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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기록문서의 서식과 성경 기록방식(대신논단 7호에서)
김 영 규 교수
우리 세대 중에서 고대근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시대까지 광대한 문서보관제도에 대해서 다루었던 학자의 글을 들 수 있다면 Ernst Posner의 Archives in the Ancient World라는 책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문서보관제도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자료취급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포괄적인 소개에 있어서 오히려 V. Gardthausen의 조그만 논문이 더 유용하다는 느낌이 들고 있다. 물론 E. Posner의 책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 쪽에 강점이 있으나 일찍이 Carl Curtius의 연구나 19세기 말 Wilhelm Kubitschek와 C. Driatzko 등에 의해서 쓰여진 Pauly Wissowa의 Real-Encyclopaia에 나타난 논고들, 그리고 파피루스 영역에서 Ulich Wilcken, Fridrich Preisigke, Friedrich van Woess, 그리스 비문 연구영역에서 Adolf Wilhelm의 연구로부터 크게 발전을 이루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특별히 Carl Curtius의 유명한 글에 제시한 주장들은 오늘날 Paros라는 헬라도시에서 발견된 헬라 공문서 제도에 대한 비문의 발견을 통해서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Carl Curtius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계약서 및 법들은 공공 정치적 성격에서 나오지 않았고 종교적 성격에서 나왔고 공문서 (κοινὰ γράμματα, 혹은 δημόσια γράμματα) 및 사적문서들은 신의 이름으로 성전에 보관되었다는 논증인데 Paros의 시민결정비문을 보면, 성전에 보관된 공공문서들(μνημονικὰ γράμματα)의 부당한 조작, 삭제 및 첨가에 대한 관원들(ἄρχοντες)과 제사장들의 형벌조항 등을 규정한 후 매 공공문서 2부를 시(市)공증인들이 각각 아폴로 신전과 아데미 신전, 레토 신전에 보내 보관하도록 하였고 정해진 시간 내에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하며 헤스티아성전의 시(市) 보관소에 있는 원문서에 대한 파손에 대해서도 역시 관원들이 벌금(30 드라크마)을 지불해야 해야 했고 그것들이 보관될 때는 그 전의 경우처럼 문서들을 발생시기별로 매달 작성하여 피욘의 문서 보관장에게 원문서와 같은 사본을 전달되어야 하며 만약 어떤 사람이 헤스티아 성전의 시 보관소 안에 있는 문서와 여기 피욘성전의 문서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경우 관원들은 정기시민집회(κυρία ἐκλλησία)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여야 하며 그 증명도 피욘에 있는 두루마리를 직접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그 해 첫 달 세 번째 주 5일에 여는 시기에 다만 현장에서 증인들(αἱ ἐπισκήψεις τών γραμμάτων) 앞에 확인만 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관심되는 부분은 한 문서의 사실성이란 원문서의 양식이나 그 내용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혹은 그 원문서의 언어사용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바울 자신도 이런 모든 법 일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리라 믿고 있다. 왜냐하면 주전 1세기의 다소성에도 이런 두 사람의 문서 보관장들이 관원의 무리 중 증명되고 있고 역시 바울이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a cive Romano ortus)이였다면(행 22:28), Lex Irnitana에 따르면, 바울의 아버지 혹은 조상이 많은 부를 가졌던 시 원로원 혹은 관원(magistratus)이였을 가능성이 있다면 주전 1세기의 이 결정비문과 같은 문서보관 성격에 대해서 친숙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가정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문서 보관법에 적용되는 공공문서 및 개인문서 중 기록문서들의 양식이 문제이다. 