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海金氏 璿源大同世譜總編(김해김씨 선원대동세보총편)
원문;1965년 을사보
해석;2005.12.06.金順大
◎駕洛國璿源世系(가락국선원세계)
太祖皇太王姓金氏諱首露(一云靑裔) 在位一百二十年 太王位三十七年
태조황태왕으로서 성은 김씨이고 휘는 수로이다(또는 청예라고도 한다.) 재위는 120년이고 태왕으로서는 37년간 이었다.
元年壬寅(新羅儒理王十九年後漢光武建武十八年)三月三日誕降于龜旨峰弁韓九干推戴爲王是月望日卽位建國于弁韓舊地國號斡曰大駕洛(或云伽倻加羅金官)都金官城遂定版圖(東至黃山津今梁山北至伽倻山今居昌西至智異山今居昌陜川西南際海大海)分封五弟于五伽倻(一曰阿羅伽倻今咸安 二曰古寧伽倻今咸昌 三曰碧珍伽倻亦曰星山伽倻今星州 四曰大伽倻今高靈 五曰小伽倻今固城)
원년인 임인(42)년 (신라 유리왕 19년 후한 광무 건무 18년) 3월3일 구지봉에서 탄생하시어 변한의 9간이 추대하여 왕이 되었다. 이달 보름에 즉위하여 변한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국호의 이름은 대가락(또는 가야/가라/금관) 이라 하고 도읍을 금관성에 두어 비로소 나라의 형상(국경)을 정하였다. (동으로는 황산진에 이르니 지금의 양산이고, 북으로는 가야산에 이르니 지금의 거창이고, 서로는 지리산에 이르니 지금의 거창/합천의 서쪽이고, 남쪽은 대해와 맞닿아 있다.) 5명의 동생에게 나라를 나누어 분봉하였다. (하나는 아라가야이니 지금의 함안이고, 둘째는 고령가야이니 지금의 함창이고, 셋째는 벽진가야 또는 성산가야이니 지금의 성주이고, 넷째는 대가야이니 지금의 고령이고, 다섯째는 소가야이니 지금의 고성이다.)
○二年癸卯蒸土築都城(固一千五百步)經始宮殿(今孤峴里 西陽治坊坪土城遺址尙存
○2년 계묘(43)년에 흙을 구워 도성을 쌓았고 (1,500보로 정하였다.) 조금 지나 궁전을 지었다.(지금의 고현리의 서쪽 양치방평에 토성 유적지가 있다.
○後移宮于虎溪邊正宗庚申竪碑于古宮遺墟卽今盆城臺)
이후 호계변으로 궁을 옮겼다. 정조 경신(1800)년에 고궁의 유적지에 비를 세웠는데 지금의 분성대이다.)
○七年戊申七月迎許氏立以爲后設官分職賜改九干之名
○7년 무신(48)년 7월 허씨를 맞이하여 왕후로 세우고, 관직을 설치하여 9간의 명칭을 바꾸었다.
○三十六年丁丑新羅阿湌吉門來侵迎擊于黃山津
○36년 정축(77)년 신라의 아찬인 길문이 침략해 왔으나 황산진에서 맞아 격퇴하였다.
○五十五年丙申改新羅南鄙斬城主長世而還
○55년 병신(96)년에 다시 신라의 남쪽 마을을 공격하여 성주인 장세를 죽이고 돌아왔다.
○六十一年壬寅音汁伐國(興海)與悉直谷國(三陟)爭彊請決新羅婆娑王曰駕洛元君年老多智延問之 大王乃立決以所爭之地屬音汁伐國
○61년 임인(102)년 음즙벌국(흥해)이 실직곡국(삼척)과 국경분쟁을 벌이자 신라의 파사왕이 말하기를 ‘가락의 원군(왕)이 나이가 들어 지혜가 많다.’하고 불러서 물어보니 대왕(수로왕)이 결정하기를 분쟁이 있는 땅을 음즙벌국에 소속시키라고 하였다.
○七十四年乙卯二月攻新羅南鄙七月新羅祗摩王親率步騎渡黃山河而來侵我師伏兵以待圍之數重羅王麾軍決圍以走
○74년 을묘(115)년 2월 신라의 남쪽 마을을 공격였다. 7월에 신라의 지마왕이 친히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황산하(낙동강)를 건너 쳐들어오자 우리 장수와 복병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신라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신라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七十五年丙辰新羅王遣將來侵自率精兵一萬而繼之我師嬰城固守會久雨乃退
○75년 병진(116)년 신라왕이 장수를 보내어 침입해 오고, 신라왕은 스스로 정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왔다. 우리의 군사는 성에 들어앉아 굳게 지키고만 있었는데, 마침 오랫동안 비가 내렸으므로 되돌아갔다.
○百二十一年壬寅 命太子居登代理國政與太后移御于方丈山太王宮(今山淸王臺)馬韓諸國皆來朝賀尊爲普州皇太王
○121년 임인(162)년 태자 거등에게 명하여 국가를 대신 다스리게 하고, 태후와 같이 방장산의 태왕궁(지금 산청의 왕대)으로 옮기니 마한의 여러 나라가 모두 찾아와 보주황태왕이 되신 것을 축하하였다.
○百五十八年己卯三月二十三日崩春秋一百五十八歲葬于納陵 (一云首陵今金海府西三百步許龜旨峰南子坐
○158년 기묘(199)년 3월23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8세였고 납릉에 장사지냈다. (한편으로는 수릉이라 하고 지금 김해부의 서쪽 300보쯤의 구지봉 남쪽 자좌에 있다.)
○新羅文武王元年辛酉三月王以外裔命修 二陵而致祭納位田三十頃合于宗祧以續祀事
○신라 문무왕 원년 신유(661)년 3월 왕이 외손의 후예로서, 두 능의 보수를 명하고 치제하였으며 납위전 30경을 종조에 보태게 하여 제사를 계속 드리게 했다.
○高麗文宗十六年壬寅特命 知金州事金良鎰修陵撰碑銘今傳其文無其碑
○고려 문종 16년 임인(1062)년 지금주사 김양일에게 특명을 내려 능을 수리하고 비명을 찬하게 하였는데 지금 그 글은 전하고 있으나 그 비는 없다.
○朝鮮成宗十年庚子府儒等因其舊趾建會老堂于 納陵東南奠香火己酉後孫金馹孫有記文 仁祖二十四年丙戌后孫道伯許積增修二陵竪碑撰銘外裔進士全榮書其後自朝家設備致享
○조선 성종 10년 경자(1480)년 김해부의 선비들이 그 옛터에 의거하여 납릉의 동남쪽에 회로당을 짓고 향화를 올렸다. 기유(1489)년에 후손 김일손이 지은 글이 있다. 인조 24년 병술(1646)년에 후손인 관찰사 허적이 두 능을 보강하여 수리하고 비를 세워 찬하였고, 외손의 후손인 전형이 글을 썼다. 그 후 조정에서 제사의 물품을 준비하여 주었다.
○英祖五十年甲午賜御製致祭文重修祭閣
○영조 50년 갑오(1774)년 임금께서 손수 지은 치제문을 내려주었고 제각을 중수하였다.
○正宗五年辛丑及十六年壬子並致祭置陵監春秋二仲降香祝 御製會老堂懸板文
○정조5년 신축(1781)년과 16년 임자(1792)년에 치제하고, 능감을 두었으며 봄과 가을 중순에 향과 축문을 내려 주었고, 임금이 회로당의 현판문을 썼다.
○高宗十五年戊寅命建殿宇設齋舍置寢郎降殿號曰 崇善殿竪神道碑後孫吏曹判書許傳撰外裔參判趙濟華書後裔 崇善殿參奉金顯■{氵柱}篆
○고종 15년 무인(1878)년 명을 내려, 전당(殿宇)을 세우고 숙소(齋舍)를 짓고 참봉(寢郎)을 두었으며, 숭선전이란 전호를 내리고 신도비를 세워 후손인 이조판서 허전이 찬술하고 외손의 후예인 참판 조화제가 글을 쓰고 후예인 숭선전 참봉 김현주가 제목을 썼다.
○純宗隆熙二年戊申龜旨峰上竪 太祖大王誕降之碑後裔享官金雲培撰碑銘外裔奎章閣學士閔泳璘書後裔前郡守金鍾應篆三年己酉南巡時命官致祭
○순종 융희 2년 무신(1908)년에 구지봉위에 태조대왕의 탄생비를 세우고, 후예인 향관 김운배가 비명을 찬하고, 외손의 후예인 규장각 학사 민영린이 글을 쓰고, 후예인 전 군수 김종응이 제목을 썼다. 3년 기유(1909)년 남쪽을 순행할 때 관리에게 명하여 치제하게 하였다.
○駕洛紀元一千八百八十八年丁卯後裔崇善殿參奉金性學竪重建神道碑外裔經筵參贊宋榮大撰前判敦寧院事尹用求書奎章閣副提學李炳觀篆大修陵寢具石物設石垣
○가락 기원 1888년 정묘(1927)년에 후예인 숭선전 참봉 김성학이 신도비를 다시 세우고, 외손의 후예인 경연 참찬 송영대가 찬술하고 전 판돈영원사 윤용구가 글을 쓰고, 규장각 부제학 이병관이 제목을 썼다. 능침을 크게 손보고 석물을 구비하여 석원을 설치하였다.
○大祭每年三月十五日及九月十五日完定奉行)
○대제는 매년 3월15일과 9월15일이 완전히 결정되어 봉행하고 있다.
后普州皇太后姓許氏諱黃玉 (一云皇玉)
왕후는 보주황태후로서 성은 허씨이고 휘는 황옥(黃玉)이다 (또는 황옥(皇玉)이라고 한다.)
駕洛建國前九年癸巳(新羅儒理王十年癸巳後漢光武建武九年)七月七日阿隃陀國(或南天竺國許黃國今印度)公主誕降
가락이 건국하기 전 9년 계사(33)년(신라 유리왕 10년 계사년, 후한 광무 건무 9년) 7월7일 아유타국(또는 남천축국 허황국 지금의 인도)의 공주로 탄생하셨다.
○太祖大王七年戊申七月二十七日封后
○태조대왕 7년 무신(48)년 7월27일 왕후에 봉해졌다.
○百二十一年壬申尊爲皇太后從皇太王移御于方丈山太王宮誕十男二女
○121년 임신(132)년 황태후가 되어 황태왕을 따라 방장산의 태왕궁으로 옮겼다. 10남2녀를 낳았다.
○百四十八年己巳(新羅伐休王六年)三月一日崩春秋一百五十七歲在后位一百十五年在太后位二十七年葬于后陵(在龜旨峰東北塢子坐南距大王陵二里許
○148년 기사()년 (신라 벌휴왕 6년) 3월1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7세였다. 왕후로는 115년, 태후로는 27년을 지냈으며, 왕후릉에 장사지냈다. (구지봉의 동북쪽 마을에 자좌이며, 남쪽으로 대왕릉과 2리쯤 떨어져 있다.)
○年十六歲承順父命乘石舟載婆娑石塔掛緋帆張茜旗來迫主浦今熊川夫人塘 純宗隆熙二年戊申竪碑外裔輔國閔泳韶銘判書張錫龍撰
○나이 16세에 부친의 명을 따라 돌로 만든 배를 타고 파사석탑을 싣고,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주포에 정박하였는데 지금의 웅천 부인당이다. 순종 융희 2년 무신(1908)년 비를 세우고, 외손의 후예인 보국 민영소가 비명을 쓰고 판서 장석룡이 찬술하였다.
○后之渡海王命天干候于望山島使神鬼干就乘岾矣及后舟迫處曰舟浦村下陸處曰夫人塘 解綾袴贄山靈處曰綾峴 茜旗出海處曰旗出邊 婆娑石塔今在后陵苑內
○왕후가 바다를 건너오자 왕이 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망산도로 가게하고, 귀천간(神鬼干)으로 하여금 승점으로 가게 했다. 또 왕후의 배가 정박한 곳을 주포촌이라 하고, 배에서 내린 곳을 부인당이라 하였으며,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께 드린 곳을 능현이라 하고, 붉은 깃발이 바다에 나타난 곳을 기출변이라 하였다. 파사석탑은 지금 왕후릉의 경내에 있다.
○后弟曰長遊和尙曰寶玉仙人嘗來遊金官國命其山曰長遊山名其寺曰長遊寺名其村曰長遊村云
○왕후의 동생인 장유화상은 보옥선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금관국에 놀러왔다가 그 산을 장유산이라 하였고, 그 절을 장유사, 그 동네를 장유촌이라 이름붙였다.
○朝鮮高宗十五年戊寅合享于 崇善殿
○조선 고종 15년 무인(1878)년 숭선전에 같이 제향하였다.
一嗣 道王
장남은 대를 이어 도왕이 되었다.
二男 居漆君 (從 后姓賜許氏)
2남은 거칠군이다. (왕후의 성인 허씨를 받아서 따랐다.)
三男 (從 后姓賜許氏○其餘七男厭世從寶玉仙人入七佛庵(河東)化仙云)
3남 (왕후의 성인 허씨를 받아서 따랐다. ○그 나머지 7남은 세상을 싫어하여 보옥선인을 따라 칠불암(하동에 있다.)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一女 永安公主(諱玉環下嫁于太師裵烈文○子裵肅相國月城君 諡文剛按金海裵氏 譜錄之)
장녀는 영안공주이다. (휘는 옥환으로 태사인 배열문에게 시집갔다. ○아들인 배숙은 재상으로 월성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강이다. 김해배씨의 보첩을 보면 기록되어 있다.)
二女 (新羅)昔太子妃(出東京誌)
2녀는 (신라) 석태자비이다. (동경지에 나온다.)
=====
二世 道王諱居登 在代理位三十七年王位五十四年凡九十一年
2세 도왕으로 휘는 거등이다. 왕의 대리로서 37년, 왕위로 54년으로 무릇 91년을 재위하였다.
太祖大王百二十一年壬寅(新羅阿達羅王九年後漢桓帝延熹五年)承 命代理國政
태조대왕 121년 임인(162)년 (신라 아달라왕 9년, 후한 환제 연희5년)에 나라를 대신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다.
○元年己卯(新羅奈解王四年後漢獻帝建安四年)卽位建宗廟于宮闕之艮方平地(今崇善殿趾)
○원년 기묘(199)년 (신라 내해왕 4년, 후한 헌제 건안 4년)에 즉위하여 궁궐의 북동쪽(艮方)평지에 종묘를 세웠다.(지금의 숭선전 터이다.)
○三年辛巳與新羅和親
○3년 신사(201)년에 신라와 더불어 화친하였다.
○十一年己丑浦上八國聯兵來侵遣王子請援於新羅羅王命太子于老及利音領六部兵來援擊殺八國將卒奪被虜六千人釋之
○11년 기축(209)년에 포상8국이 연합하여 병사들이 침입해 오자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태자인 우로와 이음에게 6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라 명하여 8국의 장수와 병졸을 죽이고, 포로가 된 6천명을 빼앗아 풀어주었다.
○十四年壬辰遣王子于新羅和親
○14년 임진(212)년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화친하였다.
○五十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 (一云庚辰卽位以世孫冊封太子己卯王子仙見塵世衰葬與神女乘雲移去王歎登都江石島巖招仙銘影幀後人名招仙臺一曰招賢又曰招七點山人旵始作伽倻琴至今傳樂府漢書所云弁韓國有瑟其形如筑者也 王之所幸石曰蓮花石石上有紋如棋局之形臺在金海府東南七里許廣野中林巒如畵) 陵在駕洛國都西野麓云
○55년 계유(253)년 9월17일 돌아가셨다. (또는 경진(200)년에 즉위하여 세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기묘(199)년에 왕자인 선이 속세를 바라보다가 몸이 쇠약하여 죽어 신녀와 같이 구름을 타고 가 버리니, 왕이 탄식하며 수도의 강에 있는 석도암에 올라가 선을 부르며 영정을 새기니, 후세사람들이 초선대라 이름붙였다. 또는 초현, 또는 초칠점산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가야금을 만들어 지금 악부에 전해오고 있으며, 한서에서 말하기를 ‘변한국에 거문고(瑟)가 있는데 그 형상이 거문고(筑)와 같다.’고 하였다. 왕이 나들이를 한 곳의 바위를 연화석이라 하고 그 돌 위에 문양이 있는데 그 모양이 바둑판과 같다. 이 대(臺)는 김해부의 동남쪽 7리쯤의 넓은 들판 가운데 수풀언덕에 그림처럼 있다.) 릉은 가락국 수도의 서쪽들의 기슭에 있다고 한다.
○(今金海府西二十里許長有面柳下里後麓有古陵瑩域高大世傳駕洛王陵云)
○(지금 김해부 사쪽 20리쯤의 장유면 유하리 뒤편 기슭에 고릉의 영역이 높고 크게 있어 세상 사람들이 전하기를 가락왕릉이라고 한다.)
后申氏諱慕貞(一云琉冕)
왕후는 신씨이고 휘는 모정이다. (또는 유면이라고 한다.)
父泉府卿諱輔○(申輔夫妻許太后東來時侍從媵臣
부친은 천부경 휘보이다. ○(신보의 부부는 허태후가 동쪽으로 올 때 시종한 몸종이었다.)
○謹按三國遺事駕洛記王曆條曰王妃申輔女慕貞云而考其原文則不合於前後事理可疑以俟博考)
○삼국유사의 가락기를 살펴보면 거등왕편에 왕비인 신보의 따님은 모정이라 하였는데 그 원문을 살펴보면 앞뒤의 일들이 사로 맞지 않으므로 의심스러우니 더 많은 자료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陵(無傳 ○一云以后遺命火葬)
○능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왕후의 유언으로 화장했다고 한다.)
一嗣 成王
대를 이은 사람은 성왕이다.
=====
三世 成王諱馬品(一云馬品)在位三十八年
3세 성왕으로 휘는 마품(馬品) (또는 마품(馬品)) 재위는 38년
元年癸酉(新羅沾解王七年蜀漢延熙十六年)九月十七日卽位
원년 계유(253)년 (신라 첨해왕 7년, 촉한 연희 16년) 9월17일 즉위하였다.
○三十九年辛亥正月二十九日崩(一云母后神女庚辰孕王越九年戊子誕王
○39년 신해(291)년 1월29일 돌아가셨다.(또는 모후인 신녀가 경진(200)년에 왕을 임신하여 9년 후 무자(208)년에 왕을 낳았다고 한다.
○五十一年三月三日從父王離塵同爲上昇有史蹟媵又云庚戌崩云)○陵(無傳)
○51년 3월 3일 부왕(거등왕)을 따라 속세를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사적에는 따라갔다고 되어있거나, 또 경술(290)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申氏諱好仇
왕후는 신씨로서 휘는 호구이다.
祖父宗正監諱匡(趙匡妻名慕良許太后侍媵臣)壬子崩 ○陵(無傳)
조부는 종정감을 지낸 휘광이다. (조광의 처의 이름은 모량으로 허태후를 시종한 몸종이었다.) 임자(292)년에 돌아가셨다.) ○능은(전하지 않는다.)
一嗣 德王
덕왕이 대를 이었다.
=====
四世 德王諱居叱彌王(一云今勿) 在位五十五年
4세 덕왕으로 휘는 거질비왕이다. (또는 금물이라고도 한다.) 재위는 55년간이었다.
元年辛亥(新羅儒禮王八年晉惠帝元康元年)正月二十九日卽位
원년 신해(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진나라 혜제 원강 원년)1월 29일에 즉위하였다.
○二年壬子母后趙氏崩 ○五十六年丙午七月八日崩 ○陵(無傳)
○2년 임자(292)년에 모후인 조씨가 별세하였다. ○56년 병오(346)년 7월8일에 돌아가셨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阿志阿
祖父阿干諱我躬(我躬本名我刀以弁韓九干之 一人太祖大王誕降時祗迎之) ○丁未崩
○陵(無傳)
왕후의 휘는 아지이다. 조부는 아간을 지낸 휘아궁이다. (아궁의 본명은 아도로서 변한의 9간의 한사람이다. 태조대왕이 탄생하셨을 때 공경하며 맞이한 사람이다.) ○정미(347)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一嗣 明王
대를 이은 사람은 명왕이다.
=====
五世 明王諱伊尸品王(一云伊品)在位六十一年
5세 명왕으로 위는 이시품왕(또는 이품이라고도 한다.) 재위는 61년간 이었다.
元年丙午(新羅訖解王三十七年東晋穆帝永和二年)七月八日卽位
원년 병오(346)년 (신라 흘해왕 37년, 동진 목제 영화 2년) 7월8일 즉위하였다.
○二年丁未母后崩 ○六十二年丁未四月十日崩
○2년 정미(347)년 모후께서 돌아가셨다. ○62년 정미(407)년 4월10일 돌아가셨다.
○陵在金海陵洞 (未詳○異國兵禍每因金氏陵號而不知葬法疑有古代寶物輒掘陵還封○今長有面陵洞山麓有上下二陵三階及左右將軍石床石尙存)
○능은 김해 능동에 있으나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른 나라와의 병화가 있을 때 마다 김씨의 능호가 붙어 있어서 장례법을 모르고 고대 보물이 있을 것으로 여겨 능이 도굴되었고 다시 덮여졌다. ○지금 장유면 능동 산기슭에 상하 2개의 능이 3계단으로 되어 있고 좌우에 장군석과 상석이 존재한다.)
后諱貞信
父司農卿克忠○丁未崩○陵(同原下)
왕후의 휘는 정신이고 부침은 사농경 극충이다. ○ 정미(407)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같은 언덕 아래에 있다.
一嗣 神王
대를 이은 이는 신왕이다.
=====
六世 神王諱坐知(一云金叱或云金吐) 在位十四年
6세 신왕으로 휘는 좌지이다. (또는 김질, 혹은 김토라고도 한다.) 재위는 14년간이다.
元年丁未(新羅實聖王五年 東晋安帝義熙三年)四月十日卽位
원년 정미(407)년 (신라 실성왕 5년, 동진 안제 의희 3년) 4월10일 즉위하였다.
○二年戊申倭國始置營于對馬島我國及新羅自是爲憂
○2년 무신(408)년 왜국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자 우리나라(가락)와 신라는 이로부터 근심하였다.
○王寵傭女以女黨爲官國內擾亂新羅以謀欲伐忠臣朴元道諫之且卜士筮得解卦曰解而拇朋知斯孚 王曰可貶傭女于荷山島改行其政國復大治
○왕이 용녀를 총애하여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자 국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신라가 모의하여 가락을 치려하므로 충신인 박원도가 간언하고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풀이하기를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하니, 왕이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로 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나라를 다시 크게 다스렸다.
○十五年辛酉五月十二日崩 ○陵(無傳)
○15년 신유(421)년 5월 12일에 돌아가셨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福壽
父大阿干諱道寧 ○陵(無傳)
왕후의 휘는 복수이다. 부친은 대아간을 지낸 휘도녕이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一嗣 惠王
대를 이은 이는 혜왕이다.
=====
七世 惠王諱吹希(一云金喜或云叱嘉) 在位三十年
7세 혜왕으로 휘는 취희 (또는 김희 혹은 질가라고도 한다.) 재위는 30년간이었다.
元年辛酉(新羅訥祗王五年宋武帝永初二年)五月十二日卽位
원년 신유(421)년 (신라 눌지왕 5년, 송 무제 영초 2년)5월12일 즉위하였따.
