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로 유래 및 연혁
현재 동로라는 명칭은 생달1리(고불목) 마을앞에 동로소(冬老沼)라는 큰웅덩이가 있다.
조선 초기 조령통로가 개통되면서 문경읍 관음리와 갈평리, 중평리를 거쳐
여우목 고개(문경읍 중평리와 동로면 생달리의 경계)를 넘으면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동로소 (冬老沼)의 명칭 때문에「동로」라는 명칭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1914년 경상 북도 령(令)이 공포되면서 현재의 동로면(東魯面)으로 한자표기가 바뀌었다.
- 동로면사무소 홈페이지에서
[지명유래]
<간송리(磵松里)>
- 간작골∙간곡(磵谷)
천주산 남쪽에 있는 시냇가의 마을로써 간좌향(艮坐向)으로 집을 지어야 피난을 한다는 뜻에서 진성이씨(眞城李氏)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간좌향(艮坐向)으로 집을 짓고 왜란때 난을 피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간작골이라 하였다 한다.
- 삼밭질∙마전(麻田)
간작골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인데 마을의 모든 경작지에 삼을 재배하였다고 하여 삼밭질 또는 마전이라 하였다.
- 천주(天柱)
천주봉(天株峯)이 하늘을 떠 받치는 기둥 같이 생겼다고 해서 천주라고 하였으며 천주봉 남쪽 밑에 자리 잡은 마을이어서 천주라고 전한다. 마을 앞 자연석에 언제의 각자(刻字)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주동천(一柱天峯)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사부래이∙사부동(沙夫洞)∙내사부(內沙夫)
1783년경에 정문오(鄭文五)라는 분이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가마솥을 만드는 사부(沙夫)가 살고 있었다 하여 사부래이라 불렀다 하며 예천군(醴泉郡) 용문면(龍門洞) 사부동(沙夫洞)을 외사부(外沙夫)라 하고 이곳을 내사부(內沙夫)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 솝들∙송평(松坪)
사부래이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 과거에 급제하면 솟대를 마을 어귀에 세우는데 이 동네 함양박씨(咸陽朴氏) 문중(門中)에서 벼슬하여 솟대를 세웠던 마을이라고 하여 솟들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변음되어 솝들이라고 부른다. 현재 간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 할무새이∙고성(姑城 )
옛날 이곳에 마고(麻姑) 할머니가 금천(錦川)의 돌을 모아 약 1㎞에 달하는 성(城 )을 쌓았다는 전설과 함께 마을 이름을 할무새이 또는 고성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 때 성안에 있는 마을을 안 할무새이 내고성(內姑城)이라 하고 성 밖의 마을을 바깥 할무새이 외고성(外姑城)이라 불렀다 하며 지금도 성지 일부가 남아 있다.
- 안성골(內城谷)
할무새이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고성(姑城) 안쪽에 있다 하여 안성골이라 한다.
<노은리(魯隱里)>
- 노래이∙노루미∙노은(魯隱)
1683년경 허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오래 살고 잘 살기를 축원하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노래이라고 하였다. 또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미, 마을이 산쪽으로 가려 있어 외부로부터 잘 보이지 않으므로 피난처로 알맞게 숨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노은이라 하였다 한다.
- 교촌(校村)
노은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1929년 동로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 이 곳에 마을이 성되어 학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 사평(泗坪)
이 마을이 생길 당시에 마을 하천의 원류가 공덕산(功德山)에서 시작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공자가 출생한 지명인 수사(洙泗)의 사자(泗字)를 따서 사평(沙坪)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 평지(平地)
노은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 주변은 전부 험한 산지인데 이 마을만은 비교적 넓은 평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평지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인동장씨가 처음으로 개척한 마을이다.
- 도화미기∙도하동(道下洞)∙도화동(桃花洞)
평지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산북면(山北面) 가좌리(加佐里)로 가는 길목 밑에 있다 하여 도하동 또는 복숭아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하여 도화동이라 불려졌다.
<마광리(磨光里)>
- 마깨이∙마광(磨光里)
1483년경 단양인(丹陽人) 우진사(禹進士)라는 분이 이곳을 개척하여 인판(仁坂)이라는 마을로 불리어 오다가 그 후 경주인(慶州人) 손영조(孫永祚) 진사(進士)와 통훈대부(通訓大夫) 변정언(邊正言)이 상의하여 앞산 정침봉(正針峯)과 뒷산 만석봉(萬石峯)가운데 있는 마을이니 바늘을 갈아서 빛이 나도록 하는 것과 같이 마을을 빛내야 한다고 하여 마광(磨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꽃재∙화령(花嶺)
이 마을은 산세가 좋고 온 산천이 사계절 꽃으로 뒤덮인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꽃재 또는 화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마광리 동쪽에 위치하고 경주 손씨가 개척한 마을이라 한다.