사실 우리가 당면하여 싸우고 있는 것은 어떤 학설 뒤에 줄곧 흐르고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사실과 기록에 대한 회의(懷疑)이며 진리와 기록에 대한 회의이며 계시와 기록에 대한 회의이다. 기독교적인 참 사실 혹은 우리의 신앙의 참된 지식(notitia)이 성령아래 깊게 내면화되기 전에, 궁극적으로 열매를 맺기까지 자라지 못한 상태에서, 역사적 사실이든 과학적 사실이든 어떤 사실이 발견되면 종종 그 자체가 그 자신의 정신적 활동의 모든 동기가 될 수 있다. 이성이니 문헌이니 하는 것은 종종 그것의 강력한 도구들로 자기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런 인간을 돕는 것은 아주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바울 자신처럼 항상(πάντοτε) 쉬지 않고(ἀδιαλείπτως)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사 그 참된 사실들을 깨닫게 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함은 물론이다(엡 1:16-23; 골1:9; 롬1:11). 그러나 잘못된 지식 때문에 성경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문제이다. 특별히 17세기 계몽주의와 그후 역사주의에 의해서 훨씬 많은 옛 시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대사람들을 주로 신화와 단순한 문자 문화 속에 살았던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실로 옛 애굽의 람세스(Ramses) 시대의 긴 법정기록 문서들을 보면 오늘날도 그런 법정 기록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물론 오래 역사를 가진 상업 계약 문서를 사실대로 기록하려는 정신이 문학보다 먼저라는 것을 근동 모든 세계에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후대의 기록문서란 더 어떤 강한 형식과 틀 속에 기록화하고 있는 인상을 우리는 받고 있다.
이런 현대정신 혹은 희랍정신 하에 형성된 문학유형에 의해서 애굽과 근동문학을 분류하여 성경과 비교하였던 학자 중에 두 사람을 예를 들 수 있겠다. T. Eric Peet와 Samuel Noah Kramer이다. 유명한 고대 이집트 문헌학자인 T. E. Peet 교수가 1929년 영국 학술원에서 이집트와 팔레스틴과 메소포타미아 문학의 비교연구를 발표한 후 1931년 그것이 책으로 나왔었다. 그는 고대 애굽에도 희랍에서처럼 문학들이 있었다고 전제하고 4가지로 나누어 분석비교하고 있다. 즉 성경이나 애굽문학들이나 서사시, 서정시, 극적 문학, 교훈적 문학으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이 유명한 학자의 일반적인 비교는 내용과 어체에 대한 것인데, 그 비교에 의해서 성서서술의 단순성 생생한 묘사를 부정하지 못하고 있고 특별히 창세기 50장의 요셉에 대한 기술은 고고학적인 설명의 생생한 모습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애굽의 단순하고 인간적이고 생생한 짧은 이야기 문학에서 느끼는 조금 인위적 요소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묘사의 완전성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대로 못 믿겠다는 자신의 동기가 있다. 거기에 있는 소위 신화적인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사시적인 짧은 이야기로 엮어진 문학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 유명한 애굽 20왕조의 무덤 도둑들의 법정기록부들에 대한 짧은 출판물을 이 강연시기 즈음에 그는 출판하였다. 엄격한 사실적인 그 기록부의 필체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 시대의 사고방식(mentalität)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비판동기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애굽 문헌들이 갖는 생생함, 단순성 그리고 특별히 1인칭과 3인칭을 사용하는 직접적인 대화기록들은 어체나 서술에 있어서 법정재판 기록부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대영제국의 박물관 파피루스 10227에 따르면 애굽총리의 문서보관소에 기록된 행정기록부의 형식을 볼 수 있다. 일반 행정 및 법정기록의 형식에 대해서는 Wolfgang Heck에 의해서 잘 연구되었고 물론 법정기록부에 대해서 이미 1829년 Wilhelm Spiegelberg의 박사논문에서 기초적으로 모든 것이 기술되었었고 역시 A. H. Gardiner가 더 분명히 기술하였었다. 