○十三年癸酉與百濟和親 ○二十四年甲申倭兵來侵堅守居漆城(東萊)設備後新羅數被邊患○三十一年辛卯二月三日崩 ○陵(無傳)
○13년 계유(433)년에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 ○24년 갑신(444)년에 왜병이 침범해와 거칠성(동래)을 굳게 지고 방비하였다. 후에 신라가 <왜에게> 여러 번 국경에서 피해를 입고 근심하였다. ○31년 신묘(451)년 2월3일 돌아가셨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仁德
父角干諱進思(一云思申) ○陵(同原)
왕후의 휘는 인덕이다. 부친은 각간을 지낸 휘진사이다. (또는 사신이라고도 한다.) ○능은 같은 언덕에 있다.
一嗣 莊王
대를 이은 이는 장왕이다.
=====
八世 莊王諱銍知(一云金銍或云荷知) 在位四十一年
8세 장왕으로서 위는 질지이다. (또는 김질 혹은 하지라고도 한다.) 재위는 41년간이었다.
元年辛卯(新羅訥祗王三十五年宋文帝元嘉二十八年)二月三日卽位
원년 신묘(451)년 (신라 눌지왕 35년, 송 문제 원가 28년) 2월3일에 즉위하였다.
○二年壬辰創王后寺(太祖大王與太后合御之地納田十結以資冥福兼鎭南倭盖東國創寺始於此○今金海菉山面明月寺趾卽其地也)
2년 임진(452)년 왕후사를 지었다. (태조대왕이 왕후와 만났던 곳이다. 밭 10결을 바쳐 명복을 비는 비용으로 쓰게 하고 남쪽의 왜를 진압하게 하였다. 대개 동국(우리나라)에서 절을 짓기 시작한 것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김해의 녹산면 명월사 터가 즉 그곳이다.)
○十三年癸卯倭寇自黃山河溯上遺兵拒之 ○二十九年己未遣使如南齊 ○三十一年辛酉高句麗靺鞨來攻新羅進至彌秩夫城(興德)羅王請援與百濟兵三國聯兵分擊追至泥河(德源)斬千餘級 ○三十七年丁卯獲白雉遣于新羅 ○四十二年壬申十月四日崩
○13년 계묘(463)년에 왜구가 황산하를 거슬러 올라오자 병사를 보내어 막았다. ○29년 기미(479)년 남제에 사신을 보내었다. ○31년 신유(481)년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를 침공하여 미질부성(흥덕)까지 이르자, 신라왕이 지원을 요청해와 백제의 병사와 같이 3국이 연합하여 병사를 나누어 추격하여 니하(덕원)까지 이르렀고 천여명을 죽였다. ○37년 정묘(487)년 흰 꿩을 사로잡아 신라에 보냈다. ○42년 임신(492)년 10월4일 돌아가셨다.
后金氏諱邦媛
父沙干諱相 ○壬申崩 ○陵(幷失傳)
왕후는 김씨로서 휘는 방원이다.
부친은 사간을 지낸 휘상이다. ○임신(492)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둘 다 잃어버리고 전하지 않는다.
一嗣 肅王
대를 이은 이는 숙왕이다.
=====
九世 肅王諱鉗知(一云金鉗) 在位二十五年
9세 숙왕으로서 휘는 겸지이다. (또는 김겸이라고도 한다.) 재위는 25년간이었다.
元年壬申(新羅炤智王十四年齊武帝永明十年)十月四日卽位 ○三十年辛丑四月七日崩 ○陵(無傳)
원년 임신(492)년 (신라 소지왕 14년, 제나라 무제 영명 10년) 10월4일에 즉위하였다. ○30년 신축(521) 4월7일에 돌아가셨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后諱淑
父角干諱出忠 ○陵(失傳 ○一云陵在居漆郡內山今東萊 ○謹按東萊誌郡北二十里久瑞里石隱巖有金海金氏陵瑩域甚大云)
왕후의 휘는 숙이다.
부친은 각간을 지낸 휘출충이다. ○능은 잃어버리고 전하지 않는다. ○또는 능이 거칠군내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동래이다. ○삼가 동래지를 살펴보면 동래군의 북쪽 20리에 있는 구서리의 석은암에 김해김씨의 능의 구역이 있는데 아주 크다고 한다.)
一嗣 讓王
장남이 대를 이어 양왕이다.
二男 脫知(爾叱今○讓王十二年壬子王讓國於新羅也奉 命留在於國而鎭之 ○其云爾叱今盖王族之指稱也)
2남은 탈지이다. (이질금이라고도 한다. ○양왕 12년 임자(532)년 왕이 신라에 나라를 넘기자 명을 받들어 나라에 남아 이를 다스렸다. ○여기서 말하는 이질금은 대개 왕족을 지칭한다.)
=====
十世 讓王仇衡(一云仇亥 仇次休) 在位十二年
10세 양왕으로서 구형이다. (또는 구해, 구차휴라고도 한다.) 재위는 12년간이었다.
元年辛丑(新羅法興王八年梁武帝普通二年)四月七日卽位
원년 신축(521)년 (신라 법흥왕 8년, 양나라 무제 보통 2년) 4월7일에 즉위하였다.
○十一年辛亥冬鷰子樓鳴驚動長安 王命毁樓(有太祖大王遺牒曰鷰子卽壬子傳國於新羅不逆天云云此乃禪讓而啓傳國之兆歟)
○11년 신해(531)년에 연자루에서 소리가 나서 장안(도읍지인 김해)사람들이 놀라고 소란스럽자, 왕이 연자루를 부숴버리라고 했다. (태조대왕이 남긴 서첩에 의하면 연자는 즉 임자년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어야 하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선양으로서 나라를 넘겨줄 조짐이었다.)
○十二年壬子(新羅法興王十九年壬子梁武帝中大通四年)讓國于新羅率妃嬪抱祭器遜入于方丈山太王宮(今山淸王臺址) 凡十世十王歷年四百九十一年(新羅法興王待以賓禮封爲金官國主以其地食邑)
○12년 임자(532)년 (신라 법흥왕 19년 임자년, 양 무제 중대통 4년)신라에 나라를 양도하고 비와 빈을 거느리고 제기를 싸서 방장산의 태왕궁(지금의 산청 왕대지)으로 피했다. 무릇 10세 10왕 491년을 지냈다. (신라 법흥왕이 손님의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금관국주에 봉하고 그 땅을 식읍으로 주었다.)
○新羅眞興王十八年丁丑(駕洛後二十五年陳武帝永定四年)薨春秋六十九歲
○신라 진흥왕 18년 정축(557)년(가락후 25년, 진나라 무제 영정 4년)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9세였다.
○陵在知品川懸王山東庚坐(卽今山淸郡今西面花溪里 ○上有王山山下有王山寺乃讓王水晶宮也寺後有興武王射臺臺上有讓王陵累石爲邱四面七級階高三丈許制度朴吉完築矣 累經兵火失傳久至 朝鮮正宗二十二年戊午久旱不雨鄕儒閔景元等齎謁禱雨雨遂至寺僧益神之發其秘函示其書物書卽古名僧坦瑛所記也 物卽王與后影幀王所御弓劍錦袍也 記有曰寺本讓王水晶宮也 遜于玆而葬焉云云於是顯晦復陵自本官轉報于巡營至京司越六年 純祖三年癸亥京鄕雲仍建陵齋講堂廟舍門樓有司禁樵焉)
○능은 지품천에 있으니 왕산의 동쪽 경좌이다 (즉 지금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이다. ○위에는 왕산이 있고 산 아래에는 왕산사가 있으니 이는 양왕의 수정궁이다. 절(왕산사)뒤에는 흥무왕의 사대가 있고, 사대의 위쪽에는 양왕릉이 있는데, 돌을 쌓아 언덕처럼 만들고 4면에는 7층의 계단이 있고, 높이는 3장정도이다. 쌓은 형식이 신라 박씨왕의 묘와 같다. 여러 번 병화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잊혀져 왔으나 조선 정종 22년 무오(1798)년에 이르러 오랫동안 가물고 비가오지 않아 마을의 선비인 민경원 등이 기우제를 올리고 비가 오기를 기도하였더니 비가 마침내 내렸다. 절의 중이 더더욱 그 비밀스러운 상자를 꺼내어 글과 물건들을 보여주니, 글은 옛날의 유명한 중인 탄영이 쓴 것이었고, 물건은 왕과 왕후의 영정과 왕이 가지고 계시던 활과 칼과 비단 옷이었다. 글에 기록되어 있기로는 그 절은 본래 양왕의 수정궁이었는데 세상을 피해 와서 여기서 죽었다고 한다. 이것들이 세상에 알려지고 능을 복구하고 산청의 관리가 서울의 순영(巡營)에게 알렸다. 6년 후 순조 3년 계해(1803)년 서울과 지방의 후손들이 능재와 강당과 묘사와 문루를 세우고 유사를 두어 나무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建影幀閣奉安晬容(王山尋陵記洪儀泳撰王山記府使成大中撰三王祠碑銘判書趙鎭寬撰畵像贊判書李秉鼎撰王山寺記僧坦瑛撰水晶宮懸板記承旨金寗漢撰) ○大祭每年三月上丁日及八月上丁日奉香焉(三月十七日及九月十七日改定奉行焉;1974년갑인보)
○영정각을 세우고 임금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왕산심릉기를 홍의영이 찬하였고, 오아산기를 부사 성대중이 찬하였고, 삼왕사 비명을 판서 조진관이 찬하였고, 화상을 판서 이병정이 찬하였고, 왕산사기를 중 탄영이 찬하였으며, 수정궁 현판기를 승지 김녕한이 찬하였다.) ○대제를 매년 3월과 8월의 첫째 정일(丁日)에 드린다. (3월17일과 9월17일로 다시 정하여 봉행하고 있다;1974년갑인보)
后諱桂花
父分叱水爾叱 ○丁卯崩 ○陵在王山下玉田上云而未詳 ○影幀一本合奉于影幀閣(純祖三年癸亥合祧于讓王廟)
왕후의 휘는 계화이다.
부친은 분질수이질이다. ○정묘(547?)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왕산아래 옥전의 위쪽이라고 하나 상세히 알 수 없다. ○영정 한 장은 영정각에 같이 모셔져 있다. (순조 3년 계해(1803)년에 양왕의 묘와 합사하였다.)
一子 世宗(一云奴宗或云武宗) ○駕洛肅王(新羅智證王十二年)辛卯生 ○新羅法興王十九年壬子始居新羅時年二十二歲 ○眞興王十五年甲戌築月峰(蔚山)眞智王二年丁酉百濟來侵西鄙公以伊湌擊破於一善郡北(善山)斬獲三千七百餘級封金官君官角干墓在太和城下(今蔚山)有碑失傳 ○配位(未詳) ○子率友(一云率支 ○配鷄林金氏墓所及子孫幷無傳)
첫째 아들은 세종이다.(또는 노종 혹은 무종이라고도 한다.) ○가락의 숙왕(신라 지증왕 12년) 신묘(511)년에 태어났다. ○신라 법흥왕 19년 임자(532)년 신라에 살기 시작했는데 이때 나이 22세였다. ○진흥왕 15년 갑술(554)년 월봉(울산)을 쌓고, 진지왕 2년 정유(577)년 백제가 서쪽 고을을 침입해와 공이 이찬으로서 일선군의 북쪽(선산)에서 격파하고 3,7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금관군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각간이었고 묘소는 태화성 아래(지금의 울산)에 있으며 비석이 있었으나 잃어버렸다. ○부인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아들은 솔우(또는 솔지)이다. ○부인은 계림 김씨로서 묘소와 자손은 둘 다 전하지 않는다.)
二男 武力(一云茂力 ○見下上系)
2남은 무력(武力)이다.(또는 무력(茂力)이다. 아래의 상계를 보라.)
三男 武得(一云茂得) ○官角干號義卿封金寧君伐首若州(春川)漢山享于觀晶洞伯仲祠故三忠公云 ○配金氏父伊湌改物
3남은 무득(武得)이다. (또는 무득(茂得)이다.) ○관직은 각간을 지냈고 호는 의경이며 금녕군에 봉해졌다. 수약주(춘천)와 한산을 정벌하고 관정동에 모셔져 있으니 큰형과 작은 형을 같이 모시고 있으니 삼충공이라 한다. ○부인은 김씨로서 이찬을 지낸 김개물의 따님이다.
※1978년 戊午譜(序文甲寅)附記(1978년 무오보(서문1974년)에 보충하여 쓴 것)
按編年國記新羅法興王十九壬子讓王傳位于世宗移御于方丈山太王宮世宗禪位于世弟武力亦入太王宮世弟武力卽王位至壬午駕洛國王武力以國傳于新羅眞興王以賓禮待之以駕洛爲金官小京封食邑拜武力爲新州大總管至角干自太王壬寅至是凡十一世十二王歷年五百二十一年云云諸家牒多以是追錄尙在疑案故姑從舊本不敢改正焉
편년국기를 살펴보면 신라 법흥왕 19년 임자(532)년에 양왕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방장산의 태왕궁으로 갔다. 세종은 동생인 무력에게 왕위를 넘기고 역시 태왕궁으로 들어갔다. 동생인 무력은 왕으로서 임오(562)년 까지 재위하였다. 가락국왕 무력은 나라를 신라에 주니 <신라의> 진흥왕은 손빈의 예로서 그를 맞이하여 가락을 금관소경으로 하고 식읍으로 주었다. 무력은 신주 대총관으로 임명되었고 각간에 이르렀다. 태왕 임인(42)년으로부터 이 때 까지 무릇 11세 12왕 521년을 지냈다고 한다. 여러 가첩에는 이 사실을 추록한 것이 많으나 의심스러운 부분이 남아 있으므로 구본에 따르고 감히 고쳐 쓰지 않았다.
駕洛國璿源世系(終)
가락국선원세계(끝)
金海金氏璿源大同譜總編(김해김씨 선원대동보 총편)
◎上系(상계)
武力(무력) <子 舒玄>
讓王第二男 駕洛肅王二十七年新羅 法興王五年戊戌生
양왕의 제 2남이다. 가락 숙왕 27년 신라 법흥왕 5년 무술(518)년에 태어났다.
○法興王十九年壬子始居新羅時年十五眞興王十四年癸酉新羅取百濟東北備置新州道公以阿湌爲郡主
○법흥왕 19년 임자(532)년 신라에 살기 시작했다. 이때 나이는 15세였다. 진흥왕 14년 계유(553)년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을 빼앗아 신주도를 설치하자 공이 아찬으로서 군주가 되었다.
○十五年甲戌五月百濟聖王 率步騎來攻管山城(今沃川)軍主角干于德匝判耽知等逆戰失利公領新州兵赴而俘其王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匹馬無反者又聞百濟王子亦率濟倭兵深入新羅界公以南攻大元帥進至梁州東界月峰(今蔚山隱月祠後山)築輪山轎山城波斯城(今昌原)骨浦漆浦甘文草八等諸軍皆來降 二十二年辛巳 以匝干隨駕巡狩至火旺山 竪碑勒名碑在今昌寧萬玉亭
○15년 갑술(554)년 5월에 백제의 성왕이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관산성(지금의 옥천)을 공격해와, 군주인 각간 우덕과 잡판 탐지 등이 싸움에서 패하여 전세가 불리하자, 공이 신주의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왕을 사로잡고,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과 말 등을 죽이니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없었다. 또 백제왕자가 또다시 백제와 왜병을 이끌고 신라의 국경을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 공이 남쪽에서 대원사를 공격하여 양주의 동쪽 경계인 월봉(지금의 울산 은월사 뒷산)까지 이르러 륜산에 교산성과 파사성(지금 창원)을 쌓으니, 골포/칠포/감문/초팔 등 여러 군사들이 모두 항복해왔다. 22년 신사(561)년에 잡간으로서 임금의 가마를 수행하여 사냥을 나갔고, 화왕산에 이르러 비를 세우고 글을 새기니 지금 창녕의 만옥정에 남아있다.
○眞平王元年己亥十月十六日卒春秋六十二官止角干享于蔚山隱月祠每年九月十五日設壇奉祀
○진평왕 원년 기해(579)년 10월 16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62세였고 관직은 각간에 이르렀다. 울산의 은월사에서 매년 9월15일에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낸다.
配 夫人朴氏
法興王妃巴刀夫人弟 ○墓鷲山下癸坐合封俱石物賜牌地建鷲仙寺守護今梁山通度寺後山時享每年十月十五日完定奉祠焉
부인은 박씨이다.
법흥왕비인 파도부인의 동생이다. ○묘소는 취산아래의 계좌에 합봉하였고, 석물을 구비하고 땅을 주었으며 취선사를 지어 수호하고 있다. 지금의 양산 통도사의 뒷산이다. 시향은 매년 10월15일을 정하여 올리고 있다.
================
十二世
<武力 子> 舒玄(서현) <子 庾信, 欽純, 女新羅文明王后,寶姬>
○一云庶云或曰道衍新羅眞興王二十五年甲申生新羅角干大梁州都督按撫大梁州諸軍事 ○都督公伐任那伽倻萬弩國封萬弩郡太守(今鎭川)
○또는 서운이라고도 하며 도연이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 25년 갑신(564)년에 태어났다. 신라 각간/대량주도독/안무대량주제군사를 지냈다. ○도독공(휘서현)이 임라가야를 정벌하자 만로국에서 만로군 태수로 봉하였다.(지금의 진천이다.)
○眞平王五十一年己丑以蘇判與角干金龍春蘇判大因波珍湌白龍等攻高句麗娘臂城(今淸州娘子城)公之子庾信斬將奮擊遂拔之 ○忌九月十九日配享于 蔚山隱月祠
○진평왕 51년 기축()년 소판으로서 각간 김룡춘과 소판 대인과 파진찬 백룡 등과 같이 고구려 낭비성(지금의 청주 낭자성)을 공격하여, 공의 아들 유신이 분발하여 공격하자 마침내 빼앗았다. ○기일은 9월 19일이며 울산의 은월사에 모셔져 있다.
配月城金氏萬明夫人父新羅宗室肅訖宗眞興王姪女○忌十月十一日 ○墓鷲山下癸坐合封今梁山北亭山麓 ○影幀閣在梁山新基里兩位影幀奉安卽羅代都督府趾每年三月三日及九月九日奉香焉
부인은 월성김씨로서 만명부인이다. 부친은 신라 종실인 숙흘종으로서 진흥왕의 조카이다. ○기일은 10월11일이다. ○묘소는 취산아래의 계좌에 있고 합봉되었다. 지금의 양산의 북정산 기슭이다. ○영정각은 양산 신기리에 두 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니, 즉 신라 대도독부의 터이다.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봉향한다.
=====
十三世
<舒玄> 子 庾信(유신) <子 三光,元述,元貞,長珥,元望, 軍承>
都督公爲萬弩郡太守甲寅歲庚辰夜夢熒惑鎭二星降於己夫人亦夢見童子衣金甲乘雲入室尋有娠二十月而生眞平王十七年乙卯歲也 背有七星文郡有胎靈山卽藏胎處後號吉詳山
도독공(휘서현)이 만로군[1] 태수로 있을 때인 갑인(594)년 경진일 밤에 꿈을 꾸니 형혹성과 진성의 두 별이 내려왔다. 부인도 역시 꿈에서 어린아이가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임신한지 20개월만에 아이를 낳으니 진평왕 17년 을묘(595)년이었다. 등에는 7개의 별 그림이 있었다. 군(만로군)에 태령산이 있으니 즉 태를 묻은 곳으로서 이후에 길상산이라 부른다.
[1]萬弩郡; 지금의 충북 진천
父公曰吾以庚辰日有吉夢得此兒 宜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庚與庾字相似 辰與信 聲相近 蓋以命之遂名 庾信
부친인 공(휘서현)이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에 길한 꿈을 꾸어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를 이름으로 해야 하나, 예기에 따르면 날짜를 이름으로 할 수 없으니, 경(庚)과 유(庾)자와 서로 비슷하고 신(辰)과 신(信)과 음이 같으니 대개 이렇게 하라고 명하니 결국 이름이 유신(庾信)이 되었다.
公幼有大志年十五爲花郞龍華香徒及壯佐新羅太宗武烈王七年庚申滅百濟陞大角干文武王五年乙丑唐高宗賜奉常正卿三十六道將軍大司馬大元帥金銀紫光祿大夫兵部尙書
平壤郡開國公之號
공은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서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리었으며, 또 커서는 신라 태종무열왕을 보좌하여 7년 경신(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대각간에 올랐다. 문무왕 5년 을축(665)년에 당나라의 고종이 봉상정경/삼십육도장군/대사마/대원수/금은자광록대부/병부상서/평양군개국공의 호를 내렸다.
八年戊辰滅高句麗之役公承命留鎭都城授方略於公弟欽純及金仁問等而滅高句麗統合三國超陞太大角干 文武王三十三年癸酉七月一日薨春秋七十九 葬慶州西松花山下金山原亥坐
8년 무진(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공은 명령을 받들어 도성의 진중에 남아 <적을 쳐부수는> 방책을 공의 동생인 흠순과 김인문 등에게 알려주어,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한의 통합을 이루어내어 태각간으로 승진하였다. 문무왕 33년(13년의 오류) 계유(673)년 7월1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79세였다. 장례는 경주 서쪽의 송화산 아래 금산원의 해좌에 지냈다.
王聞赴震慟贈賻采帛一千匹租二千石給軍樂鼓吹百人以導引命國子博士薛仁宣撰碑文立之紀功今無興德王十年乙卯二月追諡 純忠壯烈興武大王
왕이 부고를 듣고 애통해 하며 비단(采帛) 1천필과 식량 2천석을 내리고, 군악대의 취주대 100명을 보내어 장례에 따르게 하였다. 또 국자감의 박사 설인선에게 명하여 비문을 찬술하고 세워서 공덕을 기리게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흥덕왕 10년 을묘(835)년 2월 순충장렬흥무대왕이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神道碑文大提學黃景源撰今無慶州府尹南至薰誌 正宗十六年壬子四月因太祖王納陵致祭降香祝致享 純祖隆熙三年己酉南巡時命官降香祝例與崇善殿一體致祭公之偉勳巍蹟布在竹帛不敢盡錄慶州蚊川傍有故宅遺墟地曰財買井宅竪遺墟碑府尹李晩運 撰
신도비문은 대제학 황경원이 찬하였으나 지금은 없고 부윤 남지훈이 묘지를 찬하였다. 정조 16년 임자(1792)년 4월에 태조왕의 납릉에 치제하고 제사에 쓸 향축을 내려 주었다. 순조 융희 3년 기유(1909)년에 남쪽을 순시할 때, 관원에게 명하여 향축을 내리고 숭선전에서 함께 치제하였다. 공의 위대한 공훈과 높은 치적은 역사책(竹帛)에 실려 있으니 감히 <여기에> 전부 다 기록할 수 없다. 경주 문천 근방에 옛 집인 유허지가 있는데 재매정택이라 하며 유허비를 세우고 부윤 이만운이 찬술하였다.
