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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개인 생활의 문제
열국의 전성기에도 지금까지 예언된 광명은
아무 흔적이 없다.
대포는 교단에서 위엄을 떨치고
시대는 노동과 황금으로 지쳤으며,
고상한 희망은 사라지고 기억은 희미하여졌다.
벽난로와 제단에는 불이 꺼졌다.
그러나 용감한 신앙은 헛되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관찰자가 말해 준 전부다.
- 프란시스 브라운
결론- 개인 생활의 문제
저자의 과제는 끝났다.
그러나 사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도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바 있는 문제는 더 고차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생활의 문제 뒤에는 개인생활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는 각각 분리하여서는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되므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와 같이 이 문제에 대하여서 계속 생각하여 가리라고 믿는 바이다. 왜냐하면 기조는 “문명사가 완성되고 우리들의 현재의 존재에 대하여서 이 이상(以上) 언급할 것이 없게 될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만사(萬事)가 전부 사용되었는지 혹은 만사의 종국에까지 도달하였는 지에 관해서 자문(自問)하고 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저자는 언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자는 다만 이 책을 쓰고 있으면서 경험하였던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나타났던 사상(思想)이 혹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여기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이 사상의 운명이 여하튼 간에 이것은 마음속에 새로운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에게 읽혀지기 때문인 것이다. 이들은 저자가 암시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도 또한 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는 우리도 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명백히 하고자 한 진리는 용이하게 납득(納得)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저자 자신도 알고 있다. 이 진리가 쉽게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용납(容納)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쉽게 용납될 수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그렇게 불명료(不明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명백히 하고자 한 진리에는 동조자(同調者)가 생길 것이다. 이 진리를 위하여 고생하며 고통을 당하며 유사시에는 목숨을 바칠 동조자가 생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리만이 가지고 있는 힘인 것이다.
이 진리가 종국에 가서는 보급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종국적으로는 보급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시대나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결핍과 참상과 또한 불공정한 사회제도에서 야기되고 있는 무지와 잔인을 보고서 자기의 힘이 미치는 한 그것을 시정(是正)하여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실망(失望)과 시련(試鍊)이 따르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대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시련을 많이 당하고 있는 사상은 때로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용감한 사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노력의 보람도 없이 절망적이며 희생도 무위(無爲)로 돌아가는 사상인 것이다.
씨를 뿌린 사람 중에서 그 씨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였으며, 더욱 그 씨가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였던가?
그러나 여기에 현혹(眩惑)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리와 정의의 원칙은 이 세계에 부단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부단히 유린(蹂躪)을 당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유혈의 참극(慘劇)을 빚어내는 때도 있는 것이다. 진리를 반대하고 있는 세력이 약하다고 할 것 같으면 부정(不正)이 어떻게 그렇게 장기간 유포(流布)될 수 있었으며, 머리를 들기만 하여도 불의가 도망간다면 피압제자의 곡성(哭聲)이 그렇게도 장기간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진리를 알고 진리를 따르려는 사람과 정의를 인식하고 정의에 의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성공이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성공(成功)! 그러나 부정에도 성공이 있을 수 있으며 불의에도 성공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진리와 정의에도 정당한 권리로써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본질적인 성공을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이며 더욱 미국에서 현재 정의와 진리를 승화(昇華)시키려는 모든 사람들은 성공이 거두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암운이 감돌고 있다. 자기동포들을 위하여 유익한 일을 하려든 사람들의 생애를 읽는다는 것은 비통한 일인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에게는 독약이 주어졌고 그라쿠스는 몽둥이와 돌로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리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순결하신 분은 십자가에 매달리시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의 교도소는 만원이 되고 있으며 고결한 애국심만 없었더라면 안락하고 사치스럽게 생활을 하였을 남녀의 긴 행렬이 쇠사슬에 묶이어서 시베리아의 죽음의 땅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가난과 결핍 속에서 경멸(輕蔑)과 멸시(蔑視)를 당하며 감미로운 동정심도 얻어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 얼마나 많이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보았다고 하여서 과연 모든 것을 본 것인가?
