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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 차명
2 역사
- 히틀러와 포르셰
- 타트라 모방설
- 패전 후의 부흥과 비약
- 생산 종료
- 파생 차종
3 새시와 엔진
- 엔진의 응용
4 보디
5 비틀이 등장한 작품
- TV·영화
- 만화·애니메이션
- 서적
- 게임
- 그 외
6 관련 항목
7 외부 링크
폭스바겐·타입 1
개요
탁월한 자동차 설계자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1920년대 이래, 오랜 세월에 걸쳐 안고 있던 고성능 소형 대중차의 계획이 1933년에 독일의 패권을 잡은 아돌프 히틀러의 대중 정책과 결합되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1930년대에 있어서의 가장 진보한 소형 승용차의 하나로, 그 진보성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세계적인 자동차 시장의 제일선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던 큰 이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1938년부터 양산을 시작했지만 2차 세계대전중에 공습에 의해서 공장의 대부분은파괴되었으나 전후 폭스바겐 공장을 관리하는 입장에 선 영국군장교 아이바·허스트의 노력에 의해 부활해 생산 개시에 이른다.
또한 원래 오펠사 간부인 하인릿 노르트호후가 최고 경영자로 취임해 그의 경영 수완아래에서 독일 국내는 물론, 아메리카 합중국을 시작으로 하는 국외에의 수출에서도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큰 성공을 거두었다.엄청난 외화 획득에 의해서, 전후의 서독 경제의 부흥에 다대한 공헌을 했다.
1938년부터 2003년까지, 누계 2,152만 9464대가 생산되었다.이것은 4륜 승용차에 있어서의 세계 최다 양산 기록이다.
독일 본국에서는 1978년에 생산 종료하고 주력 생산품의 제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다.
폭스바겐 사는 이 차의 디자인을 모티프로 한 스타일을 가지는 모델 「뉴·비틀」을 1998년부터 생산하고 있다.
차이름에관하여
정식 용어로서 영어의 「Type 1」(이)라고 하는 형식명이나 「비틀」등의 애칭이 이용된다
시대마다의 정식차명은 「폭스바겐 1200」, 「폭스바겐 1300」, 「폭스바겐 1303/S」, 「폭스바겐 1303 LS」 등이 있었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Type 1(독일어에서는 「팁 1」 Typ 1)은 폭스바겐사 내에서 생산 형식 번호로 단지 「1형」이라고 하는 의미이며, 폭스바겐사의 1호차인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보다 알기 쉬운 통칭으로 불리는 것이 많다.
영어권에서는 그 투구풍뎅이와 같은 형태로부터 「비틀(Beetle)」 「버그(Bug)」, 독일에서는 1960년대 후반보다 「케이 퍼(K?fer=투구풍뎅이)」라고 하는 애칭으로 사랑받았다.
브라질등에서는 「푸스카」(Fusca=남미산의 대바퀴벌레)로 불려 일본에서는 영어의「비틀」외에 「투구풍뎅이」나 「워겐」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애칭이지만, 뉴-비틀로 폭스바겐사는 「비틀」을 처음으로 정식차명에 이용했다.
폭스바겐·타입 1의 역사
히틀러와 포르쉐
포르쉐가 개발한 자동차중의 하나 포르셰·타입 12(1931년)
이 차는 1933년 독일 수상으로 취임한 히틀러가 베를린 자동차 쇼의 석상에서 아우토반 건설과 국민차구상의 계획에 따라 개발되었다.
당시 아직도 고가였던 자동차를 「국민 전원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라고 하는 계획은 히틀러의 나치스당이 국민의 지지를 얻는데 절호의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후에 스포츠카 메이커가 되는 포르쉐사의 창업자인 페르디난트·포르쉐에 국민차의 설계를 의뢰하게 되었다. 포르쉐는 다임러벤츠의 뛰어난 자동차 기술자로 퇴사 후 1931년부터는 슈투트가르트에 독립한 설계 사무소를 지어 자동차 메이커로부터의 설계 위탁업무를 하면서 나치스를 지원하고 있던 「아우토반그랑프리 카」(이른바 P바겐 1933년)의 설계도하고 있었다.
