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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제 개 요 |
문 장 개 요 |
1. 제 목 : 만화 2. 주제문 : 만화는 장점도 있지만, 어린이들에게는 해로움이 많다. 3. 개 요 1) 만화의 장점 (1) 표현의 참신함과 풍부한 공상 (2) 본격 동화의 간편한 소개 2) 만화의 단점 (1) 속된 표현 (2) 독서력과 사고력의 저하 3) 독서의 권장 (1) 독서하는 습관 (2) 독서를 통한 사고력의 신장 |
1. 제 목 : 텔레비젼은 어린이보다도 어른에게 해롭다. 2. 주제문 : 텔레비젼은 어린이보다도 어른에게 해롭다. 3. 개 요 1) 어린이의 시청률은 낮다. (1) 어린이는 시청 시간이 적다. (2)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적다. 2) 어른의 시청률이 높다. (1) 텔레비젼 앞에서 여가를 보낸다. (2) 타성으로 텔레비젼을 본다. 3) 텔레비젼은 어른에게 해롭다. (1) 어린이로부터 불신을 받는다. (2) 건강에 좋지 않다. |
이 두 종류의 개요는 각각 다음과 같은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가. 장점 : ‘화제개요’는 일목요연하여 사고 과정을 개괄할 수 있고, 간결하므로 그 작성이 능률적이다. ‘문장개요’는 다른 사람이 보아도 내용을 쉽게 알 수 있고, 많은 사간이 흐른 후에도 그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 단점 : ‘화제개요’는 그 내용을 다른 사람이 충분히 알수가 없고, 시일이 경과하면 작성자 자신도 내용을 잘 모르게 된다. ‘문장개요’는 일목요연하게 사고 과정을 알 수 없고, 그 작성이 비능률적이다. - 강윤호 외, 1992, 고등학교 작문, 동아출판사. 43-4쪽
먼저 위와 같은 분류법은 너무나 도식적이다. 문장개요와 화제개요가 딱히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제목(상위항목)은 화제개요식으로 하위 항목은 문장개요식으로 섞을 수도 있다.
1) 만화의 장점
(1) 표현이 참신하고 풍부한 공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2) 본격 동화를 간편하게 소개할 수 있다.
2) 만화의 단점
(1) 속되고 저질스런 표현이 많다.
(2) 독서력과 사고력이 저하된다.
3) 독서의 권장
(1)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급하다.
(2) 독서를 통하여 사고력을 신장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위와 같은 도식적 분류법은 학생들의 생산적인 글쓰기를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개요짜기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글쓰기에 편리한 방식대로 하면 된다. 그러므로 개요 방식의 장단점은 위 교과서 설명 방식대로 딱히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글의 성격, 글을 쓰게 된 상황, 글쓰는 이의 태도나 성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실제 시험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개요짜기 할 여유조차 없을 뿐 아니라 설사 있다 하더라도 교과서처럼 도식적으로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는 시험장에서는 단연 화제개요가 문장개요보다 상대적 우위의 장점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나는 학생들의 생산적인 글쓰기를 위해 전략적 개요짜기를 많이 권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쓸 시간이 없으면 헷갈리거나 기억하기 어려운 것만 일목요연하게 간단히 메모하는 방식이다. 먼저 논제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왜 이런 문제가 출제되었는가. 이는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 논제의 최소한의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서는 논제에 대해 자신의 논지를 적극적으로 설정하기 위한 장치이다. 다음으로는 그 논제가 왜 문제인가 좀더 폭넓게 생각해본다. 그런 다음에는 그런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며 또는 해결 방안이 설정될 것인지 관점과 방향을 설정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생각, 주장, 결론이 도출될 것이며 그러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어떠한 전제나 근거를 끌어들일 것인지를 따지면 된다.
논제
↓
왜 이런 문제를 출제했는가 → 출제 의도 파악
↓
이 논제가 왜 문제인가 → 문제제기
↓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관점과 방향 설정
↓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무엇인가 → 주장, 결론
↓
어떻게 논증할 것인가 → 근거 설정
↓
어떻게 구성하여 멋들어지게 표현할 것인가.
위와 같은 단계는 먼저 머리로만 생각한 개요짜기다. 실제 글쓰기를 위한 개요짜기는 구성 효과를 위해 재구성을 할 수 있다. 재구성할 때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틀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3단 구성은 논설문 구성의 주된 방식이긴 하나 형식적인 틀을 중요시하는 학술 논문에서의 주된 관행일뿐 대입 논술에까지 도식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전개 방식인지 구성 방식인지 헷갈릴 염려가 있으므로 이런 용어를 사용하려면 ‘머리말 -몸말 - 맺음말’이라는 용어가 더 좋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결론은 원래 논리학 용어로 전제나 근거로부터 추론 과정을 거쳐 얻는 최종 생각을 말한다. 이럴 때의 용어는 전개 방식 용어이다. 그런데 단지 마지막 부분이라는 정적 개념이라면 그것은 구성 방식의 용어이다. 이러한 혼동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주장을 본론에 쓰고 결론에서 요약하고 전망하는게 좋습니까. 아니면 그냥 결론에 쓰는 것이 좋습니까. - 고3
이 학생은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용어를 구성방식 용어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주장은 서론에 올 수도 있고 본론에 올 수도 있고 결론에 올 수 있다. 이 때 결론을 주장과 동의어로 보면 혼동이 생긴다. 그러므로 차라리 철저히 위치에 따른 구성 방식을 확실하게 나타내 주는 머리말 몸말 맺음말이란 용어가 낫다는 것이다. 결론을 머리말에 밝혀 놓고 그것을 논증해 나간 것이 이른바 두괄식 구성이고 결론을 맺음말에 놓는 것이 미괄식, 앞 뒤로 반복하는 것이 양괄식이다. 그러나 주장이라는 것이 이렇게 도식적으로 놓이는 것도 아니다. 몸말(본론)이 주장을 논증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곳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학생 여러분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도식적인 틀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학생들이 하는 논술은 대개 천 자 이내의 논술이다. 그런 틀에 얽매이다 보면 진짜 쓰고자 하는 내용을 못 쓰는 경우가 많다.
먼저 개요짜기가 너무 도식적인 경우를 보자. 낙태를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개요짜기다.
1. 서론
1) 인구 증가에 따른 낙태 찬반론의 대두
2) 유엔 국제 인구 개발 회의 등을 통한 구체적 방안 모색
2. 본론
1) 낙태 찬반론의 대두
(1) 낙태 찬성론자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과 공간의 부족 우려
(2) 낙태 반대론자
(1) 종교적 믿음과 교리에 의한 반대
(2) 인간의 존엄성에 침해된다는 인도주의자들의 반발
2) 낙태 반대의 이유
(1) 생명은 모체에서 수정되는 때부터 존재함
(2) 생명은 기성세대의 자의에 의해 침범될 수 없음
3) 낙태 반대를 위한 노력
(1) 교육적 측면에서의 의식의 전환
(2)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성 회복
3. 결론
1) 요약
2) 인도적 측면에서, 낙태는 허용되어선 안됨 - 고3
위와 같은 개요짜기에서는 서론과 본론이 겹치는 부분(낙태 찬반론자의 대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론에서이 요약 등은 불필요한 부분이다. 위와 같은 개요짜기보다는 아래와 같은 긴밀한 개요짜기 방식이 효율적이다.
1. 낙태 찬반론의 쟁점 대두
1) 인구 증가와 자원 부족
2) 종교적 측면과 인도주의 관점
2. 낙태 찬반론의 문제점과 대책
1) 찬반론 모두 궁극적인 대안 아님
2) 근본적 대책의 필요성
(1) 찬성론의 한계
(2) 반대론의 한계
3. 낙태 찬반 대책보다는 근본적 대책이 필요
1) 가족 계획
2) 적절한 피임 대책
3) 성교육 강화 - 고3
논술 교육 현장에서 서론 본론 결론의 틀을 강조하다 보니 대개 불필요한 서론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첫 단락에서 “-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따위의 불필요한 문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다음 학생의 글을 보자.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배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즉 이제 과학과 기술은 어떤 사상이나 종교보다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군림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물질의 풍요와 건강과 행복을 보상해 줄 수 있을 거라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결정을 자체 내에서 포함하고 있다. 먼저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학 기술이 발달해 갈수록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져 간다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얼마 전 미국에서 시행된 유전자 복제 실험을 들 수 있다. - 뒤 줄임-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존엄성 - 김보라/고3
위의 글은 첫 단락에서 형식적인 장치 없이 자신이 반대하는 측면을 통해 곧바로 핵심 논의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제 제기 효과를 보여 탄탄한 구성의 흐름이 된 것이다.
5. 문장 쓰기의 즐거움
이제 야심찬 전략을 세웠다면 과감하게 첫 문장을 쓸 일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문장 쓰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꿀 일이다. 논술 지도를 하다보면 흔히 이런 말을 많이 듣는다. “첫 문장이 생각이 나지 않아요. 첫 문장만 생각이 나면 잘 써지는데 말입니다.” 왜 그럴까. 그 원인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원래 능력은 있는데 주어진 생각거리(논제)에 대해 고민하거나 제대로 생각을 안해 봐서 그런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단순히 문장이라는 언어 단위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곧 어떤 논제에 대해 첫 문장이 생각이 안 난다는 것은 그 논제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지 문장 자체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고민과 생각은 물음을 낳고 문제 제기를 낳는다. 그렇다면 첫 문장이 두려우랴. 물론 첫 문장이 꼭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 의식이 형성된다면 첫 문장이 전제가 되건 뜸들이기 문장이 되건 아니면 대화를 인용하건 상관이 없다.
