로 국화리 이정표를 지나면서 도로 양옆으로 길고 긴 단풍나무 숲을 지나게 되었는데, 단풍나무 가로수는 아름다움의 극치인 장관 그 자체였습니다. 이 단풍나무 길은 국화리에서 지리에 이르는 도로까지 수 Km나 되었습니다. 자칭 관광 가이드를 자청한 동승한 민박집 쥔장 이사장님의 해설에 의하면, 이 단풍나무 길을 조성할 때에 숨은 애환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사연인 즉슨, 어느 해인가? 마을 아낙네들이 단체로 단풍놀이를 겸한 서울나들이를 하고자 섬 밖으로 처음 나갔는데, 섬 밖의 생활환경을 본 청산도 부녀자들이 귀향 배에는 타지 않고 대다수가 육지에 남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뼈빠지게 농사일을하고 물질을 해도 한달에 100만원도 안되는 수입인데 반하여 도심에서 식모살이를 해도 한달에 기백만원을 벌 수 있는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크게 자극받은 청산도의 남정네들은 크게 위기 의식을 느낀 나머지 자신들의 아낙네들을 위해 내장산 or 섬진강 단풍길, 서울 여의도 단풍길 보다 더 멋진 '청산도 고유의 단풍 길을 조성'하여 자신들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관과 민이 합심하여 만든 이 청산도 국화리와 지리를 잇는 길가의 단풍길은 가을이면 전국 최고의 단풍길로 소문이나 지금은 육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곳으로 단풍구경을 오는 명품 관광 코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리의 서편제 영화 촬영장
국화리와 지리를 잇는 길가의 단풍 숲을 지나면서 안내를 자청한 민박집 쥔장께서는 지리에는 250년 이상된 유명한 소나무 숲단지가 있는데 그곳에 꼭 들려야만 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우선 청산도에서 가장 이름난 '서편제 영화촬영장과 또 봄의 왈츠' 드라마 촬영장을 보고 싶은 욕심에 지리의 소나무 숲은 '슬로우 길 트래킹'을 할 때에 들리자고 말하곤 냅다 읍내로 향했고, 읍내 도청리의 주유소에서 승용차에 기름을 만땅 채운 후, 불과 10여분만에 당리 소재의 '서편제 영화 촬영지'에 도착했습니다.
당리의 서편제 영화 촬영지에는 "서편제 영화" 내용이 잘 전시되어 있었고 또한 촬영당시의 세트시설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만, 더욱 눈길을 끌게 된 곳은 청산항과 도청항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사당과 소나무 숲에 있는 이름 모를 인물의 무덤 흔적이었습니다.
이곳 청산도 어느 주민의 말에 의하면, 수년전 어느 도굴꾼이 이 소나무 숲에 있는 언덕을 도굴하여 도망치다 '큰 신발'하나를 흘리고 갔는데, 그 신발 한짝이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도굴된 장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곳이 어쩌면 그 유명한 우리가 해신(海神)으로 부르고 있는 장보고의 무덤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현재까지 해상왕 장보고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이곳 청산도야 말로 '청해진'을 바라다 보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 것입니다. 당시 신라시대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장보고의 추종자들은 장보고의 시신이 자칫 훼손 될 것을 우려하여 소나무 밑에 매장하여 마치 묘가 아닌 그냥 얕은 언덕의 숲으로 위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런 흔적을 오늘날 문화재 당국이나 역사학자들이 왜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지 의문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이 소나무 숲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기에 계속 머리만 갸우뚱거리면서 서편제 촬영지의 현장은 그냥 보는둥 마는둥 했습니다.
전남 장흥 출신 작가 이청준이 쓴 소설을 영화한 것입니다.
서편제는 기구한운명을 타고난소리꾼 남매의 가슴 아픈 한과 여기에서 피어나는 소리의 예술을 그린 작품입니다. 일정한 직업없이 떠돌이하는 소리꾼과 그의 딸의 이야기에서 소리에만 미쳐 살아가는 소리꾼이 그 딸 또한소리장이로만들기 위해 딸이 잠자는 사이 두눈에 청강수를 넣어 두눈을 멀게 하지요.
