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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인 2권 SEVEN BAMBOO TABLETS OF THE CLOUDY SATCHEL 1. 사부와 제자 관 사이훙은 화산의 도관 안에서 도(道)에 귀의할 가능성이 가장 적어 보이는 학생이었다. 갈등과 불안감 속에서도 장난기가 넘치는 청년이었던 사이훙은 우울해하다가도 금세 행복감에 젖어 희희낙락하거나, 안하무인격으로 굴다가도 수줍어하며, 화를 내다가도 금방 공손해지는 등 변덕이 죽 끓듯 하였다. 무술을 사용해 결투를 하고픈 생각은 간절했지만 그가 시자로서 한 약속은 그런 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사부는 사이훙이 완성의 경지에 이르기를 소망하면서 계속해서 그를 수련시켰다. 사이훙이 보기에 개개인의 내면에는 인간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신과 악마가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신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사이훙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이훙의 경우는 그 어느 쪽의 승리도 쉽게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서 선이 나타날지 악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깜깜한 밤이 어스름한 새벽빛에 물들기도 전에 사이훙은 조롱박 물병을 움켜쥐고 우물로 갔다. 세상은 곧 어둠으로부터 기지개를 켤 것이다. 산시성()에 있는 화산의 도관도 곧 도사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활기를 띨 것이다. 1941년 초 중국은 내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또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려 들 판이었다. 또 한 번 혼란과 갈등의 나날을 맞을 중국의 새벽은 아직 적막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사이훙은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임무에 만 몰두하였다. 그는 칠흑같이 깜깜한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떨어뜨렸다. 쨍 하고 얼음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깼다. 깊은 산 속의 밤은 맑은 샘물을 밤새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는 두레박을 들어 올린 후 다시 내려뜨렸다. 두레박 속에 물이 가득 차 올랐다. 물을 퍼 올리자 찰랑찰랑한 두레박의 수면에 등롱의 가느다란 노란 불빛이 비쳤다. 사이훙은 잠시 물위에 그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형체는 희미했지만 넓적한 턱, 매끄러운 피부, 반짝이는 두 눈, 상투를 튼 긴 머리는 알아볼 수 있었다. 고관대작 아니면 학자, 장군 정도는 됐을 것이며 하다 못해 산적 두목이라도 됐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그의 권리였다. 그는 장군의 아들이었고 조정 대신의 손자였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왕조를 모셔 온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귀족의 후예로 남는 대신에 그는 도가에 입문했다. 9살 때의 일이었다. 지금 사이훙은 20대 중반이 되었건만 아직 화산의 대사부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갈색의 큰 조롱박 물병에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찬 우물물을 퍼 담았다. 물병을 몸에 찼다. 사부를 위해 장작 더미와 새 옷을 넣어 둔 광주리를 집어 올리는 순간, 물병에서 손등으로 물이 떨어져 손가락의 감각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사이훙은 우물 정자 처마 밑에 되는 대로 매놓은 등롱을 다시 들고 사부의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나무 손잡이 끝에 매달린 등롱 속의 촛불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사이훙은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봉우리를 끼고 도는 산길을 걸었다. 주위는 칠흑같이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듯한 노송들의 윤곽 사이로 멀리 있는 산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산봉우리들은 어둠으로 물들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울퉁불퉁하고 들쑥날쑥해 보이는 땅과 아직 별들과 초승달이 떠있는 하늘은 쉽게 구별되었다. 사이훙은 높은 산들이 첩첩이 둘러싸인 화산에서 벌써 수년 동안 지내 왔건만, 산을 모두 답사해 본 적도 없거니와 속속들이 알지도 못했다. 그러한 끝없음이야말로 지구상에 있는 무수히 많은 산들보다 더 광막한 도교의 세계에서 그가 경험한 내용이었다. 도교는 하늘과 땅에 대해 말한다. 시공의 4차원적 세계를 논하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사유의 대상이 된다. 단순 소박한 인간적 도덕은 물론, 무도덕 적인 자연도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도교는 미신, 마술 또는 종교적 제전으로 변질될 수도 있었다. 또 턱없는 금욕주의나 천상의 여행으로 솟아 오를 수도 있었다. 추상적인 형이상학이기도 하지만 그저 한 토막 나무에서도 똑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그 끝은 무한의 경지까지 뻗어 있었다. 반면에 압축시키면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로 줄어들었다. 도교를 한쪽으로 밀어젖혀 보라. 그러면 그것은 가공할 정도로 크게 확대되어 다가온다. 도교를 찬찬히 숙고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사정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도교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만물이 바로 도교인 것이다. 우주 전부 일수도 있고, 우주가 아닌 것 전부일 수도 있고, 동시에 양쪽 모두 될 수 있다. 도교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하지만 도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꼬리를 감추어 버린다. 사이훙은 바위투성이인 가파른 오솔길을 급히 올라갔다. 숨을 내쉬자 바로 눈앞에서 입김이 수증기가 되어 피어 올랐다. 서둘러 가야 했다. 지금쯤 사부는 하룻밤의 긴 명상을 다 끝내 가고 있을 것이다. 사이훙은 돌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 조그마한 사부의 거처로 갔다. <불사신의 전당>이라는 문구가 문 위에 새겨져 있었다. 육중한 문들은 사람 키보다 두세 길은 높았다. 문 위쪽의 반은 격자 무늬로 되어 있고, 아래쪽은 꽃 무늬를 아로새긴 상감 세공이었다. 사이훙은 힘을 주어 문을 밀고 사부의 방 쪽으로 난 돌이 깔린 복도를 따라 살금살금 걸었다. 이윽고 육중한 나무문에 이르러서 숨을 가다듬었다. [사부님!] 사이훙은 자신이 와 있음을 알리기 위해 크게 소리쳤다. 언제나처럼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사이훙은 문지방에 서 있었다. 등불을 비추자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벽돌 벽과 돌 마루는 싸늘한 밤공기를 머금고 있고, 커다란 놋쇠 화로의 불은 다 꺼져 가고 있었다. 방의 벽 틈새를 뚫고 아침 안개가 새어 들고 있었다. 책상, 서가, 침대 그리고 묵상대가 각각 한 개씩 단상을 향해 놓여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사부는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명멸하는 불빛 아래 안개의 소용돌이가 이는 석실 속의 사부는 마치 고대의 신비스런 봉납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사이훙은 조용히 서서 사부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열린 채광창을 통해 조금씩 들어오는 동녘 빛이 희디흰 순백색으로 부서졌다. 사부의 야윈 몸이 조금 움직였다. 순간 사이훙은 자기 이외의 딴 사람 이 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부가 하루를 시작할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사이훙은 깨끗한 도복을 내놓고 일상적인 일과를 민첩하게 해 나갔다. 조심스럽게 격자 무늬의 창문을 열어 나무 막대로 받쳐 놓았다. 장작과 석탄을 화로 속에 넣고 부채를 부쳐 조그맣고 강렬한 불꽃을 피웠다. 사이훙은 소리 안 나게 방을 가로질러 가서는 정교한 솜씨로 조각된 신장 위에 쳐진 휘장을 경건한 마음으로 열어 젖혔다. 그 안에는 아름답게 채색된 세 개의 인물상이 놓여 있다. 중앙에는 도교의 성인이자 사부의 개인 수호신이 있고 그 양쪽에는 성인의 시자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법도()를 들고 또 한 명은 인장을 들고 있었다. 세 인물상은 밝게 타오르는 유등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사이훙은 꽃과 과일이 싱싱한지, 잔에 차와 포도주가 가득한 지, 제단 위에 먼지가 쌓여 있지나 않은지 잘 살펴보았다. 다시 휘장을 예쁘게 잡아맨 후 향불을 피웠다. 백단향 향기가 방에 가득 찼다. 연기는 푸른 빛을 내며, 서로 쫓고 쫓기는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용이 되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제단은 약한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니라.] 사부가 사이훙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최근에 사부는 새벽에 사이훙은 만나도 직접 말을 건네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말을 하는 경우라도 짧게 몇 마디를 건넬 뿐이었다. 종종 차나 책을 가져오라든가 아니면 여행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는 정도였다. 그 밖에 큰 소리로 독경을 하거나 그저 몇 가지 철학적인 견해를 말하는 일도 있긴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사부가 좀 더 많은 말을 꺼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불충분한 사람만이 외부의 상에다 자기 정신을 묶어 둔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사는 이 지상, 바로 우리 각자의 내부에 있는 것이니라.] 사이훙은 감실로부터 몸을 돌렸다. 