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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유래 및 연혁
신라 전기에는 관문현(일명 고사갈이성) 또는 관현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서기 750년)때에 관산현 이라 개칭하고
고녕군(현 함창)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현종(서기1020년)때에 문희군이라 고쳐 상주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그뒤에 문경이라 불리었는데 그 확실한 년대는 미상임.
- 문경읍사무소 홈페이지에서
문경읍 <상동네ㆍ상리, 삼박골ㆍ삼밭골, 절골(寺谷) >
고려 공애왕 2년(서기1390년)때에 감무를 두었고 조선조 태종13년(서기1413년)에 감무를 폐지하고 현감을 두었고 고종32년(서기 1892년)에 문경현이 문경도호부로 승격 되었다가 1895년에 군으로 호칭이 바뀌고 1914년 행정구역변경시 읍내방과 초곡면을 통합 문경면이라 호칭하고 1932년 신북면을 병합하였으며 본읍은 신라때 부터 군청소재지로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으나 1949년 3월에 군청이 점촌으로 이전되고 한산한 면부에 불과 하였음, 한때 석탄광산 경기의 활성화로 1973년에 읍으로 승격 되어 호황을 누렸으나, 1990년대에 광산경기의 사양화로 지역경제가 많이 침체되었으나 최근 새재도립공원내 KBS태조왕건촬영장, 주흘산, 문경활공랜드, 문경온천개발, 폐광지역진흥지구, 개발촉진지구 지정 등 개발여건 조성으로 지역경제가 다소 활성화 단계에 있음.
본읍 관할리 수는 18개리(법정이동 - 上里, 下里, 校村, 堯城, 池谷, 馬院, 陳安, 各西, 下草, 上草, 古堯, 八靈, 唐浦, 龍淵, 平川, 葛坪로, 中坪, 觀音)로 되어있다.
[지명유래]
<상리>
- 상동네ㆍ상리
고려말 조선초 현청(縣廳)이 설치된 이후 청사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상동네, 또는 상리(上里)라 명명하고 1560년경부터 전주이씨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1949년 이전까지 문경 縣街와 문경군청, 문경경찰서가 소재하였던 마을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당시 객관으로 이용되었다고 하는 관산지관(冠山之館)만이 보존되고 있다. 지금의 문경서 중학교 자리가 옛 군청 소재지였다.
- 삼박골ㆍ삼밭골
주흘산(主吃山) 능선 끝부분에 위치한 마을로서 기름진 전지(田地)가 대마(大魔) 재배의 적지였다. 당시에 농민들은 밭에는 잡곡, 논에는 수도작물을 재배함을 원칙으로 생각하였으나 이곡에는 주로 삼(大魔)을 재배하여 삼베를 옷감으로 짜서 조정에 진상하였다. 그후 옷감의 품질이 우수함을 인정받아 현감의 표창도 있었다 하여 삼밭골이 삼박골로 전승(傳承)되었다고 한다. 문경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자연마을이 이곳이다.
- 절골(寺谷)
주흘산(主吃山) 좌측 계곡에 1600여 년경 자비심이 많은 무영의 스님이 절을 창건한 곳이라고 하여 절골이라 부르고 있으나 현재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일제 때 이곳에 화전민 4가구가 소도 기르고 화전을 경작한 사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 창건한 후 이 절에 빈대와 벼룩이 서식하여도 이를 박멸하지 않고 스님이 살생금기(殺生禁忌)의 자비심을 베풀다가 죽고 말았다 한다. 그 후 절이 황폐하자 동민들이 불을 질러 폐허가 되었다.
<하리(下里)>
- 하번(下番)· 하번동(下番洞)
고려 말 조선 초에 현청(縣聽)이 상리(上里)에 설치되었을 때 그 아래쪽에 발생한 마을이라고 하여 하번 또는 하번동이라 부르다가 현재 하리(下里)로 개칭되었다.
