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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이야기 - 1
우선 본 란을 마련해주신 카페지기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곳에서 연재하게 될 우리역사 이야기는 인터넷신문인 자주민보에 연재를 했던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또 본 란에서 연재를 하게될 우리 역사 이야기는 올해 7월 중순경에 책으로 출판이 될 예정입니다.
출판사와는 이미 출판 계약이 완료가 되었습니다.
책은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1권》으로 출판이 되게 됩니다. 또 같은 이름으로 2, 3, ...권으로 연속 출판이 됩니다.
카페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혹시 읽는 과정에 어렵다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댓글로 질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실하게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참고로 본인은 빛나랑 요양보호사 교육원 제57기 수료생 입니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하신 말이다. 즉 역사를 잃고 잊어버린 민족은 그들에게 미래가 없음을 말 하는 것이다. 단재 선생께서 이 말을 할 당시 우리 겨레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일반 민초들은 제 땅에서 살면서도 제 땅이 아닌 남의 땅에 사는 것처럼 핍박과 설움을 받고 살았으며, 뜻이 있는 우국지사들은 만주로 상해로 중경으로 유랑을 하면서 나라를 찾기 위하여 험난한 길을 걸었다.
단재 선생으로 말 하면 20세기초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사학자로 독립운동가로 존경을 받았던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으며,힘에 의거한 항일무장투쟁을 주장하셨던 분이다.단재선생은 또한 무력에 의한 혁명을 주장하셨던 진보적 사상가이자 혁명가이기도 하셨다.
민족주의자*독립운동가 이자 혁명가이신 단재선생께서 왜 위와 같은 말을 했는지 현대를 살아가는 후세들로서는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으로 본다.
현시기 남쪽의 역사적 관점과 역사를 대하는 백성들의 태도를 보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오신 조상들 하늘을 우러르며 통탄을 할 것이다.후손된 자로서 한 없이 부끄럽고 죄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다.
작금 남쪽의 현실을 보노라면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 눈을 감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예 역사, 민족이라는 말만 해도 고리타분하다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더 나아가서는 흔히들 <좌빨> 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게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말문이 막힐 뿐이다.만약 이런 남쪽의 현실을 조상들이 알게된다면 어쩌겠는가?
그가 배달겨레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배달겨레의 얼과 넋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마땅히 자신들 조상의 살아온 발자취(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우리 역사 소중함을 알고 더욱더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수난사
우리 역사는 크게 세 번에 걸쳐서 수난을 당하게 된다.물론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진나라의 지시황이 저지른 《분서갱유》 역시 우리 겨레의 역사서와 문화서 그리고 귀중한 사서들을 불태운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1)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대하여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우리의 역사서,문화서,귀중한 서적들을 불태운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재야사학자들은 상ㆍ고대와 중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우리 겨레의 역사적 강역이 만주와 한반도에 머무르지 않고 중원대륙과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드넓은 강역이었다고 주장을 하고있으며, 근래에 들어와서 수많은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직까지는 반론이 우세하다. 하지만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또한 그 나름의 근거와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 문제에 대해서는 강단사학자건 재야사학자들이건 마음을 비우고 함께 연구를 하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배달겨레(東夷族- 차후에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의 발자취를 지워버리고 화하족(和夏族 - 차후에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서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간략하게 언급이 있었듯이 배달겨레의 얼과 넋, 피를 이어받은 사학자들이라면 겨레의 입장에 서서 조상들의 발자취를 함께 연구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2) 고구려,백제 멸망후에 단행된 분서(역사서를 불태움)
“신이 삼가 생각하기로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를 몹시 원
망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에 그 국서고(國書庫)를 부수
고 단기고사(檀紀古事)와 고구려ㆍ백제사를 전부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진국(大震國-발해) 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쓴 단기고사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일반적으로 강단사학에서는 우리 겨레의 발자취(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들에 대한 분서 및 왜곡이 없었던 듯 아예 언급 조차 되지않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대진국(발해)시대에 이미 우리의 역사서들이 불태워 없어졌다고 한탄을 하고 있다.