설명을 기대했으나 사부의 입술은 꽉 물린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사부가 부드럽고 느린 동작으로 나무 팔걸이 위에 오른팔을 올려 놓자 무덤 속 같은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사부의 머리를 풀어 주기 위해 걸어오는 사이훙에게 사부는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숱이 많고 긴 백발이 바닥 위에 다발로 떨어져 내렸다. 사이훙은 부드 럽게 머리를 빗어 내렸다. 사이훙의 나이 16살 때 도교 입문식을 위해 사 부가 해주었던 일을 이제는 사부를 위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사이훙 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사부가 그의 머리를 빗어 주었 다. 그 의식에는 세속에 대한 집착을 씻어 낸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 었다. 사부는 사이훙의 상투를 틀고 비녀를 꽂아 주었었다. 사이훙이 상 투를 틀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그 후로도 수없이 사부의 머 리를 빗겨 주었다. 그때마다 사이훙은 그의 인생의 길잡이인 사부와 강하 게 연결된 느낌을 가졌다. 대사부는 젊은 시절 한때는 상당한 미남인데다 용기까지 겸비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사부는 무예와 병법에 밝았으며 학식도 깊었 다. 마침내는 베이징에 있는 청 왕조의 궁정까지 가게 되었다. 금단의 도시에 입성한 사부는 황제의 신하가 되기 위해 과거 시험을 보 았다. 높다란 붉은 담장과 환상적으로 꾸며진 수 많은 방들로 겹겹이 에 워싸인 궁궐에서 몇 번씩 시험을 치렀다. 사부는 글을 짓고 역사, 수학, 문학, 천문학, 통치학과 그 밖에 수십 과목을 시험 보았다. 그는 시작( )과 서예, 승마, 궁술, 무술 경연에서 높은 기량을 과시했다. 수일간 시험을 치른 끝에 그는 문무 양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매우 뛰어난 성적이었다. 사부는 황실 교사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사부는 황실에 드나들게 되었다. 사부는 황실의 예의 범절을 익힌 후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궁정에서 일을 맡은 얼마 후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의 아리따운 낭자와 성혼을 맺고 일생 일대의 전성기를 맞 이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비극이 밀어닥쳤다. 그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 사이훙은 사부의 인생을 크게 뒤흔든 이 엄 청난 사건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좀처럼 누를 길이 없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결코 풀리지 않았다.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준 사람 은 하나도 없었다. 궁중에서 일어난 암투 때문이었을까, 사악한 환관들의 모략이었을까? 평판이 나쁜 파당을 지지하다가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된 것 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경쟁 관계에 있는 무사가 사부의 가족을 살해한 것일 수도 있겠지. 속사정이야 어떻든 그것 때문에 사부는 치유 불능의 정신적 충격을 받아 세상을 등진 것이다. 사부는 속세와 동떨어져 살면서 위안을 찾았다. 그는 두 분의 스승 밑 에서 학문과 무술을 연마한 끝에 도인이 되었고 도가에 입문하였다. 그의 앞에는 두 가지 수행의 길이 열려 있었다. 하나는 도관에 기거하는 도사 가 되어, 의식, 점술, 결혼과 같은 온갖 공적인 임무와 장례에 관한 업무 를 관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가하여 완전히 탈속하는 도인의 전통 을 따르는 길이었다. 사부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다. 사부는 도인이 밟는 여러 단계의 과정 속에서 차츰 부상하여 마침내 현 재의 위치에 도달하였다. 사부는 단순히 특별한 도교 종파의 우두머리만 이 아닌 화산에 있는 도관 전체를 통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직 책은 도교의 교리와 금욕적 수행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속적인 권리까지도 암시하고 있었다. 대사부는 그 권리 를 획득하는 데 수십 년이나 걸렸다. 그래서 그의 나이가 100살은 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사부가 발 딛고 선 전통은 독특한 사회 구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세계사에게서도 그런 독특한 예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검, 마 법, 교회, 연금술이 공존 했던 중세 유럽과 신들이 우주를 다스리고 철학 자들은 자신의 학파를 이끌며 강철 같은 스파르타인이 무사의 표본으로 꼽히던 고대 그리스의 초현실적 결합을 상상해 본다면, 사부가 걸어온 문 화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우주에서 정말 파괴 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고대와 현대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가장 오 래된 농사법에서부터 시작해 최신 기술의 발명품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광 대무변함속에 각자의 위치를 갖고 있다. 대사부는 전통, 역사, 문화와 종교의 바다를 스스로 체험했다. 그는 순 수주의자였고 철두철미한 종교학자였다. 대사부는 그의 확고하고 넓은 도 량에서 나온 방법으로 도관들을 관리했다. 또한 그는 수련생들에게 자신 이 오랜 세월 닦아 쌓은 지혜와 강한 질서의식, 목표 의식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호리호리하게 큰 키에 바짝 말랐지만, 활기 넘치는 근력과 사슴 같은 우아함을 지닌 사부는 위풍당당한 풍모를 보여주었다. 수염은 비단결 같 았고 산 속의 폭포수처럼 굽이쳐 흘러내렸다. 커다란 두 눈은 광채로 번 쩍였다. 사부의 윗 입술 오른쪽에는 칼로 벤 상처가 있었다. 그 상처만이 동화 속 인물처럼 보이는 사부 역시 과거 속세에서 사무치게 절절한 행로 를 걸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사이훙은 종종 자신과 사부를 비교하곤 했다. 그 역시 깡마른데다 엄숙 한 표정, 위엄있는 모습을 지녔고 근육은 역도와 무술로 우람하고 탄탄하 게 다져져 있었다. 검은 머리는 숱이 많고 뻣뻣했다. 그리고 피부는 몇 년간 햇볕에 노출되어서 검게 그을어 있었다. 그러나 사이훙은 자신이 사 부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성마르고 충동적이며 사부 가 가진 깊은 고요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 이훙의 눈으로 볼 때 사부는 고매한 인물이었다. 영감을 불러 일으키며 결코 그가 쫓아갈 수 없는 살아 있는 이상형이었다. 빨래를 하기 위해, 사부가 벗어 놓은 옷을 광주리에 말없이 챙겼다. 방 에는 이미 온기가 돌고 안개가 걷혀 있었다. 그는 기뻤다. 열이 달아오르 는 명상을 끝낸 사부의 갈증을 풀어 주기 위해 샘물이 든 조롱박을 그의 옆에 놓았다. 사이훙은 문으로 가다가 잠시 서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사부는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두 손을 함께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조각상 같은 부동 자세로 돌아간 것이다. 드디어 산상에 새벽이 밝아 오자, 사이훙은 새벽을 알리는 최초의 빛이 채광창으 로 들어와 사부의 얼굴을 환하게 밝히는 것을 보았다. 사이훙은 빨래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아침 수련에 참석하고 난 후 동 료 수행자들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사이훙은 줄곧 사부가 낮게 속 삭이던 몇 마디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고 있었다. 천국과 지옥이 이 지상 에 있는 것이라면 보답도 응징도 있을 수 없는 일. 만일 그렇다면 선이나 악도 있을 수 없다.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그는 신을 경배하고 지루한 의식을 올리는 것일까? 사이훙은 부엌으로 걸어가면서 사부에게 더 자세히 여쭈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부엌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어린애를 목욕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가 마솥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 위에 얹혀 있었다. 젊은 수행자들은 불이 계 속 타오르도록 불을 지폈다. 그 동안 다른 이들은 쌀이 끓도록 짓고 있었 고 몇몇은 채소를 썰어 소금에 절일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고 참 요리장으로만 알려진 노도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일을 했다. 등뼈와 어깨뼈가 하나로 보이는 고집불통의 요리장은 정원에 있는 비석 만큼이나 두툼하고 땅딸막했다. 요리장은 단단해 보이는 큰 머리, 통통한 뺨에 까맣고 동그란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이훙을 보자 낯선 사람을 본 멧돼지처럼 우거지상을 썼다. 그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도관의 어른들 은 그의 불 같은 성질을 잠재우느라 애를 썼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며 나 쁜 본보기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교의 교리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너, 늦었구나.] 고참 요리장이 으르렁거렸다. [음식이 다 식어버렸잖아. 사부께서 배가 무척 고프시겠다.] [다 못난 놈의 죄입니다.] 사이훙은 사죄를 올렸다. 그는 뚜껑이 달린 고리버들 광주리에 딸그락 소리를 내는 접시를 담아 들고 사부의 방으로 내달았다. 지위가 높은 도사는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의 시중을 받았다. [사부님!] 사이훙은 문 앞에서 사부를 불렀다. 그러나 응답이 없는 침묵 뿐. 안으 로 들어가니, 사부가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사이훙은 절을 하고 광주리 를 내려놓았다. 뚜껑을 덮은 접시들을 꺼내 식탁을 차렸다. 요리는 버섯 과 땅콩,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빵과 채소들을 한 번 살짝 튀겨낸 것이었 다. 