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향기
백루피짜리(3천원) 지폐를 서슴없이 꺼내서 맨발의 짐꾼에게 건네는 그를 만류하고 내가 주려고 하자 어림없다는 듯, “노오, 마담.” 손까지 휘휘 내 저으며 처음으로 아니라는 강한 답변이 돌아온다.
우리 단원들의 수화물을 뭄바이로 모두 부친 뒤 그에게 손을 내 밀었다.
땀에 젖어 끈적거리는지 바짓가랑이에 양손을 쓱쓱 문지른 후 나의 손을 맞잡는다.
악수로서는 미흡하여 내가 손을 풀고 나그라시의 떡 벌어진 어깨에 나의 양팔을 펼치자 겸연쩍어 멈칫거리던 그도 나의 등을 감싼다.
그에게서 한 달 동안 익숙해진 인도 냄새가 물씬 피어난다.
마산철도역 대합실만한 맹갈로르의 국내선 대합실은 이별하는데 안성맞춤인 양 다정스러워 보인다.
소지품과 겉옷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고 검사대를 지난 후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 그를 쳐다보자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로타리언들과 함께 손을 높이 들고 아직 나에게 눈을 맞추고 있다.
“나그라시, 아이 러브 유.” 하고 속으로 되뇌어 본다.
거의 매일 봉고차 운전석 나그라시의 뒤통수에다 대고 했던 말이라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느려터진 소떼들과 거리를 헤매는 집 없는 개들과 줄지어 달리는 자전거 무리와 뒤뚱거리며 내달리는 오토릭샤(삼륜차) 그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서는 인파들, 거기다가 중앙선이 없는 신작로에서 그의 운전 솜씨는 예술이다.
삐우웅! 삐우웅! 하는 쉴 새 없는 그의 크락션 누르는 소리에 웬만큼 앞서가는 차들은 한편으로 양보하고 그는 의기양양 중앙선을 넘나들며,
그래도 끊임없이 삐우웅! 삐우웅!
처음엔 안전벨트도 안 되는 차가 신경이 쓰이고 운전석이 영국처럼 오른편에 있어 운전기사 뒤에 앉은 나는 마주 오는 차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아 내색 없이 혼자 소스라치며 나그라시의 운전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시작한 말이었다.
그 말이 점심을 먹은 후 졸음이 오는 시간엔 나에게도 생수 같은 한마디였다.
맹갈로르 대합실에 걸려있는 벽시계에 시선이 닫자 고단함과 느슨함이 한꺼번에 파고든다.
우리 단원들은 충만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서로를 매만지며 삶의 이정을 재확인한다. 28일간 이국땅의 공동체생활은 아름답고 흐뭇한 나눔이며 모두가 하나 된 결실이었다.
우린 배턴을 이어 릴레이 달리기를 한 같은 팀 선수였다.
그것도 우승을 하여 지친 몸을 젖히고 들뜬 가슴을 하늘에 고하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나는 눈을 감는다.
바람 속에 머무는 건초더미 냄새, 소통 없는 공기가 뒹굴다 빠져나오듯 이불속의 냄새 같은 아련함이다.
그에게서도 인도 냄새가 물씬하다니, 이 냄새란 대체 뭘까?
유년시절이 떠오를 땐 늘 입안에 침이 가득해지고 나의 입술은 위로 치켜져 단내 음과 함께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가을의 궤적은 늘 소리로부터 시작되는 걸 내 어릴 적 고향 벽계동 언덕길에서 들었다.
11월의 이른 아침 해 뜨는 소리 속엔 무수히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과 그 곁엔 실개천이 흐르고 맨땅위엔 서리가 내려앉아 뿌옇다.
상투 찌른 우리 할아버진 광목바지를 양가 랑이 사이에 모두어 쭈구린 채 산수유 열매를 줍고 계시고, 똥 장군을 진 동네 아저씬 냄새 때문인지 무거워서인지 앙 다문 입술 속에서 쇳소리를 내며 저 만치서 뒤뚱거리며 밭두렁을 돌고 있다.
사랑채 마루엔 늦가을 짧은 해가 걸터앉고 할아버지의 천자문 가르치는 음성 속에 가래가 카랑카랑해지면 벽장문을 열고 문종이로 만든 주머니들이 조롱조롱 달린 섣가레에서 그 중 하나를 풀곤 하셨다.
바로 그 냄새였다.