이렇게 하면 눈으로 뻗칠 사람의 영기가 귀와 목청으로 옮겨가 소리가 비상해 진다는 것인데, 즉 좋은 소리를 위해 딸의 눈을 멀게한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모두의 가슴을 찢어 놓을 듯한 아픔과 恨을 담고 있는 권은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당시 최고의 흥행 영화였던 기억이납니다. 1993년 한국 영화사상 초유의 100만 관객돌파의 기록을 남겼으니깐요. 어떻든 청산도 첫 여행지에서 서편제 영화를 다시금 음미하게 된 것에 감회가 새롭기만 했습니다.
서편제의 줄거리
전라도 보성읍 밖의 한적한 길목 주막이 '소릿재 주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곳에 소리꾼 여인과 북장단을 하는 사내가 나옵니다. 여자는 혼자 사는 그 집의 주인이고 사내는 하룻저녁 손님이지요.
춘향가, 수궁가 등을 들으며 소리에 빠져 들어간 손님의 재촉에 의해 여인은 그녀에 앞서 소리를하다가 이제는 죽은 어느 소리꾼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그 소리꾼은 어린 딸 하나와 떠돌이 소리를 하다가 죽어갑니다. 그가 죽고 난 뒤, 소리는 어린딸에게 이어졌는데 그 딸의 소리에서 사람들은 아비 소리꾼의 소리를 듣는다고 했습니다.
한편 이야기의 진행은 애당초 소릿재 주막에 들른 손님이 원래 그 소리꾼의 의붓아들이었음을 그리고 그의 딸 역시 의붓동생이었음을 밝혀줍니다. 즉 소리꾼은 주막 손님의 어머니가 관계했던 남자였고, 그 딸은 그 결과로 태어난 소생이였던 것이지요.
당리의 언덕은 청산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입니다. 이 언덕에는 서편제 영화촬영장 세트를 비롯하여 2006년 3월에 방영된 바 있는 KBS 2 화목 인기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장 세트 그리고 여인의 향기 드리마 촬영지 표식도 잘 보존되어있는 관광 명소였습니다.
이곳 청산도가 해마다 연 60만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명품 관광지가 된 것은 청산도가 갖고 있는 자연이 환경 및 입지조건과 더불어 위의 이러한 영화와 방송의 문화콘텐츠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특히 이를 강력히 추진한 분이 바로 김종식 전임 완도군수였기에 이곳 청산도 주민들은 김종식 군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언덕에 김종식 군수 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
봄의 왈츠 촬영장 견학
봄의 왈츠 드라마 촬영장 세트인 주택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 세트장인 가택은 방송국에서 무려 7억원이나 투자했으며, 향후 완도군에 기부체납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부부는 이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탈렌트들의 모형 틈에 끼어 살짝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이모네도 우리 부부처럼 똑같이 봄의 왈츠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봄의 왈츠 찰영와 세트장의 내부 전경을 사진에 많이 담은 것은 언젠가 훗날 귀향하여 전원주택을 지을 때 참고하기 위하여 하여간 마구 마구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부 시설 하나 하나가 정말 맘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칼라 펜이트 칠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약 1시간 가량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시 이번 여름 휴가를 청산도를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깐요.
서편제 영화세트장에서 봄의 왈츠로 이르는 돌담길에는 돌형태의 스피카를 특수 제작하여 돌담장에 끼어 놓았고 이 돌형태 스피카에서 "서편제 영화에서 나왔던 판소리"가 울리어서 더욱 정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작은 것 하나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구장리의 해변, 우리 숙소 앞 바닷가에서...
첫날 아침 8시 완도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여객선에 승선하여 아침 9시전에 이곳 청산도에 도착한 후 무려 8시간을 주변일대를 둘러 보았지만 조금도 피곤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공기가 맑고 또 주변경관이 아름다운 탓도 있었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한 즐거운 여행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숙소인 구장리 민박집에 들어가지 전, 바로 마을입구에 있는 읍리해변 방파제 앞에서 바다 구경을 한 후,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청산도에서의 첫날 멋진 저녁 만찬
숙소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 30분이었습니다.
첫날 저녁은 서울에서 준비해간 LA갈비를 구우며 집주인과 같이 멋진 만찬을 즐겼습니다.
첫댓글 청산도 다음 여정이 기대 됩니다.
선배님! 여행기는 언제나 .... 너무 즐겁고 ... 너무 상세해서 내가 여행하는 기분이라고나 ~~~
한번에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 천천히 올려 주시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