강하고 깨끗하고 상큼한 향기가 접시마다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음식냄새를 맡은 사이훙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차를 따르고 접시 위에 젓가락을 올려 놓는 동안 그의 입가에는 군침이 돌았다. [수련은 잘 되고 있느냐?] 사부가 음식을 들면서 이렇게 물었다. 사이훙은 정신을 차렸다. 사부는 며칠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론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자기를 완성시킨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사이훙은 공손히 답했다. [이런 격언이 있느니라. <성인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꽉 부여잡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는 마음이다. 받아서는 돌려주는 마음. 성인 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세상을 끌어 안는다.> 이 런 마음이야말로 네가 노력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니라. 너는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 사소한 일에다 마음을 붙잡아 두지 말거라.] [사부님, 선하면서도 악한 것, 옳으면서도 그른 것, 그런 것이 있는지 요.] [왜 그걸 묻느냐?] [사부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저희 스스로 하는 것이라 하셨고, 천 국과 지옥은 이 지상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오는 권위의 힘은 전혀 없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옳고 그른 것을 규정짓는 것은 누구란 말입니까?] [너에게 얘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아름답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은 여 인이 어떤 집에 나타났다. 집주인은 당연히 그 여인을 반겼지. 그는 여인 이 내뿜는 천상의 아름다움에 아찔할 정도로 현혹되었다. <실례지만, 누 구신가요?> 하고 집주인이 묻자 <나는 행운의 여신입니다. 불행한 아이들 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고, 환자를 치료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에게 아이를 주고,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고, 온갖 소망과 탄원을 충족시켜 준 답니다.>라고 여신이 말했다. 집주인은 즉시 옷차림을 바로 하고 여신 앞 에 머리 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몸소 그녀를 집안으로 모셨지. 잠시 뒤에 또 다른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허리가 굽었고 다리를 절 었다. 얼굴을 말라 비틀어져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고, 주름살이 겹겹이 잡혀 있었지. 머리카락은 마른 볏단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악취까지 났다. 주인은 분노하여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여인 은 <나는 어둠의 여신이라고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부자는 파산하고, 관리는 치욕적인 망신을 당하고, 병든 자는 죽고, 힘센 자는 힘을 잃어버 리고, 여자들의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남정네는 죽음을 애도하는 눈 물을 흘린답니다.>라고 얘기했다. 집주인은 곧장 지팡이를 들고 그 여인을 몰아내려고 했지. 그때 행운의 여신이 그를 말렸단다. <내 말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어둠의 여신의 말도 역시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어둠의 여신이 따라다니는 것 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이 우리 둘은 불가 분의 관계랍니다.> 집주인은 즉시 그 말을 이해했고 두 여신이 함께 머무 를까 봐 크게 염려를 했단다. 그래서 집주인은 그들에게 빨리 떠나 달라 고 재촉했지. 성인은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니라.] 사부는 사이훙이 우화를 이해했는지 보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부는 젓가락을 집어 들고 조용 히 식사를 하였다. 사부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선과 악은 존재하느니라. 밝은 길과 어두운 길이 있으며, 선인과 악인 이 있느니라. 하지만 자연이나 별자리나 동물에게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에 주목하여라. 이것들은 도()와 맺어져 있으며 독자적인 의지 력은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저항하지 않고 도를 따라간다. 움켜잡거 나 저항하지 않는 거울, 사물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인식을 되돌려 보내 는 거울이 바로 이렇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인간과 신은 별이나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에겐 지능이 있다. 인간과 신은 합리적이며 계산적인 정신을 소유하 고 있으며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느니라. 사람들이 선과 악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이 교활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만일 선과 악이 둘 다 없다면, 선택할 것 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음과 양은 우주의 기본이 되는 것이니라. 둘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어둠이 존재하기 때 문에 밝은 빛이 있는 것이다. 낮이 있으면 그 이전에 밤이 있게 마련이듯 정()이 있으면 반드시 사()가 있느니라. 이것이 우화 속에 들어 있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이다. 인류는 음과 양에서 창조되었다. 그러니 우리들은 음과 양의 존재인 것 이니라. 반대되는 양극단 사이에 긴장과 상호작용이 없다면, 인간의 내부 나 우주에는 움직임이 있을 수도 없느니라. 따라서 완전한 침체를 부를 것이며 피의 흐름은 완전한 정지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오로지 불모 ()만이 실재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상대성을 인정해야 한다. 창조 의 기본 과정의 일부로서 선과 악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이러한 이치 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내가 한 가지 다른 것을 얘기해 주마. 네 자신 속에 있는 선과 악을 받아들이거라. [사부님, 저는 도인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기 위해 각고의 노 력을 기울였습니다. 저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선을 얻어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을 키우고 싶을 뿐입니다.] 사부는 그 말을 듣고 냉소적으로 웃었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경건함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느니라.] [이해가 안 됩니다. 어릴 때부터 제가 사부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성스 럽게 사는 것 아닙니까? 도덕적으로 사는 것에 반대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가 정의를 지키는 영웅이 되어 살려고 염원하는 것이 왜 안 된다는 건가요?] [도덕과 윤리는 어리석고 생각 없는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니라. 그런 자들은 식별력이 없다. 성인들은 오로지 그런 어리석은 자들을 다스리기 위해 도덕을 창안했다. 도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도덕과 윤리 따위를 추종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이훙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사부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 했다. 분명 도덕과 부도덕을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부님 말씀이 확실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제발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 오. 악을 행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 테지요?] [나는 단지 도는 식별이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경건하고 도 덕적인 사람은 행여 잘못을 저지를까 두려워하면 산다.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간청하기 위해 사원으로 달려간다. 죄진 것을 생각 하면 천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래서 그는 경전을 읽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를 베풀고 선을 행하려고 항상 노심 초사하며 살아간다. 이 모든 기도와 중얼거림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신들은 아첨하는 자들에겐 조금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럼 기도하는 일을 그만둬도 될까요?] 사이훙은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못된 놈 같으니라구!] 사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사이훙은 움찔했다. [너는 수도자다. 기도는 일종의 예의범절이고 수행자로서의 의무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실제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만 한다. 중생을 위해 너는 중요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너 자신으 로는 극기와 자기 수양을 위해 수도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니라. 