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유적 및 풍경 화보-
韓五洙(정신과 의사/교수)
시실리의 타오르미나 山頂 마을 몰라의 골목에서 발견한 MADE IN KOREA!(조갑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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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노토의 바로크식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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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근방 해안엔 10세기 무렵 해양도시였던 아말피가 있다. 피사, 제노바, 베니스와 함께 4대 해양 公國이었다. 지금 이탈리아 해군 깃발은 이 네 도시국가의 紋章(문장)을 합성한 것이다. 아말피는 절벽면을 수평 공간처럼 활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미로를 만들어 사라센 해적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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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는 기원 후 1세기에 베수비오스 火山이 폭발, 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 사진은 당시의 재판소 건물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公共건물이다. 로마의 유산이 法治인데, 法의 권위를 상징하는 큰 건물을 지어 주민들을 심리적으로 다스렸음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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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활화산 에트나의 頂上부근이다. 흘러내린 용암이 굳은 바위 넘어 눈 덮인 꼭대기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다(趙甲濟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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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州島 팔레르모 근교에 12세기 시실리 王國(나폴리 남쪽도 통치)을 다스리던 노르만(바이킹 후손) 왕이 건설한 '몽레알레' 대성당과 수도원의 회랑이다. 노르만-아랍 혼합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회랑과 정원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연상시킨다. 이 성당과 수도원을 지을 때 아랍 기술자들을 썼기에 건물 양식과 구조에 아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 왕조는 아랍이 다스리던 시실리를 빼앗았지만 아랍, 유대인, 그리스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信敎의 자유도 허용, 중세 유럽의 가장 번성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몽레알레 성당 안엔 6000평방 미터의 壁面(벽면)에 성경 이야기를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성당을 흔히 '돌에 새긴 성경'이라 부르는 것은, 중세에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성당의 벽화를 교육 자료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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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의 기둥인데, 기둥에 붙여두었던 금박이 뜯겨 나간 흔적이 있다. 기둥 머리의 조각이 다 다르고 정교하다. 이런 회랑은 수도사들의 산책로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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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라구사 입구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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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시라쿠사의 성당. 그리스 시대부터 신전, 성당 등으로 2600년간 계속 사용되고 있는 종교건물이다. 여러 양식의 건축 기법이 섞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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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골목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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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의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 도미니크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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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의 환상적 해안 풍경. 뒤로 보이는 산은 에트나 화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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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古都 아그리젠토(Agrigento)의 '신전의 계곡'에 있는 그리스의 神殿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시실리를 거쳐간 수많은 지배 민족들은 指紋(지문)처럼 자신들의 유적을 남겼다. 그런 다양성이 이곳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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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젠토의 그리스 신전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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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젠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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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아그리젠토의 그리스 성벽인데, 나중엔 무덤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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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나폴리 왕국 시절인 18세기 말에 지은 카세르타 왕궁.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크다. 1600개의 방이 있고, 200만 입방미터의 체적을 가진 18세기 유럽에서 지어진 최대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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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왕국의 카세르타 왕궁 정면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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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기다리는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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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의 中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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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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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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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라구사. 전형적인 山頂 도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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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메모: 바이킹과 노르만의 세계
8세기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된 바이킹의 유럽 약탈 시대에 프랑스 북부에 노르망디 公國(공국)이 탄생하였다. 스칸디나비아(지금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 살던 바이킹 족은 게르만 족의 일파인데 용맹한 戰士(전사) 집단으로서 항해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세느 강 주변을 약탈하다가 지금의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한다. ‘노르망디’는 북쪽에서 온 사람들의 땅이란 뜻이다. 서기 911년에 족장 롤로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노르망디 公國(공국)을 인정을 받았다. 바이킹은 프랑스에서 살면서 현지어를 습득하고 현지인들과 결혼하면서 문명화되었다. 이곳엔 바이킹, 앵글로 색슨 족, 프랑크 족 등 여러 종족들이 살면서 通婚(통혼), 混血(혼혈)하였다. 노르만 족은 바이킹 족의 정복, 탐험 기질을 이어갔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公은 영국으로 쳐들어가 해스팅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을 무찌르고 지금의 영국과 아일랜드까지 점령하였다. 오늘의 영국은 노르만 족이 건설한 제도를 이어받아 발전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는 정복왕이라 불리게 된 윌리엄 1세의 32대 후손이다.
노르만 족에 의하여 영국이 정복됨으로써 세계사가 바뀐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었다. 이들은 先住民(선주민)인 앵글로-색슨 귀족과 융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왕가 및 귀족들의 先祖(선조)가 된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쓰던 프랑스어가 영어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유럽 대륙의 로마-라틴계 문명이 영국에 많이 들어온다. 바이킹 족이 영국과 유럽을 이어준 것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北歐(북구)를 벗어나 유럽 대륙을 활동무대로 삼게 된다. 노르만의 침공은 영국에 대한 마지막 침공이었다. 그 전 대륙으로부터 수많은 침공을 당해오던 영국은 그 이후는 침략하는 나라로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 윌리엄 1세와 후손들은 고향인 노르망디의 領有權(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중엔 프랑스의 王座(왕좌)까지 탐하게 된다. 14~15세기 프랑스-영국 사이 백년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과 거의 같은 시기 노르망디의 오트빌 家門(가문)의 戰士들이 지금의 이탈리아 남쪽과 시실리 정복에 나선다.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점령해가면서 아랍 세력이 지배하던 시실리에 상륙한 노르만 족이 팔레르모에 입성한 것은 1072년이었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 6년 뒤였다. 1130년, 노르만 족의 루체로 2세는 교황에 의하여 시실리 왕 겸 캄파니아 지방(나폴리 주변)의 공작으로 책봉된다. 그는 영토 확장에 나서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아말피, 카푸아, 살레르노 등을 흡수하고, 한때는 말타, 아프리카 북부, 예루살렘 주변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노르만이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다스린 약 200년 간 이곳은 유럽의 가장 번성한 문명국이 되었다. 노르만 지배층이 개방과 관용과 실용적 정책을 편 덕분이다. 시실리 왕국엔 노르만, 그리스, 아랍, 유대인들이 공존하면서 상공업과 농업, 그리고 문화와 예술 활동에 참여하였다. 노르만은 종교 차별을 하지 않았고 기술자들을 잘 대우하였다.
