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당일배송 물품을 골라보았습니다.
비주류의 삶을 살다간 사람들에 관하여 알고 싶었는데 그 책들은 9월이 넘어서야 오기 때문에
며칠 간 즐겁게 보내기 위해 책을 주문했습니다.
늘 그랬지만 택배기사님이 올 때만 기다려집니다.
5시가 넘어서 책이 도착하여 포장을 뜯어보았습니다.
한번 훑어보고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
첫번째
구본준이 쓴 <한국의 글쟁이들>에서는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던 책의 저자들이
많았습니다.
정민은 책만 사놓고 보지 않았고,
이주헌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저술가 이덕일은 이름만 신문에서 보았고,
정재승의 책은 집에 있지만 읽다 말았고,
구본형,김세영,노성두,조용헌,허균,주경철은 알지 못한 이름이었습니다.
두번째
'21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서경식 교수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제 무지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잭 시라이, 에른스트 톨러, 카임 수틴, 폴 니장, 프리모 레비,
갓산 카나파니, 하비 밀크, 시에키 유조, 아이미쓰, 가모이 레이, 마키무라 고우, 오구마 히데오,
히라 다키미, 하세가와 데루, 오자키 호쓰미, 가와카미 하지메, 에브리 만,
양징위,조문상,김사량,이진우,양정명,오기순"
서경식 그는 서준,서승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매우며 행동하기, 행동하며 배우기'를 목표로 만들어진 지행네트워크에서 지은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를 잡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이명원이라는 문학평론가 때문에 산 책입니다.
서울시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던 국문학,
특히 실증주의적인 문학비평계의 거두 김윤식 교수의 성과가 대부분 표절이라고
최초로 문제제기를 하여, 지도교수로부터 쫒겨나고 서울디지털대에서도 해직된 그였습니다.
몇년전 그가 '지행합일네트워크'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 그 첫 성과물이 나와 반가웠습니다.
2009.8.28. 아침에
좀더 아시려면
=============================================================================
서경식
|
|
▲ 서경식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는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며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보법"이라고 강조했다. |
|
ⓒ2004 오마이뉴스 권우성 |
| "나에게 있어서 국가보안법은 이 법 때문에 장기간 복역했던 내 형님(서승, 서준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보법이다. 이 법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 구금, 고문에 시달렸다. 재일 조선인들은 교류를 통해 조국의 역사문화를 알고싶지만, 국보법의 그물 때문에 스스로 검열하는 모습이 벌어지고 있다."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는 재일 조선인이다. 서경식 교수는 간첩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고문의 잔혹함을 고발하기 위해 난로를 끌어안았던 서승 선생과 인권운동가 서준식씨의 동생이기도 하다. 서경식 교수는 일제시대 일본에서 나고 자라 한국말이 서툴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언어의 감옥'에 갇혔다고 말한다.
일본사회에서 재일 조선인의 신분으로 사는 서경식 교수는 최근 그 삶을 담은 책(<소년의 눈물> 돌베개 간)을 펴내 재일교포로는 처음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다.
서 교수는 지난 16일 <오마이뉴스>와 만나 "한국 독자들이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타인 외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 혹은 그들이 살던 지역)' 존재들에 대해 동정하거나 연민의 정을 느끼기보다 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가졌으면 좋겠다"며 "이것은 우리 나라의 평화, 또 동북아 평화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서 교수는 이날 가진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논란을 비롯해 재일 조선인들의 참정권 문제, 과거사 청산문제와 일본의 반성, 디아스포라로서의 삶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다음은 서경식 교수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
|
|
서경식 교수는 누구? |
|
|
|
서경식 교수는 국내에서 서승, 서준식 형제의 동생으로도 이름이 높다.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고,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그 외에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분단을 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의 사신> 등을 출판했으며,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서경식 교수는 전작 <나의 서양 미술 순례>에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슬픈 가족사와 미술작품과 완벽하게 조화시켜 독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낸 <소년의 눈물>도 서 교수 문체의 독특한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
|
| | | -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국보법 개폐논쟁이 한창이다. 일본에서도 이 논쟁을 접했을텐데. "나에게 있어서 국가보안법은 이 법 때문에 장기간 복역했던 내 형님(서승, 서준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보법은 하루라도 빨리 철폐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이 법의 폐지가 공론화 된 것에 감사를 느낀다.
- 재일 조선인 사회도 국보법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 국보법 철폐문제를 말하겠다. 재일 조선인은 일제 식민지배 결과 일본사회에 남게 된 조선인이다. 해방 후 일본정부는, 1952년 재일 조선인의 일본국적을 부정했다. 그래서 재일 조선인들은 무국적자로 일본사회에 남게 됐다. 또, 재일 조선인들이 소속돼야 할 한반도는 분단에 직면하게 됐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잘려 있지만, 재일 조선인들은 남북으로 갈릴 이유가 없었다. 재일 조선인들은 남북으로 갈리지 않은 '하나의 집단'으로 일본사회에 남게 됐다. 그 일본사회에서 집단으로 존재하는 재일 조선인들을 폭력적으로 갈라놓은 게 국가보안법이다.
재일 조선인들은 한 가족 안에서도 아버지는 조총련 소속인데, 아들은 거류민단 소속인 경우, 또 가족 중 어떤 이는 북한에 가고, 또 어떤 사람은 한국에 가는, 아주 미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가족들 중 한 사람이 한국을 방문할 경우, 너의 아버지는 조총련 소속이거나, 북한에 갔다고 해서 한국경찰에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국가보안법은 분단시대의 산물이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사람들에게나 재일 조선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던 법이다."
- 재일 조선인들이 국가보안법으로 당한 피해는 주로 어떤 것들인가. "1965년 한일협정 조인으로 인해 나는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자유롭게 이주하고 유학도 가능해졌다. 그런 상태에서 두 형님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현실이 벌어졌다. 재일 유학생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돼 옥고 치른 사람이 100여명이다. 1970년대 이후 정치범으로 몰린 유학생들이 100여명이다. 대학 선후배들, 조총련계로부터 무슨 지령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진짜 많았다.
지금 내가 100여명이라도 얘기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눈에 보이는 일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은 사건을 치면 더 많았을 것이다."
- 대표적인 악용사례가 있다면.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사회의 민족차별정책으로 우리 민족교육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재일 조선인들은 조국과의 교류를 통해 조국의 역사문화를 알고싶어하는 데도 국가보안법의 그물 때문에 스스로 자기 검열하는 모습이 벌어지고 있다.
서승 형님의 경우, 초기 유학생이었다. 서승 형님은 한국에 간 뒤 간첩단사건에 걸려 국보법으로 고초를 겪었다. 본국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하고 싶었는데 옥고를 치른 것이다. 유학생들이 조국과의 교류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만, 나도 서승 형님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서승 형님 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알고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국보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재일 조선인들은 본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형성하는 데 큰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국보법은 남북분단의 장벽이자 남한사회를 보수와 진보로 가르는 장벽, 국내와 해외 동포들을 분단시키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부인하는 마당에 그 일원이 될 수는 없다"
|
|
|
▲ 일본에서 NPO전야의 이사로도 활동중인 서경식 교수는 "재외 동포들의 참정권 문제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
|
ⓒ2004 오마이뉴스 권우성 | - 한국전쟁 중에 태어나 분단 속에서 성장했다. 일본에 살면서 이런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나. "당연히, 나도 혼란스러운 나라를 못 본 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다. 옥중에 계셨던 두 형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은 재일 조선인들에게 일본은 좋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재일 조선인으로서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안락한 사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 일본사회에 대해 가장 크게 느낀 문제점은 무엇인가. "해방 뒤, 일본이 과거의 식민지배를 평가하고 책임지는 사회였다면 긍정적으로 일본사회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일본사회가 역사적 책임을 부정하는 마당에 그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는 내면적인 이유가 있다. 열 다섯의 나이에, 1966년 나는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그때 경험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재일교포 하계휴가학교였는데, 주로 반공교육과 우리말교육을 하는 '섬머프로그램'이었다. 이때 처음 받은 인상은 한국사회의 경제적 비참함이었다.
일본에서 넉넉하게 산 편은 아니었지만, 껌 파는 아이들과 구두 닦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만일 인도나 에티오피아처럼 여행자의 마음으로 조국을 방문했더라면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돈 좀 주세요!' 하는 소년은 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방 뒤 사촌 할아버지가 귀국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 남아 한국으로 귀향한 친척들의 생활비를 보탰다. 아버지가 그들처럼 귀향했다면 나도 그 소년들과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졌나. "당시 나는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전방에 갔었다. 망원경을 통해 북한군을 바라보았고, 그때 우리들은 이 북한군이 언제 남한을 칠 지 모른다는 '교육 아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북한 쪽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일본에 살던 동포들이 저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받는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 북송선을 탔다. 그들은 조만간 남북통일이 되어 곧 만난다는 기대를 가지고 북으로 갔던 것이다. 북으로 간 사람들이 분단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반공주의자가 아니었다면 나도 북한에 갔을 지 모른다. 또, 경제적으로 가난했다면 북으로 갔을 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민족통일은 선진조국의 건설을 바라는 게 아니다. 식민지 시대이래 분열된 자신의 여러 모습들을 통일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민족통일은 각기 떨어져 있는 자신의 분신을 자유롭게 만나고, 교류하는 과정 속에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북한, 중국 등 전세계에 퍼져있는 우리 민족들이 서로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해외동포법도 마찬가지다. 조선적을 가지고 있는 10만 명의 해외동포들은 이 법의 대상자가 아니다. 이 법의 목적은 재미동포들의 투자를 촉진하는 데 있다고 들었다. 이 법은 남북대립 상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세력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재일동포들은 한국, 일본, 북한 모두에서 단 한번도 투표해본 일이 없다"
- 현재 해외동포들은 선거권이 없다. 따라서 참정권이 금지돼 있다고 봐야 하는데,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놀라운 일이겠지만, 재일 동포들은 한국, 일본, 북한 모두에 단 한번도 투표해본 일이 없다. 우리는 투표권이 없다. 본국에 대한 투표권과 일본 정치에 대한 참정권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우선, 국내문제를 먼저 말하겠다. 대통령선거와 국민투표의 경우에는 반드시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정부가 어떤 정부냐는 재외동포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정부가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과거사에 대해 애매하게 넘어갔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당시 상황과 지금의 정치의식은 굉장히 다르다. 지금의 정치의식은 매우 성장해 있다. 당시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재일 동포들의 참정권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문제다."
