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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 김대용 위임목사의 39년 목회 이야기(1983-2021) *
1. 해남중앙교회와의 김대용목사와의 인연 - 하나님의 계획하심.
나는 해남중앙교회에 오기 전 시무지는 효돈교회(제주도 서귀포시 효돈동)였다. 1983년 여름, 두 주간의 휴가를 받고 먼저 한 주간은 베델성서연구 세미나에 참석하고 곧장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집(해남군 계곡면 성진리)으로 왔다. 그리고 저를 사랑해주고 아껴주셨던 당시 목포동부교회를 시무하시던 임서현목사님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그랬더니 임서현목사님께서 자기가 해남중앙교회 당회장인데, 시무하시던 전도사님이 정년이 되어 사임하고 떠나셨는데, 해남중앙교회 주일예배 설교를 부탁한다고 해서 거절하지 못하고 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주일 아침이 되어 김명표집사님이 자가용을 타고 오셔서 주일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다. 어른, 중고등부 학생 50여 명이 모였고, 중고등부 학생찬양대가 예배찬양을 하고 있었다. 예배를 마친 후, 교회 바로 옆집인 박찬기집사님 댁에서 처음 뵙는 집사님들 몇 분과 점심을 함께 했다. 저녁예배는 전도사로 시무했었던 나주교회(정남교목사님 시무)에서 설교하기로 해서 점심식사 후, 가려고 하는데 내 신발이 없다. 신발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당시 이천재집사님이 “나주교회는 담임목사님도 계시고, 부교역자들도 많은데 우린 당장 저녁예배 인도자가 없습니다. 제가 정남교목사님을 잘 아는데 못 가신다고 전화드렸으니, 저녁예배까지 인도해 주세요.” 그래서 사실인가 하여 전화드렸더니 정남교목사님께서 “그래서 내가 그 교회 설교하러 가지 말라고 했지 않냐? 저녁예배 설교는 하되 절대로 청빙에는 거절하라.” 하셔서 “예!” 라고 대답해 드렸다. 그렇게 주일밤 예배까지 인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임서현목사님으로부터 해남중앙교회에서 김목사를 원한다는 청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난 거절했다. 정남교목사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시무하고 있던 효돈교회에서 떠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9년 효돈교회 부임 당시의 나의 나이가 29세였고, 교회당 건축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에 어떤 교회인지 가보지도 않았고, 교인들을 만나 본적도 없이 이삿 날 정하고, 이삿짐을 싣고 태풍주의보가 내린 날, 배를 타고 무작정 부임했던 교회가 제주 효돈교회이었다.
당시 부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던 양동제일교회 담임목사님이었던 윤여권목사님과 장로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건축한다는 매력에, 소개한 목사님의 말씀만 듣고 부임했던 교회이다. 그러나 150명이라던 교인숫자는 15명이었고, 건축 준비가 되어 있다는 교회는 노회상납금도 몇 년째 내지 못해 빚으로 남아 있었다. 새벽기도회도 드려 본적이 없었고, 구역조직도 없었고, 성경공부도, 사역도 전혀 없는 교회였다. 오죽 했으면 이사한지 두 주일이 지난 후 목포양동제일교회 여전도회원들이 왔다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 돌아가자고 할 정도였다. 6.25 전쟁당시 미군에 의해 피난오신 150여 명의 목사님들이 전국 모금으로 건축된 교회당이 있었고, 사택은 낡고 부지도 좁았다. 물론 피난오셨던 목사님들은 모두 다 전국으로 흩어져서 목회하고 계셨다. 그렇게 만 4년을 시무하면서 먼저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고, 구역을 조직하여 구역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반도 만들어 시작했고, 대심방도 시작했고, 주보도 만들고, 교회조직도 했고, 부흥회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효돈교회에서는 다 처음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성전부지 450평을 구입하고,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성전, 연건평 150평의 2층 성전을 헌당하고 위임목사도 되었다. 물론 4년 후, 평균 장년 교인 150여 명이 회집되어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었고, 노회상납금과 부담금은 부임 후 곧바로 청산하였다. 그리고 성전건축 부채도 다 갚았다. 여기저기서 청빙 요청도 받았으나 때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중에 한 교회가 해남중앙교회였다. 그리고 청빙 조건이 가장 좋지 않았다. 당시 해남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임서현목사님의 청빙에 물론 거절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을 난들 어찌 알았으며, 거절할 수 없는 부르심에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기도할 때마다 해남중앙교회가 떠올랐고, 하나님은 네가 가라고 하셨다. 나는 버티었다. 더 좋은 곳도 거절했는데, 왜 하필 가장 열악한 조건, 그것도 고향으로 가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기도하던 중 눈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기로 했다. 아내와 의논하지도 않았다. 임서현목사님께 연락을 드리고 이사 날짜를 받았다. 토요일 밤에 당회를 모여 사임을 통보하고, 주일낮 예배 시간에 인사하고, 1983년 9월 11일, 월요일에 해남중앙교회로 이사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이별이었다. 효돈교회 장로님들, 교인들도 생각하지 못한 채 담임목사를 떠나보냈던지, 3주 후에 후임목사님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며 수요예배 인도해 주시고 정식으로 이별을 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물론 나도 그리움에 병이 날 정도인지라 즉시 허락했다. 그러나 단에 선 나는 교회도 내 교회가 아니고, 성도님들도 내 성도님들이 아님을 느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해남중앙교회임을 새삼 깨닫고 마음을 다잡고 내가 있어야 할 곳, 해남중앙교회로 기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남중앙교회 목회에 전념하기로 했다.
나중 들은 이야기가 있다. 내가 해남중앙교회에서 선을 본 열한 번째 목사였음을 말이다. 그리고 이미 떠난 김봉찬전도사님의 절대 영향 아래 있던 해남중앙교회였기에, 그분이 양동제일교회 윤여권목사님 아래서 부목사를 했다는 것 때문에 전임자이신 김봉찬전도사님이 허락하여 제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회장 임서현목사님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도 아닌, 결론은 윤여권목사님 때문에 내가 해남중앙교회에 오게 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믿는다. 어떻든 이런 과정을 거쳐 나의 해남중앙교회에서의 목회는 시작이 되었다.
2. 해남중앙교회 제 1대 담임목사로서의 시작
1) 교회의 외적 환경
교회당은 큰길 골목 안에 있어 교회당이 보이지 않았고, 종탑도 없으니 더욱 그랬다. 교회당 앞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나무 십자가가 있어 여기가 교회로구나 하고 알 정도였다. 다른 부속건물은 없었다. 109평 대지에 다 낡은 30평 교회당과, 망태 안에 담겨진 신문지가 있는 돌 두 개가 놓여 있는 재래식 화장실과 항아리 위에 판자가 올려진 퍼세식 화장실 건물과 원룸 사택이 전부였다.
