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정농회 정기총회 참석 후 도농교회에서 행한 말씀입니다.(02년 2월) 녹음내용을 풀어서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 11장 33-36절을 보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농회 연수를 잘 다녀왔습니다. 정농회 정기총회 겸 연수를 참여하면서 제 마음에 여러가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오늘은 이 말씀을 주제로 설교의 형식을 벗어나서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하려 합니다.
정농회를 잠깐 설명 드리면 27년 전에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1975년경에 30여명의 기독교신앙을 가진 농부들이 부천시 도당동 농장에 함께 모여서 일본의 고다니 준이찌 선생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때 고다니 선생은 우선 중부지방을 동서로 횡단하며 벼농사의 작황을 둘러보고 "한국은 일본농업을 뒤쫓고 있다. 수도작에서 대체로 질소과다 현상이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농약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농약의 사용은 기형아출산, 암환자의 급격한 증가 등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한국 정부에 충고한다. 국민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농업으로 농업정책을 전면 개혁하라. 유기농업으로 시급히 전환하라. 한국 농민에게 강권한다. 화학농법은 간접살인 행위이니 이를 통절히 뉘우치고 영농방법을 즉각 전환하라. 한국 국민에게 부탁한다.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대농법에 의한 생명파괴 현상은 곧 한국에서도 발생할 것이니 시급히 국민적 결단을 내려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라.”
그리하여 1976년 1월 20일, 30여명의 농민들이 다시 그 자리에 모였고 고다니 선생이 다시 와서 강의를 했고 연수회를 마치는 날 "정농회를 창립한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즉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농사를 바르게 지어야 한다. 그래서 농사를 바르게 짓자, 신앙으로 짓자해서 정농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유기농업이 발달되지 않아서 화학비료가 막 살포되고 증산정책이 실행되는 중이어서 유기농업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농회 회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농사를 해야한다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정농(正農)을 하는데 농약이 나쁘니깐 안치면 병충해가 심해서 소출이 적어집니다. 당시의 국가 시책은 증산정책인데 정농은 결과적으로 감산정책이 되고마니 1세대들은 북한의 조정을 받는 빨갱이가 아니냐는 추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신앙을 갖고 어려움 중에서도 정농을 실천하였습니다.
저도 여러 형편상 뒤늦게 정농회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농회에 많은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여러 모임이 많지만 농사 짓는 사람들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뜻대로 농사를 짓는다라고 하면 목사인 저로서 기대감이 크고 정말 멋있는 단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가 농촌운동을 하면서 잘 모르니깐 이런저런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세 군데의 농업 단체가 있는데 유기농업 협회, 자연농업 협회, 흙살림 연구소가 있습니다. 저도 3단체에 평생 회원 또는 정회원으로 다 가입을 하고 3곳에서 오는 문서들을 항상 받아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농회는 3곳과는 다릅니다. 옛날부터 만들어졌지만 무슨 교육단체도 아니고, 어쨌든 신앙으로 극복하자 해서 조금 특별합니다. 그래서 조직력이나 사업성은 약하지만 그 중에 강점은 신앙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특징이죠.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 제 자신도 기대를 많이 합니다. 다른 곳에 가면 ‘어떻게 하면 농사가 잘된다’라고만 말해주지 왜 우리가 신앙으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가 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른 농사를 지어야 하는가 하는 설명이 없는 것입니다.
정농회는 신앙으로 뭉친 단체니깐 제 자신의 마음속에, 기대 중에 여기가면 왜 신앙으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가 왜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이런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는 기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총회와 연수회를 하는 동안에 그 기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기대하는 것과 달리 그것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깐 1세대 분들은 정관도 없이 성령으로만 단체를 끌고 오셨습니다. 4년 전에야 겨우 정관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1세대 풀무원 원경선 선생님 또 정농회 초대 회장 오재길 선생님 등등 1세대 원로 분들을 보면 존경심이 듭니다. 그런데 그 1세대 분들의 숭고한 신앙을 보면 지금의 후배들은 그 신앙이 결여되고 그분들의 신앙이 계승, 적용이 안 됨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담배도 피고 불교인도 있고, 물론 정관이 다 받아 드린다 했으니깐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정농회 원칙이 정기 총회 할 때 술, 담배를 금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회의장소에서 피우지는 않지만 밖에서는 여러 명이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 술 담배 다 했으니깐, 하지만 정농회는 신앙으로 하는 단체라고 했을 때는 정농회의 주체성 그 특유의 어떤 기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총회를 하는 동안 신앙적인 면이 그렇게 보이지를 않았고, 많은 기대감을 갖고 갔었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 왔습니다.
