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양왕(恭讓王) 고려34대 마지막 왕
eunjeok seokwoo ・ 2022. 1. 15. 7:07
전주 풍남문(보물 제308호) 전라북도 전주시 전동에 위치한 전주성의 문. 대한민국 보물 제308호이다. 1389년 고려의 제34대 왕 공양왕이 건설했으며, 당시의 명칭은 명견루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1767년(영조 43)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재건된 이후 풍남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에 이른다.
고양 고려 공양왕릉
본명:왕요 휘 요(瑤)
재위1389년~1392년
출생일 1345년 02월 05일
사망일 1394년 04월 17일
본관 개성
종교 불교
능묘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
아버지 정원부원군 왕균
어머니 국대비 왕씨
배우자 순비 노씨
자녀 경화궁주, 정신궁주, 숙녕궁주, 정성군 왕석
형제 정양군 왕우
출처 : 한국사 LOD 다음백과
해설
고려 마지막 왕접기/펼치기
1388년 창왕이 즉위한 이후 정국은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혁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혁파의 대립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특히 사전(私田) 개혁 문제와 왕위계승 문제에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색은 급진적인 개혁론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정국을 파란으로 몰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이 우왕은 강화도에서 여주로 옮겨졌다. 우왕은 어떻게 하면 다시 왕위를 되찾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최영의 생질 김저(金佇)와 정득후가 우왕을 찾아왔다. 이들이 찾아오자 우왕은 눈물을 흘리며 속내를 드러냈다.
“전하, 고생이 얼마나 자심하시옵니까?”
“말해서 무엇 하리오. 생으로 말라 죽을 지경이오.”
“신들의 과오가 크옵니다.”
“서울은 어떻소?”
“이성계 일당들의 난장판이지요.”
“이성계, 그 자를 없애야 하는데 말이요.”
우왕은 이성계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자연히 얼굴이 굳어지고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전하, 옥체를 보전하셔야 하옵니다. 후일을 기약하셔야지요.”
김저가 은근해 말했다.
“무슨 묘책이라도 있소?”
“학자들이나 늙은 신하들은 전하를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서울에 가거든 곽충보에게 이르시오. 그 사람만은 믿을 수 있소. 이번 팔관회 행사 때 이성계를 없애 달라고 하시오.
만일 일이 이루어지면 왕비의 동생을 아내로 주고 부귀영화를 함께 나눌 것이라고 말이오.”
“그리 전해 올리겠사옵니다.”
“돌아가는 대로 내 뜻을 전하도록 하오.”
“염려 마시옵소서.”
우왕은 김저에게 보검을 내리었다.
김저와 정득후는 서울에 돌아와 곽충보를 만나 우왕의 말을 전하고 보검과 금은을 주었다. 곽충보는 입이 벌어져 우왕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확답했다.
그러나 곽충보는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최영이 죽은 마당에 과연 우왕을 옹위할 권신들이 몇이나 될까? 이성계를 죽인다 해도 창왕이 왕위에 있는 이상 우왕을 다시 모셔 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세는 이미 이성계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옛정을 생각하여 경거망동한 행동으로 패가망신하고 싶지도 않았다. 곽충보는 힘센 쪽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곽충보는 이성계를 찾아가 모두 털어 놓았다. 이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던 김저와 정득후는 팔관회 행사에 이성계가 보이지 않자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체포되었다. 당시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목을 끊어 자결하고 김저는 순군옥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고문에 못이긴 김저가 변안렬·이임·우현보·우인렬 등 구세족들이 이번 음모에 가담하였다며 실토하고 말았다. 이 바람에 변안렬을 비롯한 구세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유배되고 우왕은 강릉으로 추방되었다.
이성계는 김저 사건이 진정되자 이것을 빌미로 창왕마저 폐위할 마음을 품었다. 그는 심덕부·정몽주·조준·정도전·박위 등을 모아놓고 후계자 문제를 논의하며 말했다.
“우·창왕은 본래 왕씨가 아니므로 종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옳지 않소이다. 또한 천자께서도 마땅히 이들 두 왕을 폐하고 진왕(眞王, 왕씨)을 세우라 하셨으니 내 생각엔 정창군 요가 그 적임자인 듯싶소이다.
그는 신종의 7대손인데다 종친 가운데 왕실 혈통에 가장 가까우니 그를 옹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말하자면,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혈통이 아닌 신돈의 혈통이므로 창왕을 폐위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계의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창왕을 폐위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창왕을 폐위하자는 이성계의 제의에는 다들 아무런 이론이 없었다. 다만 정창군을 왕으로 세우는 문제에 있어서는 약간의 이론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지문하부사 조준이 반대하고 나섰다.
“정창군은 정치에 뜻이 없는 평범한 인물이오. 적당치 않소.”
“임금은 너무 많이 알아도 귀찮소. 정창군 같은 인물이야말로 우리에게 합당하오.”