- 재일동포들은 국내선거에 관심없다는 주장이 있다. "국내에서는 재일 동포들이 이기적이다, 정치의식이 없다, 무관심하다고 비판하겠지만, 그것도 이유가 있다. 정치행위를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한일협정 체결당시 일본사회도 매우 시끄러웠다. 그때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똑같이 평등선거를 치렀다면 우리는 그 협정에 반대했을 것이다. 한일협정은 결코 재일 조선인에게 유리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일본에서는 어떤가. "일본의 경우,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만 투표권을 준다. 헌법상으로는 국적에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다. 주민세를 지불하는 사람은 투표권은 준다는 규정이 있다. 물론 나는 주민세를 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투표권이 없다.
오사카의 이쿠노구의 경우에는 재일조선인이 1/4이다. 이들이 이 지역 주민세의 1/4을 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지방자치법에 따라 투표할 수 없었다. 최근 이런 기묘한 상황을 인식한 사람들이 외국인 중 주민세를 지불하는 사람들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운동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일본의 보수언론은 이 움직임을 반대하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투표하고 싶으면 일본국적으로 귀화하라는 식으로 나온다. 과거 식민지배와 관련해 역사적 청산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더러 귀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굴복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국적 있는 사람들에게만 참정권을 주는 것은 '국민주의'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한국정부도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보호한다. 한국정부의 '국민주의'도 일본의 '국민주의' 흐름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재일 동포인 정태균 코마자와대학 교수는 일본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재일 조선인들에게 주민자치권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다닌다. 정태균 교수는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왜 일본인이 되지 않느냐, 왜 참정권을 주장하느냐고 말하고 있다.
정태균 교수의 말은 일본 우익들이 좋아하는 발언이다. 더군다나 일본사회에 살고 있는 소수자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재일 조선인의 입장에서 이 말은 매우 힘 빠지는 발언이다."
"진상규명 없이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
|
▲ 서경식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새 책 <소년의 눈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디아스포라를 동정하기보다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가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
|
ⓒ2004 오마이뉴스 권우성 |
- 현재 과거사 청산 논의가 진행중이다. 이 논의의 방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화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 것에 반대한다. 도서출판 삼인에서 나온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의 공동저자 다카하시 테츠야 선생에 대해 말하겠다. 다카하시 선생은 화해, 진상규명, 용서 이 세 가지에 대해 말했다. 진상규명 없이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사회의 경우, 화해와 용서라는 단어가 진상규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진상규명은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찾기 위한 기본인데도 마치 진상규명이 용서와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양 인식되고 있다.
원리적으로 보면, 죄가 있어서 용서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재일 조선인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춰보자면 식민지배가 있었는지, 누가 식민지배를 했는지, 누군지 알아야 죄를 물을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왜 식민지배를 했는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용서와 화해를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화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그 이유는 철저하게 해결하지 못한 애매한 역사가 이어져왔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자꾸 화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왜 일어났는지, 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사하거나 사과를 받지 못했다.
피해자도 가해자에 대해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진상규명, 진실을 밝혀내는 게 필요하다. 가능한 한 섬세하게 조사하고 진상규명의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없다. 과거사 청산은 애매한 화해를 위한 게 아니다."
- <나의 서양미술순례기>는 한국독자들에게 널리 읽힌 책이다. 이 책에 이어 <소년의 눈물>이라는 새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과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인터뷰한 내용들의 배경과 설명이 이 작품 속에 들어있다. 1960년대는 일본이나 조국이나 민족의 분기점이었다. 분기점을 사춘기로 보내면서 일본사회의 두터운 장벽에 고립됐고, 나는 조국과 조국의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이 책의 특징은 소수인 재일 조선인이 다수인 일본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데 강조점을 두었다."
- 한국독자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한국독자들이 '디아스포라' 존재들에 대해 동정하거나 연민의 정을 느끼기보다 그들의 사고방식, 관점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평화, 또 동북아 평화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탈리아계의 유태인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을 강력히 비판했었다. 당시 프리모 레비는 유대민족의 역사 중에 있는 '디아스포라'적 전통을 상실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되어 레바논을 침공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나는 정체성이라는 말도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국가와 연결시키면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자기의 식구가 누구냐, 이웃이 누구냐, 이런 것을 되풀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갖지 않으면 우리 같은 '디아스포라'는 하루도 못 살 것이다.
유태인은 유럽에서 넓은 시야와 관용의 정신을 갖고 살고 있다. 우리도 국가를 통해서만 여러 세상을 보는 것을 넘어야 한다. 프리모 레비는 아니지만 한국의 동포들도 재일 조선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오마이뉴스
어느 재일조선인의 우울한 독서 편력 |
|
[두부독감 27] 일제와 한국 독재정권에 할킨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 |
|
두부
|
|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 - 에리히 케스트너 독서에 파묻힌 소년 1970년대 말, 영어의 몸인 서준식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저자에게 보냈을 때, 저자는 자신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다음과 같이 독서 행위를 정의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自己硏鑽)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
▲저자 서경식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새겨진 그 무엇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의 모습과 한국 독재정권의 가혹함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 돌베개, 2004 | ‘재일조선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만 했던 저자의 독서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일하게 혼자만 재일조선인 학생으로 다닌 중학교 영어 시간에 “I am a Japanese”라는 문장을 배웠을 때 저자가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머뭇거려야만 했던 것은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신과 문화를 홀로 등에 짊어진 채” 살아간다는 것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저자의 책 읽기는 일본 내에서 소수자라는 아픔과 슬픔을 상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저자는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라는 관념이 싹트게 된 것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과 ‘사춘기 교양 콤플렉스’에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독서 행위는 여느 어린 아이와는 사뭇 달랐다. ‘캠핑 따위보다는 집에서 책 읽기를 더 좋아했’고,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때에는 꾀병을 부려 집에서 네댓 권의 책을 읽기도 했다. 더군다나 야구 시합에서 정규멤버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이제 집에 돌아가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기까지 했다. 어린 그에게 안중근의 저 유명한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힌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라는 말은 평생의 화두가 되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호명한 작가와 작품을 한 번 일별해 보자. 저자의 독서 인생 최초의 책다운 책인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 쥘 베른의 『십오 소년 표류기』, 엘리자베스 루이스의 『양쯔강 소년』,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 다자이 오사무의 「추억」, 『현대시인선집』, 토마스 만의 『만의 산』, 루쉰의 「고향」ㆍ「아Q정전」「광인일기」,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등 어린 나이에 읽기에는 버거운 책들로 장식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교실』의 주인공 마르틴 타라가 내뱉은 “절대로 울지 말자”는 말을 되뇌이며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추억」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능숙하게” 그려내 오랫 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것은 소설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끝없는 논쟁 뒤 /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숟갈을 홀짝인다 / 혀끝을 만지는 그 쌉싸름한 맛 / 나는 알겠네, 테러리스트의 / 슬프고도 애처로운 그 마음을.” 이것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코코아 한 숟갈」이라는 시인데, 여기에서 ‘테러리스트’는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또한 언젠가 꼭 정복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읽지 못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그래서 저자는 “나에게 『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지목한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문제만이 아닌 일본 사회에도 날카로운 눈을 벼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모국어로서의 조선어
|
▲서승은 ‘재담가’로, 서준식은 ‘탁월한 운동능력의 소유자’로 저자는 두 형을 기억한다(앞쪽에서부터 저자인 서경식, 셋째 형 서준식, 둘째 형 서승) © 돌베개, 2004 | 1971년 박정희 정권은 4ㆍ27 대선을 열흘 앞두고 서승ㆍ서준식 형제를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그들이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했다고 하지만, 날조된 거짓말이었다. 이 사건으로 서승은 무기형을,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서승은 고통스러운 고문을 참지 못해 기름을 붓고 분신을 기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둘째 형인 서승은 대학에 갓 입학한 후 민단계 재일한국인 학생단체에 가입하여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동생에게 이야기보따리이자 재담가였다. 저자는 그의 셋째 형인 서준식을 “애초부터 탁월한 운동능력의 소유자”이자 “전도유망한 기계체조 선수”로 기억한다. 그런데 서준식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운동을 그만두고 ‘조선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들의 영향으로 저자는 자기 자신이 지리수업 시간에 일본의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논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일본인 아이가 일본은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하자, 그 아이를 루쉰의 「광인일기」에 나오는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일본과 서양의 책들만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독서에는 허남기 시인의 『조선의 겨울 이야기』와 김소운이 편역한 『조선시집』도 들어 있었다. 허나 ‘모국어 상실자’인 저자가 조선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조선인이었지만 조선어를 전혀 몰랐던 저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민족학급’ 시간에 조선어를 배웠고,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한국 이름을 썼다.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선포(?)한 셈이다.
|
▲‘모국어 상실자’인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 민족학급 시간에 조선어를 배울 수 있었다(왼쪽에서 두 번째 줄 세 번째 아이가 저자 서경식이다). © 돌베개, 2004 | 당시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만사가 공정하지 못한 것, 조잡한 것, 어딘지 뒤끝이 씁쓸한 것, 볼썽사나운 그 무엇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그만큼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저자는 대한민국보다 ‘조선’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국가명일 뿐, 재일교포를 아우르면서 민족 전체를 총칭할 경우에는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해야만 하는 저자의 비애와 고통은 누구도 추량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서경식, 이목 옮김, 『소년의 눈물』, 돌베개, 2004년)은 단순한 독서 에세이가 아니다. 전경에는 어린 시절 자신을 지배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와 후경에는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암울한 어린 시절의 풍경화를 그려 놓고 있다. 이 그림 속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의 모습과 한국의 독재정권의 모습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고, 독재정권의 공작으로 두 형을 모진 고문과 고통 속에 남겨둘 수밖에는 없었던 동생의 애틋한 사랑도 배태되어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 겪은 경험들은 이후 그의 삶을 온이로 바뀌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부여한다. “좋건 싫건 어린 시절 각인되어버린 그 무엇을 짊어진 채, 사람들은 수많은 괴로움과 얼마 되지 않는 잗다란 기쁨으로 수놓은, 인생이라는 긴긴 시간을 인내하며 살아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인생을 인내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아로새겨진 그 무엇이다.” | |
-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8389§ion=section4 |
-----------------------------------------------------------------------------
지행네트워크
ㄴㄴ
풀뿌리 아카이브 :: 지행 네트워크 |
|
'지행네크워크"라.......
