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선시인 / 만월滿月의 여자
간장을 뜨려다 문득
장독 속 빠져 있는 여자를 보네
거울에 얼비치는
퉁퉁 불은 보름달
국자로 건져 올리려다 빠뜨리고 빠뜨리네
찌그러졌다 펴졌다 도리질로 앙버티는
고집이 제법인 여자
천천히 자지러져
고요에 맞닿을 때까지 나는
아득한 독 안을 오오래 들여다보네
아찔하니 멀미가 이네
버캐 앉은 짜디 짠 생 흔들리다 울렁증 일어도
십자가 덧짐 지고
깊은 적막의 테두리 벗어나지 않은 탕탕한 세월
묵혀져 더 깊고 융숭한 초로의 단내가 되네
가을 햇살이 만월의 여자를 마침내 도닥이네
정영선시인 / 겨울 사잇길
긴 겨울 허리 가로질러
헐렁한 배낭 둘러메고 자작나무 빼곡한 숲길 걷는다
은회색 미끈한 몸매 자작자작 뱃살 트는 소리
절로 들린다
바람은 늙은 억새 듬성한 머리카락
앙상한 손가락으로 가르마질 하다가
제 서러움 무시로 휘파람으로 풀어낸다
저만치 허공에 길 내어 등불 켜 든 노박덩굴
반가이 나그네 맞는다
신은 당신의 메마른 겨울 정원에
까치밥, 망개 열매 매달아 산새들을 부르시고
나지막한 시누대 숲 사이에 빈 뱁새 둥지 걸어놓아
내 궁금증 부풀린다
마른 풀잎 고이 엮어
첫 시집 같은 신혼집 오목하니 지어
포란의 흔적 뒤로
껍질 벗은 새끼 새 서툰 날갯짓하며 이 방주 떠날 때
허공에 정점 찍으며
새끼 음성에 귀 세워 마른 애 태웠을 어미새
언제 적에 나, 껍질 벗고 고향 떠나왔던가
겨울 산 적막 쪼아대는 딱따구리 부리에
늦은 햇살 꺾이어
도끼날 부리에 푸른 멍 들겠다
정영선시인 / 선인장 모텔
ㅡ불면
발길 따라 닿은 낯선 길가 모텔에 등짝 눕히다
무당집 냄새 물씬 난다
접시꽃 포인트 벽지에 금박 꽃 붉은 커튼
한 판의 굿마당이다
어둠이 되감기는
저승길 화려한 꽃가마 사각 틀에 갇혀
껌벅이는 눈으로
굳게 닫힌 죽음의 성 들지 못하고
불면의 허물 낱낱이 해부할 때
머릿속 수천 개 별똥별 정자꼬리처럼 헤적인다
횡격막 부풀리며 몸 일으켜
취해 붉은 정수기 눈 조준하다가
코골이 냉장고에 삿대질하다가
지렁지렁한 그들 목숨 줄 다 끊어 놓고
다시, 시체싸개 같은 흰 시트에 주검처럼 누웠어도
머릿속 사랑초꽃 주저리로 피어나는
정영선시인 / 섬
떨어져 나앉은 시간만큼 외로움도 깊었을 터
아무런 각오 없이 생고집으로 스스로를 변방에 방임했을까마는
의문 부호로 떠 있는 그대에게 무시로 뱃고동
화해를 타전하고
그 속내 읽어내려 갈매기 끼룩대며 보채건만
스스로 가파른 벼랑 깎아
범접치 못할 닻을 내려
미동 없이 수평선만 응시하다가
그물처럼 조여 오는 외로움 털어내지 못해
절규하듯 제 가슴 풀어헤쳐 날선 파도에 맨살 뜯겨도
뜯긴 살점보다 더 깊이 팬 오목가슴 상처
아픈 꽃으로 피는 밤이면
홀로 앓는 소리, 하얀 포말에 묻어버리고
짭조름한 아침 갯내음에
헝클어진 마음 추스르며 시치미 뚝, 떼고 앉은
나도 때론 섬이 된다
정영선시인 / 무채화
마른 연잎 구겨진 치맛자락
이 빠진 연 숭어리 허리 꺾인 노파는
녹슨 날들 외면하며 설운 춤 추다가
태초 말씀 되짚으며 스스로를 접는다
시간의 포개짐은
계절과 계절 사이에 붉은 경계를 긋고
그 경계 사이에
연꽃잎 떨구고 간 채 읽지 못한 사연의 엽서