- 빗직걸 ·빗적걸 ·빗석걸
마원리(馬院里) 우무실에서 하번동에 진입하는 입구 느티나무 우거진 숲속에 관산(冠山), 문희(聞喜),문경현(聞慶縣)을 거치는 동안에 충(忠),효(孝),덕(德)을 베푼 선현들의 선정비(善政碑),송덕비(頌德碑)가 이곳에 건립되었다고 하여 비석거리란 뜻이 담긴 빗석걸로 불리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비(碑)가 임진왜란때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의 충절을 새긴 비(碑)로서 이곳에 있다가 한때 문경초등학교 앞으로 옮기고, 다시 상초리 제 1관문 앞으로 옮겼다가 새재 관리사무소 옆 현 위치로 이건 되었다. 현재 빗석걸이는 전지화(田地化)되고 말았다.
<교촌리(校村里)>
- 행(생)깃골,향교골(鄕校谷),교촌(校村)
여말 조선 초를 거치는 동안 공립지방학교의 구실을 하던 향교(鄕校)가 있는 곳이라 하여 향교골 또는 교촌(校村)이라 불려졌던 곳이다. 행(생)깃골은 향교골의 와전에서 온 구전이라고 생각된다. 현존하는 교촌(校村)의 향교(鄕校)에는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모셨으며 문경시장이 제주가 되어 춘추향사를 지내고 있다. 현 향교건물은 태조원년(1392)에 건립되어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중수한 것이다.
- 탑골(塔谷)
이것은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햐여 탑골이라 하였는데 이 탑에 대한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말 원종때 안유(安裕)의 후손 안수위(安壽位)라는 선비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여 자기 조상을 추모하는뜻에서 탑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구름골·구룡골(九龍谷)
이 마을은 8·15광복 전까지만 해도 근처에 못이 있어서 아침으로 항상 구름과 안개가 싸여 있는 것처럼 보여 신비스럽게 생각되어 언제부터인가 구름골이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호기심이 많은 청년 9명과 구름과 안개 낀 이 골짜기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면서 무사귀환을 축원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9마리의 용(龍)이 승천하고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이곳의 구름과 안개는 깨끗이 걷혔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구름이 끼었다 없어졌던 마을이라고 하여 구름골이라 부르고 9사람의 젊은이가 9마리의 용(龍)이 되어 승천한 곳이라고 하여 구룡곡(九龍谷)이라고 하였다.
<각서리(各西里)>
- 각싯골(各氏谷)·각씨동·각섯골(各西谷)·각서골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계를 이루고 이화령 중턱에 자리잡은 동남향의 전통적 산간마을로서 과거에는 문경현 초곡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지금부터 약 350여년전(1639) 황씨(黃氏)라고 하는 선비가 백화산(白華山) 서쪽에 마을을 개척하였는데,산의 모습이 흡사 뿔과 같다 하여 각섯골이라 하였으며 그 후 각각 다른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여 각싯골이라 불려졌는데 지금은 이와 같은 뜻과는 달리 각서골, 또는 각서로 명명하고 있다.
- 샛터·신기(新基)
각서골 동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샛터 마을은 새로운 터에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불려진 촌명으로 황씨(黃氏)를 중심으로 한 화전민(火田民)들이 임진왜란때 피난 와서 정착하였다고 한다.
- 굴뚝미기·굴뚝매기·풍덕골(豊德谷)
충북 연풍면 분지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위치하고 있는 이 고을은 그 형상이 굴뚝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굴뚝매기로 불려졌으며 1800년경에 충북인 김만덕(金萬德)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자 연풍의 풍(豊)자와 자기 이름의 덕(德)자를 따서 풍덕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지갯절 ·지개사(地開寺)
각서리(各西里) 본동(本洞) 동북쪽 산록에 넘어서면 절이 있었다 하는 전설이 있는데 이 절터를 지갯절이라 하고 이 사찰명을 지개사(地開寺)라고 하였다. 지금도 지개사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으며 현재 4가구가 화전을 경작하며 살고 있다.
