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亭 이지함 풍류기행기
지난 11월 10일 토요일 새벽, 평소보다는 약간의 기대감과 설레임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한달에 한번 찾아오는 자유행복학교 풍류기행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대충 먹고 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당산역으로 향했다. 아침이라 날씨는 조금 추웠지만 하늘은 맑고 화창했다. 약속 장소에는 이미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부지런한 회원 몇 명이 먼저 와 있었다. 우린 한달만에 다시 만나는 기쁨으로 서로 악수를 했고 버스에 탑승했다. 오전 7시 30분 버스는 당산역을 출발했고 8시경 양재역에서 회원 몇 명을 더 태운 후 이지함 선생의 생가터가 있는 충남 보령으로 곧장 출발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우리는 토정 선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1517-1578) 선생의 호는 수산(水山)이고, 그의 조상은 고려 말 삼은(三隱)중 한 분인 한산(韓山) 이씨의 시조 이색(李穡)이다. 선생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복병이 마을에서 출생했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유학은 물론 역학 ㆍ의학ㆍ수학ㆍ천문ㆍ지리에도 해박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번 기행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가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개발론과 해외통상론을 주장했을 만큼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역학에 밝고 다소 기이한 행동을 했던 인물로만 알았던 나는 이번 기행에서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막내아들로 태어난 토정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큰형 지번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온 다. 학문에만 심취했던 이지함은 송도에 살던 서경덕(화담)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지함이 천문, 지리, 역학, 의학, 수학, 복서(卜筮)에 해박한 것은 이때 서경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하여는 19살 연하였던 율곡(栗谷)과 남명 조식(趙植)은 물론 백사 이항복까지도 그를 경외(敬畏)하였다고 한다.
버스안에서 토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버스는 보령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주말이라 늦가을 단풍 구경가는 차량들로 인해 예상보다 한시간 가량 늦게 도착했다. 먼저 찾아간 곳은 그가 태어난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복병이 마을과 화암서원이다. 복병이 마을은 현재 청천저수지에 수몰되어 있어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고 대신 저수지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는 화암서원에서 선생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화암서원에는 토정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지만 사당의 문이 잠겨 있어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좁고 아담한 서원은 관리인이 살고 있는 듯 했으나 인기척이 없었고 구석구석 퇴락한 모습으로 정적만 감돌고 있었다.
화암서원은 1610년 충청관찰사 정엽과 이지함의 문인인 구계우가 주도하여 건립하였으며 1686년 화암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고 한다. 그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철폐되었다가 1922년 다시 복원되었고 청천저수지 축조로 1959년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 화암서원에는 이지함 선생 등 다섯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지역 유림들이 매년 봄가을로 제향하고 있다.
남향으로 축조된 화암서원 앞에 펼쳐져 있는 넓은 청천저수지에는 늦가을 햇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주변 산의 울긋불긋한 단풍은 수면에 반사되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리는 화암사원 입구 계단에 서서 이지함 선생이 태어나고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었던 수몰지역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토정 선생이 이 산골마을에서 꿈을 키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겠지?
화암서원을 뒤로 하고 우리는 선생의 묘소가 있는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로 차를 몰았고 20여분 정도 지나 선생의 묘소에 도착했다. 토정 선생의 묘소는 형제 및 존비속 묘소 14기가 한데 모여 있는 가족묘이다. 우리는 묘소를 더 자세히 보기위해 경사진 잔디를 밟으며 묘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마침 우리 회원중에는 한학과 역사에 밝은 분이 있어 그분으로부터 가족묘의 풍수학적인 관점과 토정이 이 자리에 묘를 쓰게 된 연유 등을 들을 수 있었다.
묘소와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한다. 토정과 형제들이 조부의 묘 자리를 구하러 갔었다. 지관(地官)이 하는 말이 이곳에 묘를 쓰면 당대에 당상관(정3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이 2명 정도 나올 명당이지만 막내아들인 토정에겐 좋지 못한 터라는 말을 듣는다. 토정은 근심하는 형님들에게 “불길한 일은 제가 다 맡겠습니다. 이 자리로 결정하지요.” 라며 안심을 시킨다. 묘 자리의 효과가 있었는지 과연 당대에 2명의 정승이 배출된다. 큰형의 아들 이산해(山海, 1539-1609)는 영의정에 오르고, 둘째형의 아들 산보(山甫, 1539-1594)는 임진왜란 때 이조판서가 되어 1품 정승의 반열에 당당히 오른다. 반면에 토정 선생의 네 아들은 모두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였는데,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돌림병(전염병)으로 죽고, 차남은 범에 물려 죽는 불행을 당한다.
묘소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묘소 바로 앞에는 안산(案山)으로 불리는 낮은 구릉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너머에는 서해 바다가 잔잔하게 깔려 있어 가히 명당이라고 할만 했다. 묘소 주변에서 한참을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시계는 12시를 훌쩍 넘고 있었다. 우리는 사전에 예약해 두었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이미 여러 가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는 출출하던 터에 보령 동동주로 목부터 축였다. 술잔이 두어잔 돌아간 후 우리는 오늘 처음 참가한 회원 네명에 대해 자기소개를 갖도록 했고 신입회원들은 풍류객답게 멋진 말솜씨로 본인 소개를 했다.
