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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의와 신뢰에 뿌리를 둔 낙관적 리얼리스트-소설가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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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잎사귀를 일제히 틔우고 있다
감겨 있던 무수한 눈들이 눈을 뜨는 순간이다
나무 아래서 나는 나무를 읽는다
이 세상의 무수한 경전 중에서
잎사귀를 틔우는 순간의 나무는 장엄하다
…
새들도 이 경전을 읽으려고
나무 기슭을 찾는 것이다
새들이 끌어당기는 나무의 힘!
나는 그 힘을 동경한다
…
- 김충규 시 <나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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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계량(計量)한 듯한 시간만을 할애하고 자리를 뜨려는 그를 몰아붙여 다시 카페 <오르세>로 갔다. 굳이 <오르세>를 택한 것은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은행나무 길이 보기 좋아서이기도 했고, 그 집의 상징과도 같은 리트리버 종 늙은 개 '주디'의 안부도 궁금해서였다. 구석에 웅크린 채 졸고 있던 늙은 개를 쓰다듬고 있는 동안 그는 차를 주차시켰다. 꽤 오랜만이었는데도 <오르세>의 은행나무와 늙은 '주디'는 변함 없이 나를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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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읽은 것까지 합치면 나는 그의 데뷔작 「겨울 무지개」를 세 번 읽은 셈이 된다. 그를 처음 만난 1998년에 다른 사람 책을 빌려서 한 번 읽었고, 2000년에 그가 누군가에게 주려고 사인해 놓았던 면지를 북 찢어내고 다시 내 이름을 써서 준 소설집 『깊고 깊은 골짜기』로 또 한 번 읽었으므로.
「겨울 무지개」는 읽을 때마다 나를 강한 흡인력으로 끌어당겼다. 컴퍼스와 자 따위의 용구를 적당히 사용해 제도한 도면 같은 빈틈없는 구성과 군더더기가 없고 절제된 문장,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짙은 서정성 그리고 읽고 난 후의 서늘한 감동, 이런 장점들이 《월간 문학》심사위원들을 사로잡지 않았을까.
이원규의 「겨울 무지개」는 작품의 전개 과정이 마치 추리소설 같은 호흡으로 진행되면서 백치 누나를 가족이 모살(謀殺)하는 안타깝고 서글픈 이야기를 소년의 눈을 통해 그야말로 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고 있다. 끝 대목에 가서 겨울 무지개를 등장시킴으로써 실제로는 살벌한 행위라 할 수 있는 처사들이 프리즘현상을 일으켜 승화시켜지고 있다.
고 한 심사평을 보아도 이원규의 데뷔작 『겨울 무지개』가 신인의 수준을 뛰어넘는 수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에 정식으로 문학 수업을 시작하여 여러 차례의 신춘문예 응모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27세에 붓을 꺾었다가 36세에 비로소 작가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랬으므로 이 작품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할 만도 한데 그는 고작 이렇게 겸손해 했다.
'나이 들어 손해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서정성 있는 성장 소설 쪽을 택했죠. 다행히 그게 맞아떨어진 거고.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의 고향 마을 그대로이니 굳이 만들고 말고 할 것도 없었구요. 인천 서곶이란 곳은 전라도, 경상도 오지보다 전기가 늦게 들어왔을 정도의 깡촌이었어요. 그것이 내 소설의 정신적 자양분인 셈입니다.'