“2002년 월드컵 대회는 한일 공동개최로 열릴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FIFA 연맹에서는 ...”
정규프로가 끝나고 곧 이어진 뉴스 속보로 전해진 이 소식. 짧은 몇 마디였지만 함께 있던 식구들의 담소를 한 번에 막아 버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젊은 학생들을 비롯한 우리 국민 모두는 한국의 단독 개최가 남북한 교류를 통한 국제 평화에 이바지, 일본보다는 훨씬 나은 월드컵 본선 진출의 전력, 우리가 유리했던 것이다.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공동개최라니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사실 축구 육성에 열악한 조건을 지녔던 우리 나라는 월드컵 유치운동이 시작됐을 때부터 그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성원이 참되고 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유치 위원회의 노력도 훌륭했다.
공동개최 발표 후 이어 들은 소식은 나를 더욱 실망스럽게 했다. 그것은 한일 공동개최가 2002년 이후 유럽 공동 개최의 전시로 유도됐다는 것과 ‘역전승’이라느니. ‘빛난 성과’등과 같은 공동개최를 미화하는 신문지상의 기사였다. 더욱 기분 나쁜 것은 한동안 단독 개최만을 고집하던 일본측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밀리는 듯 하자 그 강경 입장을 철회하고 공동개최를 내세울 때 이런 결과가 확정됐다는 것이다.
공동개최안은 그 말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데다가, 운영방법에도 문제가 많다. 어떻게 분배, 진행할 것인가. 과연 어느 누구도 불만스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등등 수많은 난제가 앞을 가로 막고 있으니 말이다.
다 이긴 경기에서 무승부가 선언된 것과 같이 결과가 너무 불만스럽고 끝까지 노력을 기울인 유치위원회의 위원들의 노고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의 결과로써는 아쉽기만 할 뿐이다. -이윤석(고>)/학생논술신문 6호. 1996년. 6.20. 31쪽
위 학생의 글은 생략된 인용 문장부터 시작하고 있다. 왜 생략을 시켜 인용했는지 전반전인 논조가 대변해 주고 있다. 마지막 문장 마지막 부분 “... 아쉽기만 할 뿐이다.”로 마무리 돼 강한 문장의 호흡이 일관성을 주고 있다. 조금 감정적인 글투와 너무 우리 입장만을 내세운 것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 논제에 대한 강한 열정을 느낄 수 있는 문장들이다. 도식적이지 않아서 좋고 교과서를 흉내내지 않아서 좋다는 것이다.
아래 학생의 문장은 어떤가.
자기 나라의 자랑스런운 글자가 있으면서 남의 나라의 글자를 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과거 사대주의 사상에 빠져 한자 전용을 주장하는 학계와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학계와의 마찰 또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글처럼 우수하고 체계적인 우리 나라 글자가 있는데 왜 과거의 묵수가 되어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과거 몇천년동안 우리 나라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그 몇 천 년에 비하면 한글의 나이는 너무나 적은 것이다. 말하자면 지난 세월 우리들이 살아온 자취는 한자 문화의 토착화과정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왔기에 아무리 한글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온 국민의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서 한자 문화를 버린다면 남는 것이 거의 없을 만큼 우리들의 모든 제도와 문물과 생각하는 방식은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한글의 역사가 짧다고 해서 한글의 기능을 간과해버리는 것은 꽤 어폐가 있다. 비록 나이는 적다 하더라도 제2의 문화적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꾸준히 성장시켜야 하는 것이 한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글 전용(물론 힘이 들지만)의 노력은 한국 문화의 주체성 확립의 일환, 즉 필요 요소라 할 수 있다. 한글 전용의 주장이 무조건 한글로만 쓰자는 것은 아니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것부터 차츰차츰 한글 전용을 시도해 보자는 얘기이다. 조금씩 실천해 나가면서 외래어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한자 혼을 주장하는 이들은 말한다. 한자가 없으면 공식적 서식작성이 어렵다느니, 한자 문화가 너무 깊게 빨리 박혀 있어서 대대적 전환이 어렵다느니 막대한 양의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기엔 어렵다느니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입장은 무사 안일한 태도의 고집에 지나지 않는다. 그네들은, 문화적으로 지배를 받아서 중국 문화화 되어버릴 위험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문자양식이 타국이 것이고 그 문자에는 타국의 문화가 들어있어서 결국엔 인식마저 타국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너무 큰 것이다. 문화하강으로 결국 파국에 치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도외시 할 수 없는 중국 문화이긴 하나 그들 문화도 처음엔 규모가 작았지만 확산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순수한 한국인의 문화는 적은 영역을 차지하나, 한글 전용이라는 방법으로 그 영역을 넓히는 일이 시급히 요구된다.- 김지한, 한글전용에 대하여
위 문장은 논제에 대한 열정은 느껴지지만 교과서의 독립선언문이나 딱딱한 논설문 문체를 흉내낸 느낌을 아니 흉내 낸 것이라기보다는 몸에 배어서 그럴 것이다. “...과거의 묵수가 되어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가.”는 다음 교과서 문장의 냄새가 난다.
다만, 새로운 민족 문화의 창조가 단순한 과거의 묵수(墨守)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단순환 외래 문화의 모방(模倣)도 아닐 것임은 스스로 명백한 일이다. 외래 문화도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이바지함으로써 뜻이 있는 것이고, 그러함으로써 비로소 민족 문화의 전통을 더욱 빛낼 수가 있는 것이다. - 이기백,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
“---한글의 기능을 간과해버리는 것은 꽤 어폐가 있다.”, “무사안일한 태도의 고집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파국에 치닫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등의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장은 힘이 없다. 논술 문장의 힘은 진지한 태도와 근거를 바탕으로 한 확실한 문장에서 나온다. 위 학생의 첫문장은 그럴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국수주의의 격한 냄새가 난다. “--무사 안일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문장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문장에 앞서 그 앞 단락을 반증할 수 있는 문장이 필요한 것이다. 곧 한자 없이도 공식적인 서류 작성이 가능하다는 따위의 근거 말이다. 마지막 문장은 내용은 무척 좋으나 역시 상투적인 글투로 끝나 그 생명력이 반감되고 있다. “한글 전용을 하게 되면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으므로 한글 전용을 서둘러야 한다.” 정도로 표현하면 무난할 것이다.
경험도 풍부하고 문제제기도 잘하지만 글쓰는 훈련이 제대로 안되어 있어 그런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본인 잘못보다는 제도교육 잘못이 크다. 학교에서 글쓰기를 삶의 실천 과정으로 가르치지 않고 문법(맞춤법)에 맞는 문장, 번지르르한 문장 위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맞춤법을 지키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일단 자기의 생각을 과감하게 문장으로 표현해보라. 문장 구조가 단순해도 좋다.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문제다.” “왜 이래야만 하는가.” 이런 문장이 단순하다면 또 다른 문장으로 이어주면 된다. “이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렇기 때문이다.” 등으로 말이다. 설령 틀린다 할지라도 고치는 과정이 있잖은가.
학교에서 잘못 가르친 탓도 있다. 이를테면 학교 문법에서 문장 성분을 가르치면서 주어, 목적어, 보어, 서술어는 주성분이고 관형어와 부사어는 부속성분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실제 글쓰기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성분이라고 꼭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속성분이라고 부차적인 것도 아니다. ‘빨리 와라’에서 ‘빨리’라는 부사어가 ‘와라’라는 서술어보다 덜 중요한 부속성분인가. 아니다. 물론 우리말 전체 체계를 가지고 한 얘기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것을 고정된 틀로 가르쳐서는 안된다. 이런 분류는 규범 문법에서의 그야말로 정책 차원에서의 규범일 뿐이다. 진정한 문장은 경험과 그에 따른 생각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 실천 욕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멋있게 쓰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때 멋의 기준이 화려한 미사여구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논술문이라고 해서 꼭 딱딱한 문장만으로 쓰라는 법은 없다. 여기서의 멋은 글의 진실성과 전체 분위기에서 나와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가요계의 풍토를 보면 듀엣으로 시작한 가수들이 인기를 얻으면 인기절정에 이르렀을 때 꼭 해체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윤분배, 성격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내부에는 혼자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데 하는 아쉬움이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이번 월드컵 한일공동개최의 반응에서도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만 개최하면 국가의 위상도 드높일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득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표명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공동개최는 한일 관계에 있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는 측면도 내포하고 있다. 스포츠는 국가간의 대립과 반목을 넘어 전 세계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성격이 강하므로 오랫동안 정서적인 냉전관계를 유지해 온 한일관계에 전환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인데도 유사이래 한 번도 대등하고 협력적인 우호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은 오랜 갈등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어왔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상호간의 이익을 도모해 온 것에 비하면 한일관계는 이상하리만치 질곡의 역사가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계속되어오고 있다. 최근에 또 불거진 독도영유권 문제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무언가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쟁도 아니고 문화적 지배도 아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스포츠의 강한 공동체적 성격으로 화합의 장을 열어야 한다. 한일 양국이 화합의 정신으로 월드컵 공동개최를 무사히 치러낸다면 그것은 양국뿐만 아닌 동북아의 평화질서와 더 나아가 지구촌의 공존공영을 이룩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양국이 스포츠의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서로의 공존을 위한 화합의 노력을 기울일 때 말이다. 위험한 적과의 동침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 김인수
위 학생은 첫 단락, 첫 문장을 적절한 비유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비유 표현은 손쉽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자칫 내용의 본질을 흐릴 염려가 있다. 그러나 위 학생은 내용에 걸맞는 비유로 다른 문장의 생명력까지 살려 주고 있다.
