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풀-오대산자생식물원
마을사람들은 별로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날에 저마다 꽃이 되어 다시 태어나기로 했다. 그것이 이 세상에 많은 들꽃이 피어나게 된 전설이다.
강물이 오래 사는 것이 그 깊고 나지막한 잔잔함 때문이듯 저 바람 부는 들판이나 길가의 바위틈에 무수히 많은 들꽃이 피고 지는 것은 속으로 품은 그윽한 사연 때문이다. 우리들 들꽃처럼 소박한 삶을 가로지르는 나날들은 또한 얼마나 운명적이고 기이한 사연들로 갈피를 채우고 있는 것인지...
물이 넘치면 잠기는 마을이란 뜻을 가졌다는 '무너미'란 이름의 마을이 우리나라 곳곳에 얼마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무너미 마을에는 단 한 가구만이 살고 있었다. 아주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 벙어리 소녀가 나무 둥지에 깃들 새처럼 머물고 있는 집.
그때 나는 길을 잃었다. 깊은 산골이었다. 늦은 봄날이었고 해가 지는 저녁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산길이란 참 이상하다. 우리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산이 스스로 그 길을 열거나 닫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때가 많다. 눈앞에 있던 길이 갑자기 없어지기도 하고 금방까지 보이지 않던 길이 하얗게 웃고 있기도 하다. 자연의 상징적인 부분이 그러하듯.
"여기…이게…웬…꽃밭입니까?" 나는 탄성을 감추지 못하면서 노인을 돌아다보았다. 노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아직도 더 옮겨와야 해. 이것들을 물에 잠기게 할 순 없어."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지요?"
한참 후, 내게서 고개를 돌린 노인이 벌판을 바라보며 이윽히 말했다.
"여기 고향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네."
"네?"
노인은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바로 발밑에서 흔들리고 있는 작은 보랏빛 꽃잎을 쓰다듬었다. "이것 보게. 이 '엉겅퀴'는 대단한 심술쟁이라네. 모른 체 지나가면 꼭 할쿼놓거든.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을 용만이라고 부른다네. 우리 마을에 살던 개구쟁이 친구였지."
노인은 이어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피어 있는 다섯 장의 오렌지 빛깔의 꽃을 가리켰다. "어느 세상에나 부모를 일찍 잃은 박복한 아이들이 있는 법이지. 어느 스님이 한 마을에 들어갔다가 부모를 잃은 다섯 아이를 보았다네. 그 마을 사람들도 모두 가난해서 아이들을 제대로 거두지를 못하더라네. 스님은 아이들을 자기가 기거하는 조그만 암자에 데려다 놓고 길렀다네. 어느 해 초겨울에 스님은 아이들과 지낼 겨우살이 양식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네. 그런데 양식을 다 구한 다음날부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네. 스님은 서둘러 돌아오고 싶었지만 한번 쌓이기 시작한 눈은 쉽게 멈출 줄을 몰랐다네. 옛날 깊은 산골에서는 눈이 오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꼼짝도 못 했으니까. 그 겨울이 다 지나 겨우 쌓인 눈을 뚫고 올라가 보니 아이들은 보이지도 않고 이렇게 기다림에 지친 모습의 꽃만 피어 있더라네. 그래서 '동자꽃'이라고 부르지."
노인은 몽상적인 시인 같은 목소리로 날마다 하나하나 끝없이 이야기를 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모두 마음에 새겨 넣었다. 우리의 산야에 피고 지는 들꽃들에 대하여 아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것이었다.
'친구'란 인디언들의 말로는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숨은 의미를 알게 된 뒤로 나는 친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사귈 때 그가 정말로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옮겨 질 수 있을 것인가 헤아려보게 된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친구가 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의 슬픔을 진정한 나의 슬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한번쯤 깊이 사고하게 되었다. 그처럼 어떤 대상에 대해 무언가 더 깊숙이 알게 되면 누구나 더 진지한 태도를 가지게 된다.
"어이쿠 이 녀석, 하마터면 밟을 뻔했구먼." 무심히 밟아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하잘것없는 풀씨를 지극한 애정으로 보살펴 한 송이 어여쁜 꽃으로 피워내는 노인을 보면 내 가슴에도 작은 풀씨 하나가 자라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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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이야기」는 자연의 여백처럼 자리한 들꽃들의 잔잔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수몰지구 '무너미' 마을의 사연 많은 들꽃들과 꽃의 전설을 통해 겸허한 생과 소박한 자연의 참다운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주) 조그만 암자 : 설악산 오세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