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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촌 1동~5동 마을 지명 유래
돈달산에서 내려다 본 점촌 시내 : 시청홈페이지에서
점촌1동 <밋발이 ∙ 진마을 ∙ 점마 ∙ 점촌(店村)>
1400년경부터 돈달산 기슭이 매의 발처럼 생겼다하여 "매발"이라고 부르다가 변음되어 밋발이로 불리어
졌으며, 또 한편으로는 산기슭에 길게 형성 된 마을이라고 하여 "긴마을" 또는 "진마을"로 불리어지다가
1829년경 옹기와 기와를 굽는 장인(匠人)들이 많이모여 옹기점·기와점이 생기고 또한 점방이 늘고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 "점마"라고 불렀으며 1906년 행정구역 개편때 점촌이라고 칭하게되었다.
[지명유래]
<밋발이 ∙ 진마을 ∙ 점마 ∙ 점촌(店村)>
정확한 연대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1400년경부터 지세와 산세 즉 돈달산 기슭이 마치 매의 발처럼 생겼다고
‘매발’이 변음되어 맷발로 또는 밋발, 다시 밋바리, 혹은 밋발이로 불리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산기슭에
길게 형성된 마을이라고‘긴마을’로 불리던 것이 변음되어 진마을이라고 불리다가 1829년경 옹기와 기와를
굽는 장인(匠人)들이 많이 모여 옹기점 기와점이 생기고 또 점방이 늘고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
점마’라고 불렀으며 1906년 행정구역 정리때 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편 ‘밋발이’이란 동명은 돈달산
기슭이 옛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 ‘미(묘)’가 많이 있는 발치라 해서 ‘밋발, 밋발이’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추측된다.
점촌2동 <제골, 기와골, 와곡(瓦谷)>
점마, 개와골이라 불려오던 동네가 1914년 지방관제 개편때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리로 되었고 그후 면세가
점차 확장되면서 1956년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승격되고 점촌리가 1~6리로 분리되었다. 1986년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되면서 점촌4~6리와 영신동을 합하여 시내의 중앙에 위치하고 점촌시의 중심부 역할을
한다고 하여 중앙동이라 행정명을 개칭하였다.
[지명유래]
<제골, 기와골, 와곡(瓦谷)>
지금의 여고 정문 앞마을이 바로 ‘기왓골’인데 이곳은 흙이 점토로서 기와 굽기에 알맞은 곳이라 조선
중엽부터 기와를 굽기 시작하여 1950년경까지 기와공장이 있었다. 따라서 기와를 굽는 골이라고 해서
와곡(瓦谷)이라 칭해 오다가 변음되어 제골이라 부르기도 하고 기왓골로 부르기도 해 왔다.
<영신동(永新洞)>
- 동칫마∙동치마∙하거리(下車里)
영신들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다. 1600년경 들 수로를 개설하기 위하여 수차(水車) 2개를 아래 위에 설치
하게 되니 한 개는 상거(上車)라 하였고 또 다른 한 개는 하거(下車)라 하여 상거(上車)에 해당되는 곳을
1里 .하거(下車) 해당하는 곳을 2里 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게 1里 ∙2里가 똑같이 수차(水車)를 동시에 설치하였다는 뜻으로 동치(同置)마라
부르다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침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는 하나‘동침’이란 침(沈), 즉 잠긴다는 뜻으로
혹 강물에 침수되었다는 뜻으로 '동침'이란 침(沈), 즉 감긴다는 뜻으로 동침(洞沈)마라고도 추리할 수 있다.
물을 퍼 올리는 동치(동치)가 있던 곳이라 동치마가 동침마로 변음되었다고도 한다.
- 한신마∙영신(永新)
현 영신동(現永新洞)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점촌(店村)에서 남동쪽으로 약 1㎞지점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1800년경 동리가 다소 번성해지자 동민들이 농악놀이 등 민속놀이를 즐기게 되었는데 10여명이 한
사람같이 신명나게 잘 놀았다고 하여‘한신마’라 불러 왔다고 한다. 1906년 세부측량(細部測量)에 의하여
행정구역정리로 영신(永新)이라고 개칭하였다. 또 다른 추리로서 ‘한신’이란 ‘한’은 크다는 뜻이고 ‘신’이란
새로 생겼다는 뜻으로‘새로 생긴 큰 마을 ’즉 ‘한신’이라고도 추상할 수 있다.
- 수통맥이
이 마을은 1600년경 영순면 포내리에 거주하던 황씨(黃氏) 한 분이 영신동 수로(水路)를 개설하기 위하여
수차(水車) 2대를 설치하고 도로 교량을 큰 돌로 쌓아 수통(水筒)을 놓았다고 하여 수통맥이라 불러왔다.