저자는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에 신문 한 장을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반관보도로부터 번역한 것으로 믿어지는 키에프에서의 세 사람의 허무주의자 즉 프러시아의 신하인 브란트너와 안토노프라고 자처하는 미지의 사람과 신사인 오신스키의 처형(處刑)을 보도한 짤막한 기사가 실리워 있었다. 교수대(絞首臺)의 밑에서 이들은 서로 키스하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하면서 이 기사는 또한 “교수형 집행인이 끈을 끊었으며, 입회의사가 죽은 것을 공포(公布)하자 시체는 교수대의 입구에 묻히어졌다. 이렇게 하여서 허무주의자는 영원한 망각(忘却)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라고 보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결단코 망각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저자 자신의 사상과정을 따랐던 것이다. 저자가 마음속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의지할 만한 이론도 없었으며 증명할 만한 결론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저자가 한 대도시의 비참한 참상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자 소름이 끼치고 저자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원인을 발견하고 구제방법을 생각할 때까지 쉬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를 연구하는 동안에, 저자는 발견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을 얻게 되었으며 사멸되었던 신앙(信仰)을 소생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세(來世)에 대한 동경은 자연적이며 깊은 것이다. 이는 지적인 성장과 더불어 장성(長成)하는 것인데, 우주가 얼마나 방대하다고 하는 것과 지식의 계발(啓發)로 인하여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광경 즉 영원까지도 답사할 수 있는 그러한 광경이 얼마나 무한대한 것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더 강하게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정신적인 분위기로 보아서 단순한 종교적 신조까지도 유지할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에서 발생하고 있는 허망되고 유치한 희망을 제(除)하고서 이러한 동경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동경을 바랄만한 하등의 이유도 근거도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동경은 적극적 지식과는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내세에 대한 희망을 파괴하고 있는 관념을 분석하고 검토하게 되면 물리학의 묵시(默示)에서가 아니라 사상이 각 방면에 깊이 스며든 정치학 내지 사회학의 교훈에 이 관념의 원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념의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학설 즉 유지할 수 있는 이상으로 인간을 생산하려는 경향과 악덕과 빈궁은 자연법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전진이 진행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과 또한 인간의 진보는 점진적인 민족의 발전이라는 학설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입증된 진리라고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는 이와 같은 학설은 과학적인 해석이 이 학설에 의하여서 수정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물리학을 확대시켜도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학설은 개인을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우주의 질서에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서나 소위 도덕적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관념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불멸의 관념과 자연은 인간을 위한 여지가 없는 곳에 인간을 존재시킴으로써 인간을 낭비시키고 있다는 관념과는 조화되기가 곤란한 것이며, 전능하시고 은혜스러우신 창조주라는 관념과 대다수의 인류의 운명인 비참과 타락은 창조주가 제정(制定)하신 것이라는 관념과는 조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유전적으로 영속화된 지지(遲遲)한 변형의 결과라는 관념을 가지고서는 인간존재의 목적은 개인생활이 아니라 민족생활이라는 관념을 도저히 암시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생활전선에서나 생활의 고통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支持)와 가장 심각한 위로를 제공하여 주고 있던 믿음은 우리들의 대다수에게서 사라졌고 현재에도 더 많은 사람에게서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검토하여온 연구문제를 통하여서 우리들은 이러한 학설을 검토하였고 모순도 살펴 보았던 것이다. 즉 우리들은 인구가 식량보다 과잉하지 않다는 것과, 인간력의 낭비와 인간고통의 범람은 자연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연법에다 일치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무지와 이기심으로 인하여 발생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인간의 진보는 인간의 성격을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성격은 항상 동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세계로부터 내세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는 악몽은 이제 파괴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서 모든 곤란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전환하던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이고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곤란성은 제거되었으며 따라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정치경제학은 지금까지 우울한 학문이라고 불리워 왔으며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같이 무망(無望)하고 절망(絶望)적인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검토하여 본 것같이 정치경제학이 이러한 위치로 전락한 것은 정치경제학이 타락되었고 속박되었으며, 정치경제학적 진리는 순서가 뒤바뀌었으며 정치경제학적 조화는 무시(無視)를 당하였고 정치경제학이 말하고자 하는 말은 빛을 보지도 못하고 기만(欺瞞)당하였으며, 부정(不正)에 대한 정치경제학의 반항은 부정을 찬동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한 것과 같이 적절한 균제 속에서 자유롭게 된다면 정치경제학이야말로 희망으로 충만되고 있는 것이다.