찌들어 짠내음이 묻어있는 오래된, 그래서 공기처럼 그 자리에서 가시지 않는 냄새
나는 이렇게 인도를 보았다.
과거에서 묻어나 현재가 그리하여 미래가 되는, 그것은 조상이며 뿌리이기도 하다.
이제야 턱하니 맘이 놓인다.
인도에서 돌아오는 정거장 맹갈로르 귀갓길에서 인도를 만나게 된 셈이다.
인도탐방의 시작은 늦은 밤에 도착한 국제공항인 남부 뭄바이 공항안 화장실에서다. 쉴 곳은 마땅찮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천정속의 에어컨 바람을 피하여 여자 화장실에 머무르니 휴지는 없고,
수도꼭지 곁에 작은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다.
뒷일을 보고 사용하는 오래된 인도의 문화다.
뜨거운 짜이로(인도 차) 아침을 기다리며 국내선을 갈아타고 맹갈로르공항에 도착하자 우리를 맞이하는 로타리언은 진한 꽃다발을 안고 인도냄새로 맞이해 주었다.
한 달간 우리를 싣고 다닐 봉고차에 준비해간 ‘다이내믹코리아’라는 스티커를 창문 여기저기에 도배를 하니 우리나라가 움직이듯, 인도 남부서해의 작은 반촌으로 덜커덩거리며 달리는 우리들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쿤다푸라에서 다음날 지구대회가 열리기에 인천공항을 뜨면서도 연습한 인도가요를 쿵덕거리는 봉고 안에서도 눈은 밖을 향하지만 “길 없는 길을 떠난 인도 여행자”의 노랫가락에 흥얼거리며 미지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지구대회가 열리는 쿤다푸라에 도착하니 3180지구 총재님과 많은 로타리언들이 과일바구니와 꽃송이로 첫 만남을 장식해준다.
새벽엔 인도의 GSE단장과 아라비안해의 해안에서 해가 뜨는 장관을 즐기며 조깅을 하고, 원시적인 고기잡이 풍경에 넋을 놓고 망중에 빠져들기도 했다.
쿤다푸라에서의 지구대회 때 나는 성큼성큼 단상에 올라가 우리 팀을 소개하고, 12개 지역으로 4천명의 로타리언들에게 대한민국과 3720지구를 홍보 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마련해 주어서 아직도 가슴은 환해지고, 유한양행의 의약품들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 되었다.
국정원에서 제작한 우리나라 홍보 영상물과 포스코의 철의 연주는 한국을 향한 큰 관심을 갖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었으며, 그 중 으뜸은 GSE단원 오정임씨의 예쁜 미모와 화려한 부채춤이었다.
지구대회 동안 호텔에 머무르며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을 선보이려고 밤을 지새운 덕분에 인도가요 ‘길 없는 길’을 노래하자 뜨거운 환호와 갈채로 지구대회의 열기는 대단했다.
5개지역 모두 지역대회 환영식엔 우리들의 장기를 선보여 달라고 성화였다.
총재님과 GSE단장의 배웅을 받으며 첫 행선지인 시모가로 이동하였다. 로타랙트, 장애인 학교들을 운영하는 시모가의 로타리언들은 철저한 봉사를 하고 있었다.
맹인학교 방문 때엔 로타리언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느끼며, 3720지구 이름으로 현금을 기부하게 되어 가는 지역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기부하는 관례를 만들게 되었다.
호스트인 2지역대표 GNP는 브라만답게 우리 대한민국 경제와 남북관계, 우리지구에 관해서 끊임없이 질문 해 온다. 영어가 부족하니 나중엔 입이 아프고 메모장에 적어가며 대화를 하다 보니 딱한 연수생 같았다.
견학하고 늦은 시간 귀가하면 그가 노트를 들고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언제나 그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 같은 표정으로 나를 아니 3720지구를 관찰하는 거였다.
이건희라는 별명을 선물 해 주었는데 단원들 모두 아무리 생각해도 딱 들어맞는 별명이라고 거들어준다.
긴장과 과로 탓인지 결국 그 더운 날씨에 감기몸살로 심하게 덜덜 떨며 오한의 몸으로 다음 행선지인 무디게르로 옮기게 되었다.
커피농장이 즐비하고 솔솔바람에도 커피의 향내가 불어오는 그 곳 무디게르는 끝없이 이어지는 신작로를 지나 코코넛 열매의 물기가 그리워 질 무렵이 되어서야 당도했다.
