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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白石.1912.7.1∼1963?)
시인. 본명 기행(夔行). 평북 정주(定州) 출생. 오산(五山)중학을 쳐 1934년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 졸업. [조선일보사] 출판부 근무.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 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광복 후 고향에 머물렀다가 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라는 아호(雅號)가 있었으나, 작품에서는 거의 ‘白石’을 쓰고 있다. 8ㆍ15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ㆍ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함흥 소재)ㆍ여성사ㆍ왕문사(旺文社, 일본 동경) 등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였다. 한때 그는 북한에 남아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가 않다. 백석은 그 시대 어느 문학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을의 유화(遺話)> <닭을 채인 이야기> 등 몇 편의 산문과 번역소설 및 논문을 남기고 있으나, 그는 실지로 시작 활동에 주력하였다. 1936년 1월 33편의 시작품을 4부로 나누어 편성한 시집 <사슴>을 간행함으로써 그의 문단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기까지 60여 편의 시작품을 그가 관여했던 [여성]지를 위시하여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분단 이후의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한마디로 백석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그 마을에 전승되는 민속과 속신(俗信) 등을 소재로 그 지방의 토착어(土着語)를 구사하여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철학의 단면을 제시한 것이다. 어린 시절로 회귀하여 바라다보는 고향은 대개 회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상투이지만, 백석은 그 체험조직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의 어린 눈에 비쳐진 고향의 원초적인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환기되는 정서의 순화를 의도하고 있다. 그는 마을의 민속이나 속신 같은 것을 재현시키면서도 자신의 감정이나 주관의 개입 없이 언제나 객관적인 입장에 섰다. 그 마을의 자연과 소박한 주민들의 원초적인 ‘삶’의 리얼리티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룩한 이런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연보】
1912 :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 백용삼(白龍三)의 장남으로 출생. 본명 기행.
1918 : 오산소학교 입학, 24년 오산학교 입학
1929 : 오산고보 졸업, 일본 동경의 창산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 공부
1934 :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 :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등단,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
1936 : 시집 <사슴> 출간
1939 : 만주의 장춘으로 옮겨감. 생계를 위해 측량보조원, 소작인 생활을 함
1942 :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 : 귀국. 고향 북한 정주에 정착, 문학활동
1987 : <백석시전집>(창작사) 간행
1988년 백석 전작시집 <가즈랑집 할머니>(새문사) 간행
1989년 백석 전작시집 <흰 바람벽이 있어>(고려원) 간행
【특징】
남쪽의 정지용, 북의 백석이라 할 정도로 1930년대 민족의 피폐한 삶의 모습을 토속적 어휘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시적 경향은 사실주의에 바탕한다.
그는 평안도 사투리를 잘 활용하여 소박한 시골 풍경과 구수한 흙 냄새가 나는 원초적 삶의 현장을 독특한 서정으로 표현했다. 그의 시를 읽으면 당시의 평안도 농촌 풍경이 선연히 떠오르며, 그와 같은 풍경을 특유의 언어로 형상화한, 서사적 시의 각별한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백석의 시세계의 주인공은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잠겨 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세계에 잠겨 있는 만큼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현실의 자신과 모순되어 있는 상태를 심화시킨다.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백석의 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창조적 힘이다.
한마디로 백석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그 마을에 전승되는 민속과 속신(俗信) 등을 소재로 그 지방의 토착어(土着語)를 구사하여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철학의 단면을 제시한 것이다. 어린 시절로 회귀하여 바라다보는 고향은 대개 회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상투이지만, 백석은 그 체험조직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의 어린 눈에 비쳐진 고향의 원초적인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환기되는 정서의 순화를 의도하고 있다. 그는 마을의 민속이나 속신 같은 것을 재현시키면서도 자신의 감정이나 주관의 개입 없이 언제나 객관적인 입장에 섰다.