적당하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부의 생산과 분배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은 현 사회상태 하에 존재하고 있는 결핍과 부정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빈곤이 존재하고 있지도 않으며, 인간의 성격에 더 충실하여지고 더 강력하여지므로 완전히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는 사회상태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으로 사회적 발전이 특별한 신의(神意)에 의하거나 혹은 무자비한 운명에 의하여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고 이득이 있는 법칙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것을 알고 또한 인간의 의지가 큰 요소로 되고 있으며, 인간은 전체적으로 생각할 때 인간의 환경이란 자기들이 만들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경제법칙과 도덕법칙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과 지성인들이 애를 써서 포착한 진리는 도덕적인 감정이 민첩한 직관으로 인하여 도달하는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개인생활의 문제에는 많은 광명이 비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이 세상을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 즐거움도 맛보고 슬픔도 경험하였으며, 고생도 하였고 힘껏 애도 써보았으며, 열망도 있었고 공포심도 있었으며 감각 이상으로 깊이 느끼는 사물에 대한 강력한 지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가장 다양성이 있는 교양의 기반까지도 형성하고 있는 일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마는 이들의 짧은 생활이 허망하게 낭비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과학이 각 분야를 통하여 나타내주고 있는 위대한 사실은 법칙의 보편성인 것이다. 과학이 어디에서 이러한 법칙성을 연구하든지, 예를 든다면 사과의 낙하나 이련태양(二聯太陽)의 혁명에서 천문학자들은 동일한 법칙 즉 그 속에서 공간을 구분할 수 있는 미세분(微細分)에서도 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과학이 취급하고 있는 불가측적 거리 내에서 작용하고 있는 동일한 법칙의 작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망원경으로 미칠 수 있는 시계(視界) 외에서는 운동체가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체의 도정을 추적할 경우에는 이러한 법칙이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외적인 존재인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와는 반대로 과학은 이것이 과학이 볼 수 있는 궤도의 일부분인 것이며 망원경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도 이 법칙은 정연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과학으로 계산이 된다면 몇 세기 후에는 이 계산도 증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법칙을 탐구한다고 하여도 가장 대규모적인 사회나 가장 소규모적인 사회에 있어서 한결같이 동일한 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다양성을 보이는 것 같고 예외적인 것같이 보이던 것도 동일한 원칙의 범주(範疇)에 속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법칙을 탐구하는 곳마다 사회법칙은 도덕법칙과 합체(合體)가 되어서 일치가 된다는 사실과 사회생활에 있어서 정의는 틀림없이 보상을 가져오는 것이며, 불의는 형벌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개인생활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개인의 생활만을 관찰한다고 한다면 우주의 법칙은 선과 악, 정당과 부정당, 공의와 불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주1) 그러면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명백하였던 법칙이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과학적이 아니다. 즉 다른 것과 관련시켜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개인의 생활을 전부 관찰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단순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 일은 아니겠는가?