사택은 원룸이었기에, 9개월 만삭이 된 아내와 어린 두 딸, 우리 4가족이 한 방에서 살아야 했고, 서재가 따로 없어 책은 아예 풀 수도 없었다. 당연히 화장실은 교회당 화장실을 사용했는데 아이들이 무섭다고 가지 않아 오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연탄 부엌이라 연탄가스 냄새를 고스란히 마시며 살아야 했다. 전임지 효돈교회에서는 교회당 150평, 사택도 독채에 수세식 화장실에 기름 보일러, 교회 대지는 450평, 당회장실과 서재를 갖추고 있었던 터라, 아내도 아이들도 하나님의 계획이라며 무조건 떠나온 나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모두 다 당시 목회자의 소명이요. 사명인 것을......, 요즘처럼 좋은 교회에 이력서 내고, 청빙위원회에서 선보고 가는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냥 가는 때였다.
당시 목회자는 사례비를 얼마나 받는지 묻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임지에서 월 50만원 + 16개월의 사례비를 받았다. 그러나 해남중앙교회에서의 첫 사례비는 10만원 + 14개월이었다. 그렇다고 왜 전임 목회지에서는 이만큼 받았는데 이만큼만 주느냐고 따지고 물어서는 안 되는, 당시 목회현장에서는 절대 금기사항이었다. 저를 소개한 임서현목사님이 보조를 연결해 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많든 적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자족하며 살겠다고 말씀드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교회가 속해 있는 해진시찰 대부분의 교회가 월 5만원 이하의 사례비를 받고 목회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받은 10만 원은 진실로 큰 금액이었고, 정말로 하나님과 성도님들께 감사한 큰 금액의 사례비였다.
2) 교회의 내적 환경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외적 환경보다 더 지독하게 힘들었던 것은 교회의 내적 환경이었다. 치유목회를 하셨던 전임 전도사님의 사역 때문에 치유받기를 원해 모여든 교인들이 대부분이라, 정년이 되고도 4년이나 지나 74세에, 외부의 압력으로 마지 못해 사임을 하신 절대자인 전임 전도사님의 사임 과정에서의 분쟁은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었고, 그 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사임을 주장하셨던 이천재 피택장로 외에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여전히 예배를 마치면 주일 오후에 광주에 계신 전임 전도사님을 찾아가 예배드렸고, 예배 후 안수 받고, 감사헌금과 십일조까지 드린 후 내려와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이미 성도들의 마음도, 물질도, 전임자에게 있었다. 그리고 피택장로 이천재집사님의 장로장립을 반대하며 결국은 분열을 예고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더더구나 여기저기서 전임 전도사님의 양 아들이라는 목사님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왜 목회를 그렇게 하느냐면서 한바탕 퍼붓고 갔다. 할 수 없이 광주에 가서 전임자인 김봉찬전도사님을 만나 교회가 나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강력히 말씀드렸고, 저의 의견을 받아들여 분열만은 막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 11월 13일에 이천재집사의 장로장립과 함께 세 분의 안수집사 피택 후, 예식도 하게 되었다. 일단은 외형상으로는 그렇게 봉합이 된 것이다.
3. 해남중앙교회 건축과 얽힌 이야기
1) 제 1 차 성전건축(1967년 4월)
1954년에 창립이 된 해남중앙교회는 해남읍교회 재정부장 장로님이셨던 김창재장로님(당시 신문보급소 운영)이 재정문제로 교회와 마찰이 생겨, 스스로 교회를 나와 자신의 집에서 1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가정교회 형태로 1954년부터 1967년까지 14년 동안 지내왔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해남중앙교회라고 부르기보다 ‘창재교회’ 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교역자가 없었고 주일에 한 번 이웃교회인 신안교회와 남천교회 교역자가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였고, 나머지는 김창재장로님이 인도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창재교회‘ 그래서 그때를 기억하는 분들은 해남중앙교회보다 창재교회를 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 오던 중 1967년 4월, 목포선교부 소속 선교사가 지원하여 교회당 건축을 하면서 김창재장로님께서 109평의 대지의 본인의 집을 교회당으로 기증하였고, 그 터 위에 교회당 30평을 건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17년 밖에 안 된 교회당은 얼마나 어설프게 건축되었던지 손만 대도 창문이 떨어져 나갔고, 벽은 균열 되었으며, 비가 오면 비가 새고, 전선은 낡아 합선이 잦아 자주 정전이 되었다. 나중에 그 자리에 건축하려고 포크레인을 대니, 단 한 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앞에서 밝혔듯이 1967년 선교사가 지어주었다는 해남중앙교회 교회당 건물은 30평이었다. 오래되고 낡아 손만 대도 창문이 떨어져 나갔고, 벽은 균열되어 있었고, 비가 오면 비가 새고, 전선은 낡아 합선이 잦아 자주 정전이 되었다. 교회당은 큰길 골목 안에 있어 교회가 보이지 않았고, 종탑도 없으니 더욱 그랬다. 교회당 앞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나무 십자가가 있어 여기가 교회구나 하고 알 정도였다. 다른 부속건물은 없었다. 109평 대지에 다 낡은 30평 교회당과, 망태 안에 담겨진 신문지가 있고, 돌 두 개가 놓여 있는 재래식 화장실과 퍼세식 화장실 건물과 원룸 사택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화장실의 담당은 당시 호남신학교 1학년인 홍정우전도사(지금 본 노회 목사, 노회장)이었다. 그때의 말없는 홍정우목사님의 아름다운 헌신은 지금도 기억된다. 두고두고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서 리모델링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현금자산이 없다. 장년교인 30여 명인데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교회당 건물이 이래 가지고는 부흥을 기대할 수 없어 교회헌금이 매 주일 곗돈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깨기로 결심했다. 전임자 때부터 주일낮 예배가 마치면 중심을 이루는 교인들이 원룸 사택에 모여 사모님이 준비한 점심식사를 한 후, 계 모임을 하고 있었다. 물론 교인들끼리는 물론 전임전도사님의 사례비도 곗돈으로 들어가고 남은 금액만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 헌금은 계수 즉시 은행이 아닌 몇 개의 곗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금융권의 문턱이 높아 목돈을 쉽게 마련하는 방법으로 계가 유행하고 있었고, 교회도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는 성서적이지 않다고 선포하고, 교회 몫의 곗돈을 정산해 달라고 했다. 그 일로 계주를 하던 한 집사님이 졸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계를 하지 말라는 설교에 교회가 술렁거리기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교회 부임한 지 한 달 만인 1983년 10월 13일 주일에, 교회 리모델링 특별헌금을 하겠다고 선포하고, 특별헌금과 교회 몫의 곗돈으로 모아진 돈으로, 1984년 1월 30일, 당장 교회 창틀을 교체하고, 비가 새는 곳을 수리하고, 교회당 앞면을 늘려 로비를 만들어 교회당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철 종탑을 높이 세워 교회 종을 달고, 종탑 위에 십자가를 달았다. 누가 봐도 교회당 같았다. 그렇게 해남중앙교회의 모습을 교회 같은 모습으로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2) 제 2 차 성전건축( 1986년 4월 6일 – 1987년 1월 12일)
교회가 부흥하면서 성전건축을 꿈꾸면서 현지 대지 109평으로는 제대로 된 건축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개인적으로 알아보던 중, 군청 옆의 200평 대지에 연건평 약 120평의 보건소 건물(지금의 해림정식당)이 보건소 이전계획이 있어 공매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당시 4천 만원에 입찰하려고 제직회를 열었다. 그랬더니 제직회의장은 반대하는 성토장이 되었다. ”결핵환자들이 드나드는 보건소에 성전건축은 말도 안 된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나면 절대로 안 된다.“ 는 강력한 반대에 결국 나의 계획은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군청 옆의 옛 해남등기소(현, 금영아파트) 자리였다. 대지 550평에, 당장 성전으로 쓸 수 있는 건평 50평의 등기소 본 건물이 있었고, 25평의 사택이 있었다. 역시 공매로 몇 차례 유찰되었던 물건인데, 목포양동제일교회 부목사로 시무할 때에 만났던 인연으로, 당시 우리교회에 출석했던 검찰청 해남지청장으로 계셨던 김승규집사님(법무장관. 국정원장 역임)에게 문의한 결과 유찰로 인해 7,200만원에 수의계약도 가능하다는 답을 듣고, 또 제직회를 열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다. 불과 몇 년 후 부동산 폭등으로 매매 후 더 넓은 대지로 이전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구 보건소 건물이든, 구 등기소 건물이든 참 아쉽다.