이명원은 몇년전 시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우리나라 실증주의 비평의 원로라 할 수 있는
김윤식의 작품이 일본의 저작들을 베껴냈다고 문제를 제기했지요.
시립대 국문학과의 그 잘난 제자들에 의해 배척되었고......
그 이후 온라인 대학에서 해직되었고.......
지식인들의 가장 큰 문제인 실천이 부족한 점을 극복하고자 만든 모임이라
기대됩니다.
2007.8.27.
포스트386 연구자 주축 ‘지행(知行) 네트워크’ |
입력: 2007년 07월 30일 17:19:31 |
|
30일 오후 서울 창전동에 위치한 66㎡(20평) 남짓한 크기의 오래 된 사무실에 작은 현판 하나가 내걸렸다. ‘지행(知行) 네트워크’. 뜻을 짐작해 봤다. ‘앎과 함이 어우러진 연대’쯤 되지 않을까.
|
이명원씨, 임헌영 민 소장, 하승우·오창은씨(왼쪽부터)가 30일 ‘지행네트워크’의 현판식을 가진 뒤 환하게 웃고 있다. <박재찬기자> | ‘지행 네트워크’는 이른바 ‘포스트 386세대’가 주축이 되어 만든 대안 연구공간이다. 이 공간을 마련한 주인공들은 30대 중반을 막 지난 소장 연구자들인 오창은 중앙대 강사(국문학), 이명원 전 서울디지털대 교수(국문학), 하승우 한양대 연구교수(정치학).
|
|
세 사람은 모두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비정규직 교수’다. 이들은 민주화 이후 대학 생활을 시작한 89~90학번으로 현실 사회주의 붕괴를 기점으로 젊은 연구자들의 관심이 ‘거대담론’에서 ‘문화연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었던 세대다. 2001년 강경대 열사 10주기 때 만나 처음 알게 된 이들은 아직 대학 내에 남아있던 ‘반역의 피’를 나눠받은 끝물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2001년 이후 ‘대학원 운동’을 고민했던 잡지 ‘모색’과 젊은 비평가들의 대안적 잡지 ‘비평과 전망’ 등의 활동을 함께 했다. 오창은씨는 당시 함께 했던 동료들이 상당수 해외 유학을 떠나거나 공부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대학 안에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추구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그러다가 네트워크 개념의 새로운 연구공간을 만들어보자는 데 의기투합한 거죠.”
이명원씨는 386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의 단절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1970년 전후에 태어난 또래 연구집단들이 전공을 뛰어넘어 모이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선배들 세대는 ‘학단협 운동’이다 뭐다 해서 많이 뭉치곤 했지만, 후배 세대는 해외 유학을 갔다오고 나면 더 이상 소통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있어요. 여기저기 흩어진 마이너리티로, 섬처럼 떠있죠.”
그래서 이들은 이 공간이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다양한 전공을 가진 젊은 연구자들이 기존 대학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들의 다짐에서 기존 지식사회, 그것도 대안공간이라고 하는 지식공동체들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묻어난다.
“대학 밖에는 ‘수유+너머’나 ‘다중네트워크’, ‘과천연구실’을 비롯해 많은 대안 연구공간이 이미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대부분 ‘지적 페티시즘’(지식에 대한 숭배)에 빠져 아카데미와 별 차이가 없는 이론적 ‘스펙’을 갖고 있습니다. 관성에 빠진 거죠.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인텔리겐차’를 얘기합니다. 전문성과 더불어 현장 개입을 해나갈 것입니다. 학술진흥재단에 손 벌리지도 않을 것입니다.”(이명원)
“이름을 지행(지식+행동)으로 정한 이유는 제도 속에서 싸우는 것과 더불어 현장 활동가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지’와 ‘행’ 중에도 ‘행’에 방점이 두어졌으면 합니다. 현장에서 떠도는 얘기들을 이론화해서 대안을 만드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도 많이 마련할 것입니다.”(하승우)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은 김종철 녹색평론 대표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다. 김대표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이들과 만나 조언해주고 있으며, 임소장은 이날 개소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지행 네트워크는 첫 활동으로 오는 9월부터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생태자치 특강’을 마련할 예정이다. 김대표와 임소장, 소설가 공선옥씨 등이 강사로 나올 예정이다. 강의 외에도 김원 서강대 연구교수, 김윤철 전 민노당 진보정치연구소 연구실장 등이 함께 하는 정치학 세미나와 젊은 비평가들의 연구모임인 ‘포럼X’의 세미나도 이곳에서 열린다. ‘자본론 세미나팀’ 등 자체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연구 소모임 쪽에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의도 들어온 상태다.
세 사람에게 이 공간이 더욱 소중한 것은 아무에게도 손 안 벌리고 이들이 각자 돈을 갹출해 어렵게 마련했기 때문이다.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60만원. 이들 말대로 “없는 형편에 아주 무리했다.” 이 공간은 직전까지 버스 운수회사 직원들이 숙소로 사용해 ‘땀내 풀풀 나는’ 곳이다. 지난 몇 주간 아무리 때를 빼고 광을 내도 없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이 공간은 계속 그럴지도 모르겠다. 또 그러기를 소망한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
바야흐로 완연한 여름을 맞이해서 제가 일을 하나 질렀습니다. 오처장님이나 몇몇 분들은 이미 들으셨겠지만, 제가 마음이 맞는 인문학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공간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연구공간의 이름은 지행합일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지행'입니다. 몇몇 사람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세미나 공간이 필요한 사람, 새로운 연구공간이 필요한 연구자, 함께 공부하며 새로운 인문학의 방향을 정립할 사람들이 만나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트워크라는 이름을 붙였구요. 현재 저와 문학평론가이자 너무 이른 나이에 해직교수가 된 서울디지털대 교수였던 이명원씨와, 실천문학, 문화사회연구소에서 활동하는 문학평론가 오창은씨가 모였습니다. 내년 1월이면 출판과 관련된 분이 한분 결합하실 예정이구요. 이렇게 일단 모여서 작은 발걸음을 내딛기로 했습니다.
이명원씨는 의정부교도소와 동대문정보과학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이미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런 프로그램들을 새로이 기획해서 풀뿌리운동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볼까 생각합니다.
30일날이 개소식인데, 혹 시간 나시는 분 계시면 오셔요. 오후 6시에 6호선 광층창 역 4번 출구로 나오셔서 전화 주시면 5분 안에 도착합니다.
참, 그리고 과천의 명물인 돼지머리를 빌릴 수 있을까요? 저희도 워낙 가난한지라 뭔가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 매개가 필요해서요.ㅎㅎ
레디앙]"공부 안하고 딴 생각 많은 이들 환영"
Posted on 2007/08/25 15:50 |
|
|
|
|
|
“공부 안하고 딴 생각 많은 이들 환영” |
[토요기획-인터뷰] ‘지행 네트워크’
"지식인 운동 다시 필요" |
3층 건물의 3층에 자리 잡은 ‘지행(知行) 네트워크’는 8월 불볕을 받아 그대로 찜질방이었다. 하지만 오창은(실천문학 편집위원), 이명원(민족문학연구소 연구원), 하승우(한양대 연구교수)의 면면을 보아하니 그 찜질방에서 몇 년은 족히 버틸 인사들이다. 지난 달 문을 연 연구공간 ‘지행 네트워크’의 세 사람을 만나봤다.
|
|
|
▲ 사진 왼쪽부터 하승우, 오창은, 이명원씨. |
|
도대체 뭐하는 뎁니까?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그건 오창은 대표가 말씀드릴게요. 대표, 오늘 정했어요.”
“인터뷰용 ‘땜빵’ 대표죠?” “이럴 경우 대비해서, 돌아가면서 대표 역할이 필요한 거 같아서요.”
“말 그대로 연구공간이죠. 물론 저희 다 에너지가 넘쳐서 그냥 연구공간에 머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희들 모여서 공부하고, 세미나할 공간 필요한 사람들한테 빌려주고, 아직 강의할만한 정도는 안 되지만 나중에는 강의도 하려고요.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연계도 하려 해요. 일에 치이다 보니 자기개발 같은 걸 엄두도 못 내는데, 정책생산 능력이라든가 여러 자기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활동가들과 함께 운영하고 싶어요.”
오창은의 설명에 이명원이 덧붙인다.
“지식인운동이 다시 필요한 시기라고 봐요. 시민운동은 현실을 추수하다 보니 즉자적일 수밖에 없고, 대학은 ‘학문’이라는 데 갇혀 있죠. 저희는 시민운동 현장과 대학 공간이라는 양자를 지양하는 지식 생산의 현장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대학 바깥에서 살아 생동하는 지식공간을 만들어 보려는 거예요.”
