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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된 설교"
"1935년 5월 주기철 목사님이 경남노회장으로 재직하실 때였다.
지금 이북에 있는 금강산 온정리에 장로교 목회자들을 위한 수양관이 있었다.
이 수양관에서 전국 250여 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하기수련회가 개최되었다.
강사로 초빙되었던 주 목사님은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다.
이 설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세례 요한은 동생의 아내가 간통한 헤롯왕을 그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은 물론 일사각오(一死覺梧)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선지자의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왜 못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 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가 되어 떨고만 있는가?"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 주 목사님의 설교는 여기서 중단됐다."
"고난의 시작"
"평양 산정현교회 수석 장로로 계시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께서 옛날 오산중학교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님을 기억하시고
몸소 마산 문창교회까지 내려와 주 목사님을 평양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초빙하셨다.
"신사 참배는 십계명의 제 1계명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다."
이것이 산정현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첫날 주 목사님이 강단에서 외천 첫 설교였다.
1년 반이 지나 산정현교회당은 5층 건물로 크게 신축되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당을 지었다.
그렇게 큰 교회당을 지어놓고 그 헌당 예배를 드리기 15분 전에 경찰이 갑자기 주 목사님을 구속한 사건에서부터
그 환난은 시작되었다.
첫 번째 구속의 사유는
그 전날 평안북도 신천에서 평북노회가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신사 참배를 찬성 결의하는 불상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소식이 뉴스와 신문으로 보도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분개했다.
그래서 당시 평북노회장이었던 김OO 목사님이 몇해 전에 평양신학교를 방문하여
기념 식수한 소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리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 참배 반대 데모를 이대로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질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모두 체포해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그 배후 인물을 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듯이 주 목사님을 첫 번째로 구속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산정현교회 헌당 예배는 당회장 목사님이 안 계신 가운데 눈물 속에 거행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닥칠 7년 동안 산정현교회가 겪을 고난의 신호탄이었고 주 목사님에게는 순교의 첫 길이었다."
오정모 사모의 기도와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
이 신사 참배 문제로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이 평양 남산 경찰서에 두 번째로 구속되자
어머니 오정모 사모님은 담요 한 장을 똘똘 말아 가지고 교회로 가셨다.
강단 바로 밑에 담요를 깔아 놓고 아버님이 출옥하실 때까지 그곳에서 철야 기도와 금식 기도를 계속하셨다.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 참배가 찬성 결의되기 전날 밤 어머니는
내일 총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새벽 다섯 시가 좀 지나자 육신이 피곤해서 잠깐 졸았다고 한다.
그런데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리더란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도 가만가만 어머니 뒤로 따라오길래
'주 목사님이 오시는가?' 싶어 돌아보았더니
머리를 빡빡 깍은 학생 하나가 어머니 앞에 와서 어깨를 탁탁치는 것이었다.
"오 집사, 왜 잠만 자? 일어나 호세아 9장을 읽어. 호세아 9장을 읽어."
이 두 마디를 하고 일어나 나가더라는 것이다.
어머님은 놀라서 전깃불을 켜고 호세아 9장 1절에서 3절을 찾아 읽으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어머니는 이 성경 구절을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 날 오후에 열리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 참배가 일본의 계략대로 가결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떠나시게 될 것으로 그 꿈을 해석하였다.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 결의가 일본의 계략대로 가결되자 그들은 곧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을 석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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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세아의 말씀을 보면서 현시대의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것에서 멀어질까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것을 가장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교회를 위해 탄식하는 기도도 필요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신사참배를 하며,
우상숭배에 빠진 교회의 모습을 다시 반복치 않고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겠습니다.
"견디기 힘든 외로움"
"경북 의성교회의 유재기 목사님이 일으켰던 농우회 사건이 터지면서, 주 목사님은 세 번째로 구속되었다.
이번에는 평양경찰서가 아닌 경북 의성경찰서로 압송 당했다.
경찰은 주 목사님에게 농우회 사건이라는 올가미를 뒤집어 씌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사 참배 문제까지 결부시켜 주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갖은 고문을 다했다.
아버님은 온갖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손발톱이 다 빠지고 하루에도 기절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
어떤 목사님은 고문을 당하다가 들것에 실려 바로 공동묘지로 갔다.
