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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인 "종화회의 글"(푸른들소리)을 여기에 올린다.
처음부터 올리면 너무 많기 때문에 201호부터 시작할까 한다.
이글을 올리는 이유는,
상호소통하여 희망적인 세상을 만든다는 통청아카데미의 목적과
이 모임의 성격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종화회는 종교간의 화합이 주관점이고,
통청아카데미는 다양한 지식의 소통이 주관점이다.
[제 12권 7호](통권 201호)(2010년 5월 1일)
폭력경기, 기록갱신, 불쌍한 후손들: 생각해 볼 문제다
장기홍(경북대 명예교수)
폭력을 일삼는 경기가 스포츠라는 미명 아래 성행하고 있다. 요즘은 소녀들도 선수라는 미명으로 폭력 경기에 동원되고 있다. 얻어터져서 유혈이 낭자하고 흔히 실신하여 겨우 깨어난다. 그들이 명대로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우선 선수들이 불쌍하고 구경할 아이들이 두렵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폭력을 삼가라고 학교에서는 가르칠 터이나 화면은 계속 폭력을 가르치고 부추기고 있다.
나는 그런 경기를 볼 때마다 '폐지해야 한다'고 탄성을 발한다. 그러면 옆에서 듣는 사람 중에는 '구경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자연히 폐지가 되리라' 하는 해결책을 말한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틀렸다. 판을 벌려 놓고 구경꾼을 탓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령, 성행위의 장면을 허가를 얻어 대중에게 구경시킨다 하자. '구경꾼이 없어지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말이 옳지 않음은 자명하다. 비교육적인 구경거리는 아예 말아야 하는 것이다. 허가를 않고 금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는 다스림이 필요하고 다스리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자연추세에, 그리고 돈의 세력에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자꾸만 폭력경기 종목이 다수가 되고 성황인 것은 그것을 스포츠라 내걸고 뜯어먹고 사는 프로모터들 때문이다. 그들이 돈을 갈라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 월급을 받는 직업인들 때문이다. 아귀 놀음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올림픽이라는 것도 문제가 많다. 자꾸만 기록을 갱신해야 하니 새로 태어난 사람은 점점 고생을 하고 인위에 인위를 가해서 시달리고 시달려서 기록 갱신을 해야 한다. 뒤에 태어난 것이 무슨 죄인가? 새로 태어나는 후손들이 불쌍하다. 기네스 부크라는 것도 문제이다. 기록갱신을 한답시고 별별 요괴한 일을 꾸미고 벌인다.
자연추세대로 두면 점점 각박해가고 벼랑에 몰리어 인류는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고안된 제도를 가지고 사회를 구출해야 한다. 그래야 할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앎이 필요하다. 그런 각성이 요원의 불길 같이 일어나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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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장기홍(경북대 명예교수)
이 두 학파의 철학은 기독교 이전의 유럽인들이 가장 신봉하던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철학이었다. 알렉산더의 세계정복이 펼쳐놓은 난세에 처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선철(先哲)들이 남긴 토대 위에 여러 독특한 생활윤리의 체계를 만들었는데 그 중 이 두 학파가 가장 우세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마음의 평정(平靜, ataraxia)이라는 쾌락을 숭상했고 스토아학파는 초연(超然)한 부동심(不動心, apatheia)을 목표로 했으니 그들은 상당히 공통적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일색의 서양 중세가 되자 전자는 쾌락을 일삼는다 하여 매도되고 후자는 기독교에 흡수되어 둘 다 사라지고 말았으나 볼테르는 에피쿠로스를 루소는 스토아를 따르는 등 두 철학의 영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 두 학파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믿어 여기에 종화모임을 위해 그들을 소개한다.