慶州陵享寒食日寒露日<金山齋享日三九月二十五日;1978戊午譜>西岳書院及鎭川吉祥祠晋州南岳祠水原金山祠光州壯烈祠並二八月仲丁日<晋州南岳祠三九月仲丁;1978戊午譜>軍威孝靈祠五月五日江陵花浮祠五月五日及十月十五日<十月二十二日;1978戊午譜>扶安開巖祠 三九月十五日夫餘扶風祠三月二十日高敞白羊祠冬至日奉香豊基竹嶺上有位牌寧邊妙香山有影閣夫餘有興武王平濟碑中國洛陽大路有頌功碑
경주에 있는 능에는 한식일과 한로일에 제사를 드리고 있고 <금산재의 제향일은 3월과 9월의 15일이다; 1978년 무오보>, 서악서원과 진천의 길상사/진주의 남악사/수원의 금산사/광주의 창열사에서는 2월과 8월의 중순의 정일(丁日)에 <진주 남악사에서는 10월22일이다; 1978무오보>, 군위의 효령사는 5월5일에, 강릉의 화부사에서는 5월5일과 10월15일에<10월22일; 1978무오보>, 부안의 개암사에서는 3월과 9월의 15일에, 부여의 부풍사에서는 3월20일에, 고창의 백양사에서는 동짓날에 제사를 드린다. 풍기의 죽령위에 위패가 있고, 영변의 묘향산에는 영정각이 있으며, 부여에는 흥무왕 평제비(백제를 평정한 비)가 있고, 중국의 낙양의 큰 길에는 공덕을 칭송하는 비가 있다.
配平壤郡夫人月城金氏一云智炤夫人亦云財買夫人追贈興武大王妃新羅太宗武烈王第三公主 ○聖德王十一年壬子王謂夫人曰今中外平安君臣高枕而無事者是太大角干之所賜也 惟夫人宜其室家儆誡相成蔭功茂焉 寡人欲報其德未嘗忘于心命歲賜南城租一千石
부인은 평양군 부인으로 월성김씨로서 또는 지소부인이라 하고 또는 재매부인이라고도 하는데, 흥무대왕비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이 분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셋째 공주이다. ○성덕왕 11년 임자(712)년 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라 안과 바깥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베고 아무 일이 없는 것은 태대각간의 덕택이다. 부인은 마땅히 그 집안이 공경을 받아야 하고 숨은 공덕이 무성해져야 할 것이다. 과인은 그 공덕에 보답하고자 하여 마음으로 잊어버리지 않고, 남쪽의 성(南城)과 곡식 1천석을 내린다.’라고 하였다.
○墓與忌失傳 ○謹按三國遺事云金氏財買夫人死葬于靑淵上谷每年春月一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于時百花敷榮松花滿洞府林谷口架築爲庵因名松花坊云則似是慶州現谷面松峴及川北面靑淵等地而姑無確證以俟博考焉
○묘소와 기일은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를 보면 김씨인 재매부인이 죽자 청연의 상곡에 장사지내고, 매년 봄에 한 종씨의 여자들이 그 고을의 남쪽 계곡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에는 많은 꽃을 흩뿌려 소나무 꽃가루가 동네에 가득 찼으며, 부림곡의 입구에는 다리를 놓아 그 암자의 이름을 송화방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경주 현곡면의 송현과 천북면의 청연 등과 비슷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넓게 살펴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
<舒玄> 子 欽純(흠순) <子 盤屈>
一云欽春官角干眞平王時爲花郞仁深信厚太宗武烈王七年庚申隨兄大角干公率精兵五萬遂滅百濟十二月還軍文武王三年癸亥與將軍天存攻百濟殘賊取居烈居勿沙平德安諸城克之九月又伐頭良尹城周留城平之八年戊辰公以副總管與金仁問及諸將領兵進攻遂滅高句麗十一月還軍九年己巳公以伊湌金良圖奉使如唐劃定國境而未果久留於唐京翌十年庚午忽聞唐軍鍊兵五十萬以薛邦爲帥欲伐新羅之說時新羅義湘和尙西學入唐公以事諭之義湘還于本國事聞于朝九月公乃還國
또는 흠춘이라고도 한다. 관직은 각간을 지냈고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질고 믿음이 두터웠다. 태종무열왕 7년 경신(660)년에 형님인 각간공(휘유신)을 따라 정예병사 5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키고 12월에 돌아왔다. 문무왕 3년 계해(663)년 장군인 천존과 같이 백제의 잔당을 공격하여 거열성과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 등 여러 성을 빼앗고, 9월에 또 두량윤성, 주류성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8년 무진(668)년 공이 부총관으로서 김인문과 여러 장수와 병사와 같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11월에 돌아왔다. 9년 기사(669)년 공이 이찬으로서 김양도와 같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경을 획정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하고 당나라의 서울에 남아 있었다. 다음해 10년 경오(670)년 갑자기 당나라가 병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이 총사령관이 되어 신라를 정벌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라의 의상 화상이 마침 서학을 배우려 당나라에 들어와 있어서 이 사실을 의상에게 전하여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9월에 공이 돌아왔다.
謹按三國遺事列傳文武王時涉爲冢宰事上以忠臨民以恕國人翕然稱賢相封金官候
配與墓無傳
근안삼국유사열전문무왕시섭위총재사상이충임민이서국인흡연칭현상봉금관후
삼가 삼국유사의 열전을 보면 문무왕 때에 총재가 되어, 일을 함에 있어서 충성으로 백성을 대하고 나라 사람들을 헤아리니 인심이 한쪽으로 대단히 많이 몰렸고(翕然) 현명한 재상이라 불리었으며 금관후에 봉해졌다. 부인과 묘소에 대해 전해지는 것이 없다.
=====
<舒玄> 女 寶姬(보희)
=====
<舒玄> 女 新羅文明王后(문명왕후)
諱文熙太宗武烈王妃有六子曰長法敏新羅文武王 眞平王丙戌生次曰仁問大角干 眞平王己丑生次曰文注角干次曰老旦角干次曰智鏡角干次曰愷元角干
휘는 문희로서 태종무열왕비이다.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법민으로 신라 문무왕으로서 진평왕 병술(626)년에 태어났고, 다음은 인문으로 대각간이며 진평왕 기축(629)년에 태어났고, 다음은 문왕으로 각간이고, 다음은 로단으로 각간이고, 다음은 지경으로 각간이고, 다음은 개원으로 각간이다.
=====
十四世
<庾信> 子 三光(삼광) <子 允中, 允文>
官伊湌文武王六年丙寅二月以大阿湌與奈麻漢林(天存子)奉使如唐唐高宗召爲左武衛翊府中郎將仍令宿衛九年戊辰六月還國及還高宗贈詩曰燦燦文星海東天飄揚才德子能全一振高名滿帝都三千躍馬向華邊與遼東行軍劉仁軌到唐項津王使金仁問備禮迎之
관직은 이찬으로 문무왕 6년 병인(666)년 2월 대아찬으로 나마(벼슬명) 한림(천존의 아들)과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갔다. 당나라 고종이 그를 불러 좌무위익부 중랑장이 되었고, 또 9년간 숙위하였다. 무진(668)년 6월 신라로 돌아올 때 고종이 시를 써 주었는데 그 내용은 ‘빛나고 빛나는 글이 별과 같이 바다의 동쪽(신라)에 태풍과 같이 떠오르는구나. 재능과 덕망은 능히 모든 나라안을 진동시켜, 고귀한 이름이 황제의 서울에 널리 알려졌구나. 3천마리의 뛰어노는 말이 영화로운 변경을 향해갔다.’고 하였다. 요동행군 유인궤와 같이 당항진에 도착하니 왕(문무왕)이 김인문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환영하라 하였다.
○神文王三年癸丑五月王納神穆王后也 公以波珍湌金文穎與婚期之使及其執政使裂起授三年山郡(報恩)太守
○신문왕 3년 계축(신문왕 3년은 계미년으로서 683년임)년 5월에 신목왕후를 맞이할 때, 공이 파진찬으로서 김문영과 혼기를 정하는 심부름을 하고, 그 집정사인 열기가 삼년산군(보은)의 태수직에 임명되었다.
配位與墓所無傳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
<庾信> 子 元述(원술)
官蘇判文武王十二年壬申唐高宗以新羅滅百濟故地又納高句麗餘衆爲慊使高侃李謹行等領兵來侵公與鎭北將軍義福及春長等逆戰于石門城不利公欲戰死之其佐淡凌止之曰與其死而無成不若生而圖後公曰男兒不死苟生將何面目見父公乎淡凌攬其馬■而不放故遂不能死以還王曰戰敗如此奈何父公曰元述不惟辱王命亦負家訓可斬也
관직은 소판을 지냈다. 문무왕 12년 임신(672)년 당나라 고종이, 신라가 백제의 옛 땅을 없애고(점거하고) 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을 받아들이자, 이를 싫어하여 고간과 이근행 등으로 하여금 <신라를> 침략하게 하자 공(휘원술)이 진북장군 의복과 춘장등과 같이 석문성에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공이 싸워서 죽으려고 하였으나 그를 보좌하던 담릉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만일 죽어서 이루는 것이 없다면 살아서 후의 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 고 하였다. <원술이> 대답하기를 ‘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의 아버지를 뵙겠는가?’ 하였으나,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아 마침내 죽지 못하고 돌아왔다. 왕이 말하기를 ‘싸움의 실패가 이러하니 어찌할까?’ 하니 부친인 공(휘유신)이 말하기를 ‘원술은 왕의 명령을 욕되게 하고 가훈도 어겼으니 목을 베어야 한다.’고 하였다.
王曰元述副將也不可獨施刑乃赦之公慚愧不敢見父公遁於田里及父公薨求見母夫人母曰婦人有三從之義 今旣寡矣宜從於子然若汝則旣不得爲子於先君 吾焉得爲汝母乎
왕이 말하기를 ‘원술 부장에게만 벌하여서는 안된다.’며 이에 사면하여 주었으나, 공(휘원술)이 매우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부친(휘유신)을 보지 못하고 시골에 숨어 지냈다. 또 부친이 돌아가시자 모친을 뵙고자 하였으나 모친이 말하길 ‘여자는 3가지 따라야 할 도리가 있으니 지금은 마땅히 아들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너는 이미 너희 부친에게 아들이 아니니 나도 너의 어미가 아니다.’ 하였다.
遂不見公歎曰爲淡凌所誤至於此極乃入太白山 ○十五年乙亥唐兵來侵買蘇川城公欲雪前恥力戰有功然以其不容於父母憤恨不仕以終其身
마침내 모친을 뵙지 못한 공(원술)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담릉이 잘못한 것이 이렇게 까지 되었다.’하고 마침내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15년 을해(675)년 당나라 병사가 매소천성을 공격해오니 공이 이전의 부끄러움을 씻으려고 힘을 다해 싸워 공을 세웠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이 분하고 한이 되어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封菁陽君食邑于花開洞子孫始籍晋州 今禮山西有公之所築山城址及元伐里元坪觀爵里等地名至今尙存焉
청양군에 봉하고 화게동을 식읍으로 주니 지손들이 진주에 살기 시작하였다. 지금 예산의 서쪽에 공이 쌓은 산성터가 있고 원벌리 원평과 관작리 등의 지명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
=====
<庾信> 子 元貞(원정)<子 王巽>
官海干神文王九年己丑築西原述城淸州城仇近從以築城公聞人言謂怠於事杖之仇近曰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不辱大角干之命大角干不以僕爲無能待以國士今以浮言罪之平生之辱無大此焉公聞之終身羞悔(史記列傳)
配與墓無傳
관직은 해간이었다. 신문왕 9년 기축(689)년 서원(현재의 청주)의 술성인 청주성을 쌓을 때 구근이 공을 따라 성을 쌓았다. 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게을리 한다 하여 곤장을 때리려 하자 구근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열기와 같이 죽음을 예측할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였는데 지금 뜬소문을 듣고 벌을 주니 평생의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공(휘원정)이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 (사기열전)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
<庾信> 子 長耳(장이)
官大阿湌
配與墓無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
<庾信> 子 元望(원망)
官大阿湌
配與墓無傳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
<庾信> 子 軍承(군승)
一云施得天官夫人所出也 文武王二年壬戌唐將蘇定方等伐高句麗請兵於新羅 又傳告糧盡且危於是父大角干公載糧入高句麗界翌年癸亥正月渡七重河至樟塞天寒道隘公與裂起仇近等亦陪從之致糧唐營而還蘇定方得糧卽還去
또는 시득이라고 하며 천관부인에게서 태어났다. 문무왕 2년 임술(662)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신라에 병사를 요청하고 또 식량이 다 떨어져 위급하다고 알려오자 부친인 대각간공(휘유신)이 양식을 싣고 고구려의 국경으로 들어갔다. 다음해 계해(663)년 1월 칠중하를 넘어 장새에 이르렀으나, 날씨는 춥고 길은 험하여 공(휘시득)은 열기와 구근 등과 같이 유신을 모시고 따라가 당의 병영에 식량을 넘겨주고 돌아왔고, 소정방은 식량을 얻어 돌아갔다.
十五年乙亥唐兵來侵買蘇川城兄元述公大破之以是羅唐兩國境成仇隙故公奉使如唐和親唐高宗封臨海郡公翌年丙子唐將薛仁貴自平壤乘舟至扶餘公以沙湌爲上將軍前後二十餘戰大破於技伐浦斬四千餘級唐兵遂不至陞阿湌
15년 을해(675)년 당나라 군사가 매소천성을 침략해 오자 형인 원술공이 크게 이겼다. 이로서 신라와 당나라 양국의 국경이 성립되고 원수지간이 되었다. 공이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가서 화친을 청하자 당나라 고종은 그를 임해군에 봉하였다. 공은 다음해 병자(676)년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평양으로부터 배를 타고 부여에 이르자 공이 사찬으로서 상장군이 되어 전후 20여번을 싸워 크게 이기고 기벌포에서 4천여명의 목을 베자 당나라 병사가 마침내 오지 못하였다. 벼슬이 아찬으로 올랐다.
=====
<欽純> 子 盤屈(반굴)
官級湌太宗武烈王七年庚申七月隨父公赴黃山之役値百濟將軍階伯新羅軍四戰不利父公召以喩之曰爲臣莫若忠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惟乃與副將黃官昌突入百濟陣中力戰殉節以此大振軍勢遂滅百濟享忠烈祠祠在匏石亭下今無出三國史記列傳
配與墓無傳
관직은 급찬을 지냈다. 태종 무열왕 7년 경신(660)년 7월 부친(휘흠순)을 따라 황산의 싸움에 가서 백제장군 계백을 쳤으나, 신라군이 4번 싸워 불리하자 부친이 공을 불러 타이르며 말하기를 ‘신하로서 충신보다 더한 게 없고, 자식으로서 효도보다 더한 게 없다. 위험이 닥쳤으니 목숨을 바쳐 충성과 효도를 이루라.’고 하자 반굴이 알겠다고 하고 부장 황관창과 같이 백제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힘을 다해 싸우다 죽으니 이에 군사의 사기를 크게 흔들어 이윽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충렬사에서 제사를 모셨는데 충렬사는 포석정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온다.
부인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
十五世
<三光> 子 允中(윤중) <子 長淸>
官大阿湌 仕聖德王 屢承恩寵王之親屬 嫉之王登月城岑頭眺望乃與從臣置酒爲樂 命召之或曰今宗戚豈無可人 而獨召疎遠之臣乎王曰今寡人 與卿等共享泰平皆允中祖父德也 如遐棄之非善善及子孫之義也遂賜密坐言及其祖父平生及晩告退及 絶影山馬一匹
관직은 대아찬을 지냈다. 성덕왕 때 벼슬하여 왕의 은총을 여러 번 입어 왕의 친속들이 질투하였다. 왕이 월성의 잠두에 올라가 먼곳의 경치를 바라보며 그를 따르는 신하와 같이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며 <윤중을> 부르자 누군가 말하기를 ‘지금 종실의 친척(戚里)중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홀로 관계가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내가 공 들과 같이 제사를 드리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은 모두 유중 조부(휘유신)의 공덕이다. 만일 이를 멀리하고 버리면 착한 일을 좋게 여겨 자손에게 해야 하는 도리가 아니다.’하였다. 드디어 <윤중을>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의 평생 일을 말하기도 하였다. 또 날이 저물어 <윤중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절영산(絶影山)의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聖德王三十二年癸酉唐玄宗遣使請兵曰聞有舊將金庾信孫允中賢而可爲將須遣之仍賜金帛七月王命公弟允文赴唐營伐渤海因天大雪八月十五日還國新羅俗以其日稱嘉俳名節至今尙傳
配李氏墓所失傳
성덕왕 32년 계유(733)년에 당나라 현종이 사신을 보내어 병사를 요청하며 말하기를 ‘듣기로는 옛날의 장수인 김유신의 손자 윤중이 현명하여 가히 장수라 할 만하니 그를 보내라.’하고 또 <윤중에게> 금과 비단을 내렸다. 7월에 왕이 공의 동생 윤문에게 명하여 당의 진영으로 가서 발해를 정벌하라고 하였으나 하늘에서 눈이 많이 내려 8월 15일에 돌아왔다. 신라의 풍속에 그 날을 칭하기를 가배명절이라 하고 지금에도 숭상하여 전하고 있다.
부인은 이씨로서 묘소는 잃어버리고 전하지 않는다.
=====
<三光> 子 允文(윤문)
官上將軍 屢立戰功聖德王癸酉承王命從伯兄大阿湌公會唐兵伐渤海國以還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다. 여러 번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성덕왕 계유(733)년에 왕의 명령을 받들어 형 대아찬공(윤중)을 따라 당나라 병사와 같이 발해국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
<元貞> 子 王巽(선) <子 巖>
官判吏部事
配與墓所未詳
관직은 판리부사를 지냈다.
부인과 묘소는 알 수 없다.
=====
<盤屈> 子 令胤(영윤)
一云令尹世居沙梁部生長世家以名節自許神文王四年甲申十一月 高句麗殘賊悉伏者以報德城(益山)判 王命討之 公以黃衿誓幢步騎監赴之 將行謂人曰吾此行也不使宗族朋友聞其惡聲 及見悉伏出椵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鷰巢幕上 魚戱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窮寇莫追 宜左次以渡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
또는 령윤(令尹)이라고도 한다. 사량부에 살았으며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하였다. 신문왕 4년 갑신(684)11월에 고구려의 남은 세력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 익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토벌을 명할 때에 공(휘령윤)을 황금서당(黃衿誓幢)의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았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이번 걸음에 나의 종족과 친구들이 나쁜 소리를 듣지 않게 하겠다.’ 하였다. 또 실복이 가잠성(岑城) 남쪽 7리에 나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지금 이 흉악한 무리는 비유컨대 제비 천막 위에 집을 지은 것이고 솥 안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같으니 만번이라도 죽겠다는 각오로 나와서 싸우나 하루살이의 목숨과 같다. 논어에서 말하기를‘막다른 곳에 다다른 도둑을 급박하게 쫓지 말라.’ 하였듯이, 마땅히 좀 물러서서 피로가 극에 달함을 기다려 치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諸將然 其言暫退公獨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豈盡偸生之人惜死之輩哉而以 向者之言爲然者 將竣其隙而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 公曰 臨戰無勇 禮經之所誡也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 遂赴賊陣 格鬪而死 王聞之 悽慟流涕曰 無是父 無其子 其義烈可嘉者也 追贈爵賞尤厚出三國史記列傳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그를듯하다 여기고 잠시 물러섰으나, 공(령윤)이 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싸우려하니 그 따르는 자가 말하였다. ■■어찌 다 살기를 엿보는 사람으로 죽음을 아쉬워하는 무리이겠습니까? 지난 번의 말을 수긍한 것은 장차 그 틈을 기다려 그 편함을 얻고자 함인데 그대가 홀로 곧바로 진격하겠다고 하니 그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하자, 공(휘령윤)이 말하기를 ■■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기에서 경계시킨 바요,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은 병졸의 떳떳한 분수이다. 장부는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무리를 좇을 필요가 있겠는가?■■하였다. 드디어 적진에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런 아버지가 없었으면 이런 자식이 있을 수 없다. 그 의로움과 위엄이 가상하다.■■ 하고는 벼슬과 상을 더욱 후하게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온다.
=================================
十六世
<允中> 子 長淸(장청)
官執事侍郞孝成王時有勳封伽倻君作開國公行狀錄十卷行于世今無傳
配朴氏父中郞將檜出東京誌
관직은 집사시랑을 지냈다. 효성왕 때 공훈이 있어서 가야군에 봉해졌다. <그가> 작성한 개국공(휘유신)의 행장록 10권이 세상에 돌아다녔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부인은 박씨로서 중랑장을 지낸 박회의 따님이다. 동경지에 나온다.
<王巽> 子 巖(암)
謹按舊譜大阿湌公允中庶孫錄之一云侍郞公長淸弟一云蘇判公元述孫一云波珍湌元貞孫等錄之則派系未詳故姑記于此以俟博考
삼가 구보를 살펴보면 대아찬공 윤중의 서손이라 기록되어 있거나, 또는 시랑공 장청의 동생으로 되어 있거나, 또는 소판공 원술의 손자라고 되어 있거나 또는, 파진찬 원정의 손자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파계가 분명하지 않으니 고기의 기록에 따라 이를 넓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公聰敏 好方術少爲伊湌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聞一隅反以三隅自述遁甲立成法示其師師憮然驚歎曰不圖吾子之明達至此自是不敢以弟子待之 及還國爲司天博士 歷良州(良山)康州(晋州)漢州(廣州)都督復爲執事侍郞領浿江鎭頭(平壤) 所至盡心撫字 三務之餘敎以六鎭兵法人皆便之 嘗有蝗蟲蔽野 百姓憂懼 公登山頂 焚香祈天 忽風雨大作 蝗盡死
공의 성품은 총명하고 민첩하여 방술(술법)을 좋아하여 젊어서 이찬이 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면서, 틈을 타서 스승에게 찾아가서 음양가(陰陽家)의 술법(術法)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미루어 알았다. 스스로 둔갑입성법을 지어 그 스승에게 보여드리니, 스승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밝음이 여기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며, 그 후로는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또 귀국하여, 사천대박사가 되었고, 양주(양산)․강주(진주)․한주(광주) 세 지방의 도독을 역임하고 다시 집사 시랑과 패강진(평양)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보살펴, <농사짓는> 세 계절의 여가에 육진병법을 가르치니 모두들 유용하게 여겼다. 일찍이 메뚜기가 생겨 우글우글 들판을 덮으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공(휘암)이 산마루에 올라가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 누리가 다 죽어 버렸다.
○惠恭王十五年己未聘日本 其國王知公賢達敬留之會 唐使高鶴林 相見甚歡倭王以爲大國所知不敢留翌年庚申乃還
配與墓未詳有一子諱瑱餘無傳
○혜공왕 15년 기미(779)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으나, 마침 당의 사신 고학림이 <와서> 서로 만나보고 매우 즐거워하니, 왜왕이 <암이> 대국(중국)에도 알려진 것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하자 다음 해 경신(780)년에 돌아왔다.
부인과 묘소는 알지 못하고 아들하나가 있었는데 진이라는 것 밖에는 전하는 것이 없다.
正德舊譜抄本(정덕구보초본)
一世 (17)
雄元(웅원)
字俊汝新羅憲德王三年辛卯二月爲完山州都督十一年己亥七月唐討金國將 李師道乃請援兵公領甲士三萬赴之○四年壬寅三月熊州都督金憲昌判公以蘇判與伊湌均貞大阿湌祐徵領三軍出擊平之興德王元年丙午築浿江長城周三百里 至■謝還號金州逸民
配上黨郡夫人韓氏父江西守峻 ○墓三陟平原洞
자(字)는 준여이다. 신라 헌덕왕(809~826) 3년 신묘(811)년 2월에 완산주의 도독이 되었고 11년 기해(819)년 7월에 당나라가 금국의 장수인 이사도를 토벌하고자 지원병을 요청하자, 공이 갑병 3만명을 거느리고 갔다. ○4년 임인(822)년 3월에 웅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이 소판으로서 이찬 균정과 대아찬 우징과 같이 3군을 거느리고 출격하여 평정하였다. 흥덕왕 병오(826)년 패강장성을 축조하니 그 둘레가 300리이다. 늙어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호는 금주일민이다.