정치경제학이 발견하는 법칙은, 물리적 자연의 사실 및 관계와 같이, 정신적 발전의 법칙과 조화를 이룬다. 정신적 발전이란 필연적이고 비자발적인 진보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발단력(發端力)이 되어있는 진보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에서 인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신적 발전이란 대단히 지지(遲遲)하게 진행하는 것이다. 마음이 각성(覺醒)되기가 무섭게 육체력은 쇠진(衰盡)하여 가는 것이다. 자기 앞에 전개되고 있는 광대한 분야를 막연하게나마 의식하며 마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알게되고 사용하게 되고 관계들을 인식하게 되며 동정심을 확대시키기 시작하였는가 하면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마음도 사라져 가는 것이다. 좀 더 위대한 것이 없었다면 여기에는 파멸만 있고 실패만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훔볼트나 허셀 같은 사람이나, 피스가산에서 전망한 모세와 같은 사람이나, 대군을 인도한 여호수아 같은 사람 혹은 좋은 범위 내에서는 찬란한 생활을 영위한 감미롭고 근면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여기에서 발전된 마음과 성격이 이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한다면 우주와는 하등의 관련성을 맺고 있지 못하는 허무(虛無)가 존재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정치경제학이 실제에 있어서 모든 연역 시에 의지하는 법칙인 마음의 기본적인 법칙에 의한다면 우리는 목적없는 수단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대상없는 계략(計略)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계에서 자연과 접촉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자연에 대하여서 마음속에 있는 지성을 지지하고 활용하게 된다면 그러한 목적과 대상이 제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혼자 힘으로 더 고차적인 것으로 향상되지 않는 한 인간의 존재란 불명료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필요성이 대단히 강력하기 때문에 현세의 생활 이상의 것을 개인에게서 부정(否定)하고 있는 사람은 완전성에 대한 관념을 민족에 전가시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 왔으며 더 이상의 완전한 논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민족의 개량을 증명할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의 진보는 인간의 개량은 아닌 것이다. 사회의 조직으로 인하여 문명이 전진하게 된 것이지 인간의 조직으로서 문명이 전진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진은 고정적이고 영속적인 것이 못되며, 때때로 아니 부단히 정지되고 있으며 또한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이 보고 있는 것 이상에서 계속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민족문제와 직면하여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문제와 같이 곤란한 문제에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이 죽어야 하는 것과 같이 민족도 사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들은 인간의 생활이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지질학적인 상태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현재에 있어서는 지구가 일정한 궤도를 회전하고 있는 것같이 북극의 빙산은 점진적으로 두터워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빙하가 다시 흐르게 되며 남극해가 땅쪽을 일소하면서 마치 현재 우리들의 문명과 같은 고도문명을 삼켜 버린 것 같이 현재의 문명을 바다 밑으로 삼켜버리게 될 그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를 과학적으로 관찰한다면 지구는 사멸되었으며 태양은 고갈된 시기이다. 그러나 언젠가 서로 충돌하게 된다면 태양계가 가스형태로 분해되어서는 다시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돌연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生命)-절대적이고 불가피하게 죽어야만 하는 생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저자의 생각으로서는 이것은 다른 생명의 길과 입구가 됨으로써만 이해되는 것 같다. 그리고 생명의 사실은 신화와 상징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이론이며 어디서나 언제나 인간이 자기들의 가장 심각한 지각을 묘사하고 있는 신화와 상징이 어떤 형태로써 표현하고자 한 이론을 토대로 하여야만 설명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왔다가 간 사람들의 경전(經典)들 즉 성경, 젠드 아베스터, 베다, 불경, 코란경 등과 고대철학의 신비적인 학설, 대종교의 내적 의미, 에큐메니칼 의회의 교리적 조직, 퀘이커교나 감리교, 사보나롤라나 홍색인디언의 전통이나 흑인노예들의 신앙 등 이 모든 것은 이 경전들의 동의하고 있는 중심과 핵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단일 진리에 대한 각양으로 왜곡된 이해같은 기미도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추종하고 있는 사상적 연쇄를 벗어난다면 이들이 막연하게 보았던 미광(微光) 즉 종국적인 관계이며 필연적으로 형태화하고 비유화되는 표현노력에 대한 희미한 섬광(閃光)같은 미광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즉 선악과가 있는 동산이라든지 주님이 하여야 할 일이 있는 포도원이라든지 과거의 생명으로부터의 피안의 생명으로의 통로라든지 결과없는 시련과의 투쟁 등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자.