에피쿠로스학파
에피쿠로스主義의 창시자 에피쿠로스(BC 341-270)는 알렉산더 대왕(BC 356-323)보다 조금 뒤에 난 사람이다. 이오니아 지방의 사모스 섬 출신인 그는 아테네에 와서 ‘에피쿠로스의 庭園’(BC 306/7-)이라 불리게 된 정원 하나를 마련하여 벗들에게 그의 생활철학을 가르쳤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쾌락이 삶의 목표라 했던 키레네학파를 계승했다. 그가 가르친 쾌락은 사려(思慮)깊고, 명예롭고, 정의로운 진정한 쾌락이었다. 사람의 죽음은 본래의 원자들로 되돌아가는 자연스런 과정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정치를 멀리하고 정원에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삶을 높이 샀다. “빵과 물만 있다면 나의 행복은 신의 그것에 버금가리라.” 에피쿠로스주의의 추종자들은 소수였으나 열렬히 교조의 가르침을 따랐다. 에피쿠로스는 공동체 사람들은 물론, 노예들도 사랑으로 대하였고, 공부시간에는 노예도 참석시켰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실행하고 권장하면서도 자주 향연과 축제를 열어 제자들과 즐겁게 살았으나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한다. 개인적 행복을 강조한 점에서 소승적(小乘的)이었으며 사회성에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500년 이상 굳건히 유지되다가 AD 4세기말에는 사라져버렸으나 그들의 영향은 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에피쿠로스 자신의 저작은 일부만 남아 있으나, BC 1 세기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저서는 에피크루수주의를 잘 대변하고 있다. 키케로의 저작도 중요하다. 또 일시 버질(Virgil)도 이 주의에 경도되었고 프랑스의 볼테르도 에페큐리안이라 지칭된다.
이 학파는 창시자를 충실히 받드는 특징이 있었고 따라서 이단이나 분파가 없었다. 에피쿠로스主義는 순수하고 영속적인 쾌락과 마음의 평화를 이상으로 삼았고 이성적 생활을 주장했던 실천철학인데 타 학파와 기독교에 의해 쾌락주의라 매도되었다. 방종(放縱)한 쾌락 종파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에피크로스주의자들은 이성(理性)에 따라 개조(開祖)의 가르침을 지키면 악에 물들거나 악의 해(害)를 입지 않는다고 믿었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이 근심걱정으로 스스로 가엾은 존재가 된다고 하면서 근심걱정에서 벗어나고 진리의 지식을 통해 ataraxia(혹은 atraxia) 곧 마음의 평화(혹은 平靜)에 도달할 것을 가르쳤다. 마음의 평화는 다른 동시대 사조(스토아主義와 懷疑주의)와의 공통된 주장이었으나 에피크로스主義는 특히 세속적 야망(지위, 성공, 富 등)과 물질적 만족(돈, 사치 등)의 추구 그리고 신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근심걱정을 버리자고 했다. 그는 일상사에 대한 신의 냉혹한 간섭을 믿는 미신이나 철학적 종교가 다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이성적 우주관을 따르면 그런 공포를 떨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에피쿠로스는 자기 학문을 지식론, 물리(자연계 탐구) 및 윤리(도덕)로 나누었다. 지식은 오직 감관에 기초한 직접적 물리적 지각에서 얻어지며 절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물을 보고 일반화하는 것은 다수(多數)의 감각-지각에 대한 일종의 기억-저장이라 본 것이 그의 이론이다(경험론). 그의 물리학은 공간을 끝없이 운동하는 원자들의 연쇄(連鎖)를 생각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따랐으며 (목적론이 아니라) 기계론이었다. 그런 우주 안에서도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전혀 결정적 운명적 필연적이 아니라 했다. 죽음은 육체와 영혼을 구성했던 원자들의 해체에 불과하니 겁낼 것이 없다(유물론).
