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유씨는 본관은 같지만 시조와 계보가 다른 세 계통이 있다.
류혼파 (柳渾派)
류혼(柳渾)을 시조로 하는 유혼파(柳渾派)측의 후손 유삼룡(柳三龍)은 1993년 신라 때 각간(角干)을 한 류기휴(柳基休)를 시조로 하고, 류혼을 중시조로 하는 전주류씨호은공파세보를 발간하였다.
류습파 (柳濕派)
류습(柳濕)을 시조로 하는 유습파(柳濕派) 측은 2004년 대동보를 발간하면서 여러 설을 검토해 보았으나 문적(文蹟)이 부실(不實)하여 시조의 상계를 알수 없으므로 시조 상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였다. 시조 유습(柳濕)은 고려(高麗) 말에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에 추증(追贈)되고 완산백(完山伯)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완산(전주)을 생활근거지로 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완주(전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류지파 (柳池派)
류지(柳池)를 시조로 한다.
기원에 관한 설
유습파(柳濕派)의 내부에서 전주 류씨가 문화류씨 에서 분적했을 것이라는 추정하는 의견과 문화류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전주의 토착 성씨라는 상반된 의견이 있으나, 정확히 고증할 수 없다.
1652년(효종3) 전주 류씨 문중에서 최초로 발간한 임진보에는 시조 우측에 방직(邦直)과 운(橒)을 별도로 기록하여 문화류씨 분관설을 주장하였으나, 1726년(영조2) 두 번째로 발간한 병오보에서는 이를 삭제하고, 1876년(고종13) 네 번째로 발간한 병자보에는 방직(邦直), 운(橒) 윗대의 기록은 믿을 바가 못 된다고 고증하여 최초 족보의 문화류씨 분관설을 반박하는 "전주류씨 보계변증"(譜系辯證)을 수록하고 있다.
1562년(명종17)에 출간 한문화류씨 족보 가정보 서문에 전주 류씨 분관설이 없고, 전주 류씨 시조와 계대가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문화류씨 분관설은 단정할 수 없고 선계의 계대를 고증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전주 류씨가 전라도 전주의 토성(土姓)이라고 추론될 뿐이다.
유혼파(柳渾派)측에서 3파를 합쳐서 유방직(柳邦直)을 시조로 모시자고 제안한 적이 있으나 유습파(柳濕派)측이 시조 유습(柳濕)의 상계에 대한 확실한 자료 없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
참고:영주 지역의 류씨는 시조를 류습으로 하고 있다
혼인관계
영주 입향조 류빈의 6세손 류영경1550년(명종5)~1608년(광해 즉위)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는풍기 백동 돈녕부사 황응규(黃應奎)의 사위이며 대사헌 황섬(黃暹)의 매부로 소년 시절 풍기 희여골에서 학업을 닦았다.
류영경은 1572년(선조5)정시 문과급제 승무원에 보임되어 성균진적,사간원정언,사헌부 지평등을 거쳐,
1583년(선조16)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와 고산(高山)찰방에 오르고,1591년 홍문관수찬,이조좌랑과 정랑을 역임 1593년 가선대부,1594년 대사간,부제학,병조참판,총관사로 영남안절사,좌도 순찰사,1599년 병조판서,대사헌,형조판서1602년 이조판서,우의정,1604년 좌의정,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류영경의 손자 류정량(柳廷亮)이 정휘옹주와 혼인하여 임금의 사위가 됨으로 하여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해 섣달에 영의정에 올랐다.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1608년 광해가 즉위하자 이이첨이 권세를 잡아 류영경이 파직되고 그해 9월에 북쪽 변경인 경흥에 유배되고 곧 배소(配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인조가 즉위하자 관작이 회복되고 왕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했다.
참고:류씨(柳氏)의 대표적인 본관은 문화(文化)를 비롯하여 고흥(高興),서산(瑞山),선산(善山),전주(全州),진주(晉州),풍산(豊山)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