- 중간재 ·중간령(中間嶺)
각서리 본동에서 이화령 정점의 중간지점에 형성된 취락이라 하여 중간재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은 1550년경 전주이씨가 처음으로 개척한 곳으로서 현재는 화전민들이 정착하여 고랭지 농업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 요광원골(要光院谷)
조선 숙종때 한양의 최대감(大監)이라는 분이 영남지방을 행차하던 중 이곳에 유숙하게 되었는 데 그 집의 주모와 통정(通情)하게 되었다. 그 후 최 대감의 아들이 벼슬길에 올라 영남지방으로 오던 중 이곳에서 유숙하게 되어 우연히 자기 부친이 통정한 주모와 동침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최대감은 고민을 하다가 아들을 불러서 "父子가 한 여자와 동침한 것은 잘못된 일이나 서로 모르고 한 일이니 한 요강에 오줌을 눈 것과 같지 않느냐?" 라고 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잊어버리자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어 이곳을 요강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때 역마제도의 일익을 담당하였던 원(院)은 여행자 및 출장관리의 편의와 숙식을 제공하였던 곳으로 산이 높아 빛을 보아야 한다는 뜻에서 요광원(要光院)이라 하였다.
- 이우릿골
이화령(梨花嶺伊火嶺)정상 가까이에 있는 이 마을을 이우릿골이라고 한 것은 이화령을 예로부터 이우릿재(고개)라고 불렀으므로 이 마을도 이웃릿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안리(陳安里)>
- 진안리(陳安里)
1530년경 박계룡(朴桂龍)이란 분이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고 1600년경 박규칠(朴奎七)이란 분이 진안(陣安)이라고 명명(命名)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나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진(陳)을 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고 하여 진안리(陳安里)라 했다고 한다.
- 너븐한 길(너브난질)․오리터
조선조에 문경새재를 넘나들 때 삼거리에 위치하였고 길이 넓었으며 주막이 있어 마원(馬院)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5리가 된다고 하여 오리터라 하였으며 이곳의 길이 다른 길보다 넓다고 하여 너브난질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초리(上草里)>
- 상(위)푸실(上草谷)·상초(上草)
신라 46데 문성왕(文成王) 8년(846년) 보조국사가 이곳 상초를 지나다가 주흘산에 혜국사를 창건하자 마을이 형성되어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개척 당시에 들과 산에는 풀과 갈대가 무성하였다 하여 상푸실이라고 하였다.
- 동화원(東華院)· 동애원(東愛院)
새재 정상 계곡에 위치한 충북과 접경지역인 이곳은 1400년경 밀양박씨(朴氏)가 산전(山田)을 일구며 살았다. 높은 곳에서 동쪽에 해 뜨는 것이 보이고 산에 꽃이 피어 화려하다 하여 동애원으로 부르다가 동화원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한다. 이곳도 원(院)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하초리(下草里)>
- 푸실(草谷)· 하초(下草)
조선시대에 한양을 잇는 옛길은 새재를 넘게 되어 있었는데 문경읍에서 약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새재로 진입하는 첫 동네가 푸실이다. 고려말 공양왕때 이 마을에는 나무가 없고 풀만 무성한 계곡이 연결되어 있었다. 계곡의 제일 밑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푸실 ·아랫푸실 ·하초(下草)라 불려지게 되었다.
- 중푸실(中草谷)· 중초(中草)
하초에서 새재쪽으로 약 200m 위쪽에 위치한 동네로 중푸실이라고 불러오다가 현재는 중초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원리(馬院里)>
- 마판(馬板)· 마원(馬院)
마원은 마성면과 접하고 있는 문경읍 최남단의 리동(里洞)으로 문경읍 입구 도로변에 위치하여 고려초부터 한양을 잇는교통의 요지로서 항상 말을 많이 길러 두었다가 출장관리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라 하여 마원(馬院) 또는 마판(馬版)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오섯골(오싯골) ·오서골(烏棲谷)
백화산(白華山) 동쪽에 위치한 산골마을로서 새들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곳이며 특히 이곳에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오석골 또는 오서골이라 불리어 왔다.