이런 과 정을 통해 선을 재차 확인하고 악을 편드는 일은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네 운명은 앞으로 성인이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 상충되는 요소들을 한 그릇에 담아 내는 것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들이 선을 고수하는 동안에라도 자신들은 어쩔 수 없이 나쁜 일을 저지 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쁜 일을 할 때도 스스로 를 이해한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면 안 된다.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 나는 내 몫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말거라. 오히려 행동으로 실천하기 전에 상황을 이해하도록 항상 노력해야만 하느 니라.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고 나서 실행에 옮겨 라. 또한 그것이 사소한 도덕성과 맞든 맞지 않든 너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성인이 가야 할 길이니라. 집주인은 두 여신을 멀리 쫓아버렸다. 상대성을 이해하고 상반된 것들 의 불가분성을 충분히 인식한 것이다. 그는 성인의 길을 택했다. 말하자 면 선도 악도 선택하지 않고 초월적인 길을 택한 것이다. 약삭빠른 자는 자신이 동시에 선이요 악이 된다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허가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양극 사이에서 영원히 왔다갔 다 하게 된다는 점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를 예로 들어 보자꾸나. 너는 능히 악마 백 명이 들어앉았다고 할 정 도로 장난을 잘 친다. 나는 이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한다. 하지 만 너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도교를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의도적으로 무모한 행위에 뛰어들기 때문에 너는 여전히 이원 ()의 세계에서 달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성인은 이원성을 초월하고자 한다.] 사이훙은 당황하여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장난 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사이훙은 화제를 자신에게서 다른 대로 돌려보려 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사부님은 선과 악이 인간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 고 신조차도 이원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인 선과 악이 있단 말씀입니까? 만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 스스 로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선과 악이 의지력을 지닌 존재의 내부에만 존 재한다면, 선과 악은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천벌도 있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둘을 식별하는 더 높은 권위란 있을 수 없겠 지요.] [네가 교활한 놈이란 걸 알겠다. 하지만 그런 궤변으로는 아무 것도 얻 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설명해 주마. 선과 악은 경극()의 주인공이나 악한이 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선과 악은 운명과 숙명처럼 형이상학적 존재다.] [운명과 숙명이라니. 둘 다 같은 것이 아닌가요?] 사이훙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같지 않다. 운명은 일생 동안 완수해야 하는 것이니라. 너는 임 무를 부여받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임무를 확인하고 세세한 것까지 완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단다. 이 일은 간단한 심 부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것은 각자가 서서히 결실을 맺게 되는 아주 복잡하고 독특한 수수께끼 같은 과제이다. 더 높은 상태로 다시 태 어나거나 아니면 이 모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생의 업보를 뛰어 넘는 것, 이 힘겨운 과제를 떠맡은 것이 바로 운명이다. 숙명은 오로지 네가 운명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존재하는 적 극적인 동인()이다. 그것은 너와 투쟁을 벌이고 네가 발전하지 못하 게 방해한다. 숙명은 환상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를 현혹하는 신기루도 다 숙명 탓이다. 숙명은 너를 속이고 웅대한 관념과 자만심으로 너의 마음을 채운다. 숙명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나쁜 일을 하거나 속임수를 쓰려는 자신을 의식할 때마다 너는 순간적으로 숙명을 발견할 것이다. 굴복하라. 그러면 숙명이 승리한다. 거부하라. 그러면 숙명이 패배한다. 그러나 숙명은 다시 한번 더 너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쉬지 않고 기다리면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바로 지상에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렇다. 천국에 가 게 될지 지옥으로 떨어질지 외양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네 속을 들 여다보거라. 운명을 추구하면 천국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숙명에 굴복하 면 지옥으로 미끄러질 것이다. 마지막까지 운명에 충실하면 인간의 존재 를 추월할 수 있게 된다. 숙명에 먹히면 미망과 무지의 수렁에 빠져 고통 을 받게 된다. 신과 악마가 너와 우주를 관리한다고 순진하게 생각지 말아라. 다시 말 하건대 그것은 미신일 뿐이다. 신은 존재하지만 제단 위의 신장상들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또한 신은 인간들에겐 거의 관심이 없다. 신은 인간의 악취를 참지 못한다. 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악마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 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신들도 운명과 숙명을 놓고 투쟁을 벌여야 하니까.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 이다.. 선과 악을 운명과 숙명으로 이해한다면, 너의 행위만으로 너는 운 명 또는 숙명을 향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요소를 너의 인생에서 고려할 필요는 없다. 운명의 숙제를 조금이라 도 풀고 나면 너는 승리할 수가 있다. 미망속으로 발을 헛딛게 되면 전망 은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너는 앞서 말한 격언을 형이상학적 권위에 반박 하기 위해 이용하더구나.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다. 네가 나쁜 일을 할 때, 너를 벌할 악마는 없다. 네가 믿지 않는 한 사 후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은 네가 마음속에서 그리는 내용을 똑 같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차원 속에 너 의 존재 전체를 영구히 옥에 가두어 놓을 수도 있다. 응보는 인과라는 기 계적 틀 안에만 존재할 뿐이다. 인과는 존재가 아니다. 정신성도 아니다. 사물도 아니다. 그것은 힘이다. 모든 행동은 인과를 낳는다. 불 위에 물을 얹으면 물이 끓는다. 물이 뛰어 오르면 다시 내려와야 한다. 모든 동작에는 동시에 상응하는 반작용 이 있게 마련이다. 인과의 끈은 한 인간의 삶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뒤 얽혀 촘촘한 거미줄 안에 그를 가둔다. 그런 인간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끈으로 그물을 만들 수도 있다. 그 그물로 물고기를 낚는다. 선()을 낚는다. 이것이 독실한 인간의 인과 다. 과거의 선행이 짠 거미줄이 계속 커져서 더 많은 선을 낳는다. 그러 나 그는 여전히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최고의 경지는 선과 악을 초월하고 인과를 모두 지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인생의 수레바퀴를 영영 떠난다. 그래서 신의 응보라는 것 이 생겼다. 그것은 옥황상제나 염라대왕이 내린 벌이 아니다. 하늘의 응 보는 네 안에서 운명과 숙명과 인과가 벌이는 상호작용이니라. 그것이 전 부다.] 사이훙은 그 말을 기억에 담고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너무 애쓰지는 말거라. 너는 아직도 악동이 아니더냐?] 사부가 조용히 말했다.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사이훙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됐다, 됐어. 계속 노력하거라.] 사부는 큰 소리로 웃었다. 평소의 습관대로 사부는 새 모이만큼의 기장과 음식을 조금 먹었을 뿐 이다. 사이훙은 더 드실 것을 권했다. [나는 속세와 연결된 끈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만 먹으면 된다. 나는 공 기를 먹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슬 몇 방울만 마시고도 살 수 있다. 하지 만 인간으로서의 내 자신을 포기할 준비는 안 되어 있다. 음식을 먹지 않 는 현인들의 절반은 이미 신의 경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작 신 성을 곁눈질 했을 뿐이다. 지상에서의 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아직 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내 육체가 문드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육체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균형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육체가 정신의 매개체 역할을 하려면 최고의 건강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육체를 만족시 킬 만큼만 먹는 것이다. 이 음식을 치우고 부엌에서 네 할 일을 끝내려무 나.] 사이훙은 절을 하고 식탁을 치운 뒤 방에서 물러 나왔다. 