물론 겉으로 아름다운 문장이라도 그 속내를 캐보면 추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최근 백화점 광고에서 등장하는 ‘작은 차가 아름답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큰차일수록 고개를 더 많이 숙이던 백화점들이 작은 차가 아름답다니 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문장 뒤켠에는 얄미운 속내가 담겨 있다. 진짜 우리 나라 실정을 고려해서 나왔다기 보다는 백화점의 주차 공간이 부족하니까 되도록 많은 고객을 확보하려는 전략에서 큰차에 인격을 부여하던(차격) 상업 전략을 바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장만으로는 생각의 온전한 모습을 추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문장이 생성된 구체적인 현실이나 아니면 문장이 쓰인 글의 맥락을 알아야 문장의 참뜻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쓸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위에서 지적한 여러 문제는 같은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장은 작문 교과서나 문법 교과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문제 의식에서 나온다. 생각도 중요하다. 그것은 원칙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다. 물론 나는 작문 교과서나 문법 교과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교과서는 문장을 좀더 효율적으로 다듬고 보강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이 절대적 잣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문장의 힘은 화려한 수사법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문장은 주어, 목적어, 보어, 서술어의 주성분, 관형어, 부사어의 부속성분, 독립어의 독립성분이라는 지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진정한 문장은 경험과 그에 따라 생각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 실천 욕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6. 논증과 철저한 개입 전략
‘주제, 구성, 표현, 논증’ 가운데 논술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냐는 물음은 그 자체가 잘못인지 모른다. 논술문을 어떤 맥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의 답변도 다양했다.
자신의 구체적인 주장을 뒷받침할 설득력 있고 현실 가능한 논증 아닐까요? 그걸 표현하는데의 맞춤법 내지는 표현방법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 고3
표현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했느냐에 따라 그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므로 - 고 3
다 중요하다. 우선은 주장이 있어야 모든 것이 성립하겠지만 주장도 논증이 있어야 타당성이 생기고 제대로 표현하고 효과적으로 구성해야 설득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 고3
엄격히 말하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네 가지 요소가 두루 충족될 때 제대로 된 논술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술문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논증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전달하려면 읽을이의 납득이 필요한데 그것은 논증이 좌우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채점 기준을 내세울 때 주장이 무엇이냐보다는 주장을 논증하는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어떤 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왜 그렇게 설정되었는지, 그러한 설정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논증이다. 그렇다면 논증은 어떻게 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인가. 논증은 간단히 말하면 전제나 근거를 통해 내 생각, 내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전제, 어떤 근거를 어떤 시각으로 입증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런 점을 따지기 전에 먼저 학생들이 많이 혼동하는 몇 가지 근거의 구분에 대해 설명을 해겠다. 쉬운 보기로 만일 순돌이가 수업시간에 졸았다는 사실을 논증할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생각해보자.
순돌이는 어제 밤을 샜다. 그래서 오늘 수업시간에 내내 졸았다. -박찬솔
사람은 밤을 새면 존다. 순돌이는 어제 밤을 샜다. 그래서 순돌이는 오늘 수업시간에 내내 졸았다.-이해누리
순돌이는 오늘 수업 시간 내내 고개를 끄덕거렸고 침을 흘렸다. 그리고 철순이, 점순이가 순돌이가 조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순돌이는 수업 시간 내내 졸았음에 틀림없다. - 김해찬
사람은 밤을 새면 존다. 순돌이는 어제 밤을 샜다. 또한 순돌이는 오늘 하루종일 고개를 끄덕거렸고 침을 흘렸다. 그리고 철순이, 점순이가 순돌이가 수업 시간 내내 조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순돌이는 수업 시간 내내 졸았음에 틀림없다. -윤누리
박찬솔의 논증은 그야말로 논거가 부족하다. “순돌이는 어제 밤을 샜다.”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원인이지 직접 근거는 아니다. 이러한 원인은 간접근거가 될 뿐이다. 간접근거는 대부분 필연성이 부족하다. 이를테면 어제 밤을 샜다고 수업시간에 졸라는 법은 없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서 차 안에서 눈을 부쳐 안 졸 수도 있고 좀 나쁜 방법이긴 하지만 잠안오는 약을 먹고 안 졸 수도 있고 또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안 졸 수도 있다. 이해누리 논증은 박찬솔 논증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뭔가 미심쩍다. “사람은 밤을 새면 존다.”도 일반적 통계 결과에 의한 전제일 뿐이다. 전제도 역시 원인과 마찬가지로 필연성이 적은 간접 근거일 뿐이다. 김해찬의 논증은 마치 수사 기록을 보는 듯하다. 김해찬이 든 논거들은 모두 사실성에 입각한 직접 근거 곧 증거들이다. 이런 논증은 필연성과 사실성이 있어 좋지만 이보다 이양이면 윤누리의 논증이 더 잘했다고 볼 수 있다. 간접 근거인 원인, 전제, 직접 근거인 증거까지 모두 포함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논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학생들에게 슬며시 근거를 간접 근거와 직접 근거로 나누었다. 곧 전제와 원인은 간접근거요, 증거는 직접 근거로 본 것이다. 전제, 원인, 증거를 모두 근거라고 하지만 그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흔한 예로 다시 정리해 보자. “소크라테스가 죽었다.”를 논증할 경우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는 전제이지 증거나 원인이 아니다. “청소년을 선동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가 원인이 된다. 증거는 “소크라테스의 맥박이 멎었다, 죽는 것을 누가 봤다.” 따위가 된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구별해 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고 반문하는 학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논증의 복잡함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일반적인 논증의 허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보통 학생들이 논증할 때 박찬솔이나 이해누리처럼 부분적인 근거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근거를 많이 들라는 것도 아니고 모든 논증을 윤누리처럼 복합적으로 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논증하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 핵심적인 근거를 적절히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는 자신의 삶 주변에서 찾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근거를 피하라는 것이다. 상투적이며 학생 답안 같지 않다는 것은 대개 막연하고 추상적인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다음 문제에 대해 논술을 한 번 해보자.
# 일상어에서는 턱을 세분화하지 않으나 의학 분야에서는 “위턱, 아래턱”등으로 세분화한다.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배경을 설명하고 일상어와 전문어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논술하라.(800 자 안팎)
여기서는 두 학생의 답안을 가지고 어떻게 논증했는지 검토해 보기로 한다.
사회구조가 세분화, 전문화됨에 따라 말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에 따르는 구분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특정 사회 내에서만 사용되는 전문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특이한 구분없이 부르는 얼굴의 턱도 의학 분야에서는 위턱, 아래턱 등의 분명한 구분이 필요하듯이, 보다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일을 다루는데 있어 전문용어의 사용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의 대부분이 외국어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병원에 갔을 때 우연히 듣게 되는 의사나 간호사의 언어는 거의 이해하기 힘든 의학용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의 대부분이 외국어일 뿐만 아니라 일부 의료인들은 아무 스스럼없이, 오히려 내세우듯이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고는 한다. 불필요한 의학전문용어를 필요이상으로 남발하는 것은 권위의식에 젖어있는 의료인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전문용어가 전문분야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이 외국의 것이라면 외국어의 차용이 불가피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문용어가 단지 화자의 권위를 나타내는데 주로 사용된다면 일반사회와의 단절감과 괴리감을 낳게되는 부작용이 초래될 수 있다.