포르쉐는 자신의 생애에 「고성능 레이싱 카」 「농업용 트랙터」 「우수한 소형 대중차」를 개발하려는 꿈을갖고 있었으며 1920년대 이래 여러가지 자동차 메이커와의 제휴로 리어엔진 방식의 소형차 개발에 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컨셉카를 개발한 단계에서 예산 부족이나 불경기 제휴 메이커의 저자세등에 의해서 계획을 성공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히틀러의 제안은 행운이었다.
운전은 하지 않았지만 자동차를 타는 것을 좋아하고, 메르세데스·벤츠와 타트라를 좋아한 카 매니아 히틀러는 포르쉐에 국민차의 조건으로서 순항속도 100 km/h 어른 3명과 아이 2명이 승차 가능한 일 7리터의 연료로 100 km의 주행이 가능한(=1리터 당의 연비가 14.3 km이상이다) 공냉 엔진의 채용, 가격이 1000 독일 마르크를 넘지않을것 등의 엄격한 조건을 제시했다. 히틀러 자신도 이 조건의 까다롭다고 알고 있었던같다. 특히 당시의 4인승 소형 승용차가 1600 마르크 이상 한 것을 생각하면 판매 가격 1000 마르크정도 되는 성능의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은 지극히 곤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각 자동차 메이커가 정부 통제에 의해서 결성한 단체 「독일 제국 자동차 산업 연맹」(RDA)이 1934년 6월에 포르쉐 사무소와 개발 계약을 맺어 계획이 시작되었다. 포르쉐사는 결코 여유롭지 않은 개발 예산 중에서 1930년대여러번 실패하고 죄절해온 소형 대중차의 개발 경험을 살리고 개발을 진행시켰다.
계약을 맺고 나서 2년 후의 1936년에 간신히 프로토 타입 2대의 제작이 완료, 1937년에는 합계 30대의 프로토 타입이 제작되었다. 나치스 친위대(SS) 대원의 면허 보유자들에 의해서 가혹한 테스트 드라이브를 받는 것으로 프로토 타입의 약점이 밝혀져서 강화되었다.
다음 해 1938년에는 최종 프로토 타입 VW38가 완성한다. 동년 5월에는 공장의 기초가 마련되고 그 회의장에서 히틀러는 생산형의 차를 KdF-Wagen라고 명명했다. 국민은 쿠폰을 적립함으로서 KdF 구입비용을 저축해 만기에 이른 사람에게 차를 인도한다고 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 자신이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을 발발시켜 버렸기 때문에 양산 직전까지 도달한 국민차 구상은 스톱 했다. KdF-Wagen 제조 공장은 군용 사양의 큐 벨 워겐이나 슈빔워겐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약간수의 KdF-Wagen 도 군용차 양으로서 이용되었다. 이 공장에서는 전쟁 포로나 수용소 수용자가 가혹한 노동에 종사 당했다(현재의 폭스바겐사에 이 전시중의 강제 노동의 직접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VW사는 역사 담당 부문을 마련해 1998년부터 각종의 전쟁 보상 프로그램을 행하고 있다).
타트라 모방설
타트라 _T97
KdF에 관해서는, 체코의 타트라사의 한스·레드비카가 시작해 1937년부터 소수를 생산한 1700 cc 리어엔진차 타트라 T97와 비슷하다고 지적되는 일이 있다 (더욱이 타트라가 1934년에 발표한 대형 리어엔진차 「T77」, 1935년의 「T77A」, 1936년의 「T87」의 영향도 받았다고 지적된다).투구풍뎅이형의 유선형 보디, 공냉의 수평 대향, 혹은 V형 엔진을 프레임의 후부에 탑재해, 사륜 독립 현가로 하는 새시 구조, 냉각 시스템 등, 확실히 유사점은 많다.공냉 엔진 채용에는, 공냉 모델을 주력으로 한 타트라에 대한 히틀러의 심취가 있었다고도 말해진다.