그러나 여기 이 파피루스가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자세한 심문기록이나 도둑들의 명단, 도난 된 피해물의 목록 전에 그 일체 과정에 대한 행정기록부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부의 일반적인 특징들 중 몇 가지는 먼저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출애굽 시대의 기록처럼 왕정 몇 년 몇 월 몇 일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16년 홍수의 계절 3 번째 달 18일 그 날에 일어났던 행적들을 기록하면서 종종 기록내용에서 “이날에 보내졌다”, “이날에 조사되었다”라는 말들이 반복되어 있고, 그 다음날의 일들은 다시 보편 날짜 형식인 제16년 홍수의 계절 3번째 날 19일로 기록되었다. 같은 날일지라도 특별히 기록해야 할 행적의 경우 다시 “제 16년 홍수의 계절 3번째 달 19일, 이날 저녁 무렵에”란 날짜를 기록하였으며 외부로부터 온 문서들을 사본할 때도 역시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런 날짜 기록형식은 슈메르나 고대 바빌로니아의 날짜 형식과 많은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세오경에 나타난 날짜 형식은 셈족의 일반날짜 형식을 따르고 있고 다만 문서의 처음에 날짜를 기록하는 것은 애굽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의 제 2년”이란 날짜 형식은 언제든지 슈메르로부터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계속 쓰는 연호의 날자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언어방식은 셈족 언어의 전형적인 성격으로 썼으나 문서방식은 애굽식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날짜 직후에 장소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이 여기 애굽의 기록부와 아주 닮은 점이 있다. 이것은 형식발전상 람세스 시대의 독특한 변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날짜 형식 이후 독특한 “이날에” (hrw pn)라는 용어와 함께 장소에 대한 언급이 뒤따르는 것이 람세스 시대의 변화라는 것이다. (제 18왕조의 한 법정 기록부를 출판할 때, W. Spriegelberg는 그 파피루스의 처음 파손된 부분들을 “몇 년 몇 월 몇 일 매일 그의 조상 Re와 함께 영원히 살아 있는 Thutmosis 4세 왕의 권위 아래 그날에”로 채우고 있다.)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3인칭으로 그 행적들이 계속 기술되다가 직접화법으로 인용될 때는 “보고 (말)하여..... 이르기를”(smỉ ..........mdd ....) 형식을 통해서 직접 말이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전형적 인용 형식, 곧 רמאל...... רמאיו/רבדיו와 같은 어체이다. H. A. Gardiner경에 의하면 히브리말 ‘이르기를’에 대응된 mdd란 말이 사용될 때, 인용된 말들이 화자의 정확한 말들이라는 주장의 경우에 사용된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더 rdd란 말이 더 잘 사용되며 후대 모세 시대인 18왕조 시대에는 매우 드물지라도 단순히 ‘that'의 가치로 번역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하튼 성경의 직접 인용형식은 애굽의 문헌과 정확하게 비교되고 있다. 특별히 애굽의 신탁계시문서에서 이런 형식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영박물관 소관 번호 10335 파피루스에 의하면 처음 날짜 형식이 기록되고 “종인 Amunemuia가 Amun 신에게 호소하여 이르기를 ......,” .... ”그때 신이 아주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그 종 Amunemuia가 도시의 모든 백성 앞에서 그에게 반복하였다.” “그때 그 신이 농부인 Petharemdimun에게 이르기를 ......” “그때 그 농부가 Pethauemlidmun가 신 앞에서 말하였다:.....” “그때 그 신이 크게 진노하였다.” “다음에 그 농부가 Te-Shenyt의 Amun 신 앞으로 가서 이르기를:................” “그때 그 신이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고개를 흔들어 이르기를:.......” “그때 그 농부 Pethanemdiamun가 말하였다.:........” “그때 신이 말하였다:.................” (증인들의 명단이 기록된 후) 그때 다시 한번 Pe-Khenty의 Amun 신 앞에 서서 세 번째 ... (파손팀). “그때 그가 소리질러 이르기를:.............” 그때 그가 그를 취하여 시민들 앞에서 징벌하였다. 그때 그가 그 신 앞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그때 그 신이 도시의 이 백성들에게 증거하여 이르기를:“..................” 