부인은 상당군 부인 한씨로서 강서의 수령인 한준의 따님이다. ○묘소는 삼척 평원동에 있다.
=====
雄允(웅윤)
宣德王朝人
선덕왕 때 사람이다.
=====
二世(18)
<雄元> 子 擎柱(경주) <子 成海, 成岱>
字天輔號擎天齋文聖王十三年辛未與阿湌元弘使于唐奏對稱旨宣宗嘉其才器局量過人謂之本朝柱石之臣
配月城金氏新羅神德王諱祐徵公主 ○墓在長山原
자는 천보이고 호는 경천재이다. 문성왕(839~856) 13년 신미(851)년에 아찬 원홍과 같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아뢰니 선종이 재주와 기량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본조(당나라?)의 기둥이 되는 신하라고 하였다.
부인은 월성김씨로서 신라 신덕왕 우징[1]의 공주이다. ○묘는 장산언덕에 있다.
[1]金祐徵; 신라 45대 신무왕(839년 윤1월~7월)
=====
三世(19)
<擎柱> 子 成海(성해) <子 挺喆>
字君楫號海陵先生仕至都觀郞歷事憲安景文憲康三朝與孤雲崔致遠較才入唐奉勅還朝居職未幾丁內艱因以歸家後王以書朝之公所撰漁樵子詩集文詞模入唐行于世
配張氏父靑海鎭大使保皐○墓在江西
자는 군즙이고 호는 해릉선생이다. 벼슬은 도관랑[1]에 이르렀고, 헌안(856~860), 경문(861~875), 헌강(875~886)왕의 세 조정을 거쳤다. 고운 최치원(857~?)과 재능을 겨루었고, 당나라에 들어가 당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직무에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왕이 글을 쓰고 공이 찬술한 어초자의 시집에 있는 글에서 당나라에 들어갔던 일은 후세에 전한다.
부인은 장씨로서 청해진대사 장보고(?∼846)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1]都官; 신라시대에 감전(監典)에 소속된 관직. 고려시대에 노비의 문서와 호적 및 그 소송 사무를 담당하는 관아.
=====
<擎柱> 子 成岱(성대)
면주없음
=====
四世(20)
<成海> 子 挺喆(정철) <子 琇胤, 玉胤>
字重擧眞聖王五年辛亥値弓裔及甄萱之亂公以大都督禦之而卒王親臨禮葬于豊山
配魏氏
자는 중거이다. 진성왕(887~896) 5년 신해(891)년에 궁예와 견훤(892~ 936)의 반란을 맞아 공이 대도독으로서 방어하다가 죽었다. 왕이 친히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풍산에 묻었다.
부인은 위씨이다.
=====
五世(21)
<挺喆> 子 琇胤(수윤) <子 天授, 天與>
字汝慶號逸休齋仕御史侍郞眞聖王朝弓裔及甄萱別朝野大亂明亮知機皆退去公赤遯居田里有詩曰今日江湖客當時勇退人壺中一片土閑臥守吾天
配完山郡夫人李氏父守慈○墓陽城
자는 여경이고 호는 일휴재이다. 벼슬은 어사시랑을 지냈다. 진성왕 때 견훤이 떨어져서 조야에 난이 있자, 사리에 밝아 그 낌새를 알아채고 모두 물러나니 공도 역시 시골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해오는 시가 있으니 ‘오늘 강호의 손님이 당시 과감히 물러나 투호병 속의 한 조각 흙 틈에 누워 우리의 하늘을 지킨다.’고 하였다.
부인은 완산군 부인인 이씨로서 이수자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성에 있다.
=====
<挺喆> 子 玉胤(옥윤)
면주없음
=====
六世(22)
<琇胤> 子 天授(천수) <子 商佐>
字思留號西峰 定康王朝以禮召之不次孝恭王十一年丁卯以侍中奉使如唐適値唐梁革世之亂而卒返葬于陽城
配王{李}氏父隱士巨仁 ○墓箕山原
자는 사유이고 호는 서봉이다. 정강왕(886~887) 때 왕이 예를 갖추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효공왕 11년 정묘(907)년에 시중으로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당나라와 양나라의 세상이 뒤집히는 난리를 만나[1] 죽어서 돌아와 양성에 장사지내었다.
부인은 왕{이}씨로서 숨어사는 선비인 이거인의 따님이다. ○묘는 기산언덕에 있다.
[1]907년 당이 후양에 의해 멸망함
=====
<琇胤> 子 天與(천여) <子 商補>
字理彦仕太保 配李氏父侍中芳喆 墓祔先兆
자는 리언이고 벼슬은 태보[1]를 지냈다. 부인은 이씨이고 시중을 지낸 이방철의 따님이다. 묘는 선영에 합사되어 있다.
[1]太保; 1068년(문종 22년)에 제정된 동궁(東宮)의 종1품 벼슬, 곧 태자태보(太子太保)
=====
七世(23)
<天授> 子 商佐(상좌)<子 浩>
字玄旭佐高麗太祖與卜智謙申崇謙裴玄慶等定鼎松岳公以元勳贈三重大匡號爲國土
配卜氏父智謙 ○墓安國土洞
자는 현욱이고 고려 태조를 도와 복지겸/신숭겸/배현경 등과 같이 송악에 나라를 세우니 공은 원훈으로 삼중대광에 증직되었고 호를 국토라 하였다. 부인은 복지겸(?~?)의 따님이다. ○묘는 안국사동에 있다.
=====
<天與> 子 商補(상보)<子 潤>
仕止小保
配金氏父司從益善 墓上仝
벼슬은 소보[1]에서 끝났다.
부인은 김씨이고 사종을 지낸 김익선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先兆祔).
[1]小保; 1031년에 제정된 고려 때의 태자부(太子府)의 종2품 벼슬. 곧 태자소부(太子少傳).
=====
八世(24)
<商佐> 子 浩(호)<子 華齋>
字光麟號靑巖先生登第知制誥翰林學士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大提學壽一百一歲 配平山郡夫人申氏父壯節公崇謙 ○墓祔先兆
자는 광린이고 호는 청암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지제고[1]/한림학사[2]/조정대부/첨의부[3]/좌사의대부[4]/보문각대제학[5]을 지냈다. 나이 101세에 돌아가셨다. 부인은 평산군 부인 신씨로서 장절공 신숭겸(?~927)의 따님이다. ○묘는 선영과 합사되어있다.
[1]知制誥;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인 조서 또는 교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 한림원(翰林院), 보문각(寶文閣)의 벼슬아치들이 겸임함. <동의어> 지제교 (知製敎)
[2]翰林院; 고려시대에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은 관청.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없었음.
본래 원봉성(元鳳省)이라 하던 것이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바뀌었다가 현종(1010~1031년) 때 다시 한림원으로 바뀜. 1275년(충렬왕 1년)에 문한서(文翰署)라 하였고 뒤에 다시 사림원(詞林院)이라 하였으며 1308년(충렬왕 34년)에 사관(史館)과 합쳐져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라고 불림.
재상(宰相)이 겸하는 판원사(判院事)와 학사승지(學士承旨-정3품), 학사(學士-정4품), 시독학사(侍讀學士-정4품), 시강학사(侍講學士-정4품) 등의 벼슬아치가 있음.
[3]僉議府;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도성(尙書都省)이 합쳐 만들어진 관청.
1356년(공민왕 5년)에 삼사(三司)가 개정되면서 다시 상서성(尙書省)이 분리되어 나옴. 복야(僕射), 사랑중(司郎中), 원외랑(員外郎), 도사(都事) 등의 벼슬아치 가 있음. 이 때는 없었음.
[4]左司議大夫; 1116년(예종 11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고쳐 부른 이름.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있는데 1298년(충렬왕 24년)에 종4품이 되면서 다시 간의대부로 바뀌었다가 뒤에 다시 사의대부라 하였고 1356년(공민왕 5년)에 또 간의대부라 하고 종3품으로 올랐으며 뒤에도 여러 번 반복하여 바뀜.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없었음.
[5]寶文閣; 1116년(예종 11년)에 궁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이라는 건물을 짓고 이름 있는 문신들을 불러들여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토론하게 하다가 이후 궁궐 밖 건물로 옮겨가면서 이름을 보문각이 라고 고침. 이 때는 없었음.
=====
<商寶> 子 潤(윤)<子 泰齋>
字世光有德行不就仕宦 配洪氏父大海 ○墓佳亭山
자는 세광이고 덕행이 있었으며 벼슬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홍대해의 따님이다. ○묘소는 가정산에 있다.
=====
九世(25)
<浩> 子 華齊(화제)<子 振酉>
字桓彦號月簑翁登第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年老歸臥江上自稱散人有詩曰浮世功名奚足取莫如江上取{擲}漁竽月笛煙簑靜裏趣物表於今得安閑
자는 환언이고 호는 월장옹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삼중대광/도첨의/우정승/판전리사사를 지내고 나이가 들어 고향의 강상으로 돌아와 자칭 산인[1]이라 하였다. 전해오는 시에서 말하기를 ‘어지러운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 어찌 즐겁겠느냐. 이를 취하는 것은 강물위에 잡은 고기를 던져버리는 것만 못하니 피리를 불며 풀을 덮고 적막한 것을 즐기는 사람이 오늘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1]散人; 벼슬을 버리고 자연을 즐기며 한가로이 지내는 사람
=====
<潤> 子 泰齊(태제) <子 德裕>
字士卓官監務 配具氏父師孟 墓在先兆下
자는 사탁이고 관직은 감무[1]를 지냈다. 부인은 구사맹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1]監務; 고려의 예종(1105~1122) 때 제정되었음.
=====
十世(26)
<華齊> 子 振酉(진유)<子 承意, 繼意, 進意>
字鳳俊號知止老又曰退休齋登第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閣{殿}大學士 判典理司事世子師 光宗設科僧惠居掌試公極諫王不聽退居金馬渚今益山 配康氏父巡檢使兆 ○墓先塋左岡
자는 봉준이고 호는 지지로 또는 퇴휴재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광정대부[1]/도첨의중찬[2]/수문각{전}[3]대학사/판전리사사[4]/세자사[5]를 지냈다. 광종이 과거제를 설치하여 중 혜거[6]를 시험담당관으로 임명하자 공이 극력 간언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와 금마저, 지금의 익산에 살았다. 부인은 강씨이고 순검사를 지낸 강조[7]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왼쪽 언덕에 있다.
[1]匡靖大夫; 1275년(충렬왕 1년)에 제정한 문관 벼슬아치들의 종2품 품계. 이전의 금자관록대부(金紫光祿大夫). 1310년(충선왕 2년)에 종2품의 첫째 등급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없어지고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설치되면서 정2품으로 올랐다가 1369년(공민왕 18년)에 폐지됨.
[2]都僉議中贊;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도성(尙書都省)이 합쳐져 첨의부(僉議府)가 되고 그 전의 시중(侍中)이 바뀌어진 이름. 좌 ·우 두 사람이 있었음.
1298(충렬왕 24년)에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바뀌었다가 뒤에 다시 이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1308(충렬왕 34년)에 정승(政丞)으로 바뀌고 한 사람만 두었음.
[3]修文殿; 문덕전(文德殿)이 1136년(인종 14년)에 수문전(修文殿)으로 바뀜
[4]전리사(典理司); 1275년(충렬왕 1년)에 이부(吏部)와 예부(禮部)가 합쳐 만들어진 관청. 1298년(충렬왕 24년)에 다시 의조(儀曹)와 전조(銓曹)로 분리되면서 없어짐.
[5]世子師; 1277년(충렬왕 3년)에 제정한 왕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은 벼슬아치.
[6]혜거(惠居); ?∼974(광종 25). 고려 초기의 고승. 성은 박씨(朴氏). 초명은 지회(智回). 자세한 생애는 미상이며, 16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의 도가 높아지자 왕이 여러 번 청하여 법문을 듣기를 원하였으나 응하지 않다가, 947년(정종 2) 왕사가 되었고, 968년에 국사가 되었다.
[7]강조(康兆, ?∼1010(현종 1); 고려의 무신. 황해도지방의 토성(土姓)이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목종 때 중추사 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었다.
[비고]이 시기에는 광정대부라는 품계가 없었고 도첨의중찬, 수문전, 전리사, 세자사도 없었음.
=====
<泰齊> 子 德裕(덕유)<子 敬意>
以行義筮仕摠郞 配金氏父洛賢 墓江界
의로움을 행하여 과거를 보지 않고 총랑의 벼슬에 올랐다. 부인은 김락현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계에 있다.
=====
十一世(27)
<振酉> 子 承意(승의)<子 天精>
字士則撿校神虎衛上將軍以斥僧爲已任光宗忤旨黜之{見黜} 配王氏父匡廉 墓上書庄{今慶州金鰲山下}
자는 사칙이고 검교[1]신호위상장군을 지냈다. 중(혜거)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이미 임명한 광종의 뜻을 거슬러 벼슬에서 물러났다. 부인은 왕광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에 쓴 장(先塋左岡)에 있다. {지금의 경주 금오산 아래}
[1]檢校; 고려 말~조선 초기, 어떤 관청에 정원외에 임시로 벼슬아치의 수를 늘렸을 때나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의 관직 이름 앞에 붙이는 말.
=====
<振酉> 子 繼意(계의)<子 淵精>
配閔氏父判典校淪 墓萬轉郊
부인은 민씨이고 판전교를 지낸 민륜의 따님이다. 묘소는 만전의 교외에 있다.
=====
<振酉> 子 進意(진의){追意}<子 澤精>
官中書令 配閔氏父侍郞漬 墓江西小{少}鹿山
관직은 중서령[1]을 지냈고 부인은 시랑을 지낸 민지[2]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의 소록산에 있다.
[1]中書令; 1061년(문종 15년)에 내사령(內史令)을 고쳐 부른 이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1품 벼슬. 1295년(충렬왕 21년)에 도첨의령(都僉議令)으로 바뀌었고 뒤에 판도첨의사사사(判部僉議使司事)라 불렀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중서령이라 하였고 뒤에 판문하(判門下)로 바뀜
[2]민지(閔漬); 1248(고종 35)∼1326(충숙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평장사 영모(令謨)의 5대손이며, 상정(祥正)의 아버지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후(祗候)가 되고, 1279년(충렬왕 5)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충선왕이 세자 때인 1290년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직학사 조열대부(翰林直學士朝列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1258년 원나라가 두번이나 실패한 일본정벌을 결행하려 하자 좌부승지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동정(東征)의 불필요함을 역설하여 전함(戰艦)건조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뒤 집현전대학사 첨광정원사(集賢殿大學士僉光政院事)가 되고 충선왕초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1321년(충숙왕 8)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1323년 가락군(駕洛君) 허유전(許有全), 흥녕군(興寧君) 김거(金$거02)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충선왕의 환국을 청할 표문(表文)을 지었다. 이 문장은 명문으로 그 뜻이 간절하고 때로는 애통한 듯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 머무른 지 6개월이 되어도 심왕(瀋王)무리의 간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교열,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 世代編年節要》라 이름하였고, 또 《본국편년강목 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사관은 민지를 평하기를, “그는 문예는 있으나 습속이 많고 심술이 바르지 않아 나인(內人)을 아첨하여 섬기고, 또한 성리(性理)의 학을 알지 못하여 주자(朱子)의 소목론(昭穆論:종묘 신위의 차례를 말함.)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편벽함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아마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견해로 보인다.
저서로는 《묵헌집》이 있다.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
<德酉> 子 敬義(경의)<子 益城>
字子益官密直使 配咸豊李氏父泓 墓上同
자는 자익이고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함풍이씨로서 이홍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江界).
=====
十二世(28)
<承意> 子 天精(천정)<子 恒齡>
字理賢老年登第重大匡兵部尙書諡文忠使契丹請和而還 配金氏父大良君詢 墓先兆下
자는 리현이다. 늙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중대광/병부상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충이다. 사신으로 거란에 가서 화친을 청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김씨로서 대량군 김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
<繼意> 子 淵精(연정)
字可宜 配安氏父禹
자는 가의이고 부인은 안우의 따님이다.
<繼意> 子 漢精(한정)
退絶宦情治産自娛有詩
벼슬에서 물러나 벼슬을 하고 싶은 마음과 돈벌이를 끊고 스스로 즐겼으며 남아있는 시가 있다.
=====
<進意> 子 澤精(택정)<子 德齡>
官侍中 配洪氏父典校倫 墓在先兆下
관직은 시중을 지냈고 부인은 전교를 지낸 홍륜[1]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1]홍륜(洪倫); ?∼1374(우왕 즉위년). 고려 공민왕의 총신(寵臣). 본관은 남양(南陽). 공민왕 때의 문하시중 언박(彦博)의 손자이며, 경상전라도순문사를 지낸 사우(師禹)의 아들이다.
1372년(공민왕 21)에 설치된 자제위(子弟衛)에 소속되어 왕의 좌우에서 보필하다가 1374년 왕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주살(誅殺)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은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후사를 얻기 위하여 자제위 소속 청년들로 하여금 여러 비빈(妃嬪)들과 사통(私通)시켜 아들을 낳게 하여 후사로 삼기를 원하였는데, 륜이 익비(益妃:공민왕의 셋째부인)와 관계하여 임신하게 되자 왕은 기뼈하며,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하자, 이를 두려워한 륜이 환관 최만생(崔萬生)과 모의하여 왕을 시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조선왕조 사가(史家)들이 의도적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敬意> 子 益城(익성)<子 華岳>
官監務 配水原崔氏 墓上同
관직은 감무[1]를 지냈고 부인은 수원최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界).
[1]監務; 고려의 예종(1105~1122) 때 제정되었음.
=====
十三世(29)
<天精> 子 恒齡(항령)<子 洙聖>
字德章號泰平齋登第撿校神虎衛將軍女眞之亂連歲不息歸臥泰平山以卒 配晉陽郡夫人姜氏父平章事燦 ○墓祔先兆下
자는 덕장이고 호는 태평재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검교[1]신호위장군을 지냈다. 여진족이 해마다 침범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태평산에서 돌아가셨다. 부인은 진양군 부인 강씨이고 평장사를 지낸 강찬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1]檢校; 고려 말~조선 초기, 어떤 관청에 정원외에 임시로 벼슬아치의 수를 늘렸을 때나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의 관직 이름 앞에 붙이는 말.
[비고]姜燦; 선조시기에 동명이인이 있음.
=====
<澤精> 子 德齡(덕령)<子 潙聖>
避女眞之亂(兵}入金華山以卒 配李氏父判典校濟 墓上同
여진족의 병난을 피해서 금화산으로 들어가 별세하셨다. 부인은 이씨로서 판전교를 지낸 이제[1]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선영 아래).
[1]이제(李濟); ?∼1398(태조 7). 고려말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성주호장 장경(長庚)의 고손(高孫)이자 조년(兆年)의 증손이며, 권신 인임(仁任)의 아우인 인립(仁立)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1352년(공민왕 1) 좌대언(左代言)이 되고, 이해 밀직제학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1등에 봉해졌다.
이성계(李成桂)의 셋째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결혼하였으며, 1392년(공양왕 4)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의 살해에 가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를 거쳐, 1393년(태조 2)우군절제에 올랐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일파로 몰려 이방원(李芳遠)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세종 때에 신원되어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후사가 없어서 조카 윤(潤)으로 뒤를 이었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
<益城> 子 華岳(화악)<子 光澤>
字山甫典廐暑承 配姜氏父諴 墓上同
자는 산보이고 전구서승을 지냈다 부인은 강함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界).
=====
十四世(30)
<恒齡> 子 洙聖(수성)<子 商欽, 商賢, 商寅>
字澄源重大匡戶部尙書與上元帥姜邯贊女眞之亂力拒以卒 配南陽郡夫人洪氏父龍虎軍校尉潁
자는 징원이고 중대광/호부상서를 지냈다. 상원수 강감찬(948∼1031)과 같이 여진의 난을 힘을 다해 막다가 별세하였다. 부인은 남양군부인 홍씨로서 용호군교위를 지낸 홍영의 따님이다.
=====
<德齡>의 子 潙聖(위성)<子 商眞>
時歲飢公承命東丘以活生靈有功封爵奉先庫判官令同正{墓上同}
이 시기에 기근이 들어 공이 명령을 받고 백성을 생활을 보살폈으며 이 공로로 관작을 받아 선고판관령의 동정[1]이 되었다.{묘소는 위와 같다.}
[1]同正; 임시직책을 뜻함
=====
<華岳> 子 光澤(광택)<子 東燁>
字士淸 配李氏父元植 墓上同
자는 사청이고 부인은 이원식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
=====
十五世(31)
<洙聖> 子 商欽(상흠)<子 成雨>
字資興登第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大提學亞中大夫輕車都尉金州伯顯宗元年庚戌契丹來寇公與上將軍金訓有功而還遇西城大食國使來獻方物事稱旨封邑歷事顯宗以忠直之功益邑 配貞烈夫人禹氏父左思補儞 ○墓福州山西原今安東
자는 자흥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첨의부[1]/좌사의대부[2]/보문각[3]대제학/아중대부/경차도위/금주백을 지냈다. 현종원년 경술(1010)년 거란이 침입하자 공이 상장군 김훈[2]과 같이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우서성에 대식국[3]의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치면서 왕이 준 것이라 하여 식읍을 주었다. 현종(1009~1031)을 거치면서 충성과 정직의 공적이 있어 식읍을 더 주었다. 부인은 정렬부인 우씨로서 좌사보를 지낸 우칭의 따님이다. 묘소는 복주의 산 서쪽 언덕에 있으니 지금의 안동이다.
[1]僉議府;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도성(尙書都省)이 합쳐 만들어진 관청.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2]司議大夫; 1116년(예종 11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고쳐 부른 이름. 좌와 우가 있었음
[3]寶文閣; 1116년(예종 11년)에 궁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이라는 건물을 짓고 이름 있는 문신들을 불러들여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토론하게 하다가 이후 궁궐 밖 건물로 옮겨가면서 이름을 보문각이 라고 고침.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2]김훈(金訓, ?∼1015); 고려의 장군.
1010년(현종 1)에 거란병이 대거 침입하여 통주(通州:지금의 평안북도 宣川)에서 강조(康兆)의 군대를 크게 이기고 계속 전진하자, 장군으로서 김계천(金繼天)·이원(李元)·신영한(申寧漢) 등과 좌우기군(左右奇軍)을 거느리고 완항령(緩項嶺)에 복병하였다가 그 선봉을 무찔렀으며, 뒤에 상장군이 되었다.
1014년에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중추원 일직(日直)황보 유의(皇甫兪義)가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에 충당하게 함으로써 무신들의 불평이 높아지자, 상장군 최질(崔質)과 함께 병사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장연우·황보 유의를 귀양보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으로 상참(常參) 이상은 모두 문관을 겸하게 하는 동시에 어사대(御史臺)를 금오대(金吾臺)로, 삼사(三司)를 도정서(都正署)로 고치는 등 무관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듬해 왕과 내통한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 이자림(李子琳, 王可道)의 계략으로 왕이 서경 장락궁(長樂宮)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하였다가 최질·이협(李協)·최가정(崔可貞)·석방현(石邦賢) 등 19인의 무신들과 함께 피살당하였다.
[3]大食國; 아라비아에 있던 사라센 제국을 당, 송나라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
<洙聖> 子 商賢(상현)<子 成洙>
官右軍兵馬使 配金氏 墓松岳山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고 부인은 김씨이다. 묘소는 송악산에 있다.