결국 기존 건물을 헐고 109평 대지에 149평의 성전건축을 하기로 했다. 1986년 1월 5일 주일에 성전건축을 선포하고, 다음 날 1월 6일 월요일부터 성전건축을 위한 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주일 후 1월 12일 주일에 16명으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다.(건축위원: 이천재, 김정현, 이영식, 김수만, 김영호, 이면근, 김우식, 김종태. 오정주, 김승규, 이영화, 김영주, 오정숙, 박혜순, 전귀엽, 민정금) 그리고 1986년 2월 2일 주일부터 건축헌금을 작정하기 시작하였다. 2월 12일 수요예배시간에 광주영락교회 임서진장로님을 강사로 성전건축을 위한 간증집회를 하였다. 드디어 1986년 4월 6일 주일 오후에 성전건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연건평 149평 / 예산 1억 2천만 원 / 설계 : 김광호설계사무소. / 시공 : 김기호집사(해남읍교회, 현재 장로) - 이렇게 우리 교인들의 힘으로 처음 건축하는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고, 완공이 되어 1987년 1월 12일 화요일 오전 11시에 해남중앙교회 성전봉헌식 예배, 1대 위임목사로 김대용목사 위임식, 2대 장로로 김정현. 이영식씨를 장로장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담임목사, 시무장로 3인이 되어, 우리 해남중앙교회가 정식으로 첫 조직교회가 되었다.
이렇게 감격스러운 성전봉헌식이 있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고, 기적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먼저 성전건축을 선포한 후, 먼저 밖에서 많은 우려와 함께 비난을 받아야만 했었다. 물론 해남중앙교회를 사랑하는 염려에서 나온 비난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해남중앙교회를 다니다가 이사를 간 교인들과 전임자의 양 아들들이라는 목회자들이 ”내가 해남중앙교회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아는데, 건축은 무슨 건축이냐? 건축 다 못 마치고 중단되고 김대용목사는 떠나면 고스란히 남은 성도들이 빚더미를 떠안게 될 것이다.“ 하는 염려와 비난이었고, 주변교회들의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염려와 비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교회 안의 성도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교회예산이 3천만 원도 안 되었고, 건축특별헌금으로 모아진 돈은 1천만 원 뿐, 그런데 교회건축 비용은 1억 2천만 원에 계약을 한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계산이 안 맞다.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이전 시무지 제주도 효돈교회 성전건축 때도 그랬듯이, ”성전건축은 하나님이 하신다. 사람의 계산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도, 물질도 예비하신다. 우리 하나님만 믿고 나아갑시다.“ 라고 강력하게 외쳤다. 기적은 일어났다. 성전건축 설계 때문에 처음 만난 김광호설계사무소장님이 성전 연면적 149평의 설계가 완성되어 군청의 건축허가가 나오는 날, 제게 물었다. ”건축비는 준비되셨습니까?“ ”예, 현재 천만 원 모아졌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저의 대답에 소장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참을 말없이 계시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신체 건장한, 한 분이 설계사무소로 들어왔다. 건설업을 하시던 해남읍교회 김기호집사님이셨다. 물론 처음 뵈었다. 김기호집사님이 앉자마자 소장님이 이렇게 말했다. ”너 교회 다니지? 여기 목사님이 1억 2천만 원이 들어가는 교회당을 건축해야 하는데, 천만 원 밖에 없데. 나머지 돈은 하나님이 마련하신데, 너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으니 해남중앙교회당 네가 지어라.“ 아예 반말에 명령이었다. 건축주인 나에게 물어도 보지 않고 시공자가 그렇게 결정되어 버렸다. 설계사무소를 나오면서 김기호집사님이 ”김광호소장님을 잘 아십니까?“ 하고 묻기에 ”아니오. 설계 때문에 처음 만난 분입니다.“ 했더니, 기가 막혔던지 어처구니없는 웃음만 허허 웃고 있었다. 그렇게 천만 원을 주고, 해남읍 중앙리 69번지, 109평 대지에 연건평 149평의 성전건축은 시작되었다. 물론 109평 대지에 149평을 지을 수 없었는데 당시 해남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났던 김광호소장님이 교회주변의 사람들에게 사용승낙서를 받아가며 설계했고, 건축허가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사람을 예비하셨고, 그 예비하신 사람들을 통해서 기적같이 이루셨다.
