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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교회
본문 / 빌1: 1~2
지난주까지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모두 마치고 이번 주부터는 빌립보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말씀을 다함께 듣고 보고 만지고 체험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를 누리시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빌립보서를 보는 첫 시간이니까 전반적인 서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 빌립보 교회에 보낸 옥중서신 중에 하나입니다. 이후로 보시겠지만 빌 1:7, 13, 14절에 ‘나의 매임으로’라는 표현을 보면 옥중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어떻게 해서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감옥에까지 이송되어 갇히게 되었느냐는 사도행전 21장 이후를 보시면 구체적으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의 마지막 28: 30,31절을 보시면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히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가택연금의 형식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며 기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옥중생활 중에 사도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세웠던 교회 중 에베소교회, 빌립보,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편지를 기록했는데 이 편지가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입니다.
이제 우리가 보게 될 말씀이 빌립보서이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알아야 이 말씀들이 입체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원래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의 의해 새워진 도시로 그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그리스와 로마의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빌립보 도성은 로마의 식민지가 됩니다. 로마는 이 빌립보를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퇴역한 군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살게 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문화와 철학, 정신을 빌립보에서 구현하게 합니다. 이를 위해 빌립보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해 줌으로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심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도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 나름대로 큰 자부심과 긍지심이 있는 거나 같습니다. 강대국의 면모를 자랑하는 미국은 자국민이 어느 나라에 억류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면 전직 대통령을 보내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지불하는 등의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구해 옵니다. 그러니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통치 수단으로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줌으로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나중에 보시겠지만 이런 배경을 알게 되면 사도 바울이 왜, 빌3:17~20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대제국 로마의 시민은 로마의 문화와 정신을 가지고 거기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처럼 성도는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원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자부심과 긍지심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품위와 권위를 들어내며 살아야 한다고 바울이 권면한 것은 빌립보 교회가 이런 배경 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비유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언제 어떻게 설립하게 되었는지를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 교회를 세웠는데 행 16:11~40절에 가보시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12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그런데 이렇게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 것은 사실은 등 떠 밀러서 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전 6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원래 사도 바울은 빌립보가 있는 유럽 쪽이 아닌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쪽으로 전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자꾸 막으시는데도 바울은 고집을 부려 아시아 쪽으로 가려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니까 하나님께서 밤에 환상을 보여주며 말씀 해 주십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하는 환상을 바울이 보고서 아시아의 끝인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 건너가게 된 겁니다.
여러분! 환상을 보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좋습니까? 성도들 중에는 환상을 보는 것을 뭐 대단한 것을 보고 대단한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환상을 보여 달라, 자기에게 무슨 원대한 비전을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까? 성령의 거듭되는 요구에도 얼마나 말을 듣지 않았으면, 얼마나 하나님이 급하셨으면 마지막 방법으로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겠습니까? 바울은 유럽 쪽이 아닌 아시아 쪽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한 줄 아십니까? 바울이 아시아에서 전도를 하는데 가는 곳 마다 전도가 너무너무 잘 되는 겁니다. 행 16:5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 가니라” 이렇게 복음이 잘 전도되고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데 이거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지 않나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뭐가 잘 되면 하나님의 뜻이고 잘못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면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요? 성도가 많고 부흥이 되면 하나님의 뜻이고 교회에 성도가 많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걸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너무 전도가 잘 된다고 생각하고 아시아 쪽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아시아 쪽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아서요? 아닙니다. 아시아 쪽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벧전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아시아 쪽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하여 주님을 만날 때 너는 내 이름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며 유럽 쪽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시아 쪽에서 전도할 때 가는 곳 마다 잘 되니까 이걸 잊어버린 겁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도 이러는데 우리야 어떻겠습니다. 일이 다 잘 되어 간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잘 될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 주셨겠습니까? 우리는 환상을 보면 무슨 대단한 것을 보고 경험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환상을 보고는 이걸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전은 자기 뜻을 이루어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환상과 비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냐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고난 후에 행16:10에 보시면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환상을 본 후에 아시아가 아닌 유럽 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이 뜻인 것을 인정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인정한다는 뜻이 원어로 ‘쉼비바조’인데 ‘결론’ 짓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원뜻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의미입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설득 당해서 인정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격렬한 논쟁 끝에 하나님께 설득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이나 환상은 이상한 것을 꿈에 보거나 무슨 대단한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내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것이 가장 큰 환상을 본 것이고 가장 큰 비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시아의 끝에 있는 항구 드로아에서 복음을 들고 건너간 유럽의 첫 번째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며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두 가정에 복음을 접하게 하십니다. 