실제로 전후 타트라사는 폭스바겐사에 소송을 야기, 1961년, VW사는 300만 독일 마르크에 이르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비틀의 원형은 1934년의 NSU 컨셉카(타입 32)에 이르러 완성을 보고 있어서 이것(타트라사에의 배상금 지불)은 저작권 침해의 배상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독일에 의한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 따른 T97 생산 정지 명령에의 배상을 인수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덧붙여서 포르쉐와 레드비카는 교류가 있어서 서로의 아이디어를 서로 교환하고 있었다.두 명은 모두 1920년대부터 백본·프레임이나 스윙엑슬 독립 현가, 공냉 엔진등의 도입에 열중했고 1931년~1933년경에는 거의 병행하는 형태로 유선형 보디의 공랭식 소형 리어엔진 컨셉카를 개발하고 있었다. 또 리어엔진 유선형차를 구성하는 개개의 기술 요소의 대부분은, 특히 두 명이 발명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폭스바겐에 있어서도 포르쉐 자신이 고안 한 부분은 토션바를 이용한 더블·트레링 암의 전륜 독립 현가 정도이다). 유사한 이유는, 당시의 트랜드인 신기술에 대해 두사람이 독점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한 쪽이 어느 한쪽을 모방했다고 볼수는 없었다.
패전 후의 부흥과 비약
1945년, 독일은 전쟁에 져 KdF-Wagen 공장이 폭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이 공장을 관리하던 영국군장교 아이바 허스트는 「나치스측이 폭파한 것처럼 보였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자재가 없는 전후의 혼란기이며 독일 국내의 다양한 공장이나 자재는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의 4국에 수탈 되는 상황이었다.그러나 아이바·허스트는 독일인의 협력적인 태도와 폭스바겐차의 내용에 장래성을 알고, 모든방법을 총 동원해서, 자동차 생산을 재개시키는 것을 계획했다. 그는 남아 있던 독일인 노동자들의 힘으로 「국민차·폭스바겐」을 처음 탄생시켰던 것이었다.1945년중에 이미 1785대를 생산하고 있었다.
허스트는 영국군에 대해 지프에 대신하는 내후성이 높은 스탭 카로서 폭스바겐을 이용하는 것을 제안해 1946년에는 1만대의 폭스바겐·타입 1이 생산되었다.
1947년에는, 네델란드 전용을 시작으로 국외 수출이 시작되었다. 최대의 시장이 된 미국에의 진출은 1949년이다.
이후의 폭스바겐 타입 1의 역사는, 파죽지세라고 해야 할 물건이었다. 어쨌든 튼튼하고 혹사에 참고 재질, 공작이 우수하고 정비성도 좋고, 어른 4명을 태워 경제적으로 고속 순항할 수 있는 이 차의 성능·품질은, 1950년대에 이르러도 아직 세계 각국의 신형 소형 승용차에 승부에 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우토반에서의 주행을 염두로 한, 100 km/h이상으로 고속도로를 연속 순항할 수 있는 차, 라고 하는 포르쉐와 히틀러의 컨셉은, 전후의 선진 각국에 있어서의 하이웨이 시대 도래에, 보기 좋게 적응했던 것이다.「악명 높은 독재자인 히틀러가 남긴 얼마 안되는 『正の遺産』은 아우토반과 폭스바겐이다」라고도 말해졌을 정도이다.
치밀하게 구축된 질 높은 딜러 서비스망은 유저로부터의 신뢰를 보다 한층 높였다.1955년에는 누계 생산 100만대에 도달, 더욱 공장의 증설·신설을 반복하고, 1964년에는 누계 생산 1000만대에 도달했다.
개량은 해마다 이루어져서 엔진이나 전장의 강화(1960년대 중기 이후, 6 V전장을 12 V에 변경), 세부의 형태 변경등이 반복해지고 있다.
