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晉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 때는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거열주(居烈州)가 되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가,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진주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삼는다. 강씨가 진주에 세거한 것은 8세 강우덕(姜友德)이 이거(移居)한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렇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강씨 집안이 북방에서 남쪽인 진주로 남하한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강진(姜縉)이 진주 지역의 진양후(晉陽侯)로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외에 강우덕의 부친으로 고려 말 문하찬성사를 지낸 강시(姜蓍)의 아들이며 우왕의 사위였던 강회계(姜淮季)의 형인 강회백(姜淮伯)이 진양(晉陽)에 귀양 간 계기로 진주를 세거지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진주강씨의 시조인 강이식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봉길선(奉吉線) 원수림(元帥林) 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 문화혁명 때 소멸되고 돌조각과 거북좌대만이 묘역에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은 확인된 바가 없다.
분적종 및 분파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강씨는 진주, 금천(衿川), 안동(安東), 배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여러 본관이 있다. 그러나 현전하는 강씨는 모두가 진주강씨에서 분적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강이식을 동일 시조로 하여,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로 하는 박사공파(博士公派), 강위용(姜渭庸)을 중시조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 강원용(姜遠庸)을 중시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강민첨(姜民瞻)을 중시조로 하는 은열공파(殷烈公派),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 강궁진(姜弓珍)을 중시조로 하는 인헌공파(仁憲公派) 등이 있다. 박사공파는 어사공파(御使公派)라고도 하며, 시중공파는 관서대장군파(關西大將軍派)라고도 한다. 인헌공파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衿川)이라고 하여 금천강씨라고 한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남해시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북도 영풍군 전라북도 순창군 제주도 북제주군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진주강씨는 300,724가구 총 966,71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첫댓글 진주강씨 문중 여러분 경주이씨 자료만 올려서 죄송하네요 시간날때 자료를 찾아서 올려볼게요 관심있는 분들은 정보를 정리해 주세요 그러면서 배우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