=====
<洙聖> 子 商寅(상인)<子 成泗>
官按察使 配上黨韓氏父諫義大夫奎 墓上同
관직은 안찰사를 지냈고 부인은 상당한씨로서 간의대부를 지낸 한규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
=====
<潙聖>子 商眞(상진)<子 佑鐸>
學聞有餘退居{處}別區獎進後學號曰廣山先生 配權氏父漢功 ○墓黃州馬峙洞
학문이 알려졌으나 남은 여생을 물러나와 외딴 곳에 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호는 광산선생이다. 부인은 권한공의 따님이다. 묘소는 황주의 마치동에 있다.
=====
<光澤>子 東燁(동엽)<子 兌一>
字爾輝官代言
자는 이휘이고 관직은 대언을 지냈다.
=====
十六世(32)
<商欽>子 成雨(성우)<子 一曙>
字雲澤登第輸忠贊化功臣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號甘霖先生德宗二年癸酉與平章事柳韶完築北界千里石城以禦女眞之禍 ○皆自今之鴨綠江口經泰川熙川寧邊永興至都連浦 ○配文化郡夫人柳氏父大將軍淸臣 ○墓鳥嶺
자는 운택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수충찬화공신/광정대부[1]/판후덕부사/우문관대제학[2]을 지냈다. 호는 감림선생이다. 덕종 2년 계유(1033)년에 평장사 류소[3]와 같이 북쪽 경계 천리석성을 쌓아 여진에 대한 근심을 막았다. ○전부 지금의 압록강 입구로부터 태천/희천/영변/영흥을 거쳐 도련포에 이른다. ○부인은 문화군부인 류씨로서 대장군 류청신[4]의 따님이다. ○묘소는 조령에 있다.
[1]匡靖大夫; 1275년(충렬왕 1년)에 제정한 문관 벼슬아치들의 종2품 품계.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2]右文館大提學; 1308년(충렬왕 34년)에 설치된 우문관(右文館)의 정2품 벼슬. 따라서 이 때는 없었음.
[3]유소(柳韶, ?∼1038); 고려의 명신(名臣). 정주유씨(貞州柳氏)의 시조라고도 전한다.
1011년(현종 2)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1016년에 어사잡단(御史雜端), 1019년 사헌중승(司憲中丞), 1022년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고, 이어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1029년 왕명으로 흥화진(興化鎭) 서북쪽 40리에 있던 석성(石城)을 수리하여 위원진(威遠鎭)을 두고, 흥화진 북쪽에 있던 석보(石堡)를 수축하여 정융진(定戎鎭)을 두어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때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난을 일으켜 흥료국(興遼國)을 세우고 고려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현종이 응하지 않았다. 이때 서북면판병마사(西北面判兵馬事)로 상중(喪中)에 있었으나 한(漢)의 승상 책방진(翟方進)의 고사를 들어 흥료의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1030년 중추사(中樞使), 1031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었고, 그해 덕종이 즉위하자 중군병마사를 거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033년(덕종 2) 왕명으로 북경관성(北境關城:千里長城)을 쌓았는데, 그것은 서해안의 압록강 하구에서 동으로 위원등 13성을 거쳐 화주(和州)에 이르는 1, 000여리에 걸치는 것이었다.
1034년 장성축조의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에 봉하여졌으며, 은청광록대부 상주국 대위 문하시랑평장사(銀靑光祿大夫上柱國大尉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덕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의(襄懿)이다.
[4]유청신(柳淸臣); ?∼1329(충숙왕 16). 고려 충렬왕 때의 역관(譯官)·재상. 본관은 고흥(高興). 본래 이름은 비(庇).
공민왕 때 좌정승을 지낸 탁(濯)의 할아버지이다.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에서 출생하였으며, 선대는 대대로 그곳의 부곡리(部曲吏)였다. 몽고어를 잘 하여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서 내왕하였고, 그 공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에 임명되었다. 고려시대에 부곡리가 5품을 넘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허통(許通)되어 장군에 올랐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1294년(충렬왕 20)에 우승지가 되었고, 1296년에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다. 다음해에 세자(뒤의 忠宣王)의 요청에 의하여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되었으며, 조인규(趙仁規)·인후(印侯)와 함께 원나라에 파견되어 충렬왕의 전위표(傳位表)를 전달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광정원부사(光政院副使)로서 참지기무(參知機務)를 겸하였고, 곧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충렬왕이 복위하고 인후 등에 의하여 한희유무고사건(韓希愈誣告事件)이 일어나자 여기에 연루되어 원나라에 압송되었으며, 1299년에 차신(車信)·최유엄(崔有?)·오인영(吳仁永)·유복화(劉福和)·홍선(洪詵) 등 충선왕 지지자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복직되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으며, 당시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충선왕의 환국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307년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옹립의 공으로 실권을 장악하자 도첨의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로 중용되었다.
이때 원나라 황제로부터 청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개명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정승에 임명되고 고흥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곧 도첨의찬성사 고흥군으로 강등되었지만 1313년에 다시 정승에 올라 1321년(충숙왕 8)까지 재임하였다.
1320년에 원나라에서 충선왕이 고려인 환관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의 참소를 받아 토번(吐蕃)으로 유배되고, 다음해에 충숙왕 역시 참소를 받아 원나라로 소환되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그곳에서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심왕 고(瀋王暠)에게 붙어 심왕옹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오잠(吳潛)과 함께 고려에 원나라의 내지(內地)에 설치된 행성(行省)을 두자는,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을 벌였으며, 충숙왕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무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이 모두 실패하고 1325년에 충숙왕이 환국하자, 처벌될 것이 두려워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말년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 때문에 《고려사》의 간신전(姦臣傳)에 수록되었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비고]류소와 류청신은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님.
=====
<商賢>子 成洙(성수)<子 萬濟>
字德阿德宗朝光祿大夫平壤郡享立以功贈左贊 配崔氏父侍中沖
자는 덕하이고 덕종(1031~1034) 때 광록대부를 지내고 평양군에 모셔졌으며 공적이 있어 좌찬[1]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최씨로서 시중을 지낸 최충[2]의 따님이다.
[1]左贊; 1277년 제정된 좌찬덕(左贊德), 우찬덕(右贊德), 좌찬성(左贊成)은 조선시대 관직명 임
[2]최충(崔沖, 984(성종 3)∼1068(문종22); 고려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온(溫)의 아들이다.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여 《칠대실록 七代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뒤 우보궐(右輔闕)·기거사인(起居舍人)·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郎諫議大夫)에 올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漢)의 자사6조(刺史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으며, 정종초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변경에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옮겼다. 문종이 즉위하여 문하시중이 되자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하였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게 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의 금지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가 내려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문하시중 상주국 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이 내리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
<商寅>子 成泗(성사)<子 陽曙>
字大卿靖宗朝人有爵未詳 配李氏父茂 ○墓秦平山
자는 대경이고 정종(1033~1046) 때 사람이며 관작은 알 수 없다. 부인은 이무의 따님이다. ○묘소는 진평산에 있다.
=====
<商眞>子 佑鐸(우탁)<子 碩挺>
字樂明官良禮令同正 配李氏父師東 ○墓先兆下
자는 락명이고 관직은 양예령 동정을 지냈다. 부인은 이사동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
<東燁>子 兌一(태일)<子 南赫>
字伯秋官三司副使
配鄭氏父夢弼 墓松岳
자는 백추이고 관직은 삼사부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몽필의 따님이다. 묘소는 송악에 있다.
=====
十七世(33)
<成雨>子 一曙(일서)<子 匡國>
字顯明登第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左文閣大提學亞中大夫輕車都尉臨海侯從朴陽臣使於遼又使於宋爲國柱石 配完山郡夫人崔氏父禮賓主簿頓 ○墓先塋下
자는 현명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첨의부/좌사의대부/좌문각대제학/아중대부/경차도위/임해후를 지냈다. 박양신[1]을 따라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고 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나라의 중요한 인물(柱石)이 되었다. 부인은 완산군 부인 최씨로서 예빈주부를 지낸 최돈[2]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1]박양신(朴良臣); 고려 때 소부소감(少府少監)을 지냈다고 한다.
[2]崔頓; 정종(定宗) 1년(139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에 장원한 최진성(崔進誠)의 증조부(전주이씨, 崔頓->崔贄->崔瀁->崔進誠)
=====
<成洙>子 萬濟(만제)<子 慶雄>
字道元 早卒 配崔氏父左僕射熙 墓先塋
자는 도원이고 젊어서 돌아가셨다. 부인은 좌복야를 지낸 최희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에 있다.
=====
<成泗>子 陽曙(양서)<子 邦寶>
字君平 早卒 配洪氏父生員繼振阿
자는 군평이고 젊어서 돌아가셨다. 부인은 생원 홍계진아의 따님이다.
=====
<佑鐸> 子 碩挺(석정)<子 啓夏>
字奇老都監判官 配朴氏父世煥 墓上同
자는 기로이고 도감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박세환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先兆下).
<佑鐸> 子 碩抽(석추)
配朴氏 墓水原
부인은 박씨이고 묘소는 수원에 있다.
=====
<兌一> 子 南赫(남혁)<子 重鉉>
字叔光官侍中 配李氏父兆年 墓上同
자는 숙광이고 관직은 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이조년[1]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松岳).
[1]이조년(李兆年, 1269(원종 10)∼1343(충혜왕 복위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농서군공(#농17西郡公)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1294년(충렬왕 20)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보직되고, 이어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비서랑(?書郎) 등을 지냈다.
1306년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전(瑞興侯琠)으로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되었는데, 이때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단지 충렬왕을 보필하고 있었으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뒤 귀양에서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은 5년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양왕 고(瀋陽王暠)가 왕위 찬탈을 음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였다.
1325년(충숙왕 12)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관동지방을 안무(按撫)하였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하였다.
이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 이듬해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으며, 이런 엄격한 성품 때문에 꺼림을 받았다.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
十八世(34)
<日曙>子 匡國(광국)<子 宗柏>
字彦忠登第翰林學士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集賢殿大提學 歷事文宗宣宗順宗避遼亂之苦作南京於三角山西岳之南居田退庄以卒 配朴氏父平章事龜壽 ○墓月城山
자는 언충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1]/조정대부/첨의부[2]/좌사의대부[3]/집현전[4]대제학을 지냈다. 문종(1046~1083), 선종(1083~1094), 순종(1083~1083)을 모셨다. 요나라의 남경에서 일어난 난을 피하여 삼각산 서악의 남쪽 시골에 살다가 죽었다. 부인은 박씨로서 평장사를 지낸 박귀수의 따님이다. ○묘소는 월성산에 있다.
[1]翰林院; 국왕이 하달하는 지시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은 관청. 본래 원봉성(元鳳省)이라 하던 것이 뒤에 학사원(學士院)으로 바뀌었다가 현종(1010~1031년) 때 다시 한림원으로 바뀜.
[2]僉議府; 1275년(충렬왕 1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도성(尙書都省)이 합쳐 만들어진 관청. 이 때는 없었음.
[3]左司議大夫;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4품 벼슬. 1116년(예종 11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고쳐 부른 이름. 이 때는 없었음.
[4]集賢殿; 연영전(延英殿)이 1136년(인종 14년)에 집현전(集賢殿)으로 이름이 바뀜. 이 때는 없었음.
=====
<萬濟>子 慶雄(경웅)<子 道意>
字斗柄都觀郞奉命濟活江陵以此贈秩 配洪氏父司徒晋遠墓廣州
자는 두병이고 도관랑을 지냈으며 명령을 받들어 강릉사람들을 보살폈다. 이 공로로 녹봉을 받았다. 부인은 사도를 지낸 홍진원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주에 있다.
=====
<陽曙> 子 邦寶(방보)<子 兌顯>
女眞之亂入金華山以卒 配金氏父振鐸 墓在先兆
여진의 난 때 금화산에 들어가 돌아가셨다. 부인은 김진탁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에 있다.
=====
<碩挺> 子 啓夏(계하)<子 昌海>
字平仲號敬安軒官嘉靖大夫 配尹氏父國憲 墓先兆下
자는 평중이고 호는 경안헌이다. 관직은 가정대부를 지냈다. 부인은 윤국헌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
<南赫> 子 重鉉(중현)<子 德相>
字夏三官司馬 配吳氏父慶起 墓上同
자는 하삼이고 관직은 사마를 지냈다. 부인은 오경기의 따님이다.
=====
十九世(35)
<匡國> 子 宗栢(종백)<子 繡>
字四元號蘭撓翁睿宗朝國學監試後登第三重大匡都僉議府左政丞判典理事老年趣切山水與郭處士輿入金州而居有詩曰江湖一竿翁長釣金城東不量生計薄櫛髮渭陽風 配樂浪郡夫人尹氏父右政丞宣佐 墓上同
자는 사원이고 호는 란요옹이다. 예종(1105~1122) 때 국학감의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삼중대광/도첨의부/좌정승/판전리사를 지내고 늙어서 산수를 즐기는 취미를 끊고 곽처사[1]와 같이 금주로 들어가 살았다. 전해오는 시에서 ‘강호에서 피리를 부는 노인이 긴 낚싯대를 가지고 금성의 동쪽에서 살아가니 생계는 어려워도 머리카락 빗질하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는구나.’하였다. 부인은 낙랑군부인인 윤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윤선좌[2]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月星山).
[1]곽여(郭輿, 1058~1130); 고려 전기의 문신
[2]윤선좌(尹宣佐); 1265(원종 6)∼1343(충혜왕 복위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순수(淳?). 문하시중 관(瓘)의 7대손이다.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288년(충렬왕 1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김해장서기(金海掌書記) 가 되었다가 비서랑(?書郎)·직문한서(直文翰署)에 보임되었다. 충선왕초에 좌정언에 임명되고, 이어 우사보(右思補)·내서사인(內書舍人)·선부의랑(選部議郎)에 전직되었다.
그뒤 전라도지방을 안찰할 때 강직함이 알려져 도율령(都律令)으로 승직, 충숙왕이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듣고 즉위하여 성균좨주에 제수하고 부인(符印)을 관장하게 하였다. 곧 이어 사헌집의가 되어 윤신걸(尹莘傑), 백원항(白元恒)과 더불어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진강하였다.
그뒤 일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집의에 임명되었다.
1322년(충숙왕 9)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이 왕을 폐하고 심왕 고(瀋王暠)를 대신 세우려는 책동을 부리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대간·문한(文翰)들의 서명을 받지 못하게 하여 그 계획을 좌절시켰다. 왕이 원에 머문 지 5년이 되어 재정이 부족하였는데 심왕 고의 일당이 사정을 알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운반을 저지하자, 감찰관 조관(趙琯)을 움직여 운송하도록 하였다. 왕이 귀국하자 판전교(判典校)가 되고, 민부전서(民部典書)로서 한양윤(漢陽尹)을 겸하였으며, 1331년(충혜왕 1) 이윤(伊尹)의 고사를 들어 앞당겨 치사하였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다시 계림윤(鷄林尹)에 임명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에 제배(除拜)되었다가 치사하였다.
1343년 자녀들에게 가업을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화목할 것을 훈계한 뒤 죽었다.
경학에 밝고, 노장(老莊)·형명(刑名)의 학도 연구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당대 표전(表箋)을 많이 지었다.
[비고]곽여와 윤선좌는 동 시대의 사람이 아님.
=====
<慶雄> 子 道意(도의)<子 夢龜>
字子三肅宗朝登第翰林學士太中大夫平章事 配貞敬夫人奇氏父泳墓上同
자는 자삼이고 숙종(1095~1105) 때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태중대부/평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경부인 기씨로서 기영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廣州).
=====
<邦寶> 子 兌顯{賢}(태현)<子 一興>
官都觀郞 配宋氏父碩補
관직은 도관랑을 지냈으며 부인은 송석보의 따님이다.
=====
<啓夏> 子 昌海(창해)<子 成麗>
以孝被徵不就有詩 配韓氏父有迪
효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시가 있다. 부인은 한유적의 따님이다.
=====
<重鉉> 子 德相(덕상)<子 振溟>
字相官甫奉事 配李氏 墓在尙州
자는 상보이고 관직은 봉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씨이고 묘소는 상주에 있다.
=====
二十世(36)
<宗栢> 子 繡(수)<子 以琢>
字文中{仲}號設門齋檢校神龍虎衛上將軍 ○仁宗四年丙午五月李資謙囚十八子之讖欲圖不軌公與卓 俊卿李尙討平之十三年乙酉正月西京守趙匡等叛與諸將攻討之 配平壤郡夫人鄭氏父代言知常 墓上同
자는 문중이고 호는 설문재이다. 검교[1]신룡호위 상장군을 지냈다. ○인종4년 병오(1126)년 5월 이자겸[2]이 18명의 아들들을 가두고 비결서대로 실행하고자 법을 따르지 않아, 공이 탁준경(拓俊京의 오기?)과 이상과 같이 토벌하였다[3]. 13년 을유(1165)[4]년 정월에는 서경(평양)의 수령으로 있던 조광[5] 등의 반란을 여러 장군들과 토벌하였다. 부인은 평양군부인인 정씨로서 대언을 지낸 정지상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月星山).
[1]檢校; 고려 말~조선 초기, 어떤 관청에 정원외에 임시로 벼슬아치의 수를 늘렸을 때나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의 관직 이름 앞에 붙이는 말. 이 때는 없었음.
[2]이자겸의 난 ; 고려사 열전-인종 공효대왕(仁宗 恭孝大王) 갑진2년 편 참고
(1126년 2월 내시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과 공모하여 왕에게 아뢰고,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과 함께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拓俊京;그는 당대의 실권자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인 지원(之元)의 장인 )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섰다. 약속된 날 밤 그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했다. 이를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리를 이끌고 가서 궁성을 포위한 뒤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에 놀란 왕은 두려워하여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했으나,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의논을 겁내었으며 더구나 재종형제간인 이수(李壽)가 반대하여 저지되었다.)
[3]내용이 이상함
[4]을유가 아닌 을묘(1135년)임
[5]조광의 난; 1135년 1월
=====
<道意> 子 夢龜(몽귀) <子 旻精>
字士久 吏部侍郞 配姜氏父啓夏 ○墓慶州
자는 사구이고 이부시랑을 지냈다. 부인은 강계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경주에 있다.
=====
<兌顯> 子 一興(일흥) <子 世煥>
文名檀世累擧不中獎進後學 配李氏父厚榮 ○墓松山
글 솜씨가 세상에 알려져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중앙에 나가지 않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부인은 이후영의 따님이다. 묘소는 송산에 있다.
=====
<昌海> 子 成麗(성려) <子 謜振>
官司馬 配金氏父玩 墓江西
관직은 사마를 지냈으며 부인은 김완의 따님이고 묘소는 강서에 있다.
=====
<德相> 子 振溟(진명)<子 萬雄>
配李氏父賢道 墓上同
부인은 이현도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尙州).
=====
二十一世(37)
<繡> 子 以琢(이탁) <子 瑞天>
字君昇號淸源先生官侍御史毅宗二十四年庚寅鄭仲夫作亂大殺賢良橫屍滿街公奏請除屍奸黨惡之被誣以卒 配貞夫人申氏父評理司事彛 墓水洛洞今開豊郡靑郊
자는 군승이고 호는 청원선생이다. 관직은 시어사로서 의종(1146~1170)24년 경인(1170)년에 정중부(1106~1179)가 난을 일으켜 어질고 착한사람들을 많이 죽여 시체가 길거리에 가득 차자, 공이 시신을 수습하기를 청하였으나 간당들이 무고한 죄를 씌워 죽였다. 부인은 정부인 신씨로서 평리사 신이의 따님이다. 묘소는 수락동인데 지금의 개풍군 청교이다.
=====
<夢龜> 子 旻精(민정) <子 嶠齡>
字淸遠官左軍兵馬使 配金氏父殿 墓楊州
자는 청원이고 관직은 좌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김전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주에 있다.
<夢龜> 子 漢精(한정)
字明遠 配金氏
자는 명원이고 부인은 김씨이다.
=====
<一興> 子 世煥(세환) <子 泳>
字君實官密直司 配李氏父仁植 墓在楊根
자는 군실이고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인식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근에 있다.
=====
<成麗> 子 謜(원) <子 重文,重武>
官司馬 配李氏父成三 墓在江西
관직은 사마를 지냈고 부인은 이성삼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振溟> 子 萬雄(만웅) <子 德河,成河>
字君彦號竹川官執義 配鄭氏父德弘 墓原州
자는 군언이고 호는 죽천이며 관직은 집의를 지냈다. 부인은 정덕홍의 따님이다. 묘소는 원주에 있다.
=====
二十二世(38)
<以琢> 子 瑞天(서천) <子 陽喆>
字汝成志切雪讎無意仕宦明宗八年戊戌與將軍慶大升合謀率家奴討殺鄭仲夫以復其讐後登第朝靖大夫行禮賓卿追封金紫光祿大夫守司空右僕射 配碧珍郡夫人順興安氏父按察使瑛
자는 여성이다. 원수를 갚고자 벼슬에도 뜻을 두지 않았다. 명종 8년 무술(1178)년 장군 경대승과 같이 모의하여 집안의 노비들을 이끌고 정중부를 살해하여 그 원수를 갚았다. 그 후에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행예빈경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수사공 우복야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벽진군부인 순흥안씨로서 안찰사를 지낸 안영의 따님이다.
=====
<旻精> 子 嶠齡(교령) <子 天起>
字士成官按察使 配淸州韓氏父琦竣 墓鹿洞
자는 사성이고 관직은 안찰사에 이르렀다. 부인은 청주한씨로서 한기준의 따님이다. 묘소는 록동에 있다.
=====
<世煥> 子 泳(영) <子 益成>
字明叔官右軍兵馬使 配金氏父伯秋 墓上同
자는 명숙이고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김백추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楊根).
=====
<謜> 子 重文(중문) <子 守仁>
官上將軍
配貞夫人姜氏父咸 墓上同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으로 강함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謜> 子 중무(重武)
配李氏父啓涵 墓上同
부인은 이계함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萬雄> 子 得河(득하) <子 致仁>
字汝宗官右軍兵馬使 配趙氏父弘珍 墓上同
자는 여종이고 관직은 우군명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조홍진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原州).
<萬雄> 子 成河(성하) <子 致賢>
字敬爾 配朴氏父秀夏 墓原州
자는 경이이고 부인은 박수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원주에 있다.
=====
二十三世(39)
<瑞天> 子 陽喆(양철) <子 是秋>
字慶補翰林直提學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平章事 配西平郡夫人密城朴氏父禮門袛侯再華 墓上同
자는 경보이고 한림<원>직<제>학/광정대부/판후덕부사/우문관대제학/평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서평군부인 밀성박씨로서 예문저후를 지낸 박재화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洛洞).
=====
<嶠齡> 子 天紀(천기) <子 命海>
字仁叟官中書注書 配徐氏 墓上同
자는 인수이고 관직은 중서주서를 지냈다. 부인은 서씨이고 묘소는 위와 같다(鹿洞).
=====
<泳> 子 益成(익성) <子 尙慶>
字士汝江陵道按察使 配李氏父湛 墓上同
자는 사여이고 강릉도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楊根).
=====
<重文> 子 守仁(수인) <子 友珏>
字仁彦官監察 配丁氏父應夏 墓光山南岡
자는 인언이고 관직은 감찰을 지냈다. 부인은 정응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산의 남쪽언덕에 있다.
=====
<德河> 子 致仁(치인) <子 聲玉>
字美哉官上將軍 配金氏父洪 墓先塋左岡
자는 미재이고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김홍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좌측언덕에 있다.