배기량은 당초의 1000 cc가 곧 1100 cc에 확대, 후 1954년부터는 1200 cc가 되지만, 1960년대에 들어오면 수출 모델을 중심으로 1300 cc, 1500 cc에의 이행이 진행되어, 모델 후기에는 1600 cc형도 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세컨드 카로서의 수요가 높았지만, 특히 합리성을 존중하는 지적 계층에서는 「대형차에의 안티테제」로서 애용되어 한때는 디트로이트의 대형차와 정반대인, 반체제의 상징의 하나로서도 다루어졌다. 이지적인 유머에 흘러넘치는 뛰어난 광고 전략도 호평을 얻었지만, 그 광고 대리점이 유태계 기업인 것은 폭스바겐의 태동으로보면 아이러니한 역사이다.
일본에서는 수입차딜러 야나세가 1952년부터 취급을 개시.「한랭시의 갑작스러운 왕진에도 신속하게 콜- 스타트 할 수 있는 튼튼한 독일 제품」이라고 하는 캐릭터가 개업 의사에게 선호되어 「의사의 차」로서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생산 종료
1960년대 이후들어서, 설계가 오래됨애따라 의한 스페이스·유틸리티의 불안정이나, 리어엔진과 스윙 엑슬식 독립 현가에 의한 고속 주행시의 불안정함, 공냉 엔진의 소음등이 문제시되게 된다. 그러나, 폭스바겐사는 결정적인 대체 차종 개발에 계속 실패해 1970 년 전후는 경영 곤란에 괴로워해, 1974년에 전륜구동 방식의 본격적인 대체차 「폭스바겐·골프」를 세상에 낼 때까지, 비틀을 주력 차종으로 한 채로 개량만 으로 나아가게 된다.
1970년에는, 포르쉐식의 토션바·트레링 암에 대신해, 스트럿식 서스펜션을 갖춘 1302계열이 발표된다. 서스펜션만이 대폭 근대화 되면서, 외관은 재래형 비틀로부터 큰 발전은 없었다. 이 계열은 1973년에는 보디 형상의 변경등에서 1303계로 이행하고 있지만, 1975년까지 생산되었다. 무엇보다 스트럿 서스펜션 계열과 함께, 포르쉐식 서스펜션을 가지는 재래 모델도 계속 생산되었다. 이전, 1972년 2월 17일에는, 누계 생산 1500만 7034대에 도달해, 포드·모델 T(19081927)의 1500만 7033대라고 하는 생산 기록을 앞질렀다.
전륜구동차에의 이동으로 독일 본국에서는 1978년을 마지막으로 제조가 종료했지만, 멕시코에서는 그 후도 생산을 계속, 브라질에서도 일시 생산 중지하고 있던 비틀을 생산 재개했던 시기가 있다.
2153만대 미만이라고 하는 방대한 생산 대수를 달성하고, 멕시코에서 마지막 타입 1의 생산이 종료한 것은 2003년이었다.발표 이래 65년간에 걸치는 제품 수명을 유지한 사륜 승용차는 비틀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파생 차종
독일인은 오픈 모델에의 지향이 강하고, 타입 1(비틀)을 베이스로 한 2 시트 카브리오레의 헤브뮤라·카브리오레가 생산되었다. 생산수가 적고, 환상의 차로 여겨지는 로메슈(로메츄)도 동류에 속한다.
또한, 비틀의 콘포넨트를 이용한 본격적인 스포츠 쿠페로서 이탈리아의 기어사의 디자인한 보디를 독일의 카르만사에서 생산한 「카르만·기어」(1955년, 타입 3계열 카르만기아는 1961년)은 멋있는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다.
비틀의 리어엔진 샤시는 응용범위가 넓고, 이것을 유용 내지 강화하는 형태로, 광대한 하실을 갖추는 선진적 원 박스차의 타입 2(1950년)나,노치백, 패스트백, 웨건을 옹대폭 평저선·스타일의 타입 3(1961년), 4 도어의 타입 4(1968년)등이 라인 업에 더해져 왔다.
폭스바겐·타입 1 샤시와 엔진
강관 백본 프레임과 플랫폼을 조합한 완강한 플랫폼·프레임을 갖추어 후부에 기어박스와 디퍼렌셜을 겸한 트랜스 엑슬, 및 엔진을 탑재한다.1930년대의 자동차로서는 진행된 설계이다.
