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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부는 삶이다
살아있는 순간 오늘도 공부한다(장영희-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기할 정도로 특별한 재주가 없는 아이였다. 신은 늘 공평하다고 믿는 어머니는 내가 일생을 신체장애(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를 갖고 기동력 없이 살게 되었으니, 혹은 다른 특별한 재능이라도 주시지 않았을까 주도면밀하게 나의 ‘재능’ 찾기에 바쁘셨다. 내가 다섯 살이 된 어느 날, 일부러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한글을 깨치고 순정만화를 읽는 오빠 옆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신 어머니는 그날로 결정하셨다고 한다. ‘쟤는 천상 공부밖에 잘할 게 없는 팔자’라고. 이렇게 해서 특별히 잘 할게 없었던 나는 얼떨결에 공부하는 게 내 ‘팔자’가 되었다.
중학교를 가야하는데 내 신체장애를 이유로 어느 학교에서도 입학시험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학교 저 학교를 찾아다니시며 제발 입학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셨다.
나는 육체의 기능이 떨어지니 머리로 내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남만큼 아니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공부로 내가 이 세상에 발붙여야 하는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 당시에 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란 순전히 수작업과 관련한 일뿐이었다. 학교에 가지 못해 그냥 집에 있거나 아니면 내 무딘 손재주로 수를 놓거나 목공예나 시계수선 같은 일을 해서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내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공부만이 나의 살 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순전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나의 단 한 가지 재능까지도 원천봉쇄하려는 사회와 싸워이기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겼다!
이렇게 말하니 사뭇 전투적이고 비장하게 들리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 싸움을 나름대로 즐긴 것 같다. 이 세상에서 공부처럼 하기 쉬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육체노동을 극심히 싫어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아할 만큼 게으른 나에게 있어 ‘공부할 팔자’는 기막힌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세기 미국문학을 전공하여 석사,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교수가 되었다. 덕분에 나의 공부이야기는 이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얼마 전에 나는 한 방송사의 문학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방영되는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화면 아래로 내 경력이 자막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경력의 마지막에 ‘현재 암 투병중’이라는 말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아! 이제는 암도 내 ‘경력’이 되었구나’,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공부의 목적이 학습이고, 또 모르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암이라는 병을 통해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어쩌면 인생 최대의 경력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병에 걸리고 나서부터 나는 내가 몰랐던 사실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 몸이 얼마나 소중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좀더 의미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아픔을 통해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을 배운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가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병을 이기겠다는 의지로 눈이 빛나고 있다. 항암주사를 꽂고 병상이 열두 개나 놓여있는 입원실에 하루만 누워 있으면, 돈 많은 부자나 대학교수나 정육점 아줌마나 결국 생명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갖고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마치 풍랑 속에서 한 배를 탄 사람들처럼 동지의식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들은 오늘 함께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운다. 그러니 우리들은 한 교실에서 함께 배우고 있는 교우들이다. 그리고 ‘공부’ 밖에 잘하지 못하는 내 특유의 재능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받았듯이, 이번에도 나는 혼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여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영원히 얻지 못했을,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아름다운 경력을 쌓을 것이다. 가슴으로 절절히 배우면서….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고미숙-고전평론가)
대학 4학년 때, 당시 명성을 날리던 한 평론가의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세련된 이론과 쌈박한 해설을 예상했건만, 희한하게도 그 강의는 ‘고전소설강독’이었고 제목에 걸맞게 강의방식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끙끙대며 써낸 독후감은 매번 맞춤법, 논리적 시각, 구성 등에 대한 세밀한 논평과 함께 되돌아왔다. 나는 독후감을 돌려받을 때마다 긴장과 감동으로 가슴이 ‘떨렸다’. 아마도 하찮은 내 사고의 파편들이 세심하고도 치밀한 지적 배려를 받는 데서 오는 자긍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수업을 통해 그간의 수업들, 운동권 서클에서 한 의식화 공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한 지적 촉발을 받았다. 그 촉발에 부응하여 나는 가차 없이(!) 내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안개 속의 풍경’처럼 모호하기 그지없었던 서양문학의 장을 떠나 한국고전문학이라는, 낯설고도 이질적인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대학원 석사과정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다. 그 시절 내가 속한 대학원은 정체불명의 격정과 혼돈이 들끓는 용광로 그 자체였다.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스승들과 나처럼 그 스승들로 인해 삶의 경로를 바꾼 ‘강호의 고수’들이 한 치의 양보 없이 각축하는 일종의 무림(武林)이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도 마치지 않고 겁도 없이 이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선배들의 표현에 따르면 구제불능의 ‘하룻강아지’였다. 수업 중에 발표한 내 발제문은 언제나 박살이 났고, 격렬한 논쟁에 단 한 번도 말을 섞어보지 못한 처참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당시 지도교수님은 미국에 계셨는데, 내가 간신히 석사논문을 고쳐서 보내면 시뻘건 ‘피바다’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오기도 했다. 한 편의 글, 아니 단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검을 벼리고 악기의 현을 고르는’ 것만큼 처절한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신체와 감성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오직 뚝심과 오기만으로 버텨냈지만 그 시절 나는 진정 행복했다. 앎에 대한 열정과 스승과 동학들 사이의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공부법의 ‘하부구조’에는 그때 새겨진 기억들로 충만하다.
