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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노래가 당신의 것입니다’ - 역사 속에 묻혔던 문단의 왕! 재조명되어야
오월은 푸르다. 그 푸르름 만큼이나 크고 작은 행사들이 많은 달이기도 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을 비롯해서 가정적인 행사가 많아 ‘가정의 달’이라 하지만 결혼식이며, 각종 문화행사도 다투어 열리고 있어 토요일 일요일엔 행사가 겹쳐 당혹케 한다. 5월 21일 오장환문학제가 열리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장환은 1918년 5월 15일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해주오씨 오학근과 청주한씨 한학수사이에 4남 4녀 중 3남으로 처음엔 서자로 태어나 나중엔 적자가 되었다. 보은 회인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수료하고 경기도 안성 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는 1931년 14세에 휘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을 한다. 16세의 나이로 33년 ‘조선 문학’지에 시 ‘목욕간’이란 산문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18세엔 일본 동경 유학길에 올라 지산중학교를 수료후 ‘시인부락’, ‘낭만’ 동인으로 참가했다. 20세인 37년에는 명치대학 전문부 문과문예과 별과에 입학,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했고 첫 시집인 ‘성벽’을 100부 한정판으로 자비로 출간했다. 22세엔 두 번째 시집 ‘헌사’(39년)를 간행 했다. 당시 정지용이 문단을 주름잡던 시절, 그의 제자인 오장환이 새로운 왕으로 군림하기 충분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그와 비슷한 연배인 서정주, 박두진, 박목월 등은 몇 년씩 후에 문단에 나온 문단 후배들이다. 어린천재 시인이 혜성처럼 나타나 당시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28세에 병원에 입원중 광복을 맞으며 29세에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을 간행했고,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46년)을 간행했다. 30세에 결혼 후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47년)을 간행했다. 그 후 48년 월북하여 지병인 신장병으로 51년 피 끓는 젊은 나이에 3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88년 6월 월북 작가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로 오장환 연구 및 작품 출판이 허용되면서 ‘오장환 전집 1, 2’ (창작과 비평사)를 비롯해서 많은 출판물이 나오고, 오장환시인의 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14명, 석사학위를 받은 41명의 논문 및 연구자료 전시되어있어 참석자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고, 오장환 연구가 매우 활발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오장환 문학제가 열리고 있는 보은 문화원에는 오후 2시 본 행사에 맞춰 도착을 했다. 식전행사가 10시부터 ‘백일장’, ‘학생 휘호대회’, 가 열리고 있었고, 회인 그의 생가에서는 ‘생가 예술제’ ‘길놀이’가 열렸지만 본 행사에만 참관을 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겼다. ‘아 내 노래가 당신의 것입니다’ 란 슬로건을 내걸고, 축하공연으로 ‘혜화동푸른섬’의 ‘어린누이야’등 오장환의 시에 곡을 붙여 많은 박수를 받으며 송찬호의 사회로 2시부터 막을 올렸다. 충북작가협회에서 제작한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서’ 영상으로 보는 코너는 보은인의 한사람으로 가슴 뭉클하게 했다. 10회까지 행사가 진행 되면서 오장환이란 이름 석자가 오히려 잊혀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번 행사에서 돋보이는 점은 1. 지역 주민들은 물론 대외적으로 ‘오장환은 누구인가?’ 알리기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2. 오장환이 태어나면서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를 밀착 취재하며 숨었던 귀중한 자료들을 발굴해 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그의 사진을 비롯해서 1933년 12월 발간된 교지 ‘휘문 11호’에 실려있는 ‘조개껍데기’ 당해 임시호에 ‘아침’ ‘화염’ 등 목욕간 이전의 작품들이다. (작품내용은 생략) 3. 이중섭 화가의 오장환 추모그림 4. 1947년 발간된 중학교 5~6학년 교과서에 오장환 시 ‘석탑의 노래’ 가 실렸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5. 1996년 제1회 오장환문학제를 시작으로 제10회까지 오면서 금년엔 생가복원 및 문학관 건립 사업을 서두르고 있다 한다. 또한 오장환 문학상 제정을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문학인의 한사람으로써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문단계 원로 원용문 회장 (서울 광진문인협회 회장, 경기도 여주문화원장, 교원대 교수 역임,)은 ‘추진위원회에서 수고가 많았다. 대형행사로 치러지면서 시행착오도 없잖아 있으리라 본다. 좀더 보완하고 홍보하면 전국규모의 훌륭한 문학제로 성장할 것 같다.’고 말했다. 2005년 신사임당 산문부 백일장에서 당당히 장원을 한 박옥선 시인은 행사를 참관하고 ‘오장환 시인이 지금까지 말만 들었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줄 이제야 알았다. 역사 속에 숨어있는 인물을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국의 예술하는 모든 분들이 참여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란 욕심을 부려본다. 이 행사가 발전 하기위해서는, 행정기관의 후원을 받아 분명, 문학인이 그 주체가 되고, 문학인의 축제의 장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금년엔 알찬 자료를 많이 준비해 발표를 하다보니 본행사가 3시간이 넘어서야 끝났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장환 문학제가 길이 남기 위해서는 주체측과 주민, 참여자가 한마음으로 많은 박수를 보낼 때 그 행사는 발전하는 것이고, 대중 앞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보은인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행사 준비 과정에서 귀중한 자료를 많이 찾아내고 공을 세운 도종환 추진위원장과 박재완 문화원장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께 큰 박수를 보낸다. |
첫댓글 어두운 시절을 살다 간 문인들을 조명 발굴하는 작업이야 말로 살아있는 자 들의 몫이지요. 지역인 중심 운동이 연륜을 거듭하면서 전국 규모로 발전하지요. 좋은 결실 있기를!
어쨌든 문학행사도 행사지만 그런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형같은 분이 우리 문단에 귀감이 되는 모범이며 거듭 건투를 빕니다.
정촌 선생님 칭찬 감사 합니다. 원용문 회장님과 박옥선 시인이 같이 다녀 왔습니다. 가는 길에 청남대도 관광 했어요
좋은곳에 다녀 왔읍니다 장은수 선생의 글을 읽고 그분의 놀라운 발자취를 세삼 알게되는군요 어두운 역사속에 가려 묻치였든 오장환시인의 발굴은 우리 문학사에 귀중한 재 조명의 기회가 아닌가 싶네요 수고하시였읍니다
2년 전 10월 보은군에 있는 '한국비림박물관' 에 행사가 있어 참석하고 정지용 생가, 오장환 생가, 육영수 옛집 등을 돌아본 적이 있었지요. 오장환 생가는 그야말로 다 쓸어져가는, 볼품없는 초가였지요. 마당 주위에 심겨진 감나무 가지 위로 붉게 익은 감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