대야발은 또 다른 사실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신이 명을 받은지 13년 동안 주야로 근심과 걱정을 하며, 부탁을 어길까 두려워 여
러 곳을 돌아다니며, 석실(石室)에 있는 장서와 옛 비(碑)와 흩어져 있는 사서를 참
고하다가, 돌궐국(突厥國-현 터키,투르크메니스탄)에까지 두 번 들어가 고적을 탐사
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위 문장은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져왔던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을 하여 <형제국> 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뛰어넘어 터키(현지인들은 뛰르끼예라고 한다-서돌궐)와 중국서부 신강위그르자치구와 접해있는 뛰르끄메니스탄(딴-땅이라는 우리 말,동돌궐)이 우리와 민족성면에서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인용을 한 대야발의 단기고사에 나오는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후 당나라에 의해서 우리의 사서들과 문화에 대한 서적 등 우리의 귀중한 수 많은 기록물들이 불태워 없어짐으로서 우리 역사 문화가 뒤틀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진국(발해) 대야발 뿐만 아니라 조선 숙종원년에 북애노인이 집필한 《규원사화》에도 언급이 되고 있다. 물론 규원사화에서 북애노인은 위에서 언급한 대야발과 같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군 설인귀와 소정방이 사서들을 불 태웠다고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않고는 있다. 하지만 북애노인 역시 우리의 역사적 기록물들에 대한 침탈과 분서들로 인하여 후세들에게 제대로된 역사를 전해주지 못함으로서 당시를 사는 조선인들이 사대주의사상에 찌든 것을 한탄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조선에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춘추(春秋)》를 지어 명분(名分)을 바로 세우고 《강목(綱目)》을 써서 정윤
(正閏)이 나뉘었는데, 춘추와 강목은 중국 선비의 힘으로 쓰였다. 우리나라의
옛 경서와 사서들은 여러 번 병화(兵禍)를 입어 다 흩어지고 없어졌다.후세에
고루한 자들이 중국 책에 빠져서 주(周)나라를 높이는 사대주만이 옳은 것이
라 하고, 내 나라 근본을 굳건히 세워 그것을 밝게 빛낼 줄 몰랐다. 이는 등나
무나 칡넝쿨이 곧게 뻗어갈 줄은 모르고 얽어매기만 하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천
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 조공을 바치는 사신을 수백년 동안 북쪽에
보내면서도 이를 한스럽게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만주를 피 맺힌 원수로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
북애노인 역시 《규원사화서문》에서 “우리나라의 옛 경서와 사서들은 여러 병화(兵禍)를 입어 다 흩어지고 없어졌다.”고 한탄을 하고 있다. 이는 앞서 대야발이 <단기고사서문>에서 했던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북애노인>이 규원사화서문에서 한탄을 했던 내용은 대야발이 단기고사서문에서 했던 당나라 장군 소정방과 설인귀가 저질렀던 서적들에 대한【병화】이외에도 더 많은 병화가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애노인이 《규원사화》를 집필하던 시기는 숙종 원년(AD1675년) 이다.지금으로부터 339년 전 이다. 북애노인에게 신통력이 있었던가? 아니면 우리 겨레들의 삶이 원래 그래서 그런 것인가? 북애노인이 규원사화서문에서 한탄을 했던 상황이 신통하게도 오늘의 우리를 말 해주는 것 같다. 즉 북녘 형제들을 피 맺힌 원수로 대하는 현실이 340여년전 북애노인이 한탄했던 당시와 너무나도 똑같음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위에 북애노인이 《규원사화서문》에 쓴 내용이 너무나도 현재의 남쪽 상황과 똑같다. 당시에도 주(周)나라를 섬기고 주(周)나라의 서적들인 <춘추春秋> 통해서 명분을 세우고 <강목綱目>으로 정윤(正閏)을 나누었듯이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는 사실 근거 자료도 불분명한 <성경>을 통해서 모든 걸 재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서양철학>만이 오로지 인간본성을 해석하였다는 듯이 섬기며 우리 조상들 대대로 내려오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터부시하거나 우리 조상들에게는 아예 고차원적인 정신사상의 체계가 없었던 듯이 무시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과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그저 탄복을 할 뿐이다. 이런면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배우지 못했다고 여기는 사람들 보다는 많이 배웠다고 하는 계층에서 더욱 우심하게 나타나는 현실이 더욱더 개탄스럽다.