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애굽의 신탁계시문서이다. 이 문서는 유명한 애굽의 몇 개 되지 않은 신판결문서 중에 속한다. 이 문서는 같은 신판결문서인 대영박물관 패각 5625에서와 같이 신의 직접적인 말이 기록된 재판기록부이다. 이 재판기록부는 전형적인 그 당시 문서형식을 따르는 패각 5625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 패각 5625는 “제4년 홍수의 계절 제 4번째 달 마지막 날, 이 날에(hrw pn) Siwadet의 아들인 노역군 Kenna가 도시의 주인 Amenophis 왕에게 보고하여 이르기를:”..................“, 그래서 그가 신에게 말하였고 그리고 Necropolis의 서기관인 Horisheri가 그에게 반복하였다. 그때 그가 이르기를:”...............“, 그렇게 그 곧 신이 자신 앞과 간역자 Nekhemmut, 간역자 Inḥorkhaʽw, 서기관 Hori, 신의 운반인들과 모든 역군 앞에 말하였다. 그리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 이란 형식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판결문서들은 일반 다른 신적계시문서들과 구별된다. 예를 들면 Worfam von Soden이 모아본 마리 계시문서란 직접계시가 아니다. 즉 마리의 왕 Zimrilim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사람의 꿈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즉 ‘Sakka로부터 온 Malik-Dagan 이란 사람이 나에게 와서 다음같이 보고하였다.:’나의 꿈속에서 나와 Sagarātum 구역으로부터 온 한 사람이 나와 함께 윗 지방 마리를 향하여 가기를 원하였다. 나의 환상에서 나는 Terga를 향하여 들어갔고 나의 도착 이후 곧장 다간(Dagan) 신전으로 들어가 다간 앞에 엎드렸다. 내가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다간이 그의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을 그 사람이 그의 꿈속에서 보았고 그것을 나에게 말하였다. 지금 나는 나의 주에게 편지한다. 나의 주께서 이 꿈의 내용들을 숙고하였으면 한다“ 하는 것이 그 증거 부분이다. 이런 증거들은 아직도 애굽의 신적 판결문서의 직접적인 예언 기록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증명하고 있다. Qüterbork, A. K. Grayson, W.G. Lambert 등이 제시한 소위 악카드 예언서들도 역시 아까 후대 이스라엘의 역사예언과 조금 비교될 뿐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애굽의 판결계시문서와 성경계시문서의 비교란 역시 다만 다같이 기록문서적인 성격에서 비교될 때 그 차이란 현저하다고 볼 수 있다. 아마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증험역사와 같은 차이를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민수기 22장 2절 이하에 나오는 브올의 아들(רעב רב)의 발람의 말이 아람어로 쓰여진 돌판 조각들이 우리에게 현재 이미 알려진 대로 그 내용의 언어체가 성서에서의 인용부분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본문에서 발람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민수기 24:3-4, 16)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해도 역시 성경은 “그가 노래를 지어 말하였다.( רמאיו ולשׁמ אשׁיו)”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차원은 성경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우리가 읽듯이 백성 앞에 세운 율례에서 재판건을 가지고 재판장에 간 다말은 하나님께 (מיהלאה -לא/דע, 출 21:6; 22:8; 삼2:25) 간다는 말로 되어 있다. 더 정확하게 출애굽기 18장 13절 이하에서 보듯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들이 재판하려 모세에게 왔는데 그것은 백성이 하나님의 판단을 들기 위해서 (מיהלא שׁרדל, 출 18:15)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매번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알게 하였다는 기록이다(출 18:16). 