또 달리 수통맥이 아닌‘수통목’으로 해석하면 들이 넓기 때문에 ‘수통’을 설치함에 수통을 설치한 가장
윗자리인 즉 목 부분이란 뜻으로‘수통목’으로 불러오다가 목이 맥으로 변음하여 수통맥이라고 해석된다.
<윤직동(允直洞)>
원래는 함창현 북면에 속한 마을인데, 도분고시(道分告示) 2호로 당교(唐橋), 쌍화(雙花), 두산(頭山 )의 각
리가 상주군 함창면 윤직리가 되었고, 1989. 1. 1자로 하신기 마을을 포함한 일부가 구점촌시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 뙤따리(唐橋里, 允直 2里)
시계에서 철로위 육교를 지나 첫번째 마을인데 한말까지 주막(酒幕)거리를 이루어 상주, 문경, 용궁방면으로
가는 갈림길 목으로 도부상, 소장사 등의 왕래가 많아 흥청거렸다고 한다(옛적에 唐橋院이 있었다 한다).
지금의 마을은 그 후 새집들이 들어서서 이룩 되었다.
- 당교리의 전설
당교(唐橋)는 모전동과 윤직리의 경계를 이루는 모전천에 놓여 있는 다리의 이름인데 이 일대를 뙤따리라
불렀다. 삼국유사 기이편 제29 태종대왕조(三國遺事紀異編第 29 太宗大王條)에 보면 “또 신라의 옛 전기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를 치고서 또 신라를 치려는 속셈으로 머무르고 있으므로
이에 김유신이 그 꾀를 알고 당병을 대접하면서 짐주(짐주)를 먹여 죽게 하여 쓸어 묻었으니 지금의 상주
경계에 있는 당교가 바로그 곳이라 한다.”라 하였고 다른 전설에 이르기를 “고종때 신라 태종왕 7년에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이 곳에 병사를 주둔시킨 까닭으로 이름하였다”라고 전한다.
(原文) 又新羅古傳云定方旣討麗薺二國又新謀羅而留連於是庾信知其謀饗唐兵之
皆死坑之今尙州界唐橋是其坑地
一云高宗時新羅太宗王七年唐將蘇定方餠兵於比故名之云 (자료 : 문경지방의 산성 p31외)
- 임진왜란과 당교
당교의 위치는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와 서울로 향하는 분기점(分岐點)에 해당하여 그 중요성은 예나 지금
이나 같다 하겠다.
“임진년(1592) 4월 27일에 왜적의 일대인 모리휘원(毛利輝元)군이 하풍진(河豊津:지금의 영순면 이목리)을
건너 당교에다 진을 치고, 영남좌우도와 기호(畿湖)간의 왕래를차단하고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므로 우리
측에서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당교의 적이 얼마나 난공불락이었는지 그 해
12월에 경상좌병사 한효순(韓孝純)이 올린 장계(狀啓)에, “당교의 적은 좌우도의 인후(咽喉:목구멍)가 되는
곳에 있어 그 세력이 창성하니 무엇보다도 이 적을 치기로 목표를 세워 수개월이 가까웠으나 적이 편리한
지점에 점거하여 있고, 중간에 큰 내가 가로막혀 장수등이 어렵게 여기어…”라 하였다. 그 후에도 쉽사리
탈환하지 못하다가, 상주전투에서 적을 크게 파하고 상주성을 화공법(火攻法)으로 수복한 바 있는 상주판관
(尙州判官) 정기룡(鄭起龍)장군이 원병요청을 받고 상주에서 당교에 급진하여 일전으로 적을 크게 파하고
적진을 소탕하니 적군이 상주부근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자료 : 선조중흥지 권3 매헌실기, 문경지역의 산성에서)
- 하신기(下新基)
현 문경시의회가 있는 주령과 남쪽으로 연접한 산의 기슭에 있는 마을로 1914년에 상주군 함창읍
해곡리에서 모전동으로 편입되었다.
- 왜진고개(倭陣峙)
하신기 마을 북쪽의 고개는 옛적에 큰 길인데 임란(壬亂)때 왜적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여 이름하였다.
- 택거리 바위
하신기 마을 뒷산 동쪽 기슭에 큰 바위가 있다. 옛적에 장사꾼이나 나무꾼이 이 곳에서 쉬면서 턱걸이를
하였다 하여 이름 하였다.
- 용지(龍池) 마을
하신기 마을에서 남쪽으로 600m 지점에 야산이 돌기(突起)해 있고 기슭에 5~6호 되는 마을이 있다.