어떤 젊은 목사님은 고문 끝에 병원에 실려 가 8일 만에 돌아가셨다.
또 한 전도사님은 고문으로 인해 결국 정신이상자가 되어 정신병원에 수감, 그 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주 목사님은 뒷날 산정현교회에 돌아와서 이 때의 고통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7개월 동안 의성에서 받았던 육체적인 고통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는데 정신적인 고독감은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
70여 명의 동지가 하루 아침에 다 잡혀 왔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동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일본에 항복하곤 했다.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두 사람의 동지가 나가 버리고,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나가 버리고...
12월이 다 돼 가니까 그 많던 동지들이 다 나가 버리고 마지막 네 명만 남아 끝까지 항거했는데
그때 받았던 정신적인 고독감, 외로움은 정말,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끝끝내 주 목사님은 이 죽음의 시련을 이겨 내셨다.
혐의를 잡지 못한 일본 경찰은 어쩔 수 없이 7개월 만에 주 목사님을 석방하게 되었다."
"다섯 기도 제목"
"7개월만에 주기철 목사님이 돌아오셨다.
주기철 목사님은 목사관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채,
감옥에서 나올 때 입고 나온 옷 그대로 산정현교회 강단 위로 바로 올라가셨다.
산정현교회에 성도 1천여 명, 주변 교회와 평양 시민 1천여 명
또 평양, 대동경찰서 등 여러 경찰서 형사대가 주위를 포위, 주기철 목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이 날 설교는 '다섯 제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였는데 차라리 기도에 가까웠다.
첫째, 죽음의 권세로부터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이 무서워 내가 의를 버리고 내 믿음을 버리지 않게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거늘 어찌 내가 이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오직 일사각오(一死覺梧)가 있을 뿐이오니
이 목숨 아끼다 우리 주님 욕되지 않게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장시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두 번 받는 고난은 혹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견디기가 참 어렵습니다.
내 말 한 마디 타협하거나, 내 고개 한번 까닥하면 이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 어느 누구도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나같은 연약한 약졸이야 이루 말해 무엇하리요?
다만 내 주님만 의지하오니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셋째, 내 어머니와 내 처자를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도 지중하고, 한 남편과 아비된 책임도 무거워 더욱 괴롭습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할 줄 알거늘 어린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지 아니할 수 없는 이 마음 한없이 괴롭습니다.
자비하신 내 주님께 부탁하오니
인정의 젖줄에 내가 얽매이지 않게 기도합니다. 순교자로서 갖춰야 할 초인적인 용기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해주시옵소서.
백성은 나라에 대한 충절의 의가 있고, 여인이라면 남편에 대한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가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다른 신에게 내 정절을 깨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도...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옥중에서든 사형장에서든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내 주님께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나의 고향이요, 아버지의 집이 곧 나의 집입니다.
죄악에 오염된 이 세상에서 나를 온전케 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날 이미 순교를 각오했던 주 목사님의 이 설교는 2천여 명의 모든 청중들이 울음바다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온 교우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더해 주었다."
"거센 풍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주기철 목사님은 무너져 가는 한국 교회와 동료 교역자의 믿음의 배신을 끊임없이 질타하셨다.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님의 입을 틀어막고 강단에 다시 서지 못하게 하고자 온갖 공작을 자행했다.
일본 경찰은 제일 약해 보이는 평양노회로 하여금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하게 하기로 계책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들은 주 목사님을 네 번째 구속해서 평양경찰서에 잡아 가두었다.
그해 12월 평양노회는 강압에 못이겨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했다.
또한 당회원 일곱 장로님들을 정직 처분하고 노회에서 임명한 장OO 목사를 산정현 교회 임시 담임 목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일곱 사람의 수습위원 목사를 두어 산정현교회를 접수하게 하였다.
1940년 3월 24일 부활절 주일 아침, 안수집사님이 나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찬송가 20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교회문이 열리면서 일본 형사대가 들어와 교회를 포위했다.