총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전역으로 가시는 몇 분을 태워 드렸는데 그 분들 중에 어느 분이 말하기를‘목사님 어떤 사람들은 가입할 때 정농회 모임에서 무슨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냐? 라고 했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 마음속으로 느낀 것은 그 사람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문호를 개방했으니깐 들어 온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정농회는 이것이다. 이것이 정농회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바꾸어서 제가 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믿으면서, 오늘 설교 제목을 ‘왜 정농인가? 왜 정심인가?’라고 했는데, ‘왜 바른 신앙이 필요한가?’를 우리가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나는 이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왜 당신은 기독교 신앙으로 농사를 짓습니까?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나는 이래서 정농을 합니다.’ 라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총회도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정농회에서 운영하는 정농생협이 서울에 있는데 잘못해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젊은 사람들이 공격을 합니다. 저는 초년생이라서 말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정농생협의 실무자와 여성소비자 10명이 와서 인사도하고 선물을 나누려고 왔는데 그 사람들이 막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잘못이 없는데 정농회 이사에서 선임한 사람이 잘못해서 문제가 일어 난 것인데 서울에서 온 소비자들 새로 온 본부장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일인데 당신이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느냐? 하며 1시간 이상 서울에서 오신 여성소비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공격을 하니깐 어이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의사진행 발언을 얻어서 한 마디를 할 수 없이 했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볼 때는 구조적인 문제인데 서울에서 오신 소비자 분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지금 새로 임명된 무슨 잘못이 있느냐? 이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하시려는 분인데 이 분들은 돌려보내고 오히려 이사장이나 이사들에게 따져야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소비자들이 낙망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생협이 안 돌아가고 그렇게되면 소비자 없는 생산자가 있습니까? 우리 생산자가 열심히 생산해도 소비자가 소비를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물론 소비자는 생산자가 있으니깐 생기는 것이지만 그래서 유기 농업운동을 하는데 모토가 "생산자는 소비자의 건강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 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몰아가면 되겠습니까? 하고 저분들을 돌려보내고 저분들에게 격려를 해드리고 처음부터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 기를 죽이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돌려보내고 그 문제는 별도로 해결하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까 박수가 터저나왔습니다. 그런데 비 신앙적으로 접근을 하니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돌려보내고 실무자나 이사들에게 따져야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서 따지니 여성소비자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한가지. 자 여기서 대두가 된 것이 일부 사람들이 왜 담배를 피우느냐? 그런데 도대체 술 먹고 담배 피우는게 농사 짓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면에서 보면 불교인도 유교인도 예수 믿는 사람도 똑같이 유기농업을 합니다. 또 사업을 합니다. 다른 점이 무엇이냐? 오히려 불교인들이 진실하게 더 유기농업을 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유기농업을 합니다. 그런데 왜 신앙으로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정농회에서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면, 농사 짓는 것을 보면, 종교를 떠나서 불교인들도 기독교인들도 유교인들도 천주교인들도 똑같이 농사를 짓고 사업을 하는데 왜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가를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신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겠다하는 숙제를 안고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머리 속에서 목사로서 생각할 때 불교인, 유교인 그들도 농사를 짓고 사업을 하는데 왜 기독교적이어야만 하는가? 왜 신앙을 갖고 해야 하는가? 어떻게 답을 내려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정농회가 근래에 한 발 먼저 나간 것이 있는데 정농회가 추구하는 농사 방법 중 생명역동농법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독일 사람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론을 받아 들여서 농사를 짓는데, 우리가 기존에 농사 방법은 퇴비를 많이 넣고 유기농을 하면 된다고 하는데 슈타이너의 이론은 농사지을 때 태양과 달만 보는 것이 아니라 토성, 목성, 수성 등 천체의 별들이 이 땅에 모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즉 별들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지구의 생물들이 영향을 받으므로 여기에 맞추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두 가지 예를 들면 땅 밑에 모든 식물에 영향을 주는 것은 지구에 멀리 떨어진 행성(외행성)에 의해서고 땅 위에 자라나는 식물은 지구 가까이에 있는 내행성에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가지 예를들면 이 땅에 규소, 석회 등이 많은데 예를 들면 규소작용은 토성, 목성, 화성과 관계가 있고 석회작용은 달, 금성, 수성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생명역동농법에서 중요시여기는 것은 천체의 행성들의 효율적인 작용효과를 위해 예비제(증폭제, preparation)를 사용합니다. 요즘은 많이 발달하여 바이오다이나믹 농사력을 만들어 각국의 유기농업단체에 보급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식물의 유형을 네 가지(과채류, 화채류, 엽채류, 근채류)로 나누어 각류마다 어느 때 파종, 정식, 중경, 수확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매우 훌륭한 농사력입니다. 생명역동농법은 아마도 현재까지 나온 농사방법(방법이란 말을 쓰기가 좀 뭐하지만) 중에 가장 우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생명역동농법에서도 왜 기독교 신앙적이어야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신앙과 농사법에 관련을 지을 때 또 한가지 생각해볼 것은 농사를 지을 때 모든 식물들은 주인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그린음악농법이라는 것이 한가지 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이완주 박사라는 분이 도입을 해서 많이 보급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좋은 음악을 어떻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식물의 건강이나 질 좋은 농산물이 생산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예를들면 북아일렌드의 핀드혼 공동체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사람이 식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얼마나 사랑을 나누느냐에 따라서 농작물의 모든 성장과정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과 식물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지요.
