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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춘의 고향 노래, 이야기 ----
이 꼭지는 내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및 미군 총집결 반대 운동]에 동참하면서 그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마련한 꼭지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고민했던 고향 마을인 <도두리>와 그 인근 동네 풍경들이 여기 노래들 속에 일부나마 녹아 있습니다.
특히, 첫번째 수용 대상 지역인 <황새울>과 <대추리>는 <도두리>와 맞닿아 있고, 그 수용 범위에 <도두리 2리>도 들어가 있습니다. 내 고향 마을은 도두 1리입니다.
나는 또다시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수십년을 터 잡아 살던 자기 마을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된 <대추리>, <도두 2리> 사람들을 돕고 싶고, 농지를 수용 당하게 된 팽성읍 일대의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또, 내가 마음 속에 너무도 소중하고 깊이 간직하고 있는 <내 서정의 들판>이 미군의 군사기지로 수용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노래들 중 그 고향에 관한 노래들을 추려내게 되었고, 그것들에 약간의 메모를 달게 되었습니다.
여기 노래들 가사를 보시거나 그 노래를 들어보시는 일로 이 일에 대한 공감대가 보다 넓어지기를 기대하고, 이미 이 일에 참여하고 계신 많은 분들에게 또다른 작으나마의 명분을 더해 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의 고향을 지키고 싶고,
나의 고향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무시 당하지 않길 바라고, 그들의 소중한 삶이 국가 권력이나 외국 군대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기 노래들을 함께 들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3년 11월 3일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팽성대책위> 홈피에)
정태춘
-- 얘 기
담 너머 뒷집의 젊은 총각
구성진 노래를 잘도 하더니
겨울이 다 가고 봄바람 부니
새벽밥 해먹고 머슴 가더라
산 너머 구수한 박수 무당
굿거리 푸념을 잘도 하더니
제 몸에 병이 나 굿도 못하고
신장대만 붙들고 앓고 있더라
어리야디야 어리얼싸
어리야디야 앓고 있더라
길 건너 첫 집의 젊은 과부
수절을 한다고 아깝다더니
정들은 이웃에 인사도 없이
그 춥던 간밤에 떠났다더라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온다 하기
동네 긴 골목을 뛰어가 보니
동구 밖 너머론 바람만 불고
초저녁 단잠의 꿈이더라
어리야디야 어리얼싸
어리야디야 꿈이더라
1974. 2
메모/
내 기억은 실제보다 더 멀고, 나의 상상은 현실보다 더 비현실적이다.
이 노래의 풍경도 과연 내 당대의 것인지 알기 어렵다.
-- 겨울 나무
잎 떨어진 나무에 바람이 불고
부러진 가지에 연이 걸렸네
겨울 나무 꼭대기에 매가 앉아서
임자 없는 까치집만 지키고 있네
우- 우--
홀로 멀리 서 있는 겨울 나무야
벌판에서 불어온 저 흙바람에
잎새마저 앗기운 겨울 나무는
세월 가고 세월 오는 그 사이에서
굽어 가는 비탈길만 지키고 있네
우-- 우--
홀로 멀리 서 있는 겨울 나무야
1974. 1
메모/
1978년도에 발표한 첫 앨범인 "시인의 마을"에 들어있던 노래인데,
그 때, 아마 그 회사 영업 쪽에서 일을 하시던 상무인가 하는 분이 이렇게 말했다.
"난 이 노래가 제일 좋아. 아주 시야, 시"
시라니요,
일기지요.
-- 사춘기 한 때의 일기
새까만 밤
공동묘지에 서면
머얼리 요단강 건너 들리는
찬송가 소리
여기 저기 우- 우- 우-
검은 하늘엔
온통 귀신 우- 우-
밤 새 어디로 쏘다녔길래
머리로 팔뚝으로 거미줄
거미줄
울창한 미류나무 숲속엔
몇 마리 나귀가 있었네
거기 실패엔 연이
차곡 차곡 감겨져 있었네
거미줄은
내 창 머리에 쳐 있었네
1974
메모/
도두리에서 노양리 계성국민학교엘 가려면 보통 논길로 본정리까지 가서 산길로 학교까지 갔는데, 낮엔 문제가 없었지만 학교에서 때로 늦게 끝나(6학년 땐 반장이었으니 그럴 일이 더러 있었다) 밤에 집에 돌아가야 할 땐 참으로 난감하였다.
본정리 산길도 문제려니와, 본정리에서 도두리까지 무서워서 논길로 올 수도 없고, 가끔씩 차가 다니는 함정리(선말) 아리랑 고개 쪽으로 해서 돌아가자면 중간에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억들이 이렇게 내 노래에 담긴다.
-- 고 향
서산에 노을은 타는데
서산에 노을은 타는데
서산에 노을은 타는데
내 맘도 불붙어 타는데
저문 산 언덕에 소나무
저문 산 언덕에 소나무
저문 산 언덕에 소나무
세상의 한 그루 소나무
어둔 들 가운데 하얀 말
어둔 들 가운데 하얀 말
어둔 들 가운데 하얀 말
내 맘에 묶여진 하얀 말
내 방 한 구석의 손가방
내 방 한 구석의 손가방
내 방 한 구석의 손가방
내 인생 따라온 손가방
밤마다 꿈속의 고향 길
밤마다 꿈속의 고향 길
밤마다 꿈속의 고향 길
내 향수 달리는 들녘 길
1978. 12
메모/
78년 12월이면 군에서 제대하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군에 가기 전에 얼마간씩 서울에 산 적은 있었다.)