그렇게 건축 중, 건축비를 건축공정에 따라 지불해야 하는데 더 이상 건축헌금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당시는 교회대지나 건물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도 안 되었다. 그래서 은행권과 거래가 있었던 건축업자 김기호집사님의 이름으로 4500만 원을 광주은행에서 대출을 받았고, 매월 교회가 상환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 건축비 지불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래서 장로님 세 분을 모시고 해남군농협지부 지부장님을 찾아가 3천만 원을 대출해달라고 때를 썼다. 금융과장을 불러 대출이 가능하냐고 묻자, 금융과장은 절대로 불가하다고 말했다. 장로님들은 돌아가자고 하기에 돌려보내고 홀로 지부장실 쇼파에 앉아 대출을 해줄 때까지 이 방을 나갈 수 없다고 때를 썼다. 그 당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박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지부장은 금융과장을 몇 차례 불렀고, 그때마다 금융과장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퇴근 무렵 지부장이 다시 금융과장을 불러 내가 책임을 질테니 3천만 원을 대출해주라고 명령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더니 지부장님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제 아내가 광주 어느 교회의 권사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기도가 있어 나도, 자녀들도 잘 되었습니다. 오늘 일은 저의 아내에게 말하면 엄청 좋아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그토록 기도하고 선포한 대로, 그렇게 불신자도 사용하셨고 물질도 예비하셨다. 그런저런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 1987년 1월 12일에 새 성전을 완공하고 봉헌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빚은 1997년까지 11년에 걸쳐서 빚을 갚는 힘든 과정을 거치기는 했다. 그 11년은 성탄절 외에는 교회 돈으로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살았고, 사례비도 한꺼번에 받아 본적이 없었고, 모자라면 받지 못한 사례비는 헌금을 한 것으로 정산을 했다. 그렇게 힘들었지만, 나도, 성도님들도 성전을 바라보면 그 모든 힘든 일들을 다 잊을 정도로 행복했다. 할 수 없는 짓을 한다고 해남중앙교회를 염려하며 비난했던 사람들이나, 시기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던 주변 교회들도 할 말을 잊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다.
또 하나의 후일담이지만, 성전건축 시공자였던 김기호집사님은 그 기간 많은 건물들을 사들였고,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면서, 나는 해남중앙교회 성전을 건축하고 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회당 건너편에 4층 건물을 지으면서 4층에 45평을 목회자에게 맞춤으로 사택을 건축하여 500만 원에 살도록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정말로 감사했던 일은, 1989년 어느 날 당회원들이 500만원을 가지고 와서, 그 동안 목사님이 너무 고생했으니, 목사님 부부 성지순례를 다녀오시라고 했다. 교회 빚도 아직 남았는데 안 가겠다고 했더니, 어차피 빚은 천천히 갚아나가면 된다면서 기어이 놓고 가셨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생전 처음 해외여행을 성지순례로 갈 수 있었던 감격을 누렸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장로님들은 통도 컸다. 후일 그때의 장로님들을 “물 장로”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저에게는 해남중앙교회에서 행복하게 목회할 힘을 주신 분들이었다. 아마도 은퇴하고도 그때의 일들은 감사로, 행복으로 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좋은 분들의 부족한 종을 사랑해 주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지금도 감사한다.
3) 제 3 차 성전건축( 1997년 2월 6일(목) – 2004년 5월 15일(토)
ㅇ 1997. 2. 6(목) / 해남읍 고도리 150-5 외 1400평 새 성전 부지 가계약.
2. 9(주일밤) / 새 성전 부지 구입을 위한 제직회에서 가결후 정식계약
2. 16(주일낮) / 임시당회에서 건축위원회 선정
2. 16(주일밤) / 건축위원회 모임
3. 2(주일) / 건축헌금 작정일
5. 18(주일) / 새 성전 부지 구입 감사예배
ㅇ 1999. 2. 3(목) / 새 성전터에 공사현장용 조립식 건물 2동을 무상으로 받아
온 교우들의 노력으로 해체와 조립하여 완공.
5. 16(주일) / 조립식 건물에서 주일 오후예배를 드리기 시작
6. 4(금) / 새 성전 건축공사 계약, 시공자 주일기업(대표 박준영장로)
건축계약총액 - 2억 7천 5백만원
설계 - 김광호 설계사무소, 연건평 230평
6. 13(주일) 오후 3시 / 성전건축기공예배
9. 26(주일) 새 성전 기도문 써넣기
12. 22(수) / 구 성전(해남읍 중앙리 69번지) 떠남 예배
12. 25(토) 오전 10시 / 새 성전 입당예배(애찬식, 기도문넣기, 꽃드림)
ㅇ 2000. 1. 16(주일) / 새 성전 강단에 십자가를 거는 예배
ㅇ 2000. 6. 4(주일) / 교육관과 사택 기공예배(지상 3층, 연건평 150평)
ㅇ 2000. 11. 5(주일) / 교육관 입당예배(연건평 150평. 3층)
기도실 1층. 교육관 2층. 목사관 3층.
ㅇ 2004. 5. 15(토) / 해남중앙교회 교회창립 50주년 기념예식과 함께 성전봉헌예배.
김대용목사 근속 21년(사역 30년) / 은퇴식 / 안수집사. 안수권사. 명예권사 임직식
위의 일정대로 진행된 제 3차 성전건축은, 시작부터 성전봉헌예배를 드리기까지 또 한 번의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체험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자가용 시대가 열리면서 중앙리 69번지의 성전에서는 더 이상 교회부흥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당장 주차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109평 대지 위에 바닥면적 70평, 연건평 149평의 건물을 짓고 나니 교회 봉고차 한 대도 댈 곳이 없어, 길 위에 주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 주변에는 주차할 땅을 팔 사람이 없어 매입할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교회 앞 도로가 확장되고 소도읍 가꾸기 사업을 하면서 3층, 4층 건물들이 들어서 길에서는 교회당이 보이지 않았고, 차 한 대 겨우 지나다니는 골목 안에 갇혀버린 교회당은 존재감도 없었다. 읍내에서도, 외지에서도 주차장이 없는 교회로 오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교단이라고 소개하여 이사온 교인들조차 다른 교회로 등록하고 말았다. 당연히 부흥도 멈추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180여 명까지 부흥했던 교인수도 광주, 목포권의 출퇴근이 가능해진 교통환경으로 80여 명의 교사, 공무원 가족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해남중앙교회를 위해서 다시 일하기 시작하셨다. 100여 명의 교인만 남았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어 주차장 확보를 위해서 기도하던 중, 1996년 5월, 제주도에서 영성훈련프로그램인 죠이뜨레스디아스라는 3박 4일을 경험하면서 저의 기도제목을 위해 뜨겁게 기도해주던 체험을 하고 돌아온 다음 주간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한 복덕방 사장님을 제게 보내 주셨다. 물론 나는 그 복덕방에 땅을 사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적도 없고, 그날 첫 만남이었다. 100% 하나님이 보내셨다. 그 복덕방 사장님이 제게 “목사님, 교회 지을 좋은 땅이 있으니 사십시오.” 참으로 뚱딴지 같은 소리였다. 속으로 순간 하나님께 따지는 기도가 터져나왔다. “하나님도 참, 지금의 교회 주변에 주차장 부지 200평만 확보하게 해주세요. 기도했는데, 이전 확장 건축이라니요. 이 교회당을 짓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또 성전건축을 하라고요.” 그러면서 복덕방 사장에게 “어떻게 저에게 땅을 사라고 오셨어요.” 