사회구조가 다양화,전문화 되어감에 따라 이에 따른 각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사용 언어의 전문화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화는 단절적,폐쇄적 관계와 효과 속에서가 아닌 공개적,대중적 관점 속에서 일반 언중과의 수위를 맞추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고 3 정난힘
정난힘은 “전문어는 일반어와의 상호 연계 속에서 설정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1) 전문어는 일반어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2)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문어가 대부분 외국어이다. (3) 전문어가 권위 의식이 결부되어 일반 사회(일상어)와의 단절감을 보이고 있다라는 부정적 현실을 근거로 들고 있다. 전문어의 필요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다. 다만 그 전문어를 어떻게 만들어 어떤 자리매김 속에 쓰여야 하는가가 논제의 초점이다. 이 학생의 근거는 나름대로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전문어가 필요할지라도 그것이 일상어에서 나왔다면 본질적으로 일상어와 전문어를 전혀 별개의 언어로 구성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는 전문어가 필요한 건 좋지만 권위의식에 결부된 외국어가 쓰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가 흔히 겪는 병원의 보기도 구체성을 띠어 좋았다. 다만 “일반 사회와의 단절감, 괴리감”과 같은 표현은 상투적인 느낌을 준다. 어떻게 되는 것이 단절감을 준 것이고 괴리감을 준 것인지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그리고 전문어를 일상어와의 연계 속에 두는 것이 왜 좋은지 좀더 보강할 필요가 있다. 다음 학생의 논거는 이런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좋은 논거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모든 전문어의 출발점은 만인이 사용하고 있는 일상어이다. 한 예로 영영사전을 생각해 보자. 영영사전에 웬만한 대학생도 알 수 없는 전문적이고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단어는 영어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단어로 풀이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전문어는 일상어의 범주에 들어야 한다. 전문어라고 해서 소수의 집단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립어가 되버리고 만다면은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된다. - 앞 뒤 줄임/장하다솔
얼뜻보면 위와 같은 논거는 부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전문어와 일상어의 관계와 사전에서의 전문어 올림말과 풀이말의 관계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서 전문어가 일상언어로 풀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상어와의 연계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될 수 있다는 것이니 그런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참신한 논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학생의 경우는 어떤가 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얼굴 좌우 측면의 귀를 단순히 귀라고 칭하지만 생물학자나 의료인들은 귀를 내이,중이,외이라고 더욱 세밀히 분류한다. 이밖에도 우리는 이러한 일상어와 전문어의 차이를 많이 보게 된다. 따라서 일상어와 전문어의 차이가 생기는 원인과 이에 댈한 바람직한 관계설정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는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단순한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쓰인다. “턱이 참 예쁘다”라고 할 때 이는 단순히 얼굴의 어느 한 부분만을 가라킨다. 하지만 의사들이 “이 환자는 턱을 수술해야 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어느 한 부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세밀한 정보를 주고 받을 필요성으로 인하여 턱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결국 그 용어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일상어와 전문어의 차이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 대해 일반 언중들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왜내하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사회는 현재보다 훨씬 전문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상어와 전문어의 차이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문어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단지 각 구성원에 따라 자신의 용도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일반어와 전문어는 일방적 포함관계가 아닌 개별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 - 고3 현나라솔
위 학생은 “전문어는 일상어와 개별적인 관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근거로 (1) 일상어와 전문어가 쓰이는 맥락이 다르다. (2) 전문화된 사회가 더 강화되고 있다. 첫 번째 근거 전문어와 일상어가 쓰이는 맥락이 다르다는 것은 대전제 같은 상식적인 얘기지만 이를 의사소통 기능으로서의 일상어, 특별 정보 소통으로서의 전문어라는 적절한 구별과 예로 그러한 점을 극복하고 있다. 그리고 첫 번째 단락은 학교 생물 시간에 배운 배경 지식을 학생답게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어 좋다. 다만 전문화된 사회가 점점 강화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일상 생활 속에서 전문어의 영역이 더 넓어진다는 사실도 뜻한다. 그러한 점이 좀더 논증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7. 독창적인 글쓰기에 대하여
독창적인 글은 대학당국이 채점 기준으로 가장 강조하는 것이다. 각 대학들은 결론보다는 독창적 사고와 논리의 정연성에 비중을 두겠다고 누누히 밝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독창성 컴플렉스(?)에 많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과연 독창적인 글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글인가. 먼저 학생들의 생각을 들어 보자.
보편적인 생각이 아니라 자기자신만의 생각을 쓴 글(단 남이 인정할 수 있는 거)-고3
논제에 대해 기존의 생각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고3
독창적인 자신의 주장에 따른 설득력있는 근거-고3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가 독창적인 글-고3
도입부분에 있어서의 독자의 관심을 유도할 만한 내용, 본론에선 자신의 주장 뒷받침의 근거(or 예)들이 자신만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생각,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예리한 비판력, 끝에선 해결책(전망)도 또한 기발한!-고3
독창성에 대한 생각이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대학 교수나 고등학교 선생도 조금씩 그 기준이 다를 것이다. 보통은 독창성 하면 남과 다른, 또는 보편적인 것과는 다른 개성적인 것으로 논설문에서는 주로 근거와 주장을 내세운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이 구별할 필요가 있다.
독창적인 관점
독창적인 근거
독창적인 주장
독창적인 표현
독창적인 구성
독창적인 글
위와 같은 항목을 내가 제시한 이유를 눈치 빠른 학생들은 알아 챘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독창적인 글과 독창적인 주장, 근거 등은 다르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독창적인 글은 종합적으로 판단되는 것이지 특정 요소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보자. 환경 오염에 관한 논제로 글을 쓸 경우 과연 주장에서 독창적인 것이 얼마나 나올 수 있겠는가. 전국 수험생들의 상당수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그것이 참고서 보고 외워서 그런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근거가 독창적이어야 하는가. 근거도 서로 다른 예를 들더라도 성격 면에서는 많이 겹칠 것이다. 이런 가운데 남의 생각과 무조건 달라야 좋은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독창적인 글이라는 것은 글 전체가 독자에게 주는 효과에서 판단되는 것이다. 주장이 진부할지라도 논증과정이 독창적이면 전체 글 평가가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논증 과정이 진부하더라도 추론에 의한 자기 주장이 독창적이면 전체 글 평가가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주장과 논증이 진부하지면 구성이 깔끔하고 표현이 독창적이면 역시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글 전체가 읽는이에게 어떤 효과를 주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논설문은 논증을 중요시 여기므로 관점과 근거 등의 독창성이 돋보일 수는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다음 세 논술 답안을 가지고 확인해 보자.
최근 들어 세계 전역으로 '세계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각 나라마다 서로 교류.협력하여 '지구촌'을 만들려는 것이 그 목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것을 개방하고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화'의 물결에 맞추어 '지방화'의 의미도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지방화'는 지방의 발전을 위한다는 개념에서 '세계화'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국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개인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각 지방도 그 지방만의 남다른 장점을 발전시켜 세계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방의 발전을 위해 주민들이 힘쓴 노력의 결과가 결국 세계화에서의 국가 경쟁력을 높여줄 수 있다는 말이다.
세계 여러 나라를 살펴보면 나라 자체보다는 특정한 도시가 세계적으로 더 유명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관광 명소로 유명한 피렌체 시드니 로마같은 곳이나, 패션으로 유명한 파리, 영화산업으로 유명한 할리우드같은 곳은 도시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이 도시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님으로써 세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그 도시의 발달이 국가에 상당한 이익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우리 나라도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도시를 발전시켜 이름을 널리 알린다면, 국가의 이미지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이고 주목받는 나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중앙 정부가 일률적으로 관리하게 되면 각 지방에 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지역 발전이 더디게 되어 지방의 특색을 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세계화의 물결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에 더 잘 적응하여 발전하려면 각 지방의 특색을 살려 세계에 내보이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각 지방이 서로 그 지방의 발전에 힘쓴다면 국가는 그 지방 간의 조화를 도모하여 세계화에서의 국가 경쟁력으로 수용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세계 무대에서의 자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밝은 미래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기오, 한국일보 논술고사의 실제 116, 최우수작
지방자치제를 실시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온 국민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출발했던 지방자치제는 지역 이기주의의 심화와같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자치제는 세계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성취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지방화가 세계화에 어떻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우선 세계화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자. 오늘날의 세계는 교통과 통신의 비약적 발달에 힘입어 말 그대로 지구촌 사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지구촌 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국경을 초월한 자유 무역의 실현과 다양한 문화의 공유화를 들 수 있다.
지방화는 이런 세계화 시대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다.
첫째 지방자치제는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국가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기능을 할 수 있다. 모든 정책이 중앙 정부에서 이루어질 때에는 지방의 특색있는 산업의 발전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방자치제 하에서는 그 지방의 경쟁력있는 산업을 육성하여 국가 경제 번영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번영은 세계화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는 지방자치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스위스가 시계 산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둘째 지방화는 많은 국제적 행사나 해외 기업들을 우리 나라에 유치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지방화는 신속하고 융통성있는 행정을 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이에 적합하다. 좋은 예로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는 많은 기업과 국제회의를 유치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지방화는 각 지역의 고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문화의 교류가 점점 활발해지는 오늘날 독특하고 전통있는 문화는 경제적 부(부) 못지 않는 커다란 자산이다. 지방화는 중앙 정부 체제에서 간과하기 쉬운 지방의 독특한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화에 크게 이바지한다. 지방자치제가 정착된 미국과 이탈리아의 지방 정부들이 그 지방의 문화를 널리 알려 세계 1.2위의 관광 수입을 올리고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지방화는 경제, 문화적 측면 등 여러 면에서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세계화 시대에 대비하려면 지방화를 통해 진정한 세계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즉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방화(Localization)가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세방화(Glocalization)'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최두헌/우수 1
1년 전에 실시된 지방자치제 선거 후 공공기관의 서비스가 향상되고 생활 여건도 눈에 띄게 나아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방자치가 지향하는 지방화는 이러한 내적인 향상 뿐 아니라 지역을 벗어난 국가의 발전 즉, 세계화에도 큰 도움을 준다. 이것은 튼튼한 건물을 짓기 전에 견고한 기초와 견실한 구성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나라의 존영의 필수조건인 세계화에 지방화가 끼치는 긍정적 영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민주주의 체제가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시대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만이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올바른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과 아울러 국민들의 성숙된 정치력 역량과 민주주의 의식의 함양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불리는 지방자치제 즉, 지방화가 국민의 한 층 발전된 민주적 태도를 양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지방화는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잘 살리고 지방마다 독립성을 띠게 하여 국가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산업을 발달하게 할 수 있다. 다가오는 정보화 시대에는 보편적인 사고와 기술을 가진 자보다 개성과 특수한 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가 세계를 주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방화로 인한 개성과 다양한 문화.산업 기술의 창출은 세계화의 밑거름이 된다.
마지막으로 지방화는 지방의 전통문화를 계승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이는 받아들이기만 하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것을 지키면서 이루는 세계화의 바탕이 될 것이다.