결론은 주인의 정성과 사랑으로 식물은 자랍니다. 이것은 이미 많은 곳에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가장 우수한 농작물 그리고 사업을 잘 하려면 주인 자신이 직업 직장에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에 주인이 화가 나면 식물도 그 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캐나다 어느 농장에는 담배를 피는 사람은 출입도 금한다고 합니다. 사업이나 농업이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멀리 가고 싶어도 멀리 갈 수 없으므로 자기가 있는 곳에 난 것을 먹게 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 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작물을 심을 때, 예를 들어 여기에 무를 심었을 때, 잘 자라는데 비가 안 오면 무가 가뭄에 따라 뿌리를 깊게 내립니다. 또 바람이 많이 불면 무도 그 바람에 따라 시달리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비가오면 우리 나라 사람도 비를 맞고 무도 맞습니다. 그리고 추우면 무도 춥고 사람도 춥습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 할 수 는 없지만 우리와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무는 거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알맞은 미네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신토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오는 무는 우리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04년에 수입 수입농산물이 개방되어 들어오게 되면 우리 나라 농촌은 죽습니다. 우리가 극복 할 수 있는 비결은 제가 생각 한 바로는 여기 밭에 어떤 무를 키웠을 때 중국과 우리나라의 것을 비교하면 일반적인 영양은 비슷할지 모르나, 하지만 일반적인 영양문제 이상의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보리를 보면 보리는 열을 내리는 식품인데 여름철에 보리를 많이 먹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여름철에 쌀밥을 먹으면서 에어컨과 선풍기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40℃라면 그 보리는 40℃ 차이의 영향을 받아 거기에 필요한 미네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30℃ 차이가 나는 보리를 먹을 경우에는 40℃ 차이의 영향을 가지고 있는 보리의 영향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40℃의 차이가 났다면 거기에서 나는 40℃ 차이의 영향을 가지고 있는 보리를 그 환경에 살고 있는 사람이 먹어야 합니다. 즉 그 지역의 여름기온이 30℃이이고 겨울기온이 영하 10℃라면 40℃차이가 나는데 만약 여름온도가 30℃이고 겨울온도가 영하 2℃밖에 안되는 보리를 먹는다면 8℃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여름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온도뿐만 아니라 습도라든가 바람(건조)등도 영향을 받습니다. 가까운 일본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일본의 경우 습도가 높기 때문에 같은 위도(緯度)나 경도(經度)일지라도 우리나라와는 차이가 많습니다. 그리기에 한국사람은 한국음식을 일본사람은 일본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좁혀서 전라도사람은 전라도에서 생산된 것을 강원도 사람은 강원도에서 난 것을 먹어야 합니다. 즉 한지형 지대 사람은 한지형 마늘을 난지형 지대 사람은 난지형 마늘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책에도 없는 내용이지만 제가 생각 해 볼 때는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식물과 인체가 같은 환경을 겪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농사는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 순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연환경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변칙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성주의와 현대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칼로리는 조사하는데 아직까지 칼로리 그 외의 나머지 여러 가지 미량요소의 영향들은 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무엇이 인간에게 얼마만큼 필요하고 불필요하다는 것을 인간은 아직까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당시의 날씨나 환경이나 천체의 모든 움직임 등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얼마나 사랑했느냐가 관건입니다. 결국 농사도 마음의 문제입니다. 주인의 깊은 애정을 받고 자란 것인지 한숨속에 농약살포 속에서 자란 것인지가 진정 중요합니다. 아직까지 사랑을 받고 자란 것과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식물이 차이를 조사할 수는 없지만 과학이 발달하면 그런 것도 조사가 가능한 시대가 오겠습니까? 만약 온다면 분명히 아주 크게 차이가 날 것입니다.