창문을 열면 먼지속의 공해가 목안을 콕콕 찌르고 닫으면 매캐한 에어컨 공기로 답답했는데 무디게르에서는 창문을 활짝 열고, 내달리는 차안에서 흙먼지를 듬뿍 머금어도 괜찮았다.
무디게르 지역대표 라비부부는 그 누구보다도 다정다감하게 우리를 맞이하여 덕분에 라비의 집에 머무는 동안 온전한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식목으로 GSE기념을 갖으며 이번엔 그곳 로타리언들이 운영하는 특수 장애인 학교들과 화장터를 방문하며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함께하며 마이소르로 향하였다.
번화하면서도 막막한 마이소르 이곳은 힌두의 젖가슴 속이었다.
늙은 어미의 젖가슴, 철철 흘러내리던 뽀얀 젖물이 정말 그 안에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날 정도로 도시는 낡았고 인파는 어디서든 모여들었다.
힌두, 불교사원들엔 감사와 염원과 회환의 보따리들을 풀어내는 인파와 등줄기엔 쏟아지는 태양을 맞으며 삶의 철로를 두들기고 바꾸려는 구도자들의 모습엔 멀고 먼 마이소르왕국을 흠모하여 그들에겐 미래와 과거가 공존한다.
우린 인도를 읊으면서도 어느새 녹초가 되어 가슴으론 그리운 것이 그리워지는 걸 서
로에게서 읽는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홀대하던 이웃도, 힐난과 조소로 견주기만 하던 동료와 인척들도, 간섭과 배타로 변질되어온 사랑도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이다.
우리들은 내면 깊숙이 들어가 자신과의 투쟁과 타협으로 주변은 적요했고, 가슴속은 할퀴어진 상처의 흔적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기대기 시작했다.
우린 단기간의 휴식이 필요했다.
내 곁에서 사진 촬영으로 잠시도 쉬지 못하던 단원 이영희씨가 과로로 쓰러지기 직전이고 가져간 캠코더가 이유도 모른 채 고장까지 나서 그녀는 이래저래 스트레스까지 간직한 채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진공포장 하여 가져간 김장김치와 멸치, 오징어볶음들은 한 가방이었지만 간수를 잘못하여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이럴 땐 단원 김종구씨의 ‘어디로 갈거나’(김영동)라는 노랫가락이 우리를 어루만지곤 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그 노래를 부르게 했으니, 무거운 짐꾼 노릇과 우리들의 멋진 보디가드역할을 톡톡히 했다.
쿠샬랑가 지역대표는 오나시스 선박왕의 역할을 한 안소니퀸의 모습과 흡사하며, 그의 손님맞이는 신의 영역으로 비칠 정도로 깍듯했다.
쿠샬랑가 지역 로타리언들의 보호 속에 운영되는 결손가정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그나마 축복이 깃던 모습이었다.
티벳 망명인 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이곳은 어디보다도 자유스럽고 미래가 꿈틀거리는 곳이다.
아침마다 호수를 돌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곳. 호숫가의 불가촉천민이 사는 그곳, 부뚜막도 부엌천장도 없는 노상에서 퍼질고 앉아 나무로 불 때서 쌀떡굽던 어린소년이 생각난다.
우린 수많은 탐방과 견학으로 아침밥을 먹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꽉 짜인 스케줄 속에서 수학여행 온 젊은이 마냥 천상을 찬양하고 세상을 노래했다.
마지막 방문지인 맹갈로르엔 깃발을 든 선두 대처럼 씩씩하게 줄달음 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단결이며, 수고스러울 때나 힘겨워질 땐 늘 이지영 선생이 우리의 총알 잡이였고, 2달 전부터 인도 3180지구와 모든 연락을 취해 이미 그녀의 인기는 소문이 나있었다.
사진 찍어 노트북에 저장하고 총재실에 이메일 보내기도 그녀의 몫이었다.
맹갈로르의 지역대회 땐 총재부부와 모든 집행부가 참석하여 꽃넝쿨을 안겨서 축하하고 배웅해준다.
맹갈로르에서 뭄바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인도의 바람소리의 궤적과 건조한 햇살 속에 담긴 사연들을 한 아름 품고,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가 아라비안의 밀물이 나를 밀어내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하다.
무디게르 지역대회 환영식 단상에서 원고 없이 인사말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약 다시 환생한다면 이곳 인도에서 신의 향기를 맡으며 태어나고 싶다”고.
인도의 냄새는 신의 향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