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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침묵
- 이원호
끝없는 시작
따스한 햇살이 도로 위에 내리쪼이고 있었다. 열어 놓은 차창으로 도시의 매연에 섞여 코가 시
린 듯한 흙과 풀의 냄새도 맡아졌다. 김영남은 남부순환도로에 접어들자 차의 속도를 높였다.
"사장님, 타당 15불 이하로는 오더 받지 않을랍니다."
묵묵히 앉아 있던 옆자리의 박재호가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마진이 8프로 미만이면 똔똔 장사도 안 됩니다. 적자가 납니다."
1차선을 달리고 있는 승용차가 앞차와의 간격을 1백 미터도 넘게 떼어 놓고 있다. 뒷머리가 긴
것을 보니 여자다. 김영남은 바짝 차를 붙이고는 경적을 울렸다. 앞쪽을 바라보는 통에 박재호
가 말을 멈췄다.
"데이비드한테 가격 올리기 힘들텐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장일수가 말했다.
"그 영감님은 우리한테 오기 전에 아마 다섯 개 회사의 가격은 받아 놓았을 거야."
"5개건 10개건 우린 15불 이하로는 안 돼."
박재호의 말투가 강해졌다.
"그 영감은 타당 13불 50전을 불렀는데 그 가격으로는 10프로 적자야."
뒷좌석의 장일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남대로 쪽으로 좌회전을 한 김영남은 두어 개의 사거리
를 계속 푸른 신호등을 받으며 통과했다.
"작년 가격이 얼마였지?"
머리를 돌려 박재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13불 40전이었지요."
뻔한 것을 묻는 그의 속셈이 짐작되는지 박재호의 말투는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가 15불을 받는다면 1년 사이에 가격을 12프로나 올린 셈이 된단 말이야. 그 영감이 불평
할 만해."
"원부자재와 인건비 상승률을 누적계산하면 15프로가 올랐습니다."
"그걸 이해해 줘야 말이지. 태국이나 중공, 하다못해 대만의 가격은 그대로인데."
"그렇다고 적자가 나는 걸 뻔히 아는데 13불 50으로 오더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박재호는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았다. 차는 붉은 신호등에 걸려 멈춰섰다. 그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딴 놈들은 13불 50이 아니라 13불로 오퍼를 던졌을지도 몰라."
장일수가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공장 돌리려면 할 수 없지."
"우린 그러면 안 돼. 물리면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게 돼. 그 전에 손을 떼어야 한단 말이
야."
"이봐, 박 이사. 정말로 답답하구만. 누가 그걸 모르고 있는 줄 알어? 데이비드의 오더 7만 타
를 받지 않으면 공장이 3개월 간이나 놀게 된단 말이야.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어?"
장일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호가 바뀌었으므로 김영남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데이비드는 영국 바이어로 세영무역에서 작년에 수입해 간 셔츠는 5만 타였다. 나이가 70이 가
까운 그는 유태인으로 김영남과 사귄 지는 10년이 넘는다.
전직장에 사표를 내고 작년에 세영무역을 설립한 김영남을 밀어 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가격문제나 제품의 하자에 대한 클레임에 대해서는 한번도 그냥 지나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업무를 떠나 마주앉아 있을 때는 아버지같이 대해 주다가도 가격에선 한치의 양보가
없었고 불량제품의 클레임은 어김없이 받아내는 그에게서 김영남은 많은 것을 배워 왔다.
"데이비드는 4,5일 있다가 갈테니까."
테헤란로로 우회전해 들어가면서 김영남이 말했다.
"오늘은 박 이사가 15불로 밀어붙여.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도저히 가격을 내릴 수는 없다고 말
해."
박재호가 앞쪽을 바라본 채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내일 오전에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알았습니다."
"장 이사가 원사를 조금 싸게 구입할 수 있는 모양이야. 한국방직에서 고리당 6백 불로 오퍼가
들어 왔어."
6백 불이면 20불이 싼 가격으로 원가계산에서 2프로쯤 까고 들어갈 수가 있다. 뒷자리의 장일
수는 잠자코 있었다.
호텔 앞에 차를 세우자 박재호는 가방을 움켜쥐고 내렸다. 샘플과 서류가 가득 든 비닐가방이
무겁게 보였다.
"박 이사는 내가 가격을 깎아 줄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야."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면서 김영남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나한테 미리 못을 박는군, 그래."
"데이비드 영감하고 박 이사는 사이가 나쁩니다."
장일수도 가볍게 대답했다.
"박 이사는 데이비드를 스크루지 사촌 같은 영감이라고 하는데 데이비드가 박 이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둘이 비슷하니까요."
"끈기로는 데이비드도 박 이사를 이길 수 없을 걸?"
"그렇죠. 하지만 번번이 우리가 졌습니다."
"장 이사, 자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 참, 사장님도."
백미러 속의 그의 얼굴이 웃었다.
"항상 사장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박 이사는 악역을 맡았고 사
장님은 선한 역을 맡았을 뿐이지요."
"......."
"그 역할 분담이 거꾸로 되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부처님 이사에 호랑이 사장이라면 문제가
있는 조직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사거리에서 우회전한 김영남은 강남대로를 달려 내려갔다. 장일수는 예민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성격이었다.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서슴없이 끄집어낸다.
"그래서 요즘 닥치는 대로 싸우는 거야? 만나는 사람마다?"
"정말 힘듭니다."