박사과정 시절, 고전문학 연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나는 선배들의 유혹에 이끌려 늦깍이로 마르크스ㆍ엥겔스라는 새로운 스승들을 만났다. 『공산당 선언』,『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자본론』 등을 읽으며, ‘경이에 찬 불면의 밤’을 보냈다. 무엇보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 건 그들의 문체였다. 고도의 난해한 이론과 경제학적 분석이 그토록 눈부신 수사학을 동반할 수 있다니! 적을 공격할 때는 폐부를 찌르듯 예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폭로할 때는 눈물겹게 애절했으며, 혁명의 파토스를 고양시킬 때는 말할 수 없이 힘찼다. 말하자면 마르크스ㆍ엥겔스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지식의 외부’였다. 지식이 대학을 박차고 거리로 나아가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는 것, 또 글쓰기가 아카데미의 경직된 성채를 박차고 나오면 낯설고 역동적인 경계를 획득한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내 박사논문에는 어설프나마 이 새로운 스승들의 가르침을 체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담겨있다.
하지만 박사논문을 쓰고 ‘세상 속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90년대 중반이었다. 소비에트는 붕괴된 지 오래되었고, 혁명에 대한 비전은 사라져버렸으며, 설상가상으로 제도권 진출은 요원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내 공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가치들이 지상에서 홀연히 증발해버린 것이다. 알 수 없는 어떤 목소리들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고, ‘이제 너 자신으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초발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물음들은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어째서 혁명의 열정은 바리케이드 위에서만 들끓는 것일까? 바리케이드가 걷히면 왜 모두들 다시금 중산층의 무기력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80년대를 주름잡던 ‘진보적 학자’들 상당수가 제도권에 진출했는데, 그럼에도 왜 ‘인문학의 위기’라는 유령은 끊임없이 대학 주변을 배회하는 것일까?