그리고 노회에서 임명한 일곱 목사들이 들어와 강단을 점령하고,
그 중의 한 목사가 나와서 사회보고, 한 목사가 찬송가 인도, 한 목사가 기도, 한 목사가 성경 봉독,
그리고 최OO 목사가 나와서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교인 1천여 명은 양재현 안수집사님의 인도에 따라
그 예배가 끝날 때까지 1시간 20분 동안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계속 반복하여 불렀다.
일본 경찰은 지켜 보다가 더 이상 안되니까 전부 내쫓고 젊은 제직들 20여 명도 전부 경찰서에 잡다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는 산정현교회당에 큰 못을 박아 교회당을 완전히 폐쇄 처분하고 말았다."
"서 있는 그곳이"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에서 파면당해 이제 목사도 아니니 목사관에 있을 자격이 없소.
평양노회에서 이 목사관을 평양신학교 교수 사택으로 전용하기로 했으니오늘 당장 나가 주시오."
그로부터 5년 동안 우리 가족의 핍박과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해방될 때까지 열세 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그것은 일본 형사의 감시 아래 있는 사람에게 자기 집을 빌려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교회당을 잃어버린 채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새벽이면 교회당 벽돌을 붙잡고 새벽 기도를 드렸다.
1940년 5월 아버지께서 목사직에서 파면당하고 목사관 아닌 우리 셋방으로 석방되어 돌아오셨다.
"당신은 산정현교회에서 파면당해 이제 목사도 아니니
이제는 당신이 설 강단도 없고 또 당신이 떠들어대 봤자 별 수도 없어.
당신만 신사 참배를 안 하면 돼.
그것이 죄라고 남에게 선동만 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더불어 고향에 가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거야."
이것이 일본 경찰이 주 목사님에게 한 회유였다.
그러나 이 진리의 파수꾼이자 믿음의 용사는 승복할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설 수 있는 강단은 없었지만 그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강단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는 복음의 진리에 굶주렸던 어린 양들이 몰려와서 대군중을 이루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다섯 번째 구속되기 직전 주 목사님은 늙은 당신의 어머니에게 작별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오시자 몸져 누워 계신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는 큰절을 하셨다.
할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마지막 고별인사는 딱 이 한마디뿐이었다.
"어머니! 하나님께 어머니를 맡겨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가까이 불러 모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는 우리를 위해 잠시 기도하셨다.
그날 마침 20여 명의 산정현교회 제직들이 찾아와 있었다.
모두가 슬픔에 찬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분들을 보시자 "우리 다 같이 찬송가 한 장을 부릅시다."라고 하셨다.
당시 찬송가 543장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였다.
아마도 아버님이 그렇게 좋아하신 찬송가는 없었을 것이다.
찬송가를 다같이 부른 후 주 목사님은 아모스 8장 11-13절을 읽으시고 마지막 설교를 하셨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이 수욕을 내가 피하여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내 평안과 내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그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져야 할 이 십자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주님이 이 다음에 '너는 내가 준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가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一死覺梧)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께서 산정현교회 성도들에게 하고 간 마지막 말씀이셨다."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하고 교회당을 폐쇄하고 목사관 사택에서 우리를 쫓아내고
주기철 목사님을 구속한 일본 경찰은 최후의 발악으로 이제 주기철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 온갖 고문을 해댔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이 목사님의 피를 말렸다.
면회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야단치는것이 있었다.
"왜 옷에 솜을 이렇게 두툼하게 넣어와서 날 괴롭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서는
"다음에 옷을 차입할 때는 옷에 솜을 많이 안 넣을게요." 라고 약속하시면서 옷을 갈아 입히셨다.
옷을 갈아 입히고 밖에 나오시기만 하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한탄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옷에 솜도 안 넣으면......."
아버지께서는 고문실에서 한참 매를 맞아 피를 많이 흘리시게 되는데
그 피가 두터운 솜에 전부 스며들어 가서 옷이 빨리 마르지 않았다.
그게 자꾸 반복되다 보니까 상처가 곪아 터져 옷은 항상 피와 고름으로 뒤범벅되었다.
평양은 겨울에는 영하 25도를 밑도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면 결국 그 옷이 다 얼어서 판처럼 뻣뻣해져 버린다.