(중앙동 소속) 옛적에 영강(潁江)이 범람하여 물길이 들 서쪽으로 나서 산 아래에 상 ∙ 하의 두 큰 소(沼)가
있어서 용담(龍潭)이라 불렀다. 산 위에 기우단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옛날에 두 마리의 용이 있었는데
소에서 나와 서로 다투다가 한마리가 죽음에 이 곳에 묻어 용무덤이라 불렀다]
(原文)
左郡北五里孤山臨野起岩下有上下燈潭深不可測俗傳昔有二龍自潭中相鬪
其一死因理于比號龍檀上有祈雨壇 (자료 : 咸昌郡邑誌)
- 원윤직이(元 允直)
뙤따리 마을에서 동쪽으로 500m거리에 있는 마을로 한말까지 함창군 북면 소재지였다.
(함창읍 소속)
- 쌍화리(雙花里), 사아매(四岩)
이조 중엽에 이 마을에 형제가 살았는데, 형제가 함께 대과에 급제하여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금의환향
하였다 하여 쌍화리라 부른다. (함창읍 소속) 이 마을에 원래 4개의 바위가 있었다.(사아매의 유래) 일제때
두개는 길을 닦을 때 없어지고 나머지 중 한 개는 옛부터 동신(洞神)으로 모시고 있다. 크기는 높이 2m,
둘레가 7m정도이며 항시 솔가지로 덮여 있어 바위의 참모습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매년 정월 13일에 새 솔가지를 묵은 솔가지 위에 덧씌우고 이튿날 동제사를 올린다.
동신 바위가 햇빛이나 달빛에 노출되면 마을 부인들한테 좋지 않다는 전설이 있다.
- 두산, 머리뫼(頭山)
원 윤직 마을 남쪽 600m에 있는 마을이며(함창읍 소속), 호연정(浩然亭:진사 申?가 세움)이 있고, 고인돌
(남방식)과 선돌(立石)이 있으며, 서쪽 마을 600m 야산의 능선에는 북방식 고인돌이 있다.
점촌3동 <흥덕골(興德谷) ∙ 원 흥덕(元 興德) ∙ 본 흥덕(本 興德) >
1914년 지방관제 개편때 호남 (戶南).호서(戶西) 양면이 호서남면으로 개편되면서 점촌, 흥덕. 모전. 우지.
창리. 신기. 유곡. 불정. 공평. 10개 법정리가 있었고 그후 면세가 점점 확장 발전되면서 1956년에 호서남
면이 점촌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 1월1일자 법률제 3698호로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되면서 흥덕.
우지 창리 3개리를 병합 흥덕리를 중심으로 새 흥덕이란 뜻으로 신흥동으로 이름붙였다
[지명유래]
<흥덕동(興德洞)>
- 흥덕골(興德谷) ∙ 원 흥덕(元 興德) ∙ 본 흥덕(本 興德)
흥덕동에서 가장 먼저 거주하게 된 마을이란 뜻이다. 15세기경 경주 김씨(慶州金氏)와 정선 전시(旌善全氏)가
거의 동시대에 입주하여 집성촌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혼성의 거주촌으로 변모했다.
- 갈밭마(葛田村) ∙ 운천(云川)
옛날에 영강 물이 굽이쳐 흘렀던 강가의 마을로 원래는 갈대가 우거졌다고 하여 갈밭마운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개촌(開村)은 경주 정씨(慶州金氏)라 한다.
- 깃골∙귀골(貴谷∙龜谷)
고려 때 상산김씨(商山金氏) 문중이 이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기 때문에 깃골 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예골(禮洞) ∙ 이골(李谷) ∙ 예동(芮洞)
고려 때는 상산김씨(商山金氏)의 터전으로 번성을 누렸으나 상주로 집단 이주후, 연안 이씨(然安李氏)가
살았기 때문에 이골(李谷)이라 불렀으나 예의를 숭상하는 마을이라고 예동(禮洞)이라 호칭하고 있다.
일설에는 고려조 때 영순현(永順縣) 소재지가 이 곳에 있었다 하여 옛 고을- 옛골 ∙ 예골로 불리었다 한다.
- 새동네 ∙ 신동(新洞)
호서남초등학교로부터 점촌동 쪽으로 일제말경부터 서서히 구성된 부락이었으나 지금은 도시풍의 상가
거주지 지역으로 변모했다.
- 신흥동(新興洞)
’88년에 토지개발공사가 택지조성을 한 문경중학교 남쪽의 거주지를 일컫는 동명이다.