오늘 남쪽의 현실은 북애노인이 한탄했던 그 당시 보다도 더 한심한 지경에 빠져있다.이에 대해 한탄을 하면서 우리 것을 되찾아야 우리 겨레의 미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한 마음이리라고 본다. 오늘 남쪽의 현실은 얼과 넋은 이미 서양과 일본 그리고 어중간한 민족들의 잡스러운 것들로 물들어있으며 심지어 말과 글까지도 스스로 내던져버리는 형국이니 어찌 이 현실이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오늘날 남쪽의 이러한 현상들 역시 우리 겨레의 얼과 넋이 깃든 찬란한 조상들의 삶의 발자취(역사)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않고 왜곡되고 뒤틀어진 거짓 역사만을 주입시키면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 문명등은 우수했다고 가르치는 역사교육현장의 현실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조선시대 역사왜곡 및 분서들에 대하여
① 수거령에 대하여
우리 겨레는 이민족에 의해서 역사가 침탈이 되고 분서가 된 것만도 억장이 무너져내릴 판에 우리 겨레 스스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귀중한 역사와 문화서들 그리고 서적들을 거둬들여 불사르고 서고에 쌓아놓고 특정한 관계자 이외에는 누구도 보지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조선조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고사서 수거령》에 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능지처참을 한다는 명까지 내렸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조선조정의 <사서수거령>에 대해 재야사학자인 이병화 선생은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하고 있다.
『 세조 때무터 예종을 거쳐 성종 때까지 계속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근세조선의 왕조는 왜 고사서를 없애려고 했는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장 큰 원인은 상고사와 고대사 또 중세사까지도 대륙에서 이루어졌던 사실
을 밝히지 않으려는 의도가 가장 우선적인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대륙의 영토를 상실한 근세조선 왕조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원인은 대륙의 명(明 )에 대해 사대하고 있던 근세조선 왕조로서는
명의 역사보다 찬란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밝히게 되면 그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할 것임을 감안하여 적극적으로 고대사를 감추려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조속한 시일 내에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복원시켜야 한다.』
위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아래 문장들에서 언급을 하고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깊이 사색을 해야할 것으로 본다. 우리는 제대로 된 우리의 참된 역사ㆍ문화에 대해서 다시 찾지 못할 때에는 우리 후손들은 이민족의 노예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여기에 대해서는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려고 하는 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우리 모두 나서야 할 것이다.역사를 다시 회복하는 일은 나의 일 우리의 일이지 특정한 세력들의 전유물도 아니며, 그들만 역사를 연구하면서 특권을 누리라고 조상들은 결코 허락을 하지않았다.그들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을러매고 있는 형국일 뿐이다.
② 김교헌 선생의 신단실기 – 경사재액(經史災厄)
사서(史書)를 태워버림
단군(檀君)의 고사(古事)와 경전(經傳)이 부여(夫餘 - 지명인 부여가 아니고 고대국가 명)와 고구려에 전해져서 번역하여 간행(刊行)된 것이 많았다.그러나 신라가 당(唐)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하고 그 서고(書庫)를 불태우고, 민간(民間)에 흩어져 있던 것까지도 또한 모두가 가져다가 태워버렸다.
이 때 부여에 간직되어 있던 것이 발해(渤海)에 전해졌으나, 금(金)나라가 신라와 당나라가 한 것을 되풀이하다 태워없앴다. 혹 남 모르게 은밀히 감추어둔 것이 있어서 불에 타지 않고 전해진 것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세조(世祖) ㆍ 예종(睿宗) ㆍ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팔도(八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명하여 거두어 올렸다가 병화(兵火)로 인하여 타없어졌다.
세조(世祖) 3년 정축(丁丑) 5월에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ㆍ <대변설(大辯說)> ㆍ <조대기(朝大記)> ㆍ <지공기
(誌公記)> ㆍ <표훈천사(表訓天詞)> ㆍ <삼성밀기(三聖密記)> ㆍ 안함로(安含老)
ㆍ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三聖記)> ㆍ <도중기(道證記)> ㆍ <동천록(動天錄)
ㆍ <지화록(地華錄)> 등 문서(文書)를 사사로운 곳에 간직해두는 것은 마땅치 않
으니 만일 간직하고 있는 자가 있으면, 이를 허락하에 바쳐 올리도록 널리 공사가
(公私家) 및 사사(寺社)에 알리도록 하라.” 했다.
예종(睿宗) 기축(己丑) 9월에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지공기(誌公記)> ㆍ<표훈천사(表訓天詞)> ㆍ <삼성밀기(三聖密記)>ㆍ<도증기
(道 證記)> ㆍ <지화록(地華錄)> 등 여러 가지 책을 집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한양
은 10월 그믐 안으로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 먼
도는 12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에 바치게하라. 바친 자는 2계급 올려주고, 바치
지 않은 자는 남을 시켜 고발하게 하여, 고발한 자는 위에 말한 것에 의하여 상을 주
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할 것을 속히 안팎에 알기도록 하라.” 했다.
