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가도리(加道里)>
- 갓질∙가도(加道)
본래 상주군 산서면의 지역으로 고종 32년(1895)에 문경군으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호계면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경주사람 김광석(金光錫)이란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앞산을 가산이라 하였고 그 산밑에 길이 있어서 산가에 있는 길이라 하여 갓질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가도(加道)라고 부르고 있다.
- 금사(金沙)
가도 동쪽 금사령 밑에 있는 마을인데 모래가 금빛이 난다 하여 금사(金沙)라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부곡(富谷),상선(上仙)서 시작하여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 바닥에는 모래가 보이지 않고 있다.
- 승마∙싱마∙승곡(僧谷)
돌고래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1783년경 가도 앞산 밑에 절을 창건하였다가 1883년경에 폐사가 되었는데 창건 당시에 이 절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이라고 하여 승마∙승곡이라 불렀다 한다.
<견탄리(犬灘里)>
- 가탄(佳灘)∙개열
임진왜란 이전에 정희우(鄭希虞)라는 선비가 경기도 용인군에서 이곳으로 낙향하여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여 가탄(佳灘)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태봉리를 병합하여 견탄리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 냇가에 깊은 웅덩이가 있어 개들이 자주 가서 헤엄치며 놀았다 하여 견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태봉(台峯)
오정산 줄기인 태봉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광해군 원년(1609)에 어느 왕자의 태(胎)를 이 마을 뒷산 봉우리에 묻었다 하여 태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상주군 함창면 태봉리로 옮겨 묻었다 한다.
- 용암(龍岩)∙사택(社宅)
태봉리 밖 0.5㎞지점에 있는 마을로서 용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용암이라 부르다가 1947년 문경광업주식회사 사택을 세우면서부터 이 마을을 사택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산리(龜山里)>
- 귀미∙구미∙구산리
마을 뒷산의 능선 모양이 거북이 꼬리처럼 생겼고 그 꼬리의 방향이 마을의 중앙을 향하였다 해서 귀미∙구미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구상리와 귀산리를 병합하여 구산리라 개칭하였다.
- 동달미기∙동달목(東月目)
구산리에서 볼때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뒷산의 모양이 둥근 달이 뜨는 것 같으며 둥근 산에는 소나무로 둘러쌓인 작은 옹달샘이 있다. 정월 대보름날 동쪽에서 보름달이 뜰 무렵 동쪽을 향하여 자기의 소원을 빌면 달님께서 그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는 전설에서 이 마을의 이름을 동달목 또는 동월목(東月目)이라 하였다 한다.
- 자실
이 마을은 1903년경 인근 봉서리에서 예천임씨가 이주하여 개척하였는데 개척 당시에 잣나무가 무성하여 잣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 잣으로 잣죽을 끓여 먹으면서 생활한 동네라 하여 자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사등마(蛇登里)∙사등리
본동에서 남동쪽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원래 본동 아래쪽에 위치한 아랫구미 사람들이1913년 큰 홍수를 만나 이곳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마을 뒷산의 능선 모양이 뱀의 등처럼 생겼고 마치 뱀이 위쪽으로 기어 올라가는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이 마을을 사등마라 부르게 되었다.
- 주막걸
사등마 서쪽 길가에 위치한 마을로서 옛날 점촌에서 달고개 넘어 김룡사로 가는 통로로서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주막걸이라 하였다.
<막곡리(幕谷里)>
- 골마∙막실∙막곡리(幕谷里)
산골에다 초막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골마∙막실∙막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하리와 병합하여 호계면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 동묘땅
양지마 남동쪽 동묏산 밑에 있는 마을로서 이 산이 먼 곳에서 보아 큰 묘(墓)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동묘땅 또는 동묘담이라 불렀다 한다.
- 밀개등
봉천(鳳川)안의 아담한 산아래 있는 마을로서 뒷산이 밀개 모양과 같이 힘차게 나오다 멈추어 있는 곳에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밀개등이라 부른다.