이 물음들이 ‘근대적 주체생산’이라는 문제틀 안에 있다는 것을 니체와 푸코, 들뢰즈ㆍ가타리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들의 난해하면서도 까다로운 세계를 친절하게 안내해준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좋은 친구들’과의 접속이 이루어졌다. 수유리에 작은 둥지를 틀고 근대성, 동아시아, 고전문학 등을 주제로 한 세미나와 강좌를 연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후 몇 번의 공간 이동을 통해 연구실은 차츰 ‘지식인 코뮌’으로 자신의 모습을 갖춰갔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실험! 연암을 만난 것도 이 과정에서 였다. 생은 길섶마다 예기치 않은 행운을 숨겨놓는다고 했던가. 여행의 스릴과 서스펜스, 거대한 문명적 비전과 심연을 투사하는 시선, 범람하는 유머와 패러독스 등등. 마치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지평선을 마주했다고나 할까. 연암의 『열하일기』의 진면목을 아주 먼 우회로를 거쳐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그때 이후 연암 박지원은 내 평생의 사우(師友)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친구이면서 스승인 존재- 가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탁오에서 허준, 노신, 달라이라마에 이르기까지 탈근대의 드넓은 비전을 제시해줄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공부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공부가 일상이고, 일상이 곧 공부다. 바로 그 때문에 일상은 곧바로 혁명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혁명이란 바리케이드 위에서, 적대적 투쟁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그런 류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건 존재의 생성과 변이를 가능케하는 유목적 여정,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경계조차 넘어 우주와 소통하는 구법(求法)의 여정이 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공부는 원초적 본능이자 삶의 모든 과정”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2. 공부는 새로움이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라(윤구병-농부철학자)
1950년 6월 25일에 벌어진 전쟁으로 헌걸찬 아들 여섯을 잃은 아버지는 남은 자식 셋을 데리고 서울에서 시골로 삶터를 옮기셨다. 아버지에게 무릇 이념은 그것이 사회주의로 포장되었건 자본주의의 탈을 쓰고 있건 모두 몹쓸 것이었다. 제도교육이 멀쩡한 자식들의 머리를 뒤흔들어 같은 핏줄을 서로 원수지간으로 만들어놓았으니, 겨우 목숨을 건진 자식들만은 아예 시골 무지렁이로 길러 피바람 부는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뜻이었다. 1ㆍ4후퇴 때 고향 근처로 옮겨간 뒤로 4년 동안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가족의 비운이 도리어 나에게는 소중한 공부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해와 달, 행성의 움직임 따위를 빌어 물질의 운동을 계산하고 그것을 ‘시간’이라 부른다. 이때의 시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한 ‘가짜’ 시간이다. 이것은 ‘진짜’ 시간, 생명계에 고유한 살아 있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 즉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이다. 물질화한 ‘인간의 시간’은 알맹이가 없이 늘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생명체의 몸 안에 간직된 시간은 비어 있는 시간, 똑같이 쪼개져 있어 그 안에 아무것이나 채워 넣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갯지렁이의 시간이 불가사리의 시간과 다르고, 또 질경이의 시간, 곰밤부리의 시간, 고슴도치의 시간, 다람쥐의 시간도 저마다 다르다. 이 저마다 다른 살아 있는 시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길섶에서 짓밟히는 질경이를 보라. 저 여린 생명체가 움 돋고, 꽃피고, 열매 맺는 데는 외부의 간섭이나 통제가 필요 없다. 저절로 자라는 것이다. 누가 밖에서 돕거나 부추기거나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저 알아서 제 삶의 시간을 통제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일과 놀이가 하나로 어우러진 자연의 삶을 즐기면서 생명의 세계에서는 자유와 필연이 하나이고, 삶의 본질은 자율성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렇게 자연의 아이로 자라던 나를 제도권 교육으로 밀어 넣은 사람은 고종사촌형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형은 “초등학교라도 다니게 해야 제 앞가림은 하지 않겠느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러나 정작 내 삶의 소중한 시간들은 학과공부가 끝나거나 수업이 없는 주말과 방학 때에 시작되었다. 나는 산과 들을 쏘다니면서 청미래나 정금 열매를 따먹고 메기, 가물치와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학년말 시험을 앞두고 한겨울 눈 쌓인 벌판으로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나는 철학공부가 목적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우여곡절 끝에 철학교수로 내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5년에 걸친 ‘앵무새’ 철학교수를 끝으로 나는 철부지 농사꾼 흉내로 지난 10년을 살아왔다. 그 동안 나는 하루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날마다 새롭게 익히면서 어제 배우고 익힌 것들이 오늘 쓸모없어지는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 그렇게 자연과 함께 살면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라”는 공자의 말씀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그러지 않으면 니 앞가림을 제대로 할 수 없느니라”란 말이 감추어졌겠지). 요즘 내 공부의 주제는 사랑이다. 무슨 거룩한 종교적 사랑이 아니라 짝지어 씨를 퍼뜨려서 생명의 시간을 미래로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남는 길’을 닦는 뜻에서 사랑이다. 사랑 속에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가 숨어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언제나 책가방을 갖고 다닌다(제타룡-전 도시철도공사 사장)