<우지동(牛池洞>
- 소못골 ∙ 소지 ∙ 우지(牛池)
1600여년경 평산신씨(平山申氏)가 흥덕(興德) 예동(芮洞)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할 때 주위의 산이나 못
(池)이 마치 소와 같은 모양을 한 형상이라고 하여‘ 소지’라고 불러오다가‘지(池)’를‘못’으로 고쳐‘소못골’이라
고 부르다가 다시 1906년 행정구역 정리 때에 우지(牛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못이 있으나 그 모양이
많이 변하여 ‘소’모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편 소못골리를 돈달산이 둘러싸고 동리의 앞산 일대는
풍수설에 와우혈(臥牛穴)이라고 전해 오고 있어 바로 마을 남쪽 산 갈라진 곳이 ‘소목’이란 뜻의 ‘소목골’
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도 추리할 수 있다. 못이 소 모양이기에‘소못골’, 산이 소의 목과 같다고
‘소목골’이라는 이름은 모두 형상에 의해서 동명이 지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다르쟁이
소못골의 동쪽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이며 뒷산에 다래덩굴이 우거져 가을이 되면 달고 있는 다래를 얼마든지
따 먹을 수 있다고 하여 다래쟁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다래덩굴을 찾아볼 수 없다.
- 도릿마
소못골에서 서쪽으로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산모퉁이에 돌아앉았다는 뜻으로 도릿마
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시 척박한 토질이었으나 지금은 과수원 특작등으로 개간하여 살기 좋은 마을로 발전
되고 있다.
- 거릿마
소못골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점촌에서 창리(創里)로 가는 길거리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서‘거리’즉 길거리에
위치하고 동네 입구란 뜻에서 거리마, 거릿마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에 마을회관이 세워지고 점점
발전됨에 따라 우지리 중심 마을의 구실을 하고 있다.
- 양지마 ∙ 양지동(陽地洞)
거릿마에서 북서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며 아침에 해가 떠서 하루 종일 햇빛이 비치는 양지
바른 마을이라고 하여 양지마 또는 양지동(陽地洞)이라 불려진다.
- 큰마 ∙ 음지마 ∙ 음지동(陰地洞)
양지동의 맞은편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며 1600年경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사도(申思道)란 분이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한다. 이 마을이 본래 우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중심이 되는 마을이란 뜻에서
큰마라 부르기도 하고 응달진 동리라고 음지마 또는 음지동(陰地洞)이라고도 부른다.
- 소곡(掃谷) ∙ 씨실골
거릿마에서 골짜기를 따라 약 1㎞들어가면 2가구가 살고 있다. 큰 재사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재사이고
2가구는 그 재사를 관리하는 집들이다.
<창동(創洞)>
조선시대에 호현창고가 있었다고 호창마라 불러오다가 1914년 3월 1일 호서면과 호남면이 통합 호서남면이
되면서 창리라 불러오다가 1986년 1월 1일자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신흥동에 속해 창동이라 하게
되었다. 마을유래는 1480년경 이 마을을 개척한 신계종이란 사람의 호를 따서 송연마을, 송평이라고도 하는
데 송평마을은 지금의 송평들에 있었다고 하며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대홍수로 마을이 쓸리고 영강물줄기를
이루 다 한다. 또 송평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솔밭이 있고 들이 넓어 송평이라 하다가 지금은 장평들로 부르고 있다.
- 새동네(新洞) ∙ 아랫창리
창동 아래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인데 동리가 발전하여 새로 생긴 동네라고 새동네 또는 아래 창리라 부르고 있다.
- 창마 ∙ 창리 ∙ 호창리(戶創里)
창동은 들 가운데 있는 동네로 웃마, 중간마, 새동네, 윳고개, 뒷들 이렇게 산재해 있는데 원 웃마, 웃 창리가
먼저 개척된 마을이고 그 후 마을이 번성하니 농사짓기 편리하게 중간마(중창리)가 생기고 그후 중간마에서
약 1㎞떨어져 새로 생긴 동네라 새동네라 하였고 윳고개는 창동과 신기동을 잇는 고개밑에 위치한 동네로
마을 윗쪽에 있다고 웃 고개∙윳고개로 불리어 오고 있다. 뒷들은 마을 뒷편들 산밑에 있는 동네라 뒷마,
뒷동네라 부르고 있다. 창동은 신당보로 유명한데 지금으로부터 400년전에 신계종이 축조하였다.(宋淵集)
- 송연동(宋淵洞)
중간창리와 우로보(洑)의 사이에 있던 마을로 1500년경부터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살아오다가 1800년대
중반에 수해로 마을을 옮겼다.