그 마을의 자연과 소박한 주민들의 원초적인 ‘삶’의 리얼리티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룩한 이런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시】<정주성>(1935.조선일보) <여우난 곬족>(조광.1935.12) <통영(統營)>(조광,1935.12) <고야(古夜)>(조광.1936.1) *<여승>(1936) *<모닥불>(1936) <추일야경(秋日夜景)>(1938.삼천리문학) <석양(夕陽)>(1938.삼천리문학) <고향>(1938.삼천리문학) <절망>(1938.삼천리문학) <수박씨 호박씨>(1940.인문평론) <적막 강산>(1947.신천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1948.학풍)
【시집】<사슴>(1936.저자발행본.단 한 권뿐) <가즈랑집 할머니>(1988.새문사.전작시집) <흰 바람벽이 있어>(1989.고려원.전작시집)
【전집】<백석시전집>(1987.창작사) <백석전집>(1997.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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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평전>
▶화석이 돼 버린 천재 시인
오늘날 백석(白石)이라는 천재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의 시를 읽은 사람은 더더구나 드물다. 소수의 문예 연구자들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뿐이다. 식민지 시대의 이 뛰어난 서정시인의 이름은 남쪽에서는 잊혀졌고, 북쪽에서는 문인 인명록에서조차 삭제된 채 화석이 되어 버렸다.
1912년 부친 백시박과 모친 이봉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부친은 개화한 인물로 당시에는 드물었던 사진 기술을 가지고 있던 이였다. 백석은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왔는데, 특별히 문학과 영어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백석은 조선일보 사진 반장으로 재직하던 부친의 권유로 계초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도쿄의 명문 대학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의 교정부에 입사하게 된다.
▶시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가슴
1937년 겨울,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영어 선생이었던 백석은 함경도 산간 오지에서 홀로 시고(詩稿)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 바로 전해에 백석은 시집 <사슴>을 출간한 뒤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었다.
<사슴>은 대학 졸업 후 신문사에 입사한 뒤 신문사 일과 틈틈이 번역 일을 하며 준비했던 백석의 초기작 33편의 시들을 담은 처녀시집이다. 이 때 그의 가슴에는 시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 해나 다니던 조선일보사 교정직을 작파해 버리고, 함흥으로 올라온 것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백석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삶을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눈 덮인 함경도 산간 지방의 고적한 여인숙에 묵으며 <함주시초>를 비롯한 여러 시편들을 썼다.
▶사랑을 남기고 만주로 떠나다
그러나 그의 가슴 한 편은 허전했다. 두 해 전 친구 허준의 결혼 피로연에서 잠깐 만났던 당시 이화고녀 학생이던 난(蘭)이란 처녀, 그리고 지난 가을 영생고보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만난 자야(子夜), 영생고보 학내 분규로 퇴학당한 애제자 고순덕의 얼굴이 착잡하게 스쳐가는 것이다.
1939년 29세 때 백석은 영생고보를 사직하고 다시 서울로 내려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한다. 그 무렵 조선일보사 사진 반장으로 있던 부친은 신문사를 그만두었으며, 동료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난의 집을 방문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고 한다. 난을 만나는 순간 백석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으나,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좋아한다고 고백하기는커녕 재입사한 지 열 달만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 버렸다. 백석은 만주로 떠나면서 친구 소설가 허준과 화가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일백 편을 건져 오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40년 만주 신경에 도착한 백석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직장을 얻는다. 나중에 일본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그곳 일을 그만둘 때까지 그는 시작(詩作)과 직장 일에 충실했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았던 집은 토굴이나 같은 곳이어서 주말마다 근교의 러시아인촌으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그 때 북만주 산간 오지의 원시 부족들과도 친교를 맺었고, 밤이면 시 일백 편을 건지기 위해 시작에 몰입하는 생활을 하였다.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시
30세가 된 백석은 이미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힌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은 발표될 때마다 화제였고, 그의 시가 실린 잡지들은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 나갔다. 백석의 명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실었던 [학풍] 1948년 10월호 후기에서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라고 백석을 극찬하였다. 그의 시는 아름다운 북방 언어의 보고이다. 그의 시어들은 낯설어 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북방 정서가 깊이 배어 있다. 백석의 현저한 토속어 지향의 시세계는 한국인의 얼과 혼을 황홀할 정도로 빼어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격동의 시대 속에서 증발해 버린 삶의 궤적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강화되면서 백석은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 몇 번의 결혼과 실패, 방랑, 일제의 수탈로 거덜나버린 참담한 민족 현실 앞에 절망한 시인은 서서히 꺾여 갔다. 백석은 만주국 경제부 자리를 그만둔 뒤 낙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안동세관의 세무 공무원으로 지내기도 하고, 다시 월북하는 등 구름처럼 떠돌다가 평양에 정착한다. 광복 후 북쪽에 남은 백석은 고당 조만식 선생의 통역을 맡는 등의 사회 활동을 하며, 러시아 작품들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북한의 어느 문학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그는 연금, 집필 금지 등의 수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 이후 북한 문인 인명록에서조차 이름이 삭제되고, 그의 삶의 궤적은 증발해버린다.