=====
<成夏> 子 致賢(치현) <子 鳴玉>
字信哉 配鄭氏父仲擧 墓上同
자는 신재이고 부인은 정중거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原州).
=====
二十四世(40)
<陽喆> 子 是秋(시추) <子 鎭國, 定國>
字孟雲早入國學登第修文殿太學士判典理司事世子師致仕 配義城郡夫人金氏父三司事㺶 墓上同
자는 맹운이고 일찍이 국학에 입학하였다. 과거에 합격하여 수문전태학사/판전리사사/세자사(세자의 스승)에 벼슬이 이르렀다. 부인은 의성군부인 김씨로서 삼사사를 지낸 김두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洛洞).
=====
<天紀> 자 命海(명해) <子 重有, 德有>
字伯三官司徒 配李氏父琇 墓上同左岡
자는 백삼이고 관직은 사도를 지냈다. 부인은 이수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데(鹿洞) 좌측 언덕이다.
=====
<益成> 子 尙慶(상경) <子 命虯>
字達甫官武科主簿 配李氏父義行 墓江西
자는 달보이고 관직은 무과에 합격하여 주부를 지냈다. 부인은 이의행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益成> 子 重慶(중경)
字達道 配金氏父相觀
자는 달도이다. 부인은 김상관의 따님이다.
=====
<守仁> 子 友珏(우각) <子 命秋>
字德文官太保 配金氏父應秋 墓上同
자는 덕문이고 관직은 태보를 지냈다. 부인은 김응추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光山南岡).
=====
<致仁> 子 聲玉(성옥) <子 重鎰, 大鎰>
字自寧官中郞將 配光山金氏父潤 墓上同
자는 자녕이고 관직은 중랑장을 자냈다. 부인은 광산김씨인 김윤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先山左岡).
=====
<治賢> 子 鳴玉(명옥)<子 大鎰>
字好徵 配崔氏父世重
자는 호징이고 부인은 최세중의 따님이다.
=====
二十五世(41)
<是秋> 子 鎭國(진국) <子 奎詳>
字士信號鷲嶺先生登第重大匡禮部尙書贈銀靑光祿大夫 配淸州郡夫人鄭氏父密直提學休 墓上同
자는 사신이고 호는 취령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중대광/예부상서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를 증직받았다. 부인은 청주군부인 정씨로서 밀직제학을 지낸 정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洛洞).
=====
<是秋> 子 定國(정국) <子 奎瑞>
字子安號孤軒官密直忠宣王五年己卯胡元統一中國國事不安王與叔昌元妣會于金文衍之家引見諸縉紳曰卿等察時事否公拜而對曰宋朝已亡元兵大肆國憂已長矣以此憤發而卒
자는 자안이고 호는 고헌이다. 관직은 밀직[1]을 지냈다. 충선왕(1308~1312) 5년 기묘(1279)년에[2] 원이 중국을 통일하여 나랏일이 불안해 지자 왕이 숙창원비와 김문연[3]의 집에서 회동을 하여 공을 만나보고 여러 신하?(縉紳)들에게 말하기를 ‘경 등이 살펴볼 때 어떠한가?’하자 공이 절하고 대답하기를 ‘송나라 조정은 이미 망하고 원나라 병사가 아주 방자하여 나라가 근심하고 있는 것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하였다. 이로서 분통을 터트리며 죽었다.
[1]密直; 1275년(충렬왕 1년)에 추밀원사를 고쳐 부른 이름.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불렸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또다시 밀직사사로 고쳐짐. 따라서 1362년 이전에는 밀직이라는 벼슬이 없었음.
[2]충선왕 때 기묘년은 없음
[3]김문연(金文衍, ?∼1314(충숙왕 1); 고려의 척신. 본관은 언양.
할아버지는 취려(就礪)이며,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년(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宋邦英)·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이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
<命海> 子 重有(중유) <子 達曙>
字極重 集賢殿副提學 配高氏父翰林漢齊 墓祔先塋
자는 극중이고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한림을 지낸 고한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에 합사되었다.
=====
<明海> 子 德有(덕유) <子 彦誠>
字君益官監務 配高氏父華齊 墓先兆南岡
자는 군익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고화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남쪽언덕에 있다.
=====
<尙慶> 子 命虯(명규) <子 景伯>
字日曙官監務 配金氏父重伯 墓上同
자는 일서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김중백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友珏> 子 命秋(명추) <子 時元>
字兌巨○時宋亡元興恥奉年號曰竹綠松靑節士可去避居山谷以卒 配位未詳 墓上同
자는 태거이다. ○이때 송이 망하고 원이 흥하자 연호를 받드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말하기를 ‘대나무는 푸르고 소나무는 청청하니 절개 있는 선비는 떠나야 하는구나.’하며 산골짜기에 피하여 살다가 죽었다. 배위는 미상이고 묘소는 위와 같다(光山南岡).
[비고]송(남송)의 멸망이 1279년이므로 대략 1270년대~1280년대 임
=====
<聲玉> 子 重鎰(중일) <子 尙秋>
字輝元官門下侍中 配密城朴氏父仲燁 墓楊根
자는 휘원이고 관직은 문하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밀성박씨인 박중엽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근에 있다.
=====
<聲玉> 子 大鎰(대일) <子 慶三>---누락
면주없음
=====
二十六世(42)
<鎭國> 子 奎祥(규상) <子 道浹>
字士甫號竹塢先生登第翰林學士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大提學 忠宣王朝時事不平謝仕還鄕 配貞烈夫人安東金氏父右政丞文衍
자는 사보이고 호는 죽오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조정대부/첨의부/좌사의대부/보문각대제학을 지냈고, 충선왕(1308~1312)때 나라가 평온하지 못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정렬부인 안동김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김문연[1]의 따님이다.
[1]김문연(金文衍); ?∼1314(충숙왕 1). 고려의 척신. 본관은 언양.
할아버지는 취려(就礪)이며, 아버지는 양감(良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었으나 환속하였다. 여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회로 30세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이 되었고, 그뒤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에 이르렀다.
1305년(충렬왕 31)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송방영(宋邦英)·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충선 두 왕의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책동하고, 충선왕비 보탑실련공주(寶塔實憐公主)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개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중서성에 그 내용을 고하였다.
또한, 왕에게 환국할 것을 종용했으나, 공주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에 처해졌다.
1307년에 충선왕의 명으로 고려에 돌아와 국정쇄신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새로이 80여인의 관리를 임명하여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공이 컸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재즉위한 뒤 첨의중호(僉議中護)가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신무장군 진변만호(信武將軍鎭邊萬戶)에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진변만호부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이 더해졌으며 원나라에 다녀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영신(榮信)이다.
=====
<定國> 子 奎瑞(규서) <子 道洽>
官閣老時宋亡恥奉胡元年號{元國年號歎曰竹祿松靑節士可去}棄官還鄕 配洪氏 墓水原
벼슬은 각로[1]에 이르렀다. 이 때 송나라가 망하자 부끄럽게도 오랑캐인 원나라의 연호를 받들자{원나라의 연호를 받들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나무는 푸르고 소나무는 청청하니 절개있는 선비는 떠나야 한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홍씨이다. 묘소는 수원에 있다.
[1]閣老; 일종의 정승급 벼슬?
[비고]우각의 자 명추(命秋)의 면주와 비슷함.
=====
<重有> 子 達曙(달서) <子 汝虎>
字瑞爾號隱岩康宗朝登第知制誥翰林學士 配淑人平壤趙氏父侍郞潘 墓河陽
자는 서이이고 호는 은암이다. 강종(1211~1213) 때 과거에 합격하여 지제고/한림학사를 지냈다. 부인은 숙인 평양조씨로서 시랑을 지낸 조반의 따님이다. 묘소는 하양에 있다.
=====
<德有> 子 彦誠(언성) <子 鉉祚>
字仲叔老爵 配李氏父植 墓忠州
자는 중숙으로 노작을 받았다. 부인은 이식의 따님이다. 묘소는 충주에 있다.
=====
<命虯> 子 景白(경백) <子 文淵>
配丁氏 墓水原
부인은 정씨이고 묘소는 수원에 있다.
=====
<命秋> 子 時元(시원) <子 三擧, 重擧>
字自鳴官監務 配平山申氏父欽 墓晉州
자는 자명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평산신씨로서 신흠의 따님이다. 묘소는 진주에 있다.
=====
<重鎰> 子 尙秋(상추) <子 在行>
忠烈王朝奉使如元以直言忤旨謫于碧潼以卒 配完山李氏父禮敬 墓松岳
충렬왕(1274~1308) 때 사신으로서 원나라에 갔다가 직언을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벽동으로 유배를 당하여 별세하셨다. 부인은 완산이씨로서 이례경의 따님이다. 묘소는 송악에 있다.
=====
<大鎰> 子 慶三(경삼) <子 相恂>
字子三 配李氏
자는 자삼이고 부인은 이씨이다.
=====
<大鎰> 子 榮三(영삼) 无后 --누락
字華敬 配朴氏
자는 화경이고 부인은 박씨이다.
=====
二十七世(43)
<奎祥> 子 道浹(도협) <子 湯雨>
字聖巨號白巖先生登第朝靖大夫禮賓卿贈金紫光祿大夫特進尙書省左僕射 配貞烈夫人南陽洪氏父平章事球 墓先塋下
자는 성거이고 호는 백암선생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예빈경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를 증직받았고 상서성 좌복야로 특진하였다. 부인은 정렬부인 남양홍씨로서 평장사를 지낸 홍구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
<奎瑞> 子 道洽(도흡) <子 聖雨>
字邦輔官監務 配朴氏父重茂 墓上同
자는 방보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박중무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水原).
=====
<奎瑞> 子 道潤(도윤)
配吳氏父契周 墓上同
부인은 오계주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水原).
=====
<達曙> 子 汝虎(여호) <子 致三>
字敬叟重大匡吏部尙書 配貞夫人晉陽鄭氏父侍中顯 墓福州
자는 경수이고 중대광/이부상서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진양정씨로서 시중을 지낸 정현의 따님이다. 묘소는 복주에 있다.
=====
<彦誠> 子 鉉祚(현조) <子 元禮>
字自善官左軍兵馬使 配申氏父相觀 墓上同
자는 자선이고 관직은 좌군명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신상관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忠州).
=====
<景白> 子 文淵(문연) <子 處賢>
官上將軍 配李氏父僉使智相 墓上同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고 부인은 첨사를 지낸 이지상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水原).
=====
<時元> 子 三擧(삼거) <子 世彰>
字樂卿 累擧不中 配樂安金氏父監務粹澄 墓水原
자는 낙경이다. 여러번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낙안김씨로서 감무를 지낸 김수징의 따님이다. 묘소는 수원에 있다.
=====
<時元> 子 重擧(중거) <子 世明,世煌>
字伯擧官密直使 配鄭氏父日瑞 墓上同
자는 백거이고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정일서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晉州).
=====
<尙秋> 子 在行(재행) <子 鼎夏,鼎禹>
無意仕宦遯世以卒 配南陽洪氏 墓上同
벼슬에 뜻이 없어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별세하셨다. 부인은 남양홍씨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松岳).
=====
<慶三> 子 相恂(상순) <子 成八>
字恂用官僉正高麗朝大有功終不登用故退居田里卒 配洪氏父尙翰 墓楊根
자는 순용이고 관직은 첨정을 지냈으며, 고려조정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끝내 등용되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가 별세하셨다. 부인은 홍상한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근에 있다.
=====
二十八世(44)
<道浹> 子 湯雨(탕우) <子 萬瑞>
字禱霖登第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判典理司事贈銀靑光祿大夫特進上柱國 配彦陽郡夫人金氏父直提學屹 墓上同
자는 도림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삼중대광/도첨의 좌정승/판전리사사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를 증직받았으며 상주국[1]으로 특진하였다. 부인은 언양군 부인 김씨로 직제학을 지낸 김흘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先塋下).
[1]주국(柱國); 고려 시대에, 훈위(勳位)의 둘째 등급. 문종 때 종이품으로 정하였다가 충렬왕(1275~1308) 때 훈제(勳制)를 혁파하면서 없앴다.
=====
<道洽> 子 聖雨(성우) <子 萬詳,萬裕>
官密直使 配姜氏父景三 墓上同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강경삼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
<汝虎> 子 致三(치삼) <子 鎭兌,錫兌>
字命甫僉議府左司議 配淑夫人光山金氏父潤基 墓福州
자는 명보이고 첨의부 좌사의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 광산김씨로서 김윤기의 따님이다. 묘소는 복주에 있다.
=====
<鉉祚> 子 元禮(원례) <子 世綱>
字允而以文名筮仕 配柳氏 墓月城山先塋下
자는 윤이이고 글로서 이름이 알려져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하였다. 부인은 류씨이다. 묘소는 월성산의 선영아래에 있다.
=====
<文淵> 子 處賢(처현) <子 守澤>
官左軍兵馬使 配崔氏父仁齊 墓先山南駕洛洞
관직은 좌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최인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산의 남쪽 가락동에 있다.
=====
<三擧> 子 世彰(세창) <子 兌豪>
字汝煇官都觀郞 配申氏父監務珹 墓上同
자는 여휘이고 관직은 도관랑을 지냈다. 부인은 신씨로서 감무를 지낸 신성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水原).
=====
<重擧> 子 世明(세명) <子 兌起>
官奉禮 配慶州李氏父天興 墓吳山
관직은 봉례를 지냈다. 부인은 경주이씨로서 이천흥의 따님이다. 묘소는 오산에 있다.
=====
<重擧> 子 世煌(세황) <子 兌精,兌憲>
字天澄江陵道按察使 配安東金氏父淵宅 墓先山下
자는 천징이고 강릉도 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안동김씨로서 김연택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산 아래에 있다.
=====
<在行> 子 鼎夏(정하)
配李氏父震益 墓在上同
부인은 이진익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松岳).
=====
<在行> 子 鼎禹(정우) <子 淸輿>
因朝野之亂入居智異山以卒
조야의 난으로 인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살다가 별세하셨다.
=====
<相恂> 子 成八(성팔) <子 處海>
字益煇司馬 配李氏父岡 墓上同
자는 익휘이고 사마를 지냈다. 부인은 이강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楊根).
=====
二十九世(45)
<湯雨> 子 萬瑞(만서) <子 師孟>
字重彬登第同知密直司事右司議大夫直提學 配貞夫人文化柳氏父中郞將濯 墓泗川
자는 중빈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동지밀직사/우사의대부/직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문화류씨로서 중랑장을 지낸 류탁[2]의 따님이다. 묘소는 사천에 있다.
[1]密直司使; 1275년(충렬왕 1년)에 추밀원사를 고쳐 부른 이름.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불렸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또다시 밀직사사로 고쳐짐. 따라서 유탁의 이전에는 밀직사라는 벼슬이 없었음.
[2]유탁(柳濯); 1311(충선왕 3)∼1371(공민왕 20). 고려의 무신.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춘경(春卿).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 청신(淸臣)의 손자이며, 판밀직사(判密直事) 유기(攸基)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귀국,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 된 뒤 고흥군(高興君)에 봉하여졌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원나라에 의해서 합포만호(合浦萬戶)가 되었다.
1345년(충목왕 1) 밀직부사가 되었고, 1348년 평리(評理)로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9년(충정왕 1)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가 되었고, 이듬해 전라도·양광도 도순문사(全羅道楊廣道都巡問使)를 겸하여 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추성양절익조공신(推誠亮節翊祚功臣)이 되고, 1351년 찬성사가 되었다. 공민왕초에는 전라도만호로 왜구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장생포 長生浦〉 등의 곡(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찬성사 판삼사사(贊成事判三司事)를 역임하고, 1353년(공민왕 2)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좌정승에 올라 고흥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장사성(張士誠)의 토벌을 위하여 원나라에서 징병을 하자 염제신(廉悌臣)과 함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356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으나 곧 유배되었다. 다시 기용되어 1360년 경기병마도통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고 고흥후(高興侯)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남행(南幸)하게 되자 도솔원(兜率院: 坡州)까지 호종하고 경상도도순문사 겸 병마사가 되었다.
1362년 좌정승에 올라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西北面紅賊防禦諸軍都統使)가 되었고, 이듬해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진압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이해에 다시 좌정승·우정승을 거쳐 1365년에는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을 역임하였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죽은 뒤 추충병의동덕보리익조공신(推忠秉義同德輔理翊祚功臣)에 올랐다.
1369년 안극인(安克仁)·정사도(鄭思道)와 함께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마암(馬巖)에 크게 신축하는 데 대하여 극력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시중에서 파면되었다.
왕과 신돈(辛旽)이 죽이려 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간쟁으로 석방되었다.
1371년 신돈이 복주(伏誅)되자 그의 일당으로 노국대장공주의 장사(葬事)에 박례(薄禮)를 주장한 것이 헌사(憲司)에 의하여 탄핵을 받아 청교역(靑郊驛)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조선개국 후 보국고흥백(輔國高興伯)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
<聖雨> 子 萬祥(만상) <子 麗精>
忠穆王朝以門下執事撰史記十餘篇行于世 配朴氏父知制誥煥 墓楊洲
충목왕(1344~1348)때 문하집사로서 사기 10여편을 편찬하여 세상에 전해진다. 부인은 박씨로서 지제고를 지낸 박환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주에 있다.
=====
<聖雨> 子 萬裕(만유)
字國瑞 配申氏
자는 국서이고 부인은 신씨이다.
=====
<致三> 子 鎭兌(진태) <子 秀垕>
字伯秋號石村翰林學士知制誥 配淑夫人河氏父提學繼梁 墓上同
자는 백추이고 호는 석촌이며 한림학사/지제고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으로 제학을 지낸 하계량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福州).
=====
<致三> 子 錫兌(석태)
字元甫 配奇氏父監務玉 墓楊州
자는 원보이고 부인은 기씨로서 감무를 지낸 기옥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주에 있다.
=====
<元禮> 子 世綱(세강) <子 首行>
字學卿官密直司事 配李氏父道徵 墓上同
자는 학경이고 관직은 밀직사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도징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月城山先塋下).
=====
<處賢> 子 守澤(수택) <子 世徵>
成均進士 配宜人申氏父珹
성균진사를 지냈고 부인은 의인으로 신성의 따님이다.
=====
<處賢> 子 鎭澤(진택)
配吳氏
부인은 오씨이다.
=====
<世彰> 子 兌豪(태호) <子 德禧>
字爾叟官密直使 配平壤趙氏父潢 墓上同
자는 이수이고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평양조씨이고 조황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水原).
=====
<世明> 子 兌起(태기)<子 麟禧>
字明仲壽職同知中樞 配晋州姜氏父司直濂
자는 명중이고 수직[1]으로 동지중추를 지냈다. 부인은 진주강씨로서 사직 강렴의 따님이다.
[1]壽職; 조선 때 매년 정월에 80살 이상의 관원과 90살 이상의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
=====
<世煌> 子 兌精(태정) <子 鳳輝>
字靈叔官右軍兵馬使 配慶州李氏父西都監判官令同正春植 墓先塋下
자는 영숙이고 관직은 우군 병마를 지냈다. 부인은 경주이씨로서 서도감 판관령의 동정을 지낸 이춘식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
<世煌> 子 兌憲(태헌)
字雲叔無意仕宦退居深山■逸平生與子姪等務治産財至巨萬 配全義李氏父東燁 墓塋山下
자는 운숙이고 벼슬에 뜻이 없어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속에 살면서 열심히 평생을 아들과 조카들과 살면서 돈벌이를 하여 재산을 모아 거부(巨富)가 되었다. 부인은 전의이씨로서 이동엽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
<鼎禹> 子 淸輿(청여) <子 虯瑞, 麟瑞>
字玄叔官門下執事 配安氏 墓帶方山
자는 현숙이고 관직은 문하집사를 지냈다. 부인은 안씨이다. 묘소는 대방산에 있다.
=====
<成八> 子 處海(처해) <子 永昌>
字洋叔 配安氏父廉 墓塋山下
자는 양숙이며 부인은 안렴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
<成八> 子 處河(처하)
字浪叔 配申氏父欽 墓先塋下
자는 랑숙이고 부인은 신흠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
三十世(46)
<萬瑞> 子 師孟(사맹) <子 相宙>
字汝欽登第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大提學忠烈朝元招東國諸賢擧對策以還 配貞烈夫人廉氏父左政丞齊賢 墓先塋下
자는 여흠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광정대부/도첨의중찬/수문전대제학을 지냈다. 충렬왕(1274~1308)때 원나라에서 동국제현을 초대하여 과거에 응시하라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정렬부인 염씨로서 좌정승을 지낸 염제현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
<萬詳> 子 麗精(여정) <子 益遜. 龜年>
官知制誥 忠烈王朝赴元應擧對策以還値紅巾賊所害南居福州 墓楊州 配未詳
관직은 지제고를 지냈다. 충렬왕(1274~1308)때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여 대책을 마련해주고 돌아왔다. 홍건적의 피해를 당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복주에서 살았다. 묘소는 양주에 있다. 부인은 알지 못한다.
[비고]만서의 자 사맹의 면주와 유사함
=====
<鎭兌> 子 秀垕(수후) <子 元玉>
字則禹 忠烈王朝金紫光祿大夫金城君諡文正公 配貞敬夫人呂氏父副提學齊 墓江西
자는 측우이고 충렬왕(1274~1308)때 금자광록대부를 지내고 금성군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려씨로서 부제학을 지낸 려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世綱> 子 首行(수행) <子 在道>
字德元官同知密直 配金氏父一齊 墓平山
자는 덕원이고 관직은 동지밀직을 지냈다. 부인은 김일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평산에 있다.
=====
<世綱> 子 元行(원행) <子 孝錫>
字德叟官禮文袛候 配淑夫人金氏父浣 墓上同
자는 덕수이고 관직은 예문저후를 지냈다. 부인은 숙부인으로 김완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月城山先塋下).
=====
<守澤> 子 世徵(세징) <子 夏成>
官右軍兵馬使 配朴氏父枝華 墓上同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박지화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先山南駕洛洞).
=====
<兌豪> 子 德禧(덕희) <子 遇秋>
字聖善奉常大夫三司副使早卒 配南陽洪氏父暎 墓上同
자는 성선이고 봉상대부와 삼사부사를 지내고 일찍 별세하였다. 부인은 남양홍씨로서 홍영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
<兌起> 子 麟輝(인휘) <子 性弘>
字聖源官存撫使 配金氏父直 墓江陵
자는 성원이고 관직은 존무사를 지냈다. 부인은 김직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릉에 있다.
=====
<兌精> 子 鳳輝(봉휘) <子 性大>
字雲梯諫議大夫 配南陽洪氏父司空瑞益 墓江界
자는 운제이고 간의대부를 지냈다. 부인은 남양홍씨로서 사공을 지낸 홍서익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계에 있다.
=====
<淸汝> 子 虯瑞(규서) <子 挺寶>
直言忤旨謫海以卒 配尹氏父舜擧 墓上同
직언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바닷가로 귀양가서 별세하셨다. 무인은 윤순거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帶方山).
=====
<淸汝> 子 麟瑞(인서) <子 挺球, 挺琇>
時紅巾賊累侵國內不安公受 恭愍王之命護內宮奔福州今安東
이 때에 홍건적이 여러 번 침입하여 나라 안이 불안하자 공이 공민왕의 명을 받아 내궁을 지키다가 복주(지금의 안동)로 달아났다.
=====
<處海> 子 永昌(영창) <子 熙成>
字成玉 配韓氏父希鍵 墓楊根
자는 성옥이며 부인은 한희건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근에 있다.