점촌4동 <틀모산 ∙ 기제동(機堤洞), 꽃밭모리 ∙ 화전동(花田洞), 새터 ∙ 신기>
점촌4동은 문경시 동지역 면적의 64.3%로 관할구역이 방대하여 축산ㆍ과수농업이 발달하였고, 문경 발전의
원동력인 신기 공단이 위치하고 있고, 중부내륙고속도로 및 3번 국도의 통과로 교통이 편리하며 청소년
수련관, 자연휴양림, 산악자전거 도로, 문경관광 사격장등 휴양 시설이 집중되어 있어 관광휴양의 고장
문경의 중심 선에 있으며 문경운전면허시험장의 유치로 지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명유래]
<신기동(新機洞)>
새터라 불려오던 마을이 1914년 4월 1일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새터(新機)와 틀모산(機堤)을 합하여 신기의
신(新)과 기제의 기(機)를 따서 문경군 호서남면 신기리로 호칭했고, 문경군에서 분리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
면서 호계면 별암2리(舟坪)를 합쳐 신기동으로서 유곡, 불정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가 1999년 문경시
신평동에 편입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공업지역으로써 쌍용 양회 공업(주)문경공장, 쌍용 정공등이 가동
되고 있고 46,000평의 공업단지가 새로 조성되었으며 앞으로 경상북도 상설 자동차 면허시험장이 들어서면
지역발전에 더욱더 박차를 가할 것으로 기대 되고 있다. 북쪽을 흐르는 영강을 경계로 호계면과 접하면서
비옥한 주평들이 펼쳐 있고 동서로 문경, 가은선 산업철도가 관통한다. 특히 신기초등학교, 우체국, 점촌농협
지소, 경찰관파출소, 주평역등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 틀모산 ∙ 기제동(機堤洞)
조선 선조(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을 당하여 江? 金氏 가 이곳에 이주하여 개척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 이곳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절 이름이 기제사(機堤寺) 또는 ‘틀모사’라고 하여
그 절 이름을 따서 동명을 ‘틀모산’혹은 기제동(機堤洞)이라 불러온다.
- 꽃밭모리 ∙ 화전동(花田洞)
온 산천에 봄이면 철쭉꽃이 만발하여 마치 온 산이 큰 꽃봉오리처럼 보였으며 1892년경에는 마을에 목화를
심어 목화꽃이 활짝 피어 앞 뒷 뜰이 온통 꽃밭이 되었으며 가을에는 목화송이가 또 한번 활짝 피어 꽃밭을
이루게 되니 사철 온통 꽃밭마을 같다고 하여 산모롱이의 모롱을 붙여 ‘꽃밭몰이’또는 화전동(花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 ∙ 신기(新機∙新基)
1893년에 유곡(谷)에 거주하던 평산신씨(平山新氏)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동네를 이루고 새 터전을
개설하였다는 뜻으로‘새터’라고 불리어졌으며 1906年 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신기(新機)라고 고쳐 불리게
되었다. 지명과 우연한 일치인지 1950년대에 정말 새로운 현대식 양회공장이 서게 되어 마을은 물론
우리고장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뒷골∙후곡(後谷)
새터가 점점 번성하여 가구수가 늘어나게 되자 새터 사람들이 幽谷里로 넘어가는 산골쪽 뒷골에 새로
한집 두집 집을 짓고 마을이 형성됨에 이 마을을 뒷골 또는 谷이라 칭하게 되었다.
- 뱃들(堤坪)
지형이 마치 큰 배(舟)처럼 생겼다 하여 뱃들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호계면 별암2리였던 것
이 1986년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되면서 신기동에 편입 되었다. 1945년 이전에는 뱃들(舟)에 불과 4~5
가구가 살았는데 1954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기간산업체(國家基幹産業體)인 시멘트공장(工場)이 건설되면
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공장부지가 일부는 점촌읍 신기리요, 일부는 호계면 별암리로 양읍면(雨邑面)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1955년에 문경탄전(聞慶炭田)에서 생산되는 석탄(石炭)과 신기에서 생산되는 양회를
수송하기 위해 산업철도인 문경선(聞慶線) 철도가 부설되고 주평역(舟坪驛)이 생겼으며 5일시장이 개설
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당시로서는 호계면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 비행장(飛行場)
대한양회공장(大韓洋灰工場) (현 쌍용양회) 서북편 평탄한 잔솔밭에 비행장(飛行場)이 생겼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 전설(傳設)(1)
뱃들의 지형이 흡사 큰 돛을 단 배와 같아 우물(샘)을 파면 마치 배(舟)에 구멍을 뚫은 것과 같다 하여 샘을
파지 않았는데 주평시장의 인구가 급증하여 식수를 해결코자 당시 호계면에서 굴정(堀井)공사를 시작하였으
나 몇 군데를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고생을 했다고 한다. 외형상 보기에는 영강 가까이라 어디서든 물이
나올 것 같으나 주평시장 안에 지금의 공동샘에서 겨우 물이 조금 나오긴 하나 물맛이 영강물만도
못하다고 한다.