세계화와 지방화는 몸과 몸을 이루는 구성기관과의 관계와 같다. 즉, 몸을 이루는 각 기관이 제 역할을 다하면서 상호 협력할 때에만 건강한 신체가 되는 것처럼 지방이 저마다의 역할에 부족함이 없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화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지방화는 세계화의 뿌리이다. 그 뿌리를 튼튼히 하는 것은 지방화의 성패에 달려 있고, 지방화의 성패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하겠다./ 박정준/우수 2
세 논술은 주장만 보면 모두 같다. 곧 세계화를 찬성하지만 지방화를 통한 세계화가 진정한 세계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채점자 김영민 교수도 지적했지만 내용으로 보면 최두헌의 답안이 제일 튼튼하지만 최두헌의 마무리(마지막 단락)가 너무 상투적이어서 2위로 했다. 반면에 이기오 답안은 세계 유명 도시를 논거로 차용한 것이 더 많은 점수로 연결되었다. 최두헌의 답안의 독창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방화를 경제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으로 나누어 본 분석 관점은 다른 학생에 비해 상당히 우수한 측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창성이 상투적인 마지막 단락으로 반감된 것이다. 그리고 박정준의 답안은 다른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표현 면이 독창적이다. 첫째 단락과 마지막 단락에서의 비유 표현이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논술문의 전달 효과를 높혀 주고 있다. 논거에서 민주주의를 강조한 것도 독창적 요소이다.
전반적으로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마무리가 참신해 독창적인 글로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아래 답안이 그런 경우이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기쁨을 나눈 것도 잠시, 우리나라는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이데올로기의 피해국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공산주의라는 미명하에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분단이 되고 말았다. 50년이 흐른 지금은 이데올로기의 가치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지난 50년동안 세계는 너무나 많이 변했다. 소련과 미국의 화해, 즉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접어들었고 세계 각국은 지금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북한과 팽팽한 대립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남과 북은 대립관계로 인하여 득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다.
첫째, 남북휴전상태로 많은 국방비가 소모되고 있다. 선진대열에 끼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는 여러 나라를 볼 때 이것은 엄청난 낭비이다.
둘째, 민족 이질화를 심화시키고 남북한에 치유하기 어려운 감정의 깊은 골을 만든다. 한 민족으로서 사랑과 관심보다는 미움을 갖고 있다. 한 조사기관의 청소년을 상대로 한 ‘통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반 이상의 청소년이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일제 통치에서의 광복은 2차 세계대전의 마감을 뜻하기도 한다.
광복 50주년을 맞았다. 휴전선이 있는 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한국전쟁도 마감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낙오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분단의 벽을 허물고 세계사의 주역이 될 것인가. 광복 50주년을 맞았고 세계는 많이 변했다. 21세기를 향하는 지금 남은 과제는 우리 민족이 통일을 하고 우리의 과거사를 올바로 정립해 나가는 길이다.
1955년 광복 50돌 이제는 발돋움해야 한다. 그 발돋움의 열쇠는 바로 우리 남북한이 쥐고 있다. 50여년 전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던 그날처럼 이제는 “한국통일만세”를 불러야 할 때인 것이다. - 원나영, 우리에게 광복 50돌은 무엇인가, 경향신문 제54회 논술고사 우수작
위 답안은 마지막 문장이 이 학생만의 뜨거운 열정을 싱그럽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이처럼 독창성이라는 것은 무조건 특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글 전체 분위기에서 드러나는 개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글을 쓸 때 무조건 독창적으로 쓰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진지하게 논의해 보려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8. 실제 글을 써보자
지금까지 한 얘기를 실제 한 문제를 통해 다시 점검해 보자. 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로 실제 고3학생들이 쓴 답안을 바탕으로 풀어나가기로 한다. 직접 해 보고 나서 읽어 주기 바란다.
* 다음은 어휘 바꾸기에 대한 대립된 글이다. 두 견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라.(1000자 내외)
<가>
“구기땅굴로 해서 가십시다.”
“예?”
“서대문쪽이 더 막히니까 자하문 땅굴로 해서 구기땅굴쪽으로 가잔 말입니다. ”
“····?”
“구기터널이라고 하면 아시겠소?”
광화문이나 종로쪽에서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탈 때 가끔 겪는 일이다. 까딱하면 파출소나 무슨 기관으로 차를 몰아갈까봐서 잘 안쓰지만, 이렇게 말할 때마다 기사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땅을 파서 만든 길 또는 산이나 바위에 깊게 뚫린 구멍을 가리켜 굴이라고 하니, 땅속으로 뚫은 길이 땅굴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전날 나온 국어사전에는 ‘터널’이란 외래어는 실려 있으나 ‘땅굴’이란 말은 아예 실려 있지 않았다. 북녘에서 파내려왔다는 그 무슨 땅굴 때문에 그러는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듯하다. ‘남침용 터널’이라고 해야 남녘의 말버릇에 맞을 터인데 반드시 ‘남침용 땅굴’이라고 하니, 북녘의 말버릇을 존중하여 주자는 동포애인가.
떠나가고 머무는 지점에 마련된 차와 집합장소를 가리키는 말인 ‘차부’가 ‘터미널’로 되고, 차표가 ‘티켓’이 되었으며 ‘땅광’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도 ‘지하실’이라고 하면 다 알아듣는 세상이다.
이러다가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전날 쓰던 말이나 순수한 우리말로 된 용어를 쓰는 사람은 행세를 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외국인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구기터널’과 ‘구기땅굴’/김성동//한겨레신문 ‘우리말 바르게’ 1994.9.28.
<나>
한겨레신문 9월 28일치 ‘우리말 바르게’에 실린 글을 보았다.
글에서 지적한 대로 사전적 의미로는 ‘땅굴’과 ‘터널’이 같다. 그런데 필자는 ‘터널’과 같은 의미로 ‘굴’도 있다는 점을 놓친 것 같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을 쓸 때는 사전적 의미를 떠나 어감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주장대로 사전적으로 상대가 말을 받아들인다면 ‘구기터널’이나 ‘구기땅굴’이나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감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땅’이라는 접두사는 지하를 의미한다. 단순히 땅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남침용 땅굴’이라는 말을 풀이한다면 ‘남침을 위해 숨겨진 굴’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기터널’을 우리말로 쓰고 싶었다면 당연히 ‘구기굴’로 썼어야 했다. 구기터널은 땅속으로 숨어들지 않고 땅밑을 잠시 지나 밖으로 나오는 것이므로.
설사 사전에서 동의어로 표기했을지라도 같은 의미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때로 사전은 어감을 무시하므로. 현실에 맞게 말을 살리고 아름답게 다듬는 것이 정말로 우리 말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땅굴’과 ‘터널’은 뜻은 같지만 어감상 다른말/이현주/한겨레 신문 국민기자석 1994.10.6.10쪽.
사실 위와 같은 문제를 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자리는 고 1 학생들을 위한 자리이므로 논술의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논술의 근본적인 문제와 위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직접 관련은 없다. 다만 논술이 언어를 통한 삶의 실천 과정이라면 언어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생각을 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위 문제는 언어의 아주 다양한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4장에서 제시한 개요 전략에 따라 학생들의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해 보자.
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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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문제를 출제했는가 → 출제 의도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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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가 왜 문제인가 →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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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관점과 방향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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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무엇인가 → 주장,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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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논증할 것인가 → 전제나 근거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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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구성하여 멋들어지게 표현할 것인가.
왜 이런 문제를 출제했는가
이 단계는 논제를 내(학생) 삶의 한 가운데로 끌어오기 위해 초기 단계의 전략이다. 먼저 주어진 그대로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휘(낱말)를 바꾼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단적인 보기로 ‘광주사태’라는 어휘를 쓰는 사람과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어휘를 쓰는 사람의 세계관과 삶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삶과문화를 바꿀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다. 보통 우리말을 어원에 따라 가르는 논의에도 중요한 역사와 문화의 의미가 깔려 있다.
꠆ꠏ순우리말(토박이말)
우리말 ꠐ
ꠐ ꠆ꠏ한자어
ꠌꠏ외래어(들온말)ꠉꠏ일본식 외래어
ꠏꠏ서구식 외래어
위와 같은 갈래로 보면 외래어도 우리말이다. 그러므로 외래어냐 순우리말이냐를 배타적으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고 일이고 그러한 외래어를 쓰느냐 안 쓰느냐를 따지는 것 역시 무의미할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비극적 역사는 순우리말 민족주의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부추겨 왔다고 볼 수 있다. 지배 계층만이 사람다운 삶을 사는 시절에 한자나 한문, 일부 한자어 등은 그런 삶의 잣대였기 때문이다. 일본 외래어는 더한 고통 속에서 자리잡았고 서구 외래어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곧 제국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언어를 침략의 수단으로 삼아 피식민지 국가의 언어를 탄압하였다. 첫 번째 견해는 이런 맥락 속에서 자리잡고 있다. 두 번째 견해는 이런 민족주의적, 역사주의적 맥락보다는 현재 글에서의 문맥적 의미를 중심으로 첫 번째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이러한 외래어, 우리 삶 속으로 끼어 들고 있는 외국어 등의 언어 갈 등을 통해 삶과 언어, 사회와 언어 문제를 따져 보자는 데 있다.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관점을 세우기 전에 우리는 먼저 언어의 다양한 측면이 있음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첫째는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이다. 서로간의 정보를 주고받는 유용한 도구라는 점이다. 다음은 언어는 민족이나 공동체를 상징하는 상징 도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언어는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 삶을 구성하고 또 대변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 두 기능이 배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두 기능을 공유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언어 갈등이 유발될 때는 어떤 기능을 더 중요시 여길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곧 첫 번째 견해는 상징 도구로 보는 관점을 취한 것이고 두 번째 견해는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관점을 취한 것이다. 학생 입장에서는 각자 두 관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따져야 할 것이다. 물론 두 관점을 세분하고 다시 분류해 본다면 또 다른 관점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관점은 언어와 민족은 보통 필연적 관계에 있다는 입장으로 국어순화론으로 이어진다. 물론 두 번째 관점이라고 해서 국어순화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최소한 언어와 민족의 필연성 등은 부정되고 그보다는 현실적 맥락이 강조되는 것이다. 먼저 언어와 민족, 국어순화에 관한 상반된 어른들의 글을 읽어보자. 길더라도 묵묵히 읽어 보자.