정도전이 정창군을 다시 천거했다.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이들은 제비뽑기로 후계자를 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성계가 대표로 제비를 뽑았더니 하필 정창군의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계가 우유부단한 정창군을 왕으로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권을 휘두르기 위해 꾸며낸 연극에 불과한 것이지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다.
이성계 일파는 장단에 살고 있는 정창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임금의 자리를 제안했다. 정창군은 달갑지 않게 여겼다. 정창군은 사위와 집안사람을 불러 의논했다.
“지금 공을 왕으로 내세우려 하는 것은 후일 자기들이 우왕과 창왕을 내쫓은 죄를 질까봐 주저하는 것이오. 공은 그런 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서는 안 될 것이오.”
정창군의 사돈 강기가 말했다.
“나도 그 정도는 아오. 어찌하면 좋겠소?”
“당연히 거부하셔야죠.”
“그렇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소?”
“그렇긴 합니다만.”
왕이 되기 싫어도 할 수 없이 운명 지워진 정창군이었다.
정창군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한 이성계는 1389년 11월 15일 심덕부 등 8명과 함께 정비궁으로 갔다. 그리고 종친·백관과 함께 공민왕 정비(定妃)의 교서를 받들어 창왕을 강화로 내쫓고 정창군을 왕으로 앉혔다.
이때 왕위에 오른 정창군 요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이다.
공양왕은 즉위 다음날부터 이성계 일파의 숙청 대상자 색출에 생머리를 앓아야 했다. 대간에서 목은 이색 축출에 열을 올렸다.
“이색 부자와 조민수는 전에 이인임과 한패가 되어 우왕을 내세운 자입니다. 조정에서 내쳐야 합니다.”
“알아서들 하시오.”
공양왕은 처음부터 무기력했다. 꼭두각시처럼 이성계 일파의 의견에 대변인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이색 부자는 대간의 성토에 따라 임금의 재가를 얻어 쫓겨나고 말았다.
이성계 일파는 윤회종이 상소하여 우왕과 창왕을 죽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권신 이인임이 역적 신돈의 자식을 왕자라고 내세워 16년간 종묘와 사직을 타성에게 맡겼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왕씨의 후손이 다시 종사를 잇게 된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옵니다. 그동안 타성의 두 왕은 조정의 간흉들을 포진해 놓았으니 이자들이 언제 전하를 해칠지 모르옵니다
두 왕에게 사약을 내리소서.”
공양왕은 자신의 딱한 처지를 한숨으로 달래었다. 일은 이성계 일파가 꾸미고 악역은 공양왕 자신이 맡아 처리하는 꼴이었다.
공양왕은 정당문학 서균형을 보내어 우왕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우왕은 그때 강릉에 있었다. 강릉 동헌 한쪽에서 최영의 딸 영비와 함께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명이오!”
우왕은 날벼락을 당한 꼴이었다. 우왕은 대경실색했으나 체통을 지켰다.
“어명이라면 달게 받겠다. 죽는 연유나 알고 죽자.”
서균형이 목소리를 높였다.
“전왕 우는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오. 타성으로 고려 역대 임금의 위패를 더럽혔으니 그 죄 그대로 덮어 둘 수 없어 죽인다 하오.”
“이런 순 패륜아 같은 자들이로고. 그렇다면 왜 진즉 내치지 않았다더냐? 너도 그렇게 믿느냐?”
“어명을 전할 따름이오.”
우왕은 영비와 작별하고 형장으로 실려갔다. 많은 백성들이 형장으로 몰려들었다. 그 백성들에게 우왕은 마지막 검증을 받고 싶었다.
“백성들이여! 나를 전왕의 아들이 아니라서 죽인다 하오. 자고로 우리 왕씨는 용의 아들이라 하여 겨드랑에 용 비늘이 있소.”
우왕은 웃옷을 벗고 팔을 번쩍 들었다.
“똑똑히 보시오! 내 겨드랑에 용 비늘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오. 이래도 내가 신돈의 자식이오?”
백성들은 우왕의 겨드랑이에서 돈짝만한 비늘 흔적을 보았다. 잠시 후 우왕은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렸다.
영비는 시체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밤이 깊어도 영비는 그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동네 부인들이 먹을 것을 가져왔다. 동네 사람들은 우왕의 시체를 수습해 주고 여막까지 마련해 주었다. 영비는 여막에서 지쳐 쓰러져 울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창왕도 강화도에서 피살되고 말았다. 두 왕은 이성계 일파의 정략적 제물이 되어 엉뚱한 누명을 쓰고 비명에 갔다.
두 왕이 죽은 후 벌써부터 서울에 떠돌던 목자득국(木子得國)설, 즉 이씨가 나라를 세운다는 참언은 더욱 구체화되어 갔다.
