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흔 교수님이 쓰신 자료로서, 한국문학의 특질에 대해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읽기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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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전통
신 동 흔
문학과 전통
여기는 다도해. 바닷물 위에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떠 있다. 섬들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며 생태도 다르다. 서로 가까이 있는 섬들이 있는가 하면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도 있다.
문학작품들이 존재하는 방식도 이 섬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각 작품은 저마다 독립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울림이 넓고 영향력이 큰 작품이 있는가 하면 존재가 미미한 작품도 있다. 시대와 공간, 성격 면에서 서로 인접한 작품들이 있고, 시대적․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작품들도 있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여러 문학작품들은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특히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사용된 언어가 다르고 시대배경이나 사상이 다른 작품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한 예로 문화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21세기 문학과 등잔불 아래서 글을 읽던 18․19세기의 문학은 서로 동떨어진 채 별개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따로따로인 것처럼 보이는 섬들이 물속으로 서로 이어져 있듯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학작품들도 밑바탕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물 안팎의 땅들이 일련의 맥(脈)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문학작품들 사이에도 연면히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을 일컬어서 문학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섬의 형세와 지질을 이해하려면 땅의 맥을 살펴야 하는 것처럼, 문학작품의 특성과 가치를 이해하려면 전통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 문학적 전통의 핵심 맥락을 잘 짚어내면 오늘날의 문학을 바르게 진단하고 문학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자연과의 소통과 교감
한국문학에서 하나의 큰 전통을 이루는 요소로 자연과의 교감을 들 수 있다. 자연과의 소통과 합일을 통해 삶의 가치를 찾는 것은 한국문학의 오래고도 큰 화두였다. 그 전통은 시대에 따른 변주를 거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별곡’
이 작품에서 청산(靑山)은 혼란스런 세상과 대비되는 안식의 공간이다. 화자는 청산에 들어가서 삶의 고달픔과 시름을 내려넣고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 하고 있다. 청산에 자라나는 머루와 다래를 먹으며 살겠다는 말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삶에 대한 본원적 지향이 깃들어 있다. 한국문학에 나타난 자연관의 한 원형이다.
조선시대 강호가도(江湖歌道)는 자연친화적 문학의 흐름을 활짝 꽃피웠다. 강호자연 속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바른 길을 찾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나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같은 작품에서 강호자연은 세파에 젖은 혼탁한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평화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안거(安居)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황의 <도산십이곡> 같은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사의 법도를 일깨워주는 성찰의 공간이었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긏지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 ‘도산십이곡’ 제11곡
이 시의 화자는 지금 맑은 물 흐르는 청산에 돌아와 있다. 산은 늘 푸르며, 물은 밤낮으로 흐름을 그치지 않는다. 사람의 일도 그와 같다. 배움과 성찰을 그치지 않고 나아가 언제나 푸른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이 작품은 자연을 통해 삶의 법도를 찾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의 자연의 일부로서 대자연에서 배우며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의 교감과 합일을 추구하는 전통한 현대문학에까지 연면히 이어져 왔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작품들이 그침 없이 이어져 왔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청산(靑山)’을 노래한 시를 한 편 본다.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靑山)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山)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치솔을 생각한다.
(중략)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 이기철, ‘청산행’
이 작품 속의 ‘청산’은 현실세상과 대비되는 공간이다. 편지와 칫솔로 상징된 현실은 문화와 문명의 공간이다. 하지만 거기는 ‘앓음’이 있다. 문명화된 삶 속에서의 번뇌일 것이다. 화자는 청산 속에서 상수리와 들거미줄, 돌멩이들과 함께하는 안식을 꿈꾼다. 생명의 본향에 귀의하여 존재의 본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지향이다.
자연은 세계문학의 보편적인 소재이다. 한국문학은 자연을 이용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조화와 합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그 바탕에는 인간 자체를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는 관념이 깔려 있다. 도시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 전통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흐르면서 새로운 문학작품들을 낳고 있다.
이별의 정한과 그 승화
많은 이들이 한국문학의 두드러진 전통으로 이별의 정한(情恨)을 든다.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 가운데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다. 주목되는 것은 한국문학에서 이별의 아픔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며,
나를 두고 가는 임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 ‘아리랑’에서
민요 ‘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한국 서정문학의 원천인 민요에는 이별을 다룬 노랫말이 많다. “나를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노랫말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정선아라리나 진도아리랑 같은 토속 민요에서는 위 노래가 많이 불린다. 이 노래는 이별에 대처하는 한국적 방식을 잘 보여준다. 지금 임이 떠나고 있다. 하지만 임은 가고 싶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해가 서산에 지는 것처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아파도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보냄은 끝이 아니다. 서산에 지는
해가 아침에 다시 떠오르듯 떠나는 임도 꼭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이별의 아픔을 마음으로 감당하며 재회에 대한 희망 내지 믿음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잡사와 두어리마난 / 선하면 아니 올세라
설운님 보내옵나니 / 가시는 듯 도셔오소셔. - ‘가시리’에서
고려가요 ‘가시리’의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의 화자도 임을 보내고 있다. 나를 두고 떠나니 야속한 임일텐데 화자는 그가 더 서러워 보이는지 ‘설우 님’이라 부른다. 잡고 싶지만 기꺼이 떠나보낸다. 그럼으로써 임과 다시 만날 일을 기약한다. 이별의 아픔을 재회에 대한 신념과 의지로써 승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 황진이의 시조
이 시 속에서도 임이 떠나고 있다. 청산이 흐르는 물을 못 잡는 것처럼 화자는 임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임은 떠나가도 자기 사랑은 산처럼 변함없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떠나는 저 사람도 나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니 그 사랑 허망한 것이 아니었다고. 그는 이렇게 이별의 아픔을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시킨다.