점심을 마친 후 우리는 토정이 말년에 목민관으로서의 포부를 펼쳤던 아산으로 향했다. 현재 선생의 동상과 영모비가 아산시 영인면사무소 부지내에 세워져 있다. 동상은 20여년 전에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이 새마을운동의 원조라며 뜻을 모아 세운 것이라 한다. 면사무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과거 걸인청이 있었던 자리가 있다. 걸인청은 이지함 선생이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여 걸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최하층 서민들을 보살피던 곳이다. 걸인청 옆에는 조선시대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慮民樓)가 아직도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걸인청은 오늘날 국가에서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있는 노숙자 문제를 당시에 이지함 선생이 이미 행동으로 구휼 방안을 보여준 사례로 생각된다.
동상, 영모비, 여민루 등을 둘러보니 그 옛날 토정 선생이 이루고자했던 정치가 눈에 보이는 듯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는 면사무소 맞은편에 있는 술도가에서 막걸리를 사다놓고 뒷풀이 겸 풍류활동 시간을 가졌다.
초암(참가자들은 이름 대신 호를 부른다)님이 먼저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을 낭독하며 분위기를 돋구자 오늘 처음 나온 영소님이 애송시 ‘귀천’을 낭독한다.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중략--------)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어서 백천님이 삼행시를 연속으로 지어 선보인다.
토: 토정비결은 토착적인 토속의 토론들로
정: 정감록 정신과 함께 정말로 정화시켰는데
비: 비결로 비하하며 비판했지만
결: 결집된 결과물로 결말이 났다네.
걸: 걸망맨 걸객 걸음 멈추고 걸상에 걸터앉아
인: 인자의 인술을 인근의 인가에 인도적으로 베풀어
청: 청진기로 청문하며 청심환과 청정약재 처방하네.
이어서 지설님이 인터넷으로 보내온 삼행시가 소개되고
이 : 이리 오너~라, 온갖 세~상시름 다 내~려놓고
지 : 지~화자 어~절씨구 즐~거운 풍류기행 왔으니,
함 : 함께~ 멋들어지게 풍~류를 체험하며, 맘~껏 즐겨 봄~세나!
또 다른 삼행시들이 이어지고 쉴새없이 박수와 웃음꽃이 터진다.
이 ; 이제야 만났구나 옛날 친구들
지 ; 지나간 세월은 무얼하며 지냈는가?
함 ; 함께 만났으니 술잔을 기울여 보세
<황건>
화 ; 화암서원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네
암 ; 암자보다도 자그마한 규모지만
서 ; 서원답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네
원 ; 원래 있던 규모는 더욱 웅장했다고 전하네
<인봉>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자 초암님이 단소를 꺼내들고 한오백년을 멋들어지게 연주한다. 오늘 호를 새로 얻은 은봉(殷峰)님은 틈나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아까 귀천을 낭송했던 영소님이 이번에는 가곡을 한곡 선사한다. 모두 한참동안 흥겨움에 흠뻑 취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귀가할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데 일부 회원들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표정들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리들은 오늘의 이지함 풍류기행에 대해 각자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다. 더 나은 풍류기행을 위한 개선책들이 나오기도 하고 찌들었던 심신이 말끔히 회복되었다는 회원도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미덥고 편안한 분들과 하루종일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스트레스는 없어지고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자재로 소요하며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행복학교 풍류기행은 최근 떠오르고 있는 ‘힐링’의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할 수 있다.
8시경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다음달 풍류기행을 약속하며 아쉬움을 뒤로 한채 각자 집으로 향했다. 멋스럽고 운치있게 사는 것이 바로 풍류인 것을... 세상 사람들은 알까? 모를끼?
첫댓글 이지함 풍류기행의 체험을 낱낱이 알수있는 글이군여
어디에 기고해도 손색없는 집필 실력에 짝짝짝 를 보냅니다.거워하는 자유행복학교 학생들 모습이 상상이 되너요.
담엔 지설 꼭 참석해야징
새벽에 글을 읽노라니 그날의
새벽까지 안자고 뭐했소?? ^^
이지함 풍류기행 다녀오고나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훌륭하신 교장샘님을 비롯하여 초암님 여러분들 ......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이지함선생의 토정비결도 알게되고.....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에너지를 충전하여 일상으로 돌아와 열심히 일하고 있네여....
여러분들께......감사합니다......^^**
초암님 풍류기행기 쓰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풍류기행기를 꼭 남겼으면 합니다. 이런 글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해야겠습니다. 지난 풍류기행도 기억을 더듬어(사진, 삼행시 등을 토대로) 기행기를 완성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교장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아니 초암님이 여행기를 쓰신건가요? 시시콜콜히 상세히도 쓰셨네요?! 감사합니다. 역시 여행기가 있어야 반추하는 맛이 있거든요?
자리를 함께못한 섭섭함을 기행문으로 대신 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