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지금
김문숙
휴대폰이 울렸다. 아이의 전화번호였다.“우찌됐노?” 다급한 마음에 PCR 결과부터 물었다. “이번에는 미화원 아주머니들과 입원한 어르신들이 확진됐어요.” 기운이 바닥으로 내려앉는데 전해오는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아이고 자꾸 이캐가 어짜노.” 대답에 걱정의 옷을 입히자 이번에도 집에 못 내려갈 거 같다고 했다. 조심하겠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음성이 다시 들렸다. 제발 그러라고 부탁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설마 또 나올까 반의하며 확진자가 나오지 않기를 빌었지만, 아이의 직장에서도 오미크론 전파를 막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냉장고 찬 통도 벌써 다 비워졌을 것인데, 마음 같아서는 코로나19에 걸릴까 두렵기만 한 그 직장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청년실업 시대라고 부르는 요즘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잇달아 양성판정자가 나오는 조마조마한 직장에서 제 몫을 하려는 아이를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어미는 걱정이 가득하다.
아이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은 코로나 시국이 닥쳤을 때부터 두 해 가까이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다. 종사하시는 분들의 엄격한 관리에 입원하신 어르신들이나 그 가족들도 병원의 준수 방침을 철저히 지켜왔다. 그러해도 마음 구석에서는 혹여 확진자가 나오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그때는 감염되면 바이러스가 폐로 내려가 치명상을 입히고, 후유증도 심각하다고 알려졌다. 공포로 다가온 펜데믹에 수많은 중증 환자들이 사망했다는 소식과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내 두려움을 크게 했다. 다른 요양원에서 확진자가 급증하고, 전국적으로 수치가 불어나는 와중에 무슨 비결이 있는 것인지 노 코로나를 유지하는 아이의 직장이 미덥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실시된 위드 코로나 이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갑자기 확진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간호사가 덜컥 확진되고 말았다. 내부는 발칵 뒤집혔다. 자신들의 비책으로 코로나를 잘 막아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방어선이 터져버리자 난리가 난 것이다. 행정실에서 망원경으로 탐색하듯 확진 경로를 거슬러 보았지만 찾을 수도 없었다. 그 간호사와 아이가 업무상 자주 맞닥뜨리는데 밀접 접촉자가 되어 큰일이라는 생각에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일주일에 세 번 PCR 검사를 하고도 그길로 코로나 소독수로 방역을 다시 하고, 입원하신 어르신들과 전 직원이 검사를 또 받았다. 그때는 그 간호사만 양성이었으나 누군가는 바이러스가 몸 안에 잠복 중인 모양이었다. 며칠 안에 다른 업무를 보는 직원들이 양성판정을 받고, 일정 기간이 지나자 주방을 담당하는 조리사들이 또 확진되었다. 뒤이은 릴레이 확진자에 내내 음성이었던 아이는, 이틀은 나중에 양성반응을 보인 직원들과 밀접 접촉자가 되었는지라 자신도 모르게 바이러스가 들어와 잠복 중인지 알 수가 없었다. 퇴근하면 집으로 달려가 야간시간이라도 확진자처럼 스스로 격리하였다. 필요한 것이 생겨도 마트도 가지 못했다.
찬을 가지러 시골집에 오곤 했었는데, 연속으로 스스로 격리하다 보니 주말에도 집에 올 수가 없었다. 그것이 넷째 주로 이어지자 설날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반찬과 명절 음식을 싼 보따리를 들고 아이한테 갔다. ‘어머니 아직 대면은 안 됩니다.’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그리리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아이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처량해졌다. 염려스러운 제집에 부모를 들여놓지 않겠다는 부탁대로 보따리를 현관문 앞에 내려놓자, 내 감성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코로나가 뭐 겁나나? 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고생하는 아이 얼굴 한번 보고, 방이며 냉장고도 살펴줘야 해!’그러자 이성이‘만약에 네가 확진되면 기저질환이 있는 남편이 감염될 것이고, 바쁜 우사와 농사는 누가 하나.’단번에 거절의 뜻을 토로했다. 잠시 저울질 된 마음을 떨치고, 현관문을 두드려 놓은 후 우물쭈물 아래층의 층계를 다 내려서자, 문이 조금 열렸다. 저도 안에서 우리가 저만치 떨어지길 기다린 것이다. 먼발치에서 마스크 쓴 반쪽 얼굴만 겨우 보이는데 반찬도 없이 때를 먹어서 그런지 조금 야윈 듯했다.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으니 혹시 모르니 손 소독 잘하고, 얼른 시골집으로 가시라 했다.
먼 길 달려와서 이런 식으로 가야 한다니, 갑자기 부아가 치밀고 마음이 울컥했다. 감염될까 봐 겁이 나서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온 내가 비겁하고 무정한 엄마 같기도 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이 이름을 부르니 “어쩔 수 없는 형편이니 서로 이해해야 해요. 잘 견딜게요!”차분한 목소리로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현관문을 닫겠다고 할 때까지 내외가 지켜보고 서 있는데 아이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대체 이 시국이 언제 끝나려나 하고 궁시렁거리며 조심하라는 말만 거듭하고 헤어졌다.
층계를 내려오는데 남편의 눈이 불그레해졌다.“나는 고마 화가 부쩍 돋는다.”오랫만에 아들한테 와서 다정히 앉아 정담도 나누지 못하고, 얼핏 실루엣 같은 모습만 본체 얼른 돌아서야 하니 나오는 말이었다. 이심전심이지만 어쩔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혈육을 격리하고, 사람 사이를 떼어 놓고, 잡히지도 않은 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느냐 말이다. 분노 속에‘이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야. 예전으로 돌아가야 해!’마음속으로 외쳐보았지만 힘든 코로나 현실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나만 이렇게 지내는 것도 아니고 더한 고통 속에 계시는 분들도 많지 않은가. 나의 경우는 고통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야!’스스로 위안하면서도 고속도로를 타고 귀가하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위로 두 딸을 두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얻은 아이였다. 딸들에겐 미안하면서도 아들을 더 위한 것은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대를 우선하는 가풍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코로나가 급속히 퍼지는 현장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온 신경이 꽂혀 버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세 해째나 끈질기게 달라붙어 소멸하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 맑고 고요하던 아이의 직장은 이제, 확진자의 시동을 걸고 달리는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멈추지 않고 숫자를 더해가는 확진자, 뉴스 속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오미크론 수치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다. 달 포 전부터 시작된 확진자 발생은 앞으로 아이의 일이 될까 애간장만 검게 덧칠한다.
걱정이 많은 이 어미와는 다르게 아이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사는 문제가 달린 일이기도 하겠지만 극복하려는 의지로 코로나와 맞서고 있질 않은가. 어디 이 일이 내 아이만의 문제겠는가. 지금 온 세상의 일인 것을.
코로나19가 어디까지 진행이 되려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극복하는 순간도 반드시 오리라 믿고 싶다. 아이에게 전반기를 무사히 넘어와 준 것처럼 종식 때까지 버텨 달라고 기도만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