대학 바깥에서 생동하는 지식 공간
오창은과 이명원의 말에서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몇 번인가 반복된다. 그렇다면 노동조합 운동이나 진보정당 운동과는 놀지 않겠다는 건가? 하승우가 '변명'한다.
“참여연대, 경실련, 희망제작소 같은 데하고 그다지 친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단체들끼리도 서로 안 친하고. 같이 일하지 않으니까 친해질 일이 없는 거지요. ‘지행’이 이런 단체들끼리 회의도 같이 하고 소통하는 장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는 주로 시민단체들하고 교류가 있었지만, 노조나 민중운동 단체를 배제하려고 그랬던 건 아니예요. 지난 8일에는 이랜드 투쟁에도 참여했어요. 앞으로는 ‘몸으로 움직이는 분들’과 많은 기회를 만들고 싶어요.”
“비슷한 개념, 연구공간으로 ‘수유 +너머’ 같은 데가 있잖아요?”
“‘지행’ 만들 때 ‘수유 + 너머’ 같은 곳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기존 연구집단들에 대해서는 조금 문제의식이 있기도 해요. 지식 생산에는 대단히 충실하지만, 대학과 무엇이 다른지, 변종 대학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는 거 같아요. 저희는 지적 결론과 행동의 일치를 지향하려 해서 ‘지행(知行)’이지요.”
지행, 지적 결론과 행동의 일치
그렇다면 ‘지행’이 하려는 실천이나 행동은 무엇일까? 연구집단의 실천이나 행동이 무엇일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명원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제 시작인데, 구체적으로 무얼 실천할지를 예단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어떤 단체든, 조직이든 그 정체성은 구성돼가는 거잖아요. 우리도 이렇게 시작해서 점차 정체성이 구성되겠죠. ‘다시 지식인을 말한다’는 세미나를 내년 봄께까지 진행하려 해요.
근대 전환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지식인, 현장 개입적 지식의 구성 방식과 존립 방식, 가치 지향점 같은 걸 공부할 것이고, 그 속에서 ‘지행’의 실천 과제나 방식도 나타날 테죠.”
이명원은 쫓겨난 해직교수고, 오창은과 하승우는 날품팔이 교수다. 셋 모두 대학 강의를 병행하면서 ‘지행’ 일을 할 심산이지만, 대학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대학 일은 계속 해야죠. 대학을 논의로 하거나 절연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해요. 대학 안과 밖이 같이 변해야 올바른 학문을 성취할 수 있겠죠. 저는 대학 안에서 제자 키우는 것과 대학 밖에서 문학 평론하는 일을 병행할 계획이예요.
제 인생에서도 좋은 선생님들 기억이 있어요. 선생은 학생들의 인생 전환점에서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고, 역할 모델이죠. 이런 좋은 선생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유로워지고 싶어 여기에 왔다
이런 이명원의 생각에 오창은은 조금 다른 속내를 내비치고, 하승우는 더 과감한 말을 한다.
“강의 하다 보면 대학이 정한 틀에 따라 재생산에 동원된다는 느낌이나 환멸이 들 때가 많아요. 처음에는 학생들과 함께 대학을 바꿔보겠다는 뜻을 품었었는데, 어렵더라고요.”
“저는, 제가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지행’에 왔어요. 대학에 있으면 갇히는 거 같아요. 뭘 하려면 규격에 맞춘 논문 써야 하고, 맘에 안 맞는 학회에도 들어가야 하고, 이런 거에 갇히기 싫어요.
예전에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지금은 대개 직장에 다니잖아요. 대학에서는 직장인들을 못 만나요. ‘지행’이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무실이든 조직이든 뭘 만든다는 건, 돈이 든다는 말이고, 딱히 돈 나올 구멍이 없다면 제 살 깎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직은 처음이어서인지, 워낙 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리 살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인지, 셋은 한목소리로 그런 걱정을 불식시킨다.
“저희는 세미나 공간 사용료 같은 것 안 받을 겁니다. 수익사업이라는 것 때문에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조직운영비 벌려 불필요한 사업하는 경우도 많이 봤고. 그러지 말자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자력갱생할 겁니다. 저희들이 대학, 사회단체, 기업, 교도소 같은 데서 강의하며 버는 돈 갹출하고, 시민 대상 강의 프로그램도 개설하려고요.”
우리에게 중심은 없다
한국에서 지식인이 있을 곳은 대학이나 정부와 기업의 연구소 뿐이다.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야 수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들의 앞에 놓인 운명은 세상과 세월에 풍화되는 것 뿐이다. 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라면 대학이나 연구소 말고도, 정당, 사회단체, 노동조합이 지식인을 끌어안고, 그런 싱크탱크에서 나오는 담론이 대학을 압도하는 경우도 간혹 보게 되겠지만, 한국에서 조만간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지행’ 같은 산장(山莊)에서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산장의 빨치산들은 언제나 정규군보다 사기가 높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행’에게 의기충천하다거나 하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단지 길을 찾고 싶고, 그래서 삐딱하게 비켜 서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중심이 없습니다. 조직 정체성이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그에 따라 흐르고 싶어요. 공부 안 하고 딴 생각 많은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
| | | |
1. 오프라인의 작은 반란
어느 젊은 문학평론가의 작은 반란이 사이버스페이스 한 구석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이명원이라는 청년이 문학평론계의 거두 김윤식 서울대 교수가 일본 평론가의 저술을 표절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진상은 이렇다. 대학원에서 문학비평을 연구하고 있던 이명원씨는 김윤식 교수가 <한국 근대소설사 연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텍스트 분석의 방법이나 논리 전개가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표절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 내용을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이란 논문으로 교내 학술지를 통해 발표한다.
여기서 잠시 필자가 이를 '반란'이라는 과격한 단어로 표현한 것에 주목해 달라. 사실 학계에서 아직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생이 교수에게, 그것도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에게 학문적 비판의 칼날을 들이민다는 것은 금기를 깨뜨리는 행위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인지 이명원씨는 자신의 논문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고뇌를 서술하고 있다.
"학문의 초입에 있는 사람이, 또한 비평계의 말석에 있는 사람이 우리 근대문학 연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선배학자를, 또 평단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현재에도 지침 없이 현장비평을 수행하고 있는 선배 비평가를 비판할 때,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이 동반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우리 사회처럼, 두드러지게 '장유유서'의 관행이 철저하게 준수되고 있는 곳에서, 이러한 작업은 자칫 '치기' 혹은 '객기'의 산물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우리 학계 및 비평계에 건전한 지성의 통풍이 될 수 있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혹 그러한 가능성이 절망적일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지라도, 누군가는 묵묵히 이 일을 해나갔을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그의 비평에 대한 김윤식 교수의 반응도 들어보자.
"지적한 대로 가라타니의 글 가운데 일부가 내 글에 그대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내 실수입니다. 젊은 학인 이명원씨의, 나를 비판하는 패기를 높이 평가합니다. 앞선 세대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학문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의 적합성과 논지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 공부와 글쓰기가 일본문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 고백들은 이 점과 관련해서 이해될 터입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담백하다. 젊은 후배 비평가의 신념에 찬 비평과 원로 비평가의 겸허한 자기 고백만 뚝 떼어놓고 보면 실로 아름다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집요한 공작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이명언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모교 교수들의 끊임없는 압력에 시달렸으며 온갖 불이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 모교 교수들은 김윤식 교수의 후배이자 제자들이다. 인내의 한계점에 이른 그는 학교에 자퇴원서를 제출하고 그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과 자신의 감회를 담은 글을 한 시사잡지를 통해 발표한다.
이후 사건의 무대는 사이버스페이스로 옮겨진다. 몇몇 온라인 신문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고 곧바로 토론게시판 곳곳에서 이 사건을 둘러싼 네티즌들의 열띤 의견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지식시장에 암암리에 형성되어 있는 카르텔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지식권력의 일상화된 비제도적인 횡포가 신랄하게 고발된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오프라인 세계에서 금기를 건드린 이단아로 간주되어 갖은 수모를 겪으며 기득권층과 고독하게 싸워야 했던 이명원씨는 이제 수많은 네티즌들을 우군으로 얻고 당당하게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2. 네트의 다윗과 골리앗
우리는 여기서 네트의 권력 이동을 실감한다. 이것은 앨빈 토플러가 말한 권력 이동과는 의미를 달리 한다. 앨빈 토플러는 자신의 저서 <권력이동>을 통해 "지식정보 사회에서는 지식이 곧 권력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원씨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정황들은 토플러의 저서에 새로운 명제를 하나 추가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바로 "네트에서는 진실이 곧 권력의 원천"이라는 명제이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이야기는 네트의 세계에선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다윗의 클릭 한방에 나가떨어진 수많은 골리앗들을 보아왔다. 소비자들에게 횡포를 일삼던 대기업이라는 골리앗은 안티 사이트에 모여든 다윗들에게 굴복했으며, 통신질서법이란 이름으로 네트를 통제하려던 국가권력이란 골리앗은 다수의 네티즌 다윗의 저항을 못이기고 퇴각하고 말았다. 거대 보수언론이란 골리앗도 키보드와 마우스로 무장한 시민 기자라는 다윗들의 게릴라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제 지식권력이라는 또 다른 골리앗이 '진실의 권력'으로 무장한 다윗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난관에 처해있는 것이다.