국어 순화의 뜻/김석득/국어 교과서/줄임
순화란, 잡스러운 것을 걸러서 순수하게 하는 일이요, 복잡한 것을 단순(單純)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어 순화란, 잡스러운 것으로 알려진 들어온 말(외래어, 외국어)을 가능한 한 토박이말로 재정리하는 것이요, 비속(卑俗)한 말과 틀린 말을 고운 말과 표준어(標準語) 및 말의 법대로 바르게 쓰는 것이다. 또, 그것은 복잡한 것으로 알려진 어려운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말로 고쳐 쓰는 일도 된다. 한 마디로 하면, 우리말을 다듬는 일, 그것이 바로 국어의 순화이다.
말을 다듬는 일이란, 말에다 인위적(人爲的)으로 손을 대는 것과 사람의 창조적 힘을 더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면 과연 말에 인위적으로 손을 댈 수 있고, 사람의 창조적 힘을 더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말에 대한 관점, 곧 언어관(言語觀)에서 구해야 한다. 만일, 말을 단순히 사회적(社會的) 소산(所産)이나 자연 발생적(自然發生的)인 것으로만 보는 데 그친다면, 말에 결코 인위적인 손길이나 창조적인 힘을 더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국어 순화 문제도 이러한 쪽에서 보면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말의 순화 운동의 초기 단계에 순화 반대론자가 있었던 것도 이러한 언어관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말의 순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말의 반작용(反作用)을 막음
말이 살고 죽으며 변하는 일체(一切)는 사회적 자연 현상이다. 그러므로 말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말에 손을 대야 한다. 그 이유는, 말을 단순히 ‘되어진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고, ‘무엇을 이루어 내는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언어 철학자 훔볼트는 앞엣것을 ‘에르곤(ergon)’이라 하고, 뒤엣것을 ‘에네르게이아(energeia)’라 한다. 그리고 그는, 말은 에르곤이 아니고 에네르게이아라고 역설한다.
말을 ‘이루어 내는 힘을 가진 것’으로 보는 쪽에서는, 말을 단순히 표현 수단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나 사회의 본바탕, 곧 본질을 이루는 데에 순리 작용(順理作用)이나 반작용의 힘을 가진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우리말의 반작용을 막을 필요가 있다. 이 반작용의 막음, 이것은 국어 순화의 근본적 이유의 하나가 된다.
(2) 말은 민족적 세계상의 반영
한 나라의 모든 사람의 공통 의식(共通意識)이 모이면 민족 의식(民族意識)을 이룬다. 민족 의식의 표현은 그 나라 말로 나타난다. 따라서, 각 민족이 쓰는 말에는 그 민족 나름대로의 세계상(世界像)이 들어 있다. 우리 겨레가 쓰는 말은 우리 겨례의 세계상을 담는 그릇이요, 우리 겨레의 공통적인 정신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말은 겨레의 얼’이라고 한다. 이것은 겨레의 흥망(興亡)과 말의 흥망이 기복(起伏)을 같이하는 역사적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말으 인식은 자기를 깨치는, 곧 자각(自覺)하는 일인 동시에 민족을 깨치는 일이요, 나아가서 민족을 결합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도 밝혀, “말의 공통성이 곧 같은 혈족(血族)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말은 공통적인 민족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민족 통일을 이루는 데에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고 했다.
말이 겨레의 얼의 상징이며 민족 결합의 원동력이라는 데에서 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처럼 소중한 말의 순화를 들고 나올 때 문제 되는 것의 하나가 들어온 말이다. 이 들어온 말은 우리 겨레의 참된 삶이나 정신이 투영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마땅히 우리말에서 솎아 내야 할 말의 잡풀에 지나지 않는다. 밭의 잡풀은 뽑아 내는 것으로 끝나지만, 말의 잡풀은 뽑아 낸 빈 자리에 반드시 다른 말을 갈아 심어야 한다. 갈아 심는 말, 이것은 이미 쓰고 있는 말이거나, 혹은 옛말에서 찾아 낸 것이거나, 아니면 주어진 천부의 창조력으로 새로이 만든 말이어야 한다. 새 말의 만듦, 이것은 언어의 자연 발생관(自然發生觀)에는 어긋나지만, 우리 민족의 세계상을 담은 그릇인 말을 순화하는 데에 필할 수 없는 창조 작업이다.
(3) ‘체’로서의 기능 회복
말의 순화에서는, 먼저 말의 잡풀이 어느 것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는, 이를 바로 고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외국어가 우리말에 들어올 때나 이미 들어와 혼돈을 이루고 있을 때, 우리말은 이들에 대하여 중간 세계(中間世界)의 역할을 해야 한다. 중간 세계로서의 말은 객관적 세계의 일과 몬, 곧 사물을 인식의 세계로 걸러 주는 ‘체’로 비유할 수 있다. 이 체가 성글면 우리의 인식도 성글어지고, 이 체가 고우면 우리의 인식도 섬세하고 올바르게 된다. 이와 같이 본다면, 우리말은 우리의 올바른 인식과 가치를 판단하는 ‘자’가 되기도 한다. 중간 세계에서 인식을 걸러 주는 ‘체’, 혹은 가치 판단의 ‘자’로서의 우리말에 확신이 서지 않은 사람은 들어온 말을 말의 잡풀로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면에서 볼 때, 말의 잡풀이란 처음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우리말을 체로 하여 걸러지면서 비로서 그것이 잡풀로 확인되는 것이다.
우리말의 의식, 무의식은 민족의 자각, 자존의 사상과 함수 관계(函數關係)에 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오랜 동안의 자아 상실(自我喪失)의 뒤나 국난(國難)을 겪은 뒤에는, 깨달음의 사상이 고조되어 자각, 자존으로 나타나곤 했다. 한편, 남 곧 외국에 대한 이해가 역설적(逆說的)으로 자각, 자존의 사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상은 필연적으로 우리말, 우리글의 재발견(再發見)과 그것의 갈고 닦음으로 나타났다. 세종대(世宗代)의 자각 시대나, 영.정조대(英正祖代)의 실학 시대(實學時代)나, 개화기의 근대화 과정(近代化過程)에서의 우리말, 우리글의 숭상은 그 역사적인 시련이 있었고, 그러한 시련 속에서 우리말의 심한 오염 현상(汚染現象)이 있었음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간혹 ‘우리말’을 살리자는 주장에 접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누구나 그러한 주장에 동의한다. 우리말을 살리자는 내용인즉슨 서양말이나 서양말투, 일본식 말투, 불필요한 한자말 등을 남용하여 우리말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적인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적인 것의 일부인 우리말을 지켜내자는 것은 정당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정당화가 ‘우리것’이라는 논리에 과부하를 거는 것이라면 곤란할 일이다. 거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것’, 바꿔 말해 ‘우리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이 질문도 적절하지는 않다. 좀더 분명히 하여, 우리말은 어떠한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는가로 질문하자.
단일언어의 자부심이 대단한 우리말도 알고보면 상당히 ‘문제아’로 존재해왔다. 입말의 발전이 고유한 문자와 함께 이루어지지 않고 중국에서 도입한 ‘한자’에 지배를 당하면서 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고유성은 매우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한자말은 좋으나 싫으나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우리말의 분포에 있어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해 왔다. 여기서 잠깐 질문해보자. ‘한자말’은 우리말인가 아닌가? 당연히 우리말이다.
여기에 곡절이 하나 있다. 주지하다시피 문자정책을 둘러싸고 한글전용론과 국한문혼용론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이나 팽팽히 맞서오고 있다. 거기서 논란된 것 가운데 하나가 한자말의 국적이다. 한글전용론자들이 한자말은 우리말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으면서도 한자말(특히 어려운 한자말)을 순우리말로 고쳐야 할 것을 주장하자, 국한문혼용론자들은 한글전용론자들이 한자말을 우리말로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그렇다면 한자말이 우리말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근거에서인가? 수천년동안 우리의 삶과 함께 민족적인 것으로 이미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 길어야 수십년에 불과한 서양말들도 ‘외국어’ 아닌 ‘외래어’ 범주로 들어온 것들도 우리말로 포함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말이라는 것은 ‘순수한’ 형태로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현실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표상이 가능하다. 하나는, 우리말의 순수한 형태, 다시 말해 ‘원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의 입말들에서 원형을 찾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우리 한민족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다른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하나는, 항상 이미 순우리말이라고 하는 것들과 외래적인 것들이 접촉하면서 우리말을 구성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말’이라는 특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외래적인 것들이 우리의 언어적 육체로 분포화하였기 때문이다. 서양말도 마찬가지다.
이 대목에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외국어들이 우리의 언어적 육체로 분포되는 과정은 단지 ‘어휘’의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통사적 관계를 포함한 언어체계 전체에 걸쳐 일어난다는 것이다. 가령 “-에 있어서”나 “-에 다름아니다”, “-진다”와 같은 방식들을 문제로 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투의 말 사용을 문제삼는 사람들은 외국말법의 흉내내기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굳이’ 그런 표현들을 안하고도 순우리말식으로 할 수 있지 않느냐 이거다. 이 문제는 사실 골치 아프다. 단순히 우리말식이니 아니니 하는 잣대로 재단해서 대중들의 맹목적 추종을 유발할 수는 없다.