1930년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백석은 이렇게 북한에서 금지되고, 남한에서는 기피된 채 잊혀져 갔다. 1963년, 52세로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일본에 알려졌을 뿐이다.
<시대적 상황 앞에 파란만장했던 생애>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북방정서를 통해 시화(詩化)했다. 본명은 기행(夔行).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ㆍ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1935.12) <고야(古夜)>(조광.1936.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 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統營)>(조광,1935.12) <고향>(삼천리문학.1938.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1948.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펴냈다.
▶샛별 같은 모국어에 실린 민족 현실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 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 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 전문)
이 시의 첫 연에 나오는 사물들은 생물, 무생물의 구분을 따로 나눌 것 없이 우리들의 유년체험과 친숙하게 맞닿아 있는 모닥불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요긴하고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게 되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나 아예 버려진 하찮은 사물들끼리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의 광휘와 온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1∼2연에 등장하는 각 낱말 끝에 '∼도'라는 특수조사가 낱낱이 붙어 있는 것은 모닥불이라는 공간이 애틋한 소외존재들이 서로 만나는 평등한 장소임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여겨진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농촌적 정서를 아주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 농촌공동체의 여름, 저녁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 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 때 북으로 올라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김일성이 맨 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 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인에 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 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한 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 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가장 최근에 발간된 <백석전집>(김재용 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편이 넘는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석 문학의 특징은 상실되어가는 고향의식의 회복, 이를 통한 제국주의 문화의 극복,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따뜻한 긍정,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북방정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백석의 시는 우선 문체상의 개성이 다른 시인들에 비해 매우 뚜렷하다. 그가 즐겨 쓰고 있는 방법들은 대개 회고체, 방언체, 구어체, 의고체, 연결체, 만연체, 아동 어투의 독백체 등이며, 이는 민중적 정서를 농도짙게 풍겨나게 하는 기대를 갖고서 구사된다. 시인 자신의 유소년 시절의 체험과 고향 정서로써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들이 어김없이 회고체를 채택하게 하는 것이며,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지역의 방언이 그의 시작품의 방언적 토대가 되고 있다. 특히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구어체를 그대로 표기하므로써 생생한 현장감을 드높이고 있다. '금덤판,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녕감, 니차떡, 석박디, 데석님, 디운구신, 녀귀' 따위가 그 사례이다. 더불어 작품의 서사적 구조로 독자들을 이끌어 들이는 하나의 장치로써 연결형이 구사되고 있는 듯하다. ∼고, ∼며, ∼는데, ∼도 등이 가장 빈도수가 높은 연결형 어미와 조사들이다. 백석의 시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기형태는 '슳븐' '얹헜다' 등의 분철(分綴)과 '울ㄴ다' '알ㄴ다' '달ㄴ' 등에서 보여주는 ㄹ과 ㄴ의 자음겹침 형태이다. 이는 작중 화자가 사투리로 직접 말하는 듯한 생동감을 드높이기 위해 시도하는 형태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기법들은 정서법의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 있지 못한 시기에서 의고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시인 자신의 의도와 배려가 강력히 담겨 있는 부분이다.