웃음 띤 목소리로 물었으나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 놈도 우리를 긍정적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힐끗 백미러를 올려다본 김영남은 잠자코 차를 몰았다.
회사를 설립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1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월급쟁이
생활 10년보다도 더 길고 지루한 1년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고는 있
다. 제각기 익숙하지 못한 자리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영업 이사인 박재호와 관리 이사인 장일수에게 김영남은 실무를 맡겼고 실무자인 그들이 일 때
문에 거래선과 충돌이 있는 것을 보아 왔었다.
사장이 실무를 챙겨 거래선과 충돌해 버리면 수습하기가 어려워진다. 부장이나 이사가 수습해
줄 수는 없는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모양이 우습다. 거래선이 사장보다 부장이나 이사를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교육 때문만은 아니지만 박재호와 장일수는 접촉하는 사람들과 자주 싸우고 있었
다. 그것은 그만큼 의욕적이라는 말도 되었다.
그들은 커다란 빌딩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장일수가 12층의 단
추를 눌렀다. 단추 옆에는 한국신용보증기금이라고 씌어진 안내판이 보였다.
장일수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약속시간인 10시보다 10분 빨리 왔는데도 초조한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은 육
중한 유리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1백 평이 넘어 보이는 사무실에는 흰 와이셔츠 차림의 직원들이 분주한 듯 움직이고 있었다.
타자 소리와 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왔으나 나지막하게 응답하기 때문인지 분위기는 조용했
다.
그들은 입구 오른쪽의 소파에 앉았다. 대기석인 모양으로 7,8명의 방문객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장일수가 사무실 안쪽을 두리번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중간쯤의 책상 앞에 앉아 있
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여기, 자주 오십니까?"
옆에 앉은 사내가 김영남에게 물었다.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점퍼 차림의 사내였다. 햇볕에
탄 검은 얼굴에서 조그만 눈이 자주 깜박이고 있었다. 불안한 모양이었다.
"저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러자 사내는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두 처음인데, 잘될지 모르겠구만."
"무슨 일인데요?"
장일수에게 시선을 준 채로 김영남이 물었다. 장일수는 흰 얼굴의 사내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흰 얼굴은 머리를 끄덕이며 서류를 챙기고 있었다.
"5천만 원 신용보증을 받으려구 담당자하고 약속을 했는데 자리에 없구만."
장일수가 김영남 쪽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말하자 사내도 김영남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은행에서는 담보가 없으니까, 이곳으로 와서 신용보증서를 받아오면 지급보증을 해주겠다는데
."
사내가 다시 말했다.
"잘되겠지요."
김영남이 건성으로 대답하자 장일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영남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가시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쪽에 있는 지점장실로 들어섰다. 담당직원이 그들을 소개하자 40대 후반의 지점장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잘 오셨습니다. 앉으시죠."
여유가 있는 태도였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자금이 필요한 중소기업인들이 그를 찾아올 것이다
. 지점장은 직원이 가져온 서류를 찬찬히 넘겨보고 있었다.
온몸을 굳힌 김영남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일수의 목젖이 크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
한동안 지점장실 안은 지점장이 넘기는 서류 소리만이 들렸다. 신용보증기금에 1억의 중소기업
육성자금을 신청한 것이다. 지점장의 결재가 나면 주거래 은행이 집행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회사 연륜이 1년이 조금 넘었는데 대단하시군요. 작년 매출이 50억이나 되다니."
서류에서 시선을 뗀 지점장이 말했다.
"올해의 목표가 70억이라면 50프로 성장하는 셈인데......."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다행히 고정바이어들이 있어서요."
"장하십니다."
장일수가 상체를 추스리며 바로 앉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은행에서는 5억을 쓰고 계십니까?"
"네, 하지만 아시다시피 회전자금이 부족해서요. 매월 원자재 가격만 3억이 넘습니다. 최소한
2개월분의 원자재를 확보해 놓아야 하기 때문에."
지점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담보는 김 사장님의 아파트하고 사무실의 임대료를 근저당해 놓으셨군요."
"그렇습니다."
머리를 돌린 지점장이 장일수를 바라보았다.
"장 이사님도 주주로 되어 있군요. 회사의 등기부등본 상에."
"네? 네에."
애매한 목소리로 장일수가 대답하자,
"설립년도가 1년이 겨우 넘어서 5천만 원밖에 안 되겠습니다. 저두 정말 해드리고 싶은
데......."
지점장이 안타까운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일수가 힐끗 김영남을 바라보고는 턱을 들었다.
"저희 회사는 1년이 넘었으니 지점장님 직권으로 1억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누가 그럽니까?"
지점장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쪽, 강동지점에 제 친구가 있는데......."
"저런.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우리는 지점장 전결사항이나 지점의 한도에 구애받지는 않습니
다. 유망한 기업에 대해서는 지점의 한도 이상으로 보증해 드릴 수도 있지요. 물론 본점의 승
인을 받아야 하겠지만."
아리송했는지 장일수는 멀뚱한 얼굴로 지점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1년 간의 대차대조표와 사업성적을 보고 판단을 내리기가 힘이 드는군요. 5천만 원도
저희로서는 모험을 하는 겁니다."
"그럼 몇 년분의 대차대조표가 있어야 합니까?"
장일수가 다시 물었다. 지점장의 손이 탁자 위로 뻗어나와 담배갑을 쥐었다.
"최소한 3년의 실적을 봐야, 그래야 전망이 가능하겠지요."
"전망이 없으면 쥑이겠군요. 그리고 3년 동안은 우리 힘으로 버텨나가야 하고."