8월, 군대에서 제대할 때 짐 넣어 가져온 나무 탄통 박스에 또, 사제 짐을 담아가지고 서울 올라온지 약 넉달 쯤 지나서인가 싶다.
뭔 놈의 고향에 대한 집착이 이리 강한지 . . .
-- 思 亡 父 歌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거친 베옷 입고 누우신 그 바람 모서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바람 거센 갯벌 위로 우뚝 솟은 그 꼭대기
인적 없는 민둥산에 외로워라 무덤 하나
지금은 차가운 바람만 스쳐갈 뿐
아, 향불 내음도 없을
갯벌 향해 뻗으신 손발 시리지 않게
잔 부으러 나는 가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모진 세파 속을 헤치다 이제 잠드신 자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길도 없는 언덕배기에 상포(喪布)자락 휘날리며
요랑 소리 따라가며 숨가쁘던 그 언덕길
지금은 싸늘한 달빛만 내리비칠
아, 작은 비석도 없는
이승에서 못 다 하신 그 말씀 들으러
잔 부으러 나는 가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지친 걸음 이제 여기 와
홀로 쉬시는 자리
나 오늘 다시 찾아가네
펄럭이는 만장(輓章)너머 따라오던 조객들도
먼 길 가던 만가(輓歌)소리 이제 다시 생각할까
지금은 어디서 어둠만 내려올 뿐
아, 석상(石像)하나도 없는
다시 볼 수 없는 분 그 모습 기리러
잔 부으러 나는 가네
1978.
메모/
제대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울지도 않았고.
도두리에서 북쪽은 신흥과 물 건너 안중 쪽이고, 남쪽으로 또 들이 있고 들너머 신대리, 영창 부락이 있었다.
그 영창 부락 앞쪽으로 몇 개의 산 둔덕(봉아제산)이 있고, 그 중 두 번 째 쯤 높은 둔덕 군부대 철책 아래에 아버지가 모셔졌다.(제일 높은 곳에는 미군의 것이라는 작은 레이더 기지가 있다.)
거기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넓고 넓은 평택호가 있고, 그너머 <물근너>(안중면인가)가 있고, 여름이면 시원하겠지만 겨울 서풍이 매서운 곳이다.
풍광이야 왼쪽으로 계양 바다 등대도 보일 듯하고, 옛날 숭어나 새우젖 가득 실은 황포 돛배들까지 보일 듯 좋다.
뒤쪽으로는 수십년 동안 인근 미군부대 활주로, 도로, 건물 공사에 쓰느라 산 허리가 부서진 그 돌산 너머로 도두리도 보일 듯 하고 . . .
아버지 돌아가신지 얼마 안돼서 서울에서 밤에 거기까지 갔던 것인데, 이 노래가 어떤 느낌으로 만들어진 것이냐 하면 참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음반으로 발표된 한참 뒤, 국내 어떤 공항에서 한 신사가 내게 인사하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님이 이 노래를 들으시면서 "무슨 노래가 이렇게 청승스러우냐"고 하셨는데, 그러고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셨습니다.
당황해 하는 내게 그 신사는 다시 말했다.
"연세 많으시고, 호상이었습니다."
--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뒷뜰의 해바라기 울타리에 기대어 자고
담 너머 논둑길로 황소 마차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음, 무너진 장독대 틈 사이로
음, 난쟁이 채송화 피우려
음, 푸석한 스레트 지붕 위로 햇살이 비쳐오겠지
에헤야, 아침이 올게야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담 그늘의 호랭이꽃 기세 등등하게 피어나고
따가운 햇살에 개흙마당 먼지만 폴폴 나고
음, 툇마루 아래 개도 잠이 들고
음, 뚝딱거리는 괘종 시계만
음, 천천히 천천히 돌아갈께야,텅빈 집도 아득하게
에헤야, 가물어도 좋아라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장독대의 큰 항아리
거기 술에 담던 들국화
흙담에 매달린 햇마늘 몇 접 어느 자식을 주랴고
음, 실한 놈들은 다 싸보내고
음, 무지랭이만 겨우 남아도
음, 쓰러지는 울타리 대롱대롱 매달린
저 수세미나 잘 익으면
에헤야, 어머니 계신 곳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마루 끝 판장문 앞의 무궁화 지는 햇살에 더욱 소담하고
원추리 꽃밭의 실잠자리 저녁 바람에 날개 하늘거리고
음, 텃밭의 꼬부라진 오이,가지
음, 밭고랑 일어서는 어머니
지금 퀴퀴한 헛간에 호미 던지고
어머니는 손을 씻으실께야
에헤야, 수제비도 좋아라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내 고향집 마당에 쑥불 피우고
맷방석에 이웃들이 앉아
도시로 떠난 사람들 얘기하며
하늘의 별들을 볼게야
음, 처자들 새하얀 손톱마다
음, 샛빨간 봉숭아 물을 들이고
음, 새마을 모자로 모기 쫓으며
꼬박꼬박 졸기도 할께야
에헤야, 그 별빛도 그리워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어릴적 학교길 보리밭엔 문둥이도 아직 있을런지
큰 길가 언덕 위 공동묘지엔 상여집도 그냥 있을런지
음, 미군 부대 철조망 그 안으로
음, 융단같은 골프장 잔디와
음, 이 너머 산비탈 잡초들도
지금 가면 다시 볼께야
에헤야, 내 아버지는 그 땅 아래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
1984. 6
메모/
내가 태어났던 집은 지금 남아있는 그 집이 아니라 그 마당 가의 오두막이었던 같고,
지금 남아있는 집을 지을 때의 기억이 조금은 남아있다. 주추를 놓으면서 여러사람이 노래를 불러가며 쿵 쿵 메질을 하던 기억 등이다. 아마 서너살 때쯤이 아니었나 싶다.