매일 몇 시간씩 책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35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늘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지금도 여전히 책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타지에서 어업을 하셔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님을 보면서 나도 할머니처럼 죽을 때까지 한 가지는 열심히 하겠다고 선택한 것이 공부였다. 어려서 읽은 책도 내 공부 인생에 도움을 주었다. “마른 논에 물을 대면 싹이 돋아나고, 계속 물을 대면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그래도 계속 물을 대면 나무는 더 커서 열매를 맺고 그늘이 져서 쓸모가 있게 된다. 사람도 계속해서 머리에 물을 대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도 머리에 물을 대듯 책을 가까이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공부하는 습관이 드니 평생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시 과장과 국장이 되면서부터는 각종 행정, 경영, 경제에 관한 자료들을 접하는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수많은 자료들이 축적되다보니, 정책을 수립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1994년 당시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인 친구가 보내준 CEO 정보지를 읽고 또 읽었다. 또 외국의 석학들이 쓴 책과 자료도 꾸준히 읽었다. 이런 자료들을 꼼꼼히 챙겨 읽은 것은 행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97년 4월, 시청 간부회의에서 내가 외환위기를 예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렇게 살아 있는 자료를 꾸준히 읽은 덕분이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나처럼 관련자료들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상할 수 있었다. 또한 외국의 각종 자료들을 읽으면서 세계 벤처사업의 발전과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시장에게 새로운 정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1998년 정년을 1년 앞두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 나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우선 전문대에서 골프를 배워 골프강사 자격증도 따냈다.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는 도시행정학을 공부했고, 내처서경대 영문학과에도 편입학했다. 실용학문을 공부했다가, 영문학을 공부하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렇게 문ㆍ사ㆍ철(文思哲)의 공부를 통해 자아를 새롭게 그릴 수 있었다. 특히 영문학을 공부하며 너대니얼 호손을 배우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다. 그는 인간은 부모, 친구, 동료, 이웃 등 주변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반 윤리적이거나 비 도덕적일 때는 이 고리가 끊어지게 되어 결국 불행하게 산다는 ‘인간성의 고리(chain of humanity)'이론을 내세웠다. 그 바탕에서 쓴 것이 『주홍글씨』이다. 나는 호손의 가르침을 경영은 물론 나의 자아성숙을 위한 지침으로 삼고 있다.
내가 공사를 맡아 다음의 몇 가지 경영 원칙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꾸준히 공부한 덕분이다. 첫째, 나는 ‘지식경영’을 강조한다. 직원들에게도 가능한 한 공부 기회를 많이 주려고 했다. 석박사 과정에 들어가면 등록금도 지원해주고, 기술영어와 영어회화도 배우게 했다. 또, 미국의 기술 분야는 학문의 트렌드가 1년 6개월마다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신기술에 대한 사이버교육 시스템도 구축했다. 이렇게 가르치는 만큼 직원들의 기술혁신도 크게 향상되어 불필요한 비용이 들지 않았다. 둘째, 감성경영이다. 관리자의 솔선수범을 직원들이 보고 스스로 변화, 발전해 가도록 했다. 셋째, 윤리경영이다. 이는 앞서 말한 호손의 철학에서 배운 것이다.
넷째, 지혜경영이다. 이를 위해 직원들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인센티브 제도를 확대했다. 직원들 개개인의 긍정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못 한다는 마음의 벽을 넘어서도록 했다. 또한 미래학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여 장래 비전을 수립할 수 있었다. 21세기는 20세기의 생각과 경영전략으로는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 미래학자들의 생각이다. 무엇이 될지는 몰라도 새로운 전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새로운 전략,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시 세상을 똑바로 보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오늘도 아침 7시에 영어학원에서 한 시간씩 강의를 듣고서야 출근한다. 벌써 5년째 계속하고 있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3. 공부는 즐거움이다
세상에 공부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조동일-계명대 석좌교수)
나는 왜 공부하는가? 이 물음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즐거우니까. 공부에서는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고 전에 없던 경지로 나아간다. 새로운 것을 남들에게서 받아들이다가 스스로 찾아내는 감격을 매번 다르게 경험한다. 이 세상에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아내고, 그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공부에서 얻는 보람의 극치이다.