네트는 언제나 열린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뒷골목의 쉬쉬 거리는 밀담이나 은밀한 거래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 작은 몸짓이라도 네트를 매개하면 순식간에 거대한 함성과 힘찬 활력으로 증폭된다. 지식은 분명 권력의 원천이지만 그렇기에 네트라는 열린 공간에서는 진실에 기반한 지식만이 진정 그 힘을 얻을 수 있다. 오프라인 세계의 제도화된 권력은 네트라는 새로운 환경에서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
요즘은 사이버스페이스가 마치 자살사이트와 폭탄사이트 그리고 음란물만 난무한 아수라장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분명 사이버스페이스는 혼돈과 혼란, 즉 카오스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혼돈과 혼란 속에서도 규범과 원칙을 잡아 나가려는 네티즌들의 자율적인 의지와 노력들은 네트의 공간 어디를 가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세계의 권력구조가 자행하는 온갖 억압과 부조리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움직임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사이버스페이스가 대안의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월간 책과 인생, 2001. 3월호)
----------------------------------------------------------------------------------
|
|
[쟁점] 이명원·김윤식 사태로 본 학계 현실 |
師弟 카르텔 철폐…근대적 사제 관계 수립계기로 |
|
|
|
문학평론가 이명원(서울시립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중퇴)씨가 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사실을 밝힌 논문으로 학계가 파문에 휩싸이고 있다. 이 사태는 학계를 지배하는 서울대 패권주의에 대한논란으로 더욱 확장되고 있다. 이에 관해 문학평론가 구모룡 교수의 견해를 들어 본다.
화제가 되고 있는 ‘이명원-김윤식 사태’는 현금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문학계에 긍정적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 본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제도와 관행에 내재한 문제의 축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사태의 진전은 우리 학계와 사회가 피할 수 없이 거쳐가야 할 토론의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앞세우면서 먼저 이번 사태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들고자 한다.
첫째, 표절 시비. 이명원씨의 논문이 목표한 바가 김윤식 교수의 표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후기 김윤식의 일본 경도 현상(현해탄 컴플렉스)을 밝히는 데 있다는 점에서 표절 시비는 이씨의 의도와 무관하게 침소봉대된 현상임에 틀림이 없다. 아울러 이러한 이씨의 지적에 대하여 김교수가 ‘실수’를 인정함으로써 이씨의 논문은 실수의 무의식적 기제를 파헤쳤다는 점에서도 성공작으로 인정된 셈이므로 논문과 관련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다 알다시피 국문학자로서 김윤식 교수의 영향을 입지 않은 이 없으며 그를 알고 싶은 욕망에 한번쯤 시달리지 않은 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씨의 학문적 패기는 김윤식 교수에 대한 존경에 연원한다고 할 수도 있다. 김교수가 그의 패기와 용기를 인정한 것도 이씨가 품은 순수한 의도를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씨에서 발단된 표절 시비는 일로 확산되고 있다. 당연한 것이 표절이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님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씨의 논문은 김윤식 학문의 체계나 그 글쓰기 전반에 대한 연구의 시발에 불과한데, 과장된 표절시비가 이씨나 김교수의 생각과 무관하게 이들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쪽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둘째, 사제 카르텔과 서울대 패권주의 시비. 따지고 보면 이명원씨도 넓은 의미에서 김윤식교수의 제자에 속한다. 그것은 이씨의 선생이 김교수의 제자이기 때문인데 이는 전근대의 학맥 관계에 비출 때 그렇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전근대적 사제관계에 따른다면 이씨의 논문은 사문난적에 몰려 축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휘황한 근대의 태양 아래서 봉건적 사제관계의 퇴행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씨의 김윤식 비판을 들어 이씨의 서울대 출신 선생들이 제도적, 상징적 권력을 동원하여 이씨를 억압한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그들이 중재자의 역할을 맡지 않았을 것이라고 억측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결과는 그들이 이씨가 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자퇴라는 최악의 상황을 선택하도록 하였고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식을 죽였다는 오명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씨의 선생들은 똑똑한 제자를 포기한 것일까? 여기에 서울대주의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잠복해 있는데, 이것이 어떠한 합리적 비판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사제 관계의 형성도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알다시피 이씨의 선생들도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으로 알려진 비평가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알려진 지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씨와 더불어 김윤식이라는 큰 산을 넘는 힘겨운 작업을 계속할 수는 없었던 것인가. 이씨를 제자로 생각했다면 그들은 이씨를 억압하고 축출하기보다 그가 학문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명원-김윤식 사태는 한국 학계와 사회의 성격논쟁으로 비화하고 있는데 이는 이번 사태가 많은 과장을 포함하고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생산적인 귀결로 가는 과정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증거가 된다. 확실히 이번 사태는 신화나 금기는 해체되어야 할 학문의 적이며 합리적 비판과 토론이 학문을 발전시킬 유일한 장(場)의 작동 원리임을 확인하게 하였다. 어떤 점에서 이명원씨에 의해 제기된 김윤식 비판은 더 많은 이명원들의 보다 심도 있는 연구에 의해 종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존경과 권위는 어떠한 비판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나 억지로 봉합된 귄위는 그 어떤 불합리한 권력 못지 않게 쉽게, 빨리 훼손되고 해체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윤식 연구는 이 땅의 후속세대 국문학도들이 안고 있는 핵심 과제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란스런 출발에도 불구하고 이명원씨의 작업은 인정되어야 하고 그의 학문적 미래도 보장되어야 한다. 아울러 이번 사태와 더불어 봉건적 사제관계를 철폐하고 근대적 사제관계를 형성하는 학문 운동의 계기도 만들어져야 한다. 사제 카르텔은 비단 서울대만의 일은 아니다. 우리사회에서 어느 대학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로 하여금 늘 자신을 밟고 넘어설 것을 주문하는 위대한 스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김윤식교수가 그런 스승 가운데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곤경에 처했다. 그 원인의 처음은 그 자신에서 나왔고 그 다음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명원씨는 하나의 단서에 불과하다. 그런데 김윤식을 연구한 이명원씨도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곤경에 처해야 할 이유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씨에게 학문적 장래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전근대적 관계에 속박되어 있으면서 근대나 탈근대를 외치는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
-----------------------------------------------------------------------------------------
|
문학비평계의 태두(泰斗)로 불리는 김윤식 교수. 그는 최근 <한국현대문학비평사론>과 <초록빛 거짓말, 우리 소설의 정체>를 펴냄으로써 ‘저서 100권 발간’을 돌파했다. 지난 1973년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를 발간한 이후 27년 만에 이룩한 미증유의 업적이다.
그런데 “언어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내 앞에 소설이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 바 있는 이 백전노장의 문학비평가를 둘러싸고 표절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표절 문제 하나만으로 그의 학문적 성과 전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건이 있는 곳이라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그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기자의 운명인 걸 어쩌랴.
“한 젊은 문학평론가가 작성한 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이 중앙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에게 전달됐으나 묵살된 채 보도되지 않고 있다.”
기자가 최근 한 중진 문학평론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전해들은, 1년 전부터 문단에 떠돌고 있다는 ‘흉칙한 소문’의 내용이다. 며칠 후 기자는 문단의 다른 인사가 전하는 또 하나의 소문에 접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소설비평의 대가인 김윤식 교수가 선정되지 않은 것도 표절 논란과 무관치 않다.”
한 문학평론가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실린 글
마침 김윤식 교수(64)의 ‘100권 저술 돌파’ 소식이 각 신문 지면을 덮고 있던 상황이라 충격의 파장은 더욱 컸다. 그 두 개의 소문은 과연 사실일까. 기자는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추적에 나섰다.
단서는 세 가지로 좁혀졌다. (1)‘젊은 문학평론가’는 누구인가? (2)‘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은 존재하는가? (3)‘김 교수가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 이 소문과 관련이 있는가?
문단 인사들을 탐색한 끝에 하나의 실마리를 찾았다.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인 문학평론가 홍기돈씨의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 소문의 진상을 뒷받침하는 글이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인터넷을 연결하자 <현대시문학상 수상식에 다녀오다>라는 제목의 글이 떴다. 글을 올린 날짜는 지난 7월 2일. 다음과 같은 대목이 시선을 끌었다.
“어제는 현대시문학상(실제로는 현대시동인상이라고 함) 수상식이 있었다. …수상식장에는 유명한 시인들이 참 많이도 왔다. 축사는 김춘수 선생이 하셨는데 …(뒤풀이 술자리) 2차에서는 이모 선생 맞은편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거기서 오고 간 기억나는 내용은 대략 두 가지. 하나는 이명원에 대한 얘기였다. 이모 선생께 들은 내용인데, 이번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서 김윤식 교수가 배제된 이유가 이명원의 비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모 선생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에게 들었다고 출처를 밝히셨다.”(홍기돈씨의 요청으로 이모 선생’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사실 확인을 위해 홍기돈씨와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현대시동인상 수상식은 언제 있었나? “지난 7월 1일이었을 것이다. 장소는 대학로에 있는 한 건물이었다.”
―수상식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이명원, 고명철, 나 셋이서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비평과 전망> 창간호에 글을 써준 권혁웅씨가 올해의 수상자였기 때문에 축하해주려고 갔다. 권씨와는 문예지 <애지>에서 내가 그의 시를 언급했던 인연도 있었다.”
―문제의 발언을 듣게 된 경위는? “행사가 끝나고 술자리가 있었다. 1차에서는 <현대시학>에서 활동하는 시인들, 고려대 최동호 교수의 제자들과 마셨고, 2차에서는 이모 선생과 마셨다. 그때 이모 선생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이모 선생은 요즘 이명원의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모 선생과는 어떤 사이인가? “내가 문학평론가로 등단할 때 그분이 심사위원이셨다.”
―홈페이지에 쓴 내용은 사실인가? “그렇다.”
이로써 세 가지 단서 중 우선 단서(1)과 단서(3)의 진상은 밝혀졌다. (1)‘김윤식 교수 표절 폭로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젊은 문학평론가’의 이름은 이명원이다. (3)‘김윤식 교수가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 이명원의 비판과 관련이 있다.