모퉁이를 막 돌아서면서 사이훙은 덩그러니 서 있는 도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격 자 무늬 창으로 쏟아져 내리는 흰색 불빛을 받아 고리버들 광주리가 반짝 였다. 그는 광주리를 내려놓고 그것을 열었다. 접시 뚜껑에 손을 댔다. 청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자기의 촉감이 손에 느껴졌다. 사이훙 은 뚜껑을 열어 소리 안 나게 옆에 놓고 음식을 꺼내 먹었다. 야채 무침 과 땅콩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부엌으로 돌아가기 전에 광주리 속에 조 금씩 남은 음식을 모조리 게걸스럽게 먹어 버렸다. [사부께서 흡족해 하셨느냐?] 고참 요리장이 물었다. 보통 요리사들처럼 그도 자기가 만든 음식이 환 영받기를 원했다.사이훙은 말없이 빈 접시들을 의기양양하게 보여주었다. 고참 요리장의 환한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다 드셨구나!] 요리사는 탄성을 질렀다. [내일은 더 많이 보내드려야겠다. 너무 야위셨어! 배가 고프게 해드려 서야 되겠니. 안 되고 말고!] [그러시지요.] 사이훙이 공손하게 말했다. 사이훙은 화산에 서 있는 웅장한 도관의 하나인 삼청전()을 향해 가파른 화강암 계단을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갔다. 돌이 너무 단단해서 끝 없이 행렬이 이어져도 계단 끝을 닳게 하지는 못했다. 계단과 주랑 현관 은 불과 한 시간 전에 물로 깨끗이 씻어 내렸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도관의 정면은 대들보가 천장을 받치고 서 있는 주목 ()의 위세에 눌린 형상이었다. 삼청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지붕의 용두머리는 그 높이가 50자나 되었다.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삼청전은 태 양 빛을 받아 현란하게 빛났다. 방마다 문 위에 가로 쳐진 상인방( )의 기하학적 무늬 가운데에는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옻칠한 문 위에 있는 거대한 검은 색 현판에는 도관의 이름이 금색 글씨로 멋지게 써져 있었다. 도관의 문들은 육중했고 사이훙이 어른을 무등을 태워 걸어가도 될 만 큼 높았다. 문의 격자 무늬에 손이 닫지 않게 조심하면서 문 중앙에 손바 닥을 올려 놓았다. 상감으로 아로새겨진 꽃 무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부분이었다. 문을 힘껏 밀어서 활짝 열었다. 찬 공기가 밀려 들었다. 솟을 대문은 삼청전 내부의 웅장함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대다수 중국 의 성전()들처럼 지붕의 마룻대는 현관과 나란히 평행선을 이룬다. 삼청전은 깊숙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폭이 넓었다. 밑으로 기울어진 지붕 의 선들과 아래로 내려갈수록 길이가 짧아지는 받침 기둥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보였다. 도톰하게 높여진 신단과 실물보다 큰 신상들이 함께 어우러져 생긴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에 삼청전은 초현 실적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숨막힐 듯한 건축의 웅대한 규모는 현란한 색깔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대들보는 하나하나 조각이 새겨지고 밖에 있는 대들보보다 훨씬 더 정교 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무늬들이 너무 정교해서 한눈에 관찰하기가 벅찰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들은 복잡 미묘한 영상과 만화경으로 본 풍경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세 개의 신단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신단마다 높은 금박의 아치가 둘 러쳐져 있고 그 안에 신이 모셔져 있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줄이 섬세하게 쳐진 칸막이 아치는 손가락 크기 정도의 수천 개의 인물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신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 다. 법복 아래의 단단한 근육이나 부풀어 오른 가슴을 보면, 그 바로 밑 에 살아있는 실체가 숨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은 살색이었고 눈 과 입술은 아주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삼신의 손은 놓인 모양이 각각 달랐다. 왼쪽의 태상노군()은 부채를 들고, 중앙의 원시천존()은 우주를 표현하는 천체를, 오른쪽의 옥황상제는 제 왕의 권표를 들고 있었다. 세 신들이 입은 옷은 아주 교묘하게도 진짜 주름이 잡힌 옷처럼 조각되 어 있었다. 도복과 기도용 무릎 깔개는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진 값비싼 비단이었다. 금실로 수놓은 잎사귀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신들이 가부좌상으로 앉아 있는 자리인 왕자는 황제에게 어울 릴 만했다.조각가가 칼로 한 번씩 새길 때마다, 화가의 붓이 한 번 스칠 때마다 바쳐졌을 헌신적인 몸짓이 눈에 선했다. 다른 맥락에서 보더라도 도교의 삼신은 최고 수준의 조각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문가라면 단번에 상상력, 생명력 그리고 놀라운 솜씨 뿐만 아니라, 모든 위대한 예술의 구성 요소인 초자연적 형상을 알아 보았을 것이다. 삼신은 존경심과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며, 사고와 자기 성찰을 자극하는 신비스러운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페인트칠을 한 나무를 뛰어 넘는 생동감을 지니고 있었다. 예술의 힘은 인간과 하늘 사이의 간격을 메웠다. 사원, 경전, 풍경화는 모두 자연과 하늘의 웅장함 속에서 일을 꾀하는 인간의 위치를 대변했다.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예술을 창작하면서 예술가들은 하늘에 이르는 거 리를 메워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한눈에 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긴 두루 마리의 그림을 그렸다. 단 몇 걸음에 올라갈 수 없는 높은 탑을 세웠다. 예술가들의 노력은 모두 인간을 비천한 현실에서 이상적인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세워진 삼청전은 무수히 많은 인간의 예술적 기교와 헌신이 빚어 낸 무대였다. 간절한 소망을 빌고 신 앙 생활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다. 사이훙은 높은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제단에는 이미 노랗고 빨간 꽃들 이 꽂힌 큰 꽃병, 알이 굵은 과일, 제물용 음식, 향기로운 백단향이 놓여 있었다. 유등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고, 의식에 쓰이는 많은 도구들인 종, 나무 문고리, 징과 옥으로 된 제왕의 홀()도 놓여 있었다. 빨간 촛 불들은 환한 빛으로 밝혀져 있었다.아직 켜지지 않은 수백 개의 다른 초 들이 한쪽에 놓여 있었다. 사이훙은 사부가 도교의 지고한 삼신 앞에서 의식을 행하기 위해 몸을 깨끗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 삼청전은 엄숙한 성인들과 도관의 수백 개의 불만큼 밝게 타오르는 기도의 불꽃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사이훙은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꾸며 놓은 사건이 일 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구경하기에 좋은 자리를 찾았다. 높이 25자쯤 되는 마루 위 대들보에 올라가면 삼청전의 구석구석을 전 부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들보로 올라가는 길은 삼신을 안에 모신 금박 아치 위로 올라가는 길 하나뿐이었다. 사이훙은 재빨리 조각물을 손 가락으로 잡았다. 발가락으로 더듬거려 다른 틈새를 찾아 아치 위로 올라 가서는 장수신(), 자비신(), 불사신, 용왕, 악마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다. 희열에 들떠서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리니 넓적한 대들보 위였다. 칠도 안되어 있는 지붕에는 수십 년 동안 쌓인 먼지와 향불 검댕이 더럽게 켜 를 이루고 있었다. 깨끗한 청색 도복 위로 짙은 회색 먼지가 묻었다. 손 도 더러워졌다. 그러나 사이훙은 개의치 않았다. 흥분이 그의 전신을 휘 감았다. 사이훙은 몸을 살짝 움직여 대들보의 중심으로 가서 행렬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장엄한 청동 종소리가 산 전체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돌 하나, 소나무 한 그루, 심지어 흐르는 시냇물까지 산 속의 모든 자연 은 웅장한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화답하였다. 오늘은 화산에서 가장 성스 러운 날이었다. 이 성스러운 날 아침에는 수업이나 허드렛일 따위는 없었 으며 목욕 재게만 하면 되었다. 사이훙은 징소리와 박()소리가 부드럽게 울리는 가운데 낮게 깔리는 찬가 합창과 행렬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린 도사들이 문을 열었 다. 정식 도사들이 먼저 입장하였다. 그들은 모두 푸른 도복과 바지를 입 고 흰색 대님을 매고 짚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모자만은 서로 모 양이 달랐다. 둥근 모자를 썼는가 하면 사각모도 있고, 챙이 두 개인 모 자를 쓴 도사들도 눈에 띄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모자를 쓰는 이유는 도 사들의 계급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화산의 도사들은 엄숙하고도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춰서 들어왔다. 그들은 보폭까지 똑같았다. 한편 두 손 은 수련의 표시로, 성스러운 기()를 보존하는 표시로 꼭 모아 합장을 하였다. 지위가 높은 도사들이 입은 도복은 형형색색이었다. 도관의 내부를 장 식하고 있는 다양한 빛깔들처럼 색의 가짓수가 많았다. 대사부는 지도자 답게 가장 화려한 태상화의()를 입고 있었다. 검은 색 모자에는 아홉 개의 챙이 달려 있었다. 그것들은 도교 수행자의 서열상 사부가 최 고위직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타원형으로 된 푸른 옥이 모자의 정면에 박혀 있었다. 숱이 많은 수염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흰색을 띄 고 있었으며, 가슴 아래로 강물처럼 굽이쳐 흘러내렸다. 