『한국문학통사』를 쓰고 거듭 고치느라고 관련된 모든 논저를 보아야 하는 중노동이 사는 보람을 더해주었다.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세계문학사의 전개』 등에 관한 작업은 멀리 나다니면서 책 사냥에 욕심을 낸 결과이다. 여러 학문에 관한 업적을 많은 나라에서 만나면서 토대를 넓히고 구상을 키웠다. 그 덕분에 50여 종의 책을 냈다. 그러나 지식을 많이 얻는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이미 해놓은 일에 묻혀 헤어나지 못한다면 즐거움은 사라진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학문의 저작은 몇 만 개의 부품을 필요로 하는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더욱 정교하다. 부품이 따로 놀지 않고 각기 맡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총괄 설계가 생명이다. 스스로 깨달은 바가 없으면 지식이 무용하다.
‘많이 알면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연구할 만한 것은 남들이 이미 다 찾아낸 탓에 새로운 과제는 없다. 적당하게 무식한 덕분에 아무 말이나 겁 없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다’고들 한다. 이는 아는 것을 새롭게 휘어잡아 올라서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밑에 쳐져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들의 유식은 무식이다. 몰라도 큰 지장이 없는 것들은 너무 많이 알고, 꼭 알아야 하는 단 하나의 이치는 모른다. 휘어잡아 올라가려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는 스승도 소용없고, 어떤 명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머리를 비워야 한다.
나는 공부하는 자리를 어디서 펴든 나다니기를 좋아했다. 영남대학교의 넓은 교정을 거닐면서, 한국학대학원 시절에는 주변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전철역에서 내려 서울대학교까지 걸어가면서, 지금은 계명대학교 성서 캠퍼스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면서 내 나름대로 공부의 도를 터득했다. 산천초목이 책을 대신하는 곳에서 막힌 생각을 풀고, 숨은 원리를 깨닫는다. 머릿속에서 먼저 쓴 글을 나중에 종이에 옮겨 적는다. 깨달음이란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 숨어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나타난다. 갑자기 한 소식 올 때의 놀라움. 짙은 구름이 걷히고 새 천지가 열린다. 서로 무관하던 것들이 하나로 꿰어진다. 겉만 보이던 것들이 속을 드러낸다. 천고의 비밀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한다. 즐거우니까 한다. 이렇게 대답해도 납득하지 못하면, 공부는 일종의 미친 짓이라고 대답한다. 누구는 놀음에, 어떤 사람은 낚시에 미치는 것과 같다. 미친 짓 치고는 괜찮은 것이 아닌가.
혼자 끈질기게 생각한다(임지순-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나는 1970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 대학교는 계엄령과 위수령, 그리고 유신을 겪으면서 휴교 중인 때가 많았고, 그렇다 보니 학생들은 자연히 나라의 장래와 그에 따른 젊은이들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고민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는 물리학이나 고급수학을 깊이 배울 기회가 없었다. 대신에 소설과 사회과학책들을 많이 읽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소설을 특히 좋아했는데, 이는 어머니의 독특한 교육관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강한 분이셨지만 과외 같은 선행학습은 전혀 시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가 세계문학전집 같은 책들을 많이 읽도록 가르치셨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어주시고, 또 그 일을 진득하게 해낼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다. 당시에 나는 독재에 저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시절을 보내다가 나는 더 높은 학문의 뜻을 이루고자 유학을 결심했다. 버클리 대학은 주립대학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많았다. 여기서 나는 한국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물리학의 기초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첨단과학일수록 축적된 학문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을 갖고 새로운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축적된 학문을 좇아가는 것은 공부라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은 공부로 잘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나중에는 평범한 사람으로 주저앉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기만의 엉뚱한 생각, 즉 독창적인 사고가 축적된 이론과 만났을 때 비로소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독창적인 사고는 다양한 분야를 접하면서 자기 전공과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가운데 자연스레 싹트게 된다.
축적된 학문을 다 익힌 상태에서 공부(혹은 연구)는 두 가지 경로를 거쳐 비약한다. 하나는 혼자서 생각하는 것이다. 흔히 공부나 연구라고 하면 책을 읽거나 논문을 쓰는 것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공부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오히려 혼자 끈질기게 생각하는 것이 과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공부다. 두 번째는 비슷한 수준의 다른 연구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물리학의 중심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여건이 잘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몰려온 다양한 연구자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풍부한 학문적 대화를 나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만남을 계기로 자기 연구 분야에서 뜻밖의 획기적인 해답을 얻곤 한다.