하루에 두 번 간수가 와서 먹을 음식을 창문으로 끼워 주는데 그걸 먹으러 가려면 언제나 기어서 가야 했다.
그럴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 상처가 스치면 아물어가던 상처가 또 터져서 피고름이 나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솜을 안 넣으면 피가 흘러도 시멘트 바닥으로 다 흘러버릴 것이고 물을 부어도 금방 말라 버릴테니까
그 고통을 안 당할 것인데 왜 자꾸 솜을 넣느냐?"는 게 아버지 말씀이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밖에 나오셔서 날 붙잡고는 하소연하셨다.
"솜을 안 넣으면 어쩌라는 말이냐? 그 추위에 며칠 안 되어서 살이 다 얼어서 썩는데....
그보다는 차라리 솜이 있어서 고통을 좀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십자가는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주기철 목사님 혼자서 지고 가지 않았다는 것은 참 중요한 사실이다.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투쟁은
어머니의 내조와 산정현교회 당회와 제직과 성도들의 기도의 뒷받침과 그분들의 침묵의 항거로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남편이 찬방에서 자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더운 방에서 잘 수 있겠는가?" 하시며
골방이나 마루방에 올라가 기도하시며 6년을 하루같이 지내셨다.
남편 못지 않게 10여 차례나 경찰에 감금되어 갖은 수모를 당하시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님이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에서 파면당한 뒤에도
조만식 장로님께서 우리 집에 계속 사례비를 갖다 주시자 일본 경찰은 그것을 강력히 막았다.
그때 조 장로님은 "우리 조선 사람들은 옛날부터 의리와 윤리가 있는데
어찌 스승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이것은 정치와 도덕, 사상 이 모든 것을 떠나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하시며 완강히 거절하셨다.
6년 동안 우리는 열세 번이나 이사해야 했지만 우리 집은 언제나 산정현교회 성도들로 꽉꽉 찼다.
물론 일본 경찰들은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전부 잡아다가 48시간 동안 유치장에 가두고 고문을 가했다.
여자 같으면 남편이나 아들을 불러서 "주기철 목사 집에는 다시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풀어 주었다.
이렇게 풀어 주면 이 분들은 숨어 있다가 저녁 자정시간이 되어 형사대가 철수하고 나면 또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밤도 없고 낮도 없고 새벽도 없었다.
그저 몰려와서 예배드리고 함께 기도하고 어머니를 격려해 주었다. 늘 이렇게 같이 신앙생활을 했다.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우리 집에 쌀이 떨어진 사실을 눈치채게 됐는데
그날 밤부터 자정이 지나면 우리 집 담장 너머로 주머니를 던지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 개, 어떤 때는 서너 개씩 던졌다. 열어 보면 수수, 보리, 콩, 조, 팥 같은 곡식들이 나왔다.
어떤 날은 쌀이 있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아주 생일잔치하는 날이었다."
"왜 안 데려가"
"한번은 일본 경찰에서 나와 할머니와 어머니를 호출하여 경찰서로 가게 되었다.
지하로 내려갔는데 그곳은 평양경찰서에서 제일 무서운 고문실이었다.
거기는 천정이 탁 트여 있었기 때문에 지하 어느 곳에서든 고문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지하로 내려가 왼쪽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거기 시멘트 바닥에 그냥 앉으라고 해서 그렇게 앉았다.
방과 방 사이에 투명한 유리가 있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까 맞은편 방에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시며 웃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아버지를 엄지 손가락을 뒤로 해서 공중에 매달아 놓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른바 '그네뛰기 고문'을 했다.
발길로 차면 공중에 매달린 채 그네가 되어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기절하기 전에 내 옆에 있던 할머니께서 먼저, 고문이 시작되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어머니는 고문이 시작되자마자 손을 깍지끼고는 "오! 주님."하시며 기도만 하셨다.
아버지가 기절하니까 찬물을 끼얹더니 책상 위에 뉘여 고춧가루물을 코와 입에 부어넣었다.
한 5~6분 지나니까 배가 농구공 두 개만큼 부풀어 올랐는데
형사 둘이서 배 위에 조그만 의자 두 개를 얹어 놓고 짓눌러 버렸다.