‘폭로 문건’은 없고 ‘학술 논문’은 있다
그러나 단서(2) ‘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의 존재 여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물론 홍기돈씨의 진술을 통해, 문건의 존재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명원의 비판’과 ‘표절 폭로 문건’이 일치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명원’은 누구인가.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인 그는 서울시립대 국문학과 4학년 때인 지난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비평 당선과 <상상> 비평상 수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그는 최근 김현 논쟁, <창작과 비평> 논쟁 등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과 안티조선 논쟁에 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에 대한 기고·인터뷰 거부 지식인 1백54인 선언에도 문학계 인사로 서명한 바 있다.
지난 9월 1일 마포의 한 술집에서 기자는 이명원씨(30)를 만날 수 있었다. ‘표절 폭로 문건’ 소문의 진위에 대해 묻자,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당신이 ‘표절 폭로 문건’을 작성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 알려진 것이다. 단언컨대 ‘표절 폭로 문건’은 없다. 석사과정 때 김윤식 교수의 비평 작업을 검토하는 논문을 썼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논문을 쓴 것은 언제인가? “석사과정 3학기 때였으니까 아마 1997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대학원에선 매 학기마다 논문발표회가 있는데, 그때 쓴 논문 제목이 바로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스’ 비판>이었다. 학문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작성한 논문을 두고 ‘표절 폭로 문건’이라니 당치 않은 소리다.”
―일부에선 당신이 직접 문건을 언론사 기자들에게 돌렸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 그런 헛소문이 도는지 이해할 수 없다.”
―논문이 학교 외부로 나갔을 가능성은 없나? “서울시립대 국문학과는 매년 <전농어문연구>라는 논문집을 내는데, 내가 쓴 논문이 1999년 2월에 발간된 11집에 실렸다. 그때 내 논문만 따로 별쇄본을 만들어 다른 대학 교수 10여 분에게 돌린 적은 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학문적 평가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논문을 보냈던 교수들의 면면을 기억하는가? “내가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김윤식 교수를 비롯해, 오세영, 유종호, 정과리 교수 등이었다.”
―교수들로부터 반응은 없었나? “김윤식 교수가 제3자를 통해 한번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다른 분들로부터는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에세’ 담배 한 개비를 빼 든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불을 붙이더니 다시 말문을 이어갔다.
“사실은 한두 달쯤 지나고, 그러니까 작년 4∼5월경에 <중앙일보> 학술부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기사화하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반대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하게 소문이 퍼졌다니 황당할 따름이다.”
―김윤식 교수와 만났나? “나는 글을 통해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명원씨는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 싫다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가 된 논문을 제공해달라는 기자의 요청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조만간 김윤식을 비판한 이 논문을 포함해, 김 현, 백낙청, 임화 등에 대한 비판적 논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번역상의 표기 차이 빼면 명백한 ‘표절’
그러나 비록 인터뷰는 중단됐지만 성과는 있었다. 소문과 달리 ‘폭로 문건’이 아니라 ‘학술 논문’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이명원의 비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단서(2)의 진상도 밝혀졌다.
(2)‘김윤식 교수의 표절 폭로 문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김윤식 교수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논문은 존재한다.
이제 급선무는 문제의 논문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에야 그 논문이 실려 있는 <전농어문연구> 11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씨의 논문은 다른 일곱 개의 논문과 함께 실려 있었는데, 맨 뒤에서 두번째에 수록돼 있었다.
우선 논문 내용부터 정독했다. 이명원씨가 표절 문제를 언급한 것은 <한국근대소설사연구>. 이 책의 2장 <문학적 풍경의 발견>과 4장 <고백체 소설 형식의 기원>이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실제로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보니 <풍경의 발견> <내면의 발견> <고백이라는 제도> 등의 소제목이 보였다. 특히 <문학적 풍경의 발견> 중 일부 대목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아예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다.(여기서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김윤식의 <한국근대소설사연구>는 1986년, 가라타니 고진의 <日本近代文學の 起源>은 1980년에 각각 간행됐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 한국에 번역돼 들어온 것은 1997년 6월이고, 이명원씨가 논문을 작성한 시점은 1997년 10월이다. 이씨가 이 번역본을 정독하는 과정에서 ‘표절’이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국근대소설사연구>의 2장 <문학적 풍경의 발견>에 실린 내용부터 보자.(알기 쉽게 표절 부분에 번호를 붙였다)
(1)반 텐 베르크의 견해에 기대면, 서양에서 처음으로 풍경이 풍경으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이다. (2)거기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당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에서 소외당한 최초의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이 인간적인 것에서 독립되어 독자적 세계, 이른바 풍경화의 세계를 성취한 것, 그것이 근대성이고, 풍경에서 독립된 인간이 인물화의 세계를 이룩한 것, 그것이 근대성이다. (3)그러기에 ‘모나리자’라는 인물의 미소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물어서는 안 된다. (4)거기에는 이른바 ‘내면성’의 표현을 보아서는 안 된다. (5)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6)’모나리자’에는 개념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맨얼굴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7)따라서 그 맨얼굴은 ‘의미하는 것’(시니피에)으로서 존재한 것과 동시이자 동일한 것이다. (<한국근대소설사연구> 53∼54쪽)
다음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번역판에 실린 내용이다. (1)판 덴 베르크의 생각에 따르면 서구에서 최초로 풍경이 풍경으로서 그려진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이며 (2)그곳에는 풍경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인간과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된 최초의 풍경이 존재한다. (3)그렇지만 모나리자라는 인물의 미소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4)거기에 ‘내면성’의 표현을 보아서는 안 된다. (5)아마 사태는 그 역일 것이다. (6)>모나리자>에는 개념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맨얼굴이 처음으로 표현되었다. (7)그렇기 때문에 그 맨얼굴은 ‘의미하는 것’으로서 내면적인 무엇인가를 지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내면’이 거기에 표현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노출된 맨얼굴이 ‘내면’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전도는 풍경이 형상으로부터 해방되고 ‘순수한 풍경’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며 사실상 같은 것이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84쪽)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개의 내용은 번역상의 표기 차이를 빼면 아예 똑같다. 대충 비교해보기만 해도 거의 같은 부분이 무려 일곱 군데나 된다. 물론 김윤식 교수가 인용 표시를 했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을 구해 직접 확인해본 결과 인용 표시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표절’임에 분명했다.
김윤식 교수의 ‘독백’과 이명원씨의 ‘고뇌’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외국 이론의 ‘차용’이라는 수준을 넘어서 ‘표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가라타니 고진의 ‘차용’에 대한 지적은 간헐적으로 있어왔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들이 최근 몇 년 사이 집중 번역되면서, 김윤식 교수가 평소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인 것처럼 주장해온 것들이 사실은 가라타니 고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가라타니 고진의 학문적 오류마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했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를 발간한 김영건 서강대 강사의 비판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자연주의철학’으로 학위를 취득한 그는 김윤식 교수가 철저하게 동의한 가라타니 고진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에 오류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관련 김윤식 교수는 <문예중앙> 2000년 여름호에 의미심장한 칼럼을 썼다. 자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쓴 이 글에서 자신의 사상적, 학문적 텃밭이 일본이었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기자는 이 칼럼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 주목했다.
“고바야시 히데오, 요시모토 다카키,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미우라 마사시 등의 글을 읽고 배운 것이 많지만, 내겐 외국문학인지라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만일 이런 범주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 <소세키와 그의 시대>이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쓸 때 내 머리 속엔 <소세키와 그의 시대>가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나 회고된다.”
자신의 저술 <이광수와 그의 시대>의 작명이 에토 준의 <소세키와 그의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아울러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등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일본 학자들의 이름도 털어놓았다. 그러나 “내겐 외국문학인지라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더 이상 솔직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가라타니 고진을 명백하게 ‘표절’해놓고도 ‘참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한 것이다.
물론 이 표절 문제 하나만 가지고 김윤식 교수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학문적 업적 전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이명원씨의 논문을 몇 차례나 정독하며 우리 지식인 사회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씨가 작성한 논문의 행간(行間)과 주석(註釋)에 배어 있는 고뇌와 성찰이 가슴에 울려왔거니와, 그는 결론 부분의 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학문의 초입에 있는 사람이, 또한 비평계의 말석에 있는 사람이 우리 근대문학 연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선배학자를, 또 평단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현재에도 지침 없이 현장비평을 수행하고 있는 선배 비평가를 비판할 때,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이 동반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우리 사회처럼, 두드러지게 ‘장유유서’의 관행이 철저하게 준수되고 있는 곳에서, 이러한 작업은 자칫 ‘치기’ 혹은 ‘객기’의 산물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우리 학계 및 비평계에 건전한 지성의 통풍이 될 수 있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혹 그러한 가능성이 절망적일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지라도, 누군가는 묵묵히 이 일을 해나갔을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논문을 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독백에 다름 아니거니와, 이씨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문제는 김 교수가 행한 비평적 작업에 대한 가치평가는 그의 작업량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비평론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대개 맹목적인 찬사에 가까운 글이거나, 선배 비평가에 대한 과도한 예의에서 나온 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착잡해지기까지 한다. …기이한 것은 일본문학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았을 일문학자들이나 한국의 국문학자들은, 왜 단 한 번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언론은 과연 표절 사실 알고도 쉬쉬했나?
사실 ‘맹목적인 찬사’나 ‘과도한 예의’의 경향은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서 100권 돌파와 관련, “쉽사리 범접하기 힘든 거대한 봉우리”라는 표현을 동원해 칭송한 한 신문의 보도가 단적인 사례이다. 언론에게 ‘범접하기 힘든’ 성역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언론이 김 교수의 표절 사실을 알고도 쉬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은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 결국 김 교수 표절 논란은 우리 지식인 사회가 갖고 있는 일그러진 풍경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보여준 셈이다.