서스펜션은 톨션바로부터 트레링 암으로 매달아지는 구조로, 프런트는 포르쉐류의 2단식 트레링 암, 리어는 싱글 트레링 암으로 스윙 엑슬 방식이다. 이 서스펜션과 차격에 비해서는 큰사이즈의 타이어에 의해서 험로를 진행하는 성능은 높았다. 브레이크는 초기야말로 메카니컬·드럼이었지만, 1950년대 전반에 유압화 되어 더욱 말기에는 전륜을 디스크 브레이크화하고 있다.
포르쉐사의 프란츠·라임슈피스에 의해서 설계된 엔진은, 경량함과 간이성을 배려해 설계된 강제 공냉 수평 대향 4 기통 OHV로, 차체의 최후부에 놓여지는 RR(리어엔진, 후륜 구동)이다.포르셰는 정비성에 중점을 두고 있어 엔진 룸에는 상당한 여유가 확보되고 있었다.많은 경우, 소렉스제의 싱글 캬브레터 장비가 표준이었다.
수평 대향의 강제 공냉 엔진이기 때문에 「푸드득푸드득」 「바사바사」등의 의음, 혹은 「미싱 소리」라고 표현되는 큰 소음을 발했지만, 그 대신 내구성은 발군으로, 작열·혹한의 기후에서도 견뎌냈다. 비틀만으로도 1600 cc에 이르는 배기량 확대등의 대 개량이 몇 번이나 되었음에도 기본 레이아웃이 그대로 답습을 계속한 것은 대단하다 .
엔진 교환이 비교적 용이하고, 1970년대 등에 활발히 행해진 팬·미팅에서는 「엔진 탈착 경주」(르·맨식 스타트 (와) 같이, 차로부터 떨어진 출발점으로부터 두 명1조의 팀이 차에 달려 와, 엔진을 제외한 후, 그것을 차체를 지탱하는 부분에 실어 출발점점으로 돌아온후 다시 차로 돌아와 엔진을 장착해, 엔진 시동후 차를 출발점까지 몰고오는 경기로서 -평균 타임은 20분- )가 연례 행사로서 행해지고 있었다.
엔진의 응용
VW공냉 엔진은 염가로 가볍고 튼튼하기 때문에 경비행기등의 엔진에도 유용되었다.
VW엔진을 사용한 경주용 자동차, Vee(1200 cc엔진을 사용)·Super Vee(1600 cc엔진을 사용)의 시리즈도 존재했었고 동시리즈에서는 니키·라우다가 F1서까지 경기를 해였다
폭스바겐·타입 1 바디
전강철 제품 세미·모노코크 구조의 유선형으로, 「투구풍뎅이형」이라고 말해지는 유선형 바디의 전형이다. 아직 목골바디의 대중차도 많았던 시대에, 프레스 강판에 의한 양산성이나 내구성, 안전성을 고려해 재빨리 전강철 제품 바디를 채용했던 것에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둥글림의 강한 바디는 공기 저항이 작을 뿐만 아니라, 강재의 절약이나 강도 확보의 효과도 있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보디 형상은 2 도어 세단내지 카브리오레만으로써 4 도어형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나 패트롤카 등 4 도어에 적절한 용도에도 자주 이용되었다).
디자인은 포르쉐사의 앨빈·코멘다가 한 것으로 「히틀러의 디자인」이라고 하는 기묘한 설이 일부에 있지만 틀린 말 이다(화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공업제품 설계의 경험은 없다).유사한 유선형차는 1930년대부터 포르쉐 자신에 의해서 설계되고 있었지만, 코멘다의 디자인은 독립식 펜더나 휠 베이스간의 측면 스텝을 남기는 고전성은 있지만, 유려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긴 생산 기간을 통해서 창형상이나 후드, 펜더, 범퍼등의 형상 변경은 조금 있었지만, 「독립 펜더와 휠 베이스간의 사이드 스텝을 가지는 투구풍뎅이형」이라고 하는 유선형 보디의 기본적인 디자인 모티프는 일관해서 답습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다.