1997년 내가 탄소나노튜브의 반도체적 특성을 밝혀낸 연구도 버클리 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그곳 연구팀과 합동 연구로 이뤄낸 성과였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단기간에 따라갈 수 없는 것도 사실은 시설이나 자금의 부족보다는, 바로 이런 수준 높은 연구진들의 수가 많지 않고, 또 그들과 풍부한 상호작용의 효과를 누리지 못한 원인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축적된 학문을 익히는 체계적인 공부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직관적인 아이디어도 실은 체계적인 학문이 바탕이 되어 나온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어느 분야에서나 축적된 학문을 익히는 것은 공부라고 강조하지만, 반면 다양한 분야를 체험하는 공부는 소홀하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미국인들과 공부하면서 또 감탄한 것은 틀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다. 이들은 생각과 의사 표현이 매우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현상을 설명할 때 그것과 별로 관련 없는 이론과도 쉽게 연관 짓는다. 그러는 가운데 정말 획기적인 발견이 나온다. 나는 학생들에게도 “틀릴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르는 것은 반드시 물어보라”고 강조한다. 학문은 예술과 같아서 독창성이 가장 중요한 분야이다.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기존의 것을 따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자기만의 새로운 것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틀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가 매우 중요하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과학자나 대학생들은 이런 면에서 대담한 독창성이 매우 부족함을 절감하곤 한다. 내가 공부하는 것이 사회전체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도 나는 지금의 공부가 참으로 즐겁다.
공부는 즐거운 창조다(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나는 거창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선비가 글을 제대로 읽으면 천하가 바로 잡힌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나는 그 ‘천하’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나는 나를 알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이기적인 동기만 갖고 있을 뿐이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는 것이 내 공부의 내용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나는 인문학자다. 따라서 나의 공부는 자연히 후자에 관심을 갖는다. 나를 안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나에 대해 아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유아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라 하자. 내가 지금도 신실한 천주교인이라면, 나의 ‘천주교인임’을 구성하는 내용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2천년에 걸친 수많은 논쟁의 결과 단 하나의 정통으로 확립된 신학이다. 곧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신앙이 남이 만든 신학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요컨대 나는 내가 아니다. 타자의 사유가 나에게 설치되어 나에게 구성하고 명령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그것은 컴퓨터의 운영체계 같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윈도를 설치할 것인지, 리눅스를 설치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프로그램이 있는지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 결과 나의 대뇌를 차지한 타자의 사유들이 나로 하여금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여기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분석해보면 나는 위에서 말한 타자들의 담론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복합물이다. 나는 복수적 타자가 나에게 설치한 프로그램의 내용들과 그 프로그램을 설치한 의도를 알고 싶다. 이것이 내가 공부하는 이유다.
나는 우연히 국문학자이자 한문학자가 되었다. 나의 전공은 그야말로 인문학 중에서도 변방이고 오지에 속한다. 이 오지를 탐사하는 나에게 국가/민족은 여전히 민족의 우월한 문화, 전통을 찾아낼 것을 명령하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도리어 관심이 있다면, 한문학을 생산했던 양반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제작했던가, 그 제작의 결과 인간을 얼마나 억압했던가 하는 문제에 있을 뿐이다. 대학의 학문분야는 한문학과 역사학, 혹은 사상사의 경계를 엄격히 나누지만, 그 경계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내가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제도적으로 한문학과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 제도가 나의 공부와 연구까지 제한할 수는 없다. 나에게는 문학과 역사, 사상의 경계선은 없으며 그 내부의 경계들도 무의미하다. 정치사, 경제사, 제도사, 풍속사 등의 경계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오직 관심이 있다면, 그것들이 한데 얽혀 인간을 ‘제작’해온 역사를 역으로 추적하여 나에게 진리로 설치되어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담론의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명대(明代)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는 ‘성교소인(聖敎小引)’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쉰 이전에 정말 한 마리 개였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서 짖을 뿐이었다. 왜 짖느냐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냥 실실 웃을 뿐이었다.” 오십을 바라보는 마흔의 마지막 지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본다. 20대 초반에 공부의 길에 들어섰지만, 나는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이탁오의 말처럼 남을 따라 짖는 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정말 공부를 하고 싶다. 오직 화폐를 향한 욕망이 범람하는 세상에 인문학자가 된 것은 불행이지만 화폐의 지배를 넘어서는 세계를 꿈꾸기에 한편으로 보람찬 일이기도 하다. 읽어야 할 책은 언제나 넘치고, 머릿속은 생각으로 늘 가득하다. 쓸 것도 많다. 공부는 괴로운 노동이자 즐거운 창조다. 적어도 나에게는.