아뭏든 난 이 새 집에서 자랐고, 커서는 여기서 몇 해 농사도 지었고, 그 사랑채 작은 방에서는 [얘기] 등 초기의 노래들도 만들었고, 이 집은 영원히 [우리 집]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집이 그만 팔리고 말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어찌 어찌 그 지경이 되고 말았다.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가서 종이 한 장 들고 이 구석 저 구석 돌아다니면서 기록을 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거기에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또 풀어내고 . . .
-- 들 가운데서
바람아 너는 어딨니, 내 연을 날려줘
저 들가에, 저 들가에 눈 내리기 전에
그 외딴 집 굴뚝 위로 흰 연기 오르니
바람아 내 연을 날려줘 그 아이네 집 하늘로
바람아 너는 어딨니, 내 연을 날려줘
저 먼 산에, 저 먼 산에 달 떠오르기 전에
아이는 자전거 타고 산 쪽으로 가는데
바람아 내 연을 날려줘 저 어스름 동산으로
바람아 너는 어딨니, 내 연을 날려줘
저 하늘 끝, 저 하늘 끝 가보고 싶은 땅
얼레는 끝없이 돌고, 또 돌아도 그 자리
바람아 내 연을 날려줘 들판 건너 산을 넘어
1984.10
메모/
도두리는 인근 동네에서 가장 낮은 지표면에 있었고, 버스를 타고 평택에서 들어오면 미군부대 후문이 있는 아리랑 고개에서 내려서 함정리를 거쳐 말랭이까지 그리고, 거기서 옛날 서당이 있던 산비탈 고갯길을 내려서야 그 본 동네로 들어오게 된다.
우리집은 그 본동네의 가운데 가장 북쪽 끝 신흥 부락(지금은 도두 2리) 가는 길에 뒤로 들판을 바라보며 있고.
그 서당이 있던 비탈 위는 거기서 본동네 입구까지 조금 더 길게 뻗어서 도장산이라 불렸고, 그 끄트머리에 커다란 바위들이 있었다. 물론, 여기가 옛날(내가 태어나기 전) 배 대던 자리였고, 그 바위들 중 하나에 조그만 애기 발자욱 같은 것이 있어서 우린 애기장수 바위라고 불렀다. 역사 연구하는 분의 얘기로 그 산 꼭대기에 그 포구와 갯벌 물길을 바라보는 정자(돈두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 너머가 바로 황새울이다.
거기는 부근의 논들보다 아주 깊은 곳이라서 내가 농사 지을 때 그 곳의 남의 논 써레질을 하러 들어가면 경운기가 푹 푹 빠져버려서 아주 애를 먹이던 곳이기도 하다.
거기가 바닷물이 들어오던 가장 끝자락의 깊은 골이었기 때문이다. 또, 개간 이후 마지막까지 늪지로 남아있었던 곳이고. 그래서 황새들이 날아왔던 곳이고.
거기가 이 노래의 실처이다.
도두리에 달이 솟아오르는 곳이고, 연을 날리면 그 너머로 연결이 안되는 마지막 들이고, 철조망 너머 미군부대의 너무나 컬러풀한 물탱크들이 세워진 경계이고, 그 미군부대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고 산다는 두집인가 세집매의 조그만 언덕이고.
거기는 어린 우리에게 신비로운 변방이었고, 그너머 더 큰 세상의 최후방 초소만 같던 마을이었다.
-- 배 들온대여
배 들온대여, 새우젓 배 들온대여
찬 새벽 달빛에 웅크린 갯벌
잔 파도 밀며 배 들온대여
배 들온대여, 새우젓 배 들온대여
황포돛대는 감아 올리고
밀물에 실려 배 들온대여
꿈인가 내가 그 곳에 다시 가나
아, 뱃터는 사라지고
갯벌 갈대처럼 부대끼던 얼굴들
이십 년 세월에 그 한 모두 풀었다는가
(뜨신 국물에 쓴 소주 한 잔으로
가슴이 더울줄 그 땐 몰랐지)
배 들온대여, 새우젓 배 들온대여
찬 새벽 달빛에 웅크린 갯벌
찬 파도 밀며 배 들온대여
꿈인가 내가 그 곳에 다시 가나
아, 갯벌도 사라지고
어두운 하늘에 습기 찬바람만
떠나온 고향을 홀로 남아 지켰다는가
(아, 이제 돌아갈 고향도 잃고,
닻을 내릴 곳도 없는데)
배 들온대여, 새우젓 배 들온대여
텅 빈 내 가슴에 새벽 밀물처럼
가득히 밀려와 닻을 내린대여
1984. 11
메모/
우리 집 뒤로는 옥수수 키우던 작은 텃밭과 그 텃밭 가의 <용애>라고 하던 웅덩이, 거기 붙은 작은 신작로 그리고, 그 신작로 너머 아산만 갯물이 멀리까지도 들어오던 실개천이 있었다.
아주 어려서는 그 개천으로 바닷일 다니는 작은 배들이 들어왔었다. (그 갯둑에서 밤엔 늑대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이건 누구한테 전해들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 어디까지가 내 현실의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전생의 기억인지 때론 아물거리기만 한다.)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거기가 내 현실의 고향이 아니고 전생의 한 삶의 길목이었다면 그 전생으로라도 돌아가고 싶다.