노르망디는 1204년 프랑스 왕의 통치로 넘어갔다가 14~15세기의 백년전쟁 때 영국군에 잠시 점령당한 적도 있다. 16세기 新舊敎(신구교) 사이의 종교 분쟁 때는 노르망디 사람들이 新敎로 개종하였다가 탄압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일제히 루터교로 개종, 유럽에서 가장 먼저 신교 국가로 변한다. 17세기 노르망디 출신들이 北美(북미) 지역으로 넘어가 지금의 캐나다와 미국에 방대한 지역을 확보하였다. 캐나다의 퀘벡, 미국의 루이지아나(뉴올리안스) 지역을 개척한 이들이 바이킹의 피를 이어 받은 프랑스인들이었다.
바이킹-노르만 족은 몽골-투르크 족처럼 많은 나라를 부수고, 만들고, 키운 세계사의 대표적 지배민족이다. 바이킹 족이 만들거나 세운 나라들은 거의가 一流(일류)가 되었다. 시실리 왕국, 영국,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핀란드(바이킹에 의하여 정복), 덴마크, 스웨덴 등등. 캐나다와 미국에서도 이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나 시골은 삶의 질이 매우 높다. 일류국가 또는 일류문명 제조기라고 부를 만하다. ‘바이킹 = 一流’의 비결은 무엇인가? 바이킹 족이 10세기 무렵까지 유럽에서 가장 미개한 종족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原始(원시)신앙을 가졌으며, 심지어 殉葬(순장)까지 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하나의 기적이다.
1. 체력이 좋고 용감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死生觀(사생관)을 가졌다.
2. 戰士 집단이면서도 의외로 사회가 민주적이고 평등하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는 노르만 족이 시실리에 만든 것이다.
3. 전쟁기술에 못지않게 통치, 행정 기술이 뛰어났다. 異民族(이민족)을 다스릴 때는 개방, 관용, 실용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통합의 에너지를 동원, 주로 상공업과 건설에 썼다.
4. 해양적 탐험 정신과 이를 뒷받침하는 치밀한 계획 및 기술습득이 제2의 天性(천성)이 되었다.
이하는 趙甲濟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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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탈리아의 4大 해양도시 중 하나인 아말피(나폴리 근처)의 새벽. 사라센 해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절벽을 깎아 도시를 짓고 미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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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유적. 나폴리, 폼페이, 아말피는 베수베오스 산을 중심으로 인접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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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해안 절벽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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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船에서 본 시실리의 에트나 화산. 한라산처럼 이 섬의 중심이다. 높이 3300m. 60만 년 전에 생성된 매우 젊은 활화산으로 자주 폭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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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산의 분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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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타오르미나에서 바라본 해발 500m의 山頂 도시 카스텔몰라. '어금니'란 뜻이다. 아랍 지배 시절 세운 도시를 노르만이 발전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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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에 있는 그리스-로마 시절의 半圓(반원) 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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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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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타오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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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상징 紋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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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르미나 시내 건물의 벽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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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풍경엔 늘 에트나 산정이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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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 근처의 해안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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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 근처의 山城(산성). 12세기 경, 노르만이 시실리를 점령하고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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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고대가 공존하는 시실리의 古都(고도) 시라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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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의 석회암 채석장.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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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성당. 그리스 신전을 기초로 만든 성당인데, 내부가 단순하고 정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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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근교 노토의 바로크 식 건축물.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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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토의 바로크 식 건축물. 17세기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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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토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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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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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la Romana del Casale라고 불리는 시실리의 로마 시대 대저택 건물 바닥에는 서기 3~4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 그림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당시 지배층의 생활과 패션을 느낄 수 있다. 위의 모자이크는 생포한 코끼리를 배에 싣는 모습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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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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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비키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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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 족이 세운 시실리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 시내에 있는 '궁전 예배당'은 호화찬란하다. 노르만-아랍-비잔틴-그리스 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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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르모 시내의 야외 카페, 尙美會(상미회) 여행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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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레알레 성당 벽에는 베드로가 거꾸로 메달려 십자가 刑을 당하는 모자이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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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르모 근교에 몽레알레 성당을 지은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구글리엘모 2세)이 성당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뜻을 담은 조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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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레알레 성당과 수도원의 아랍 풍 정원 및 회랑. 노르만-아랍-비잔틴 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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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음식점 정원 풍경 |
나폴리 만을 지키는 노르만의 海城. 안에는 수백 명이 버틸 수 있을 만한 생활공간이 요새화되어 있다.
인천~밀라노 대한항공기 창을 통해 내려다 본 알프사 산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