아버지의 입, 코, 귀에서 붉은 물인지 핏물인지 모르게 막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책상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형사 세 사람이 우리 방으로 건너와서 이번에는 어머니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고문하기 시작하자 이번엔 아버지께서 깍지를 끼고 엎드려 기도만 하셨다.
어머니를 고문하는 이유는 이러했다.
"야, 이년아! 너희 남편 주 목사를 우리가 이렇게 고문을 하는데 왜 안 데리고 나가는 거야.
왜 빨리 집에 데려갈 생각은 안 하고 '주여!' 어쩌고 하느냐? 남편 말아먹을 년!"
"마지막 면회"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씩 면회가 허락되어 홀로 아버지 면회를 가셨다.
그런데 1944년 2월에 면회가셨을 때 아버지께서 이렇게 보채셨다고 한다.
"요다음 3월달엔 막내 광조를 꼭 좀 데리고 오라. 그놈이 그렇게 보고 싶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전에 약속을 하셨단다.
"3월 면회 때 광조를 면회실 밖에다 세워 놓을 테니까 제가 문 열고 들어올 때 밖에 서 있는 광조 얼굴 한번 보세요."
어머니께서 면회실에 들어가면서 날더러 그러셨다.
"내가 들어가면서 문을 천천히 열 테니까 문 안에 있는 너희 아버지 얼굴을 한번 보아라."
어머니는 면회실로 들어가면서 문을 천천히 여셨다.
7~8미터 앞에 푸른 죄수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며 웃고 계셨다.
아버지 얼굴을 3초 정도나 보았을까? 보자마자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3년 동안 아버지께 큰절을 못했는데 큰절을 해야겠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여 큰절을 했다.
다시 아버지를 보고자 머리를 들었을 땐 이미 아버지의 모습은 없어지고 눈 앞에는 붉은 철문이 닫혀 있었다.
내가 머리를 숙여 큰절을 할 때 안에서 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밖에서. 문 닫아!"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여러 장 있다.
그런데 내 눈 앞에 항상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따로 있다.
1944년 3월 31일 오후 4시에 불과 3~4초밖에 보지 못한
푸른 죄수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으신, 인자하게 나를 보고 웃고 계시던 그 모습이다."
"숭늉 한 그릇"
"평양형무소 소장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주 목사님이 위독한데 빨리 와서 수속을 밟으면 퇴소를 시켜줄 테니까 평양기독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
어머니께서 그 편지를 읽고 말씀하셨다.
"우리 다 같이 하루를 금식 기도하자. 아버지께서 위독하신가 보다."
다음날 어머니 혼자서 면회를 가셨다. 형무소 소장은 편지로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고 아버지를 면회하셨다.
"주 목사님과 의논해서 면회 끝난 다음에 결정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간수의 등에 업혀 나오셨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꼭,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그렇소 내 살아서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갈 것을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오.
내 오래지 않아 주님 나라에 갈 거요. 내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을 당신한테 부탁하오.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 교회와 조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조선 교회를 구해 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리고 다시 아버지는 간수의 등에 업혔다.
어머니는 눈물 섞인 음성으로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씀이 없으시냐?"고 했더니,
아버지께서는 손을 한 번 흔들어 주시더란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돌아보시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셨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이 말씀이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이 살아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었다."
"때"
"열두 살 난 나는 아버지의 발목을 붙잡고 울고 있었고, 할머니는 가슴을 붙잡고 울고 있었고,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방에 가득 들어와 입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탈지면에 알콜을 묻혀서 얼굴부터 온몸을 씻기시며 수의로 갈아 입히셨다.
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가슴을 붙잡고 울고 계셨는데,
어머니께서 울음 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뒤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그저 흐느끼고만 계셨다.
그런데 마지막에 수의를 다 입히고 입관하여 아버지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
할머니는 아버지를 관에 못 넣게 꽉 붙잡고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셨다.
뒤에 있는 여자 성도들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대성통곡을 하였다.
조용하던 방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한 손에 알콜병을 들고, 한 손에 솜을 든 채로 할머니와 뒤에서 울고 있는 여자 성도들을 번갈아 보시더니
아주 조용히, 그러나 엄숙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니예요.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이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가야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 남을 수 없어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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