아차 싶었으나 이미 장일수의 입에서 뱉어진 말이었다. 김영남은 헛기침을 했다.
"지점장님, 죄송합니다. 오더는 받아 놓았는데 원자재 구입할 길이 막막해서요."
빈 담배를 입에 문 지점장은 장일수를 바라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나시지요."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말씀대로 5천은 보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직원하고 상의하시지요. 난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독단으로는 결정하지 않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영남은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지점장실을 나왔으나 담당 직원은
지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인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너, 왜 불쑥거리고 그래?"
이맛살을 찡그린 김영남이 물었다.
"대뜸 그렇게 대드는 법이 어디 있어? 내가 지점장이라도 못해 주겠다."
"본래부터 싹수가 없었습니다. 직원 이야기가 1년 넘은 우리 같은 회사 치고 5천 이상을 준 적
이 없답니다."
장일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1억을 올리라고 한거야? 아예 처음부터 6천을 쓰라고 하든지 그럴 것이지."
"우리 실적이 좋았으니까요. 그리고 5천을 받더라도 심사는 받아야하지 않습니까?"
입맛을 다신 김영남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직원이 지점장실에서 나오더니 책상에 앉았
다.
"김 과장님, 미안합니다."
장일수와 함께 다가간 김영남이 말했다.
"우리 장 이사가 하두 급한 김에 말이......."
"그런다구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면 됩니까? 내 체면도 생각해 주셔야지. 내가 지점장 앞에서
뭐가 됩니까?"
"미안합니다."
김영남이 머리를 숙였으나 장일수는 입술을 비튼 채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그와 김 과장과는
회사의 업무에 대한 실사 관계로 서너 번 만났기 때문에 꽤 친해져 있었다.
"이 서류를 작성해 오세요. 그러면 6천만 원에 대한 신용보증이 될테니까요."
장일수는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았다. 선 채로 서류를 훑어보던 그가 서류를 내렸다. 눈을 둥그
렇게 치켜 뜨고 있었다.
"아니 보증인이 두 명 필요합니까? 재산세가 10만 원 이상인 사람으로?"
"아, 그거야 형식이니까요."
"에이 씨발."
장일수가 잇사이로 욕설을 뱉었다.
"아니, 이보쇼. 장 이사!"
김 과장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를 쏘아보았다.
"왜 욕을 하는 거요?"
"이것은 담보를 받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뇨? 어느 놈이 보증을 서 주겠어?"
"허어, 나 참."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김 과장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장일수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였
으나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관록이 있게도 보이는 것이 수많은 기업인들을 다뤄왔기 때문일
것이다.
"장 이사가 주주니까 보증을 서도 되겠구만. 회사 등기부등본을 보니까 이사가 또 한 명 있던
데."
와락 화를 내려던 장일수가 잠자코 눌러 참는 이유를 김영남은 알았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필수적입니까?"
김 과장이 기가 막히는 듯이 얼굴을 돌리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보세요. 사장님. 우리가 뭐하러 이런 서류를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몸을 돌린 김 과장이 수화기를 쥐고는 귀에 대었다. 다른 일을 시작했다는 표시였다.
데이비드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는 라이터를 켜 정성들여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는데 몰
두해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것같이 짙은 연기를 길게 내어 뿜었다.
머리를 든 박재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데이비드는 온 얼굴에 주름살을 만들면서 웃어 보였다.
"어때? 미스터 박, 결심이 섰나?"
"아니오, 데이비드."
문득 NO라고 바이어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름
은 생각나지 않는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NO보다도 더욱 강한 부정이다.
"흠."
파이프를 입에 문 데이비드는 백발의 머리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박재호의 눈에 시청 앞 광장 위를 떼지어 날고 있는 비둘기가 보였다. 모두가 우중충한 색깔의
털에 덮인 지저분한 새들이었다.
"자네들은 언제나 원부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오르고 있다고 하고 있네. 하지만 영국의 소비자
물가는 작년도에 비해서 2퍼센트 가량 내렸어."
데이비드의 또박또박 잘라 말하는 영어는 듣기에 쉬웠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영어에 서툰 외
국인들을 오랫동안 상대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입사원이었을 때 회화에 자신없어 하던 그에게 김영남이 말했었다.
"그냥 지껄여. 자신있게 말하란 말이다. 그러면 저쪽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는 알아듣는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말을 뱉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회화가 유창하다고 해서 상담이 성사되는 것
이 아니다. 서로 알아들으려고 정신을 바짝차리고 있으면 통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아. 한국만 유별나단 말이야. 품질이나 기술은 별로 나아진 것도 없는
데 가격만 줄곧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데이비드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소비문화의 영향이야."
다소 엉뚱한 느낌이 든 박재호가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접대를 받아봐서 아는데 해마다 고급 술집이 늘어나고 화려해지더군. 값도 매년 20, 30
프로씩 오르고. 영동의 수입품 가게에 가서 놀랐네. 원산지인 우리 영국의 판매가격보다 서너
배가 높아. 그런데도 잘 팔리고 있어."
".......'
"생활수준은 3,4천 불 정도의 1인당 국민소득이라면서 소비구조나 행태는 2만 불 정도인 우리
영국보다 더 화려해. 그것이 문제야. 그것이 끊임없이 가격이 높아지는 이유라고 생각하네."
"맞습니다. 데이비드. 하지만 우리의 셔츠 가격은 당신들의 시장에서 너무 낮은 가격으로 팔리
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 책정된 가격이었어요. 타당 15불이라고 해도 결코 높은 가격이 아
닙니다."
