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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 Miguel Ángel Asturias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 로살레스(1899년 10월 19일~1974년 6월 9일)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과테말라태생의 시인, 소설가 겸 외교관이었다. 아스뚜리아스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서방문화의 주역으로 이끈 공헌을 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줌과 동시에 인디오 문화의 중요성 특히 조국 과테말라 인디오문화의 그것에 관심을 끌어냈다.
아스뚜리아스는 과테말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중요한 시기를 해외에서 보냈는데 첫번째로 1920년대 파리에 머물면서 문화인류학과 인디오 신화를 연구했다. 많은 학자들은 그를 문화인류학과 언어학의 연구가 문학의 집필활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소설가라고 여긴다. 파리에 체류하면서 아스뚜리아스는 또한 초현실주의 문예사조에 참여했으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모더니즘 스타일의 수 많은 면모를 도입한 원조로 추앙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 라틴아메리카 붐 세대의 중요한 선각자이다.
아스뚜리아스의 유명한 소설 중 한편인 <대통령 각하 El señor presidente>는 무자비한 독재자 통치하의 삶을 묘사한다. 독재 통치에 대한 아스뚜리아스의 바로 그 공공연한 반대입장 표명이 그로 하여금 남미와 유럽에서 그의 생애의 후반부의 대부분을 망명생활로 이끌었다. 때론 그의 대표작이라고 여겨지는 작품 <옥수수 인간 Hombres de maíz>은 마야 문화와 관습에 대한 방어이다. 마야문명의 신뢰를 현실 참여와 연대의 생활로 채널을 연결하면서 정치적 확신과 마야문명의 신뢰에 대한 지식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였다. 그의 작품은 종종 과테말라 사람들의 사회적 도덕적 열망과 동일시된다.
망명과 주변인화의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아스뚜리아스는 마침내 1960년대에 폭 넓은 인식을 얻었다. 1966년에 그는 소련의 레닌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에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라틴아메리카사람으로서는 두 번째였다. 아스뚜리아스는 말년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는데 74세에 사망했다. 그는 파리의 Pè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되었다.
생애 Biography
생의 초반부와 교육 Early life and education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는 변호사 겸 판사 에르네스또 아스뚜리아스 히론 Ernesto Asturias Girón 과 교사 마리아 로살레스 데 아스뚜리아스 María Rosales de Asturias 사이의 장남으로 1899년 10월 19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태어났다. 2년 후 동생 마르꼬 안또니오 Marco Antonio가 태어났다. 아스뚜리아스의 부모는 스페인 후손의 가문이었고 합리적으로 저명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1660년대에 과테말라에 정착한 식민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가족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선조가 보다 혼혈된 그의 어머니는 대령의 딸이었다. 그들은 아스뚜리아스의 친할아버지 가문의 저택에 거주하면서 안락한 환경에서 생활을 영위했다.[1]
상대적인 특권에도 불구하고 아스뚜리아스의 아버지는 1898년 2월에 권력을 손아귀에 잡은 마누엘 에스뜨라다 까브레라Manuel Estrada Cabrera의 독재와 충돌했다. 아스뚜리아스가 나중에 회고했듯이 “우리 부모님은 투옥되거나 그런 종류의 고초는 없었지만 엄청나게 박해 받았습니다”.[2] 판사의 권한으로 아스뚜리아스의 아버지가 소요 죄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시킨 1904년의 사건이 일어난 후 그는 독재자와 직접적으로 충돌했고 직업을 잃었으며 그와 그의 가족은 1905년에 바하 베라빠스Baja Verapaz의 직할시 살라마Salamá로 강제 이주되어서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는 외조부모의 농장에서 생활했다. 이곳이 아스뚜리아스가 처음으로 과테말라의 인디오 사람들과 접촉한 장소이고 젊은 인디오 여성 롤라 레예스 Lola Reyes 는 후에 그의 작품에 너무나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인디오들의 신화와 전설을 그에게 말해주었다.[3]