- 전설(傳設)(2)-뱃들의 백마계주(白馬鷄舟)
신기동 일원인 뱃들(舟坪)에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의 천하명당(天下名堂)인 백마계주혈(白馬繫舟穴)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믿는 수많은 지사(地師)들이 이곳의 명당(名堂)을 찾아오고 수많은 시체(屍體)들이 이곳
에 묻혔다가 옮겨간 곳이다. 백마계주혈(白馬鷄舟穴)이란 흰빛 말(馬)을 배(舟)에 매어 놓은 형(形)이란 뜻으로
이 혈(穴)에 묘를 쓰면 자손중에 삼갈팔신[三葛八信 :중국 삼국시대의 위대한 전력가였던 제갈양(諸葛亮)
같은 사람 셋과 상승장군(常勝將軍) 한신(韓信)같은 사람 여덟사람]이 난다고 하는 명당(名堂)이라 한다.
일설에는 백마계주(白馬繼走 :흰 말이 계속 달린다)라고도 하는데 문경선(聞慶線) 철도(鐵道)가 생겨 기차
(汽車 : 鐵馬)가 달리게 되어 철마계주(鐵馬繼走)가 되었다고도 말한다.
<대성동(大成洞)>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관할내에 대성탄좌 문경광업소가 있어서 대성동이라 명명하였으며,
신기동, 불정동, 유곡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였다가 1999년 신평동이 신설되면서 폐지되었다.
- 유곡동(幽谷洞)
(1) 유곡(幽谷)
고려시대부터 유곡역(幽谷驛)을 개설하여 찰방(察訪)이 배치되었는데 이 유곡찰방(幽谷察訪)이 18개 속역을
관장한 큰 역촌(驛村)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지역이 넓고 골이 깊숙하여 그윽한 골이라고 해서 유곡
(幽谷)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역(驛)이 생기고 인구가 늘고 생활이 넉넉해지자 도둑이 자주 들어 왔다고 하여
마을을 수호하는 뜻에서 수호신단(守護神壇)을 설단하고 제사 지낸 후에는 이 수호신의 보호로 한번 들어온
도둑은 밤새도록 헤매어도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하여 유령(幽靈)의 영험을 나타내는 뜻으로
유곡이란 동명이 지어졌다고도 한다.
(2) 한적골 ∙ 한절골 ∙ 대사동(大寺洞)
유곡의 남동쪽으로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넘으면 자그마한 동네가 있는데 바로 ‘한적골’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큰절이 있었다고 하여 한절골(大寺洞) ‘한’은 크다는 뜻으로 큰 절골이란 뜻이다.
그후 점점 변음되어 ‘한적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나 지금은 그때의 절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옛날의 약수터인 장군수(將軍水)의 맑은 샘물만은 지금도 남아 있어 동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 장군수(將軍水)샘물도 뭔가 유래가 있음직 하나 고증할 도리가 없어 아쉽다. 한편 ‘한적골’이란 동명도 또
다른 추상적 고증으로 ‘한적’이란 우리나라 말의 뜻으로 보면 한가롭고 조용하고 편안하다는 것으로 통한다.
따라서 한적골이란 조용한 곳이란 뜻에서 지어진 마을 이름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3) 마본(馬本)
유곡리 서쪽에 위치하여 고려초부터 영남(嶺南)과 한양(漢陽)을 잇는 역촌(驛村)의 본거지로서 영남지방 1
8개 역을 관장하던 찰방(察訪)이 역마(驛馬)를 사육하고 관리하던 곳이라고 하여 마본(馬本,)이 한다.
(4) 새마을 ∙ 신리(新里)
유곡리 동쪽에 새로 형성된 부락으로 옛역촌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사람이 많이 모여 살게 되자 이곳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어 새로 되었다는 뜻으로 새마을 혹은 신촌, 신리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5) 아골 ∙ 앗골 ∙ 아동(衙洞)
주막마을에서 서쪽으로 깊숙한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서 유곡역 찰방이 집무하던 관아(官衙)가 있었으며
아전(衙前)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처음에는 아동(衙洞)이라 불러오다가 아골 ∙ 앗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 주막(酒幕)
유곡 역촌이 번성해짐에 따라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는 요로(要路)가 되어 오가는 통행인이 많아지게 되므로
한길 주변에 주막이 생기게 되어 길손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휴식처가 되었다고 하여 주막 ∙ 주막걸
(주막거리)로 칭하게 되었다.