"어림없는 소리 말게."
데이비드는 재떨이에 파이프의 끝부분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재가 떨어져 내려오자 다시 불
똥이 살아났다.
"한국상품은 고급도 아니고 중급품도 아니야. 개성도 없고 상표도 없어. 이제 곧 중공이나 태
국, 인도네시아 제품에게 밀려나게 돼. 우리가 아직까지 거래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도 당
신들이 납기를 지키고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야."
"......."
"13불 50전, 거기서 1센트도 올릴 수가 없네."
"데이비드."
"가서 미스터 김에게 그렇게 전하게. 나는 그 이하로도 구입할 수 있다고 말이네."
박재호는 탁자 위에 널린 서류를 끌어 모았다.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셔츠의 견본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가슴이 답답했고 6월부터 공장이 논다는 생각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손해보는 장사
는 할 수가 없다.
6월부터 8월까지 공장을 돌린다 해도 그때 발생한 적자가 다시 짐으로 얹혀질 것이다.
바깥 사무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그러자 타자기 소리도 들렸다. 두
런거리며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재호가 머리를 들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오더를 포기하는 것이 나올 것 같은데요."
장일수가 힐끗 김영남을 바라보았다.
"13불 50전으로 오더를 받는다면 약 8프로의 적자가 납니다. 금액으로는 7만 타니까 7만 5천
불 정도, 한화로는 6천만 원입니다."
"14불 60전이 되어야 적자를 면하게 되는군."
원가 계산서를 들여다보던 장일수가 말했다.
"아니, 14불 60전이면 임가공비까지만 계산한 거야. 사무실 운영비네, 교통 통신비, 창고료 등
은 넣지도 않았어."
"그것까지 계산하면 15불. 순이익이라고는 한푼도 없구만."
"만일 원단이 더 들어간다든가, 염색을 잘못해서 사고가 나거나, 조그만 문제가 터져도 당장
손해를 보게 돼."
김영남은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잠자코 계산서를 내려다보았다. 셋이서 한 시간이 넘도록 온갖
궁리를 짜내고 난 후여서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데이비드의 고집을 익히 아는 터여서 그가 13불 50에서 가격을 올려주리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
었다.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하지만......."
입맛을 다신 박재호가 말했다.
"제품을 변경시키는 것이지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본 채 김영남은 입을 열지 않았다.
"원사의 등급을 계약조건보다 낮추는 겁니다. 오더는 코마사 40수로 받고 제품은 카드 38수를
쓰는 것인데."
"......."
"원사 가격차이가 고리당 50불이나 나니까 원사비용에서 10프로를 줄일 수가 있지요.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약 4,5프로 절약이 됩니다."
장일수가 상체를 세우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팔짱을 졌다. 애써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 속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중량을 떨어뜨릴 수가 있지요. 야드당 1백20그램의 원단을 7,8프로 중량을 떨어뜨리면
전체가격의 3프로 정도를 먹을 수 있고."
"......."
"염색비나 봉제비를 5,6프로 줄여서 계약하면 1,2프로 가격 다운이 됩니다."
"부자재 비용도 10프로 쯤 깎지 뭘. 그러면 잘하면 흑자가 되겠네."
장일수가 나섰다.
"이왕 그럴 바에는 사이즈도 줄여서 소매나 몸통을 3,4센티 짧게 하는 것이 어때?"
"이봐, 장 이사. 장난하는 거야?"
박재호가 눈을 치켜 떴다.
"남은 심각해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장 이사 말도 일리가 있어."
김영남의 말에 오히려 장일수가 놀란 듯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예 마지막 장사라고 생각하면 그렇게라도 해서 적자를 면해야지."
"사장님, 제 말은 13불 50 가지고는 그 방법밖에는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실이
좋아서 코마하고 카드의 구분이 쉽게 되지않아요."
그러나 데이비드는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쓸어 보기만 해도 가려낼 것이다. 김영남은 머리를
저었다.
"그건 사기야. 실수로 섞여 들어갔다면 몰라도 계획적으로 그럴 수는 없어."
"그렇다고 적자가 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 가격으로 오더를 할 수는 없습니다."
강경한 말투로 박재호가 나섰다.
"공장이 쉬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시계를 올려다본 김영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10시 반이었고 12시에 데이비드와 점심 약속이
있는 것이다.
"오늘 데이비드에게 다시 이야기해 볼테니까. 그러고나서 다시 상의해 보기로 하지."
"사우디 오더를 땡겨서 작업하면 어떨까요?"
따라 일어선 장일수가 물었다.
"안 돼. 계약서만 가지고 작업할 수는 없어. 신용장이 오고나서 시작해야 돼."
그냥 해 본 말이었는지 장일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적당하게 익혀 달라고 하였으나 칼끝에 피가 배어 나왔고 입 안에 넣자 질겅거려
생살을 씹는 기분이 들었다. 칼을 내려놓은 김영남은 포크로 감자를 찍었다.
"김, 배고프지 않은가? 왜 고기를 먹지 않아?"
데이비드가 칼질을 멈추고 물었다.
"아침을 많이 먹어 놔서 식욕이 나지를 않는군요."
"맛있는데. 남기는 것을 보니 아깝군."
그는 두툼한 스테이크 한덩이를 이미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다.
"난 식사 때에는 사업 생각을 잊는 버릇이 있네. 오직 먹는 것을 즐기지. 그것이 소화에도 좋
고 건강에도 이로워."