했더니, “해남중앙교회가 그 땅을 사서 교회당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왔습니다. 해남중앙교회가 잘 돼가고 있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물었다. “교회 다니세요?” “아니요.” 그러니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지금의 우리교회 땅으로 이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시도했던 교회가 두 교회가 있었는데, 내부 결의가 안 돼서 무산이 됐다는 것입니다. 복덕방 주인은 땅 주인이 급하게 땅을 팔아달라고 하나, 그때가 1997년 IMF 가 터지기 직전이라 땅은 팔리지 않고, 영업상 복비를 받아야 하기에 생각하다가 저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땅인지 보기나 하라고 해서 복덕방 사장님을 따라 지금의 해남중앙교회 부지를 보게 되었다. 답으로 되어 있어 벼농사를 짓고 있는 1400여 평의 땅이었다. 물론 주거지역으로 되어 있어 건축에 문제가 없는 땅이었다. 그 당시 가격으로 약 6억원 정도였다. 평당 100만원이 넘는 땅이었지만, IMF 가 터지기 직전이라 40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에 나온 것이다. 당시 우리교회 예산이 1억이 안 되는데, 그 여섯 배의 돈이 넘는 땅을 어떻게 살 수 있으며, 또 건축은 무슨 돈으로 감당할 것인가? 그래서 전 “가죽은 탐나는데 호랑이가 무서워 못 사겠다.” 고 거절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그날부터 기도할 때마다, 영성훈련에서의 뜨겁게 기도하던 사람들이 생각나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아무 대책도 없이, 무대뽀로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 하나로 그 땅을 매입하기로 나 혼자 마음을 먹었다. 그때가 중앙리에서의 성전건축 빚을 다 갚고 제로상태, 모아둔 돈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 당시도 교회부지나 성전을 담보로 잡고 대출도 안 되던 때였다. 먼저 세 분의 장로님들과 땅을 둘러보고 당회를 모였다. 장로님들도 아무 생각없이 허락해 주었다. 제직회를 열었다. 제직회도 갑작스런 제안에 그냥 통과되었다. 계약금도 걸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당시 임협에 금융과장으로 계시던 서평옥집사님(현, 장로님)에게 소위 씨아시 보증으로 돈을 빌려 줄 수 있겠느냐고 제안했더니, 말도 안 되게 서평옥집사님은 신용대출 채무자 1인, 보증인 2인이면 2천만 원씩, 그렇게 30명만 확보되면 6억 원을 빌려 줄 수 있다고 했다. 지금도 금융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었는지, 서평옥집사님의 믿음이었는지, 궁금하다. 아마 그때 안 된다고 했으면 모든 일은 거기서 멈추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난 서평옥장로님에게 감사한 마음, 빚진 마음이다. 그렇게 해서 그 당시 죠이 뜨레스 디아스 영성훈련을 뜨겁게 경험한 사람들 30명으로 돌려가며 채무자, 보증인을 세워 6억 원을 대출받아 땅값을 지불하고 등기를 마쳤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을 또 예비하셨고 물질을 동원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얼떨결에 찬성을 했는데, 생각해 보니 말도 안 되는 일, 계산이 안 나오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대가 시작됐다. 나는 그 문제 제기에 100% 공감했다. 내가 교인이라고 해도 반대했을 것 같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땅을 계약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했지만, 나는 믿음으로 한다고 했지만 성도님들은 그렇지를 못했다. 반대하는 분들은 임협에 찾아가 서평옥집사님에게 왜 대출을 해주었냐고 따졌고, 나에게도 항의를 했다. 나는 기도하고 설득했다.
1997년에 새로운 성전 부지를 구입 후, 1999년 새 성전건축이 시작되기 전까지 2년 동안 우리 교인들은 주일 11시 예배를 드린 후, 모두 다 새 성전부지에 논둑에 서서 서로 서로 손을 잡고, 감사하면서 이곳에 새 성전이 건축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모습은 해남군민들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되었고, 입소문을 타고 해남중앙교회의 새 성전 건축은 모든 해남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모두 다 놀랐다. 중앙리 그 작은 해남중앙교회가 1400평의 새 성전터를 구입하고 새 성전을 건축한다는 사실에 모두 다 놀라워 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했었다.
목회자인 나의 기쁨은 더했다. 그래서 한 달을 작정하고 논 한 가운데 논둑에서 밤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밤 기도를 시작한지 첫째 날 밤, 온 몸이 오싹해 오는 한기를 느낄 정도로 무서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본래 겁이 없었던 터라 더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다음 날도 똑같은 온 몸이 오싹해 오는 한기를 느낄 정도로 무서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낮에 다시 와서 알게 된 것은 새 성전터 건너편에 있는 피난민 마을에 20 여 개의 점쟁이, 무당의 깃발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 무서움과 두려움은 영적 전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온 성도들에게 영적 선포를 하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하고 더러운 모든 어둠의 영들인 사탄마귀와 귀신들은 물러갈지어다.”를 외치는 명령과 선포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3개 정도의 깃발만 남고 다 사라졌다. 그 3개의 깃발은 귀신들린 무당과 점쟁이들의 깃발이 아니라 학습무당과 점쟁이 - 가짜 무당과 점쟁이들이 틀림없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구 성전이 팔려야 그 돈으로 성전을 건축을 할 수 있는데 팔리지를 않았다. 힘들게 지은 성전이기에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가 이전해 오면, 시세보다 싼 가격에 팔고, 모든 성구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 나오겠다고 했지만, 팔리지를 않았다. 그렇게 성전부지는 구입했으나 성전건축을 하지 못한 채 2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힘든 기간이었다. 더 힘들었던 것은 IMF 가 터지면서 대출이자가 20% 이상으로 치솟은 것이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월 이자 1천만 원 이상이나 되는 이자를 한 번도 갚지 못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신기할 정도로 헌금이 많이 들어왔고, 적자 없이 메꾸어 갔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그렇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이었다. 우리에겐 축복이었다.
구 성전이 팔리지 않은 상태에서, 1999년 1월, 마침 이천재장로님께서 호천리의 땅을 팔고 필요한 돈을 쓰신 다음 남은 금액을 무이자로 갚을 때까지 교회에 빌려 주시겠다고 해서, 그 돈으로 건축을 시작하기로 하면서 성전건축의 열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또 사람과 물질을 동원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때가 되어 시작하게 하셨다. 그리고 성전건축위원회가 구성되고, 건축헌금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돈이 덜 드는 공법으로, 연건평 230평의 성전건축을 하기로 하고, 주일기업 대표 박준영장로와 건축공사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999년 6월 13일(주일) 오후 3시에 성전건축기공예배를 드리고, 성전건축공사가 진행되게 되었다. 우선은 세멘판넬로 집을 짓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된 성전을 짓자며, 기초를 튼튼하게 했던 것이, 지금의 교회를 리모델링하면서 기초를 손대지 않아도 됐던 이유가 되었다.
