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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1) 2019. 11. 13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삼하 1:1-16
오늘부터 사무엘하 강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본래 히브리 성경에는 사무엘서가 상하로 나누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원전 3-2세기에 히브리어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을 하였는데 이 성경을 칠십인역(septuagint, LXX)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은 72명의 번역자들이 번역을 했다고 헤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때 사무엘서가 상하로 나뉘었습니다(열왕기도 마찬가지). 결국 사무엘 상하는 같은 저자에 의해 기록된 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죽음>
사무엘상 마지막장에서 우리는 사울 왕가의 비참한 최후를 보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이스라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사울과 세 아들들 끝까지 추격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의 세 아들(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은 전사를 하고 맙니다. 그리고 사울도 블레셋 군사들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무기를 든 자가 감히 사울을 찌르지 못하자, 자기의 칼에 엎드러져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의 옷을 벗기려 왔다가 사울과 세 아들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사울의 목을 베어 다곤 신전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 없는 시신은 벧산 성벽에 못을 박아 매달았습니다(사울의 아들들도).
다행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밤중에 사울의 시체를 거두어 화장하고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40년 전, 암몬 사람 나하스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 사울이 구해 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을 한 것입니다.
<사울 왕의 사망 소식을 듣다>
이 소식이 다윗에게 까지 전해집니다.
1-4절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2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3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아말렉을 치고 승리의 전리품을 가지고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어떤 사람(청년)이 옷이 찢어지고 머리에 온통 흙먼지 투성이인 채로 다윗에게 와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배하였고 사울과 요나단도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합니다(3절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그렇게 속이기 위해 일부로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발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결국 그의 거짓말은 들통이 나고 맙니다.
<아말렉 청년의 거짓 보고>
놀란 다윗은 자초지정을 자세히 묻습니다.
5-10절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7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9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그에게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것을 어찌 아느냐” 물으니, 그는 대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드러내고 맙니다.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랐다”(6절)고 말을 합니다. 대답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말이 꼬인 것입니다.
수사관들의 수사 기법 가운데 하나 – 같은 질문을 반복해(또는 갑자기) 묻다 보면 거짓말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모순된 진술을 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이스라엘군에 소속된 자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소지품을 훔치는 자임을 자기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된 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거짓을 드러내게 됩니다. 거짓말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술 더 떠서 이 청년은 더 큰 거짓말을 합니다.
사울이 크게 부상당한 채로 창에 기대어 있고, 블레셋의 병거와 기마병은 그를 추격하고 있었는데, 사울이 자신을 보고는 너무 고통스러우니 죽여 달라 요청하였고, 자기 보기에도 사울이 살지 못할 것 같아 그의 요구대로 죽이고,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빼어 이렇게 가져왔다고 말했습니다. ‘팔에 있는 고리’ 전쟁에 나갈 때 사용하는 왕의 표식입니다. 왕이 전쟁에 나갈 때에만 왕임을 표시하기 위해 착용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에게 찾아 온 젊은이는 자기가 사울을 죽인 증거로 팔의 고리를 내놓으며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물론 그의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그의 거짓말을 단번에 간파하였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단서가 있습니다.
8절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다윗은 사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사울은 이방인의 손에 죽는 것을 모욕으로 여겨 자신의 칼을 맡은 근위병에게 자신을 찌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가 차마 자신을 죽이지 못하자 스스로 자결을 하였습니다. 그 근위병도 자결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말렉 청년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할 리가 없습니다.
다윗이 이 아말렉 청년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왜 이 아말렉 청년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아마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까? 악령이 든 사울을 위해 비파를 타다가 창에 맞아 죽을 뻔했고, 자신의 딸(미갈)과 결혼시켜 주겠다면 블레셋 사람 포피 100개를 가져오라고 요구하고, 집으로 자객을 보내 죽이려했고, 결국 다윗은 10년 동안이나 들판이나 이방 땅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단 하루도 발 뻗고 잔적인 없는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울 왕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울을 죽였다고 보고하면 크게 상을 내릴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말렉 청년에게는 모델이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도엑’입니다.
도엑 역시 아말렉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진설병과 칼을 주는 것을 보고는 사울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명을 받아 놉의 제사장들을 전멸시켰습니다. 이 일로 도엑은 사울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사울을 죽였다고 하면 다윗으로부터 크게 인정받으리라 여긴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그러면 그의 보고를 들은 다윗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11-12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자신의 대적이 쓰러졌을 때 내심 쾌재를 부르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본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런 본성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육신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비극적 최후는 결국 이스라엘의 패배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그의 패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더군다나 사울의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닙니다. 민족의 패배를 가져옵니다.
절친이었던 요나단도 죽었고, 사랑하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자신의 원수인 사울이 죽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가 기뻐했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는 모슨 사람들도 슬퍼하도록 지도 했습니다. 자신 뿐 아니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옷을 찢고 울면서 해가 질 때까지 금식하였습니다.
다윗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안녕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 가장 먼저 안타까워하고 회개(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에 분노와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아말렉 사람을 처형하는 다윗>
그러면 사울의 죽음을 알린 아말렉 청년은 자신이 계획한대로 상을 받았을까요?
13-16절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다윗의 반응은 그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다윗은 도엑의 말을 들은 사울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은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며 자신의 부하를 시켜 그 자리에서 그를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죽음 앞에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청년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은 하나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누리려는 생각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말렉 청년은 사실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훔친 것만으로도 횡재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불의한 재물과 명예를 노리다가 그만 목숨까지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돈을 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합니다.
딤전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야고보 사도도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쌓은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약5:1-5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물질을 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굶어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은혜가 됩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바위 사이에서 물을 내셔서 마시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산다면 오늘도 우리의 수고를 따라 채워주시고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불의한 재물을 탐하다가 망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다윗이라고 해서 사울에 대한 개인감정이 없었겠습니까?
원망도 있을 것이고 불평도 있을 것이고 원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러한 감정을 다 초월하며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가 훼손되고, 하나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애통해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계산을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계산, 안목의 계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영적인 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이익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아말렉 청년처럼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멀리 봐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잘 계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가 손상되는 순간에 반드시 거룩한 분노(의분)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런 분노가 있어야 죄악이 우리 주변에 자리 잡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거짓의 죄, 공명의 죄,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의 죄를 다 잘라내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민감한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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