"그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들어온 말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이혼한 전처 말인데, 그 여자는 내가 식사하면서 신문 보는 것을 무척 싫어했었어. 덕분에
나는 20년이 넘었던 버릇 하나를 없앴지. 지금 생각하면 좋은 일이었어. 좋은 여자였다네."
그 여자는 지금 은행 간부의 부인이 되어서 가끔씩 만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들이 낳은 딸은 마리은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방송국의 엔지니어였다. 회색 머리카락의 억세게
생긴 그녀의 사진도 본 적이 있다.
포크를 내려놓은 김영남은 잠자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의 데이비드는 가격을 올려
달라면 얼마든지 올려줄 수 있는 인자한 할아버지로 보인다.
그래서 가끔씩 그의 습관을 깨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가늘게 긴 숨을 뱉으면서
김영남은 물컵을 들었다.
"데이비드, 아침에 회의를 했습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김영남이 얼굴을 들었다.
"당신의 가격인 13불 50전을 맞추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코마사를
카드사로 바꾸는 방법, 소매나 몸통의 기장을 줄이는 방법."
데이비드는 커피잔을 손에 든 채로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자재의 질을 떨어뜨려서 10,20프로 정도 부자재 가격을 내리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데이비드의 잿빛 눈동자는 꼼짝하지 않고 김영남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데이비드, 그렇게 되면 12불 50전 정도가 되어서 7만 불 정도의 이윤이 납니다. 그리고 당신
과의 거래는 끝나게 되겠지요."
"김, 그 말을 하는 이유는 무언가?"
커피잔을 내려놓은 데이비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커피숍안은 점심을 마치고 나온 손
님들로 시끄러웠으나 그의 낮은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난 그 짓은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13불 50전으로 당신의 셔츠 오더를 받지 못한
다는 말도 되겠지요."
"......."
"경쟁국들의 가격이나 당신의 시장상황에 대해서 나는 변명할 이야기가 부족합니다. 부끄럽기
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커피잔을 들어올린 김영남은 식어 버린 커피를 한모금 삼켰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데
이비드가 이윽고 머리를 돌렸다.
굵고 털이 무성한 손이 탁자 위에 놓여져 있었는데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가볍게 두
드리고 있었다.
"김, 에미낭스 알지?"
이윽고 데이비드가 입을 열었다.
"압니다. 데이비드."
모른다면 섬유를 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에서 명성을 떨치는 최고급 상표로 세계로
수출되는 니트였다.
"에미낭스 셔츠는 백화점에서 타당 48불로 팔리고 있네. 자네 제품보다 2배나 높은 가격이지."
"......."
"자네의 수출가격이 13불 50전이면 내가 도매상으로 넘기는 가격은 18불이고, 도매상은 소매상
이나 슈퍼마켓에 20, 22불로 넘기고, 판매가격은 타당 25불쯤이 되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김영남은 잠자코 있었다. 데이비드가 조금 가격을 속였다면 도매상
으로 넘기는 가격을 낮춘 것일 것이다.
그는 20불선에서 도매상으로 셔츠를 넘기고 있었다. 타당 5불 정도의 이윤을 챙기는 것이다.
"자네가 그것을 만들어 보게."
"뭐라구요."
김영남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날더러 에미낭스를 만들란 말입니까?"
"흥."
눈가에 굵은 주름을 만들면서 데이비드가 웃었다.
"내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은가? 돈 몇만 불 때문에 내 인생을 걸 것 같아? 상표위조 판매는 영
국에서 중형이야."
"그럼 무슨 말입니까?"
"헤미낭스로 해. E를 H로 고쳐서 디자인은 똑같게.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이 보이도록. 같은
분위기이지만 다른 상표, 무슨 말인지 알겠나?"
데이비드의 말은 열기를 품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방이지. 하지만 헤미낭스를 사 입은 사람들은 제품이 에미낭스보다 못한
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가격도 싸고."
"데이비드, 저는 상관없습니다."
"나도 상관없네. 내 변호사하고도 오랫동안 검토해 본 일이야."
"......."
"일본에서 만들어 볼까 했었어. 그런데 자네하고 이야기하다가 결정했네."
데이비드가 다시 싱그레 웃었다.
"어이, 박 이사. 나 좀 봅시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박재호는 그를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계단 입구에 장일수가 서 있었
다.
"아래층 다방에 가서 진한 커피나 한잔합시다."
장일수가 보통 때는 반말로 지껄였으나 가끔씩은 존대말로 대할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무엇인
가 부탁할 때라고 박재호는 기억해 내었다.
"그럽시다."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신도 존댓말을 쓸 경우를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박재호는
생각했다.
오후 5시면 사무실은 바쁜 시간이다. 외출했던 사원들이 돌아오고 그날의 업무정리가 시작된다
.
다방은 서너 명의 손님들만 있을 뿐으로 한산했다.
"여기 커피 진하게 해서 두 잔."
자리에 앉은 장일수가 소리치자 다가오던 종업원이 몸을 돌렸다.
"제다의 홍 과장한테서는 오늘 연락이 없어?"
장일수가 물었다.
"없어. 라마단이 끝난 때라 바이어들이 당분간 움직이지를 않아."
담배를 빼어 문 박재호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오더 걱정이 돼? 걱정말어. 쿠웨이트에서도 말라피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다음 달인 5월은 그런대로 80만 불쯤 하겠는데, 6월은 40만 불도 안 돼."