=====
三十一世(47)
<師孟> 子 相宙(상주) <子 邦直, 龍直>
字大院號孤峯先生仕至閣老忠烈王元年乙亥王命公使一國禁白衣稱旨四年戊寅又命令國內剃頭服元衣冠公極諫以此忤旨 配通義郡夫人羅氏父平章事文玉 墓松岳山
자는 대원이고 호는 고봉선생이다. 벼슬은 각로에 이르렀다. 충렬왕(1274~1308)원년 을해(1275)년에 왕이 공에게 나라에서 흰옷을 입는 것을 금하게 하라고 명하였고, 4년 무인(1278)년에 또 공에게 나라 안에 머리를 깎게하고(변발[1]) 복장을 원나라와 같은 의관으로 하라고 명하자, 공이 극력 간언하였으나 이로서 왕의 미움을 샀다. 부인은 통의군부인 라씨로서 평장사[2]를 지낸 라문옥의 따님이다. 묘소는 송악산에 있다.
[1]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당시 원을 다녀올 때 변발호복(辯髮胡服)으로 입국하여, 즉위 후에는 영(令)을 내려 모두 몽고의 의복과 개체변발(開剃辯髮)을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지배계급인 관료층과 출세를 원하는 일부 지식층만이 호응하였을 뿐 일반 국민 모두가 따르지는 않았다.
[2]平章事; 성종(982~907년) 때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두었던 것을 1275년(충렬왕 1년)에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고쳤고 1298년(충렬왕 24년)에 폐지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년)에 다시 내오면서 찬성사(贊成事)라 하였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평장사(平章事)로 바뀜. 따라서 1275년부터 1308년 사이에는 평장사란 벼슬은 없었음.
=====
<麗精> 子 益遜(익손)
官閣老
관직은 각로를 지냈다.
=====
<麗精> 子 龜年(귀년) <子 修德>
字君實官密直 配朴氏父重燁 墓江西
자는 군실이고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박중엽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秀垕> 子 元玉(원옥) <子 夏器>
字仁元官版圖摠郞禮賓卿 配貞夫人李氏 墓坡州
자는 인원이고 관직은 판도총랑/예빈경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이씨이다. 묘소는 파주에 있다.
=====
<首行> 子 在道(재도) <子 元錫>
字大而官上將軍 配郭氏父世迪 墓卒本
자는 대이이고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곽세적의 따님이다. 묘소는 졸본에 있다.
=====
<元行> 子 孝錫(효석) <子 奇孫>
堂後官 配尹氏父邦 墓錦山
당후관을 지냈다. 부인은 윤방의 따님이다. 묘소는 금산에 있다.
=====
<世徵> 子 夏成(하성) <子 允秋>
字成實官監務 配高氏父齊天 墓吳山
자는 성실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고제천의 따님이다. 묘소는 오산에 있다.
=====
<德禧> 子 遇秋(우추) <子 東寶>
字汝三官左獻納 配李氏父世迪 墓廣州
자는 여삼이고 관직은 좌헌납을 지냈다. 부인은 이세적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주에 있다.
=====
<麟輝> 子 性弘(성홍) <子 道彬>
官別將同正 配李氏父哉仁 墓端川
관직은 별장동정을 지냈다. 부인은 이재인의 따님이다. 묘소는 단천에 있다.
=====
<鳳輝> 子 性大(성대) <子 信彬>
字大叔行廊都監判官 配慶州李氏父齊 墓鰲山大寺洞
자는 대숙이고 행랑도감 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경주이씨로서 이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오산 대사동에 있다.
=====
<虯瑞> 子 挺寶(정보) <子 文孝>
官執義 配安東金氏父主簿之鏡 墓江西
관직은 집의를 지냈다. 부인은 안동김씨로서 주부를 지낸 김지경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麟瑞> 子 挺球(정구) <子 仁孝>
字元甫 配靑松沈氏父徵 墓江陵
자는 원보이고 부인은 청송심씨로서 심징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릉에 있다.
=====
<麟瑞> 子 挺琇(정수)
配平康蔡氏 墓江陵
부인은 평강채씨이다. 묘소는 강릉에 있다.
=====
<永昌> 子 熙成(희성) <子 洙亮>
字熙之 配沈氏父景夏 墓江西
자는 희지이고 부인은 심경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三十二世(48)
<相宙> 子 邦直(방직) <子 益銛>
字忠甫重大匡吏部尙書 忠肅王賞功賜丹券書曰同知密直翰林宗正金先生云追封金紫光祿大夫特進上柱國殿宇門下書省丞相駙馬仍給田丁及奴婢 配貞夫人張氏父右政丞源 墓太白山
자는 충보이고 중대광/이부상서를 지냈다. 충숙왕(1313~1330, 1332~1339)이 공로를 포창하여준 비단으로 된 책에 ‘동지밀직 한림종정인 김선생’이라 되어있다. 금자광록대부[1]에 추봉하고, 상주국과 전우문중서성 승상과 부마로 특진시켰고, 이에 더하여 논밭과 장정과 노비를 주었다. 부인은 정부인 장씨로서 우정승을 지낸 장원의 따님이다. 묘소는 태백산에 있다.
[1]金紫光祿大夫; 문종(1047~1083년)때 제정되어 1275년(충렬왕 1년)에 폐지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다시 설치되고 종1품의 윗자리로 올랐다가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폐지됨. 따라서 1275년부터 1356년 사이에는 없었음.
=====
<相宙> 子 龍直(용직) <有子 諱管云>
初諱龍角官至舍人
처음의 이름은 룡각이었으며 관직은 사인에 이르렀다.
=====
<龜年> 子 修德(수덕) <子 自玉>
官右軍兵馬使 配郭氏父世迪 墓上同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곽세적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元玉> 子 夏器(하기) <子 再伯>
字德三號禮成齊 忠肅朝登第僉議府左司議寶文閣知制誥 配夫人洪氏父提學永振 墓長湍雙封
자는 덕삼이고 호는 예성재이다. 충숙왕(1313~1330, 1332~1339)때 과거에 올라 첨의부/좌사의/보문각/지제고를 지냈다. 부인은 제학을 지낸 홍영진의 따님이다. 묘소는 장단에 쌍봉으로 되어있다.
=====
<在道> 子 元錫(원석) <子 禹鼎>
字君重早卒 配申氏父英 墓上同
자는 군중이고 일찍 별세하셨다. 부인은 신영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平山).
=====
<孝錫> 子 奇孫(기손) <子 汝龍, 汝鳳, 汝麟, 汝龜, 汝虎, 兌郁>
諸陵署令 配洪氏父德球 墓鰲山
제릉서령을 지냈다. 부인은 홍덕구의 따님이다. 묘소는 오산에 있다.
=====
<夏成> 子 允秋(윤추) <子 德淵>
字時景官都管郞 配梁氏父監務起河 墓上同
자는 시경이고 관직은 도관랑을 지냈다. 부인은 양씨로서 감무를 지낸 양기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吳山).
=====
<遇秋> 子 東寶(동보) <子 執一>
字雲卿官門下侍中 配海州吳氏父元翔 墓上同
자는 운경이고 관직은 문하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해주오씨로서 오원상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
<性弘> 子 道彬(도빈) <子 以潝>
字景益官司馬 配李氏 墓上同
자는 경익이고 관직은 사마를 지냈고 부인은 이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端川).
=====
<性大> 子 信彬(신빈) <子 以濂, 以學>
字士潤奉翊大夫禮儀判書 配光山金氏父漢球 墓上同
자는 사윤이고 봉익대부/예의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광산김씨로서 김한구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大寺洞).
=====
<性大> 子 義彬(의빈) <子 濤>
字士明無意仕宦隱居智異山 配安東金氏 墓先塋南岡
자는 사명이고 벼슬에 뜻이 없어 지리산에 숨어 살았다. 부인는 안동김씨이다. 묘소는 선영의 남쪽 언덕에 있다.
=====
<挺寶> 子 文孝(문효) <子 世綱>
字學而官左軍兵馬使 配晉州姜氏父以濂 墓上同
자는 학이이고 관직은 좌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진주강씨로서 강이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挺球> 子 仁孝(인효) <子 得重>
字自安 配李氏父啓漢 墓上同
자는 자안이고 부인은 이계한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陵).
=====
<熙成> 子 洙亮(수량) <子 敬文>
字一叟 配李氏父得華 墓上同
자는 일수이고 부인은 이득화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三十三世(49)
<邦直> 子 익섬(益銛) <子 柱國>
字守儀官上將軍 配貞夫人平山申氏父典理判書諿 墓先塋下
자는 수의이며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평산신씨로서 전리판서를 지낸 신집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
=====
<龍直> 有子 諱管云(관)
면주없음
=====
<修德> 子 自玉(자옥) <子 有燦, 有煥, 有煜, 有潤>
字齊光官引儀副事 配韓氏父師相 墓上同
자는 제광이고 관직은 인의부사를 지냈다. 부인은 한사상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夏器> 子 再佰(재백) <子 龜瑞, 龍瑞, 麒瑞, 麟瑞>
字遇秋西都判官令同正奉常大夫判三司府使 配夫人姜氏 墓長湍
자는 우추이고 서도판관령동정/봉상대부/판삼사부사를 지냈으며 부인은 강씨이다. 묘소는 장단에 있다.
=====
<元錫> 子 禹鼎(우정) <子 得泂,得源>
字德享官監務 配張氏父世傑 墓江陵
자는 덕향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장세걸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릉에 있다.
=====
<奇孫> 子 汝龍(여룡) <子 㺶>
字自仲官全羅道按察使 配吳氏父綱 墓上同
자는 자중이고 관직은 전라도안찰사를 지냈다. 부인은 오강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
=====
<奇孫> 子 汝鳳(여봉) <子 琇>
官都評議事 配宋氏父文玉
관직은 도평의사를 지냈다. 부인은 송씨로서 송문옥의 따님이다.
=====
<奇孫> 子 汝麟(여린)
開城判官 配白氏父元素 墓上同
개성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백원소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
=====
<奇孫> 子 汝龜(여귀) <子 王貞>
官良醞令同正 配白氏父以素 墓上同
관직은 량온령[1]동정[2]을 지냈다. 부인은 백이소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
[1]司醞署; 궁궐 안에서 쓰는 술을 만들고 보관하는 일을 맡은 관청.
[2]同正; 실제 근무하는 벼슬이 아닌 정원외에 주는 명예직
=====
<奇孫> 子 汝虎(여호)
字荊玉無意仕宦隱居智異山學道垂仙 配慶州鄭氏父彦弼
자는 형옥이고 벼슬에 뜻이 없어 지리산에서 은거하며 도학과 도교를 배웠다. 부인은 경주정씨로서 정언필의 따님이다.
<奇孫> 子 兌郁(태욱)
字熙敬累擧不中 配尙州周氏父信復
자는 희경이고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상주주씨로서 주신복의 따님이다.
=====
<允秋> 子 得淵(득연) <子 義明>
字明甫官司馬 配楊氏父大根 墓廣州
자는 명보이고 관직은 사마를 지냈다. 부인은 양대근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주에 있다.
=====
<東寶> 子 執一(집일) <子 義哲>
字士一官按廉使 配權氏父重玉
자는 사일이고 관직은 안렴사를 지냈다. 부인은 권중옥의 따님이다.
=====
<道彬> 子 以潝(이흡) <子 國瑞>
官典理判書 配順興安氏 墓上同
관직은 전리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순흥안씨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端川).
=====
<信彬> 子 以濂(이렴) <子 華玉>
字德卿通訓大夫東部參奉{軍} 配金氏父慶秋 墓先塋下
자는 덕경이고 통훈대부 동부참봉{군}을 지냈다. 부인은 김경추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 아래에 있다(鰲山大寺洞).
[비고]벼슬이 참봉이면 통훈대부의 품계를 받을 수 없음
=====
<信彬> 子 以㶅(이학) <子 敬玉, 敬臣, 敬輔>
면주없음
=====
<義彬> 子 濤(도) --가필
字景源 高麗朝拜知密直事金城君 配貞敬夫人欽城李氏
자는 경원이고 고려조정에서 지밀직사와 금성군에 임명되었다. 부인은 정경부인으로 흠성이씨이다.
=====
<文孝> 子 世綱(세강)
官奉翊大夫禮儀判書 配洪氏父若河 墓上同
관직은 봉익대부로서 예의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홍약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文孝> 子 得重(득중) <子 漢成,旻成>
字益補 配高氏父濟漢 墓先塋北岡
자는 익보이고 부인은 고제한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북쪽 언덕에 있다.
=====
<洙亮> 子 敬文(경문) <子 宇賢, 宙賢>
字大榮 配申氏父憲章 墓光州
자는 대영이고 부인은 신헌장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주에 있다.
=====
三十四世(50)
<益銛> 子 주국(柱國) <有子三人曰 晢卿牧卿益卿云>
字汝極登第朝靖大夫僉議府左司議大夫寶文閣大提學知制誥 贈銀靑光祿大夫特進尙書省左僕射 配海州郡夫人吳氏父左政丞達周 墓江西
자는 여극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첨의부/좌사의대부/보문각대제학/지제고를 지냈고 은청광록대부에 증직되었으며 상서성 좌복야에 특진하였다. 부이는 해주군부인 오씨로서 좌정승을 지낸 오달주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自玉> 子 有燦(유찬) <子 世傑>
字燦叔 配李氏父淑
자는 찬숙이고 부인은 이숙의 따님이다.
=====
<自玉> 子 有煥(유환) <子 之瑞>
字士益 配李氏父以夫 墓上同
자는 사익으로 부인은 이이부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自玉> 子 有煜(유욱) <子 平>
字溫哉 配李氏父密直以彬 墓上同
자는 온재이고 부인은 밀직을 지낸 이이빈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自玉> 子 有潤(유윤) <子 尙恭>
初諱潤官郡事
초휘는 윤이고 관직은 군사를 지냈다.
=====
<再伯> 子 龜瑞(귀서) <子 明澤,不比>
字君甲密直提學 恭愍朝翰林學士 配夫人金氏父侍中泰振 墓松岳山
자는 군갑이고 밀직제학을 지니고 공민왕(1351~1374) 때에 한림학사를 지냈다. 부인은 시중을 지낸 김태진의 따님이다. 묘는 송악산에 있다.
=====
<再伯> 子 龍瑞(용서)
配申氏 부인은 신씨이다.
=====
<再伯> 子 麒瑞(기서)
配安氏 부인은 안씨이다.
=====
<再伯> 子 麟瑞(인서)
配李氏父益三
부인은 이익삼의 따님이다.
=====
<禹鼎> 子 得泂(득형) <子 一麗>
官右軍兵馬使 配吳氏父大衡 墓上同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오대형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陵).
<禹鼎> 子 得源(득원) <子 守麗>
字源叔 配李氏父栽仁
자는 원숙이고 부인은 이재인의 따님이다.
=====
<汝龍> 子 㺶(두) <子 以學>
字士彬江陵道存撫使 配李氏父震慶 墓上同
자는 사빈이고 강릉도 존무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진경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
=====
<汝鳳> 子 琇(수) <子 以碩>
堂後官 配權氏父瑊
당후관을 지냈다. 부인은 권감의 따님이다.
=====
<汝龜> 子 瑱(진) <子 以澤, 以璋>
配金氏父沃 墓上同
부인은 김옥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
=====
<得淵> 子 義明(의명) <子 彦孝, 淸有>
官司馬 配金氏父夏潤 墓上同
관직은 사마를 지냈고 부인은 김하윤의 따님이며 묘소는 위와 같다(廣州).
=====
<執一> 子 義哲(의철) <子 萬球, 萬珹. 萬玉>
累擧不中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
<以潝> 子 國瑞(국서) <子 文翊,文翔>
配安東權氏父相夏 墓上同
부인은 안동권씨로서 권상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端川).
=====
<以濂> 子 華玉(화옥) <子 海柱>
奉靖大夫內資寺主簿 配安氏父生員應迪 墓水原
봉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내자시 주부를 지냈다. 부인은 안씨로서 생원인 안응적의 따님이다. 묘소는 수원에 있다.
=====
<以濂> 子 衡玉(형옥) <子 天柱>
字山巨官參奉 配洪氏父繼溟 墓水原
자는 산거이고 관직은 참봉을 지냈다. 부인은 홍계명의 따님이다. 묘소는 수원에 있다.
=====
<以濂> 子 泰玉(태옥) <子 得海, 得河>
字汝巨官參奉 配韓氏父尙文 墓上同
자는 여거이고 관직은 참봉을 지냈다. 부인은 한상문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大寺洞).
=====
<以學> 子 敬玉(경옥) --가필
면주없음.
=====
<以學> 子 敬臣(경신) --가필
都摠管 도총관을 지냈다.
=====
<以學> 子 敬輔(경보) --가필
漢城判尹 한성판윤을 지냈다.
=====
<世綱> 子 震澤(진택) <子 仁源.仁濟>
官密直提學 配吳氏父天柱
관직은 밀직제학을 지냈고 부인은 오천주의 따님이다.
<世綱> 子 雲澤(운택) <子 仁漢>--누락
配鄭氏父春輔
부인은 정춘보의 따님이다.
=====
<得重> 子 漢成(한성) <子 擇謙>
配洪氏父瑞鳳 墓原州
부인은 홍서봉의 따님이고 묘소는 원주에 있다.
=====
<得重> 子 旻成(민성)
字明玉 配朴氏父秀華
자는 명옥이고 부인은 박수화의 따님이다.
=====
<敬文> 子 宇賢(우현) <子 德休>
字自重官參奉 配金氏父永澤 墓上同
자는 자중이고 관직은 참봉을 지냈다. 부인은 김영택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光州).
=====
<敬文> 子 宙賢(주현)
配洪氏父秀逸 墓上同
부인은 홍수일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光州).
=====
三十五世(51)
<柱國> 有子三人晢卿牧卿益卿云
<주국> 3명의 아들인 절경/목경/익경이 있었다고 한다.
噫吾金譜牒失於兵燹中系未詳故先世時以金寧君諱牧卿別立中祖矣○當宁乙丑四派松廣大譜時有正德遺譜始現于世而有諱柱國有子三人曰晢卿牧卿益卿云則十王以下中祖以上派系頗明證然欲爲聯系則先世未遑之事率爾行之有關事體故不得聯系別祿中絶世系一券以備參考矣
아! 우리 김씨의 보첩이 병화에 잃어버리고 중간의 세계를 상세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선세에 금녕군 휘목경을 별도로 중조로 세운다. ○ 지금 임금 을축(1865)년 4개의 파가 송광대보를 할 때, 정덕유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나 휘주국이 있었고, 아들 3명이 있었으니 절경/목경/익경이라고 한다. 즉 10왕 이하 중조 이상의 파계가 자못 분명하여 연계하고자 하나, 선세에서 미쳐 겨를이 없었던 일이라 이를 따르기에는 여러 관련되는 것이 많아 연계하지 않고 별도로 중간을 끊어서 세계를 한권으로 기록하니 참고하라.
=====
<有燦> 子 世傑(세걸) <子 履徵>
官都事 配金氏父時爀
관직은 도사를 지냈고 부인은 김시혁의 따님이다.
=====
<有燦> 子 之瑞(지서)-가필
官承仕郞都漆令同正
승사랑/도칠령동정을 지냈다.
=====
<有煜> 子 平(평)-가필
元宗朝龍山郡事書雲副正
원종(1260~1274) 때 용산군사와 서운부정을 지냈다.
=====
<有潤> 子 尙恭(상공) <子諱添劍云>-가필
官武都事 관직은 무도사를 지냈다.
=====
<龜瑞> 子 明澤(명택) <子 榮孫>--누락
면주 생략(配金氏 父大英;부인은 김대영의 따님이다.)
=====
<龜瑞> 子 不比(불비) -가필
면주없음
=====
<得泂> 子 一麗(일려) <子 佑鳴>
官太保 配玄氏父震天
관직은 태보를 지냈고 부인은 현진천의 따님이다.
<得源> 子 守麗(수려)
官左參議
관직은 좌참의를 지냈다.
=====
<㺶> 子 以學(이학) <子 慶遜, 首遜, 尙遜>
字泰瑞侍聘齋生 配柳氏父灌 墓上同
자는 태서이고 시빙재생을 지냈다. 부인은 류관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
=====
<琇> 子 以碩(이석)
字君一官密直使 配徐氏父世遠
자는 군일이고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서세원의 따님이다.
=====
<瑱> 子 以澤(이택) <子 德寬, 明寬>
配呂氏父自渭 墓上同
부인은 여자위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鰲山).
=====
<瑱> 子 以璋(이장)
配韓氏
부인은 한씨이다.
=====
<義明> 子 彦孝(언효) <子 宗厚>
字百元官門下執事 配李氏父成均官春植 墓柳川
자는 백원이고 관직은 문하집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씨로서 성균관을 지낸 이춘식의 따님이다. 묘소는 류천에 있다.
=====
<義明> 子 淸有(청유)
면주 없음
=====
<義哲> 子 萬球(만구) <子 元碩, 元玉>
字益賢官侍中
자는 익현이고 관직은 시중을 지냈다.
=====
<義哲> 子 萬珹(만성) <子 貞錫, 明錫>
字益章官右軍兵馬使 配平康蔡氏父浩吉 墓上同
자는 익장이고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평강채씨로서 채호길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어디?).
=====
<義哲> 子 萬玉(만옥)
官典理判書
관직은 전리판서를 지냈다.
=====
<義哲> 子 萬希(만희) <子 赫>-- 가필
左議政公
좌의정공이다.
=====
<國瑞> 子 文翊(문익) <子 麗徵,麗泂>
官兵馬使 配平山申氏父欽 墓先塋
관직은 병마사를 지냈고 부인은 평산신씨로서 신흠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에 있다.
=====
<國瑞> 子 文翔(문상)
字汝元 配明氏父一周
자는 여원이고 부인은 명일주의 따님이다.
=====
<華玉> 子 海柱(해주) <子 麗澤>
字擎翼 累擧不中 配李氏父健夏 墓昌原
자는 경익이고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이건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창원에 있다.
=====
<衡玉> 子 天柱(천주)
墓上同 묘소는 위와 같다(水原).
=====
<泰玉> 子 得海(득해) <子 漪柱, 澤柱>
字益卿官右軍兵馬使 配權氏
자는 익경이고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권씨이다.
=====
<泰玉> 子 得河(득하)
官大提學 관직은 대제학을 지냈다.
{字自卿寶文閣大提學 配白氏;자는 자경이고 보문각대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백씨이다.}
=====
<震澤> 子 仁源(인원) <子 元老, 喆老>
字奇重官右軍兵馬使 配金氏父萬成 墓上同
자는 기중이고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김만성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어디?).
=====
<震澤> 子 仁濟(인제)
字淸重 配奇氏
자는 청중이고 부인은 기씨이다.
=====
<雲澤> 子 仁漢(인한)-누락
字益重 墓江西
자는 익중이고 묘소는 강서에 있다.
=====
<漢成> 子 擇謙(택겸)
字謙之 配閔氏父的 墓上同
자는 겸지이고 부인은 민적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原州).
=====
<宇賢> 子 德休(덕휴)
官宣傳 配鄭氏
관직은 선전을 지냈다. 부인은 정씨이다.
=====
三十六世(52)
<世傑> 子 履徵(이징) <子 機祚,械祚,楹祚>
字允直官監務早卒 配李氏父時培 墓廣州竹洞
자는 윤식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내고 일찍 별세했다. 부인은 이시배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주의 죽동에 있다.
=====
<明澤> 子 榮孫(영손)-- 누락
字良叔密直提學 配徐氏父千秋
자는 양숙이고 밀직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서천추의 따님이다.