- 우무실(井谷)
1600년경 의성김씨가 처음으로 개척한 마을로 봉명산(鳳鳴山) 뒷산 바위틈에 우물이 있는데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항상 솟아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큰 장마에도 물이 넘치지 않아서 우무실이라 하였다 한다.
<요성리(堯城里)>
- 돌빼기·요성(堯城)
주흘산 밑 아늑한 곳에 1500여년경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선비가 큰 바위에 있는 느티나무 밑을 중심으로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돌빼기라 불려지다가 후에 풍수지리설에 이곳이 길지(吉地)라 큰 인물이 많이 배출한다고 하니 이곳에 역(驛)을 설치하여 중인(中人)을 거주하게 하고 말을 사육하여 역지(驛地)로 만들게 되었다. 그후 민심이 순화되어 중국의 요순시대와 같다 하여 요성(堯城)이라 명명(命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요성(聊城)이라 불렀다.
- 한골(恨谷)·학골(鶴谷)
요성에서 갈평 쪽으로 약 1km쯤 가면 주흘산에서 뻗어진 산록에 한골이라는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씨라는 무명 청년이 술에 취하여 고개를 넘던 중 갑자기 아름다운 한 여자가 나타나 동행을 청하기로 장가 못간 노총각은 너무나 좋아서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 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한 밤중에 외출을 계속하므로 이를 안 남편은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100일 동안만 모르는 체 기다려 달라고 부인이 말하였다. 남편은 부인과 굳게 약속을 하고 지켜 오던 중 너무나 궁금해서 99일만에 부인의 뒤를 밟으니 부인은 어느 무덤 속에 들어가 영영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부인을 기다리던 정씨는 너무나 한이 맺힌체 죽게 되었으니 이곳을 한골 ·한곡이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이 부근은 공동묘지로 수많은 무덤이 산재되어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이곳 뒷산에 송림(松林)이 우거져 많은 학(鶴)들이 서식하였다 하여 학골로 불려져 오다가 음(音)이 변하여 한골로 된것이라고 한다.
<지곡리(地谷里)>
- 모싯(시)골· 지곡(地谷)
요성(堯城)에서 주흘산쪽으로 약 1Km정도 북상하면 주흘산 밑에 형성된 취락이 지곡인데 이곳은 1350년경(고려말) 박준봉이란 선비가 마을 어귀에 성황사(城隍寺)를 짓고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누구인지는 모르나 이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주흘산에 있던 큰바위가 마을에 굴러 내려와 말하기를 나를 주춧돌로 삼아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실 성황사를 짓고 주흘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큰 못을 만들어 못 밑의 전답에는 모시를 심고 이를 가꾸어 옷감을 만들면 부자 마을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여 모싯골,지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시작골(始谷)
이 마을은 동래정씨가 개척하여 집단촌을 이루고 있으며 주흘령봉(主屹靈峰)을 오르게 되는 첫 동네라고 하여 시작골(始谷)이라 불리게 되었다.
- 큰마(大村)
지곡은 여러 자연촌으로 산재되어 있는데 이 마을을 개척 당시에 성황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제일 큰 마을이라고 하여 큰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요리(古堯里)>
- 기성·괴성(傀城)·고요성·고성(古城)
1119년경 전주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중국의 요순시대 사람과 같은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고요성(古堯城) 또는 구성(古城)으로 불려지다가 후에 기성으로 변음되었다. 또 일설에 의하면 이 마을이 개척 당시에 괴목(槐木)이 울창하여 성(城)을 이룬 것 같다고 하여 괴성(槐城)이라고 불려지다가 이 음이 변하여 기성이라고 하였다 한다.
- 동우점(東隅店)
1500년경 경주김씨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 동쪽 운달산(雲達山) 기슭에서 옹기(동우)를 구워 이것을 팔기 위한 점방을 벌였다고 해서 동우점이라고 하였다 하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 마을은 문경읍 최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녘의 해가 제일 처음으로 뜨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도 해 본다.