<명전리(鳴田里)>
- 본명전(本鳴田)∙명전(鳴田)
이곳은 밭에서 항시 많은 새가 울고 있었다고 명전이라 하고 명전리 전체의 중심된 마을이라 하여 본명전이라고도 한다.
- 거느기∙건학(乾壑)
이 마을의 주위에 있는 산의 형상이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을 하고 있어 건학이라 불렀다 한다. 이곳 주민들은 보통 거느기라 부르고 있다.
- 굴바우∙굴암(窟岩)
이 마을 뒷산 서편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 밑에 토굴이 있어서 굴바우∙굴암이라 불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가 있는데 새벽별이 밝게 비친다고 바위의 이름을 별바위라 한다.
- 당골∙당곡(堂谷)
이 마을의 입구 동쪽 산등성이가 말등과 같이 생겼다 하여 당골이라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앞 개울의 가장 깊은 곳을 용소라 했고 전설에 이 용소에 있던 용이 하늘로 올라 가다가 벼락을 맞아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 큰말∙대촌(大村)
현재 명전초등학교가 위치한 마을로서 명전리에 산재한 자연부락 중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큰말(큰마을) 또는 대촌이라 하였다.
- 멍애재∙멍애티∙모녀티(毛女峙)
1300년경 이 고개에 한 과부가 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 과부의 턱에 수염이 나 있었다고 하여 이 마을을 모녀티 또는 멍애재∙멍애티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새점∙신점(新店)
옛날에 솥을 만들던 장인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여러 종류의 무쇠그릇을 만드는 공장과 가게를 개설하자 새로운 취락이 형성되었다. 그 후 이 마을을 새점 또는 신점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옥수동(玉水洞)
1480년경 이 마을 위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의 이름을 옥과 같이 맑은물이 흐르는 곳의 암자라 하여 옥수암이라 하였고, 그 뒤 이곳에 형성된 마을을 옥수동이라 하였다 한다.
- 오목내∙방곡(傍谷)
마을의 사방이 산으로 싸여 있고 골짜기를 따라 집이 세워져 그 형상이 오목하고 모든 재산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하여 오목내라 하였고 행정구역이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와 접한 곳이라 하여 방곡이라 하였다 한다.
<생달리(生達里)>
- 거무정∙거무재
바깥 생달에서 남쪽으로 100여m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로서 6∙25전쟁 전까지 6가구 정도가 살았으나 그 후 주민이 차츰 다른 데로 이주해 가서 현재 2가구가 산전을 경작하며 살고 있다.
- 고불목∙바깥산다리∙바깥생달∙새터∙고불항(顧佛項)∙외생리(外生里)
생달리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산과 달만을 바라볼 수 있는 두메산골이라는 뜻에서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으며 그 후 생달로 변경되었다는 설과 마을어귀에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도 죽지 않고 살았다 하여 산다리라 하였고 그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두가지 속설이 전해 오고 있다. 고불목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 마을 뒷산에 노승 고불형(顧佛形)의 명당이 있다는 어느 지관의 말에서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 새터∙여우목재(狐項嶺)
바깥생달 서쪽에 인접해 있는 마을로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라 하였다한다. 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2㎞정도의 지점에 경사진 계곡이 있는데 옛날에 이곳이 여우들이 지나는 길목이었다고 하여 여우목골 또는 여우목재라 하였다 한다.
- 안산다리∙안생골∙내생리(內生里)
바깥생달에서 북쪽으로 2㎞정도 떨어진 마을로서 생달리 마을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약사정(藥沙亭)∙약사쟁이∙사점(沙店)
바깥생달 동쪽에 있으며 동로에서 생달리로 들어오는 어귀의 마을이다. 옛날에 사기점이 있어서 사점이라 불리어졌고 이 마을 뒷산에 약산사(藥山寺)라는 절이 있다가 폐사되고 그 사지에 약사여래 석불이 있다고 하여 약사정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차갓∙차가동(且加洞)
안생달에서 북쪽으로 4㎞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명전으로 넘어가는 험한 차갓재가 있다 하여 차갓 또는 차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석항리(石項里)>
- 무진골∙점마걸∙수진계리(水眞溪里)
이곳은 1500년경 주씨(周氏)가 처음으로 무성했던 다래 덩굴을 베고 마을을 개척한 후 1670년경에는 개성고씨가 이주하여 이곳을 돌목(石項)이라 하였으며 1700년경에는 예천박씨가 현재의 석항1리를 발전시켰고 1770년경에는 정선전씨(旌善全氏)가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의 주체를 이루고 있다. 이때 이 마을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그 물맛이 좋고 맑으며 수량도 변하지 않고 계곡으로 넘쳐흘렀다. 이것을 본 이웃 동민들이 맑은물이 골짜기에 넘쳐흘렀다 하여 마을 명을 무진골이라 하였다 한다. 점마골이라 한 것은 이 마을에서 솥을 만들어 팔았다 하여 불려진 동명이다.