=====
<一麗> 子 佑鳴(우명) <子 昌淵>
字士健官少保 配金氏父挺彦 墓順興
자는 사건이고 관직은 소보를 지냈다. 부인은 김정언의 따님이다. 묘소는 순흥에 있다.
=====
<以學> 子 慶孫(경손) <子 靚>
官壽安宮錄事 配完山李氏父慶文 墓靈山洞先塋下
관직은 수직으로 안궁록사를 지냈다. 부인은 완산이씨로서 이경문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산동의 선영아래에 있다.
=====
<以學> 子 首孫(수손) <子 觀>
諸陵直 配古阜李氏父元植 墓靈山洞南岡
제릉직을 지냈고 부인은 고부이씨로서 이원식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산동의 남쪽언덕에 있다.
=====
<以學> 子 尙孫(상손) <子 覩>
字夏三官監司 配李氏父璜 墓康山洞
자는 하삼이고 관직은 감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황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산동에 있다.
=====
<以碩> 子 德弘(덕홍) <子 文玉>
配未詳 배위는 미상이다.
=====
<以鐸> 子 德寬(덕관) <子 奇玉, 章玉>
配朴氏父春茂
부인은 박춘무의 따님이다.
=====
<以鐸> 子 明寬(명관) <子 惠玉>
配未詳 배위는 미상이다.
=====
<彦孝> 子 宗厚(종후) <子 希旻>
官監務 配閔氏父漬
관직은 감무를 지냈고 부인은 민지의 따님이다.
=====
<萬球> 子 元碩(원석) <子 永顯>
字光甫官郡事 配丹陽張氏父壽益 墓丹城
자는 광보이고 관직은 군사를 지냈다. 부인은 단양장씨로서 장수익의 따님이다. 묘소는 단성에 있다.
=====
<萬球> 子 元玉(원옥)
官奉翊大夫禮儀判書 配李氏
관직은 봉익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예의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이씨이다.
=====
<萬珹> 子 貞碩(정석) <子 元泰>
字汝述官奉翊大夫 配李氏父命相 墓尙州
자는 여술이고 관직은 봉익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부인은 이명상의 따님이다. 묘소는 상주에 있다.
=====
<萬珹> 子 明碩(명석)
配安氏父邦彦
부인은 안방언의 따님이다.
=====
<文翊> 子 麗徵(여징) <子 大振>
官上將軍 配安氏父守欽 墓江界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고 부인은 안수흠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계에 있다.
=====
<文翊> 子 麗浻(여형) <子 重振>
官司空 配李氏父相賢 墓江界
관직은 사공을 지냈고 부인은 이상현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계에 있다.
=====
<海柱> 子 려택(麗澤) <子 厚明>
字昇甫官密直提學 配李氏父光玉
자는 승보이고 관직은 밀직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이광옥의 따님이다.
=====
<得海> 子 漪柱(의주) <子 益謹>
字昌玉官密直使 配黃氏父得中 墓水原
자는 창옥이고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다. 부인은 황득중의 따님이다. 묘소는 수원에 있다.
=====
<得海> 子 澤柱(택주) <子 益愼, 益珹>
字源伯官典客令
자는 원백이고 관작은 전객령을 지냈다.
=====
<得河> 子 碩柱(석주) <子 益玉, 益珏>--누락
中郞將
중랑장을 지냈다.
=====
<仁源> 子 元老(원노) <子 漢濟>
官戶曹佐郞 配金氏
관직은 호조좌랑을 지냈고 부인은 김씨이다.
=====
<仁源> 子 喆老(철노) <子 重器>
配豊川李氏父仁濟
부인은 풍천이씨로서 이인제의 따님이다.
=====
三十七世(53)
<履徵> 子 機祚(기조) <子 鼎赫>
官密直提學 配丁氏父守甫 墓上同
관직은 밀직제학을 지냈고 부인은 정수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廣州竹洞).
=====
<履徵> 子 械祚(계조)
字自重官監察大夫 配吳氏父麟齊 墓廣州
자는 자중이고 관직은 감찰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부인은 오인제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주에 있다.
=====
<履徵> 子 楹祚(영조)
配李氏父東植 墓上同
부인은 이동식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廣州竹洞).
=====
<榮孫> 子 光海(광해)-누락
字鏡甫郡事 配韓氏
자는 경보이고 군사를 지냈다. 부인은 한씨이다.
=====
<榮孫> 子 光河(광하)-누락
字美甫監察大夫 配崔氏父擎旻 墓在長湍
자는 미보이고 감찰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부인은 최경민의 따님이다. 묘소는 장단에 있다.
=====
<佑鳴> 子 昌淵(창연) <子 南>
字君仲官監務 配咸陽朴氏父重儉 墓上同
자는 군중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함양박씨로서 박중검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順興).
=====
<慶孫> 子 靚(정) <子 有昌>
官左獻納 配慶州李氏父弘亮 墓上同
관직은 좌헌납을 지냈고 부인은 경주이씨로서 이홍량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靈山洞先山下).
=====
<首孫> 子 觀(관) <子 舜精>
字士玉 配靈光丁氏父致誠 墓上同
자는 사옥이고 부인은 영광정씨로서 정치성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靈山洞南岡).
=====
<尙孫> 子 覩(도) <子 禹精>
官中樞府事 配奇氏父永承 墓光山
관직은 중추부사를 지냈고 부인은 기영승의 따님이며 묘소는 광산에 있다.
=====
<德弘> 子 文玉(문옥) <子 國賢, 國良, 國輔>
配未詳 배위는 배상이다.
=====
<德寬> 子 奇玉(기옥) <子 國重, 國安. 國興>
配崔氏父漢相
부인은 최한상의 따님이다.
=====
<德寬> 子 章玉(장옥)
配宋氏
부인은 송씨이다.
=====
<明寬> 子 惠玉(헤옥)
配吳氏父崇福都監判官智澤
부인은 오씨로서 숭복도감 판관을 지낸 오지택의 따님이다.
=====
<宗厚> 子 希旻(희민) <子 萬鎰>
官密直使 配金氏
관직은 밀직사를 지냈고 부인은 김씨이다.
=====
<元碩> 子 永顯(영현) <子 聖薰>
字伯三官侍中 配元氏父以泰 墓上同
자는 백삼이고 관직은 시중을 지냈다. 부인은 원이태의 따님이고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丹城).
=====
<貞錫> 子 元泰(원태) <子 載坤>
字明叔官朝靖大夫 配李氏
자는 명숙이고 관직은 조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부인은 이씨이다.
=====
<麗徵> 子 大振(대진)
字重聲官典廐署承 配平山申氏父萬成 墓上同
자는 중성이고 관직은 전구서승[1]을 지냈다. 부인은 평산신씨로서 신만성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江界).
[1]典廐署; 집짐승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1308년(충렬왕 34년)에 전의시(典儀寺)에 소속시킴, 영(令-종7품), 승(丞-종8품) 등의 벼슬아치가 있음.
=====
<麗泂> 子 重振(중진)
配宋氏
부인은 송씨이다.
=====
<麗澤> 子 厚明(후명) <子 世迪>
字文伯官右獻納 配南平文氏
자는 문백이고 관직은 우헌납을 지냈다. 부인은 남평문씨이다.
=====
<漪柱> 子 益謹(익근) <子 碩孫>
字謹甫官注書 配白氏父文成 墓原州
자는 근보이고 관직은 주서를 지냈다. 부인은 백문성의 따님이다. 묘는 원주에 있다.
=====
<澤柱> 子 益愼(익신) <子 天輿>
字自善官兵馬使 配崔氏父萬膽
자는 자선이고 관직은 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최만담의 따님이다.
=====
<澤柱> 子 益誠(익성) <子 運輿>
字信甫官典理判書
자는 신보이고 관직은 전리판서를 지냈다.
=====
<碩柱> 子 益玉(익옥)--누락
典客令
전객령을 지냈다.
=====
<碩柱> 子 益珏(익각)--누락
兵馬使 配慶州李氏
병마사를 지냈고 부인은 경주이씨이다.
=====
<元老> 子 漢濟(한제)<子 得秋>
配李氏父進士東坵
부인은 이씨이고 진사를 지낸 이동구의 따님이다.
=====
<喆老> 子 重器(중기)<子 文江>
未詳 미상이다.
=====
三十八世(54)
<機祚> 子 鼎赫(정혁) <子 泰齡>
字聖甫官司馬 配張氏父萬綱 墓黃州
자는 성보이고 관직은 사마를 지냈다. 부인은 장만강의 따님이다. 묘소는 황주에 있다.
=====
<光海> 子 仁彦(인언) <子 得濟>--누락
字顯卿執義 配朴氏
자는 현경이고 집의를 지냈다. 부인은 박씨이다.
=====
<光河> 子 義彦(의언) <子 厚濟>--누락
字善卿 配鄭氏父再桓 墓上同
자는 선경이고 부인은 정재환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長湍).
=====
<光河> 子 智彦(지언) <子 命濟>--누락
字良甫司馬 配星州玄氏父機天 墓上同
자는 양보이고 사마를 지냈다. 부인은 성주현씨로서 현기천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長湍).
=====
<昌淵> 子 南(남) <子 振燁,振煜,振섭>
奉益大夫禮儀判書 配文化柳氏父寅伯 墓江西
봉익대부/예의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문화류씨로서 류인백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靚> 子 有昌(유창) <子 守兌>
配宋氏父文相 墓上同
부인은 송문상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靈山洞先山下).
=====
<觀> 子 舜精(순정) <子 宗貴>
字一瑞 配鄭氏父東煥 墓先塋石假山
자는 일서이고 부인은 정동환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석가산에 있다.
=====
<觀> 子 夏精(하정)
配許氏否恒 墓先塋同岡
부인은 허항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과 같은 언덕에 있다.
=====
<覩> 子 禹精(우정) <子 宗仁>
字汝卿 配卓氏父屹
자는 여경이고 부인은 탁흘의 따님이다.
=====
<文玉> 子 國賢(국현)
字賢輔 配崔氏父齊華
자는 현보이고 부인은 최제화의 따님이다.
=====
<文玉> 子 國良(국양)
字仁老 配崔氏父天卓
자는 인로이고 부인은 최천탁의 따님이다.
=====
<文玉> 子 國輔(국보) <子 成澤>
字仁叟 配造氏父東貞
자는 인수이고 부인은 조동정의 따님이다.
=====
<奇玉> 子 國重(국중) <子 用萬>
配金氏
부인은 김씨이다.
=====
<奇玉> 子 國安(국안) <子 用汝>
字平輔 配蘇氏父命祐
자는 평보이고 부인은 소명우의 따님이다.
=====
<奇玉> 子 國興(국흥)
字興叔 配咸氏 墓平山
자는 흥숙이고 부인은 함씨이다. 묘소는 평산에 있다.
=====
<希旻> 子 萬鎰(만일) <子 應玉>
官右軍兵馬使 配金氏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고 부인은 김씨이다.
=====
<永顯> 子 聖薰(성훈) <子 鎬>
字汝潤官監務 配元氏父以泰 墓上同
자는 여윤이고 관직은 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원이태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丹城).
=====
<元泰> 子 載坤(재곤) <子 道恒, 道徵>
官左軍兵馬使 配安氏父國憲 墓上同
관직은 좌군병마사를 지냈고 부인은 안국헌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尙州).
=====
<大振> 子 若訥(약눌) <子 再蕃>
字爾明 配丹陽張{禹}氏萬紀 墓先兆下
자는 이명이고 부인은 단양장{우}씨로서 만기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아래에 있다.
=====
<厚明> 子 世迪(세적) <子 命祐>
字敬叔 配崔氏父齋天 墓安州
자는 경숙이고 부인은 최재천의 따님이다. 묘소는 안주에 있다.
=====
<厚明> 子 世平(세평)
配未詳 배위는 미상이다.
=====
<益謹> 子 碩孫(석손) <子 世章>
字重厚官東北道巡撫使 配安東金氏父安邦墓楊州
자는 중후이고 관직은 동북도 순무사를 지냈다. 부인은 안동김씨로서 김안방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주에 있다.
=====
<益愼> 子 天輿(천여) <子 起酉>
配元氏父繼參
부인은 원계삼의 따님이다.
=====
<益誠> 子 運輿(운여) <子 萬壽>
字龍瑞官大司成
자는 용서이고 관직은 대사성을 지냈다.
=====
<益玉> 子 德寬(덕관) <子 閏賢>--누락
典客令
전객령을 지냈다.
=====
<益珏> 子 義寬(의관) <子 天柱>--누락
大司成 配鎭川宋氏
대사성을 지냈고 부인은 진천송씨이다.
=====
<漢濟> 子 得秋(득추) <子 道珏>
配淸州韓氏{父進士東坵}
부인은 청주한씨이다.{진사를 지낸 한동구의 따님이다.}
=====
<重器> 子 文江(문강) <子 指>
官牧師 관직은 목사를 지냈다.
=====
三十九世(55)
<鼎赫> 子 泰齡(태령) <子 維五,維公>
字孟翊累擧不中 配金氏父參奉濂 墓江西
자는 맹익이고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침봉을 지낸 김렴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서에 있다.
=====
<仁彦> 子 得濟(득제) <子 兌益>--누락
字君一 配柳氏
자는 군일이고 부인은 류씨이다.
=====
<義彦> 子 厚濟(후제) --누락
字仁叟 配黃氏父處夏 墓石城
자는 인수이고 부인은 황처하의 따님이다. 묘는 석성에 있다.
=====
<智彦> 子 命濟(명제) <子 達孫>--누락
字致叔判官 贈資憲大夫 墓楊州 配姜氏
자는 치숙이고 판관을 지냈으며 자헌대부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양주에 있고 부인은 강씨이다.
=====
<南> 子 振燁(진엽) <子 德泂>
字東甫官司憲府監察 配陽川許氏父弘 墓上同
자는 동보이고 관직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부인은 양천허씨로서 허홍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江西).
=====
<南> 子 振煜(진욱) <子 德鼎>
字明叔 配安東金氏父夏沃 墓上同
자는 명숙이고 부인은 안동김씨로서 김하옥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江西).
=====
<南> 子 振爕(진섭)
配南陽洪氏父汝海
부인은 남양홍씨로서 홍여해의 따님이다.
=====
<有昌> 子 守兌(수태) <子 夏碩>
配位未詳 배위미상이다.
=====
<舜精> 子 宗貴(종귀) <子 爾炯>
配洪氏父如海 墓先塋秋月山
부인은 홍여해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영의 추월산에 있다.
[비고]振爕(진섭)과 동서?
=====
<禹精> 子 宗仁(종인) <子 爾王弘>
면주없음
=====
<國輔> 子 成澤(성택)
字子章 配李氏父萬補 墓楊州
자는 자장이고 부인은 이만보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주에 있다.
=====
<國重> 子 用萬(용만) <子 乙棟> --가필
贈判決事
판결사에 증직되었다.
=====
<國安> 子 用汝(용여) --가필
면주없음
=====
<國興> 子 用光(용광) --가필
면주없음
=====
<萬鎰> 子 應玉(응옥) <子 榮國>
官通訓大夫石城縣監 配玄風郭氏父進士載昌
관직은 통훈대부/석성현감을 지냈다. 부인은 현풍곽씨로서 진사를 지낸 진사 곽재창의 따님이다.
=====
<聖薰> 子 鎬(호) <子 克胤, 勝胤, 碩胤>
字君仲官密直提學 配李氏父首春
자는 군중이고 관직은 밀직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이수춘의 따님이다.
=====
<載坤> 子 道恒(도항) <子 弘祚>
字章甫官密直提學 配金氏父瑞玉
자는 장보이고 관직은 밀직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김서옥의 따님이다.
=====
<載坤> 子 道徵(도징) <子 義祚, 德祚, 賢祚>
官通訓大夫監務 配淑人平山申氏父密直使雅 墓上同
관직은 통훈대부/감무를 지냈다. 부인은 숙인 평산신씨로서 밀직사를 지낸 신아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어디?).
=====
<若訥> 子 再蕃(재번) <子 時採, 時抽, 時挺>
字允老 配文化柳氏父世茂
자는 윤로이고 부인은 문화류씨로서 류세무의 따님이다.
=====
<世迪> 子 命祐(명우) <子 兌鎭, 兌明>
字仁卿 配安東金氏父相國 墓上同
자는 인경이고 부인은 안동김씨로서 김상국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安州).
=====
<碩孫> 子 世章(세장) <琢,珍.璉,現,瑾,관,球,琥>
字暉官右軍兵馬使 配平康蔡氏 墓上同
자는 휘이고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평강채씨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楊州).
=====
<天輿> 子 起酉(기유) <子 龍瑞>
配李氏
부인은 이씨이다.
=====
<運輿> 子 萬壽(만수) <子 璘>
字天汝官門下侍中平章事以直言極諫忤旨謫咸興十年後蒙宥以還家有詩曰白首晩作白鷗伴白髮長櫛白蘋風紅塵何日因潦倒紅蓼花邊任此翁退而棄世
자는 천여이고 관직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다. <임금께> 직언으로 극간하여 미움을 받아 함흥으로 귀양을 가서 10년을 살다가 석방(蒙宥)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남아있는 시에서 말하기를 ‘흰 머리가 되어 늙어가고 --- 중략 --- 세상을 버린다.’라고 했다.
=====
<德寬> 子 閏賢(윤현) <子 延>--누락
字賢甫監務
자는 현보이고 감무를 지냈다.
=====
<義寬> 子 天柱(천주) <子 孝昆>--누락
淸州牧使 配晋州鄭氏父牧使煥 墓晋州灰洞
청주목사를 지냈고 부인은 진주정씨로서 목사를 지낸 정환의 따님이다. 묘소는 진주의 회동에 있다.
=====
<得秋> 子 道珏(도각) <子 慶德>
字漢卿 配金氏
자는 한경이고 부인은 김씨이다.
=====
<文江> 子 指(지) <子 叔樞>
官縣監
관직은 현감을 지냈다.
=====
四十世(56)
<泰齡> 子 維五(유오)
官首行官判官 配尹氏父來華 墓上同
관직은 수행관 판관을 지냈다. 부인은 윤래화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江西).
=====
<泰齡> 子 維公(유공)-가필
官判官
관직은 판관을 지냈다.
=====
<得濟> 子 兌益(태익)--누락
司馬 背<配?>權氏父察訪重 墓水原
사마를 지냈고 부인은 찰방을 지낸 권중의 따님이다. 묘소는 수원에 있다.
=====
<命濟> 子 達孫(달손) <子 形尊,形樽>--누락
司憲府大司憲 配白川趙氏父判中樞瑞安 墓上同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부인은 백천조씨로서 판중추를 지낸 조서안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楊州).
=====
<振燁> 子 德泂(덕형)
字明夏官五衛將 配昌寧成氏父溟羽 墓廣州
자는 명하이고 관직은 오위장을 지냈다. 부인은 창녕성씨로서 성명우의 따님이다. 묘소는 광주에 있다.
=====
<振煜> 子 德鼎(덕정)
無意名利避世以卒 配李氏父華漢
이름을 날리고 이익을 얻는데 뜻이 없어 세상을 피해 살다가 죽었다. 부인은 이화한의 따님이다.
=====
<守兌> 子 夏碩(하석)
配金氏父泰巖
부인은 김태암의 따님이다.
=====
<宗貴> 子 爾炯(이형)
字君重 配韓氏父照 墓上同
자는 군중이고 부인은 한조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先塋秋月山).
=====
<宗仁> 子 爾王弘(이홍)
면주없음
=====
<用萬> 子 乙棟(을동) -가필
字支彦
자는 지언이다.
=====
<應玉> 子 榮國(영국)
字國卿 配李氏父枝茂
자는 국경이고 부인은 이지무의 따님이다.
=====
<鎬> 子 克胤(극윤)
官判三司副使 配姜氏父慶三 墓德源
관직은 판삼사부사를 지냈고 부인은 강경삼의 따님이다. 묘소는 덕원에 있다.
=====
<鎬> 子 勝胤(승윤)
字孝友奉翊大夫禮儀判書 配全州李氏父生員萬弼
자는 효우이고 봉익대부/예의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전주이씨로서 생원을 지낸 이만필의 따님이다.
=====
<鎬> 子 碩胤(석윤)
字伯益官右軍兵馬使上將軍 配李氏父益成 墓先兆下
자는 백익이고 관직은 우군병마사/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이익성의 따님이다. 묘소는 선산아래에 있다.
=====
<道恒> 子 弘祚(홍조)
官典理判書 配洪氏父大河 墓黃州
관직은 전리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홍대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황주에 있다.
=====
<道徵> 子 義祚(의조)
官左參議 配李氏父必賢 墓上同
관직은 좌참의를 지냈다. 부인은 이필현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어디?).
=====
<道徵> 子 德祚(덕조)
官右軍兵馬使 配成氏父萬機 墓上同
관직은 우군병마사를 지냈다. 부인은 성만기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어디?).
=====
<道徵> 子 賢祚(현조)
官上將軍 配玄氏父龜徵
관직은 상장군을 지냈다. 부인은 현귀징의 따님이다.
=====
<再蕃> 子 時採(시채)
字伯瞻 配洪氏父重海 墓江界
자는 백첨이고 부인은 홍중해의 따님이다. 묘소는 강계에 있다.
=====
<再蕃> 子 時抽(시추)
字重叔 配洪氏父成海
자는 중숙이고 부인은 홍성해의 따님이다.
=====
<再蕃> 子 時挺(시정)
字自善 配慶州李氏父仁復
자는 자선이고 부인은 경주이씨로서 이인복의 따님이다.
=====
<命祐> 子 兌鎭(태진)
字君實 配密陽崔氏父擎雲 墓上同
자는 군실이고 부인은 밀양최씨로서 최경운의 따님이다. 묘소는 위와 같다(安州).
=====
<命祐> 子 兌明(태명)--가필
字明甫 配柳氏父星烈 墓上同
자는 명보이고 부인은 류성열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위와 같다(安州).
=====
<世章> 子 琢(탁)
侍中諡文敬公
시중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공이다.
=====
<世章> 子 診(진)
長沙君
장사군의 봉호를 받았다.
=====
<世章> 子 璉(연)
進士
진사를 지냈다.
=====
<世章> 子 現(현)
贈崇祿大夫
숭록대부에 증직되었다.
=====
<世章> 子 瑾(근)
官府使
관직은 부사를 지냈다.
=====
<世章> 子 王寬(관)
면주 없음.
=====
<世章> 子 球(구)
恭愍王朝官評理諡忠貞公
공민왕(1351~1374)때 관직이 평리를 지냈고 시호는 충정공이다.
=====
<世章> 子 琥(호)
號休隱
호가 휴은이다.
=====
※수단하한1761년정덕보
<世章> 子 珍(진)
配吳氏父環
부인은 오환의 따님이다.
<世章> 子 璉(연)
配吳氏父咸
부인은 오함의 따님이다.
<世章> 子 琥(호)
配李氏父仁伯
부인은 이인백의 따님이다.
<世章> 子 琢(탁)
侍中
시중을 지냈다.
※1881년신사보-有子人八曰琢珍璉現瑾球琥관{王寬}云未詳
=====
<起酉> 子 龍瑞(용서)
配明氏
부인은 명씨이다.
=====
<萬壽> 子 璘(인)
官都事
관직은 도사를 지냈다.
<道珏> 子 慶德(경덕)
字汝誠 配李氏
자는 여성이고 부인은 이씨이다.
<指> 子 叔樞(숙추)
進士
진사를 지냈다.
正德舊譜抄本終
정덕구보초본 끝
첫댓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