마지막 의혹. 자타가 공인하는 소설비평의 대가이자 잡지에 발표된 소설은 다 읽는다는 김윤식 교수가 왜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서 제외됐을까. 그는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의 단골 심사위원으로 활약해 왔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도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조선일보>가 김 교수를 심사위원으로 선정할 경우 안티조선에 서명까지 한 이명원의 논문이 언제라도 불거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문단 일각의 분석은 심증 차원을 넘어선다.
이와 관련, 기자는 김윤식 교수에게 4개항의 질의서를 보냈고, 김 교수는 9월 14일 답변서를 보내왔다. 다음은 ‘질문 요지’와 ‘답변 전문’이다.
(1) 표절 문제의 사실 여부에 대하여: “지적한 대로 가라타니의 글 가운데 일부가 내 글에 그대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내 실수입니다.”
(2) 이명원 비판의 적합성과 타당성에 대하여: “젊은 학인 이명원씨의, 나를 비판하는 패기를 높이 평가합니다. 앞선 세대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학문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의 적합성과 논지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3) <문예중앙>에서의 ‘고백’에 대하여: “내 공부와 글쓰기가 일본문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 고백들은 이 점과 관련해서 이해될 터입니다.”
(4)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하여: “그것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처음 듣는 일입니다.”
|
-------------------------------------------------------------------------------------
서울대 식민지를 고발한다.
/ 월간 『말』2000년 11월호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은 참담하다. 한 편의 논문이 내 삶과 인생과 학문에 대한 의욕을 그렇게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 일의 전말을 비교적 간략하고도 냉정하게 기술할 생각이다.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논리적 일관성을 상실하거나 '팩트'를 훼손시킬 위험성을 사전에 제거시켜 보자는 것이 그 의도임은 물론이다.
"내 인생과 학문적 의욕을 그렇게 순식간에 변화"시켰던 그 논문은 무엇일까? <타는 혀>(새움, 2000)에 수록된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내가 석사과정 2학기에 재학 중이던 1997년 10월에,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중간논문 발표회장에서 발표하였다.
지식인에게 표절은 똘레랑스의 대상 아니다
이 논문이 쓰여진 배경은 아주 간단하다. 비평가가 되길 꿈꾸던 학부 시절부터 나에게는 한 가지 소박한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김윤식 교수가 출간한 저작 전부를 읽어보겠다는 것이었다. 틈만 나면 나는 김윤식 교수의 저작을 읽었다. 사실 당시의 나에게는 소설보다도 그의 평론을 읽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어쩌면 당시의 나로서는 그의 평론집이나 연구서, 에세이집들을 읽어나가면서, 후일 나 자신이 기획하고 설계해나갈 비평가 혹은 학자로서의 꿈을 간접경험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독서목록 중에, 문제가 된 <한국 근대소설사 연구>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이 책에서 김 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논의들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풍경' '고백체' '언문일치' '내면'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의 근대문학을 종횡무진 분석하는 그의 태도가 낯설고도 매혹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 번역되기 전까지는, 그 낯섦과 매혹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역시 김윤식 교수는 매우 상상력이 풍부하고 노력하는 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여 나름의 학문에 매진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영풍문고에서 우연히 당시 막 번역되었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목차를 살펴보던 나는 그 즉시 매우 놀라운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이 책의 목차에 나와 있는 용어들이 김윤식 교수의 위의 책에서 내가 매혹과 낯섦 속에서 감탄한 용어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그 즉시 책을 구입해 이 두 권의 책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검토의 결과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김윤식 교수가 <한국 근대소설사 연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텍스트 분석의 방식이나 논리전개가 고진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특히 몇몇 부분은 고진의 논의를 완전히 베낀 것으로 드러났다. 논문에서는 그 일부만을 제시했지만, 정밀하게 대조해 보면 매우 많은 부분에서 그의 표절현상이 발견된다.
일부 사람들은 겨우 문장 일곱 군데를 베낀 것을 두고 표절이라 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하는 식의 동정론을 펴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문제는 내가 논문에서 적시한 것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표절의 양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혹여 타인의 저작으로부터 극히 일부만을 표절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변명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표절은 일종의 지적 사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윤식 교수의 연구업적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국문학 연구에 쏟은 혼신의 열정과 그 업적들을 마음 깊이 존중한다. 그러나 그런 그가 어떤 저작의 표절을 당연시했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식인에게 표절은 똘레랑스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 사기일 뿐이다. 때문에 이로 인한 책임은 철저하게 김윤식 교수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
논문 발표회장에서 벌어진 교수들의 난상토론
이제 이 논문을 발표하던 당시의 발표회장으로 시선을 옮겨보도록 하자.
나는 이 논문을 발표한 직후 벌어진 교수들의 난상토론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견해는 대략 세 가지로 갈렸다. 어학을 전공하는 한 젊은 교수는 이 논문을 읽은 직후 매우 흥분한 어조로, 국문학계의 원로교수가 이러한 문제를 범했다면 철저하게 학문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이른바 소수의견으로 그쳤다.
다음의 경우는 김윤식 교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분이 있었다. 그 교수는 당시 막 우리 대학에 부임했던 젊은 교수였는데, 나의 발표논문을 읽고는 매우 당황해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교수는 김윤식 교수를 마치 자신의 부친처럼 존경한다는 뜻을 "우리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거침없이 발성하곤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옹호론은 매우 단순하고 간략한 것이었다. 김윤식 교수가 너무 많은 책을 읽고 썼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인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마지막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비록 김윤식 교수가 표절을 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견해를 지니셨던 한 교수는 논문 발표회가 끝난 후 나를 개인적으로 불러 조심스럽게 조언하곤 했다. "이런 글은 나중에 교수가 된 다음에나 발표하는 것이 나을 것 같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석사 4학기가 되었고 <김현 문학비평 연구>라는 석사논문을 쓰는 데 집중하였다.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나는 이 논문의 한 장에서 김현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그게 그만 몇몇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겨우 석사논문을 쓰면서 당대 제 일급의 비평가를 비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김윤식 교수를 지나치게 흠모하던 젊은 교수는 그것을 나의 성격과 관련지어 이해하기도 해 난감했다. 내 성격 자체가 직선적이고 과격하기 때문에 그런 연구나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심사 대상 논문은 읽지도 않고, 목차나 읽으면서 이런저런 심사내용을 이야기하는 지적 불성실성이었다. 비판적 연구를 성격론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지적 불철저함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결국 나는 내 견해를 끝까지 관철시켰다. 논문 최종 제출 시한을 넘긴 끝에 수정하지 않고 논문을 제출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그 교수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했다. 일년 후 역시 석사논문을 제출했던 대학원 후배에게 그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명원이가 박사과정에 왜 떨어진 줄 알아. 선생 말에 복종하지 않고 제 고집만 세웠기 때문이다. 너도 그렇게 될래?" 이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후배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그것은 쉽게 말해 제도적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석사논문을 쓰면서 박사과정 시험을 보았지만, 나는 시험에서 탈락했다. 나는 그때 무척이나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혹 내가 교수들에게 찍힌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른바 '괘씸죄'가 작동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4명의 응시자 중 오직 나만이 탈락된 것은 기이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나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다.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나서 나는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을 과내 학술지인 <전농어문연구> 제10집에 게재했다. 이 학술지의 게재 자격이 석사학위자 이상인지라 당시 학과장이던 모 교수에게 조교가 게재여부를 상의한 끝에 실리게 된 것이다. 나는 논문이 나온 직후 별쇄본을 몇 분의 교수들에게 우송했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 학자들이 침묵한다면, 그것은 '침묵의 카르텔'이 아니냐 하는 항의가 그 속에는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침묵했고, 오히려 엉뚱한 데서 일이 벌어졌다.
대학원에서 '교수와 제자'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
어느 날 한 원로교수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셨다. 한 마디도 보태지 말고 빠짐없이 실토하라는 명령조의 말과 함께. 서울대 국문과의 모 교수를 만났는데, 그 논문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했다. 도대체 그 논문이 어떻게 논문집에 실릴 수 있었는가라는 사실도.
솔직히 대답했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나보다 하는 직감이 들었지만, 그저 한 개의 논문에 불과한 것이 뭐 그리 큰 파장을 일으키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일보 학술부 기자라는 분에게 전화가 왔다. 기사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내 석사 때의 지도교수와 상의했다. 지도교수의 말씀이 학술적 토론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사화는 좋지 않다는 견해였다.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실천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다른 교수들이 매우 격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문학 전공교수들이 모여 이 사태를 두고 회의를 거듭하였고, 각각의 교수들이 연구실로 나를 불러 이런저런 훈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 동안 나는 조교실로 출근하자마자 교수들의 훈계를 듣는 것을 하루일과로 삼곤 했다. 그 중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젊은 교수였다. 그는 하루에도 수 차례 나를 불러 호통을 치곤 했다. 그 대화의 내용 중 일부를 아직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자네가 기자들한테 논문을 돌렸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사실인가?"
"그런 일 없습니다."
"왜 그 따위 논문을 써서 제멋대로 발표하고 난린가?"
"그건 학술적 논의입니다. 비판적 문제제기라는 이야깁니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드나? 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너무 강한 거 아냐?"
"김윤식 교수가 선생님에겐 아버집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선생께서 누누이 주장하는 합리주의란 무엇입니까?"
"동양적 합리성이란 것도 있잖아."
"권위에 대한 복종이 동양적 합리성입니까? 저는 그런 것 믿지 않습니다."
"자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자네를 제도적으로 매장시킬 수밖에 없어."
"좋도록 하십시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 갈 길과 선생님의 갈 길은 다릅니다. 그것만 이해해 주십시오."
이런 대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교수와 하곤 하였다. 제도적 매장(!)이라는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대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시 조교였던 나는 무단결근을 하고, 거의 일주일 동안을 거리에서 떠돌았다. 선배들과 후배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이런 상황 앞에서 올바른 대안을 처방해 주지는 못했다.