-- 애고, 도솔천아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선말 고개 넘어간다
자갈길에 비틀대며 간다
도두리 벌 뿌리치고 먼 데 찾아 나는 간다
정든 고향 다시 또 보랴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이깟 행차에 흥 난다고 봇짐 든든히 싸ㅅ겄는가
시름 짐만 한 보따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길을 막는 새벽 안개
동구 아래 두고 떠나간다
선말산의 소나무들 나팔소리에 깨기 전에
아리랑 고개만 넘어가자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도랑물에 풀잎처럼
인생행로 홀로 떠돌아 간다
졸린 눈은 부벼 뜨고 지친 걸음 재촉하니
도솔천은 그 어드메냐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등 떠미는 언덕 너머 소매 끄는 비탈 아래
시름 짐만 한 보따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풍우설운 등에 지고
산천 대로 소로 저자길로
만난 사람 헤어지고 헤진 사람 또 만나고
애고, 도솔천아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노을 비끼는 강변에서 잠든 몸을 깨우나니
시름 짐은 어딜 가고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빈 허리에 뒷짐 지고
나 나..
선말 고개 넘어서며 오월 산의 뻐꾸기야
애고, 도솔천아
도두리 벌 바라보며 보리원의 들바람아
애고, 도솔천아
애고, 도솔천아
메모/
만든 시기를 적어두지 않았으나 대략 1984년 전후 때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시기에 고향 이야기를 줄기차게 하고 있다.
앞에 소개한 도장산 뒷쪽(황새울 방향)으로도 길이 있고, 큰샘(동네 유일의 식수원)터와 삼도천을 지나 선말산으로 아리랑 고개까지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동네 앞길로 떳떳하게 나가기에 뭔가 마땅치(또는 적절치) 않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이 노래도 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실제, 농사를 한 두해 쯤 지으면서 봄 들판에 경운기 뻗쳐 놓고 집에 들어와 짐 싸들고 가족 누구에게도 말 한 마디 없이 떠난 일이 몇 차례 있는 내게 동네 앞길과 서당 앞길, 말랭이 한 가운데의 길은 너무나 평이한 길이었을 것이다.
<보리원>은 거꾸로, 우리 집에서 신흥 부락을 지나 갯벌 끝(물 막은 이후론 평택호)까지 가야 만나는, 경운기로 한 30분은 달려야 하는 가장 최근의 간척 농지 이름이고, 선말산의 소나무들 깨우는 <나팔소리>는 선말(함정리) 사람들 해 맞는 동쪽 미군부대에서 들리는 나팔 소리이다.
-- 보름달
보름달
시골 마당에 숨바꼭질하는 애들
짚동가리 사이로 모두 깊이 깊이 숨어라
거기 환한 달빛 비춰, 깜짝 놀라
나는 왜 숨어 다닐까, 숨어 다닐까
보름달
시골 마당에 술래잡기하는 애들
술래한테 채일라 모두 빨리 빨리 뛰어라
제 그림자 밟으며 골목 골목 달리다
나는 왜 쫓겨다닐까, 쫓겨다닐까
보름달
시골 마당에 밤 늦도록 놀던 애들
방문 여는 소리 너무 커서 깜짝 놀라
나는 왜 몰래 다닐까, 몰래 다닐까
보름달
서울 한 복판 많은 업무에 시달리다
친구하고 한 잔 하고 통금 직전에 나와
방범대 호각에 놀라 허둥지둥 달리다
나는 왜 쫓겨다닐까, 쫓겨다닐까
1981. 3.
메모/
숨고 찾는 놀이는 참 스릴 있다. 왜 그럴까 ?
숨고 쫓는 놀이도.
인간적인 놀이이기보다 사회적인 놀이이다. 때론 무섭고, 때론 짜릿한.
그런데, 그 때 그 시골 마을엔 마당이 없다. 모두 텃밭 갈아 먹고 있다.
밤에는 옆 집 가는 길도 안보인다.
-- 얘기 2
저 들 밭에 뛰놀던 어린 시절
생각도 없이 나는 자랐네
봄 여름 갈 겨울 꿈도 없이 크며
어린 마음뿐으로 나는 보았네
도두리(悼頭里) 봄 들판 사나운 흙바람
문둥이 숨었는 학교길 보리밭
둔포장(屯浦場) 취하는 옥수수 막걸리
밤 깊은 노성리(老城里) 성황당 돌무덤
달 밝은 추석날 얼근한 농악대
궂은 밤 동구 밖 도깨비 씨름터
배고픈 겨울밤 뒷동네 굿거리
추위에 갈라진 어머님 손잔등을
이 땅이 좁다고 느끼던 시절
방랑자처럼 나는 떠다녔네
이리로 저리로 목적지 없이
고단한 밤 꿈속처럼 나는 보았네
낙동강 하구의 심란하다 갈대 숲
희뿌연 안개가 감추는 다도해
호남선 지나는 김제 발 까마귀
뱃놀이 양산도 설레는 강마을
뻐꾸기 메아리 산골의 오두막
돌멩이 구르는 험준한 산 계곡
노을 빛 뜨거운 서해안 간척지
내 민족 허리를 자르는 휴전선을
주변의 모든 것에 눈뜨던 시절
진실을 알고자 난 헤매였네
귀를 열고,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설프게나마 나는 듣고 보았네
길 잃고 헤매는 교육의 현장과
지식의 시장에 늘어선 젊은이
예배당 가득히 넘치는 찬미와
정거장마다엔 떠나는 사람들
영웅이 부르는 압제의 노래와
젖은 논 벼 베는 농부의 발자욱
빛 바랜 병풍과 무너진 성황당
내 겨레 고난의 반도땅 속앓이를
얼마 안 있어 내 아이도 낳고
그에게 해 줄 말은 무언가
이제까지도 눈에 잘 안 띄고
귀하고 듣기 어려웠던 얘기들
아지고 풋풋한 바보네 인심과
양심을 지키는 가난한 이웃들
환인의 나라와 비류의 역사
험난한 역경 속 이어온 문화를
총명한 아이들의 해맑은 눈빛과
당당한 조국의 새로운 미래를
깨었는 백성의 넘치는 기상과
한 뜻의 노래와 민족의 재통일을
1981. 3
메모/
향토사학자랄까, 우리 모임의 김해규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평택은 조선조 말까지 거의 충청권이었단다.