이 골치아픈 문제에 닥쳐서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우리말’이라는 범주를 벗어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이라는 경계 안에서만 논다면 우리말을 제대로 볼 길이 없다. 언어일반에 대해서 검토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라는 관념이나 말을 사용하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서이다.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담화하면서도 ‘우리말’이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 말은 그렇다고 ‘외국말’을 상상하면서 언어소통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국적’을 따져가면서 담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무관하게 현실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대중들의 언어소통은 우리말이다, 아니다가 문제가 아니다. 담화와 소통의 필요상, 그리고 다양한 방식의 언어적 사용 욕망과 관련하여 그때그때 감각적으로 언어를 생산해낸다. 예컨대 최근 신조어 “컴맹”이라는 말을 보자. 국어순화론자들은 아마도 ‘우리말’이 갈데까지 갔다고 궐기대회를 서두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말이니 아니니 하는 의식과 무관하게 이미 있어 온 “컴퓨터”라는 말과 “문맹”이라는 말을 감각적으로 조합한 것이다. “셈틀맹”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들은 “컴맹”을 택했다.
그것을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허위의식적인 말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허위의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들의 삶을 표시하고 소통하는 하나의 과정을 차지하고 있다면 단순히 ‘허위의식적’이라고 비난하기에 곤란한 점들이 많다. 예컨대 해방정국 말에 발생한 제주 4.3항쟁시 제주주민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무장대 보초들을 ‘빗개’라고 불렀다.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아마 제주말이려니 어림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말은 자신들의 싸움대상인 미군정의 모국어, 즉 영어 ‘picket’에서 온 것이다. 제주주민들은 수만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과정에서 그 말을 자신들을 지켜내는 말로 배치, 사용하고 있었으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한문에 익숙하지 못한 시골사람들도 어려워보이는 듯한 한자말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노점상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면 ‘왼쪽으로 돌아서’가 아니라 ‘좌회전해서’라고 가르쳐주기도 한다. 자동차문화의 결과이다. 지식인의 ‘말흉내’를 내고 있다고 한심해하는 지식 인 국어순화론자들이 그 노점상에게 가서 ‘왼쪽으로 돌아서’라고 ‘계도’한다면 그 노점상은 잠시 숙연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달리보면 그러한 ‘계도’행위는 대중들의 언어적 사용 욕망을 ‘우리말’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현실적인 흐름에 따라서 분포되는 언어적인 사용의 필요와 욕망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우리말로만’이어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말’이라는 규범과 당위성을 떠나서 소통되는 언어적 현상의 흐름이 결정한다. 거기에는 또한 언어적 권력도 개입한다. 인쇄업계에는 일본말 잔재들이 많다. 인쇄공들은 그 말들을 얼마나 잘 숙련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노동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받기도 한다. 그 ‘위치’라는 것은 생존환경, 능력인정, 그 세계에서의 담론구조와 밀접히 연결된다. 즉 그 문제의 일본말 잔재는 인쇄공들을 어떠한 지위의 주체로 호출하는가 하는 의미체계로 사용되면서 그들 사이의 권력을 전략화한다.
우리말이란 바로 이러한 언어일반적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말이라는 육체를 역사적-현실적으로 끊임없이 변경하고 분포화한다. 우리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러한 과정 자체가 우리말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원형’을 가지고 우리말이 병들어가네 어쩌네 하는 것은 편집증적 악몽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되어진다’에서처럼 ‘-진다’는 원래 우리 말법이 아니므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지식인들이 ‘지식병’에 걸려서 외국 말법을 도용하는 짓이라고 분노하면서 말이다. 민중들의 삶에서 나오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 토박이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한 닷새쯤 지나가니까 대충 시간을 알아져갑디다.” 이처럼 제주말에서는 ‘-지다’가 자주 나온다. 이것은 어찌된 현상일까? 이미 지식인들이 점령해버린 까닭일까? 나는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제주말에 이미 그러한 구조가 고유하게 존재해온 것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된다면 지식병이니 하는 진단들은 정말 돌팔이 의사의 편집증적 왜곡일수 있겠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말의 원형’론을 가지고 진짜 우리말의 ‘원형’을 외국어 번역말투라고 둔갑시켜버리는 기괴한 일이 자초된다.
그렇다고 여기서 나는 ‘신원형론’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설령 우리말에 고유하게 존재해 오지 않은 외국식 말법이나 표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의 방식들을 새롭게 표현해내고 생산해내는 데 참여할 수 있다면 굳이 철조망을 단단히 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것은 또 ‘우리’라는 공동체적 맥락이 아니고 ‘인간’의 표현적 자유를 위한 한 실천이기도 하다. ‘우리말’이라는 편집증적 잣대는 사람들의 표현의 새로움, 표현의 차이, 표현의 미세함, 표현의 가능성, 표현의 실험, 요컨대 언어적 사용욕망을 억압한다. 우리말을 ‘살리자’는 호소가 사실은 우리말을 ‘죽이는’ 함정이 여기에 있다. 우리말은 항상 이미 위기에 처해왔다. 그 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극단을 내포한다. 우리말의 ‘원형’화 극단과 ‘우리말’의 소멸화 극단 말이다. 우리말의 육체적 분포를 풍부히 하고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서 양극단의 경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말 살리기’의 우리말 죽이기/이대학보/고길섶 ****
첫 번째 글은 옛교과서에 실렸던 국어순화론이다. 언어(순우리말)는 사상이나 민족을 형성하는 도구이므로 외래어를 걸러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견해는 이런 견해에 대한 반박이다. 어느 쪽이 옳은 견해냐는 것은 학생들 스스로에게 맡긴다. 다만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언어는 우리 삶을 단순하게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고 이룩해 내는 주요 실천 도구라는 점이다. 따라서 각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우리나라 말과 같이 약소국가의 언어는 시대 상황에 따라 상징도구로서의 역할이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곧 일제 시대같은 상황에서는 그런 기능이 강조되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무엇인가
이 단계부터는 학생 작품을 보면서 생각해 보자. 지금부터의 학생 작품은 학생 논술 답안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름은 가명이다.
최근 들어서 우리 말을 아끼자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 쓰고 있는 외래어를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도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주장이지만 여러가지 문제들을 수반할 수 있다.
우리는 북한에서 ‘로터리’를 ‘도는 네거리’로,‘팬티 스타킹’을 ‘양말 바지’로,‘베이킹 파우더’를 ‘부풀음제’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웃곤 한다.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어감 때문일것이다. 우리도 이처럼 몇 십년동안에 걸쳐 써와서 익숙해진 말을 바꿀만한 어휘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물론 ‘와리바시’나 ‘캔디’와 같이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는 말과 ‘유아틱’과 같이 외래어도 아니고 우리말도 아닌 어설픈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텔레비젼’이나 ‘라디오’같이 우리말로 바꾸기가 힘든 어휘들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감이 어색해질 뿐만 아니라 우리말로 바꾼다고 해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언어는 사전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언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는 말소리 또는 말투의 차이에 따라 말이 주는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어감이다. ‘터널’을 ‘땅굴’로 부른다면 사적적 의미는 서로 같을지 몰라도 그 어감의 차이는 굉장하다.
사람들은 우리말을 아끼자 하면 모든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 한 코메디 프로에서 방송된 것중에는 야구 중계를 순 우리말로 하여 보여 주는 것이 있었다. 그 방송에서 ‘투수’를 ‘공을 던지는 이’로,‘포수’를 ‘공을 받는 이’로 표현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했었다. 국어 순화란 앞에서 말한 코메디 프로처럼 모든 것을 우리말로 하자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외래어의 사용은 자제하고 우리말로 바꿔야 하겠지만 불가피한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꿀 필요는 없다.- 이다솔/고3
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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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문제를 출제했는가 → 출제 의도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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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가 왜 문제인가 → 문제제기 :순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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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관점과 방향 설정:어감이 더 중요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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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무엇인가 → 주장/결론:불가피한 외래어는 바꾸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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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논증할 것인가 → 전제나 근거 설정:(1) 북한 말의 웃음거리
(2) 바꿀 수 없는 외래어
(3) 언어에서 어감의 중요성
(4) 순우리말 코미디 프로의 우수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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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구성하여 멋들어지게 표현할 것인가.