아스뚜리아스가 9살이던 1908년에 그의 가족은 과테말라 시티의 변두리로 돌아와 생계를 마련했으며 아스뚜리아스는 청소년기를 보냈다.[4] 아스뚜리아스는 Colegio del Padre Pedro 처음에 다니다가 Colegio del Padre Solís로 전학했다.[4] 아스뚜리아스는 학생의 신분으로 집필을 시작했고 나중에 그의 소설 <대통령 각하 El señor presidente>가 되는 이야기의 첫 번째 초고를 탈고했다.[5]
1922년에 아스뚜리아스와 동료 학생들은 “중산층들이 빈곤층 시민들에게 무료로 강의를 배울 수 있도록 일반적 복지 혜택에 이바지하고자 북돋아 주었던 장소” [6]인 지역사회의 프로젝트인 인민대학교를 발견했다. 아스뚜리아스는 1년간 약학을 공부한 후 과테말라 시티 소재 과테말라 산 까를로스 대학교Universidad de San Carlos de Guatemala 법학부로 전과[7]했으며 1923년에 법학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법학부에서 1등 상에 해당하는 Premio Falla 를 수상했다. 그가 대학생 연합회 Asociación de Estudiantes Universitarios 와 법대생 연합회 Asociación de estudiantes El Derecho 를 창설한 것은 바로 이 대학교에서였다. d이 두 연합회는 과테말라의 애국주의와 긍정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여겨져 왔다.[8] 그리하여 아스뚜리아스는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대학생 총연합회 Asociación General de Estudiantes Universitarios 의 대표자로 일을 하였고 새로운 직업 때문에 엘 살바도르El Salvador와 온두라스Honduras를 여행했다. 1920년에 아스뚜리아스는 독재자 마누엘 에스뜨라다 까브레라Manuel Estrada Cabrera에 항거하는 폭동에 참여했다.
아스뚜리아스의 대학교 논문 “인디오의 사회적 문제”는 1923년에 출간되었다.[9] 법학학사학위를 받은 후인 1923년에 아스뚜리아스는 유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원래 정치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영국에 거주할 계획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7] 그는 곧 파리로 거처를 이전했고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인종학을 공부했으며 프랑스의 시인이자 문학 이론가 앙드레 브레똥André Breton의 영향을 받아 골수 초현실주의자가 되었다.[10] 그곳에서 그는 파리의 한 지역인 몽빠르나스Montparnasse에서 작가와 미술가들의 모임에 영향을 받아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기간동안에 아스뚜리아스는 마야 문화Mayan culture에 대한 깊은 관심을 전개했으며 1925년에 그는 마야의 성서 포플 부Popol Vuh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파리에 거주하면서 그는 <띠엠뽀스 누에보스 Tiempos Nuevos (신 시대)>라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11] 아스뚜리아스 총 10년간 파리에 머물렀다.
정치 경력 Political career
1933년에 아스뚜리아스는 과테말라로 돌아와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조국의 외교단으로 복무했다. 그는 <엘 디아리오 델 아이레 El diario del aire >라는 라디오 잡지를 창간하고 편집했다.[10] 이 즈음에 그는 수 편의 시집을 썼는데 첫 작품 <소네트 Sonetos>는 1936년에 출간되었다.[10]
1942년에 그는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12] 1946년에 아스뚜리아스는 외교직을 시작했는바 중미와 남미의 여러 나라들에서 보직을 수행하면서 작품활동도 병행했다. 아스뚜리아스는 1947년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1952년에는 파리에서 외교 직을 수행했다.[13]
1933년에 아스뚜리아스가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재자 호르헤 우비꼬Jorge Ubico와 그리고 그의 정치적 이상이 참아낼 수 없었던 체제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1944년까지 그는 과테말라에 머물렀다. 과테말라에 머물던 시기에 그는 “우아한 냉소주의라고 규정된바 있는 오직 시” [7]만 출간했다. 보다 자유로운 정부가 나라를 통치했을 때인 1933년[14]에 궁극적으로 그는 10년간의 시 창작활동을 마감했다. 라틴아메리카의 불특정나라에서 이름없는 독재자의 세상을 다루면서 그는 소설 <대통령 각하 El Señor Presidente>를 썼다. 이 소설은 정치적 제한 때문에 우비꼬의 통치 기간 중에는 출간될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대통령 각하 El Señor Presidente>는 1946년에 가서야 출간되었다.[15]
1946년에서 1954년까지 아스뚜리아스는 멕시코, 아르헨티나, 엘 살바도르 대사직을 역임했다. 그의 소설 <옥수수 인간Men of Maize>은 그가 대사로 재직 중에 출간되었다. 각 파트가 전통적인 인디오 문화와 현대성 간의 대조를 다루면서 이 소설은 수 많은 파트로 구성되었다.[16]