얼굴을 찌푸린 장일수의 말에 박재호가 피식 웃었다.
"누굴 닮아가는군. 껍데기만 불리면 뭘 해? 속살이 쪄야지."
"이런 젠장, 6월에 어음 돌아올 것이 3억이야. 네고하면 그 돈으로 어음 막고 끝나. 금융은 어
떻게 까고 임가공비네, 운영비는 어떻게 하란 말이야?"
입맛을 다시며 박재호는 머리를 돌렸다. 열 번도 더 들어 본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
분의 수출업체들이 손해가 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오더를 받아서 회전자금을 늘리는 이유도 그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적자가 쌓여가므로 한순간도 공장을 멈출 수가 없다. 적자가 나는 오더라도 많이 받아서 다음
달에는 더 많은 자금을 회전시켜야 겨우 운영이 된다. 매출이 떨어지면 당장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사장이 쓸데없는 투자를 했어. 10만 불이나 들여서 제다에 지사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구."
날라온 커피잔을 들며 박재호가 입을 열었다.
"그런 투자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안 되었을 거야."
"무슨 소리."
장일수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지사 덕분에 오더 상황이 전년대비 50프로 상승이 되었는데. 신규바이어도 여럿 개척하고."
"그런 오더는 출장 가서 받을 수도 있어."
"이봐, 당신도 찬성했으면서 웬 말이 그리 많어? 불평이?"
장일수가 와락 화를 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다.
다섯 달 전인 작년 11월에 사우디 제다에 지사를 설치했고 지사장으로 홍성구 과장이 부임해
나갔다. 그는 40평형 아파트를 세내어 사무실겸 숙소로 쓰고 있었는데 그가 고용한 직원은 4명
이었다.
"당신도 이제는 바이어들이 믿고 우리에게 오더를 준다고 했지 않어? 제다에 지사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내 말은 무리해서 자금을 끌어내어 성급하게 투자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야. 지사는 회사가 자금이 넉넉할 때 차렸어야 했어."
"그럼 왜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어?"
"난 사장이 별도 자금을 끌어내는 줄 알았어."
"아이구 젠장."
그리고는 장일수가 말을 멈췄다.
"이봐, 박 이사."
한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장일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증을 좀 서 줘. 아니, 당신만 하는 게 아니라 나하고 같이."
박재호가 눈을 치켜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엊그제 신용보증기금에 다녀왔는데, 그쪽에서는 5천을 보증해 주겠다는데 보증인이 또 필요하
다는구만 두 명이."
"난 보증을 섰는데. 우리 큰형님이 땅을 은행에 넣고 돈을 썼는데 그 연대보증인으로."
"상관없어. 보증인으로 서명만 하고 재산세 납부 증명서만 내면 되니까. 두 번 보증을 해도."
박재호는 머리를 저었다.
"안 될 거야. 지난번 은행에서 들었는데 만일 그렇게 되면 저쪽이 문제가 돼, 형님이."
그러고는 장일수를 쏘아보았다.
"사장은 뭐래? 우리더러 보증을 서라고 했어?"
"아니, 그 양반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던데."
"그 일 때문에 날 보자고 한 거야?"
"겸사겸사."
맥이 풀렸는지 장일수의 대답은 건성이었다.
"그럼 사장더러 알아서 하라고 해. 수단이 좋으니까 만들어 내겠지."
"하긴 그렇군."
박재호는 상체를 세우고 장일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봐. 장 이사, 오해하지 마. 나도 나만큼 회사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어."
"......."
"그리고 우리는 우리 선에서 사장의 잘못된 점을 고쳐 줘야돼. 우리가 10년 가깝게 겪었지만
그 양반은 옆에서 적당한 조절을 해줘야 돼. 그것이 바로 회사를 위한 일이야."
장일수는 잠자코 커피잔을 집어들었다. 그의 말이 맞는 점도 있었다. 김영남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내닫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귀가 않아서 남의 말을 거르지 않
고 듣고는 곧잘 흥분하고 이내 잊는다.
김영남은 꿈이 컸고 그 꿈을 실현시킬 현실적인 방법을 처음부터 그들에게 교육시켜 준 직장의
상사이자 선배였다. 그가 독립해 나간다고 했을 때 그의 제의를 자신뿐만 아니라 매사에 냉소
적인 박재호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커피는 너무 썼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장일수는 박재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전 같았으면
이야기가 길어졌을 것이다.
밤 1시가 넘어 있었다. 김영남은 벨을 누르고는 한쪽 볼을 문에 대었다. 철판의 차거운 감촉이
금방 피부에 전달되어 왔다.
"누구세요?"
안쪽에서 아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야."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잠에서 깬 모양으로 민영희의 얼굴은 부시시했다.
"또 술이에요?"
이맛살을 찡그린 그녀가 상체를 뒤로 제꼈다.
"에이구, 술냄새."
저고리를 소파 위에 던져 놓은 그는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데이비드하고 한잔했어. 그 영감님은 나한테만 술을 먹이거든."
건넌방 문들은 모두 닫혀 있었고 기척도 없다. 아이들은 모두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 영감이 나한테 근사한 제의를 했는데."
"나 잘래요."
"그래."
