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럽다
‘을사년(乙巳年)’은 얼마나 비통한 한 해였을까
‘가을 바람 불고 낙엽 뒹구는 교정’, ‘비 내리는 겨울 바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가 서 있는 폐가(廢家)’ 등의 풍경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음산하다, 스산하다, 으스스하다, 을씨년스럽다’ 등이 아닐까 한다.
‘을씨년스럽다’는 어디에서 온 말인가? ‘-스럽다’가 ‘복스럽다,
자랑스럽다’에서 보듯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 쓰이므로 ‘을씨년’이 명사라는 점과, 또
‘을씨년스럽다’에 ‘을씨년’의 성질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은 ‘을씨년’의 어원을 밝히는
것으로 자연히 드러난다.
‘을씨년’이 ‘을사년(乙巳年)’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 제법 널리 퍼져 있다. 여기서의 ‘을사년(乙巳年)’은 정확히 1905년이다. 이 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박제순, 이완용 등의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내세워 강제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 정치를
실시한 원년이다. 형식적으로는 1910년 일본에 강점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에 의해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민족에게 매우 치욕적인 사건이었으니, 그 일이 벌어진 ‘을사년(乙巳年)’은 참으로 비통하고 허탈한 한 해였을 것이다.
조선 민족은 강점의 슬픔과
허탈함과 울분을 표현하기 위해 ‘을사년스럽다’는 말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을사년스럽다’는 처음에는 ‘을사년의 분위기처럼
쓸쓸하고 침통하다’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을사년스럽다’라는 단어는 문헌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을사년스럽다’에서 ‘을씨년스럽다’가 변형되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빈상셜」에 나오는
‘을사년시럽다’는 물론 ‘을사년스럽다’에서 제4음절의 모음이 달라진 것이다. 이 소설이 씌어진 1908년은 ‘을사조약’이 맺어진 시점에서 불과
3년 뒤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 등장한 ‘을사년시럽다’를 그 초기 어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이렇게 해서 ‘을사년스럽다’의
‘을사년’을 ‘乙巳年’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을사년스럽다’가 1920년 판
『조선어사전』과 1938년 판 『조선어사전』에는 ‘을시년스럽다’로 표기되어 있다. 제2음절의 모음이 달라진 것이다. 이는 모음조화와 관련된
모음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겠다. 사전으로는 『큰사전』(1957)에 와서야 지금과 같은 ‘을씨년스럽다’는 어형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최근의 ‘을씨년스럽다’는 ‘날씨나 분위기가 스산하고 쓸쓸하다’는 의미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살림이 매우 가난하다’는
의미로도 쓰인다는 점이다. “을씨년스럽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에 쓰인 ‘을씨년스럽다’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을씨년스럽다’에 ‘가난하다’는
의미가 생겨난 배경이 궁금하지만 딱히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아울러 북한에서 ‘을씨년스럽다’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거나
매우 지긋지긋한 데가 있다’는 의미로 쓰는 것도 매우 이채롭다. 같은 단어를 남북한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인데, 북한어가
남한어에 비해 의미 파생의 정도가 심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북한에서 ‘스산하고 쓸쓸하다’의 의미는 ‘을스산하다’가 대신한다. ‘을스산하다’는
‘을씨년하다’와 ‘스산하다’가 뒤섞여 만들어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