망명과 복권 Exile and rehabilitation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는 환 호세 아레발로 베르메호Juan José Arévalo Bermejo의 후계자 하꼬보 아르벤스Jacobo Arbenz 정부를 후원하는 방향으로 대부분의 정치적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17] 아스뚜리아스는 엘 살바도르 출신의 반란군의 위협을 억누르도록 돕기 위하여 대사로서 임무를 수행해 줄 것을 요청 받았다. 그의 노력이 미국정부와 엘 살바도르 정부의 후원을 등에 업은 것이기에 반란군은 과테말라를 침공하는데 성공했고 1954년에 아르벤스 통치를 전복시켰다. 하꼬보 아르벤스 정부가 실각하자 아르벤스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까를로스 까스띠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에 의해 아스뚜리아스는 조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과테말라 국적을 박탈당했으며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칠레로 거주하기 위해 망명하여 그의 인생의 8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비록 망명 생활을 했지만 아스뚜리아스는 집필활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에서 정부의 교체가 그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을 때 아스뚜리아스는 유럽으로 이주했다.[18] 제노아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에 소설 <달의 정령 Mulata de Tal>(1963)의 발간과 함께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갔다.[19]
1966년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 훌리오 세사르 멘데스 몬떼네그로Julio César Méndez Montenegro 가 집권하자 아스뚜리아스는 과테말라 국적을 다시 찾았다. 몬떼네그로는 아스뚜리아스에게 프랑스 대사직을 약속했고 1970년까지 대사직을 수행하면서 파리에 영주권을 획득했다.[20]
아스뚜리아스의 생애의 후반부에 그는 과테말라 인민대학교를 창설하는데 도움을 주었다.[9] 아스뚜리아스는 말년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는데 1974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파리 소재 Pè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Family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는 1939년에 첫 번째 부인 클레멘시아 아마도 Clemencia Amado와 결혼했다. 그들은 1947년에 이혼하기에 앞서 슬하에 두 명의 아들 미겔 Miguel 과 로드리고 앙헬 Rodrigo Ángel 을 두었다. 아스뚜리아스는 1950년에 두 번째 부인 블랑까 모라 이 아라우호 Blanca Mora y Araujo 를 만나 결혼했다.[21] 모라 이 아라우호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아스뚜리아스는 1954년에 과테말라에서 추방되어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거주하러 갔다. 그는 아내의 조국에서 8년을 살았다. 그들은 아스뚜리아스가 1974년에 죽을 때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스뚜리아스의 아들 로드리고 아스뚜리아스Rodrigo Asturias는 아버지의 소설 <옥수수 인간>에 등장하는 인디오 출신 반란군의 이름 가스파르 일롬 Gaspar Ilom 이라는 용병의 명칭을 사용하는 과테말라 혁명 국민 조직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teca (URNG)의 총사령관이었다. 과테말라 혁명 국민조직은 과테말라 내전기간 동안에 1980년대와 1996년 평화 협정이 있기 까지 전성기였던 반란그룹이었다.[22]
주요 작품 Major works
과테말라의 전설 Leyendas de Guatemala
Main article: Leyendas de Guatemala
아스뚜리아스의 첫 번째 주요작품 <과테말라의 전설Leyendas de Guatemala>은 스페인 침공이전의 마야 문명을 묘사한다. 이 소설은 과테말라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비평가들의 호평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시인이자 수필가 폴 발레리Paul Valéry 는 이 작품에 대하여 (로사다 출판사의 일부로 간행된 편지에서) “내가 각별한 즐거움을 경험했던 열대지역의 꿈을 야기했다고 알아챘다“[23]라고 썼다. 이 소설은 수 많은 이야기들을 말해주기 위하여 마술적 사실주의의 요인들을 이용했다. 다른 전형적인 인간들과 대화를 나누는 새들과 다른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말해 주기 위하여 서정적인 산문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글쓰기를 사용했다.[24]
제럴드 마틴 Gerald Martin에게 있어서 <과테말라의 전설>은 “중남미문학에로의 최초의 중요한 문화인류학적 공헌”이다.[25] 또한 장 프랑코Jean Franco는 이 작품을 “프레 콜롬비아 시대pre-Columbian 와 식민지 양식에서부터 영향을 받은 수 많은 과테말라 민속의 서정적인 재창조“[26]라고 묘사한다.