보라! 여기 현재의 문명세계에 있어서도 낡은 비유(比喩)가 아직도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낡은 신화도 또한 진실한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어서도 의무의 통로가 있는 것이며 허영의 거리에는 크리스찬과 페이스풀이 걸어가고 있으며 그레이트하트의 갑옷에는 강타의 소리도 요란(擾亂)한 것이다. 선신인 아후라마즈다는 악신인 아리만 그리고 광명의 여신은 암흑의 왕자와 아직도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사람들에게는 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불러라. 이들을 부르고 또 불러라 듣는 사람들의 가슴이 벅차오를 때까지! 강인한 정신력과 끈기있는 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세상은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아직도 감금(監禁)당하고 있으며 인간의 생활에서 용솟음치고 있는 선(善)과 진(眞)과 미(美)를 철마는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신 아후라마즈다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상호지면은 없으나 어떤 장소에서 언제인가는 인원명부가 작성될 것이다.
진리와 정의가 때로는 억압당하고 있지마는 그렇다고 하여서 우리가 전부를 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전부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지나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서는 그것이 비록 현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빛과 색의 감각을 우리들에게 제공하여 주고 있는 파동도 어떤 지점을 통과하게 될 때는 불명료하여지는 것이다. 우리가 소리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도 동일한 음역 내에서 뿐인 것이다. 동물들에 있어서까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 못하는 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지구는 어떤 것인가? 태양계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지구라는 것은 보잘것없는 반점(斑點)에 불과한 것이며 또한 태양계 자체도 전(全)항성과 비교측량하여 본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들의 시야에서 지나간 것은 망각에로 사려져 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결단코 망각에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 것이다. 저멀리 우리들의 시계(視界) 외에서는 영원한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발생한다는 것은 모든 종교의 중심적인 사실인 것이다! 시인들은 이것을 노래하였고 예언자들은 이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여기에 대한 가장 심각한 충격을 느끼면서 이 진리에 응답하려고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언어를 통하여서 순결한 마음의 소유자와 강력한 예지(叡智)의 소유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사상(思想)의 최고봉에서 음침한 해양을 바라보면서도 이상(理想)의 세계를 그리며 아래와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육신(肉身)과 감정(感情)으로 둘러 쌓여 있는 인간의 영혼(靈魂)은 철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서 몽롱한 환상과 같은 개념 외에는 일절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에서 해방되어서 보이지도 않고 바라볼 수 없는 순수한 영역(領域)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때에 가서 하나님이 영혼의 지도자가 되고 왕이 되는 것이다. 영혼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예속(隸屬)하여서 인간으로서는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싫증도 느끼지 않으며 감정이 격(激)하게 되지도 않으면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1) 우리들의 자식을 기만(欺瞞)하지는 말자. 다른 것은 몰라도 플라톤이 제시한 이유로 인하여서 우리가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가 진리하고 말하고 있는 것도 또한 무시하여 버릴 것이다. 그 자체와 관계있는 덕은 일반적으로 스스로 보상되고 있는 것이다. 즉 상인이나 해적이라고 하더라도 똑똑하고 신중하고 약속에 충실하면 가장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체에 관계하지 않은 덕은 다음과 같이 되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것을 얻었을 때나,
혹은 자기가 얻은 것을 어떤 사람이 귀중하게 여긴다면,
정신세계에서 폭풍이 오는 것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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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용어해설과 새인은 생략합니다.
1961년 한글완역본은 참고자료이며,
헨리조지 정치경제학의 교재로는
이후에 합의되는 용어를 사용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