무엇보다, 보닛 폭이 좁아 실용면의 약점도 있어, 1930년대 기준의 디자인은, 1950년대 중기 시점에서 벌써 「시대착오」라고 평 되고 있었던 것이지만, 큰 변경도 없고 그대로 생산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전강철 제품 보디는, 당시의 차로서는 기밀성도 높고(창을 닫아 두면) 「물에 뜨는 차」로서도 유명했다.거의 무개조의 비틀이 이탈리아의 멧시나 해협을 횡단하거나 폭스바겐사의 실험에서는, 엔진을 걸친 채로 풀에 가라앉혔는데, 9분 정도 가라앉지 않았다고 한다. 홍수에 흘러갔지만 무사했다는 에피소드도 가 있다.
폭스바겐·타입 1 비틀이 등장한 작품
그 인기나 지명도가 높아 영화나 소설 등에 등장하는 것도 많다. 대부분의 작품으로 「낡은 비틀」로서 그려져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아키시노노미야문 히토시 황태자의 한 때의 애차.
아비이·로드 - 비틀즈의 앨범.
LOOK - 라스트 씬
텔레비전·영화
디즈니의 일련의 히트 영화 「러브·가방」시리즈에서는, 감정을 가진 비틀 「허비」가 활약한다.
「러브·가방」 The Love Bug (1969년)
「속러브·가방」 Herbie Rides Again (1973년)
「러브·가방/몬테카를로대폭주」 Herbie Goes to Monte Carlo (1977년)
「비바!러브·가방」 Herbie Goes Bananas (1980년)
「 신러브가방 허비 절제절명!」 The Love Bug (1997년)
「허비 기계 장치의 큐피드」 Herbie: Fully Loaded (2005년)
「그렘린」 - 주인공 비리의 애차.
만화·애니메이션
「미라이 경찰 우라시만」 - VM비틀을 개조한 마그나비틀이 등장 디자인은 오오카와라 쿠니오.
「명탐정 코난」 - 주인공·에도가와 코난의 협력자, 아립박사의 애차로서 가끔 등장한다.
「싸워라!초로봇 생명체 트랜스포머」 - 사이버 트론·미니 보트 정보원 반불이 변형한다.
「초능력자마미」 - 주인공의 아버지로 화가 사쿠라 쥬우로우의 애차.
「제로 욘 Q태」 - 주인공의 애차 쵸로 Q로서 등장.
서적
「ARIEL」(소설)- 우주인에 의해서 소형 우주선에 개조된 비틀이 등장.
「실수 투성이의 자동차 선택」 - 덕오테라유항 - 소우시사 - '01년 상반기판, 컴팩트 카 개론에 초대 비틀 등장.
「유럽의 명차Volkswagen」 - 보육사
「월드 카 가이드 5 VOLKSWAGEN」
「Calmgazine 캐르」 - 일본 저널 출판
게임
「쵸로 Q」(플레이 스테이션)에 등장.
「그란트리스모 4」(플레이 스테이션 2)에 등장.
그 외
타미야 모형1/24플라모델 각종, '66 연형 1/48플라모델 각종, KdF-Wagen
하세가와1/24플라모델 각종
이마이(도산 후, 금형은 아오시마 문화 교재사가 인계)1/24플라모델 각종, 1303 s, 카브리오레
군제산업(현GSI 쿠레오스)1/24플라모델 각종, '56 연형
타카라트미쵸로 Q·트미카 각종
노무라 토이의 미니카 "Volkswagen Convertible"
군마현 사와타리 온천의 여관 산수관의 당주 모리모토씨는 10,000대의 폭스바겐의 미니카의 수집가이다.
폭스바겐·타입 1 관련 항목
폭스바겐
폭스바겐 그룹
야나세 - 1953년 1978년까지의 일본에서의 정규 수입원
폭스바겐·카브리오레 (Typ 15)
폭스바겐·카르만기아
폭스바겐·뉴비틀
폭스바겐·골프
큐 벨 워겐
슈빔워겐
타트라 - 동시기에 착상·설계된 거의 동일 컨셉의 대량생산차
포르셰·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