1) 국어순화 운동에 대한 문제제기
2) 일방적인 국어순화론에 대한 반론의 근거와 관점
(1) 북한 말의 웃음거리
(2) 바꿀 수 없는 외래어
(3) 언어에서 어감의 중요성
(4) 순우리말 코미디 프로의 우수움
3) 불가피한 외래어는 바꾸지 말자
위 학생은 어감을 중심으로 순우리말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구체적인 보기를 다양하게 들고 누구나가 쉽게 자신의 논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깔끔하게 쓴 점이 마음에 든다. 다만 주된 근거 설정에서 특수한 상황의 근거를 들어 그 논증의 설득력이 반감되고 있다. 곧 북한이라든가 코미디 프로의 보기는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것들이다. 북한의 순우리말 바꾸기가 남한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우스울지 모르나 북한 안에서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코미디 프로는 프로 성격상 더더욱 설득력이 부족하다. 결국 어감의 중요성을 웃음거리라는 주관적 정서로 논증하여 왜 어감이 중요한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웃음거리를 유발하는 것도 중요한 어감이긴 하나 그것을 두 번씩 언급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문장이 조금 상투적인 느낌을 준다. 자신의 주된 관점보다는 절충형 문장으로 얼버무렸기 때문이다. 곧 ‘불필요한 외래어는 --- 우리말로 바꿔야 하겠지만 불가피한 외래어는 바꿀 필요가 없다’식의 표현은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자’는 식의 문장과 다를 바가 없다. 어감을 주된 관점 기준으로 삼았다면 그것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마무리를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말’을 살리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우리말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외래어로 표기된 어휘들을 우리말로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35년간 지배를 받았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 속에는 일본말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고 광복 후에는 서양말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서 영어가 최고인 듯이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가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오면서 우리의 훌륭한 문화 유산인 우리말을 잘 보존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말을 살리자는 주장에 대한 호응 방법으로는 우선 외래어가 섞인 잘못된 어휘들을 바꾸자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속에서 익숙하게 사용하여 오던 그런 어휘들을 갑자기 우리말로 바꾼다면 혼란이 생길 수도 있지만 빨리 외래어 어휘들을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언어 생활은 주체적인 말을 잃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일것은 외래어라고 할 지라도 현실에 맞게 말을 살리고 아름답게 다듬는 것이 정말로 우리말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두번째로 우리 나라의 국민들의 의식도 외래어,외국어 보다는 우리말을 사용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깊숙히 뿌리 박혀 있어야 한다. 상대방과 말을 할 때에도 괜히 영어 단어를 섞어 가면서 말을 해야 유식해 보인다는 헛된 생각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말을 좀 더 조리있고 알차게 쓸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을 골똘이 생각해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외래어인 어휘들을 바꾸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몇 년전 스포츠 해설을 할 때에 전문적인 용어를 우리말로 바꿔서 하다가 우스꽝스러운 말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투수를 ‘공 잡는 이’,포수를 ‘공 받는 이’로 풀이 하다가는 야구 해설을 속도감있게 빠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외국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래어를 쓸 수 밖에 없는 이런 전문적인 용어들은 제외하고 우리말로 원래 있었던 어휘들은 잘 보존하자는 것이다. 잘못된 어휘를 바꾸려는 노력은 힘든 작업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올바른 언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다샘/고3
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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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문제를 출제했는가 → 출제 의도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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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가 왜 문제인가 → 문제제기 : 왜 우리말 살리기가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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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관점과 방향 설정: 우리말은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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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무엇인가 → 주장/결론:어휘바꾸기는 올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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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논증할 것인가 → 전제나 근거 설정:(1) 우리말의 역사성
(2) 바꾸지 않으면 주체성 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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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구성하여 멋들어지게 표현할 것인가.
1) 우리말의 역사성
2) 외래어 바꾸기의 의의점
(1) 바꾸지 않으면 주체성 잃음
(2) 현실에 맞게 바꾸자
(3) 국민 의식을 바로잡자
(4) 일부 예외는 있음
3) 어휘 바꾸기는 올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꼭 필요
위 학생은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편 뒤 논거에 대한 예외를 언급한 뒤 글을 맺는 흐름 자체는 무척 명료하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보인다. 먼저 용어의 혼동이 눈에 거슬린다. 이 글에서 우리말 살리기는 순우리말 살리기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말은 외래어도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점에 대한 처리가 부족하다. 문제 지문의 앞의 견해를 지지하였으면 왜 그런 관점이 어감을 중시하는 관점보다 더 자기 마음에 들었는지를 분명히 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국민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상투적인 어른들의 언어를 차용하게 된 것이다. 전제와 논거에서도 일반적인 역사 보기와 언어를 잃으면 주체성을 잃는다는 조금은 극단적인 논거만을 제시해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반론에 대한 언급에서 어감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실용성을 기준으로 해서 전체 논지의 흐름이 탄탄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주어진 지문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뒤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 방식을 보자.
요즈음 순한글로 어휘를 바꾸자는 주장과 현실에 맞게 어휘를 다듬자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위의 두 화자도 이러한 문제로 대립되고 있는데,과연 두 주장은 어느 것이 현실에 잘 반영될 수 있을까?
첫번째 화자의 순한글로 바꾸는 주장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물론 순한글로 바꾸자는 주장이 ‘신토불이’라는 말을 요즈음 많이 듣는 우리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겠지만,그 주장을 현실에 반영하는데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컴퓨터를 셈틀 즉 순우리말로 바꾼 어휘를 사용하게 될 경우 혼란이 따르게 된다. 컴퓨터를 ‘컴퓨터’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셈틀이 어떻다고 이야기할 경우 둘사이에 심한 이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최현배선생의 한글전용론의 몇가지 예를 적용시켜보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번째 화자의 현실에 맞게 어휘를 다듬자는 주장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어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땅굴,터널 물론 비슷한 뜻이기는 하지만,단지 어감때문에 터널이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터널이라는 말은 외래어로써 외국에서 쓰였다. 처음 이 외래어가 쓰였을 때,어감이 반드시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터널이라는 단어가 어감이 좋게 들리는 이유는 그리 긴 기간은 아니지만,그동안 많이 불리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어감때문에 터널이라는 말을 썼다면 모든 외래어들도 어감이 좋아서 우리말은 각기 다른 언어들의 집합체가 될것이다.
따라서,어휘를 바꾸는 데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은 현실에 맞게 어휘를 다듬자는 원칙아래,오랫동안 쓰여서 정착된 어휘에 대해서는 그대로 두고,지금 현재 생성되는 어휘에 대해서 순수한 우리말을 쓰거나 적절한 우리말이 없을 경우 외래어로 대체해서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 고손돌/고3
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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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문제를 출제했는가 → 출제 의도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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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가 왜 문제인가 → 문제제기 : 대립된 두 견해 가운데 어느 쪽이 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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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 관점과 방향 설정: 현실에 대한 실용성으로 바라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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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은 무엇인가 → 주장/결론: 현실성을 바탕으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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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논증할 것인가 → 전제나 근거 설정:(1) 첫 번째 견해의 오류
(2) 어감보다 현실성이 더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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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구성하여 멋들어지게 표현할 것인가.
1) 문제제기
2) 대립된 두 견해 분석
(1) 첫 번째 견해 오류
(2) 두 번째 견해 지지 이유
3) 현실에 맞게 어휘를 다듬자
위 학생은 두 견해를 자신의 주장 위주로 분석하는 태도가 깔끔해보인다. 그리고 어감이라는 언어 내적 위주의 기준보다 실제 현실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좋다. 다만 그 현실이라는 기준이 무엇인지 막연하다. 왜냐하면 주어진 두 견해가 작동하는 것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논술에 대해 답한 학생들의 전체 흐름을 보면 대부분 자신이 겪은 삶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교과서 지식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언어에 대해 평소 적극적인 고민을 안한 탓이다.
9. 아쉬움을 남기며
거칠게나마 삶의 실천 과정으로서의 논술의 대략적인 모습을 흝어 보았다. 이번을 기회로 논술이 좀더 친숙하게 학생 여러분들에게 다가오길를 바란다. 논술을 가르치다 보면 논술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느냐고 어떻게 준비하느냐고 묻는 학생들이 많다. 학생마다 성향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르므로 뭐라고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차분하게 기본 방향만을 생각해 보자. 내가 낚시 방법만을 얘기해 보겠다는 것이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앞에서 강조했듯이 우리 삶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 보는 것이다. 문제 의식, 문제 제기는 삶에 대한 관심과 고민의 처음과 끝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책을 스스로 찾아 나서고 보고 듣기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설정해 나가야 한다.
평소 논술을 연습할 때는 대학 입시 문제 스타일로만 할 필요가 없다. 입시 때문에 고달프다면 그 작은 고통을 더 나아가서는 작은 희망을 글로 표현해보자.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과감하게 써서 신문 독자 투고란에 보내 보자. 통신에도 올려보자. 컴퓨터가 없으면 있는 벗에게 부탁해보자. 일부 제도 언론의 횡포가 심하기는 하지만 여러분의 잘된 글을 크게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청소년 드라마 여학생상 왜곡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여학생이다. 요즘 텔레비전 프로그램중 이른바 청년문제를 다룬다는 드라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로 주인공들은 남자이고 여학생들은 그들의 시각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남학생들의 성격은 적극적이고 활발하며 진로문제, 친구문제, 이성문제, 학교문제 등 다양한 고민을 하며 자라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아이들로 그려지는 반면, 여학생들은 순종적이고 소극적이고 감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는 정반대로 남자친구를 가운데 두고 언니나 친한 친구와 싸울 정도로 속물적이거나 신데렐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자들 시선에나 신경쓰는 한심한 존재들로 묘사돼 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외모, 연예인, 패션, 남자친구 따위들로 한정돼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왜곡된 것 같다. 적어도 우리또래 여학생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선도할 임무가 있는 방송매체에서 여학생들을 이런 식으로만 몰고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길난희/대전시 동구 가양2동 부성아파트/한겨레 신문 국민기자석, 96.06.12
이렇게 적극적으로 글을 쓰면서 기회가 있다면 까짓것 입시 전선에도 자원 입대하여 싸워 보자. 입시 전선 자체가 불만이라면 일단 전선을 통과 한 뒤 그 입시 전선을 위해 다시 싸워 보자. 내가 이렇게 당부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 나라를 이끌어 갈 동량지재라는 거창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당당한 주장이 우리 삶의 희망을 구성해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