나직하지만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한 그루 나무를 떠올린다. 나무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또 냉정하기도 하다. 땅에서 나고 자라 굽힐 줄 모르는 자연 그대로이다. 나는 몇 년 간 그와 만나오면서 죽 그를 빗대어 표현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무였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나무일까?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세쿼이아삼나무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넓은 면적에서 자라는 인도의 반얀나무도 아니고,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에 나온다는 천국과 지옥을 지상과 이어주는 거대한 물푸레나무도 아닌,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대단히 크지도 굵지도 않은 실한 참나무이다. 장정 손바닥처럼 넓은 잎 사이로 어린 도토리 몇 개를 달고 있고, 나뭇가지 한켠에서는 회색 이끼도 더불어 자라고 있는 곁가지 많은 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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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천의 변두리인 서곶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그곳에서 자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글짓기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분이라 거의 매일 한 편씩 글을 써야 했다. 선생님에게 인정받아 학교 대표로 어린이 백일장에 나간 소년 이원규는 옷 잘 차려입고 얼굴이 하얀 도회지 아이들을 제치고 세 해 연속 3위 안에 입상한다. 닭과 돼지들이 밥을 달라고 소리소리 질러서 아침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그런 시골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썼을 뿐이었는데, 그게 입상했다는 게 나는 오히려 신기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크게 잘 웃지는 않지만 간혹 쓰윽, 이라는 의태어가 잘 어울리는 웃음을 웃곤 하는데, 시골 이야기를 할 때와 소설 이야기를 할 때이다.
감성적인 누나 셋을 둔 덕분에 일찍부터 음악의 세계를 빠져든 그는 인천고등학교 1학년 때 교지 <미추홀>에 '오페라 해설'을 실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5월에 급성 류머티스열이라는 진단을 받고 장기결석을 하게 된다. 그때 그를 지탱해준 건 일본제 내셔널 상표 반달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그리고 그는 누나들이 보던 '백수사 간 한국문학전집'과 '정음사 간 세계문학전집' 등,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병고와 절망과 고독과의 싸움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문학 잠복기에 들어간다.
다행히 병이 다스려지고 다시 입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초등학교 때 함께 백일장에 나갔던 여자친구로부터 동국대 국문과에 가서 정식으로 문학 수업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게 된다. 가난으로 인해 문학을 접고 간호사의 길을 택했던 그녀는 친구를 문학의 길로 안내하고 미국 이민을 떠나고, 이원규는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한다.
동국대에 들어가서 그는 양주동, 서정주, 조연현, 장호 등 당시 이름이 알려져 있던 선생님들과 고교생 문학 콩쿠르에서 명성을 떨쳤던 많은 친구, 선배를 만나게 된다. 당시 고교생 잡지로서 유명했던《학원》을 정점으로 하여 이름을 떨쳤던 동기생들의 극성스런 자신감 때문에 그는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린 채 혼자 외롭게 쓰고 또 썼다.
스승도, 선배도, 동기생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로 그렇게 고독한 문학 수업을 하던 1학년 가을, 그는 90매 짜리 처녀 장편「불연속성의 도정」이란 단편소설로 동국대 학술상 문학부문을 수상한다. 드디어 그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의 문학 수업은 더욱 치열해진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군 입대 영장을 받으면서 그의 문학수업은 중단된다. 육군에 입대한 그는 특전사에 배속되었다가 지명 차출되어 파월 백마사단에서 장거리 정찰대원으로 종군하게 된다. 그때, 실로 여러 차례 목숨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위험을 겪었던 그 전쟁을 증언하는 소설을 쓰리라고 결심한다. 그 결심은 진중일기라는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았다가 훗날 장편 『훈장과 굴레』로 새롭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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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복학한 그는 1972년《경향신문》신춘문예 응모를 시작으로 단편·중편·장편 등을 여덟 차례 응모했는데, 일곱 번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시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조와 한탄은 마침내 스물 일곱 이원규의 붓을 꺾게 만들고 만다. 그 후 7년 간 소설은 덮어두고 그는 교사 생활에만 전념하여 반 학생 65명 중 43명을 4년제 대학에 보내는 '맹렬교사'가 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시작된 이명(耳鳴)의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마침내 그는 정신과를 찾기에 이른다.
'교사를 하시기 전엔 무슨 다른 일을 하신 적은 없나요?'
이런저런 문진 끝에 의사가 물었다.
'소설을… 소설을 좀 끄적거렸습니다.'