대학원에서의 교수-제자 관계란 것이 워낙 특이한 형식의 주인-노예 관계인지라, 함부로 자신의 견해를 제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래는 막혀 있었고, 현재는 고통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대학을 떠나지 못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과 학과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왜 서울시립대 출신인 내가 서울시립대를 떠나야 하는가? 이건 뭐가 이상해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지도교수: "난 복종하지 않는 제자는 원치 않아"
그러던 중에 또 한번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우연히 학교 앞 전철역에서 지금은 동국대 영화과 박사과정으로 적을 옮긴 전임조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날 나는 종로의 술집에서 그 선배와 많은 술을 마시면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교수 중의 한 분이 자신을 불러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묻더란다. "혹시 너희 둘이 짜고 그 논문을 게재해서 교수 뒤통수 친 거 아니냐?" 물론 이 이야기는 절대 나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도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또 한번 실망했다. 교수-학생 관계가 아니라 이제 수사관-범죄자의 관계구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학교와 교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렸다. 물론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학과의 교수들은 모두가 서울대 출신이다. 전임교수들이 모두 서울대 출신이기 때문에 학과의 강사들 역시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서울대 식민지'라는 표현으로 정리하고 싶다. 이런 상황은 매우 많은 부분에서 이른바 '적서차별'의 현실을 만들어낸다.
가령 전공강의 배정에 있어서의 차별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관례화된 학과내규에 따르면 전공강의는 박사학위 소지자를 원칙으로 한다. 물론 이 원칙은 고무줄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1999년 1학기 어학 전공과목 중 한 과목의 강사가 부족했다. 당시 학내에는 해당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선배가 있었다. 난 당연히 그 선배가 강의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영 딴판이었다.
강사추천을 하라고 올라온 명단을 확인해 보니, 그 강의에 배정된 강사는 당시 서울대 국문과 조교로 박사과정을 막 수료한 사람이었다. 어이없어 한숨도 안나왔다. 원칙이라면 최소한의 공명정대함이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항의해보아야 우리만 손해라는 패배주의가 지배적이었다.
2000년 2학기의 전공강사 역시 마찬가지다. 어학과목의 전공담당 시간강사의 경우 대부분이 박사학위 소지자가 아니다. 물론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이게 소위 강사임용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제 멋대로의 고무줄 원칙.
에피소드 같은 나 자신의 경험도 이야기하자. 박사과정 지도교수인 한 교수가 간염으로 병원에 장기 입원했다. 그가 강의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어, 학과 교수의 동의를 거쳐 내가 해당 강좌를 대강(代講)하기로 하였다.
첫 강의를 끝내고 일주일 후 다시 강의에 들어가는데, 병원에서 잠시 퇴원한 지도교수가 나를 불렀다. 방금 끝난 교수회의 결과 내가 대강하기로 한 강좌를 다른 교수들이 번갈아 강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강의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었다. 한 원로교수가 그런 이야기를 하자 신속하게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입맛이 씁쓸했다. 자격미달이라니. 그러나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래보아야 나만 손해라는 것을 이미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논문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논문이 문제가 되고 나서,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한 교수는 내가 사무실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면, 한참동안 모니터를 쳐다보곤 "또 그런 식의 글을 쓸래. 그러지 않는다고 약속했지?"라고 말하곤 했다. 진중권이 '마이크로 파시즘'이라고 한 행태들이 일상 속에서 미세하게 관철되었다.
혼란 끝에 박사과정의 지도교수가 된 한 젊은 교수는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교수가 제자 눈치나 보고 살아야 되나? 난 복종하지 않는 제자는 원치 않아. 알겠나?" 나는 알겠다고 했다. 작은 일로 소모적인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로교수: "왜 그렇게 성급해? 널 '저격수'라 그러더라"
박사과정에 다니면서도 나는 사실 대학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은 없었다. 어차피 연구야 자신이 하는 것이고, 이런 상황이라면 박사논문을 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교직도 그만두었다. 사소한 일상까지 간섭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돈보다는 자유가 더욱 절실했다. 거리를 두고 내가 계획한 연구와 평론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비평과전망>을 출간하고, 한 편에서 <타는혀>와 같은 저서를 출간한 것은 이러한 결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출간하고 나서 나는 또 한번의 시련을 겪게 된다.
'말'에 김윤식 교수에 관련한 내 논문이 기사화되고 며칠 안 지나, 한 선배비평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선배비평가는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와 같은 잡지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편집회의 도중 나에 대한 험담을 나의 지도교수가 늘어놓더라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너무 걱정스러워서 전화를 해보았다고 한다. 물론 자신은 그러한 내용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괜한 일에 편들어주는 인상을 주었다가는 내 입장만 더욱 난처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타는혀>가 출간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직후에 박사과정 수업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예비군 훈련인 관계로 나는 수업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그 선배는 다소 곤혹스런 목소리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사태를 직감했다. 또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는.
선배는 한 원로교수가 자신을 따로 불러 해준 이야기를 내게 털어놨다. 물론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라는 이야기도 있었단다. 원로교수는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요즘 대학원생들의 분위기가 이상한데, 혹시 이명원이 다른 대학원생들과 집단적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명원이 학부생들을 충돌질해 학생과 교수 사이를 벌려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어이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나는 또 한번 절망했다.
그리고 10월 초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그 원로교수를 교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원로교수와 나는 2시간 정도를 교정에 앉아 이야기했다. 그 대화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왜 그렇게 성급해? 밖에서 너를 '저격수'라 그러더라. 그런 꼬리표를 달아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성급하다니요, 책은 낼 만한 거니까 낸 것입니다. '저격수'요? 그 사람들은 연구와 비평이 사격술인 줄 아나 보는군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너 때문에 학부 후배들까지 나쁜 영향 받는 거 아니냐? 너 왜 그러니?"
"저와 학부생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친구도 없구요."
교수는 나와 내 후배 평론가가 최근에 참여했던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을 폄하하고 있었다. 나는 '큰 저격수', 내 후배는 '꼬마 저격수'라고 표현할 정도로 뿌리깊은 반감이 있는 듯했다.
"네 지도교수도 너에게 무척이나 화가 나 있더라. 너 때문에 교수들 입장이 엉망이 되어버렸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 책은 학문적으로 토론할 사항이지, 그런 식의 잡음을 일으킬 일이 아닙니다."
"왜 본질적인 부분은 안 건드리고 변죽만 울리는 거냐?"
"비평사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논쟁사라는 것 모르십니까?"
이런 이야기를 2시간여에 걸쳐 하다보니 해가 다 저물었다. 나는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모교 교수들까지도 학문적 의욕을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는 분위기인 바에야 어디서도 희망은 찾을 수 없었다. 문제는 모두들 책은 읽어보지도 않고, 저널의 기사만을 읽고 나서 자신의 견해를 손쉽게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억압의 가능성' 포기하고 '자유의 고난' 선택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금 재학중인 대학원에 자퇴서를 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미안하게도 적어도 나 자신의 연구방향과 관련하여 내 모교에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든다. 학과 교수들과의 소모적인 싸움에도 지쳤다. 정당한 문제를 제기해도 이미 나는 '왕따'다. 금기를 건드린 자는 그 자신이 금기가 된다는 말을 폴 리쾨르는 <악의 상징>에서 적어놓은 바가 있다. 내가 바로 그 금기가 된 셈이다.
나는 이 현실이 비단 내가 소속되어 있는 대학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파생된 하위모순이다. 구조와 맞서 고립된 한 개인이 싸울 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희생양'의 딱지일 확률이 높다. 나 자신의 삶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연구나 비평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나와 내 모교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가능성의 일부를 자진 반납함으로써, 더 큰 자유를 찾고 싶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견해를 자유롭게 표출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조건--그것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구조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가슴 아픈 점은, 과연 우리의 대학원 사회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지식인들의 공동체인가 하는 점이다. 내가 다닌 대학의 학과만을 리트머스 시험지 삼아 말하자면, 그 기본적인 토대마저도 왜곡되어 있는 곳이 한국의 대학원 사회다.
나는 이런 구조를 변화시킬 프로그램을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평범한 대학원생일 뿐이다. 그러나 평범한 대학원생도 자기 인격의 엄숙함과 존엄성을 능동적으로 보존할 의무와 권리는 있다. 누구도 그것을 침해할 수는 없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다.
요즘 많이 읽혀지는 <체 게바라 평전>에는 생전에 그가 말했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 적혀 있다.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나는 이 말이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날카로운 파문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뜨거운 가을, 찬 겨울을 지나며 : 문학평론가 이명원
.............................................................................................................................. 이명원은 누구인가
정치적으로 왜곡된 의미가 아니라면 스스로를 '리버럴리스트'라고 말하는 이명원은 편견 없는 세상과 스스럼없는 소통이 가능한 문학을 꿈꾼다.
'김윤식 교수의 표절을 고발한 발칙한 젊은이'라는 아우라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이명원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논쟁들과 과감히 결별하기이다.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체 게바라의 말을 새기며 굽히지 않았던 학문적 소신을 담은 <타는 혀>를 시작으로 문학비평의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보여주었던 <해독>, 문학권력과 주례사 비평에 대한 비판, 등단제도와 문학상 논쟁 등을 정리한 <파문:2000년 전후 한국문학 논쟁의 풍경>, 그리고 산문집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등이 그가 쌓아놓은 저작 목록이다.
다니던 대학의 박사과정에서 스스로 자퇴했다가 학문적 망명처인 성균관대에서 지난 8월 박사학위까지 받은 이명원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아 오히려 빨리 대학교수가 될 수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말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3년동안 원고료로만 살 수 있는지 실험한 결과 재앙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 서울디지털대학에서 글쓰는 기술자보다 사상적으로 유연하고 소신 있는 작가를 길러내고 싶다는 교수로서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글쓴이 : 조성원 기자 출처 : 오마이뉴스 2005년 10월 25일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