이미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백성이 모세에게 왔던 것은 애굽에서의 쉽게 보는 신의(신명재판) 법정 제도와의 연결 하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제안 이후 모세 이외의 사람들에게서 법정이 이루어졌을 때, 그 기준 법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로 전체적인 성문법이 주어졌던 점이 중요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역시 재판제도는 역사적으로 변화가 있는 듯 하다. 여호수아 시기에 종종 이 재판이 백성 앞에서 이루어졌을 때 슈메르시대로부터 증거된대로 대제사장이 주관하였다는 기록이 있고(수 20:6) 이스라엘 지도자들 가운데 이스라엘 장로들, 그 두령들, 재판장들과 유사들이 구별하고 있다.(수 24:1) 사사시대에는 특별히 여선지자 드보라에게 백성들이 재판을 받더라는 기록이 있다(삿 4:5). 사무엘의 아들들을 사사로 삼았을 때, 그것을 재판 기능으로 이해하고 있다(삼상 8:1-3). 이스라엘의 왕 역시 근동 보편적인 경우처럼 재판권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왕 제도 시기에는 선지자들의 법정이란 신 앞에서의 법정을 통해서 혹은 그것을 위한 독립적인 직접계시로 받은 것이 기록으로서 남았다고 볼 수 있게 된다. 모세가 이런 계시들을 출애굽기 24장 4절에서 보듯이 그날 안에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있듯이 애굽의 형식처럼 직접적인 계시만 기록하였던 것이 아니고 그것에 설명까지 기록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애굽의 기록습관으로부터 온 이런 기록방식들은 모세 오경 기록의 중요한 배경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Luis Klebs의 연구에 의하면 애굽 고대 왕조인 주전 2980년전부터 모든 업무에 서기관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궁내관에서 앉아서 쓰고 있는 모습, 주인의 산보길에서도 동반되고 있는 장면, 수확기, 사냥터, 국고, 물고기 잡는 곳, 짐승기르는 장소, 요리실, 금속 공예실, 배 만드는 곳, 빵 굽는 곳, 술 만드는 곳, 선물과 제물 목록시, 세관들과 도시 장로들의 형벌하는 곳에, 임대하는 곳에, 여행하는 배 위에, 모든 출납시에 서기관들이 그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유명한 Sinuhe 이야기나 소위 역사적 기록들 역시 이런 기록행위를 전제하는 글로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모세의 기록은 애굽의 기록문서의 어체를 가지고 잘 이해되나 창세기의 경우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에 있어서 비록 모세 시대의 영향을 전시대 형식으로부터 우리가 구분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5:24의 רמאל וילא GN-רבד הנהו의 경우는 rdd ...... hƹnƹ GN ʽḥʽn 와 같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S.N. Kramer의 유명한 주장인 창세기의 저자는 아마 슈메르인이였다는 가정을 받아드리지 않을지라도 슈메르인들의 언어형식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 같다. 특별히 창세기 21장 22-30은 확실히 편지 형식을 가진 계약인 듯 하고 역시 창세기 23장 3-18 역시 대화체문서(Zwie Gesprächsurkunden)으로서 고증될 수 있다. 역시 민수기 33장 1절 이하의 이스라엘의 여행기(לארשׁי ינב יעסמ)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여행기보다는 독립적이지만 그것도 독립적인 기록(Urkunden)성경이 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것의 근본적인 정신은 현저히 구별되고 있다. 소위 한 문학적 역사적 작품이라 하지만 전설의 개념 아래 이해하고 있는 Sargon에 대한 슈메르의 이야기의 서술방식을 분석하면 성경에서 종종 역사를 소급할 때 사용하는 “태초에(창 1:1),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지을 때“(창 2:4),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창 5:7), ”사람이 땅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의 일이라(창6:1)”, “옛적부터 유명한(משׁה ישׁנא מלועמ רשׁא 창6:4)”, “홍수 후에(לובמה רחא 창9:28; 10:1; 10:32; 11:10)와 같은 서술방식과 같이 차이가 없다. ”어느 날 저녁이 되었을 때(u4-NE u4- te-en-e um-ma-te-a-ta, Obv. 1) Sargon이 .... (어떻게)... 행하였다.“ ”거룩한 Inana 신이 그 상황 뒤에서 쉬지 않고 역사하고 있었다(kù dInana-ke4 da-bì-a mùš nu-túm-mu). 