그는 우물쭈물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러셨군요! 다시 쓰십시오. 당신은 지금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쓰기 시작하면 당신의 병은 말끔히 나을 것입니다.'
소설을 쓸 것, 그것이 의사의 처방전이었다. 그랬다. '소설을 쓰지 않음' 이 병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 때, 의사의 처방에 따라 그는 '소설'이라는 녀석을 다시 끄집어내어 맞서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한 순에 심신이 와르르 와해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다시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는 것을 안 동국대 국문과 출신 선후배 몇 명이 찾아와 등단도 하지 않은 그를 끼워 넣어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이상문, 고 정채봉, 유한근, 정찬주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그 모임은 두 해 동안 그를 격려하고 채찍하며 그가 작가로 우뚝 서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가 문학을 향해 다시 어렵게 내민 손을 잡아준 것은 1984년 《월간문학》8월호였다.
'잊을 수 없는 문학 동지들입니다. 이미 문단에서 이름을 얻고 있던 그들이 스터디 그룹을 계속해나간다는 게 쉬운 일이었겠어요? 그 사람들이 큰 힘이 돼 주었죠.'
36세 늦깎기 작가로 문단 말석을 차지한 그였기에 기쁨보다 감회가 컸다. 그러나 감회는 오래가지 않았다. 단 한 곳에서도 늙은(?) 신인에게 원고 청탁을 해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신춘문예 당선 작가가 '등단만 하면 동네 슈퍼마켓 아저씨도 알아보고 기뻐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전화통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원고 청탁 전화는 단 한 건도 걸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후딱 정신이 났다'고 술회한 것과 같은 고통의 나날들이 그에게도 이어졌다. 당시《한국문학》을 경영하고 있었던 조정래 선배가 지면을 할애해준 것이 고작이었다. 만약 그런 고통의 시간들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는 다시 장편 공모에 도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2년 뒤인 1986년 2월에 《현대문학》창간 3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훈장과 굴레」가 당선되기에 이른다.
「훈장과 굴레」는 옛날 붓을 꺾기 전에 창작 노트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고, 십년의 세월이 흘러 베트남 전쟁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도 많이 변해 시의적절한 소재였다. 그 자신 베트남인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보상심리 같은 것도 있었고, 지면조차 얻을 수 없었던 무명작가라는 소외감까지 부채질하여 비장하게 매달렸던 결과였다. 그의 작품이 '공연히 비장하고 엄숙한 느낌을 주는 것도 그런 과정 때문일 거'라고 그는 말한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한 늦깎이의 처녀장편 -이원규론->(현대문학, 1987년 9월호)에서 「훈장과 굴레」를 발표한 신인 이원규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늦깎이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찍이 등단하여 문단 정치에 지친 올깎이보다는 뭔가 싱싱한 힘이 늦깎이에게는 숨어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원규처럼 오래 문학을 놓았다가 불현듯 치미는 욕구 때문에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 작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만한 의식으로 이만큼 무리 없이 장편소설을 이끌어간 이원규의 작가적 역량이 미덥다.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원규는 1987년에 첫 장편소설집 『훈장과 굴레』(현대문학사)를 세상에 내놓는다. 1988년에는 첫 창작집 『침묵의 섬』(현암사)이 출간되고, 같은 해 11월에 『침묵의 섬』으로 대한민국문학상 소설부분 신인상을 수상한다. 1990년 1월에는 장편『황해』(한국예술사)를 출간하였고, 같은 해 9월에 『황해』로 박영준 문학상을 수상한다. 이어 1993년 4월 중편 「천사의 날개」로 동국문학상을 받았으며, 1994년에는 중편집 『천사의 날개』(문학과 지성사)가 출간되는 등, 대하소설 『거룩한 전쟁』(전 9권, 신구미디어)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20권 이상의 저서를 출간하면서 그는 이른바 대형 작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84년 데뷔했을 때 이젠 창작집 한 권은 남겨두고 죽을 수 있게 되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어느 새 세상에 내놓은 책이 20권이 넘었군요…….'