백석의 시는 형태면에서도 독특한 변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가 대체로 서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례가 많으므로 담시, 서술시, 이야기시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그 외적 양식이 줄글 형태의 산문적 성격으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하다. 띄어쓰기도 시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낭송하기에 편리하도록 한 차례의 낭송호흡에 필요한 일정한 어절을 서로 통합하여 띄어쓰기 규칙성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백석 시의 원문을 주의해서 지켜보면 이런 점들이 당시 정서법 체계의 무질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된 것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연(聯)에 관한 부분에서도 아예 연구분이 없는 비연시 형태와 분명하게 연 구분을 획정하고 있는 연시 형태가 거의 반반씩 균형을 이룬다. 비연시 형태에서는 시 <비>의 경우처럼 단 2행으로 전체 형태가 완결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청시(靑柿)> <산비>처럼 3행 형태도 있다. 그런가 하면 4행형과 5행형 이상도 다수 있다. 연시 형태는 시 <초동일(初冬日)>처럼 특이한 2연형이 있고, 기타 3연형에서 5연형 이상까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으나 이 가운데 단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3연형이다. 줄글 형태는 행 구분과 연 구분을 모두 벗어난 산문시의 형태인데 백석은 이러한 형태도 더러 구사하고 있다. 백석의 시를 곰곰히 읽다 보면 그의 시가 조선 후기의 서정적 분위기가 감도는 사설시조의 형태를 방불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 황정을 캐어들고 집으로 돌아 들제 방경에 나는 꽃은 의건을 침노하고 벽수에 우는 새는 유수성을 화답한다 문앞에 다달아는 막대를 의지하여 사면을 살펴보니… 뜰 가운데 들어서니 섬돌밑에 어린 난초 옥로에 눌러 있고 울가에 성긴 꽃은 청풍에 나부낀다… 대수풀 우거진데 이슬바람 서늘하다. (안민영의 사설시조 중 일부)
(2) 한 십리 더 가면 절간이 있을 듯한 마을이다 낮기울은 볕이 장글장글하니 따스하다… 뒤울안에 복사꽃 핀 집엔 아무도 없나보다 뷔인 집에 꿩이 날어와 다니나 보다 울밖 늙은 들매남ㄱ에 튀튀새 한불 앉었다 … 어데서 송아지 매--하고 운다 골갯논드렁에서 미나리 밟고 서서 운다 (백석 <황일> 부분)
장면을 따라서 포커스가 서서히 공간 이동을 해가는 관찰자의 시점도 그렇거니와 형태와 분위기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서로 많이 느껴진다. 백석이 사설시조에 평소 애착을 가졌다는 그 어떤 자료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전통적인 문학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백석의 시를 율격면에서 고찰해보더라도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전집을 두루 일별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행의 율격 형식들을 볼 수 있다.
(1) 장―단―장
(2) 단―장
(3) 장―단―장―단―장―단
(4) 장―단―단―단―장―단―단―단
이러한 율격 형식들은 무작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작품의 효과를 예견하고 있는 시인 자신의 치밀한 배려가 깃들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질서를 갖고서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1)은 <산비>와 같은 전형성을 지닌다. (2)는 <청시>에서 그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다. (3)은 긴 행과 짧은 행을 규칙적으로 교체 반복해가는 방법이다. (4)는 한 줄의 긴 행 다음에 짧은 행을 세 줄 반복하고 나서 다시 긴 행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행 형식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고, 더불어 주제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적절한 형태를 선택하고 있다.
<연잣간>과 같은 시는 2행 반복율이 특징이고, <바다>는 3행 반복율로 보인다. 운율법으로는 일종의 각운 형식을 방불하게 하는 것이 가장 많다. <대산동(大山洞)> <물닭의 소리> <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 <안동> <목구(木具)> <수박씨 호박씨> <적막강산> 등의 시작품에서 그러한 운율 형식을 느낄 수 있다. 또하나 특이한 점은 시 <황일(黃日)>의 결말 부분처럼 줄글 형태의 끝에 부분적 정형율을 삽입하는 경우이다. 줄글을 곧장 읽어내려갈 때 발생될 수 있는 분위기의 따분함이나 단조로움을 극복시키려는 의도적 장치로 여겨진다. 이러한 계열의 한 갈래로서 <오리 망아지 토끼> <오금덩이라는 곳>등의 시작품처럼 작중 화자나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삽입한 형태도 있다.