사부의 도복은 자주색과 붉은 색,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밖에 학, 박쥐, 만 가지 변화 중의 하나인 장수라는 단어, 주역()의 팔괘 등이 다른 색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대사부는 우아하게 여덟치 높이의 문지방을 넘어 발을 내디뎠다. 길게 질질 끌리는 소매와 넓은 옷자락을 모양이 튀지 않게 살짝 집고 끌어 올 린 다음 삼신에게 다가갔다. 사부는 한 번도 문지방이나 깨진 바닥에 시 선을 주지 않았다. 마음과 영혼을 다해 철저히 집중하여 신앙의 대상에만 열중했다. 사이훙은 사부의 눈이 조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분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대사부는 종교의 무아지경에 빠져 반쯤 미소를 띤 채 황홀경 속에서 가볍게 미끄러지듯 그렇게 걷고 있었다. 촛불이 모두 환하게 켜졌다. 어두웠던 삼청전 내부는 수백 개의 가느다 란 황금색 불꽃이 어우러져 붉은 색으로 빛났다. 중앙의 신단에서 타오르 는 향 연기는 뭉게뭉게 휘돌아서 구름처럼 올라갔다. 사부는 세 개의 긴 향에 불을 켜고 세 개의 신단을 차례로 돌며 앞에 납작 엎드린 수 산 전 체를 대표해서 향불을 하나씩 공양했다. 사부의 뒤에서는 도사들이 낮게 부르는 찬가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긴 찬가 소리는 물줄기처럼 흘러 향 연기와 뒤섞였다. 정녕 그것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를,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이어지기를 도사들은 간절히 빌 었다. 대사부는 중앙의 신단으로 다시 돌아가 경전을 펼쳤다. 도교의 신은 각 각 경전을 하나씩 갖고 있는데, 도인들은 나무 위에 칠을 입힌 신들이 자 신들의 독경으로 깨어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독경을 하는 사람들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그리고 제물이 향긋하면 향긋할수록, 장소가 깨끗 하면 깨끗할수록 신들을 감동시켜 더 잘 설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대사부의 비음 섞인 음성은 흡사 당적()소리처럼 들렸다. 처음에는 갈대 피리 소리처럼 들리다가 점차 깊고 섬세한 공명음으로 변하였다. 그 모습은 연주의 한 장면 같았다. 징과 박은 경전이 봉독되는 동안 절정에 맞추어 일정한 박자로 연주되었다. 사부의 목소리가 커져가면서, 향불은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 길이가 반으로 줄었다. 의식의 신성함은 갑자기 터 진 무시무시한 소리 때문에 끊어져 버렸다. 아주 끔찍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통에 도사들은 그만 집중력을 잃고 말 았다. 신들과 대면하는 그들의 관심을 빼앗아갈 만큼 위력을 가진 소리는 아니었지만, 무심결에 그들은 돌아서고 말았다. 나무문 하나가 차가운 마 룻바닥에 쿵 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의 틈새에서 먼지 구름이 풀풀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문은 번개가 갈라지듯 세로로 쪼개져 버렸 다. 문 입구에는 세 남자가 서 있었다. 남향의 문들을 통해 들어온 빛에 눈이 부셨다. 도사들은 어둠과 연기로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시야가 흐렸다. 보초를 서던 도사들이 돌 풍 같은 기세로 뛰어든 반면, 다른 도사들은 공포에 질려 신단 쪽으로 몸 을 움츠리고 피했다. 지금 도관에 쳐들어온 세 남자는 무사임이 분명했 다. 그들은 결투 동작을 취했다. 소매 사이로 무사들의 근육이 툭 불거졌 다. 그들은 사악한 눈을 번득이며 무방비 상태의 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변발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무사들의 변발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된 청 왕조에 충성한다는 상징이지만, 그들은 지배 계급의 표시로 땋아 늘인 것이었다. 세 남자는 신단 앞에 우뚝 서더니 목에다 끈 을 감았다. 싸우기 위해 왔다는 신호였다. [누가 대사부냐?] 키가 제일 큰 자가 청천벽력같이 큰 소리를 질렀다. [바로 나요.] 대사부가 점잖게 말했다. 대사부는 앞으로 나가 공손하게 절을 했다. [우리가 훌륭한 수호신들의 기분이라도 언짢게 해드렸습니까?] [빌어먹을 놈 같으니! 네놈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았더냐?] 한 무사가 짙은 자주빛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까만 글씨체가 반투 명한 종이 위에 드러났다. [내가 읽어주마. <너희 셋은 스스로를 감히 하늘, 땅, 인간이라고 불렀 다. 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칭호를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세속의 풍 진 속에서 떠돌기를 수년, 나는 이 보다 더 불쌍한 인간들은 본적이 없었 다. 어린애들과 고작 말다툼이나 하는 정도 가지고 스스로 무술가라고 칭 하는 후안무치한 자들이여, 고소를 금할 길이 없구나. 너희들이 조금이라 도 진정한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아래에 지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도전을 받아라. 세상에서 제거하는 것만이 너희 같은 더러운 존재를 깨끗 이 치울 수 있으리니.......>] [나는 결코 그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소이다.] 대사부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비천하고 불쌍한 수행자이외다. 여러분 같은 영웅들과 감히 겨룰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뭔가 크게 오해하셨소.] [닥쳐라! 이것은 너의 서명과 봉인이 아니더냐?] 사부는 마룻바닥에 던져진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사이훙은 사부가 충격 받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노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래졌다. 입을 크게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서명은 그의 것이었다. 봉인도 진 짜였다. <하늘>이라는 키 큰 남자는 사부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죄를 인정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공격 자세를 방어 자세로 바꾸었다. 사부는 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부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지더니, 경계 태세 에 돌입했다. 심지어 그의 도복조차 기로 부풀어 올랐다. 짙은 청색 웃옷과 바지를 입은 <하늘>은 표범처럼 날쌔게 몸을 놀려 금 강세()를 취했다. 그렇다면 그는 주먹과 발을 쓰지 않고 단지 손바 닥만 이용해 싸울 것이다. 그의 어두운 얼굴에는 깊게 주름이 패어 있고 다소 일그러져 있었다. 코는 젊은 시절에 부러진 듯 비뚜러져 있었다. [오늘이 너의 장례식인 줄이나 알아라, 이 영감아.] 그가 으르렁 거렸다. [생과 사는 신이 예정하시는 것이외다.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나는 기 꺼이 신 앞에서 죽겠소이다. 그러나 그대가 나를 염라대왕에게 보내지는 못할 것이외다.] 대사부는 사나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항복을 해라. 무방비 상태의 영감을 죽였다고 소문이 나는 것은 싫으 니까.] [그대는 왜 존재도 없는 명예에 집착하시오? 원커든 언제든지 공격하시 오. 내가 그대를 이기기 위해 세 번 이상 움직이면, 나는 스스로 명예를 지키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오.] [그럼, 죽어라!] <하늘>이 낮게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왔다. 그러나 수백 차례의 시합에 서 승리했던 대사부는 단 한 차례 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자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사이훙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킬킬거 리고 웃기 시작했다. 대사부는 얼굴을 들었다. 싸움을 하느라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하지만 사부가 입을 떼기도 전에 <땅>이라 는 자가 그를 공격해 왔다. <땅>은 뚱뚱하고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는 상스러운 인간이었다. 소림 권()을 이용한 그의 동작은 서툴고 단순했다. 그러나 힘에 체중을 실으면 언제든지 기술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체중이 보통 사람 보다 훨씬 더 나가는 그는 웅크리고 숨어 있는 복병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사정없이 대사부에게 달려들었다. 가냘픈 체격의 사부는 살짝 비 켜섰다. 그가 다시 덤볐다. 대사부의 얼굴에는 후회의 빛이 잠깐 스쳐갔 다. 백정 앞에 돼지 한 마리가 놓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무사의 법도상 싸움을 완전히 끝내야만 했다. 사부는 홱 몸을 피하더니 앞으로 나아갔 다. 펄럭펄럭 나부끼는 옷소매가 태풍 속에서 윙윙 소리를 내는 깃발처럼 휘날렸다. 사부는 손바닥을 날카롭게 세워서 상대의 신장을 찌르고 한쪽 발로 그의 무릎을 탈구시켜 버렸다. <인간>이라는 자는 철사줄 같이 야위고 뻣뻣하게 생겼다. 네모진 얼굴 오른쪽에 보기 흉한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 인사를 하는 것을 봐서는 무 당권()을 쓸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도 대사부는 적이 먼저 공격하 도록 기회를 주었다. 공격자는 양동 작전을 펴 한가운데를 찌르는 듯하다 가 잽싸게 눈을 찔렀다. 대사부는 커다란 옷소매에서 미끄러지듯 슬쩍 손 을 내밀더니 손목을 잡고 비틀어서 바닥에 <인간>을 내 꽂아 버렸다. 한 차례 발을 날려 걷어차니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 버렸다. 대사부는 뒤로 물러나 에워싼 사람들에게 세 사람을 들어서 밖으로 내 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을 회생시키고 빠진 뼈를 맞춰 주도록 의원 일을 맡아 보는 도사들을 보냈다. 대사부는 단지 그들을 얼마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사부는 그들이 속아서 공격을 벌 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짐승 같은 놈! 썩 이리 내려오지 못할까!] 