그들(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무신론자는 아니었으나 신들은 사람이 믿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비(非)본래적 존재라고 했다. 신들은 우주와 우주 사이에서 행복하게 불사를 즐기며 사는 존재로서 우주에는 일체 간섭을 할 수 없으니 전혀 겁낼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한 신들을 머리에 그려보고 명상하면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신이 불멸이라는 그 점 외에는 철학자는 신과 동등하다는 것을 신들도 인정할 것이라 했다. 죽음과 신들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된 뒤에는 에피쿠로스主義의 윤리에 따라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 선악의 기준은 쾌락(마음의 평화)이냐 고통이냐이다. 고통은 근심걱정인데 그것은 에피쿠로스주의(철학)가 면케 해준다. 생활의 필수(必需, 예를 들면 물과 빵)는 적고 간단하여 쉽게 얻을 수 있다. 쾌락을 얻으려면 인위적 필요와 욕망을 줄여서 자연적 필수(정말 자연인으로 살 때의 필요)에 맞추어야 한다. 최대의 불필요는 권력욕과 명예욕이다. 정치적 욕망과 유명해지려는 욕망을 버리고 근검(勤儉) 은둔(隱遁)하여 모든 인위적 필요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마음에 맞는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그런 인생을 살면 ataraxia(마음의 평정)는 교우를 통해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믿음의 동지에게 둘러싸여 지나는 것은 에피쿠로스式 생황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에피쿠로스 도덕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다. 모든 사회는 서로 해치지 않는다는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철인은 먼저 자신의 복지(well-being)에 관심이 있다(自愛주의). 그러나 에피쿠로스主義의 역사는 그들의 이론에 사회성과 자연적 인성(人性)의 측면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결점으로 드러냈다.
스토아學派
이 학파의 창시자는 키프로스(사이프로스) 섬 키티움 출신의 제논(Zenon of Citium, BC 333-261)이다. 그는 페니키아人이라 전하는데 철학을 공부하러 아테네에 와서 BC 300년경 스토아 포이킬레[채색 벽화가 있는 주랑(柱廊)]에 학원을 열고 가르쳤으므로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의 철학은 소크라테스를 숭배하던 견유(犬儒)학파의 철학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토대로 했다.
제논은 고향에서 소크라테스에 관한 글을 읽고 아테네를 동경하다가 그곳에 와서 한 가게에 들렸는데, ‘어떻게 하면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가게주인은 마침 지나가던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을 따라 가라’ 하여 그대로 하였는데 그가 바로 견유학파(키니코스학파)의 크라테스였다. 그리하여 제논은 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견유학파를 물려받았다. 제논은 스스로 실천했던 도덕적 엄격주의 때문에 크게 존경받았다 한다.
에피쿠로스학파와는 달리 스토아학파는 개조(開祖)의 학설을 고수하지 않았다. 제논의 제자인 시실리 섬의 크리시포스(Chrysippos, 280-206)는 많은 책을 써서 스토아철학의 체계를 세웠고, 그 후 수백 년 간 스토아철학은 계승자들에 의해 계속 다듬어졌다. 스토아철학은 로도스 사람 파나이티오스(180-110)에 의해 로마로 전파되었고, 로도스 학교에서 가르쳤던 포사이도니오스(ca 135-50)는 스토아철학을 로마인들의 생활철학으로 중흥시켰다. 로마 帝政시대에는 스토아철학은 로마의 통속철학이 되었으며 道德敎의 (종교적) 색채를 띠었는데 이때의 유명한 지도자들은 세네카(ca 4-65), 에피크테토스(Epiktetos) 및 황제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 121-180)였다.
이 학파는 자연에 순응한 생활을 하는 현자(賢者)를 이상으로 삼았다. 현자는 세상의 변화에 아랑곳없고 욕정과 감동에 흔들림이 없고 번뇌를 벗어난 자유인이다. 그런 초연한. 무(無)감동(感動)의 경지 곧 아파테이아(apatheia, 不動心)를 유일한 善이요 德이라 했다. 아파테이아는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에서 오는데 자연은 logos(이성)와 같다고 했다. 인성(人性)은 자연이므로 우리 本性에 따름은 世界理性을 따름과 같다. 번뇌는 자연/이성에 위배되는 것으
로, 현자는 의지를 自然律(世界道)과 일치시킨다. 현자는 곧 有德자라 보는 점에서 그들은 소크라테스와 같으나, 소크라테스는 덕의 내용을 좁게 규정하지 않고 열어 두었었다.