- 양짓마∙양촌(陽村)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정만년(鄭萬年)이란 분이 양지바르고 따뜻한 이곳에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이 마을을 양지마라 부르게 되었다.
- 장터∙장터걸
지금의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1914년경에 시장이 개설되면서 장터걸로 부르게 되다가 1940년경에는 이곳 시장이 없어지고 주평(舟坪)으로 시장이 옮겨져 장터의 흔적은 없어지고 주거지가 되고 말았다.
<아랫마∙구하리(九下里)>
1383년경 평해황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당시 윗동네인 귀산 밑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구하(龜下) 또는 아랫마라고 부르다가 오랜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에 구자(龜字)가 구자(九字)로 바뀌어 구하리(九下里 )로 변하였다 한다.
<별암리(鱉岩里)>
- 자래바우∙굴암∙별암
마을 앞개울에 자라 모양의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을 자래바위 또는 별암이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주평리(舟坪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별암리라 하고 호계면에 편입시켰다. 당시에는 이곳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는데 1921년 10월에 면사무소를 막곡리로 옮겼다. 1519년경 영천인(永川人) 이씨(李氏)가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당시 마을 뒷산에 큰 굴이 있어 굴암(窟岩)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굴에서 용이 등천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봉서리(鳳棲里)>
- 구봉서(舊鳳棲)
이 마을은 임진왜란 이전(1545년경)에 경주사람 이씨가 이주하여 개척한 후 봉서리라 부르다가 그 후 잿봉서가 생기자 이 마을을 구봉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본래 이곳은 상주군 산서면의 지역으로 봉황새와 같은 바위가 있어서 봉서라 하였고 고종 32년 (1895)에 문경군에 편입되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봉리, 하봉리, 반암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봉서리라 하고 호계면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 잿봉서
이 마을은 1479년 예천임씨가 처음으로 마을을 개척하였다. 봉바위 남쪽에 위치하고 구봉서보다 지대가 높은 산허리에 있다 하여 잿봉서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부곡리(富谷里)>
- 막골(馬谷)∙부성(富城)∙부곡(富谷)
이곳은 본래 상주군 산서면 지역인데 1895년에 문경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삼곡리 외야리 부성리를 병합하였다. 이때에 부성리와 삼곡리(三谷里의 이름을 따서 부곡리라고 하였다 한다. 외얏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바둑재 아래 있으며 조선조 중기(1550년경) 개성고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개척 당시에 이 고씨가 말을 매었던 골이라 하여 막골이라 부르다가 후에 고씨 형제들이 부성으로 개칭하였다.
- 삼곡(三谷)
부곡 북서쪽 골자기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조 말엽에 함안조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그 당시 이 골에 우물이 세개 있었다고 하여 삼실 또는 삼곡이라 하였다.
- 외야골∙와야곡(瓦也谷)
부곡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조선조 말에 기와를 만들었던 곳이라 하여 기와골 또는 와야골 와야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선암리(仙岩里)>
- 상선암(上仙岩)∙상선리(上仙里)
이 마을은 1583년경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여 개척한 곳으로서 이곳의 물과 바위가 아름다워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바위 위쪽의 마을이라 하여 상선암이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이곳에 신선바위라고 부르는 큰 바위가 있다. 원래 이곳은 상주군 산서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895년에 문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상선암, 하선암을 병합하여 선암리라 하면서 호계면으로 편입되었다.
- 하선암(下仙岩)∙하선리(下仙里)
1570년경 경주최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신선들이 놀았다는 바위 아랫마을이라고 하여 하선암이라고 하였다 한다. 중선암도 있었다고 하나 하선암과 마을이 합쳐졌다고 한다.
<우로리(牛老里)>
- 우로실∙우로골∙우로곡(牛老谷)
마을 뒷산 지형이 늙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과 같다 하여 우로실 또는 우로곡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연역골,주진(舟津),도덕골을 합쳐서 우로리(牛老里)라 명명하면서 호계면으로 편입시켰다.