평택군에서도 도두리 일대로 말하자면 그건 분명하다.
우린 평택장보다 둔포장을 다녔다. 아리랑 고개에서 버스를 타고 삼거리라 불리던 평택이나 아산으로 가는 양 갈래길에서 내려 아산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아산만으로 흘러 나가는 작은 개울 건너 충남 땅 둔포가 있었다.
어려서는 그리 멀리까지 나다닐 일이 없었지만 내가 농사 지을 때 경운기 연료를 사러 내내 다녔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한 때 우리 고대사에 흠뻑 빠지고, 민족주의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거대한 대륙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민족의 고대사와 위대한 민족의 긍지 뭐 이런 것.
그 뒤 사회과학 쪽 책들을 접하면서 이걸 탈피할 수 있었는데, 이 노랠 만들 때에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런 민족의 자긍심을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뒤, 문제는 그런 미몽의 이데올로기 또는, 국가주의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인간을 조직하고 기존의 지배관계를 견고히 하기 위해 그런 이데올로기를 . . .
이런 근대성을 벗어버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
가사가 참 쑥스럽지만 이것도 내 한 일기이니 . . .
함께 사는 가족이나 부모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는 일이 <가출>이라면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에 가기 전까지 몇 차례의 <가출>을 한 것은 사실인 것 같고, 그렇게 만났던 것들이 노래로 나오고 있다.
--우 네
저 건너 산에는 진달래 고운데
그 꽃을 못 먹어 두견이 우는데
우네, 우네, 두견이 우네
진달래 향기에 취해서 우네
동구 길 텃논엔 장마비 오는데
넘치는 논둑엔 개구리 우는데
우네, 우네, 개구리 우네
장대비 속에서 목놓아 우네
외딴집 마당엔 갈 햇볕 좋은데
빈집을 지키는 아기는 우는데
우네, 우네, 아기가 우네
하늘이 깊다고 무서워 우네
눈 내린 산천엔 삭풍이 부는데
어둠에 덮인 채 뒷산이 우는데
우네, 우네, 뒷산이 우네
긴 긴 밤 눈가루 날리며 우네
1981. 7
메모/
나는 어려서 동네 인근에서 진달래를 본 적이 없다.
산다운 산이 별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커서 다른 고장 산에서 그 애련한 꽃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엔 외딴집도 없고, 뒷산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면 귀가 멍멍할 정도로 밤 새 울어대던 천지 사방 논두렁의 개구리들.
개골 개골 개골,
엉 엉 엉 울어대던
개구리들 . . .
-- 실향가 (失鄕歌)
고향 하늘에 저 별, 저 별
저 많은 밤 별들
눈에 어리는 그 날, 그 날들이
거기에 빛나네
불어오는 겨울 바람도 상쾌해
어린 날들의 추억이 여기 다시
춤을 추네, 춤을 추네
저 맑은 별 빛 아래
한 밤 깊도록 뛰놀던 골목길
그 때 동무들 이제 모두 어른 되어 그곳을 떠나고
빈 동리 하늘엔 찬바람 결의 북두칠성
나의 머리 위로
그날의 향수를 쏟아 부어
눈물 젖네, 눈물 젖네
나의 옛집은
나도 모르는 젊은 내외의 새 주인 만나고
바깥 사랑채엔
늙으신 어머니, 어린 조카들, 가난한 형수님
아버님 젯상에 둘러앉은 객지의 형제들
한 밤의 정적과 옛집의 사랑이 새삼스레
몰려드네, 몰려드네
이 벌판 마을에
긴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오며는
저 먼 들길 위로
잊고 있던 꿈같은 아지랭이도 피어오르리라
햇볕이 좋아 얼었던 대지에 새 풀이 돋으면
이 겨울 바람도, 바람의 설움도 잊혀질까
고향집도, 고향집도
1981. 12.
메모/
시골집이 팔린 뒤, 안채에 사는 새 주인의 양해로 어머니와 큰댁 식구들은 사랑채로 물러 앉고 우린 그 옹색한 사랑채에서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였다.
누구 하나 투덜대는 사람 없었고, 그런 상황에 대한 코멘트도 일체 없었다. 그저 제사를 지내고 형제들은 다시 흩어졌다.
어머니와 큰댁 식구들도 오래지 않아 거길 아주 떳다.
그렇게 나는 실향민이 되었다.