아스뚜리아스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편인 <대통령 각하>의 번역본
Main article: El Señor Presidente
<대통령 각하>는 1933년에 완성되었지만 1946년까지 출간되지 않은 체 남아 있었다. 그의 초기의 작품 중 한편으로서 <대통령 각하>는 소설가로서의 아스뚜리아스의 재능과 영향을 전시해 주었다. 짐머맨 Zimmerman 과 로하스 Rojas 는 그의 작품을 “과테말라의 독재자 마누엘 에스뜨라다 까브레라의 감동 어린 탄핵”으로 묘사한다. [27] 이 소설은 아스뚜리아스가 파리에서 망명할 때 집필되었다.[28] 파리에서 이 소설을 탈고하면서 아스뚜리아스는 친애하는 미래의 라틴아메리카 작가인 아르뚜로 우슬라르 삐에뜨리Arturo Uslar Pietri와 쿠바출신의 알레호 까르뺀띠에르 Alejo Carpentier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 문예사조의 회원들과 교류를 맺었다.[29] <대통령 각하>는 라틴아메리카 독재자 치하의 삶을 폭로한 수 많은 작품 중 한편이며 최초의 사실적인 독재자 소설dictator novel로 몇몇 비평가들에 의해 알려졌다.[30]
실제 사건들은 애매모호하고 줄거리는 부분적으로는 실제 사건들을 근거로 하는 반면에 시간과 장소는 허구이다. 아스뚜리아스의 소설은 악행이 어떻게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부터 거리와 나라의 국민들에게 하향식으로 퍼져나가는지 규명하고 있다. 정의는 소설에서 조롱되어 지고 독재자의 전제정치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소설의 개별 캐릭터들은 독재에 의해 깊숙이 영향을 받고 있으며 끔찍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28] 이 소설은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과 친숙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체제로부터 탈출을 모색하는 몇몇 캐릭터들과 함께 여정을 떠난다. 독자들이 “천사의 얼굴”이라고 알고 있는 독재자의 신임을 얻은 고문은 까날레스 장군 General Canales 의 딸 까밀라 Camila 와 사랑에 빠진다. 딸이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장군은 처형의 위험에 처한다.[31] 천사의 얼굴은 그녀에 대한 사랑과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사이에서 방황한다. 독재자는 이름이 불려지는 일이 결코 없지만 그는 마누엘 에스뜨라다 까브레라와 현격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대통령 각하 El Señor Presidente>는 초현실적인 테크닉을 사용하고 현실에 대한 인디오들의 비이성적 인식은 무의식적 세력의 표현이라는 아스뚜리아스의 개념을 반영한다.[32]
극작가 우고 까릴요Hugo Carrillo 는 1974년에 <대통령 각하 El Señor Presidente>를 희곡으로 각색했다.[33]
Main article: Men of Maize
<옥수수 인간 Hombres de maiz >(1949)은 보편적으로 아스뚜리아스의 대표작이라고 여겨진다. 이 소설은 각 파트가 전통적인 인디오 관습과 하나의 진보적인 현대화된 사회의 대조를 탐험하면서 6개의 파트로 집필되었다. 아스뚜리아스의 소설은 작가가 열의를 보였고 박학하기도 했던 주제이기도 한 인디오 지역사회의 마술적 세계를 탐험한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전설을 묘사하지만 줄거리는 아스뚜리아스의 창작이다.[34] 상업적 개발이 목적인 외부인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땅을 가지고 있는 고립된 인디오 지역사회(옥수수 인간)를 중심으로 줄거리가 전개된다. 