한편 백석 시의 특징적인 분위기 가운데는 이미지의 구사가 유난히 독특한 면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추억을 환기시키거나 토속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불러일으킬 때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는 회고적 상상적 이미지이다. 이와 더불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의 민감한 반응을 작용시켜 현장의 생동하는 느낌을 더욱 실감나게 고조시킨다. 시 <동뇨부(童尿賦)>와 같은 경우는 1연의 '누어 싸는 오줌이 넓적다리를 흐르는 따끈따끈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으로 표현된 촉각적 이미지, 2연의 '첫 여름 이른 저녁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로 표현된 후각적 이미지, 3연의 '새끼오강에 한없이 누는 잘 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로록 하는 소리'로 표현된 기발한 청각적 이미지, 4연의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말갛기도 샛맑았다는' 색채 형용의 이미지가 한 편의 시작품속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 <북관(北關)>에서 명태창란젓을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라는 후각적 이미지와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이라는 미각적 이미지로 연결 통합시키고 있는 부분들은 백석 시만의 독특한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석의 시작품 세계에 전반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이미지는 고향과 관련된 이미지와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이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고향이 정주(定州)라는 작은 포구이기도 한 사실과 시인이 교사 생활을 하던 곳도 함흥 바닷가 연안 지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관심이 바다쪽으로 쏠리게 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 세계와 그 분위기가 가장 일치되는 공간에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된다는 설명과도 관련된다. <가키사키(柿崎)의 바다> <이즈 코쿠슈(伊豆國湊) 가도> <통영> <바다> <삼천포> <함주시초(咸州詩抄)>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계절 이미지도 빈번히 등장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은 시인 백석에게 있어서 그리움과 애틋함, 아름다움, 슬픔, 쓸쓸함 등으로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따라서 백석의 시는 어떤 고정된 계절 이미지에 구속되어 있질 않고 모든 것이 온유함과 쓸쓸한 분위기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시제들도 대다수가 과거 시간이거나 현재의 시점을 지키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특히 유소년 체험을 회상하는 과거 시제가 월등히 두드러진다. 현재 시제를 지키는 작품들은 대개 방황과 좌절을 표현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백석 시의 소재적 측면
백석의 시에서 다른 소재들에 비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는 음식물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그의 시전집을 통틀어 음식물 소재는 대략 150여종이나 된다. 이 음식물들을 살펴 보면 별반 특이한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무튼 우리의 토착적인 음식 문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외래 문화, 즉 제국주의적인 일본 문화의 침탈을 시인이 의식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적 분위기가 강렬히 풍겨나는 토속 음식들을 열거하고 집착을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주된 음식물이나 기호물, 또는 그 재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막써레기, 돌나물김치, 백설기,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우림, 둥굴네 우림, 도토리묵, 도토리 범벅, 광살구, 찰복숭아, 반디젓,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뽂운 잔디, 도야지 비게, 무이징게국, 찹쌀탁주, 왕밤, 두부산적, 소, 니차떡, 쇠든 밤, 은행여름, 