또 하나의 재미 있었던 일은 그렇게 성전건축을 시작하기 전, 한 건축업자의 공사현장인 30평짜리 조립식 건물과 해남경찰서 공사현장인 조립식 건물 두 동을 (50평) 공짜로 뜯어가라는 말에 온 교인들이 동원하여 이틀 만에 뚝딱 옮겨지었고, 식당과 공사현장으로 사용하였다. 나중엔 임시예배처소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군청 옆 금영아파트에 있었던 사택을 팔아 건축비로 사용하기로 하여, 임시 사택으로 방 한 칸을 만들어 2년 여 동안 살았다. 홑판넬이라 비가오면 얼굴로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고, 바닥은 습기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벌레와 지네는 아예 자기들 집처럼 기어다녔다. 여름이면 열기로 도저히 방에 있을 수 없어 교회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도 성전이 지어져 가는 것을 보면 행복했기에 그런 정도의 힘든 일들은 기쁨으로 견디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새 성전터는 물이 솟아오르는 논이었다. 약 2미터 정도 높이로 지반을 높여야만 했다. 그런데 마침 구교리 산을 깎아 공간아파트를 짓던 업자가 찾아와 흙을 공짜로 받겠느냐고 해서 말도 안 되게 천 여 덤프트럭이나 되는, 산을 깎아낸 좋은 흙으로 성전터의 지반을 다져가며 지금처럼 높이게 되었다. 나중에 트럭 운전사들의 요구로 한 차에 5천 원의 수고비를 주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다.
새 성전터에 새 성전은 순조롭게 지어져갔고, 성전을 다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1인용 개인 의자로 특별 제작하였다. 나중에 아버지학교와 어머니학교를 할 때에는 원탁을 놓고 최적의 환경에서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고, 커텐은 독일제 전동기를 사서 버튼을 누르면 커텐이 자동으로 올라가고 내려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예배가 시작되면 커텐이 열려 있어 전체가 통유리로 된 성전은 밖을 볼 수 있다가, 설교가 시작되면 커텐이 내려와 외부와 차단을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밤 예배 시간이 되면 옆에 논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별이 보이고, 달이 보였다. 농사철이 되면 개구리와 함께 합창을 하며 찬송을 부를 정도였다. 비록 조립식 건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한 방법으로 구경거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환상적이었다.
그렇게 건축을 시작하여 1999년 12월 25일(토) 오전 10시에, 성탄절축하예배 겸 새 성전 입당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성탄절 저녁예배는 당시 가장 유명하셨던박종호 찬양가수(지금도 활동하고 계심)와 그의 악단을 초청해 찬양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새 성전에서 새로운 세기인 2000년 1월 1일을 맞아 새해주일 예배를 드리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 동안의 많은 성도님들의 수고와 헌신과 아픔의 결과였기에, 그 감격은 눈물로 드리는 예배들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비전사역관 앞에 있었던 논 100평을 성전부지로 구입하여 1500평의 성전부지로 확장되어 넉넉한 주차장을 확보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과정이 꿈만 같았다. 하나님이 사람도 동원하시고, 물질도 동원하시고, 기적을 베풀어 이루어진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렇게 새성전 입당예배를 드린 얼마 후, 구 교회당이 극장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팔렸다. 당회와 제직회에서 의논한 결과 빚을 갚기보다, 구성전을 위해 헌금한 분들을 기리기 위해 똑같은 평수, 150평의 교육관(기도실 1층. 교육관 2층. 목사관 3층. 각 50평) 을 건축하기로 하고, 2000년 6월 4일 주일에 교육관과 사택 기공예배를 드리고 완공한 후, 같은 해 11월 5일 주일에 교육관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2004년 5월 15일 토요일에 “해남중앙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예식과 함께 성전봉헌예배. 김대용목사 근속 21년(사역 30년) / 은퇴식 / 안수집사. 안수권사. 명예권사 임직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전부지 이전과 성전봉헌, 교육관봉헌으로 해남중앙교회는 출석교인 200명 이상으로 부흥하면서 2005년까지, 말도 안 되게 시작했던 모든 교회의 빚을 다 갚게 되었다. 그리고 반대했던 교인들도 함께 기뻐했고,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변 교회들은 물론, 해남 사람들이 우리 해남중앙교회의 성전건축과 부흥에 깜짝 놀라워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었다.
이 외에도 소소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너무 많아 후일 기억을 더듬어 다시금 정리해 보았으면 한다. 여기 기록되지 않은 일들이 있으면 연락주시기를 바란다.
4) 제 4 차 성전건축( 2007년 3월 3일(토) – 2008년 3월 22일(토)
ㅇ 2006. 9. 18(주일) / 교회당 리모델링과 사역비전관 건축위원회 조직
ㅇ 2007. 3. 3(토) / 해남중앙교회 예배당 리모델링과
사역비전관 신축기공식 예배
■ 사역비전관 골조. 설비. 전기. 통신 / (주) 중우건설(대표이사 강규백집사)
전체 리모델링 / (주) 성심예건 (대표이사 이정수장로)
ㅇ 2008. 2. 24(주일) / 새 성전과 사역비전관 머릿돌 헌석 및 입당예배
ㅇ 2008. 3. 22(토) / 새 성전과 사역비전관 봉헌식 및 임직식
1999년 완공하여 봉헌한 교회당이 신공법 조립식 건물이었지만, 리모델링을 하고, 사역비전관을 건축하기로 하고, 2006년 9월 18일 주일에 “교회당 리모델링과 사역비전관 건축위원회” 를 조직하였다. 본당은 철골만 남기되 다 철거한 후, 층고를 높이고 중 2층을 만들며, 벽체는 콘크리트 옹벽으로 건축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역비전관은 바닥 면적 120평, 4층으로 건축하기로 했다. 1층은 사무실, 유치부실, 당회실, 친교실, 화장실 / 2층은 아동부실, 목양실, 화장실 / 3층은 중고등부실, 다목적실, 화장실 / 4층은 식당과 화장실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준공 후, 본당과 사역비전관 사이를 로비와 유아실, 수유실, 방송실로 사용하기로 했다. 대공사였다. 본당과 로비 연건평 380평, 사역비전관 연건평 480평이다. 건축비를 줄이기 위하여 반 직영으로 건축하였어도 총 건축공사비가 약 25억 원 이상이 들어가는 대공사였다. 물론 현금은 2억 원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헌금과 은행대출, 개인 채무로 하기로 했다. 다행히 이때는 교회당과 부지를 담보로 대출이 허용되었기에 이전 보다는 더 수월하게 건축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도 하나님은 사람과 돈을 예비하셨고, 이때는 온 성도님들이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 일을 해냈다. 2008년 2월 24일 주일에 새 성전과 사역비전관 머릿돌 헌석 및 입당예배를 드렸고, 2008년 3월 22일 토요일에 새 성전과 사역비전관 봉헌식 및 임직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택 구입은 물론, 모든 건축 빚을 2020년까지 다 청산하였다.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우리는 또 한 번의 큰 재난을 당했었다. 2012년 8월 28일(화), 볼라벤 태풍으로 본당 지붕이 전파되는 재난을 당한 것이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동시에 불어닥친 덴버 태풍으로 그 피해는 더 엄청났다. 통신이 단절될 정도의 엄청난 재난에 교회가 걱정되어 하나 둘 교회로 나온 성도들은 경악했고, 울며 기도했다. 그리고 3일에 걸쳐 열 트럭도 넘는 모든 잔해물을 다 치워냈다. 그 누구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비를 맞아가며, 찬송을 부르며 기쁜 마음으로 해냈고, 비에 젖은 모습으로, 쓰레기로 범벅이 된 채로 교회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쉬지 않고 일을 해냈다. 믿음으로 헌신한 결과였다. 남아 있는 성전벽채와 바닥, 부서지지 않는 성구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해서 계속되는 폭우와 비바람 속에서도 비닐로 덮고, 가리는 작업을 했다. 그러면서 쓰레기로 범벅이 된 채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린 웃었다. 거기서 목회자인 나는 우리 해남중앙교회의 열정과 희망을 보았다. 군청 추산 10억 원의 피해였으나, 종교시설이라 단 1원도 지원받지 못했고, 거의 직영으로 약 5억 원에 복구를 마쳤다. 그렇게 성전복구 작업을 마친 후, 2012년 11월 24일(토)에, 새로운 일꾼을 세우는 임직식과 은퇴식을 거행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시고 들어 쓰신 사람들 모두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4. 해남중앙교회 사역과 얽힌 이야기