4. 공부는 깨달음이다
인식의 날개로 훨훨 날다(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조금은 절망적인 세월을 살면서 보낸 어렸을 적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다행히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잘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실은 그것도 내킨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이 깊었던 탓이겠습니다만, 저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불안한 내일들의 소용돌이를 살았다고 겨우 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종교는 제게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종교는 제 삶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호흡하듯 기도했습니다.
참 고마운 충고들이 많았습니다. 선친을 따라 법대를 가든지, 아니면 의대를 가야 집안을 살릴 수 있다는 충고들은 지금 생각하면 마땅히 따랐어야 할 바른 말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추한 모습을 너무 일찍 ‘체험’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어른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골똘했습니다. 대학에 간다면 죽기 전에 읽고 싶은 책이나 마음껏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연하지만 저는 신학을 동경했었습니다. 죽음을 전제로 한 젊음이 마땅히 관심 가져야 할 것이 제 삶의 맥락에서는 그렇게 다듬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머물 수 없었습니다. ‘배운 물음’에 대한 ‘준비된 해답’을 되뇌는 것이 신학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학에의 반역’이라고 해도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 자신이 스스로 정직하고 싶다는 ‘자존심’은 저를 신학의 길을 버리고 종교학의 자리에 이르도록 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신심의 결여, 오만의 범람이 그 까닭이겠습니다만, 저는 특정한 종교가 발언하는 배타적인 언어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종교는 초월이나 신비의 범주에 든 별개의 것이 아니라 지극한 일상이 담고 있는, 그러나 그렇게 범주화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삶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승인하면서 그것을 애써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그것 자체로 ‘스캔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로 이루어진 종교에 대한 관심, 곧 종교학이란 결과적으로 종교를 근원적으로 해체하려는 음흉한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거나, 아니면 인식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해부하여 결국은 생명을 지닐 수 없는 것이게 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자리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제 물음을 정직하게 물을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한 듯했습니다. 적어도 종교학의 마당에 들어서면서 저는 인식을 위한 기존의 범주가 고쳐지거나 폐기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기존의 개념들조차 얼마든지 새로 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웠고, 글도 쓰고 싶었고, 발언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틈에 저는 ‘공부하는 사람’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즐겁지 않으면 공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닌 문제에 대한 반향(反響)을 경험해 나아가지 않으면 공부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학문은, 당연히, 학문답기 위한 문법을 스스로 갖춰야 합니다. 공부하는 일은 상상만도 아니고 실증만도 아닙니다. 무척 낡은 주장일지 몰라도 무릇 학문은 불가피하게 사물과의 일정한 거리를 지녀야 하고, 그렇게 인지된 사실과 사물에 대한 분석적인 이해와 통합적인 판단을 빚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학문의 배후에는 학문의 논리에 다 담을 수 없는 비학문적인 실존적 모티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간과되거나 어떤 의미에서든 제거된 학문은 지적(知的) 유희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학문의 귀결은 학문 자체의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학문을 처음 충동한 실존적 물음에 대한 실천적 귀결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종교를 공부하는 일, 그것은 저에게 천형(天刑)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으면 되는 일을 알려고 하는 일은 도무지 ‘효율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분명한데 그것을 피해가는 것은 아무래도 떳떳치 못합니다. 공부를 왜 하느냐는 물음에 이제 겨우 제 자리에서 답변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는 정직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내 물음을 묻고, 내 대답을 추구하는 자유를 호흡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공부하는 까닭의 전부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