곰국,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내빌물,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의 뒷다리, 날버들치,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미역국, 술국,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노루고기, 산나물, 조개, 김, 소라, 굴, 미역, 참치회, 청배, 임금알, 벌배, 돌배, 띨배, 오리, 육미탕, 금귤, 전복회, 해삼, 도미, 가재미, 파래, 아개미젓, 호루기젓, 대구, 건반밥, 명태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힌밥, 튀각, 자반, 머루, 꿀, 오가리, 석박디, 생강, 파, 청각, 마늘, 노루고기, 국수, 모밀가루, 떡, 모밀국수, 달재생선, 진장, 명태, 꽃조개, 물외, 꼴두기, 당콩밥, 가지냉국, 싱싱한 산꿩의 고기, 김치가재미, 동티미국, 밤참국수, 게산이알, 취향이돌배, 만두, 섭누에번디, 콩기름, 귀이리차, 칠성고기, 쏘가리, 35도 소주,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끓인 술국, 도야지 고기, 기장차떡, 기장쌀, 기장차랍, 기장감주, 기장쌀로 쑨 호박죽,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과일, 오두미, 수박씨, 호박씨, 멧돌,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감주, 대구국, 닭의 똥, 연소탕, 원소라는 중국떡, 고사리, 가지취, 뻑꾹채, 게루기,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도합 148종이 넘는다. 이 음식물들의 종류를 가려뽑아서 보면 백석의 시에서 동원된 음식들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먹는 생활 음식들의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시골 아이들이 어릴 적에 주워 먹던 길바닥의 닭똥도 있고, 젓갈에 가자미식혜 등의 지역 음식도 보인다. 거의 대다수가 민중적 향취가 느껴지는 음식물들이며,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구체적인 명칭도 상당수인 바 야생 동물, 가축, 물고기, 곤충 따위의 동물적 소재와 과수, 야생초, 약초, 해초, 채소, 과일, 곡식 등의 식물적 소재를 모두 추출하여 대비해보면 식물성이 약간 많다. 동물적 소재는 모두 72종 가량이 된다.
지렝이, 박각시, 주락시, 개구리, 자벌기, 거미, 찰거머리, 버러지, 노랑나비, 벌, 딱장벌레, 파리떼, 노루(복작노루), 곰, 멧도야지, 승냥이, 배암, 산토끼, 잔나비, 여우, 쪽재피(복쪽제비), 다람쥐, 도적괭이, 땅괭이, 호랑이, 당나귀, 오리, 개(강아지), 도적개, 얼럭소새끼, 도야지, 닭, 말(망아지), 토끼, 노새, 게사니, 소(송아지), 멧새, 물총새, 짝새, 까치(까막까치), 꿩(덜걱이), 멧비둘기, 어치, 제비, 물닭, 뻐꾸기, 갈새, 뫼추리, 갈매기, 물총새, 백령조, 꼴두기, 붕어, 농다리, 게, 굴, 소라, 조개(가무락 조개), 참치, 꼴두기, 전복, 해삼, 명태, 호루기, 대구, 칠성고기(칠성장어), 가재미, 도미, 반디, 미꾸라지, 쏘가리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류가 아니라 평화스러웁고 양순한 성질의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의 선택에서도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해 식물적 소재들은 도합 79종이나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시골 생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나물,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도토리, 살구나무, 찰복숭아, 배나무, 무이, 찹쌀, 왕밤, 천도복숭아, 콩가루, 섭구슬, 박, 감나무, 산뽕, 땅버들, 석류, 수리취, 송이버섯, 도라지꽃, 옥수수, 아카시아, 미역, 수무나무, 아주까리, 밤나무, 머루넝쿨, 재래종의 임금나무, 돌배, 벌배, 다래나무, 갈부던, 복사꽃, 들매나무, 삼, 숙변, 목단, 백복령, 산약, 택사, 금귤, 파래, 동백나무, 진달래, 개나리, 당콩, 머루, 쑥국화꽃, 자작나무, 바구지꽃, 강낭, 귀리, 모밀, 피나무, 버드나무, 호박씨, 수박씨, 이깔나무, 바구지꽃, 오이, 마늘, 파, 감자, 쉬영꽃, 뻑꾹채, 게루기, 고사리, 갈매나무, 싸리, 이스라치, 가지, 함박꽃