사부는 사이훙을 보고 버럭 고함을 쳤다. 사이훙은 조용히 기둥을 타고 내려왔다. [네 방에 가서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나서야 두 시자가 사이훙을 대사부의 방으로 호송 하여 데려갔다. 대사부는 아직 태상화의를 입은 채였다. 그는 천천히 책 상을 돌아오더니 사이훙을 마주 보았다. 사이훙은 순간 사부의 몸에 급속 한 가속도가 붙는 것을 감지했다. 사부가 그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무릎을 꿇어라!] 대사부가 명령했다. [이 나쁜 놈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불경스런 짓을 꿈도 못 꿀 것이다. 네놈이 웃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 이름을 사칭해서 나를 함정에 빠뜨린 놈이 너라는 것을 알았다. 늘 장난칠 궁리만 하는 네놈만 이 그런 음모를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사이훙은 침묵했다. 감히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 모든 일을 흥분에 들떠 한껏 즐기고 있었다. [너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너는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고, 나의 명예를 더럽히고, 신에게 봉헌하는 신당의 신성함을 모독했다. 네 죄는 실로 엄 청나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당해도 싼 자들입니다.] 사이훙은 능글능글 웃었다. [도교의 삼신 앞에서 패주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수모를 줄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도교의 삼신은 그런 놈들보다는 훨씬 높은 위치에 있으니까요.] [또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을 보니 네 죄를 모르고 있구나! 너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보다 먼저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사건을 꾸몄는지 그 동기를 내게 밝혀라.] 사이훙은 자세히 설명했다. [제가 그들의 도장을 지나가다가 시주를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 은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직접 그들에게 도전하러 갔으나. 제 힘으로는 그들을 당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편지를 보냈습니 다. 높은 칭호를 갖고 있으면서 거만한 자들은 누구나 한 두 단계 강등을 당해야만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대사부는 사이훙을 크게 꾸짖었다. [네가 틀렸다. 부끄러워할 사람은 바로 너다. 사이훙을 데려가거라.] 두 시자는 멀리 있는 지하 동굴로 사이훙을 데려갔다. 공기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고 습했다. 친절하게도 그들은 솜을 누빈 옷을 가져다 주었다. 세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두 시자는 너무도 엄숙했고 사이훙 은 여전히 기쁨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들은 물이 가득 찬 방으로 갔다.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서 생긴 이 동굴은 수세기 전에 파괴 되었다. 그 결 과 직경이 다섯 자쯤 되는 둥근 고원 위로 뾰쪽하게 튀어 나온 장소가 생 겼다. 지하의 호수 중심부에는 평평한 바위가 솟아 나와 있었다. 수면 위 로 열 자쯤 되는 높이였다. 육중한 널빤지가 그들이 서 있는 고원에서 그 바위까지 뻗어 있었다. 시자들은 사이훙의 손에 옷과 물이 든 조롱박을 쥐어주고 건너가라고 지시했다. 사이훙이 건너가 앉자 그들은 널빤지를 치워 버렸다. 사이훙은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손에 든 횃불이 어 둠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사이훙에게 내려진 판결은 지은 죄를 각성하며 49일 동안 명상에 잠겨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동안 그는 묽은 죽과 물 만 먹게 될 것이다. 사이훙은 눈을 감았다.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리 고 기침이 나왔다. 물이 좔좔 흐르는 소리에 신경이 계속 거슬렸다. 위에 서 박쥐가 날개를 찍찍 끌고 다니는 소리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사이 훙은 동굴 생활이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날 벌어진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쿡쿡 터져 나왔다. 장난의 결과가 너무 통쾌했기 때문에 반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 위 높은 곳에 있는 뾰족뾰족 들어간 구멍들에서 희미한 불빛이 나 왔다. 그 빛은 수면 위로 창백하게 쏟아졌다. 삐죽이 나온 암석층의 그림 자와 무지갯빛의 괴상한 광석의 그림자가 살짝 수면에 비칠 뿐이었다. 검 은 색 물이 깊은 곳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사이훙은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도망 갈 출구를 찾았지만, 도피처라곤 옛날의 기억밖에 없었다. 물 속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뛰놀 던 소나무 수풀에 있는 반짝반짝 빛나던 푸른 호수가 생각났다. 소년 시 절에 수영을 어떻게 배웠던가도 생각났다. 셋째 삼촌은 그가 물에 뜰 수 있도록 굉장히 큰 조롱박 두 개를 그의 몸에 묶어 주었다. 그때의 경험은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추억의 하나였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물론 있었다. 일곱 살에 가정 수업을 보충할 목적으 로 마을의 학교에 보내졌을 때 그는 매일 같이 얻어맞았다. 반격도 해봤 지만, 공격자들이 마법을 부리듯 기습을 해와 도저히 그들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창피해서 남에게 말도 못하고 고통을 참았다. 그런데 수영을 하 다 셋째 삼촌은 사이훙이 온통 퍼렇게 멍이 든 것을 보았다. [싸워 봤지만, 그놈들은 손과 발로 이상한 동작을 하며 싸우기 때문에 내가 지고 말아요.] 사이훙은 애처롭게 말했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그놈들은 권법을 이용하는 거야.] 셋째 삼촌은 그를 책망했다. [그게 뭔데요?] 사이훙이 물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무술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실 하 나를 알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무사 계급이며 청 왕조의 만주족 후예이 고 전쟁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관공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사이훙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든 무술과 병기류는 가족의 어린 구 성원에까지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사이훙은 자신이 가문의 깊은 갈등 속에 빠 져든 것을 알았다. 음악 교사를 하던 어머니는 장군인 남편의 직업을 잘 모르는 어린 사이훙을 학자로 키우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술 은 무엇이든 금했다. 그러나 셋째 삼촌으로부터 그가 물려 받은 유산에 알게 되면서 사정을 바뀌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에게 무사 교육을 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이훙은 전사는 대포와 군대를 다루는 현대적 군인과 19세기의 할아버지처럼 되는 무사,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보다 할아버지와 같은 전통적인 영웅이 되는 길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할아버지는 신사이며 시인, 서예가, 음악가였다. 반면에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폭군이었다. 양친과 멀어 지면서 사이훙은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가 무사 정신 에 눈을 뜨게 되자 어머니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군 국주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못마땅했다. 부모님은 사이훙이 하인들이 나 가족들에게 장난치는 것이나 좋아한다고 매우 언짢아 했다. 사이훙은 장난을 즐겼다. 부엌에서 음식을 훔치기도 하고, 벽돌로 사람 을 치기도 했다. 크게 구경거리가 됐던 사건도 하나 일으켰는데 먹으면 방귀를 뀌게 하는 가루를 입수했던 것이다. 그는 이 무기를 써서 재산 문 제로 그에게 항상 잔소리를 해대던 삼촌 한 분에게 복수를 했다.대저택에 왕자님이 오시는 날, 사이훙은 아저씨의 차에 그 가루를 탔다. 이 불쌍한 삼촌은 그만 참지 못하고 방귀를 뀌어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사이훙은 이 광경을 아무런 내색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 다. 장난치는 것이야말로 사이훙의 최대 기쁨이었다. 친척들이 그의 희생물 이었는데 그들은 그때마다 그에게 벌을 주면서 장난질은 그만하고 개과천 선하라며 혼쭐내곤 했다. 거의 매일 벌어지는 못된 행동을 보고도 직접 나무라신 적이 없던 할아버지까지 젊은 신사로서의 의무와 역할에 대해 몇 번이고 타이르셨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역할의 문제가 복잡해졌다. 어느 날 셋째 삼촌이 잉 어가 수놓아진 긴 비단옷을 그에게 입히고, 굽이 높은 신발, 공작의 깃털 이 꽂힌 이상한 모자와 구슬을 꿴 줄을 가져오셨다. 그는 그때 자신이 귀 족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잘 몰랐고 또한 하인들이 그를 보고서 왜 부 들부들 떨며 엎드리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할 것없이 무릎을 꿇고 그의 신발을 만졌다. [왜들 이러죠?] 사이훙이 삼촌에게 물었다. [그냥 내버려둬라.] 삼촌은 신경쓸 것 없다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셋째 삼촌은 그를 데리고 유배 중인 푸이()황제를 알현했다. 1927 년 이었다. 청 왕조는 1911년에 몰락했다. 그러나 사이훙의 가족들은 여 전히 자녀들을 황제에게 인사를 시켰다. 