긴 가운을 펄럭이며 민영희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영남은 장식장으로 다가
가 위스키 병을 집어들었다. 데이비드와 위스키 한 병을 나눠 먹었지만 온몸에 열기만 오를 뿐
정신은 또렷했다. 장식장을 등지고 돌아선 그는 응접실과 닫혀 있는 방문들을 바라보았다. 너
무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아이들은 잔다. 그리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병을 기울여 위스키 한모금을 삼켰다. 콧구멍으로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뱃속이 화끈해
졌다. 한 손에 병을 쥔 채로 김영남은 응접실을 가로질러 아이들 방 쪽으로 향했다.
아이들 방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가 아이들을 깨우지나 않을까 하고 와락 짜증이
났던 민영희는 몸을 돌려 누웠다.
오늘도 바이어하고 술을 마셨다지만 바이어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술을 마실 사람이었다. 그
리고는 여자들을 끼고 노닥거릴 것이다. 도무지 가정에 대한 성실성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자식들을 유달리 귀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스스로 괜히 멋적어서 하는 행동으로 보
인다. 그까짓 한두 시간 유난하게 구는 것보다 자식들은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봐 주는 아버지
를 필요로 한다. 민영희는 그것도 위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 직장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할 때에는 그래도 지금보다 나았다. 월급 이외에 부수입이
만만치 않았고 그런 것이 생기면 가져다주기도 해서 즐거웠던 것이다. 또한 토요일이나 일요일
에는 대부분 집에 눌러앉아서 아이들하고 놀아 주거나 함께 외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을 하면서부터는 가정의 단란함이 사라졌다. 그를 보면 언제나 쫓기는 사람처럼 불
안해 보여서 덩달아서 이쪽도 불안하다. 언제 어떻게 깨뜨려질지 모른다.
10년 동안 저축하고 주택부금을 8년이 넘게 들어서 마련한 아파트도 은행에 담보로 들어가 있
으니 회사가 잘못되면 식구들은 길거리로 쫓겨날 것이다.
이제는 전처럼 김영남의 감정을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자식을 낳고 10년이 넘게 살았으니
무더지기도 했겠지만 그 햇수만큼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커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문이 열리더니 김영남이 들어섰다. 그는 침대 앞에서 길게 트림을 했다. 등을 돌린 채였으므
로 민영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부러 그러는지도 모른다.
"어어, 취하는군. 조금 전까지는 멀쩡했었는데."
혼자소리처럼 말하면서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이거, 집에 돌아오니 더 허전하네."
민영희는 이불을 제치고 벌떡 상반신을 세웠다.
"그럼 술집에 가서 여자 끼고 자지 그랬어? 밤늦게 들어와서는."
"그래, 그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느릿한 그의 말소리가 민영희의 화를 더욱 북돋았다.
"말리지 않을테니까 가서 자고 와."
"그럴까?"
그랬으나 김영남은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그의 뒷머리를 쏘아본 채 민영희도 아랫입술을 물었
다. 한두 마디씩 더 뱉었다가는 밤새도록 실랑이를 하게 된다.
방안은 이내 술냄새로 가득찼고 민영희는 구역질이 났다. 김영남도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왔다.
"헤미낭스라구요?"
박재호가 입을 벌린 채 김영남을 바라보았다.
"그래, E가 아니라 H로 시작되는 헤미낭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번에는 장일수가 물었다.
출근하자마자 사장실로 불리워 왔으므로 장일수의 얼굴은 싱싱했고 로션 냄새까지 났다.
"글쎄, 그 뜻은...... 없을 거야.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서."
"그 영감님이 그런 제의를 하셨단 말입니까?"
믿기지 않는지 박재호가 다시 물었다.
"응, 전부터 검토해 온 것이라면서."
"가격이 25불이라면 아주 좋습니다. 포장을 5도 색상을 먹이는 박스포장으로 하고 최고급 부자
재를 써도 20불이면 뒤집어 쓰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밝았으므로 김영남의 기분도 가벼워졌다.
어젯밤에는 집에서 혼자 위스키를 반 병이나 마셨던 것이다.
"수량은 거기 적힌 대로 6월에서 8월까지 월간 2만 타씩 6만 타야. 1백20만 불짜리 오더가 되
었어. 내 계산으로는 타당 6불이 남는데, 36만 불의 마진이 남는단 말이야."
"사장님, 살았습니다. 우리."
장일수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린 운이 따르는 모양입니다. 예?"
"모두 너희들 덕분이지."
"아뇨, 아닙니다. 사장님이 데이비드한테 잘 보이셔서 그래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런 걸 주
었지요?"
장일수가 이제야 생각난 듯이 물었다. 한국에만 해도 수백 개가 넘는 동종업체가 있고 그가 거
래하는 회사들도 10개가 넘는다. 세영무역보다도 훨씬 크고 단단한 생산 기반을 갖춘 회사도
많은 것이다.
"글쎄, 그것이......."
김영남의 시선이 박재호와 마주쳤다.
"13불 50전으로는 이야기를 끝내자고 했더니 꾸물대다가 결국은 헤미낭스 이야기를 꺼내더군.
가슴이 덜렁 내려앉았어. 그러더니 한동안 가슴이 뛰는 것 같지 않다가 갑자기 쿵쿵거리는 거
야. 심장마비는 그렇게 일어나는가 봐."
"하하하."
장일수가 커다랗게 웃었고 박재호는 실눈을 만들면서 흰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어."
그들의 웃음이 그치자 김영남이 말했다.
"선적시킬 때까지 제품의 생산은 비밀로 할 것. 그것은 에미낭스측보다 다른 수입업자들이 이
쪽의 생산업자와 손을 잡고 헤미낭스를 모방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헤미낭스를 모방하다니요?"
