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기쁨
요 3:22-30
마약청정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요즈음 마약으로 점점 물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마약범들이 늘어나니까 한국경찰로서는 감당이 안돼서 차라미 미국처럼 마약만 전담하는 마약수사부를 만들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미국 이나 남미처럼 무슨 폭력배나 조직이 마약을 유통시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나 학생 심지어 가정주부들이 마약을 퍼뜨리고 유통시키기에 더 경찰로서는 더 골치가 아프다고 합니다.
요즘음은 한술 더 떠서 10대 청소년이나 재수생 대학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마약에 손을 대면서 어린 청소년들이 마약에 중독되어 가고 있어서 한국의 마약범죄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단속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청소년들이 마약을 찾는 이유는 암담한 미래와 희망없니 우울한 입시제오에만 매달리는 스트레스와 진학과 취업과 결혼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마약이라도 해서 한 순간만이라도 삶의 해방구와 탈출구를 달려가고픈 욕망에 있다고 합니다.
좀 더 쉬운 말로 말하면 기쁨이 사라진 젊은이들이 새로운 기쁨, 감각적이고 자극적이고 육신의 최고의 쾌감을 주는 마약을 통해서 기쁨을 찾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흔히들 기독교를 기쁨의 종교다 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 중 두 번째가 희락 즉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주안에서 기뻐하라 라고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늘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제 교회도 젊은이들에게 기쁨을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부담감과 불쾌감만 주고 있는 갓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보고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해도 젊은이들과 햑생들이 기쁨을 찾으러 교회로 발걸음을 돌릴 것입니다.
환경과 육신의 쾌락만이 참된 기쁨인 줄 아는 오늘날의 세테에서 본문의 세레요한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9절 말씀에 세레요한이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당시 세레요한은 집도 없었고 번번한 직장도 없었고 결혼은커녕 여자친구도 없었고 벤츠는커녕 털옷을 입고 나막신만 신고 다니는 가난한 청년이었는데 도대체 뭐기 기쁘길래 나는 기쁨이 충만하다 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다른 복음서에서는 세레요한이 밥 먹을 빵도 없어서 야생의 메뚜기를 잡아먹고 바위에서 나는 꿀을 찾아다니며 겨우겨우 안 굶주리고 사는 완전 100프로 자연인이라고 설명합니다.
요즘같이 한 끼 몇 십만원짜리 식사를 하고 자랑삼아서 사진찍어서 인스타그램이나 개인홈피에 올리는 젊은이들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식사를 하는데 뭐가 그렇게 기뻐서 나는 기쁨이 충만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레요한도 한 때는 속된 말로 잘 나가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세레도 받고 설교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금씩 자기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는 그 많던 자기 교회 신도들이 다 빠져나가고 다른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세레요한의 제자들이 조사하고 알아본 결과 바로 옆 동네에 새 교회가 생겼는데 그 교회로 자기 교회 성도들이 다 가버린 것입니다.
바로 예수라는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났는데 그 가르침과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고 탁월해서 자기 교회에 있던 수 많은 신자들이 다 그리로 빠져나간 것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랍비여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레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세레요한은 아마 실망감도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설교를 듣고 세레를 받고자 많은 사람이 몰렸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들이 다 다른 곳으로 가버리니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아쉬움이 컸을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레요한의 제자들도 투덜대는 것입니다.
괜히 우리 선생님이 에수라는 분을 추켜 세워서 우리 신도들이 다 그리로 갔어요.
속된 말로 말하면 손님을 다 빼앗겼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도 나쁘고 사정도 좋지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세레요한은 나는 기쁨이 충만하도다 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중에 그런 심보가 있었을리 모르겠습니다.
아휴 우리 선생님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시나?
손님 다 빼앗겨서 우리는 쫄쫄 굶게 생겼는데 무슨 기쁨이 충만하다고 하시는가?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네.
아마 요즘의 물질과 환경과 지위와 여건만으로 기쁨을 찾으려는 젊은이들도 이러한 제자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도저히 기쁠 것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왜 세레요한은 나는 기쁨이 충만하다 라고 했을까요? 참된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는 요즘세태에서 우리는 세레요한의 기쁨을 발견해 보길 원합니다.
1.세레요한의 기쁨은 사명의 기쁨입니다.
28절 말슴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냄을 받은 자라.
보냄을 받았다를 한문으로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보낼 사 명령 명.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보내셧다는 것입니다.