인디오 출신의 지도자 가스빠르 일롬 Gaspar Ilom 은 반란을 진압할 요량으로 그를 죽이는 개발자들에 대항하는 지역사회의 저항을 이끈다. 무덤의 뒤편에서 일롬은 “민속-영웅”으로서 생활하지만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땅을 빼앗긴다.[35] 소설의 후반부에서 주동인물은 나초라는 우편배달부이고 이야기는 잃어버린 아내에 대한 그의 탐문에 관심을 둔다. 아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그들이 “백인 사회”인양 연대를 맺었고 자신의 수호정령guardian spirit을 대변하는 코요테로 자신을 변형시킨다.[36] 알레고리(풍유)를 통해서 아스뚜리아스는 유럽의 제국주의imperialism가 중남미에서 고유한 전통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변화시키는지 보여준다. [37] 소설이 끝나는 부분에서 장 프랑코가 주목하듯 “인디오 전설의 마술적 세계는 상실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수했던 옥수수를 나르기 위하여 개미가 되어 버리는 “유토피아적인 주목”에서 결론을 맺는다. [36]
신화의 형태로 씌어진 이 소설은 실험적이고 야망적이며 난해하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시간적 구조는 신화적 시간으로 수 천 년의 세월이 아마도 함축되어 있으며 일순간으로 보이며” 이 소설의 언어 또한 “너무나도 구조적이어서 인디오의 언어와도 유사하다”.[34] 비범한 접근방식으로 인하여 이 소설이 비평가들과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에 앞서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37]
아스뚜리아스는 바나나 집단농장에서 유린당하는 원주민 인디오들의 착취에 관한 서사극 3부작을 또한 집필했는데 소설 <사이클론 Viento fuerte >(1950), <녹색의 교황 El Papa Verde >(1954), <매장당한 사람들의 눈동자 Los ojos de los enterrados > (1960)로 구성된 이 3부작은 중미 바나나 재배 산업에 대한 외국의 통제권의 결과의 허구적 보고이다.[7] 이 작품들은 그의 조국 과테말라에서 소수의 물량만 출간되었다.[15] 아스뚜리아스는 처음의 두 권이 출간된 지 거의 20년이 지난 후에 3부작의 마지막 권을 완성했다. 과일 재배 산업에 대한 그의 비평과 과테말라의 인디오들이 어떻게 착취당했는가 라는 방법은 궁극적으로 소련 최고권위의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게끔 했다.
아스뚜리아스의 명성은 냉전 시대에 서방진영과 공산 진영Communist bloc 양쪽에서 인정 받았던 몇 명 안 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그를 반열에 올렸다. [38]
Main article: Mulata de tal
아스뚜리아스는 1963년 아내와 함께 제노아에 거주했을 때 <달의 정령 Mulata de tal>을 출간했다. 그의 소설은 수 많은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이데올로기와 문학 Ideologies and Literature>은 이 작품을 “소설 속에 구현된 사육제”라고 묘사했다. 이 작품은 마야의 참회의 화요일 (사순절의 마지막 날)과 스페인식 바로크의 충돌을 대변한다. [39] 이 소설은 1960년대 대표 소설로 부상했다.[24] 소설의 줄거리는 달의 정령 물라따를 통제하기 위한 까딸리나 Catalina 와 유미 Yumí 의 전쟁을 주변부로 선회한다. 유미와 까딸리나는 마법의 전문가가 되고 그들의 연습을 이유로 교회의 비판을 받는다. 이 소설은 믿음의 상이한 알레고리(풍유)를 형성해 내기 위해 마야의 신화와 카톨릭 전통을 이용한다.