박재호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물론 헤미낭스는 데이비드가 상표등록을 해 놓고 왔다고 그래. 그리고 그 제품은 도매상과 백
화점에 깔릴 거니까 판매망도 염려할 것이 없다는 거야. 하지만 다른 수입상이 H를 P로 바꾼
페미낭스나 또는 A로 바꾼 아미낭스를 대량으로 구입하면 판매에 지장이 있다는 거지."
박재호와 장일수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일단 시장을 잡아 놓고 나면 다른 모방품이 들어와도 3개월은 버틸수 있다고 하더군. 3개월
후면 아미낭스, 페미낭스, 또는 비미낭스로 가득 깔리면서 가격도 내려갈테니까."
"알겠습니다. 공장이나 부자재 업체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박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이 방을 나가자 김영남은 소파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데이비드와는 계
약서에 사인까지 받아 놓았으므로 이제 신용장만 기다리면 된다.
6월의 매출은 80만 불 가깝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어음 막고, 금융상환하고, 임가공비와 운영
비를 쪼개 쓰면 겨우 회사는 지탱이 된다.
7월과 8월의 매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헤미낭스에서 생긴 이익이 이제까지 누적된 적자를
상쇄시키게 되면 9월부터는 양질의 오더만 선별해서 수주할 작정이었다.
매출액이 월 50만 불이 되건 40만 불이 되건 이익이 남는 오더만 할 것이다. 그리고 에미낭스
처럼 자체의 상표를 좋은 가격으로 세계시장에 뿌려야 한다. 이제까지 바이어의 상표를 부착했
기 때문에 그들에게 끌려다니기만 했었다.
김영남은 감았던 눈을 뜨고는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
를 설립했을 때부터 세영무역의 첫글자인 S . Y의 상표로 끈질기게 세일즈를 해 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바이어들의 반응은 탐탁치 않았다. 냉소적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판매망에 기반을 굳힌 상표를 가지고 있었고 S . Y를 판매해 줄 의무가 없다.
어떤 바이어는 S . Y를 구입해 갈테니 가격을 10프로 정도 싸게 해서 선전물을 보내달라고 요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바이어의 상표를 생산하는 것보다 20프로 가깝게 가격이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신제품을 개발해서 S . Y상표를 부착해 내보내기도 시장상황에 맞지 않았다.
세영은 아직 조그만 회사고 신제품의 특허를 낸다고 하더라도 출원기간은 3개월이고 해당 수출
국에 특허를 받으려면 나라마다 다르지만 반 년에서 1년 정도 걸린다. 그 사이에 경쟁국들이
만든 모방제품이 쏟아져 들어와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남은 앞으로 꾸준히 S . Y상표의 판매를 증가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신용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것만이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지금도 믿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장일수가 들어섰다.
"사장님,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요."
앞자리에 앉은 그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로 김영남을 바라보았다.
"데이비드 오더를 6월부터 선적시키려면 이달 말까지 원사 수배가 되어야 합니다."
김영남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6월분 원사를 구매하려면 8천만 원 정도의 자금이 별도로 있어야 하는데......"
말을 멈춘 장일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신용보증기금을 다녀온 지 닷새가 지났지만 아직 서로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그쪽에서 5천의 보증이라도 받아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신보는 알아서 할테니까 장 이사는 걱정하지 말어."
"보증인이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글쎄, 그 보증인을 내가 알아서 하겠다니까."
"저하고 박 이사가 하려고 합니다."
김영남이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희들도 세영의 중역이고, 주주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저희들이 투자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에는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참."
웃는 얼굴로 김영남은 입맛을 다셨다. 자본금 2억에서 장일수와 박재호는 각각 15프로의 지분
을 가지고 있는 주주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식회사의 설립조건상 필요했기 때문에 김영남이 임의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지
실제 자금은 모두 김영남이 댄 것이다. 그렇다고 장일수와 박재호가 그들의 지분만큼의 설립자
금을 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금을 내겠다고 우겼지만 김영남이 거절했던 것이
다.
그 일을 말할 때면 지금도 박재호와 장일수는 의견이 다르다. 박재호는 그것을 김영남이 회사
를 자기 뜻대로 끌고가려는 의도로 보았다. 자기들은 명분은 주주지만 투자를 하지 않은 중역
이므로 말발이 설 리가 없다. 김영남은 언제든지 자기 뜻대로 주주까지 바꿀 수 있을 것이고
자신과 장일수는 그의 기세에 밀려 따라야만 할 것으로 본 것이다.
장일수는 일단 김영남의 '너희들에게 설립자금부터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말을 믿었다. 그것
은 김영남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씩 엉뚱한 허세를 부린다.
그렇지만 악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김영남이 전액을 투자했다면서 독선적인 운영을 할 때는 자신은 공식적인 주주의 신분
으로 나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창립공신의 보이지 않는 지분이 15프로 이상의 일을 해 오고 있는 것을
김영남은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장님, 이건 박 이사하고 조금 전에 합의한 사항입니다."
장일수가 다시 말하자 김영남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맙다."
"그럼 5천은 해결되었습니다. 나머지 3천도 문제없습니다."
"허, 장 이사가 자신만만하구만."
그러는 김영남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가난한 집에 쌀 가마니를 들여놓은 것 같습니다. 웬지, 든든해요."
그러고 보면 장일수는 안살림을 맡아하는 주부였다. 밥을 끓이는 땔 감은 어떻게든 준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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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굿
미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