1) 예배 사역
교회의 사역 중 예배사역은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모든 사역의 시작은 예배에 있고, 예배로부터 시작되고 예배로 마쳐져야 한다. 그만큼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이다. 그래서 목회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여야 하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큼의 열정적인 예배가 있을 때에 모든 사역에 열매가 있고, 신앙생활의 성숙함이 있게 된다.그래서 모든 성도님들이 예배의 은혜 속에 푹 젖도록 예배 준비에 철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 인도자인 목사 자신부터 예배의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말씀으로 준비해야 하고, 모든 예배의 순서에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큼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담임목사인 나는 설교에 목회의 최우선순위를 두고 준비했다. 주일 낮 예배는 확실한 주제가 있는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여 선포하였다. 주일 오후예배는 헌신예배, 찬양예배, 간증예배, 선포예배 등으로 준비하였고, 거기에 맞는 설교를 준비하여서 선포하였다. 수요예배는 성경 중심의 강해설교를 준비하여 선포하였다. 새벽예배는 성경 66권을 신구약 성경을 번갈아가며 본문 중심으로 준비하여 선포하였다.
그리고 설교를 포함한 모든 예배순서가 들어 있는 예배문과 주보(주일 낮 예배, 주일 오후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을 교회 까페에 올려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보게 하여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예배와 말씀의 은혜를 갑절로 충만하게 하였다. 일찍이 영상장비를 준비하고 예배실황을 영상으로 까페에 올려 보게 하였고, 코로나 이전부터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온라인 예배도 실시간으로 드릴 수 있게 하였다. 최근에는 유투브로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일예배 설교를 영혼구원을 위한 선교 차원에서 극동방송 설교, CTS 방송설교로도 함께 나누었다.
예배의 다양성을 위해 예배순서를 전통에 따르기보다 열린예배 형식으로 드렸고 복음성가 찬양을 찬송가와 함께 예배순서에 넣어 함께 불렀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새로운 순서로 변화를 주었다. 주일낮 예배에도 찬양사역자를 초대해서 간증과 찬양예배로 드렸고, 외부 간증자를 초대하거나, 우리 성도님들 중에 간증자로 세워 간증예배로 드렸으며, 가정사역자들을 초대해서 가정사역에 대한 말씀도 들었다. 주일 오후예배는 복음적인 내용을 가진 영화상영, 간증영상, 찬양집회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예배프로그램과 설교를 통해 지루하지 않게 뜨겁게 예배를 드렸다.
2) 성경공부반
나의 사역의 중심은 기본이 예배를 통한 말씀과 찬양과 기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열정을 쏟았던 것은, 우리 해남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공부를 통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인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일이었다. 그래서 해남중앙교회에서의 목회사역 내내 말씀공부는 계속되었다. 구역으로 시작하여 셀 목장으로 바뀐 소그룹 사역과, 다양한 성경공부반들을 통한 소그룹 사역이기도 하다. 열정적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만나는 공예배라는 대그룹과 소그룹 셀 목장과 성경공부반은 영적 가족으로서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친교를 중심으로 한다. 그리고 전도대상자를 교회로 초대하기 전, 쉽게 함께 하는 교회를 경험하게 할 수 있어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큰 도움을 주었다.
가장 먼저 시작되었던 성경공부는 “베델성서연구” 였다. 베델성서연구는 성서편, 교리편, 생활편으로 되어 있는 체계적인 성경공부다. 교회 안에서도 소그룹으로 모여 공부하였지만, 해남병원 간호사 그룹도 당시 병원 부원장의 배려로 부원장실에서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때의 간호사들 중에 목회자 사모, 섬기던 교회의 직분자들이 되었다. 다음으로 온누리교회가 하고 있었던 “일대일성경양육공부” 였다. 먼저 목회자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양육하는 양육 프로그램이었다. 그 다음은 “크로스웨이 성경공부” 였다. 1, 2, 3권으로 나뉘어 있다. 그 다음은 우리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개발하여 보급했던 “복음의 삶 1, 2” 성경공부반도 운영했다. 그리고 지구촌교회(이동원목사님 시무)의 중보기도 사역훈련을 하여 중보기도실을 만들고, 중보기도카드에 기록된 중보기도를 하는 중보기도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새벽기도를 두란노출판사의 “생명의 삶”으로 오랫동안 진행하였고, 새벽기도에 못 나오는 성도님들도 생명의 삶으로 큐티를 하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였다. 그후 해남중앙교회 카페에 주일예배 설교, 수요예배 설교, 새벽기도 말씀, 선포예배문을 올려서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고 있다. 바나바사역훈련을 통한 전도자훈련, 이슬비 편지보내기를 통한 잃어버린 영혼과 전도작정 전도자 전도하기를 통해 영혼구원의 열매도 많이 맺었다. 그리고 사랑의 교회 “소그룹 제자양육훈련” 프로그램 소그룹반을 통해서 제자 삼는 훈련을 계속해오다가 부산풍성한교회(김성곤목사님)의 “두 날개 제자 양육” 소그룹 프로그램으로 바꾸면서 구역을 셀 목장으로 바꾸었다. 연령대 별로, 남자 셀 목장, 여자 셀 목장 소그룹으로 모이도록 하여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물론 교회학교도 청년 셀, 중고등부 셀, 아동부 셀, 유치부 셀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셀 목장 소그룹을 활성화 하는데는 부산 벡스코에서 “소그룹 제자양육훈련”을 시작하기 전 매해 열리는 “두 날개 컨퍼런스”에 많은 성도님들이 참석하여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성경공부 프로그램인 “장자권 선포사역” 을 시작하면서 주일 오후예배를 말씀선포예배로, 셀 목장 말씀선포 예배로, 금요기도회 말씀선포 예배로 드리게 되었다. 이 외에도 “총회 교육부 신구약 성경공부” “통큰 성경통독 90일” “40일 말씀 양육” “어, 성경이 보이네.” “행복한 독서클럽” “예수님의 제자되기 훈련” 등을 진행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성경공부 훈련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는 성경공부반 소그룹을 통해서 훈련 받고, 제자가 되어 전도하므로 제자 삼는 일을 계속 해옴으로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교회 성장을 하도록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이런 모든 성경공부를 해남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시작함으로 다른 교회에서 시작하려고 하면 “그건 해남중앙교회에서는 이미 끝냈다는 데요.” 라는 말이 나왔고, 다른 교회 성도들이 자기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반을 자라하면, 우리교회 성도들은 “그 성경공부는 우리교회에서는 오래 전에 다 끝냈는데요.” 하면서 자랑을 했다고 한다. 참 열심히 해 온 말씀사역이었던 것 같다. 배우려는 열심을 가진 성도님들과 함께 했던 소그룹 말씀사역의 시간들이, 목회자로서는 참 행복했었다.