- 강선(講先) ·광선(光先) ·광원(光院) ·광수원(光水院)
고요(古堯) 남서쪽 길옆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때 넓고 큰 서당(書堂)을 지어 학동(學童)을 가르쳤던 곳이라 하여 광원이라 하였다가 전주이씨가 1800년경에 글방을 차려 강론하였다 하여 강선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또한 갈평 ·평천쪽으로 흐르는 물이 이곳에서 합쳐져서 넓은 냇가를 이룬다고 해서 광수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팔령리(八靈里)>
- 바바리 팔령리·문촌(文村)·강촌(姜村)·파발리(把發里)
중국의 선비 "두잠"이 살았다는 파발리(把發里)와 지형(地形)이 비슷한 곳이라고 하여 바바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파팔리(巴八里)와 영산 주흘산에서 각각 팔(八)과 영(靈)을 따서 팔령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 세종 2년(1420)에 문여우(文汝雨)라는 선비가 해평(海平)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생활하면서 문촌(文村)이라 부르게 되었고 효종 8년경에는 강축문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하여 강촌(姜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요성역에서 충북과 연풍과 안보로 연락하는 파발꾼이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파발리라고도 한다.
- 득거리(得巨里) ·득평(得坪)
갈평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신북천과 팔령천이 합류하는 지역에 위치한 마을로서 조선초에는 황무지로 쓸모가 없던 이곳이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토사가 쌓이고 옥토로 변하여 큰들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득평이라고 부르다가 현재는 이곳을 득거리로 호칭하게 되었다.
- 영산골 ·영산곡(靈山谷)
고려 때 주흘산 기슭에 영지사(靈智寺)라는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영산골이라 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주흘산의 주봉이 마을의 뒷편에 우뚝 솟아 있어 영산이라는 이름과 상통하여 영산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비지재 · 비조령(飛鳥領)
이 준령은 영산골에서 평천리로 넘어가는 주흘산 중턱에 위치한 고개로 옛날에 비조룡(飛鳥領)이라고 하는 전설상의 새가 영산골에서 평천으로 넘어가려고 날랐으나 주흘 준령이 가로막혀 단숨에 넘지 못하고 정상에서 쉬어 넘었다고 하여 비조령이라 하였으며 1700년경에는 최완룡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이 재를 비지재라고 불러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당포리(唐浦里)>
- 고주골(高主谷) ·화지리(花枝里)
고려시대(고증은 되어 있지 않으나) 고주(高州) 부사(府使)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고주(줏)골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권수암 선생의 조카인 옥소(玉所) 선생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의 뒷산인 성주봉을 바라보니 마치 매화가 활짝 핀 것 같다 하여 고주골을 화지리로 개칭하였다 하나 현재는 화지리로 부르는 사람은 없고 고주골로 부르고 있다. 1920년 갈평(葛坪)으로 이전되기 전까지는 신북면(身北面)사무소가 이곳에 있었다.
- 숲마을
지금으로부터 100여년간 고주골에서 이주해 온 안동권씨들이 개척한 마을로서 마을 주위에 500년이상의 고목과 느티나무숲이 울창하다 하여 숲마을이라 불려졌으며 현재 당포리 중심마을로 발전되었다.
- 살무이 ·살뫼
당포에서 갈평으로 가다가 강 건너에 있는 산을 시루봉이라고 하는데 이 산 봉우리에 우뚝 솟은 3개의 바위를 옥삼(玉三)이라는 선비가 삼문(三門)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이곳에 있었던 고주(高洲(主)부사(府捨)가 갈뫼라 하였으므로 이후 이곳 사람들은 이 마을을 살뫼 또는 살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천리(平川里)>
- 벌내 ·평천(平川)
주흘산 동쪽 계곡에 위치한 6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전통적인 산간오지 마을로서 1300년경 한 보살 노파가 암자를 창건함으로써 마을을 형성되었고, 고려말부터 평산신씨들이 이주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개척되었다. 이곳은 평평한 내와 토지가 기름져서 벌내 또는 평천이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신라,고려시대에는 벌천부곡(伐川部曲)이 있던 곳이다.