-- 우리네 고향
가세, 가세, 길 떠나 가세
어두운 밤길로 꿈처럼 가세
가세, 가세, 너두야 가세
바쁘게 오던 길 되돌아가세
가세, 가세, 논길로 가세
가문 들 흙냄새 맡으며 가세
가세, 가세, 너두야 가세
갈짓자 걸음에 흥겨워 가세
가세, 가세, 고향엘 가세
빈 주먹 마른 종아리로 머슴돼 가세
가세, 가세, 너두야 가세
봄 들판 아지랭이 구경이나 가세
가세, 가세, 벌초나 가세
죽은 애비 무덤에 벌초나 가세
가세, 가세, 너두야 가세
봉아제 산 꼭대기 따라나 가세
가세, 가세, 갯벌로 가세
황토길 지나서 또 건너가세
가세, 가세, 너두야 가세
우리네 고향은 여기나 저기
1982. 2.
메모/
이건 노래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또 한 장의 일기이다.
-- 장서방네 노을
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 조차 설운 날
먼 산에는 단풍 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
서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 빛에 겨운
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비바람에 거친 세월도 님의 품에 묻고
여러 십년을 한결같이 눌 바라고 기다리오
기다리다 맺힌 한은 무엇으로 풀으요
저문 언덕에 해도 지면 밤벌레나 될까요
어찌하리, 어찌하리 버림받은 그 긴 세월
동구 아래 저녁 마을엔 연기만 피어나는데
아, 모두 떠나가 버리고
해지는 고향으로 돌아올 줄 모르네
솔밭 길로 야산 너머 갯바람은 불고
님의 얼굴 노을 빛에 취한 듯이 붉은데
굽은 허리 곧추세우고 뒷짐지고 서면
바람에 부푼 황포 돛대 오늘 다시 보오리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되돌리기 비나이다
가슴 치고 통곡해도 속절없는 그 세월을
아, 모두 떠나가 버리고
기다리는 님에게로 돌아올 줄 모르네
당신의 고단한 삶에 노을 빛이 들고
꼬부라진 동구 길엔 풀벌레만 우는데
저녁 해에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
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 속에 깃드는데
1983. 9 (장서방은 장승을 의미한다)
메모/
우리 동네에서 장승을 본 일은 없고, 서낭당도 없었다.
멀리 계양 쪽으로 가야 볼 수 있었다. 물론, 먼 동네 풍경인 만큼 이채롭기도 했을 터이다.
그런데, 이런 풍경을 어른 돼서 서해 어느 해수욕장 부근에서 다시 발견하였다.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였는데 어찌나 애릿하던지 . . .
도두리에 다시 돌아가 살게 된다면 함정리 선말산 넘어가는 동네 초입에 장승도 세우고 서낭당도 하나쯤 마련하자고 해 볼 것이다.
-- 다시 가는 노래
에, 해 떨어진다 돌아가자 고갯길 장승터엔 해무리가 진다
에요 데요, 갯바람 살랑 살랑 빈집 허물기 전, 에요 가자
해가 뜨면 땡볕이요, 달이 뜨면 칼바람
맘 붙여 몸 기댈 언덕배기 하나 없네
예 어디냐, 예 어디냐
메마른 대처 후여 떠나가자
밭 갈아엎어 콩 심고, 텃논에 물대어 벼 심고
외양간 쓸어 누렁소 매고 배불리 먹여 잠재우고
조상 제사나 잘 모실란다
에, 해 떨어진다 돌아가자 허물어진 장독대에 족제비 노닌다
에요 데요, 턱없이 늙어버린 당집 할매 죽기 전, 에요 가자
적수공권 떠돌던 몸 처자가솔도 흩어져
회오리풍 동풍에 천둥 번개 요란하니
예 어디냐, 예 어디냐
남의 땅 대처 후여,후여 떠나가자
흩어진 식구들 모여서 두레상 한 마루 밥 먹고
동네 품앗이 나락 걷워 농주 담궈 나눠 먹고
두레나 한 번 잘 놀아 볼란다
에, 해 떨어진다 돌아가자 메워버린 우물가엔 흰 김이 오른다
에요 데요 서낭당 돌무데기 와르르 무너지기 전, 에요 가자
뚫으셔,뚫으셔, 샘구멍 뚫으셔
메워버린 우물가에 흰 김이 오르니
길조가 아니고는 딴 뜻이 없겠네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얼룩소가 아니고 누렁 송아지
* 자진모리 + 휘모리 (별달거리)
메모/
[얘기 2.]나 [장서방네 노을]과 비슷한 시기에 만든 노래인가보다.
전통 공동체 마을의 사회 경제적인 파괴에 대한 아픔보다 전통적인 것 그 자체에 대한 관념적 집착이 강한 것으로 보아 . . .
쑥쓰럽지만, 국립국악원이나 국립국악관현악단, KBS 국악관현악단, 서울 시립국악 관현악단 등 여러 국악 연주단체들과 협연을 한 나의 가장 대표적인 국악 레퍼터리이다.