무수히 남았는데
흘림체로 쓰여진 체념의 문장 오롯하다
기울어진 세월에 잉태된 무채화 한 폭
내가 접수하다
정영선시인 / 바람새로 우는
흑 흑, 바람의 혼이 울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나뭇가지에 우쭐대며 물구나무 서는 바람
신들린 듯 칼춤 추다 꼬리 감추는 바람
모두 떠난 가지 끝에 쪼그려
머리채 흔들며 우는 또 다른
바람
한번 떠난 바람씨는 돌아 올 줄 모르는데
바람 맞은 여자는 또 다른 바람 낳아
헛바람 콧바람 엉덩잇바람으로
묏바람 들바람 냇바람이 들어
소소리바람 건들바람 된바람 몰아치다
길바닥에 치마 벗고 회오리바람으로 나 뒹굴다
떠난 자리
바람새로 우는 그대
정영선시인 / 꽃멀미나 할란다
이 봄날, 섬진강으로 핸들 잡은 바람난 여자가 간다
늘상 고향 쪽으로 벋어있는 촉수에 꽃 기별 와
저당 잡힌 내일의 태엽 풀어 달려간다, 가서
꽃멀미나 할란다
휘어진 섬진강 허리춤에 감겨 모롱이 돌 때마다
뭉텅뭉텅 안겨오는 분내음
진저리나게 피어 꽃 사태 난 매화 향에, 나
꽃멀미나 할란다
화개장터 지나 구례 마을 산수유
푸수수 꿈꾸는 꽃 돌담 위 아른거릴 때
골목길 걷다 말고 꽃그늘에 앉아
무심코 올려다보면
노란 멀미 아득 이는
쌍계사 십리 벚꽃 타닥타닥 팝콘처럼 튀면
무장무장 따라 피는 순백의 하동 배꽃
강바람에 하롱하롱 흰나비로 날으는
실컷 나 꽃멀미나 할란다
꽃자리같이 내 탯줄 자른 땅 꽃내에 취해
스러져나 볼란다
정영선시인 / 소리꽃 자리
감잎 붉은 이파리 두어 장 책갈피에 뉘었다가 창가에 내어걸다
바스락 금이 갈 것 같은 몸피로 쇄골에서 흘러내린 핏줄들 사이사이
세월 더께로 가부좌한 검버섯 어룽인다
잎새는 떠나는 가을 꽁무니 좇다 말고 여름벌레가 갉아 먹다만 옆구리를 긁적인다
연둣빛 통통한 애벌레 주억이며 베어 먹던 소리꽃 사각사각 소금기둥 되어 서 있다
가을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한 채 양면테이프에 두 발이 묶여 있다
정영선시인 / 다래끼 꽃
내 촉수는 온통 그에게로 뻗어있다
붉은 사춘기 쉼 없이 피고 지던 꽃봉오리
발작하듯 갱년의 가을 뜰에 다시 부풀어
달포가 지나도록 피지도 이울지도 않아
어둑살 삼거리에 몰래 나가
납작 돌멩이에 속눈썹 뽑아 올려
퉤퉤 침 뱉고도 못 미더워
자잘한 돌멩이로 다래끼 집 지어
누군가 걷어차길 간절히 빌었건만
옷 앞섶 실로 묶으면 질식해 시든다 하였지만
발기된 꽃봉오리 시들 줄 몰라
언젠가 농익어 노란 꽃술 드러내는 날
엄지손톱에 십자가 긋던 탱자가시 끝에서 뭉텅,
하혈 쏟으며 스러질
화농의 넋
누름돌
정영선
오늘같이 자만이 삐죽이 고개 드는 날이면
심중에 눌러 둘 묵직한 돌 한 개 생각난다
고들빼기 쓰디쓴 물 우러날 때까지
뻣뻣한 풋고추 곰삭을 때까지
꿈쩍 않고 앉아 있을
목울대에 불덩이 오르내리는 날이면
차가운 이성의 돌 한 개 생각난다
꼿꼿한 자존이 뭉그러질 때까지
발설의 욕구 수그러들 때까지
지긋하게 눌러 둘
건들바람에 마음 깃 나부끼는 날이면
가부좌 무릎 위에 누름돌 한 개 얹어 놓고
몸 비틀어 튼실한 시 한 줄 낳고 싶다
반질반질 묵직한 돌 같은
주남저수지에 와 보시라
정영선