- 불정동(佛井洞)
(1) 부처샘 ∙ 불정(佛井)
1650년경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이곳에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운암사(雲岩寺)가 있는 절골의 부처샘
에서 맑고 깨끗한 물이 이 마을로 흐른다고 하여 부처샘이라고 불러오다가 행정구역 확정때 한자로
불정(佛井)이라 동명을 개칭하게 되었다.
(2) 굴모 ∙ 굴모랭이 ∙ 원골 ∙ 원곡(院谷)
이곳은 석회암(石灰岩)으로 된 동굴이 많아 굴모랭이로 부르다가 차츰 변음(變音)되어 굴모리(굴 모롱이)로
또는 굴모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때 원(院)이 있어 길손들의 숙박시설로 이용되었다고 하여 일명‘원골’ 또는
원곡(院谷)이라 칭한다. 한때 대성광업소가 있어 탄굴이 더욱 많이 생겨 옛 굴모랭이(굴모리)라는 지명과
더욱 일치하게 되었다.
(3) 새터마 ∙ 신동(新洞)
불정리에 석탄광산이 개발되자 외지에서 광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산골짜기 오막살이 주택이 지어지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새터마’∙‘신동(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4) 수통배기
불정역의 남동쪽으로 약 2㎞지점에 위치한 운암사(雲岩寺) 부처샘에서 흐르는 물을 여기서 조절하였다 하여
수통배기라 일컬어 왔는데 1930년경에 시멘트관(管)으로 수로(水路)를 보수하였다.
(5) 쟁마 ∙ 재궁마 ∙ 장촌(長村)
불정의 동편에 형성된 자그마한 부락인 바 마을의 모양이 길쭉하게 생겼다고 하여 장마∙쟁마∙재궁마라고
부르다가 장촌(長村)이라고도 불러 왔다. ‘재궁마’라는 뜻으로 보아‘재궁’∙‘재사’가 있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6) 동막골(東幕谷)
석탄광산이 개발됨에 따라 장촌(長村)의 동편(東便)으로 막사(幕舍)가 세워지고 광부들이 거주하게 되어
이 마을을 동막곡(東幕谷) 또는 동막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7) 양달마 ∙ 양지촌(陽地村)
음달마의 맞은 편에 위치하며 운암사(雲岩寺)로 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하며 해가 떠서 하루 종일 양달이란 뜻으로 양달마 또는 양지촌(陽地村)이라 불러 왔다.
(8) 음달마 ∙ 음지촌(陰地村)
양지촌의 맞은편 음달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전주이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해가 떠서 한나절이 되어서야
햇빛을 볼 수 있는 음지(陰地)에 있다고 하여 음지마 또는 음지촌(陰地村)이라 부른다고 한다.
<공평동(孔坪洞)>
점촌읍 공평리(1~4)가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모전동에 소속되었다가 1999년 신평동이
신설되면서 신평동에 편입되어 신평동 동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 배실 ∙ 이곡(梨谷)
임촌(林村)에서 북쪽으로 약 1.5㎞지점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로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지형이 배(舟)와
같이 생겼다고 배실(行舟形) 또는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뜻으로 배실(梨谷)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그때의 배나무는 한그루도 찾아볼 수 없고, 앞산모양이 배와 흡사함은 사실이다.
- 미리실 ∙ 구엉마 ∙ 꿩마 ∙ 진곡(辰谷)
임촌에서 서쪽으로 약 2㎞지점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지형이 꿩이 엎드려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호계면(虎溪面)의 견탄(犬灘)과 영순면(永順面)의 포내(浦內포수)가 있어
개와 총(犬∙ 銃)이 두려워 꿩이 날지 못하고 기어 다녔다 하여 구엉마라고 불러오다가 후에 꿩마로 불렀다
한다. 그러나 마을 이름이 [구엉마]라고 함은 바위에 구멍(굴)이 있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공암(孔岩)이라 불린
것이 정설이다. 공평(孔坪)이란 이름이 구엉마에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孔岩里 로도 불렀으며 孔坪의
유래도 여기에 있다. 진곡(辰谷)을 미리실이라 하며 미리는 옛 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보통원(普桶院)이 있었다.
- 임촌(林村)
1660년경에 평택인(平澤人) 임시익(林時益)이 충주(忠州) 단월에서 이주하여 개동하고 林氏 들만의 집성촌이
라 하여 林氏이라 불려지고 있다.