라며 그는 다시 한 번 예의 그 웃음을 쓰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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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 문학사전에는 그를 '분단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온건하게 표현하는 작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그 어떤 작가보다도 분단이라는 주제로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끈질기게 그 주제에 매달리면서 작품의 깊이를 더했다. 그를 일약 유명 작가 대열에 올려놓은 「훈장과 굴레」가 그러하고 「황해」가 그렇다. 그가 등단할 당시엔 '분단문학'이라는 것이 성행했다. 그때 그런 문학사적 조류 속에서 그는 분단문학 내에서도 엄밀한 역사적 고증과 진지한 작가적 시각을 견지하는 색깔 있는 작가로 올라섰다.
그는 우리의 분단소설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어민들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가로, 또한 분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갖가지 인물 유형을 누구보다도 다채롭게 형상화한 소설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분단작가'라는 이미지로 고정된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불만을 토로한다. '분단문학을 하나, 둘 쓰다 보니 평가를 얻게 되고, 계속하여 그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동안 서정성 있는 소설을 발표하지 않은 건 아닌데도 워낙 '분단작가'라는 이미지가 강렬해서인지 그런 소설들은 묻혀버린 감이 있다'고 말한다.
성민엽은 오늘의 한국문학을 조명하면서 <리얼리즘의 넓은 길>(《문학과 사회》1994년 겨울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원규의 소설 쓰기는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는데 그 관심은 단순히 대상적 관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 밑에 숨어 있는 역사적 뿌리의 발굴과 맞물리며, 이원규의 리얼리즘은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리얼리즘'이라고 평한다. 그리고 김치수는 그를 '비관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도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드물게 보이는 무게 있는 작가의 대열에 서 있는 것 같다'(『천사의 날개』해설 <상황과 우연의 진정한 의미>, 문학과 지성사, 1994)고 본다. 그리고 이원규의 그 희망은 구체적으로 '운명공동체로의 전통적 가족 관계의 회복' 이며 그것이야말로 '상처를 치유하고 위안을 줄 수 있는 유력한 대안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문학평론》, 1997년 겨울호, 장영우, <상처와 위안>)
어떠어떠한 경향이 짙은 작가라고 해서 한결같이 그러한 경향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어느 작가에 대해서도 섣부르게 한 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할 수는 없다. 그렇긴 하더라도 굳이 그를 한 문장으로 정의해 본다면 '인간에 대한 선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낙관적 리얼리스트'가 아닐는지.
'이젠 '거룩한 내용'을 써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에서 일단 떠나 소설의 본령이랄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 본질이나 인간 창조에 다시 접근해 가야죠.'
그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그만큼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떠한 문학이라도 시대적 변화와 요구에 따라서 변화해나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2000년을 전후하여 「펠리컨의 날개」등 다시 서정성 있는 소설을 여러 편 발표한 그는 2000년에는 네 번째 창작집 『펠리컨의 날개』(책 읽는 사람들)를 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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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무이면서, 또 스스로 나무를 심는다.
곽하신, 이범선, 김문수, 조정래, 한용환, 황석영, 이상문에 이어 동국대학교 출신 소설가의 굵직한 뿌리에 위치한 그는 현재 모교인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그리고 고향 인천의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나무 심는 일에 여념이 없다.
가르치는 일에 빠져 정작 자신은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그는, '이쯤에서 학생들 작품 봐 주는 일은 그만두고 내 글 써야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의 강의를 신청하는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는 강단을 떠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는 천생 훈장이다. 될성부른 떡잎을 보면 아무리 잎들이 가뭄에 누렇게 떴어도 끝까지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진정한 교사이다. 아니, 별 신통해 보이지 않은 떡잎이라고 해서 함부로 잘라버리지는 않는다.