-- 저 들에 불을 놓아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 가득히
낮은 논둑길 따라 번져가누나
노을도 없이 해는 서편 먼산 너머로 기울고
흩어진 지푸라기 작은 불꽃들이 매운 연기 속에 가물가물
눈물 자꾸 흘러내리는 저 늙은 농부의 얼굴에
떨며 흔들리는 불꽃들이 춤을 추누나
초겨울 가랑비에 젖은 볏짚 낫으로 그러모아
마른 짚단에 성냥 그어 여기 저기 불 붙인다
연기만큼이나 안개가 들판 가득히 피어오르고
그 중 낮은 논배미 불꽃 당긴 짚더미 낫으로 이리저리 헤집으며
뜨거운 짚단 불로 마지막 담배 붙여 물고
젖은 논바닥 깊이 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
어두워가는 안개 들판 너머, 자욱한 연기 깔리는 그 너머
열나흘 둥근 달이 불끈 떠오르고 그 달빛이 고향 마을 비출 때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농부의 소작 논배미엔
짚더미 마다 훨 훨 불꽃 높이 솟아오른다
희뿌연 달빛 들판에 불기둥이 되어 춤을 춘다
1992. 11
메모/
서울 우리 동네 아파트 단지가 작은 들판과 면해 있는데, 그 단지의 전에 살던 집에서 보는 그 풍광이 일품이었다.
달이 뜨면 달빛이 거실 마루에까지 들어오고, 봄 개구리 소리하며 . . .
오랫만에 나온 농촌 풍경의 노래이다.
전의 노래들과 달리 구체적으로 한 농부가 등장하고, 그의 분노가 불길로 솟구친다.
표현들이 리얼하고 직설적이고 . . . 그런데, 다소 객관적이다.
사람들은 초기의 노래가 서정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서정성을 버려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우기고 . . .
--도두리의 봄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도두리 음, 거긴 이제 내 고향이 아냐
봄 들판 못자리 차가운 무논에 알량한 햇볕이 번지고
사람 떠난 폐가 구멍난 창호마다 봄바람이 사리살살 불어도
젊은 처녀 총각들 버글대지 않는다면, 이젠 거긴 내 고향이 아냐
왜냐구 ? 희망이 없으니까
아, 백 여 호가 넘는 동네 집집마다
한 십 년 새 주인들이 죄다 바뀌고
아니면, 주인들이 집 버리고 떠나서 무너진 채, 버려진 채
썩어 풀 돋는 지붕이 한 두 집이 아니고 . . .
아니, 거기 남아 사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알지
대개는 희망이 없다 그 말이여, 사는 낙이 없다 그 말
강근이는 미군부대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고, 몸뗑이가 워찌 됐겄어
경식이, 승훈이 알콜 중독으로 죽어뻐리고,
수용소 가서 치료받고 나왔대더니 또 술처먹고 바로 바로 죽었지
들이야 넓지유, 땅금이야 비싸지유
아, 게다가 언제 근래 흉년 한번 든 적 있남유
허지만, 허지만 고향 생각 하덜 마슈
이젠 여긴 당신네덜 로맨틱헌 고향이 아녀유
참 아름다웠지
봄,
밤 새 개구리들이 악을 쓰고 울어대던
텃논배미 여기 저기 봄물 잠겨 찰랑거리고
그 차가운 무논에 정신 번쩍 들게 신 벗고 들어서면
논배미 잔 물결처럼 살랑 살랑 불어대던 봄바람
왜 그리 선동적이었을까 ?
어서 농사들 시작하라고
봄물 가득 들어오는 용수로 구비구비
몇 십리 몇 백리 멀리서부터 흘러온
그 맑고 차가운 물살
때론, 뚝을 넘치며
때론, 뚝 가의 웃자란 봄풀들 사정없이 쓰러뜨리며
농사꾼들 잠 자는 밤 내내, 그들 일하는 해녘 내내
더 멀리, 더 멀리, 마지막 마른 논바닥까지
소리내지 않고 다만 흘러가고
들 일 끝내고 노을빛에 젖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물살에 발 씻고, 겨우내 묵은 때까지 흥건히 불려서 벗겨 씻고
또, 지푸라기로 고무신 벅 벅 문질러
그 새 세상 같은 물살에 헹궈 탈탈 털어 신고
접어올렸던 바지 가랭이마저 풀어내리면
아, 살맛 나는 그 따뜻한 온기
그 바람, 그 물줄기는 어디서 오는건지
저 먼 세상, 참 신비로운 세상에서
냉정하게, 아주 이성적으로, 혁명적으로,
은밀하게 전달하는 비밀스럼 문건처럼
겨우내 팍팍했던 가슴들 우, 설레게 하는,
벌렁 벌렁 들뜨게 하는 비밀스런 전갈처럼, 속삭임처럼 . . .
고향에 대한 내 원초적 정서는 바로 그것이었어
그 들판 너머엔 너른 갯벌이 있고
달 밤 밀물 가득 넘실대다가
사람 네 길 다섯 길 뚝 떨어지게 빠지는 새벽녘 썰물 땐
더럽게 푸석한 개흙들을 뻥 뻥 무너뜨리며
쓸어내리며 퇴각하는 시커먼 갯물의 갯벌이 있고
또, 그 너머엔 육지, 야산들과 또 들이 있고
우린 거길 물근너라 불렀지
물근너
건너다니는 배 한 척 없는 미지의 땅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도두리, 허나 이젠 거긴 내 고향이 아니야
릿사무소 앞 길로 버스가 지나가고 제삿날 더러 서울놈들이 내려도
까라앉는 땅 돋우고 이층 양옥이 몇 채 서고
마루엔 소파 탁자 으, 편타 해도
미군부대 기상나팔보다 먼저 깨서 일하는 동네 사람들이 진정 행복하지 않다면
아, 거긴 내 고향이 아니야
아침마다 기상나팔 소리, 저녁마다 받들어 총
봉아제 산 레이다 기지 첨탑에 깜빡이 불이 들어오고
산너머 하늘로 노을이 붉게 번질 때
잘생긴 미군 애들이 철조망 안, 그들의 영토에서 성조기를 내리고
-- 성조기여 영원하라 ! --
아리랑 고개 후문으로 노무자들, 하우스보이들이 퇴근하고
헌명이 몸 수색을 하고
그 때 쯤 임무 교대한 도두리, 함정리 사는 경비원들이
뺑 뺑 둘러친 철조망 안, 높다랗게 잘 지은 보초막마다에서
저들이 빌려준 이상한 장총을 메고
그 스러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영토를 지키고 . . .