즉 세레요한의 말은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이유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나타내고 증언하라고 보내셧지. 내가 잘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라고 보내신 게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참된 사명을 알고 그 사명대로 행하였기에 기쁨이 충만하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 청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대로 살 때에는 인생이 즐겁고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사명 없이 그냥 마지 못해 교회나오고 갈 데 없으니까 심심해서 교회 나오고 교회오면 그대로 밥이라도 얻어먹으니까 교회 나온다면 그 신앙의 삶은 참으로 재미 없고 답답하고 즐거움과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청년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기능공이 되어서 이 세상에 나가서 한 몫이라도 그리스도인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셨지 한다면 그 청년의 삶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사명 없이 마지 못해 살고 순간의 쾌락과 즐거움과 향락으로만 살아가는 인생은 기쁘고 즐거울 것 같지만 그저 공허한 기쁨으로만 헛 배만 채우는 것입니다.
교회 올 때도 그저 마지 못해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갖고 교회 나오면 기쁨이 넘칩니다.
내가 비록 교회 와서 아무 하는 일도 없고 봉사도 별로 못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로 이 교회를 위해 조그마한 보탬과 헌신이라도 하라고 나를 이 곳에 보낸 거야.
그냥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하고 주위 성도들에게 환하게 웃어주고 인사해 주고 작은 교회니까 더 할 일이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 주신거야.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에 오고 사명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늘 그 마음에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찹니다.
별 볼일 없는 교회 정리를 하고, 찬양으로 섬기고, 발고 환하게 성도들을 맞아주고, 교회 봉사랑 섬김도 감당해주고 나서 나는 나의 사명을 오늘 다 했구나 하면 내 마음은 늘 뿌듯함과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성도의 최고의 사명은 뭘까요?
예수님을 잘 믿는 거지요. 그리고 예배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게 최고의 사명인 것입니다.
오늘처럼 자리가 조금 비면 목사는 마음이 철렁 내려 앉습니다.
우리 성도들 예배 안 드리고 어디 갔나? 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성도의 최고 사명은 주일 성수를 잘 하며 예배를 잘 드리며 늘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배 하나를 드려도 사명감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면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 각자 인생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다할 때, 참된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2.세레요한의 기쁨은 친구의 기쁨입니다.
29절 말씀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도다.
세레요한은 비록 신랑이 되는 주인공은 될 수 없지만 그 친구가 신랑이 된다고 하니 너무나 기뻐서 좋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친구는 누구일까오?
바로 예수님이시죠.
자신은 비록 예수님의 친구로서 결혼식에 참여해서 주인공은 아니지만 친구가 결혼하는 모습만 봐도 너무 즐겁고 기쁘다 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고 나는 비록 그 옆의 하수인이지만 신랑과 나는 친구이기 때문에 신랑의 기쁨이 바로 나의 기쁨이 된다 라는 것입니다.
더 쉬운 말로 말하자면 예수님과 나는 친구이기에 기쁨이 가득하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친구이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있습니까?
내가 울적할 때 옆에서 나를 위로해 주고, 내가 외로울 때는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고, 내가 괴로울 때는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친구가 되어서 서로 서로 교제하며 같이하며 인생을 함께 한다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기쁨이요 즐겨움 인 것입니다.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울 때 세상 쾌락이나 향락이나 마약으로 그 공허함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친구 되신 에수님으로 마으므이 만족함을 누리게 되니 참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친구의 기쁨이다 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인 예수님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에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3.세레요한의 기쁨은 낮아짐의 기쁨입니드.
뭐라고요? 자신이 낮아져서 오히려 기쁘다 라는 것입니다.
30절 말씀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냥 이유 없이 낮아지고 비천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은 낮아지고 쇠하여지기 때문에 즐겁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내가 성공하고 잘되고 잘 먹고 부유하고 출세하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꼭 평소에는 교회 안오다가 무슨 선거시즌만 되면 무슨 동네의원 시의원 국회의원 후보들이 교회에 나와서 허세를 부립니다.
자기는 모태신앙이었다든지 자기는 어려서 교회를 잘 다녔다든지 하면서 꼭 필요할 때면 교회에 와서 외식적인 모습을 보이지요.
자기가 흥하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은 기쁨도 즐거움도 없는 인생입니다.
에수님을 위해서라면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나는 쇠하여지고 망해도 괜찮습니다. 하며 사는 성도는 그 마음에 즐거움과 기쁨이 충망합니다.
조금 내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별로 끄떡도 안합니다.
나는 주님이 흥하여진다면 쇠하여지고 사라져도 괜찮은데 이깟 것 고통과 수고가 무슨 대수냐?
하면서 복음과 주님이 흥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고난은 다 참아내고 감수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나라와 그 의을 위해서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살기에 나한테 닥치는 고난과 역경과 환난은 그저 담담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그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세레요한은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세상의 환경이나 내 육신의 즐거움이나 만족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세레요한의 기쁨처럼 사명의 기쁨, 친구의 기쁨, 낮아짐의 기쁨으로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