루디아의 가정과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두 가정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보면 기도하려고 기도처를 찾다가 만납니다. 행 16:13절에 보면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다니다가 루디아를 만납니다. 이후 16절에도 보면 바울이 감옥의 간수를 만나게 된 배경도 기도하는 곳을 찾다 가였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은 시작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는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져 갑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일을 확인하고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이게 기도의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하루에 셀 수 없는 많은 사건과 일을 만납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시작하는 그 하루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하루가 그냥 지나간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앙의 원리를 알았기 때문에 가는 곳 마다 기도하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하나 더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빌립보에 전하기 전에 이방나라에 흩어져 사는 소위 디아스포라가 이미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사는 사람들은 남자 10명 이상만 모이면 반드시 회당을 만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유대전통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회당이 아닌 기도처에 갔다는 것은 유대인 남자가 10명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것을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을 기록하여 보낼 때는 언제나 서두에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말을 전할 때는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자신이 사도라는 걸 반드시 밝힙니다.(롬, 고전, 고후, 갈, 엡, 골, 딤전, 딤후, 딛) 그런데 유독 빌립보서의 서두 1절의 인사말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이라고 하며 사도라는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은 언제나 유대인들이 꼭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당시에 사도라고 인정받으려면 조건이 있어야 했는데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가르침을 받거나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부름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가지가 모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그것도 예수 믿는 사람 잡아다가 죽이는 일에 앞장서다가 어느 날 갑자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했다고 하며 갑자기 나타나 사도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유대인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겁니다. 아시다 시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부정하고 부활도 부정하고 오직 구약성경의 말씀만 믿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들이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니 바울을 가짜 사도라고 하며 죽이려 했던 겁니다. 문제는 바울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도라는 칭호를 받지 않아 권위가 없고 사도라는 대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만약 사도가 아니라고 판정이 나면 지금까지 자기가 전한 모든 복음도 가짜가 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목숨을 걸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메섹에서 회심 한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너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의 택한 그릇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전도하는 목회 현장은 항상 이런 사도권의 문제가 뒤따랐는데 빌립보교회는 이런 사도권의 문제가 없었던 것이죠. 이런 부분 하나하나를 알고 빌립보서를 보면 말씀이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또 하나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해서 두 가정에 복음을 전합니다. 루디아의 가정과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루디아의 가정은 아주 쉽게 전도가 됩니다. 행 16:14절 이하를 보시면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가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고 따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루디아의 가정이 다 세례를 받고 바울이 거할 장소와 예배 장소로 집까지 공궤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미 하나님이 다 준비 해 놓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바울이 실력이 있고 땀 흘리고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전도는 복음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많은 어려움과 우여곡절을 겪게 하신 후에 복음의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걸 옥중에서 전도한 간수의 가정을 통해서도 겪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러 가다가 이번에는 점을 쳐서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사하여 귀신을 몰아냅니다. 돈 벌이를 잃어버린 여종의 주인이 바울을 불법종교를 포교한다는 죄목으로 고소하여 실라와 함께 심한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자 지진이 나며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벗겨지는 체험을 합니다. 이 때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책임이 자기에게 올 것이 두려워 자결하려 합니다. 이때 바울이 간수를 안심시키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으로 그 집에 있는 사람들까지 구원시키고 세례까지 베풀어 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루디아 가정과 같이 순조롭게 전도하게도 하시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가정과 같이 때로는 많은 어려움과 수고와 땀을 통해서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얻은 은혜이고 신앙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뭘 하려고 발버둥을 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여호와 이래, 미리 다 준비해 주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걸 믿으시고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혹독한 연단과 훈련, 아픔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에서 만난 이 두 가정이 빌립보 교회를 세워가는 기초가 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어디에 가서나 복음을 전하든 자기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교만하지 않게 되고 자신에게 어떠한 고난과 환란이 닥쳐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며 끝까지 인내할 때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이 열매를 주신다는 것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다보면 바울의 이 신앙이 곳곳에 배여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로마 감옥에서 육체는 매어 있지만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기뻐하라는 이 신앙의 메시지를 담아 오늘 1절 인사말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도 빌립보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경험한 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인해 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