귀족들은 모두 왕정 복고를 소망 하면서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삼촌은 사이훙도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들로부터 가해지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사이훙은 가문의 위대한 유 산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이훙이 무사든 장군이든 귀족이 든 수양을 쌓고 높은 교육을 받아 훌륭한 젊은이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총명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성숙의 표시는 하나도 나 타나지 않았다. 사이훙 자신은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그분의 모범적 품행 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다른 가족들이 그를 통제하려고 하 면 피해 버렸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장난이 너무 짓궂어지자 부모 는 의절까지 할 각오를 하였다. 그때 중대 조치를 취하신 분은 할아버지 였다.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데리고 타이 산으로 순례 여행을 갔다. 거기서 그 는 대사부를 처음 만났다. 사이훙은 그 만남이 특별했던 것으로 기억한 다. 주변의 분위기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적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친화감을 느꼈기 때문 에 사이훙이 사부의 최연소 학생이 될 수 있게끔 주선해 주셨다. 그것은 가문의 압력으로부터 아홉 살 난 손자를 구하려는 할아버지의 배려였다. 사이훙은 가끔 집에 다녀가긴 했지만 대부분을 도관에서 생활했다. 사 부와 두 사형이 그를 키웠다. 사이훙에게 사부의 존재는 제 2의 아버지와 다름없었다. 사형들과 대사부의 제자들은 사이훙보다 최소한 12년 위였는 데 마치 친형들 같았다. 장난꾸러기 짓은 여전했지만 한 가족이라는 안전 한 방패가 있음을 깨달은 것은 화산에 있을 때뿐 이었다. 도관의 생활은 단조로왔다. 그래서 사이훙은 마음이 초조해지면 옛날 버릇이 다시 살아나곤 했다. 때때로 그저 재미 삼아 장난을 치기도 했지 만, 대부분은 자신이 멸시를 받았다고 느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보 다 더 많이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도사들의 음식에 방귀뀌는 가루를 듬뿍 넣고, 박쥐 신선에게는 약초를 써서 잠이 들게 하고, 개구리 신선은 끈적 끈적한 아교로 돌에 꼼짝못하게 붙여 놓고 막대기로 두들겨 팼다. 사부는 사이훙이 못된 짓을 할 때마다 벌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사이훙에게 는 오락의 일부였다. 그의 가족과는 달리, 사부는 나중에 항상 그를 용서 해 주고 스스럼없이 대하며 사이훙을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이훙은 점점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나갔다. 무술뿐만 아니라, 학문과 정신적 기량도 어느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3년 동안 동굴 속에 갇혀 지내면서 극도의 금욕 생활을 실천했다. 그리고 1년 동안은 신 탁을 받았다. 그는 약초만을 먹었고 몸무게는 40킬로밖에 안 되게 줄었 다. 사형들이 그를 들어서 옮겨 가야만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사이훙을 신의 영매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의 식을 수행 했을 때 그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서 신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 작했다. 신에게 자신을 열어 놓는 데 최소한의 육체적 힘밖에 들지 않는 다는 사실은 이상했다. 수 차례에 걸쳐 영혼이 사이훙 안으로 들어와 얘 기를 했지만, 직접 영혼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었다. 완전히 영혼에 사로 잡혀 있는 동안에 자신의 의식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신과 영적인 교섭을 하던 사이훙은 1937년 일본 이 중국을 침략하자 또 다른 극한 상황으로 떨어졌다. 사이훙은 애국심 때문에 산에서 내려와 싸우고 살인을 했다. 하지만 2년 후 그의 애국심은 목적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전쟁은 양쪽을 모두 패배시켰다. 사이훙에게는 처절한 고통을 수반했던 잔혹 행위가 마치 애들 장난같이 어리석게 보였 다. 또 그는 정치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일 전쟁은 그의 가문 을 송두리째 삼켜 버렸다. 가족들 중 몇몇은 생명을 잃었다. 한때 떵떵거 리던 관가보와 토지는 폐허로 변했다. 사이훙은 화산의 공동체로 돌아와 칩거하면서 온갖 풍상을 겪고 난 후 느낀 환멸을 달래느라 몇 년 동안 애 를 써야 했다. 명상과 차가운 정적 그리고 향 연기 그윽한 사당이 자아 내는 평화스러 움에 힘입어 마음의 상처는 얼마간 치유되었다. 영혼의 훈련을 통하여, 사이훙은 다른 퇴역병들보다 빠른 속도로 전쟁의 상흔을 지워 갈 수 있었 다. 심약한 민족주의가 강대한 허무주의와의 전쟁에서 전투를 벌이면 어 떻게 되는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활기 차게 살 수 있도록 그에게 마법 의 힘을 주었던 남성다운 호전성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가문의 요구와 잔혹한 전쟁 때문에 더렵혀졌던 사이훙은 도교의 전통을 실천하며 더욱 결의를 다짐으로써 깨달음의 본질을 찾아 구도의 길을 걸었다. 도관에는 선각자들의 해답이 보존되어 있었다. 사이훙에게 고대의 지혜 는 고고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과 영감을 주는 보물이었다. 고 대의 미술품에서 그는 편안함을 느꼈다. 안정과 생존의 힘이 느껴졌다. 하늘에 닿을 듯 절벽 위에 높이 지어진 낡은 건물들을 보면 영혼 속에서 고대의 음향이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고대 문명의 흘러간 영광을 반추할 수도 있고, 생명체들이 사라져 간 흔적들을 묵상하고, 초자연적인 노력의 영원함을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도교는 영생 불사를 논하는 종교이 다. 그러나 사이훙은 장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갈등과 부패와 덧없음을 초월할 수 있는 영생의 시학()을 발견하기 위하여 도교 연구에 몰두 해 왔다. 그러나 죄의 대가로 당분간은 동굴에 갇혀 지내야 할 신세였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동굴 속에 떨어지게 됐을 뿐 아니라, 목표 달성에도 차질 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기간을 정식으로 단식과 명상의 시간이 되게 하려던 사이훙의 첫 시 도는 절반 정도의 시간을 헛되게 흘려 보냈다. 이제 그는 허영을 부릴 처 지가 아니었다. 몹시 춥고 배가 고팠다. 생각은 꼬일 대로 꼬였다. 사이 훙은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때웠다. 깨어 있어도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 는지도 몰랐다. 딱딱한 바위 위에서도 얼마든지 잠들 수 있었고, 뺨에 먼 지를 가득 뒤집어 쓰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 사실에 묘하게도 흥미가 동했다. 49일 후, 그의 의식은 꽁꽁 얼어붙은 극한 속에서 마비되어 무감각해졌 다. 사이훙은 그 작은 세계의 바닥에 나무 널빤지가 걸쳐지는 것을 어렴 풋이 보았다. 소복한 먼지가 그의 앞으로 밀려왔다. 널빤지에서 찍찍 긁 히는 소리가 났다. 신경이 거슬렸다. 위를 올려다 보았다. 두 눈의 초점 을 한 곳에 모으기가 힘들었다. 불꽃이 번쩍번쩍 빛났다.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사이훙의 손을 꽉 붙잡는 것이 있었다. 비트는 힘이 너무 강해서 손이 아팠다. 사이훙이 한때 그 위력을 과시했던 근육은 너무나도 나약해 져 있었다. 사이훙은 기침을 했다. 목구멍이 탈 정도로 침이 말라붙어 있었다. 매 운 연기 냄새에 더욱 세차게 기침이 나왔다. 널빤지가 휘청대자 마음이 쏠렸다. 지하에서 흐르는 검푸른 물은 밤하늘이 녹아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물이 반짝 거렸다. 수면에 반사된 횃불은 저물어가는 태양 같았 다. 가스가 다 빠진 듯 꺼져 가는 불꽃은 강물을 이루고 그 강물 속에 다시 가스와 불꽃이 녹아 잇는 것처럼 보였다. 소멸돼 가는 별들에게서는 신음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이훙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소 리는 나무 널빤지가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그는 불안정 했다. 근육이 말 을 잘 듣지 않아 동작이 아주 불안했다. 부신 호르몬이 오래 전부터 분비 되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사이훙은 두 사형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는 가까스로 웃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동안 사형들은 친절하게도 부축을 해주었 다. 추운 새벽이었다. 그러나 잘게 이는 바람도 지하의 공기보다는 따뜻 했다.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바보처럼 턱이 어긋나 고 말았다. 사형들은 그저 잠자코 있으라고 그에게 일렀다. 사이훙을 간 호해서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의 방으로 데려갔다. 더러운 머리카락은 시든 풀뿌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얼굴은 먼지가 뒤덮여 회색 빛이었다. 수염은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그는 굴 속 에서 나온 장난꾸러기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사이훙은 비참했다. 탈진 상태에 놓인 한 마리 짐승이었다. 고집 세고, 반항적이고, 자신만만하던 그를 이 꼴이 되게 한 장난질이 아직도 뉘우쳐지지 않는 것이 그를 괴롭 게 했다. 사이훙은 화산 주변에 깔린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았다. 높이 솟은 산의 전경들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창공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삼각 대 모양의 화산이 주는 영감으로 생긴 전설들은 이 산들이야말로 푸른 하 늘을 떠받치는 버팀목이라고 전해왔다. 사이훙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쓰디쓴 강장제를 씹으면서 웅장한 자연 속에 묻혀 곧 정상 생활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