5일 혹은 10일이 지났을 때(u4 5-àm u4 10-àm ba-zal-la-ta) 왕 Urzababa가“ ..(어떻게)... 행하였다. "그 때에 (u4-ba) Sargon이 누워 자지 않고 그러나 누워 꿈을 꾸었다.“ ”그가 5일 혹은 10일 안에 그 순수한 성전으로 ...을 때“.... ”그 당시에 토판에 쓰는 일이 확실히 존재하였으나 발달된 토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등과 같은 서술방식인데, 그런 서술방식으로서 성경의 서술방식과 그 내용을 비판할 수 없다. 역시 Sollberger가 출판한 한 슈메르 학교(é-dub-ba)의 역사적 문헌 토판에 의하면 Lagaš 도시 지배자들의 형적사를 기록하기 전에 그 머리말에서 “홍수가 일어난 이후([egir a-m]a-ru ba-ur-ra-ta)", "인류(n[am]-l[ú]-lug)가 ...... 하였을 때", ”인류가 그 이름을 불러지게 되었을 때", “그 때에는 (u4-ba) 젊어서 100년을 행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100년을 행하였으나...., ”그 때에는(u4-ba)...., (농업의 기원에 대한 서술)....<지배자들의 연대기 및 짧은 행적들이 기록된>“ 그 당시에 (u4-ba, u4-bi-a)” 등의 역사적 termini technici이 강한 성경적 서술방식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Kramer나 W.W. Hallo처럼 성경의 내용과 그 사상조차도 Sumer에 그 기원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주전 2500년대의 Fara, Abu-Salabīkh 등과 지역상 보다 더 밀접히 교통이 있었던 Ebla 토판들 중에서 G. Pettinato가 창세기의 창조 서술과 같은 Ebla 문헌의 서술방식을 발표하였으나 지금 토판들의 출판을 쥐고 있는 Archi가 근거 없는 것으로 잘못 해석 한 것이라고 반박하였고, 더구나 최근 O. O. Edzard 가 Ebla의 찬송시, 주술 등과 관련된 자료들을 출판함으로써 Ebla의 신적 배경을 다르게 제시한 듯 하다. 그런 근본적 신들의 배경이 어떻든 간에 실제적으로 J. Van Dijk가 말하였듯이 신화적 서술방식과 역사적 서술방식을 서로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역사적인 법적 기록문서들(Protokollen) 중에는 신적 재판기록문서들(Ordalprotokolle)들이 현존하기 때문이며 또한 Adam Falkenstein이 모든 슈메르 법정문서들의 많은 날짜 형식들을 왕의 신화적 묘사를 해주기 때문이다. “Ur 왕 Susin 이 Enlil과 Ninlil을 위해서 놓은 비석을 세웠을 때”가 그 연호였으며 많은 고대 이름들 역시 신의 이름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그 당시 중요한 정신적 구조를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유명한 신들인 태양신, Iranna(금성), Suen(달신) 등이 하늘의 광명체로서 피조물로 낙착되어 있다. 이 창세기 1 장의 기록이 출애굽기 20장 11절의 “이는 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라는 말씀과 어떻게 얼마나 관계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창세기의 지금을 에서 후손들의 기록에 의해서(36장) 추론하다면 모세의 시대를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창 36장 37절의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란 표현을 제쳐놓고 창세기 49장이 왕정시대 즉 정착 이후의 시대를 전제하는 글 이라는 근거는 애굽의 일찍 내려온 토지제도와 왕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충분히 설명된다고 보고 있다.
여하튼 신화(Mythus)의 시대로부터 이성(Logos)의 시대 혹은 나와 그것(Ich-Es) 관계시대로의 전환은 희랍철학의 운동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많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역사관은 희랍시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서 약간의 오해에 근거하기도 하지만, 일찍 슈메르 시대와 고대 이집트 왕국 시대의 기록문서들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생겨진 사상들로 생각되며, 작품 형성과정의 다양한 발전과정에 대한 쟝르개념들이란 대부분이 17, 18세기 이후 직선적인 발전개념 혹은 그후 역사적 상대주의에서 발전된 개념들로 생각되고 있다. 고대 기록문서들에 대한 연구는 역사 이해에 많은 수정을 요할 수 있는 분야라고 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