강의할 때의 그는 강력한 흡판을 숨기고 있는 식충식물처럼 수강생들의 호흡까지도 빨아들인다. 강의 시간 내내 잡념이 들어설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커서도, 몸짓이 현란해서도 아니다. 필요 이상 톤을 높인 적도 흥분한 적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공들여 조율한 악기를 부리듯 적당한 완급과 고저장단으로 수강생들의 오감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가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교편을 잡았던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고 흔히 말하듯, 남들보다 깊고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면 그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는 부적격이다. 그는 오래갈고 닦았던 소설 이론과 창작 실전 경험에다 잘 전달하는 능력까지 갖춘 명교수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았는가? 물이 빠지고 난 바닥처럼 속속들이 드러난 그곳을 다시 호미로 파 보았는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직접 보았는가? 만약 아직 그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시작해보라. 자신들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스스로 한번 찾아보라. 지금껏 몰랐던 자신만의 빛나는 무엇인가가 그 속에 숨어 있지 않은지 스스로 확인하라.'
그의 첫 강의는 그런 주제로 시작되었는데,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애정 어린 눈길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거쳐 나에게로 와 꽂혔을 때 내 온 살갗에서 스륵 스륵, 소리를 내면서 소름이 돋았다. 몇 년 간 모른 척 눌러두고 지냈던 '소설'이 작은 벌레들처럼 곳곳에서 기어나와 내 심장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왔다. 고통과 부끄러움으로 금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날 밤부터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왜, 무엇 때문에 써야 하는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다만 나는 내 가슴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있길래 그토록 고독하고 고통스러웠는지 그것을 알아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우리는 마술에라도 걸린 듯 내장과 가는 뼈들이 다 보이는 작은 열대어처럼 투명해진다. 처음으로 투명해진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지독한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작업을 거치고 났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점차 깨닫게 된다. 그는 소설이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왜 써야 하는지, 무엇을 써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쓰는 것인지 그런 것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악수하는 법부터 가르쳤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는 그 누구도 아닌, 더도 덜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되게 해 주었다. 1998년 가을, 친구를 따라 청강하러 갔던 나는 그렇게 그와 운명적으로 해후했다. 뒤늦게나마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찾아온 많지 않은 행운들 중 하나였다.
물론 두려움에 떨며 도중에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끊임없이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가지치기를 해주는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을 느낀 나무들은 끝내 소설에 뿌리를 내리고 일어섰다.
1994년 처음 강단에 선 이래 지금까지 박석근(1996년 문학사상으로 데뷔), 김은경(1997년 문학동네 동계문예공모), 최인(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박정란(1998년 경인일보, 1999년 대한매일신문 신춘문예), 김숙(1999년 문학동네 하계문예공모), 조혁신(2002년 소설시대), 우경미(2002 작가세계) 등 7명의 제자를 굵직굵직한 지면을 통해 데뷔시킨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소명의식을 갖고 강단에 서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문학이야말로 청춘 시절 절망의 구렁에서 나를 이끌어낸 구원한 지표이다. 그 길을 떠났다가 못견디어 다시 뛰어든 것처럼 마치 숙명과도 같은 멍에이고, 나 자신을 지탱하는 정신의 기제이다. 예술이란 죽을 때까지 매달려도 완성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늘 자신의 한계를 들여다보며 절망과 싸우는 일이지만 나는 기꺼이 고난 어린 문학 수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내가 만난 소설가 이원규는 그의 소설 속에서, 막 작가라는 이름을 얻은 제자들 속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심고 있는 어린 묘목들 속에서 아름답고 든든한 참나무 한 그루로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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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끝내고 <오르세>를 나오면서 나는 또 '주디'를 쓰다듬어 주었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은행나무는 더욱더 우람하게 자랄 것이고, '주디'는 조금씩조금씩 더 노쇠해갈 것이다. 생명 있는 것들이 쑥쑥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아름답지만, 생명 있는 것들이 묵묵히 숙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슬프지만 아름답다. 내가 <오르세>를 좋아하는 까닭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한 편의 잘 짜여진 '소설'이기 때문은 아닐까.
- 김숙(작가)
<문학과 창작> 2002년 10월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