- 연역골(連驛谷)
우로실 북서쪽에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역촌(驛村)이 있어 한양과 충청도를 왕래하던 관원들과 행인들이 계속 줄을 이어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하여 연역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뱃나들(舟津)
우로실 남서쪽에 있으며 마을 앞에 영강이 있어 1960년까지는 이곳에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 장평(長坪)들에 농사도 짓고 나들이도 하였다 하여 뱃나들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은 밀양박씨가 1580년경에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 도둑골∙도덕골(道德谷)
뱃나들 동쪽 골짜기 안에 있으며 옛날에 도둑이 숨어살았다 하여 도둑골이라 하였으나 1944년 큰 홍수가 일어나 막곡의 수재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후에는 인심이 좋아지고 예의도 바른 마을이 되어 도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천리(芝泉里)>
- 놋점∙주천(酒泉)
1619년경 장수황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현재 지천리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고 옛날에 놋그릇을 만들었던 집과 점방이 있었다고 하여 놋점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 술샘이있어 주천(酒泉)이라 하였는데 이 샘에는 행인이 지날 때마다 술이 한 잔씩 솟아났다고 한다. 어느날 김룡사로 가던 스님 한 분이 주천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한참 더 기다려도 술이 더 나오지 않자 화가 나서 지팡이로 샘구멍을 찌르니 그 때부터 술은 나오지 않고 물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여름철에는 맑은 찬물이 나오고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흘러나온다.
- 정골(鼎谷)
주천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초계인(草溪人) 변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옛날에 이곳에 놋그릇을 만들던 솥이 있었다고 하며 인근에서 놋그릇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의 명칭이 놋그릇 만드는 솥이 있었다고 하여 정골이라 한다.
-강신터(降神基) 강선터(降仙基)∙난지(蘭芝)
주천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 주위의 산천이 아름다워 신선들이 내려와 놀 만한 곳 이라 한다. 그래서 옛날에 옥녀(玉女)라는 신선이 이곳에 내려와 놀았던 곳이라고 하여 강신터 또는 강선터라 부르게 되었고 또한 마을 주위에 잔디가 무성하고 난초가 많았다 하여 난지라고도 하였다 한다.
<호계리(虎溪里)>
-호 계
1529년경 김해김씨 제남(悌男)과 부계(缶溪) 홍씨 경민(景閔)이라는 두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여 우물을 파고 논밭을 개간하였다 한다. 호계란 지명은 당시 뒷산 오정산(오정산)이 험하고 수풀이 울창하여 범이 많이 서식하여 마을 앞 냇가까지 출현하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설에 의하면 중국(中國)의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고사성어에서 호계라는 지명을 따왔다고도 한다. 또한 호계리 앞 냇가에서 시작한 산이 마치 호랑이가 누워서 냇가를 굽어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호계란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호계면의 중심 부락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 섭(加攝)
호계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1529년경 김해지방의 김제남(金悌男)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을 때 호계리에 있었던 홍경민(洪景閔)이란 선비가 이곳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찾아가 인사를 하니 대답하기를 국난에 쫓겨 피난 왔다고 했다. 그 후 이 두사람이 협력하여 첩첩산중인 이 마을을 개척하여 가섭이라 하였다 한다.
-신영(新榮)∙신령(神靈)
호계리 남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로서 1904년경 김재년(金載年)이란 사람이 냇가에서 살다가 큰 홍수 때문에 가족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당시 이곳은 도깨비가 많았던 곳이라 신령(神靈)이라 하였으나 1947년 이용희(李龍熙)란 사람이 神資 를 新으로靈字 를 榮 으로 고쳐서 신영(神榮)이라 개명하였다 한다. 현재 도깨비 터라고 불려진 곳이 호계중학교가 설립된 곳이고 요불승덕(妖不勝德)이란 말대로 도깨비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호계마을이 한결 평안하다고 한다.
- 문경시청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