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두 대학교 동창들과 연락이 닿았다. 한 때 잘 나갔던 친구들이다. 노년을 앞둔 친구들 모습에서 예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표정들이 읽히곤 한다. 앞으로 맞닥뜨릴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긴장감과 일종의 당혹감이 섞인 묘한 얼굴이다. 현대인의 화두인 불안과 소외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만 우리 또래 친구들은 그 정도가 심한 것 같다. 두 친구 역시 현역에서 은퇴한 뒤로 조금은 의기소침해진 듯하다.
그 중 한 친구는 젊은 시절 강원도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서울 동쪽에 있었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원도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동기들과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두 친구 머리에는 어느새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어디서 식사를 할까 잠시 고민하자 그 친구는 자신의 단골집으로 가자며 우릴 이끌었다. 몇 해 전 우연히 들어갔는데 주인장 고향이 자신이 군 생활 했던 곳과 같은 동네였다고. 음식 맛도 입에 맞아 그 뒤로 자주 찾아간다고 했다. 돼지고기 특수부위 전문점인데 코다리찜과 막장으로 끓인 칼국수도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섰더니 역시 주인장이 ‘강원도 군인’ 친구를 반겨 맞았다.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예전 이 집이 공중파 방송에 나왔던 흔적들이 벽면에 붙어있었다. 삼겹살은 먹을 만큼 먹어서 이젠 다른 부위를 먹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필자도 동의했다.
개성 있는 맛의 특수부위, 철원 고추로 맛낸 코다리찜
‘강원도 군인’은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주인장에게 시래기 스페셜(5만5000원)을 주문했다. 이 집 대표 메뉴 세 가지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세트 메뉴라면서. 돼지고기 특수부위인 항정살, 갈매기살, 가브리살과 시래기 코다리찜, 그리고 막장칼국수로 구성된 메뉴였다.
항정살, 갈매기살, 가브리살이 각각 170g씩인데 국산 한돈 브랜드육이었다. 세 부위 모두 돼지고기에서 인기 있는 특수 부위들이다. 올해 17년차 고깃집 주인의 안목으로 고기를 고른다고. 고소한 기름이 부드럽게 씹히는 항정살, 쫄깃한 맛의 갈매기살, 처음엔 거부하다가 이내 톡톡 씹히는 독특한 식감의 가브리살. 파절이와 먹어도 좋지만 소스에 찍어먹는 맛이 각별하다. 소스는 양념간장에 겨자, 다진 마늘과 양파,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하고 상큼하다. 원하는 손님에겐 소금장도 내준다.
찬류는 가짓수가 많지 않지만 소박하면서 맛깔스럽다. 알타리 무로 담근 동치미는 시원하면서도 시골스런 맛이 난다. 고기 먹다가 느끼할 때면 하나씩 와작 깨물어 먹기 좋다. 넉넉히 내온 동치미 국물도 마시면 속이 시원해진다.
고기를 구워먹고 나자 코다리찜이 나왔다. 좀 저렴한 이른바 ‘물코다리’가 아니었다. 상품인 반건조 코다리였다. 가래떡과 큼직한 두부 한 모에 양구 펀치볼 시래기가 아주 푸짐하게 들어갔다. 코다리찜의 맛은 소스가 좌우하고 소스 맛은 고춧가루가 중요하다. 주인장 친형이 철원 와수리 비무장지대에서 농사지은 고추로 빻은 것을 쓴다고 한다.
무 파 뒤포리 등으로 낸 육수에 코다리를 넣고 조렸다. 어느 정도 국물이 있어서 찌개나 전골 같은 느낌으로 밥과 함께 먹기 좋다. 남은 국물에 밥을 볶아 먹는 손님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뒤에 나올 막장칼국수를 의식해 공깃밥은 주문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차츰 먹을수록 칼칼하고 매콤하다. 철원 고추의 힘이다. 저절로 소주 생각이 나게 하는 맛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코다리찜 국물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얼큰하되 짜지 않은 점도 맘에 든다. 즉석 두부 집에서 구매했다는 두부는 양도 엄청 많지만 그 맛이 아주 좋다. 구수한 시래기를 곁들여 뚝뚝 떼어먹었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소주 한 잔씩이 따라붙었다.
‘강원도의 맛’ 막장 칼국수로 마무리
고기를 먹고 나서 코다리찜을 먹었더니 벌써 배가 불렀다. 세 사람이 먹기엔 너무 양이 많다. 네댓 명이 먹을 양이다. 우리에겐 막장칼국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코다리찜과 함께 아주 강원도스런 음식이다.
지금도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는 메주를 빻아 보리밥과 함께 섞어 발효시켜 막장을 만든다. 막장은 장을 담그고 나서 간장을 빼지 않고 발효시켜 맛이 진하다. 담근 지 1년 정도 지나면 익어 먹기 시작한다. 이 집은 강원도 인제의 주인장 장모님이 매년 막장을 담가준다고 한다.
막장칼국수는 종종 ‘장칼국수’라는 이름으로 파는 곳이 가끔 보인다. 코다리 육수에 막장을 풀어서 버섯, 호박, 감자, 새우, 북어포 등을 넣고 끓였다. 설설 끓기 시작하면 짙은 갈색 국물이 식욕을 돋운다. 국물에 날배추, 감자, 호박에서 나온 단맛이 스몄다. 잘 익은 면발을 들어 올려 주인장 지인이 재배한 태백 고랭지 배추로 담근 김치와 함께 먹는다. 새우와 북어포 우러난 국물은 개운하고 시골 된장 맛이 구수하다.
칼국수 국물에도 우리는 소주를 마셨다.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했던 친구는 벌써 취한 듯 했다. 아마 소주가 아니라 음식과 추억에 취했을 것이다. 다른 한 친구는 팀장 시절, 팀원들을 거느리고 회사 근처 한강변에 나가 갈매기살을 구워먹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때는 강변 잔디밭에서 고기를 구워먹어도 제재를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친구도 회사도 잘 나가던 시절이어서 부하직원들에게 호기롭게 자주 인심을 쓰곤 했다고. 어쨌거나 오늘은 내가 한턱냈다. 최소한 오늘만큼은 두 친구의 얼굴이 밝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