- 중마을 ·중마 ·중말
팔령에서 4km지점에서 위치한 이 마을은 주위에 배나무골이 있고, 그 가운데 마을이 있다고 하여 중마을·중마 ·중말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배나무골 ·이곡(梨谷)
살뫼에서 평천으로 통과하는 주흘산 기슭 양쪽 4Km 골짜기에 자연생 배나무가 많아 오가는 사람들이 배를 따먹고 허기를 면했다고 하여 이 계곡을 배나무골 또는 이곡아라 불렀다고 한다.
-개그늘 ·개음동(蓋陰洞)
고려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주흘산 어류동에서 기거하면서 난의 평정을 바라 전좌문(殿座門)에 매일 거동할 때 시녀들이 일산을 받쳤는데 그 일산 그늘이 동네를 덮었다고 하여 개그늘 또는 개음동이라 하였다 한다.
- 달목이·달매기
1850년경 남양홍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마을 뒷산 목너머로 달이 진다고 하여 달목이 또는 달매기로 불렀다고 한다.
<용연리(龍淵里)>
- 용연리(龍淵里)· 용못
마을 뒤는 대미산 마을 앞은 운달산으로 둘러싸여 자연경관이 수려한 전통적 산간오지 마을로 1506년 손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연못에서 용이 승천한 마을이라고 하여 용연리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사람이 살기 이전에 천년 묵은 구렁이와 천년 묵은 지네가 서로 승천하기 위하여 보름동안 밤낮없이 싸운 끝에 구렁이가 이겨 용(龍)으로 변하여 승천하였다고 한다. 이때 싸움이 너무나 치열하여 그곳의 땅이 움푹 패어 지금의 용못이란 마을자리가 생겼다고 전한다.
- 골마
1930년경 차씨와 장씨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운달산을 넘어 동로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는 양지 바르고 아늑한 골짜기 마을이라고 하여 골마라고 불렀다 한다.
- 벌마
잡초만이 무성한 이곳을 1920년경 다른곳에서 이주해 온 손씨들이 개척하여 들 가운데 마을을 형성되었다고 하여 벌마라고 하였다.
- 샛마
운달산을 넘는 길섶에 위치한 이 마을은 1500년경 손씨가 개척한 마을로서 골마와 벌마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샛마라 칭했다고 한다.
<갈평리(葛坪里)>
- 갈불 ·갈벌(葛伐) ·갈평(葛坪)
문경읍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미산 능선에서 뻗어나온 나지막한 야산분지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전형적 농촌마을로서 전설에 의하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갈정승(葛政丞)이란 분이 넓은 벌판이 있는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갈정승의 들이라 하여 성(姓)과 들을 합하여 갈평이라 하였고, 당시 이곳에 칡덩굴이 꽉 엉켜 있는 것을 쳐서 없애고 논밭을 개간했다 하여 갈벌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한편 갈가리라 불려 오니 고사갈이(高思葛伊: 갓가리)와 비교된다.
- 갈산(葛山)
이곳은 나지막한 야산분지로 이루어진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며 옛날 갈정승이 소유했던 산이라 하여 갈산이라 부른다고 하며 일설에는 산에 칡이 많아 갈포(葛布)의 산지로 유명하다 하여 갈산(葛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웃갈벌
마을의 위치가 갈벌의 위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웃갈벌이라고 불려지며 반대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아랫갈벌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옛날부터 피난지로 유명하다.