그대, 주남저수지에 와 보시라
가을날 조붓한 코스모스 길 밟으면
손끝에 와 닿는 순금빛 들판
서툰 소리꾼의 휘몰이 장단에 머리채 흔드는 억새
풀섶에 겅중대는 다리 긴 방아깨비
호수에 잠방대는 물잠자리 흘레에 물빛도 숨 멎나니
그대, 주남저수지에 와 보시라
해질녘 호젓이 둑길 걸으면
노을이 맨몸 담글 때 붉어지는 호수의 낯빛
간당간당 가지 더 늘어뜨리는 수양버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꽁무니 좇는 쇠물닭 새끼들
어둠을 끌어당기는 가창오리 군무
지우며 그려내는 바람의 물무늬에
그대 취하리니
그대, 무시로 주남저수지에 와 보시라
날빛 따라 옷을 갈아입는 호수는
비 오면 오는 대로 갠 날은 갠 대로
그가 풀어내는 몸짓과 언어가 다르며
아침과 한낮, 저물녘 표정과 메시지 또한 다른
주남저수지에 그대 한번 빠져보시라
논우렁이
정영선
온 몸 비틀어
제 살 속 잉태한 모래알 같은 새끼들
목젖 아프게 토해놓고
허물어지는 육신아
철없는 새끼들
식어빠진 어미 속살
마지막 한 점까지 다 뜯어먹고
늑골 넓히며 우렁우렁 등껍질 키워갈 때
둥둥, 물 위로 떠오르는 껍데기
살아 온 날 결코 가볍지 않은
뜨거운 생의 무게
담쟁이 단풍
정영선
갯가
돌담
바알 발
옆걸음질로 기어오른다
돌 틈에서
빠져 나온
붉은발말똥게
햇살에 발갛게
등껍질 익는 줄도 모르고
줄
지어
어딜 가시나
외딴 집
정영선
꼬부랑 할머니, 달팽이 뿔 같은 지팡이로 하루를 누이고 일으키며 밤 쭉정이 같은 집에 들며 나며 산다. 수수모가지 붉은 뒷목 당기는 한낮 사부작사부작 가풀진 뒷밭에 올라 풀물 든 손톱으로 고구마 줄기 따며 궁시렁거리더니 어느새 붉은 고추 한 자루 따서는 질질 끌며 누런 호박 나뒹구는 두렁길 기어서 오신다. 손바닥만 한 볕바른 마당에 닿자 갈고리 손으로 키 가득 널어놓은 햇참깨 두어 되에 깨알보다 많은 참새 떼 콩콩 뛰는 부정맥으로 꼬습한 시간 쪼다가 인기척에 깨알 튀는 소리 흩뿌리며 날아오른다. 할머니, 혀를 차다가 양철 소리로 엄나무에 째째째 앉은 참새 떼 꾸짖으며 헛팔매질로 후이 후이 역정 내신다. 할머니 속마음 읽고 있는 참새들 달아나는 척 제자리 맴돈다. 연신 궁시렁거리는 할머니, 째째 거리는 참새떼
종일 봄을 튀기다
정영선
동구 밖 벚꽃나무 아래서
뻥튀기 아저씨 종일 봄을 튀긴다
지구 궤도를 공전하던 알갱이들이
달구어진 압력을 못 이겨 꽃살로 터진다
동네 꼬마들 덩달아 부풀어
동구 밖이 환하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야바위 같은
튀밥이지만
군것질만으로 포만했던
우리 삶의 언저리
또 다시 호각소리에 펑펑, 벚꽃이 터진다
빈 캔
정영선
돌담 위에
버려진
빈 캔
빗물로 빈속을 채우고 있다
그 누구의 타는 목마름을 위해
기꺼이 내장까지 비워 준
이젠
골바람이 와서
울어주지 않아도 좋다
정동진
정영선
바다는 흑암 속 거친 숨소리로
수평선까지 달려가
하늘과 몸 섞으며 밤새 뒤채이다가
밝아오는 날빛에
흥건히
붉은 양수 터뜨리며
불끈 힘주어
햇덩이 순산하고는
알몸으로 퍼질러 앉아
절절 땀 흘리며 미역국 마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