"접근하면 발포함 !!"
참, 그 때
한 겨울 얼었던 땅이 풀리고
동네 하늘에 뜬 한낮의 햇덩어리가 달처럼만 보이도록
온통 뿌옇게 황사가 불어치던 초 봄
도두리 일대엔 수 십대의 불도저들이 몰려 들어왔지
삽시간에 온 들판을 파헤쳤지
논둑, 밭둑, 꼬불탕거리는 지겟길 마차길
물도랑, 웅뎅이, 벼포기 뽀송한 논바닥
두 번 볼 것 없이 밀어부치고
내원, 보리원, 흥농계, 안상골,
그 푹푹 빠지는 황새울 어디랄 것 없이
온 들판 붕붕거리며, 먼지, 연기 피우며
메꾸고 깎아내고 그저 한 바탕 펀펀하게 밀어놓고
홀연히 떠났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마치 빨치산들처럼
그리곤, 다시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벌판에 가래, 삽 들고 달라붙어
가로 세로 반듯 반듯하게, 십장이 줄 대는대로 들판을 쪼개서
한 구간, 두 구간 논둑들을 쌓고, 용수로, 배수로를 치고 . . .
우린, 높이 몇 전에 길이 몇 자로 도급을 받아
얼굴이 새까맣게 타도록, 죽을똥 살똥 모르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멀리까지 뚝들을 쌓았지
황석영이 객지의 한 장면처럼
들판 한 쪽엔 그야말로 십장들의 함빠가 있고
또 우린 그렇게 품삯을 십장한테 또는, 누군가한테
싸구려 딱지로 팔아버리고 . . .
그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봄내 모내기 전까지 우린 그 들판에서 살았지
끼리 끼리 제 논에 작답들을 했지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도두리. 하지만 거긴 이제 내 고향이 아니야
우리 팔남매가 태어나고 헤매인 들판 동네 지금은 거기 아무도 없고
남은 이들 모두 지쳐 도회만 바라보고 테레비, 비디오만 쳐다보고
희망이 없다, 무너진다, 저 집 봐라, 뉘집이냐
여긴 이제 누구의 고향도 아니야
그래, 남은 이들 맹독성 농약에, 고된 노역에,
저곡가 수매에 몸 망가지고
국민학교 분교마저 폐교되도록 사람의 씨가 마르는
공화국의 소외지역이야
도장산 아카시아 하얗게 피면 뭘하랴, 그 향기 여전히 달콤한들 뭘하랴
거기 애기 장수 바위 벌써 땅 밑으로 묻혀버리고
상수도 꼭지 지하수 콸콸 쏟아지면 뭘하랴
생활 하수가 온 동네 마당 가생이마다
질질 흘러 넘치는데 . . .
도회지 나간 이들 성공하면 뭘하랴, 제사마져 모셔 간다는데
떠난 사람들은 모두 성공했다는가 ?
공장에, 노동판에, 술집에, 사창가에 몸들 팔지 않고
그래, 손에 흙들 안묻히고, 사철 춥지도 덥지도 않게
자가용 살 살 끌며 모두 성공들 했다는가 ?
테레비 드라마들처럼 산다는가 ?
여기보다 더 딱한 사람들은 없다는가 ?
돌아오지들 마시게, 행여 돌아갈 고향으로는 생각들 마시게
여긴 그 고향이 아니네
그런 고달픈 맘 쉴 곳이 아니네
참, 옛날 선거 때 돌아버린
김정식 대통령 소식이 궁금한가 ?
우리 모두 궁금하긴 마찬가질세
그저 가끔씩 생각들이나 한다네
잘들 지내게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도두리, 거긴 이제 내 고향이 아니야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도두리, 거긴 이제 절대로 내 고향이 아니야
1992.7
메모/
이 노래 만들고 한 너댓 해 쯤 지나선가
서울 북촌 창우 극장에서 이 노랠 불렀다.
아마, 사물놀이 김덕수패가 해체된 뒤 같은데, 그 패에서 소리도 하고 쇠를 치던 이광수 씨와 북 치던 최종실 씨가 참여한 사물패와 우리 양악패가 어울려 실험적으로 만든 공연이었던 것 같다.
공연이 끝나고 한 원로 연극 연출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최종실씨에게 그 분이 덤덤하게 물었다.
"그 글은 누가 쓴거야 ?"
누가 쓰긴요 . . .
제가 투덜댄거지요 . . .
첫댓글 아~ 모든 정황들이 눈에 선하네요. 형 아버님 돌산에 모실 때 저도 따라 갔던 기억도 나구요.
형님은 기억 속의 도두리지만 저는 역사 속의 도두리입니다. 제가 즐겨 듣던 노래의 풍경들이 진하게 다가옵니다. 50대에도 푸른 젊음을 간직하고 사는 형님의 삶에 새삼 존경을 표하며, 그 노래의 고향을 지켜낸 뒤 돈두암 꼭대기에 형님의 노래비를 세워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