<중평리(中坪里)>
- 중들 ·중평(中坪)
대미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산간마을로서 북으로는 충북 제원군과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동로면과 접경하고 있는 이곳은 1300년경에 단양장씨가 처음으로 개척할 당시 주위가 아늑하고 들이 마을 중앙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중들 또는 중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박마 ·박마을
1680년경 밀양박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한 이후 박씨가문의 3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하여 박씨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박마을 또는 박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여우목
문경읍과 동로면 경계에 운달산 준령인 재가 있어 그 모양이 여우목과 비슷하다 하여 여우목이라 불렀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사냥하는 사람들이 이곳이 여우가 많이 다니는 길목이라고 하여 여우목이라고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관음리(觀音里)>
- 가나문 ·관음(觀音)
북으로 충북과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신라시대 "가나문"이라는 보살이 이곳에 관음사라는 절을 짓고 나 후 수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이에 절을 세운 사람의 이름을따서 가나문 또는 절의 이름을 관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때는 이곳이 북쪽에서 남쪽 서울 계림(경주)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전략상 요충지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 문막(門幕)
경북과 충북의 접경지역에 삼국시대때부터 신라에서 고구려로 통행하는 문이 있어 낮에는 문을 개방하고 밤에는 문을 닫아 통행인의 왕래를 막았던 곳이라고 하여 문막이라 하였다 하며 이곳을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은 노씨라는 선비였다고 한다.
- 수셋골 ·수세골(水洗谷)
옛날 주흘산에서 내려오는 홍수로 산사태가 나서 이 마을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당시 황무지로 개척되지 못한 이 지역이 황토로 덮혀 기름진 옥토로 변하게 되었다. 이후 이 마을은 전답을 개간항 살기 좋은 곳이 되었고 물이 씻어준 고을이라고 하여 수세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중점(中店)
조선시대때 이 마을은 검은 옹기(黑陶)를 제조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곳이었는데 당시 이곳이 옹기의 집산지로서 옹기 점방이 많았다고 하여 중점이라 하였다. 지금도 이곳에 사기그릇과 검은 옹기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는 곳이다.
- 비바우 ·베바우 ·포암(布岩)
관음 뒷산은 암벽으로 되어 있어 이 바위에 흘러내리는 자연수로 바위가 희게 보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베를 펴 내건 것과 같이 보였으므로 이곳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비바우 ·베바우 ·포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황정모리(黃停)
1800년경 관산(冠山) 전씨(錢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황정(黃停)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하여 이 마을을 황정 또는 황정모라고 불렀으나, 현재 그때 정자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고 1950년경부터 이곳에 도자기공장이 세워져 일본으로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 마을 동편 골짜기 막바지, 대미산줄기에는 조선시대때의 쇠광산과 야금한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 꼭두바위(꼴두바우)
이 마을 뒷산에 있는 바우기 마치 꼭지처럼 생겼다 해서 이 바위를 꼭두바위라고 하였으며 이 마을도 바위 이름을 따서 꼭두바위 또는 꼴두바우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그후 1860년경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 지릎재 ·하늘재(大院領)
관음리에서 미륵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릎재 또는 하늘재라 하는데 삼국초기(三國初期)부터 조선초 새재(鳥嶺)길이 열릴때 까지 기호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가장 큰길이었다. 이 지릎재길을 따라 고대문화(유교 ·불교 ·청동기 · 철기문화)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고갯마루에는 동서로 뻗힌 성벽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요충지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註" 문막과 중점, 황정모리와 관련된 전설
어느 때인가는 확실치 않으나 충북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에 박씨 성을 가진 자가 부인과 아들, 딸이 함께 살았는데 박씨가 중병에 시달리자 아들이 문경방면으로 약을 구하러 갔으나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가 마중을 가게 되었다. 마중 나간 어머니도 귀가하지 않자 딸이 어머니와 오빠의 행방을 찾아 문경 방면으로 오던 중 문막에서 어머니의 시체를 확인하고 난 후 슬픔을 안고 오빠의 행적도 확인하기 위하여 중점마을까지 오게 되었으나, 딸도 기진맥진하여 오빠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원혼이 되고 말았다.
아들도 황정모리에서 약을 구하지 못한 채 죽었다고 한다. 그 후 홀로 병마에 시달리던 박씨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부처님께서 나타나시어 약의 처방을 내리시니 완쾌되었다고 한다. 완치된 박씨는 부인이 죽은 문막자리에 미륵불을 세워 평생동안 부인과 자녀에 대한 명복을 빌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속칭 "미륵데이"라고도 한다.
- 문경시청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