- 잡살모리 ∙ 작살모리 ∙ 작사동(作沙洞)
임촌의 맞은편 3번국도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촌에서 거주하던 임씨(林氏) 일부가 모래와 돌무지가 많은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모래와 돌무지의 땅을 일구었다 하여 작사(作沙)동이라 칭하다가 산모퉁이
에 위치하였다는 것으로 좀더 세분하여 ‘작사모리’, ‘작살모리’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그때의 모래더미
가 마을 뒤에 남아 있다. 마을 앞에 신평동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 장승백이 ∙ 장승리(將丞里)
배실에서 북서쪽으로 약 1㎞지점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이며 1592년 임진왜란때 전사한 將軍의 비석(碑石)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고 하여 장승백이 또는 장승리(將丞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의 장군이
누구인지, 참고할 도리가 없다. 비석도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또한 옛날 이정표인 장승이 서 있던
마을이라 장승백이라 한다고 한다. 1999년에 지명에 걸맞게 마을 앞에 장승을 깎아 세워 오가는 길손을
반기고 있다.
- 표석골(表石谷)
공평리(孔坪里)에서 가장 큰 마을로 상주군 사벌면(商州郡沙伐面)에서 이주한 평해황씨(平海黃氏)가 처음
으로 개척하였다고 하며, 신라 때 김유신(金庾信)장군이 함창과 점촌사이에 있는 뙤다리(唐橋)에서
당군(唐軍)을 물리치고 이곳에 전승비(戰勝碑)인 표석을 세웠다고 하여 표석골(表石谷)이라 칭하여 왔으나
그때의 표석(表石)을 찾아볼 수 없다.
점촌5동 <음지마 ∙ 음촌(陰村), 조개실 ∙ 합촌(蛤村), 상신기(上新基) >
1579년경 경주 이씨가 처음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이곳이 황무지로서 띠풀이 무성해졌다 하여
띠밭이라고 불러오다가 조선시대 지방관제 개편때 호서면 모전리가 호서남면 모전리로 개편되었으며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공평리를 합쳐 모전동으로 행정동의 명칭을 붙이게 되었으나
1999년 1. 1 공평동이 신평동으로 분리되었다.
[지명유래]
- 대보탈 ∙ 대보평(大洑坪)
현 모전리 앞 시민운동장 입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며 옛날 이곳에 큰 보(洑)를 막아 반쟁이 들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었다고 대보평(大洑坪) ∙ 대봇들이라고 칭하여 오다가 언젠가도 모르게 대봇들이 대보탈로
불리게 되었다.(지금의 시 체육관 앞 동네)
- 띠밭 ∙ 모전(茅田)
옛날 이곳에 띠가 무성하고 지형이 평탄하여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이주하여 개척한 후 띠밭이라고
불려지다가 행정구역 획정때 모전(茅田)으로 한자 동명을 붙이게 되었다.
- 양지말 ∙ 양촌(陽村)
모전동리 양지쪽에 남향으로 위치하여 해돋이가 빠르고 햇빛이 잘 비치는 마을이라고 양지말 또는
양촌(陽村 )이라고 불렀으며 경주이씨가 이룩한 마을이다.
- 음지마 ∙ 음촌(陰村)
모전동 동쪽에 서북향으로 위치하여 양지마을 맞은편에 있어 그늘이 많이 진다는 뜻으로 ‘음지마’라 불렀다.
- 조개실 ∙ 합촌(蛤村)
음지마 동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며 옛날에 동네 앞에 작은 연못이 있어 이 못에 ‘조개’가 많았다고
‘조개실’이라고 불렀다고도 하고 마을 모양이 흡사 조개모양을 했다고 조개실(蛤村) 또는
‘조개마’로 부르기도 했다. 혹은 조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여 조가실(趙家室)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리할 수도 있다. 지금은 마을이 더욱 번성하여 모전이란 큰 동네로 발전하였다.
- 상신기(上新基)
1900년 이전에는 울창한 산림지역이었으나 인구가 늘고 지역이 발전함에 따라 산림지역을 택지로
개발하여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으며 그 위치가 지역적으로 윗땀에 있다 하여 상신기(上新基)라고 칭하였다.
(지금의 연초조합이 있는 부근)
- 중신기(中新基)
상신기에서 남동쪽으로 약 1㎞지점에 위치하여 1900년경까지는 마을이 없는 산림지역이었으나 점점
발전하여 마을이 형성되고 옹기와 기와를 굽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상신기와 하신기의 중간지점이라
하여 중신기라고 칭한다.(지금의 문경시의회 앞 일대)
- 기왓골
지금의 문경여고, 동산여고 정문앞에 위치한 동네로서 기왓굴이 있고 기와를 만들어 낸 동네라고‘
기왓골’이라고 불렀다.
- 문경시청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