- 잿골마
교통이 발달하기 전에 무진골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이웃 마을을 다닐 때 넘나들던 고개밑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잿골마라고 하였다 한다.
- 지통마∙지통동(紙通洞)
원래 이곳은 황무지였으나 어느 때인가 이곳에 이주 정착한 사람들이 지통(紙統)을 차리고 한지를 만들어 생계를 영위하였다고 하여 지통마∙지통동이라 하였다 한다.
- 솥토목이∙정항동(鼎項洞)
점마의 가게를 지나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통하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솥토목이라고 한다.
- 눌기∙와기(臥旗)
옛날 이 고을에 용맹한 장수가 휘하 병사들과 같이 진등이란 곳에서 진을 치고 난 후 에 투구는 투구봉에, 말은 마산(馬山)에다, 깃발은 눌기에다 두었다 한다. 이 때 깃발을 세워 둔 것이 넘어졌으므로 장수는 실망하여 어디론지 사라졌고 병사들 역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 기가 넘어진 골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눌기 또는 와기라 불렀다 한다.
- 도애뱀이∙대뱀이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고을에는 농사 짓기에 충분한 큰 전답이 없으나 산 능선 끝에 위치한 논배미이 하나가 여러 마지기에 달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이 논을 도애뱀이 대뱀이라 하고 이 주위에 형성된 마을도 그와 같이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중간마∙중석동∙상석동
도애뱀이와 상석동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간마라 하고 이웃한 도애뱀이와 중석동보다 가장 위에 위치하고 돌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상석동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 성골∙양짓마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흡사 작은 성과 같다 하여 성골이라 하고 하루 종일 햇빛이 비치어 따뜻한 양지를 이루는 마을이라 하여 양짓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군마∙구마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에 경주김씨 몇 가구가 이주 정착하여 취락을 형성하였는데 주위의 어느 부락보다 가장 오래된 마을이란 뜻에서 군마 또는 구마라 명명하게 되었다 한다.
- 음짓마∙응달마
이 동리는 사방이 산으로 가려져 있어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음지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란 뜻에서 음짓마라 하였다 한다.
- 물목이∙물매기∙수항동(水項洞)
이곳에는 산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약수터가 있어 약수의 량이 많아 작은 개천을 이루게 되었다. 이 물을 이용하여 식수도 하고 농업용수로도 이용하게 되었다. 그 후 자연적으로 물이 흐르는 목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물목이, 물매기, 수항동이라 하게 되었다.
- 구낙이∙구락리(龜落里)
전설에 의하면 어느해 여름, 홍수가 심할 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천둥번개가 치더니 큰 거북이 한 마리가 빗줄기를 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웃 사람들이 거북이의 운을 받은 상스러운 땅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구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수평리(水坪里)>
- 큰마
1700년경 황씨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수평리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규모의 마을이라 하여 큰마라 하고 30여가구가 이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경천댐 조성으로 수몰되고 주민은 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 물아이∙물한리(水閑里)∙무라이
창마 북쪽 3㎞떨어진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인데 금천(錦川)의 물이 빨리 흐르지 않고 서서히 흐른다 하여 수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옻추골
수평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 말기에 옻나무가 많아서 이 곳에서 옻을 채집하였다 하여 옻추골이라 하였다 한다.
- 창마
큰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시대에 군기창고(軍器倉庫)가 있었다고 하여 창마라하였다. 경천댐 조성으로 수몰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인곡리(仁谷里)>
- 너버이∙광원(廣院)
돌문 밖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원터가 있어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갈 때 이 곳을 거쳐 유숙하던 곳이라 하여 원터라 불리어 지다가 후에 광원이라 개칭되고 또 너버이(양지너버이, 음지너버이)로 불리어 지기도 했다. 경천댐 조성으로 수몰되고 주민은 이주하였다.