고려왕 계보 역사 순서 1대 태조부터 34대 공양왕까지
올바른교육 ・ 2021. 12. 27. 10:15
고려왕 계보 역사 순서
1대 태조부터 34대 공양와까지
고려왕 계보 순서를 나열하며
역사 공부를 시작해요!!
고려왕 계보 순서
1대 / 태조 / 918~943년
왕건. 고려의 시조. 북진정책
혼인 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포섭함.
↓
2대 / 혜종 / 943~945년
1대 태조 왕건의 맏아들.
이복동생들과 왕위 다툼에 시달림.
↓
3대 / 정종 / 945~949년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나
실패함. 재위가간은 4년.
↓
4대 / 광종 / 949~975년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정종의 동생.
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과거 제도를 실시함.
↓
5대 / 경종 / 975~981
4대 광종의 맏아들.
976년 전시과 제정.
6년간 재위함.
↓
6대 / 성종 / 981~997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체계의
기틀을 세운 왕.
↓
7대 / 목종 / 997~1009
5대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함.
↓
8대 / 현종 / 1009~1031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으로
물려치기 위해 대장경을 제작함.
관련사건 : 강감찬의 귀주대첩.
↓
9대 / 덕종 / 1031~1034
8대 현종의 맏아들. 국자감시를 실시함.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함.
↓
10대 / 정종 / 1034~1046
8대 현종의 둘째 아들.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함.
노비종모법과 장자상속법을 제정함.
↓
11대 / 문종 / 1046~1083
8대 현종의 셋째 아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한 왕.
↓
12대 / 순종 / 1083~1083
11대 문종의 맏아들.
재위 3개월만에 죽음.
↓
13대 / 선종 / 1083~1094
11대 문종의 둘째 아들.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임.
↓
14대 / 헌종 / 1094~1095
13대 선종의 맏아들.
즉위 1년만에 왕위를
숙부에서 물려줌.
↓
15대 / 숙종 / 1095~1105
11대 문종의 셋째 아들.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통용하게 함.
↓
16대 / 예종 / 1105~1122
15대 숙종의 맏아들.
국학에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학문 진흥에 힘씀.
↓
17대 / 인종 / 1122~1146
16대 예종의 맏아들.
김부식에게 명하며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 관련사건 :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
18대 / 의종 / 1146~1170
17대 인종의 맏아들.
정중부, 이의방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폐위됨.
↓
19대 / 명종 / 1170~1197
17대 인종의 셋째 아들.
정권을 장악한 무신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
20대 / 신종 / 1197~1204
17대 인종의 다섯째 아들.
최충헌이 실권을 잡았으며
만적의 난 등 민란이 잇달아 일어남.
↓
21대 / 희종 / 1204~1211
20대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폐위됨.
↓
22대 / 강종 / 1211~1213
19대 명종의 맏아들.
1197년 최충헌에게 쫓겨
강화도로 갔다가 1211년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오름.
↓
23대 / 고종 / 1213~1259
22대 강종의 맏아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함.
↓
24대 / 원종 / 1259~1274
23대 고종의 맏아들.
친몽정책과 개경환도를 추진하다가
임연에게 폐위됨. 4개월 만에 복위함.
개경환도 후 이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항쟁 일어남.
↓
25대 / 충렬왕 / 1274~1298,1298~1308
24대 원종의 맏아들. 고려왕이면서
원나라의 사위로 살아간 왕.
↓
26대 / 충선왕 / 1298~1298,1308~1313
25대 충렬왕의 아들. 한국사 최초의 혼혈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함.
↓
27대 / 충숙왕 / 1313~1330,1332~1339
26대 충선왕의 둘째 아들.
심양왕 고와의 정권다툼에 시달림.
↓
28대 / 충혜왕 / 1330~1332,1339~1344
27대 충숙왕의 맏아들.
방탕한 행동으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됨.
↓
29대 / 충목왕 / 1344~1348
28대 충혜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해 12세에 죽음.
어머니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함.
↓
30대 / 충정왕 / 1349~1351
28대 충혜왕의 서자.
12세에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었으나 3년만에 폐위됨.
↓
31대 / 공민왕 / 1351~1374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과 반원정책을
단행하였으나 권문세족 반발
공민왕 시해로 개혁 중단됨.
↓
32대 / 우왕 / 1374~1388
공민왕이 시해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됨.
↓
33대 / 창왕 / 1388~1389
32대 우왕의 맏아들. 9세에 즉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
↓
34대 / 공양왕 / 1389~1392
20대 신종의 7대손.
고려의 마지막 왕.
고려왕 계보 순서!!
다들 공부해 보세요~~
[출처] 고려왕 계보 역사 순서 1대 태조부터 34대 공양왕까지|작성자 올바른교육
고려의 왕
참고자료
관련이미지 1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 이전
출처: 테마리스트
[네이버 지식백과]고려의 왕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2009. 2. 5., 김아네스, 최선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6
[출처] 고양 공양왕릉, 고려 마지막 왕에게 가다|작성자 이룰빛날
공양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