현대문학에도 이별을 노래한 수많은 시작품들이 있다. 그 바탕에는 문학적 전통이 흐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이별의 아픔을 의미로 승화시키는 한국적 전통과 만날 수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이 작품의 화자는 차마 보낼 수 없는 ‘님’을 속절없이 떠나보낸 상태다. 그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고 슬픔이었다. 한숨과 눈물. 하지만 화자는 상실감에 빠져 슬퍼하기만 하는 것은 사랑을 깨뜨리는 일임을 깨닫고서 굳게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자 어느 순간 마음속에 임이 돌아온다. 몸은 떠났지만, 임은 떠난 것이 아니었다. 화자는 침묵 속에서 임을 느끼며 교감한다. 이별은 이제 영원한 공존과 더 큰 사랑으로 승화된다.
위에서 살핀 작품들은 시적 형식이 각기 다르다. ‘아리랑’은 4음보격 분절 형태의 노래이고, ‘가시리’는 3음보 연속체 시가이며, 황진이의 시조는 4음보 3행의 정형시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산문적 성향을 지니는 자유시 형태의 작품이다. 이렇게 형식이 다르지만, 또 시대가 다르고 작가가 다르지만, 이들의 문학적 지향에는 본질적인 공통적 맥락이 있다. 문학적 전통이란 이러한 것이다.
해학과 신명의 미학
흔히 우리 겨레를 한(恨)의 민족이라 한다. 실제로 한국문학에는 깊은 한이 깃든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한민족은 해학과 신명의 민족이기도 하다. 즐거운 해학과 거침없는 신명으로 마음속의 거침을 훌쩍 풀어내곤 했다. 예컨대 한국의 민속극은 해학과 웃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문학 가운데는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작품이 많다. 가난의 고통과 슬픔을 해학과 신명으로 펼쳐낸 <흥보가>는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미학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왔으니, 김유정의 소설 작품들은 그 좋은 사례가 된다.
덕순이는 통째 짓무를 듯싶은 등어리를 견디지 못하여 먼젓번에 쉬어 가던 나무 그늘에 지게를 벗어 놓는다. 땀을 들여 가며 아내를 가만히 내려다보니 그 동안 고생만 시키고 변변히 먹이지도 못하였던 것이 갑자기 후회가 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면 동넷집 닭이라도 훔쳐다 먹였을 걸 싶어,
“울지 말아, 그것들이 뭘 아나 제까짓 게!” 하고 소리를 뻑 지르고는,
“채미 하나 먹어 볼 테야?”
“채민 싫어요.”
아내는 더위에 속이 탔음인지 한길 건너 저쪽 그늘에서 팔고 있는 얼음냉수를 손으로 가리킨다. 남편이 한푼 더 보태어 담배를 사려던 그 돈으로 얼음냉수를 한 그릇 사다가 입에 먹여까지 주니 아내도 황송하여 한숨에 들이켠다.한 그릇을 다 먹고 나서 하나 더 사다 주랴 물었을 때 이번에 왜떡이 먹고 싶다 하였다. 덕순이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나머지 돈으로 왜떡 세 개를 사다 주고는 그대로 눈물도 씻을 줄 모르고 그걸 오직오직 깨물고 있는 아내를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왜떡을 입에 문 채 훌쩍훌쩍 울며,
“저 사촌 형님께 쌀 두 되 꿔다 먹은 거 부대 잊지 말구 갚우.”
하고 부탁할 제 이것이 필연 아내의 유언이라 깨닫고는,
“그래 그건 염려 말아!”
“그리구 임자 옷은 영근 어머니더러 사정 얘길 하구 좀 빨아 달래우.”
하고 이야기를 곧잘 하다가 다시 입을 일그리고 훌쩍훌쩍 우는 것이다.
- 김유정, ‘땡볕’에서
가난하여 몸을 못 돌본 탓에 아내가 병에 걸려 죽게 된 상황이다. 남편은 그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아내가 먹고 싶어 하는 떡을 사준다. 아내가 떡을 먹으며 눈물 속에 유언을 하는 모습은 어찌 그리 슬픈지 모른다. 그런데 작품은 그 눈물 나는 상황에 웃음을 곁들인다. 상황은 심각한데 문체는 가볍고 해학적이며, 장면 묘사가 희극적이다. 아내가 왜떡을 입에 문 채로 훌쩍이며 말하는 모습은 슬프면서도 희극적이어서 웃음을 일으킨다. 쌀 두 되를 꼭 갚으라고 하는 유언 내용도 너털웃음을 일으킨다. 그러한 웃음을 통해 우리는 슬픔에 매몰되는 대신 그것을 음미하며 감당하게 된다.
웃음으로 눈물을 씻는 미학은 소설뿐만 아니라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데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한국 영화의 대표작들로 꼽히는 <서편제>와 <왕의 남자>, <괴물> 같은 작품을 보면 무척 슬프거나 심각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웃음을 터뜨리도록 하는 장면들이 있다. 외국인들한테는 낯선 그런 장면을 한국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공감한다. 이 또한 우리 안에 흐르는 전통의 힘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