스토아학파의 실재론(實在論)은 플라톤의 관념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적 성질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철인들의 주관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본 이 학파의 대안은 경험론이었다. 감각과 지각이 기억이 되고 경험이 되어 지식을 이루고 마침내 보편적 관념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관념이 대상과 일치하여 진리임이 자명(自明)해지는 것은 마치 빛이 스스로를 증명함과 같다고 했다. 스토아철학은 유물론으로서, 영혼, 신, 사물의 성질, 덕, 욕정 등 모두가 물체의 바탕에서 나옴을 알았다. 물체는 물질과 힘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물질은 성질이 없으나 힘이 가해져 운동하게 되면 성질을 띠게 된다. 힘의 근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밝힌 대로 만물의 근본원소인 ‘불’이요 로고스라 했다. 로고스가 곧 신(神)이라 하여 종교적 범신론적 색채를 띠었다. “신의 섭리는 그것을 원하는 자는 선도(善導)하고 원치 않는 자는 억지로 끌고 간다.”
스토아철학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敎의 부활이라 볼 수 있다. 로고스라는 불은 물질이며, 정신이요, 세계영혼이며, 이성이며, 道요, 법칙이며, 세계질서요, 목적이라 하여 목적론적 경향을 띠었다. 불이 공기로 공기에서 물과 땅(흙)으로 변했다. 불이라는 원소는 희박해지면 공기가 된다. 불, 공기, 물, 땅의 4원소는 세계의 신체가 되고 불의 일부는 신체를 활동시키는 세력 곧 정신이 된다. 형성, 파괴, 순환의 큰 과정이다. 만유신교(萬有神敎)이며, 세계는 신의 필연적 발현(표현)이다. 신(로고스)의 필연적 법칙으로 예정되어 있으므로 만물은 숙명에 따른다. 신이 그의 목적대로 섭리하면 인간에게는 숙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숙명도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를 다소간 참고는 한다고 보았다.
스토아들에게 있어 이성은 덕(德)이고 비이성적이면 부덕(不德)하다. 덕은 선이고 부덕은 악이다. 인간자연 곧 인성 곧 이성이라는 그들의 단순화는 그런 것만을 따르는 德 일변도로 치달아 그것만 인정하는 엄격주의에 이르렀다. 그들은 덕(이성)이 아닌 모든 것(생명, 건강, 부귀, 빈천, 쾌락, 고통, 老病死 등)은 구별도 안 되고 논의할 거리가 못 되는(區別不可 論議不當) 지저분한 것들이란 뜻으로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했다. 이렇게 흑백논리적 가치관에 서자, 살아서 무가치한 아디아포라의 지배를 받기보다는 죽는 것이 옳다고 보아 이 학파는 자살을 시인했고 차츰 자살자가 많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후에는 조금씩 에누리를 하여 삶은 바람직하고 죽음은 나쁘다고 추가했다. 현자가 못된 자들은 모두가 우자(愚者)라 하던 엄격주의는 후에 가서는 너무 지나치다는 뉘우침이 생겨나 현자와 우자 중간에 정진(精進) 계급을 인정하게 되었다.
학파의 개조 제논, 클레안테스 등도 자살하였다. (네로 황제의 私교사였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AD 4경-65)도 자살하였으나 그는 황제에 대한 모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황제의 명에 의해 자살하였으므로 예외이다.) 자살하는 방법의 하나는 자기 의지력으로 호흡을 멈추고 절명하는 것이었다. 스토아철학이 자연과 이성(인간이성과 세계이성)을 동일시하(는 형이상학을 가지)고 나니 그런 理想에서 보면 현실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상 當爲, 의무, 도덕의 개념을 윤리학에 도입한 공로가 있다.
스토아철학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동일한 법칙을 따르고 있음을 보아 모두가 이성을 가졌고 평등하다고 보았다. 인종, 혈통, 귀천의 구별 없이 세계시민, 세계국가의 백성이라 보았으며, 세계주의, 四海同胞主義 나아가 박애주의에 이르렀다. 스토익들은 로마의 다민족 대제국에서 이미 정치적 세계주의를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사해동포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는 바울이 로마제국의 바탕 위에서 기독교적 세계주의를 체득했던 것과 같다.