이러한 식물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작품 세계의 아늑하고 민중적인 삶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적어도 시작품속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구별이 느껴지지 않는 합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천부적으로 참된 슬픔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의 고귀함 등을 타고난 시인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백석이 자신의 문학적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신경에서 거주하던 시절 「만선일보(滿鮮日報)」(1940.5.9~10)에 발표한 하나의 짧은 시평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나 기질을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당시 시인 박팔양이 함께 신경에 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발간된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한 서평을 위의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백석은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진실로 높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것이 마음을 제사들오어 이것이 아니면 안심하지 못하고 입명(立命)하지 못하고 이것이 아니면 즐겁지 않은 때에 밖으로 얼마나 큰 간난(艱難)과 고통이 오는 것입니까? 속된 세상에서 가난하고 핍박을 받어 처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은 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서름차지 아니하겠습니까? 시인은 슬픈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안흔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魂)입니다. '외로운 것을 즐기는' 마음도, 세상 더러운 속중을 보고 '친구여!'하고 부르는 것도, '태양을 등진 거리를 다떨어진 병정 구두를 끌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마음도 다 슬픈 정신입니다. 이렇게 진실로 슬픈 정신에게야 속된 세상에 그득찬 근심과 수고가 그 무엇이겠습니까? 시인은 진실로 슬프고 근심스럽고, 괴로운 탓에 이 가운데서 즐거움이 그 마음을 왕래하는 것입니다.” (백석의 서평 <슬픔과 진실>-여수 박팔양씨 시초 독후감)의 부분)
이 글 속에서 백석이 말하는 '슬픈 정신'은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과 뭇사물에 대한 크나큰 연민이 아닐까 한다. 모든 것을 다 내 마음속에 애틋하게 수용하고, 특히 모든 소외된 사물들에 대하여 따뜻한 가슴으로 끌어안으려는 불교적 자비심, 혹은 기독교적인 긍휼이나 사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 '생명을 아끼는 마음' 등은 모름지기 시인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필수 덕목이자 품성인 것이다. 백석의 시가 유난히 작고 가냘프고 여린 것, 외롭고 못난 사물과 가여운 생명들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에 있을 것이다. 잘나고 거만하고 자신을 뻐기는 존재나 화려한 사물들은 적어도 백석의 문학적 관심에서 일단 벗어나 있다.
다음으로 백석의 시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동 유희 및 무속적 의식이나 민속 행사, 민중 의약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백석의 시가 주로 농도짙은 설화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주로 이러한 소재들을 표현하고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분위기라 하겠다.
<실향 의식 노래한 토속 시인> - [일간 스포츠](1988. 7. 25)
백석은 엄밀히 말해서 월북 문인은 아니다. 평남 정주가 고향인 그는 동경 유학과 서울에서의 기자생활을 거쳐 39년 만주로 떠나갔고, 해방 후에는 고향에 정착한 재북(在北) 시인이다.
분단 이후의 백석의 행적은 확실히 확인된 바가 없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해방 이전의 유일한 시집인 <사슴>에 실린 33편과 각종 잡지에 발표한 시 등 모두 90여 편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백석은 그 동안 잊혀진 시인으로 묻혀 있다가 최근에 들어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시인 최두석(崔斗錫)이 <백석연구>로 82년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땄고, 김명인(金明仁.경기대 교수)은 87년 백석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시인 이동순(李東洵-충북대 교수)은 지난해 94편의 시를 담은 <백석시전집>을 [창작과 비평사]에서 내는 등 백석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시인이다.
백석은 토속적인 향토시인이라는 점과 서사적 구조의 이야기시를 썼다는 점에서 30년대 중반 우리 문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두석은 백석의 특징을 ‘철저히 도시 문명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으며, 이동순은 역시 ‘같은 시대 어느 누구의 시보다도 더욱 진한 민족주체의 정신적 토양을 끌어안고 있다’고 평가한다.