- 구만이∙구만(九灣)
돌문 밖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금천(錦川)의 물이 흘러오다가 산에 막혀 구자(九字)모양의 만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구자(九字) 모양의 만 지역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구만이라 불렀다 한다. 경천댐 조성으로 수몰되었다.
- 남산(南山)
몽고지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서쪽에 남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남산의 정기를 이어 받은 마을이라 하여 남산(南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마을에서 조선시대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 돌문밖에
음지너버이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조선시대에 9대를 동지사 벼슬을 지낸 천석(千石) 가문의 이씨가 이주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성(城)이 있어 북쪽에 돌문을 달아 놓고 이 곳으로 마을 사람들이 출입하였다. 이 때 성 밖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돌문밖에”라는 동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 몽고지∙몽현(夢峴)
인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남산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몽현이라 하여 꿈을 꾼 고개란 뜻으로 불리어지다가 후에 몽고지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 원터
돌문 밖 동쪽에 있는 마을로 약 500년전에 이 곳에다 원(院)을 설치하고 숙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여 물목마다 가격을 기록한 후 과객들이 필요한 물건을 이용하도록하고 이용한 물건값은 비치된 금고에다 넣고 마음대로 활용하였다 하며 원이 있었던 곳 이라 하여 원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적성리(적성리)>
- 갈밭골∙갈전동(葛田洞)
칡덩굴이 많은 곳을 개간하여 마을을 만들었다 하여 갈밭골 또는 갈전동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에 옥녀봉(玉女峯)이 있고 그 동쪽 산 정상에 치마바위가 있으며 연주패옥(連珠佩玉)이라는 풍수지리설이 전해 오고 있다. 연주패옥이란 우리나라 명당중의 나라고 하며 선조때 약포 정탁(鄭琢)이 중국의 이름있는 풍수 두사충으로 하여금 자기의 묘터를 찾게 했는데 이곳에서 연주패옥을 발견하고 구리로 만든 술잔 한 개와 은300량을 묻고 표지를 해 놓았으나 자손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죽었다 한다. 그 후 그 아들이 명당터를 찾기 위하여 선친 정탁과 같이 다니던 청지기를 데리고 갈밭골 입구 큰 송 밑에서 잠시 쉬면서 묘터가 어느 쪽이냐고 묻자 청지기가 저기 저곳입니다 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타고 왔던 말이 갑자기 노(怒)하면서 청지기를 물어 죽였다 한다. 이에 가 난 주인은 말의 목을 베어 그 노송밑에 매장하여 버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재까지도 연주패옥을 찾는 사람은 많으나 찾지 못한 채 그 주변에 묘만 생겼고 말 무덤과 함께 50평 크기의 큰 바위 옆에 서 있는 수령 600년 가량의 노송만이 당시의 전설을 간직한 채 외롭게 서 있다.
- 쇠골∙쇠골∙금곡(金谷)
벌재(伐嶺)밑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쇠붙이가 생산되었던 곳이라고 해서 쇳골, 금곡이라 했으며 근년(近年)에도 금광을 개발한 사실은 있으나 현재는 없다.
- 장터∙벌재장∙장기(場基)
벌재에 있는 동로면의 시장으로 3일과 8일의 5일마다 장이 선다. 처음에는 저자거리에 장이 있었으나 조선조에 현재의 벌재장터로 옮겨졌으며 구장터와 새장터로 구분된다. 곳에“벌재장 웃골목”같다는 속언이 전하는데 이 말은 이곳 사람들이 가까운 곳으로 혼인을 해서 장날마다 모이는 사람의 대부분이 사돈지간이 되므로 서로 정겨운 이야기를 할 때 소란스럽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장자불∙장동(壯洞)
적성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1633년경에 조성재(曺成才)라는 선비가 이주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백만장자가 살았다 하여 장동이라 부르게 되었고, 원인 모를 화재로 온 마을이 망하게 되자 장자불이라고 하였다 한다.
- 큰마∙벌재큰마
벌재 밑에 있는 마을로서 칡덩굴을 쳐 없애고 마을터를 마련하였다 하여 벌재큰마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날의 벌재는 허궁다리 안으로부터 도하동(道下洞)까지를 모두 벌재라 하였는데, 그 여러 마을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이며 작성현 소재지로서 이 지역 중심 마을이라 해서 큰마∙벌재큰마라 하였다 한다.
- 멍들게이
쇳골 아랫편 산비탈에 위치한 마을로서 주위의 산에 돌이 많아 사람들이 다닐 때 부닥쳐서 멍이 들 정도로 매우 불편한 지역이라 하여 멍들게이라고 불리어졌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