조금 전에 핀드혼 공동체 이야기를 말씀드렸지만 그곳에서의 실험은 척박한 땅에서도 주인이 작물을 사랑하게 되면 좋은 땅에서 자란 작물보다도 더 좋은 작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즉 작물도 주인의 사랑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농사나 사업이나 인간 관계의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제 왜 기독교적이어야 하는가? 왜 신앙적이어야 하는 문제에 접근하게 됩니다.
일본에서 조사 한 바에 따르면 남녀간에 사랑을 하는데 힘없는 남편이랑 힘 좋은 청년이랑 한 여자가 관계를 맺는데 아주 건장한 청년이랑 관계할 때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관계할 때 나오는 파장을 조사했는데 건장한 청년이랑 사랑할 때는 α(알파)파장이 나오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사랑할 때는 θ(쎄타)파장이 나왔다고 합니다. 즉 윤락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애인과 관계를 맺을 때와 사랑이 아니라 돈으로 관계를 맺을 때 나오는 파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θ(쎄타) 파장은 병을 치료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파장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간도 정말 사랑해야 어떤 정상적인 파장이나 호르몬이 생성되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질병 치료 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동물과 같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로 기착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도 농사를 짓고 불신자도 농사를 짓지만 어떤 극한 상황이 왔을 때 그 문제를, 예를들어 어떤 병이 왔다고 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약을 쓰고 제발 살아라 살아라라고 합니다. 우리도 그럽니다. 저도 닭이 병들면 양계장에 가서 제발 살아달라고 말해봅니다. 닭이 병이 들 때 못 고치면 다 죽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가서 닭과 사랑의 대화를 나눕니다. 기도도 하고 계속 살아달라고 외쳐 봅니다. 이럴 때 예수 믿는 사람도 그런 말을 하고 불신자들도 그런 말을 합니다.
차이점이 무엇이냐? 여기에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안될 때도 기독교인들도 사업이 잘 되길 바라고 안 믿는 사람도 사업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불교에서는 흔히 윤회를 말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칫 되는 되로 가는 것이고 가다가다 안되면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결국 절망합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삶이 생의 목표인 사람은 그 목표가 좌절되면 속상해서 술 마시고 담배를 피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 11장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깐 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입니다. 왜 닭보고 네가 살아야 하냐면? 네가 죽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 이러면 더 애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이런 기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신앙이 아니면 네가 잘 되어야지 내가 잘 먹고 산다 우리 집안이 산다 이 정도이지만 우리는 기도의 차원이 네가 망하면 교회가 망하고 네가 망하면 하나님 영광이 결여된다. 그러니깐 너는 살아야 한다. 그러면 간절함이 다르고, 삶의 목표가 다르니깐 기도가 다릅니다.
나아가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가지입니다. 왜 다릅니까? 목표가 있고 분명한 삶의 방향이 있기 때문에 간절한 염원이 나오는 것이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총이 있습니다. 다른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말합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우리의 행동이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다녀도 영적인 분명한 목표가 없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똑같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지 분명한 기도가 나오고 그래야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 은총을 구하고 그 은혜 위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로마서는 1장부터 11장까지 교리편이라고 하고 12장부터 16장까지를 생활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어보시면 로마서는 1장부터 8장까지 교리가 다 끝납니다. 9장부터 11장까지 도중에 3장이 교리 아닌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민족문제를 토로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을 기록했는데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나님이 선민을 했다고 하며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주장했는데 자신의 동족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바울이 고민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9장부터 11장까지 기록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로마서 9장 14절을 보시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선택된 사람은 구원받는다 라는 교리를 형성했는데 그러면 자기 민족은 어떻게 됐느냐? 거기에 대한 대답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다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선택자와 비선택자가 있지 않느냐? 지금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다시 11장 1절부터 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 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 천을 남겨 두었다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울이 볼 때는 이스라엘은 불택자가 된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모두 선택된 민족이 된 것 같은데 예수님을 죽이니깐 모두 불택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7천의 선택자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무 신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든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이런 논리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강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어서 농사도 잘되고 사업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와 다른 점은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은총을 받아야합니다. 교회를 수없이 다녀도 그 동안 은총을 모르면 사실 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없으면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사업이나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늘 여러분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농사를 곁들어 제가 다시 이 말씀을 드린 것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왜 당신이 예수 믿어야 하느냐?’ 할 때 ‘나는 이래서, 또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알고 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정체성과 주체성을 형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