<히스패닉 리뷰 Hispanic Review >에 기고한 글에서 제럴드 마틴은 이 작품은 “이 소설의 전체적인 예술은 그 언어를 재배치하는 것이 충분히 확실하다. 일반적으로 아스뚜리아스는 스페인어가 그에게 제공하는 모든 자원들을 이용함으로써 만화의 시각적 자유를 걸맞게한다”라고 촌평했다. [40] 아스뚜리아스는 색채, 자유주의적 이론, 그리고 스페인어의 그의 상이한 사용의 독특한 이런 이용법으로 이 소설을 구성했다.[41] 그의 소설은 또한 프랑스에서 출간된 최우수 중남미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실라 몽세구르 상 Silla Monsegur Prize 을 수상했다.[9]
젊은 옥수수 신에 의해 옷과 모자가 벗겨진 지하세계의 군주를 묘사한 마야 항아리
풍부한 마야 문화가 아스뚜리아스의 문학작품과 정치 생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영향은 부정할 수 없다.[42] 그는 마야 전통의 신성함을 신봉했으며 자신의 소설 속에 인디오의 형상과 전통을 결합시킴으로써 마야 문화로 생명력을 되살리는 작업을 했다.[43] 예를 들어 그의 소설 <옥수수 인간>의 제목은 인간은 옥수수 줄기에서부터 창조되었다는 마야의 믿음에서 나왔다. 마야 문화에 대한 아스뚜리아스의 흥미는 수 많은 마야의 전통과 문화가 카톨릭 교회의 영향에 의해 고사되었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44] 중미에서 스페인사람들은 어떤 의례는 사악할 정도로 금기시했으며 아즈텍과 마야의 서적을 파괴했으며 과테말라에서 인디오 지역 사회에 카톨릭 종교를 설파하고자 싸움을 벌였다. 학자로서의 아스뚜리아스의 작품은 억압 받은 신성한 전통을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 되돌리려고 통합했다.[citation needed]
아스뚜리아스는 소르본느Sorbonne (당시에는 파리대학교)에서 키체 마야 Quiché Maya문화의 전문가 조르주 레이노Georges Raynaud와 함께 동문 수학했으며 마야 문화의 성서 포폴 부Popol Vuh의 번역을 1926년에 궁극적으로 끝마쳤다.[45] 과테말라 인디오들의 전설과 신화에 매료되어 1930년에 <과테말라의 전설>을 집필했다. [46]
장 프랑코 Jean Franco 는 아스뚜리아스를 로사리오 까스떼야노스Rosario Castellanos와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José María Arguedas와 더불어 “인디오주의자” 작가로 규정한다. 이들 3명의 작가 모두는 인디오를 대표하는 경우에 있어서 장르의 제한 때문에 사실주의를 깨트리는 방향” [47]으로 이끌어진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프랑코는 아스뚜리아스의 <옥수수 인간Hombres de maíz>을 “이 소설에서 사용된 테크닉은 전통적인 산문보다는 시에 더욱 유사하지만 이것이 인디오의 마음을 대변하는 더욱 진정한 방법이라고 우리는 느낀다” [48]라고 말한다. 이 소설의 일시성은 “수 천 년의 세월이 아마도 함축되어 있으며 일순간으로 보여지는 하나의 신화적인 시간이다”라고 또한 지적한다.[47] 이 소설의 언어조차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스페인어로 너무나도 구조적이어서 인디오의 언어와도 유사하다”. [47]
과테말라 시티 소재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 문화 센터 Centro Cultural Miguel Ángel Asturias
1974년 그의 사망 후에 과테말라는 그의 이름을 따서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 훈장을 제정했다. 과테말라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 국민문학상은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추가해서 과테말라의 국립극장도 그의 이름을 따왔다.
아스뚜리아스는 과테말라에서 인디오 문화를 강력하게 유지할 것을 확신하고 박해 받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사람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그의 문학은 비평적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언제나 진가를 인정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럴드 마틴에게 아스뚜리아스는 “진정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모더니즘을 시작했었다”라고 주장하는 그의 용어로 “ABC 작가-아스뚜리아스 Asturias, 보르헤스Borges, 꼬르따사르Carpentier” [49]중 한 사람이다.
비평가들은 그의 소설을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50]의 그것과 비교한다. 그의 작품들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그 밖의 수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아스뚜리아스는 작품 경력을 통해 수 많은 명예 학위와 상을 받았는데 그 중 가장 큰 영예는 1967년도 노벨 문학상 Nobel Prize for literature이다. 노벨 문학상은 약간의 논쟁의 여지를 야기했는데 비평가 로버트 미드 Robert G. Mead가 주목했듯이 아스뚜리아스는 라틴아메리카 밖에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고 라틴아메리카 안에서도 노벨 문학상을 받아도 마땅한 후보들이 있었다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했다.[51] 더욱이 “과테말라 사람들에 대항하여 미국의 간섭” [52]을 폭로했다 라는 연유로 수여됐던 소련의 1966년도 레닌 평화상Lenin Peace Prize은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이 상은 그의 바나나 3부작이 완성된 후에 찾아 왔다.
그 밖의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 Premio Galvez, 1923; Chavez Prize, 1923; Prix Sylla Monsegur, for Leyendas de Guatemala, 1931; and Prix du Meilleur Livre Étranger, for El señor presidente, 1952.[18]
What follows is a selected bibliography. A more complete listing can be found at the Nobel Prize website.[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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