[필자가 생각건대, 그들은 번뇌 없는 무균상태의 행복만 추구했다. 너무 행복에 치중함은 이기주의 같다. 부동심은 경직성에 이르기 쉽다. 마음의 평정과 초연함만이 덕이요 선인가? 이성만이 人性이요 자연이요 덕이요 선이라 하는 그들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의료일원화 국민 위해 필요불가결 (원고 중 일부)
김재식(경북대 명예교수, 정신과 의사)
때는 거년 12월 28일이다. 조재국 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 보건의료의 미래 - 의료일원화( 醫療一元化 ), 필요한가? 그리고 ’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보건의료의 선진화와 의료일원화 ‘ 주제발표를 통해 의학과 한의학이라는 이원적 의료 체제로 인해 의료선택에 혼란을 주고, 치료할 시기를 놓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며 환자를 위해서라도 의료일원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대해서 1996년 중국의 길림대학교병원 중의과( 中醫科 )교수인 결합의( 結合醫의 ) Li Xiao -Chun( 李 曉 春 )선생과의 공동연구로 경북의대 김재식교수( 진단검사의학과 )가 대표로 창립한 경북대 동서의학연구회가 발표한 결과 대비해 보아도 의료일원화는 궁극적인 공동 목표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통일이 되는 일이다.
중국에는 의사, 한의사( 中醫 ) 및 결합의 이렇게 세 종류가 있고 결합의는 반대쪽의 임상과정을 2년씩 수료를 하면 된다. 중국에는 국가고시가 없다. 이유는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결합의는 양쪽 진료를 다 할 수 있다. 이 결합의 때문에 한국 보다 일원화예 한 발 앞서 있다. 위의 Li교수는 놀라울 정도로 침술( 鍼術 )에 능하고 명 강의자였다. 이 때문에 침술강습회 까지 개최하여 수료생까지 배출하였다. 그러나 침 하나가 치료의 전부는 될 수 없다. Li교수는 의사가 먼저이고 한의학은 추가로 이수한 결합의로서 한의학진료를 맡고 있다. 중국은 오랫동안의 폐쇄적인 공산주의체제 때문에 의학이 많이 뒤 떨어져 있었다. 가난 때문에 인민들은 원시적인 한의학치료가 쉽다고 했다. 중간에 등소평( 鄧 小 平 )의 개방정책으로 서양의 현대의학이 급속도로 도입 발전하여 인민들도 의학진료를 찾는 경향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오늘 날은 간이식 수술도 많이 하고 있다. 수적으로도 의사가 한의사 보다 훨씬 많고 결합의는 극소수라고 한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의료일원화는 시급하다고 한다.
최선진 미국은 한의학을 대체의학으로 인정을 하고 의대 교과과정에 포함하는 대학이 더러 있다. 정식 의학으로는 취급하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은 명치28년( 1895 ) 그러니까 115년 전에 벌써 국회에서 한의사제도를 폐지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한의사는 없다. 일본은 조선조 말기에 대원군이 쇄국정치를 하고 있을 때 서양의학과 독일의학을 먼저 받아 들였다. 그것은 과학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은 과학을 먼저 받아 들여 무기를 만들고 과학적 의학을 먼저 도입하여 의료일원화를 과감하게 시행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일본은 명실공히 오늘 날 당당한 최고의 선진국의 하나가 된 것이다.
조 선임연구위원은 ‘ 이어서 중복적인 의료 이용으로 인해 의료비지출이 증가하고 의사 -한의사사이에 심한 갈등이 생겨 의학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하면서 환자를 위해서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의료일원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어서 ’ 의료의 질적 향상은 물론 의료시장 진출 및 개방에 대비하고 제 3의학 창출을 통해 세계의학을 주도하기 위해서라도 의료일원화 또는 통합이 필요하다 ‘고 지적한 조 선임연구위원은 ’ 보편성과 투명성에 반하는 혼자만의 처방인 ‘ 비방 ’이 없어 져야 한의학이 발전할 것이라 ‘며 의료일원화화 과정에서 한의학이론을 정립할 수 있고 한의학의 발전 가능성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조선임 연구위원은 또 ’ 일원화문제는 정부나 의료계와 한의계에서 개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만큼 공식적인 위원회를 설치 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한다 ‘고 지적한 뒤 ’ 내년( 2010 )부터 시행하는 병원급 치료기관의 협진을 통해 상당부분 의견을 수렴하고 교통정리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 하였다. 조 선임연구위원은 차제에 ‘ 의료법을 비롯한 관련 법령의 획기적 정비를 통해 의료선진화를 마련하고 의료인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역할 분담과 의료행위의 구체적인 정의( 구분 )을 기술할 필요가 있다고 ’고 조언
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 측은 과학적 근거 때문에 의사가 한의학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실정 속에서 한의학이 의학의 발전을 직 간접적으로 저해하고 있기 때문에 협공을 당하고 있는 것이 한의학의 현실이라고 보여진다.