<睿宗實錄>
성종(成宗)이 즉위한 기축(己丑) 12월에 글을 내려 각도 관찰사(觀察使)에게 이르기를,
“전에 <지공기(誌公記)> ㆍ <표훈천사(表訓天詞)> ㆍ <삼성밀기(三聖密記)> ㆍ
<도중기(道證記)> ㆍ <지화록(地華錄)> 등 여러 책을 빠짐없이 찾아서 올려보내도록
이미 유시(諭示)한바 있는데, 이미 책을 거둔 것은 먼저 유시(諭示)에 의하여 올려보내
고, 남은 책은 그대로 거두어 바치도록 하라.”했다.
<成宗實錄>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우리 조상들 스스로 역사ㆍ문화(종교,사상사 포함)서들을 불 태우고 없애버렸다는데 대해서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어도 독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김교헌 선생이 쓴 《신단실기》에서 관련된 부분에 대한 전문을 실었다.
위에 언급된 서적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고를 해나가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할 것이다.오늘 『우리 역사 이야기 – 1편』에서는 우리 역사가 고대로부터 어떻게 침탈 및 분서(불에 태움)를 당해왔으며 왜곡을 당해왔는지에 대해서 논해보는 장이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가 외세에 의해서 때로는 우리 조상들 스스로에 의해서 어떻게 침탈과 왜곡을 당해왔는지 우리 역사의 수난사 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 역사와 문화, 문명은 현생인류 최고, 최대의 꽃을 피워왔으며 이민족에게는 하늘과 같은 존재로서 그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온 민족이다. 역설적으로 만약 우리 민족이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였다면 우리 조상들이 상고대부터 시작해서 그리도 많은 자료들을 남겼겠는가? 만약 우리 겨레가 열등하고 못난 존재였다면 이민족이 굳이 우리 역사ㆍ문화들에 대한 기록물들을 불태우고 없애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자료가 없으니 그렇다 쳐도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고 당나라에 의해서 우리 역사와 문화들에 대한 기록들을 불태우고 없애버렸다는 것은 사실로서 기록에 남아있는 것 아닌가?
당나라에 의해 우리의 역사나 문화, 문명에 대해 기록한 귀중한 서적들이 불타 없어졌다는 사실을 대진국(발해) 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서문》과 그로부터 천삼백여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김교헌 선생이 저술한 《신단실기》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그러나 그 동안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렇듯 이민족들에 의해서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록들이 불태워지고 없애버린 세월은 무려 1400여년을 헤아린다. 참으로 집요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사실에 후손들은 얼을 바짝 차려서 이제라도 잃어버린 우리의 참된 역사를 되찾고 복원을 해서 우리 후대들에게 옳바른 조상들의 역사를 전해줌으로서 우리 후대들은 민족적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사 속에서 찬란히 꽃 피월 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줌으로서 먼저가신 조상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본다.기존에 식민사학에 머물러 그게 다라고 하기에는 우리 역사 침탈에 대한 세월이 너무 길고 집요하며 이로인한 폐해는 이루 상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남쪽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 증명해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록유산들에 대한 분서와 침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리 조상들의 기록문화유산들의 분서와 침탈로 인하여 우리 후손들이 조상들의 역사를 찾아 전수를 해주고 얼과 넋은 불러일으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비록 그간에는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이제부터라도 늦었다 생각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는 겨레의 구성원들이라면 이 점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할 것이며, 자신들이 후손으로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심사숙고해야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와 문명사에 대한 기술이 들어가기 전에 그동안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록들이 어떻게 침탈이 되고 멸실이 되었으며 왜곡이 되었는 지를 먼저 고찰해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따라서 앞으로 연재되게 될 《우리 역사 이야기》를 볼 때에는 독자들은 우리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된 사실을 필히 기억하면서 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다음회차부터 몇 회에 걸쳐서는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가 어떻게 왜곡이 되고 침탈이 되었으며 멸실이 되었는지에 대해 기고를 하게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역사침탈에 대해서 모르고서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을 하여도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을 것이다.그동안 일제에 의해서 심하게 왜곡된 식민사학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역사적 진실에 대한 기술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은 물론이려니와 심하게 반발을 하는 현상들도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 조상들 스스로 자신들의 잘 못을 숨기기 위하여 조상들의 발자취를 은폐하고 왜곡하고 멸실을 하였는데 심지어 이민족이라면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더구나 일제강점기 왜인들은 우리 역사와 문화기록물들에 대한 불태움과 멸실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맛게 악랄하게 왜곡까지 하였으니 이게 어찌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요 역사라고 하겠는가? 앞으로 《우리 역사 이야기》를 관심있게 보는 독자들은 이 점을 항상 잊지말기 바란다.
단기 4347(서기 2014)년 4월 7일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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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