백석의 시들은 대체로 진한 고향 상실감을 담고 있다. 그의 실향 의식은 식민치하의 망국에서 오는 보편적인 의식이며 그는 이러한 상실감을 고향의 강한 토속적 사투리로 노래한다. 그는 잃어버린 공동체적 삶에 대한 향수와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지켜 온 시인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가 방언학, 민속학, 식물학, 생태학에 깊은 조예를 가졌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은 이곳에서 잊혀지다시피한 북방의 정서를 담고 있어 신선한 느낌을 준다.(발췌)
<‘백석전집’ 발간>(1997) - [조선일보](1997. 9. 10)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 시 <고방>의 일부 -
백석은 평안도 방언을 시어로 사용하여 우리의 토속적인 삶의 모습을 이야기시 형태로 형상화한 3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36년 발표한 <사슴>으로 한국시사에 큰 발자취를 남겨 일부 국문학자들 사이에는 ‘남에는 정지용, 북에는 백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 납ㆍ월북 작가 작품 해금조치 이전까지는 잊혀진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백석전집>(실천문학사)이 발간되어 백석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집은 시와 소설을 비롯, 동화시, 수필, 평론, 정론에 이르기까지 백석의 저작을 망라하고 있다. 해방 이전의 시95편, 수필 3편, 소설 3편을 비롯, 해방 이후 발표한 동화시 12편, 시13편, 평문 4편, 정론 3편이 실려있다.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 33편은 이번에 최초로 독자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백석은 본명이 백기행으로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를 거쳐 34년 일본의 청산학원을 졸업했으며 35년에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전집」을 엮은 문학평론가 김재용씨는 “백석문학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일제하는 물론이고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까지 포함해 전반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백석 작품의 특색은 민속적 세계다. 그는 전근대 민중들의 생활 속에 전해 내려오는 풍속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여우 난 곬족>이나 <칠월 백중> 등의 시에 나타나는 공동체는 근대인이 잃어버린 원형질의 세계다. 백석의 또 다른 특색은 지방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쓴 시가 많다는 것이다. 남행시초를 비롯해 관북지방, 특히 관서지방의 방언을 의식적으로 사용했다. 표준어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지만, 바탕에는 중앙 집권화가 지방나름의 구체적인 삶을 압살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해방 직후 만주에서 고향인 평북 정주에 돌아온 그는 당시의 남북 현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꿈을 가졌던 백석에게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큰 차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결국6․25 이후에도 남하하지 않고 삼팔선 이북에서 활동한 그는 본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시 쓰기를 버리고 번역을 하는 한편, 동시나 동화를 발표하기도 한다. 57년에 나온 <집게네 형제>는 시의 형식을 빌린 동화시집으로 혁명이나 계급의식보다 휴머니즘을 고양하려는 글들이 주로 실려 있다.
이런 경향이 북한 내부의 당파 분쟁에 겹쳐 백석은 58년 사실상 숙청되어 삼수군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한다. 그리고 62년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 비판과 연관되어 마침내 창작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자야(子夜) 여사의 회고
돌이켜 보면 그의 만주행은 함흥에서부터 계획해 오던 것이었고, 또 그가 재차 서울로 와서 옛 직장을 다시 나가고 한 해를 머무른 것도 결국은 나 때문에, 내가 마음에 걸려서였던 것 같다. 나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 함흥에서 만주로 곧장 떠나갔으리라. 그가 만주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깊은 속뜻을 내 얕은 여자의 소견으로 어찌 감히 짐작인들 했으랴. 그는 내가 자기 권유대로 쉽게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중략)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 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만주 신경 시절 백석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작가 송지영(宋志英) 씨의 술회로는 백석이 그때만큼은 고향의 부모에게 매달 약간의 송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 무렵 항상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송 씨가 "그 옷, 서울의 김이 보냈구려."하고 농을 걸면, 백석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이후 백석은 실직 상태가 되어서 만주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었던가 보다. 그가 이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었다는 생각을 하면 온통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 시절 만주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시 "횐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나는 필시 나의 모습으로 짐작되는 부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 있다. 깊은 밤에 그의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 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 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이 시에서 그의 맑고 고결한 정신은 이미 세속을 훨씬 떠나 있는 듯하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흡사 그가 눈앞에 당장 되살아 온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말 속에는 평소의 그의 성품, 현실에 임하던 그의 모습 같은 것이 그대로 생생하게 스며 있다.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 온 것도 헤아려 보면 모두가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 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 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 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 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출처 : 이동순 편 <백석시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