한정호 의료와 사회포럼 자문위원 ( 현 청주 성모병원 소화기내과과장 )은 ‘ 민간의학 약초 침술 등에서 옥석을 가려 국부를 창출할 자원으로 삼고자 한다면 고대철학에서 기반한 종교적 이론을 솎아 내어야 현대의학의 큰 틀에 들어 올 수 있다 ’며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효과가 검증된 현대의학으로 편입되는 것이 의료일원화의 유일한 방법 ‘이라고 강조했다. 한 위원은 ’ 국민이 어떤 치료를 받도록 할 것인지 어떤 것이 합리적인지 미래교육인지를 지식인과 과학자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한다 ‘고 하였다.
최방섭 대한한의사협회 부회장은 ‘ 한의학은 5천년 동안 국민의 건강을 보호해 왔다 ’ 며 ‘ 한의학의 특성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의료인의 기본자세가 될 수 없고 의료와 의료계에 대한 불신을 조장, 신뢰를 떨어뜨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라 ’고 지적했다. 최 부회장은 의료일원화 논의는 의료수혜자인 국민의 입장에서 논의해야한다 ‘며 서로의 의학을 존중하는 태도의 변화가 선결되어야한다 ’고 강조했다.
노길상 보건복지가족부 보건의료정책관은 ‘ 새로운 과학기술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며 내년 1월부터 의학과 한의학 협진의 법적 근거가 마련된 만큼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 협진체계를 정착시켜 나가자고 ‘ 당부 했다. 노 정책관은 ’ 다른 나라에서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보건의료기술을 수출할 수 있도록 세계에서 가장 좋은 보건의료체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 ‘이라며 ’ 국민건강과 보건의료체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어 가자 ‘고 밝혔다.
이 날 토론회를 주최한 한나라당 안홍준의원은 “ 100년 앞을 내다보는 한국의학의 발전과 국민보건의 향상은 물론 보건산업의 발전이라는 3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의료일원화는 필수적 ‘이라며 일부 역작용이 예상되지만 목표달성을 위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여 합일점을 찾아 가자 ’고 당부하였다. 안 의원은 ‘ 2010년에도 의료일원화를 위한 토론회를 계속해서 개최하여 범국민적 논의의 틀을 마련 해 나갈 것이라고 ’ 밝혔다.
우리 측은 안의원의 제안에 대하여 의료일원화는 시급한 당면 과제이기 때문에 상호 올 바른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토론회에는 김형오 국회의장을 비롯한 국회의원들과 유영학 복지부차관 윤영표 식품안전청장 한광수 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 이수구 대한치과의사협회장 나 형 서울시 의사회장 신원형 의협상임부회장 등 보건의료계대표들과 관계자 300여명이 대강당을 가득 메워 의료일원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 모처럼의 물실호기의 좋은 기회가 오지 않았나 싶다.
결론적으로 가까운 일본이 115년 전에 의료일원화가 이루어 져 명실상부한 세계 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 있음을 본 보기로 하여 깊이 성찰하고 경제는 대국이 되었는데 모순투성이 의료제도 때문에 선진국 대열에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직시하여 이 후진성을 의료일원화로 하루 속히 벗어 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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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10년 5월 모임
5월 모임은 회장님의 해외여행과
회원들의 사정상 한달간 휴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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