매년 2차례의 총동원주일을 통해서 새로운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에 힘써오다가 2010년 12월 19일(주일)에 1차 해피데이 주일로 지키기 시작하였다. 1차 해피데이 주일에 150 여명의 새가족이 등록하였다. 그리고 매년 2차례의 해피데이 전도주일을 통해서 많은 새 가족들이 등록하였고, 성도님들에게는 영혼 구원의 사명을 키웠다. 그리고 6월 마지막 주일, 12월 마지막 주일을 총동원주일로 지키면서, 성도님들도 총동원, 새 교우도 전도하여 데리고 오는 새가족 총동원 전도주일로 계속해 왔다.
3) 영성 사역
(1) 뜨레스디아스 사역
신학교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현재 우리교단의 총회장이신 류영모목사님의 강력한 추천으로 1996년 5월 13일(월) - 17일(금)까지 제주성안교회 수련원에서 열리는 “죠이 뜨레스디아스” 영성훈련 20기에서, 담임목사인 내가 먼저 영성훈련을 경험 후, 21기부터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매기마다 다수가 참석하여 엄청난 감동과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중심이 되어 1997년 6월 16일(월) - 19일(목)까지 죠이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 28기(캔디데이트 96명, 팀멤버 81명). 1998년 4월 13일(월) - 16일(목)까지 죠이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 34기(캔디데이트 105명, 팀멤버 97명)가 해남 유스호스텔에서 개최하였다. 기도실을 옥상에 설치하는 등, 많은 수고에도 죠이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를 먼저 경험한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으로 섬겨 주었다. 한마디로 섬김받고 섬기는 모두가 은혜를 받았다. 지금도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죠이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에 참여하여 팀멤버로 섬기고 캔디데이트로 은혜를 받고 있다. 코로나 재난으로 인하여 잠시 쉬고 있지만, 계속되어야 할 영성훈련으로 생각한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을 위한 죠이 비전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 청년들을 위한 죠이 유니온 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에도 참가시켜서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므로 본인들은 처음 경험해 본 은혜로 충만했고, 우리교회의 예배와 찬양과 사역에 불이 타올랐다. 우리교회는 아직도 그 영성의 영력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죠이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를 경험한 성도님들 중에 담임목사와 함께 영남 사랑의동산을 섬기기 위해 포항 구룡포 수련원까지 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기쁨으로 섬겼고, 광주 빛고을 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를 섬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죠이 유니온 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를 경험한 사람들의 모임인 리유니온 모임에 참예하였고, 우리교회에서도 수차례 모임을 가지고 받은 은혜를 나누었다.
이 모든 영성훈련의 열매로는 새성전부지를 마련하고 이전하여 성전을 건축할 때,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온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교회부터 시작된 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는 주변교회들은 물론 광주, 전남지역, 담임목사가 알고 있는 전국 목사님들에게 권면하여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이 뜨레스디아스(영성훈련)를 경험하고 교회를 새롭게 부흥케 하고 있다.
(2) 성경공부반과 제자훈련, 전도훈련, 기도훈련 등을 통한 영성훈련
열정적인 예배와 성경공부반과 제자훈련, 전도훈련, 기도훈련, 찬양사역 등은 물론 모든 교회 안과 밖의 사역들은 영성훈련이 되어야만 그 열매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열정적인 예배와 성경공부반과 제자훈련, 전도훈련, 기도훈련, 찬양사역 등을 위한 별도의 영성훈련을 하게 되었다. 교회안에서, 교회밖에서 당일이나 1박 2일, 2박 3일을 신청자를 받고 영성훈련을 진행하였다. 그러므로 열매가 맺히게 되었다.
4) 찬양 사역
(1) 교회 안의 찬양사역
해남중앙교회에 부임했을 때, 강원준전도사님(현재, 고흥녹동중앙교회 원로목사)의 열정으로 중고등부가 활성화되어 있어 60여 명의 학생회가 모여 예배드리고 있었고, 열심 있는 학생들 30여 명이 장년예배 성가대로 찬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심 있는 학생들이 장년예배에 출석하기도 했다. 그래서 주일예배 출석이 70여 명이었다.
그러던 중 해남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이신 손완구집사님을 지휘자로 세우고 장년성가대(지금의 호산나성가대)를 출범시켜 장년예배 찬양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학생들과 어른들 중에서 예배 전 찬양하는 찬양대를 조직하여 찬양으로 예배사역을 은혜롭게 하였다. 지금의 호산나성가대와 임마누엘찬양단 찬양사역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중고등부는 1984년 5월 17일에 “제 1회 아가의 샘”이라는 특별공연 찬양사역을 시작하여 해남읍내 중고등부 학생들을 초청하는 가운데 성황리에 시작을 하게 되었다. ‘아가의 샘’ 찬양사역은 계속 이어졌고, 해남읍내 중고등부 연합찬양제를 할 수 있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2) 교회 밖의 찬양사역
우리교회가 주도하는 교회 밖의 찬양사역은 힘들게 시작하였으나, 놀라운 역사를 이룰 만큼 엄청났다. 나는 양동제일교회 부목사 시절, YFC(십대선교회) 목포지회의 리더로 말씀과 찬양사역을 한 경험이 있었다. 매주 청소년집회을 인도해왔고, 찬양사역자들과 함께 찬양집회를 통해서 많은 청소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YFC 호남지부와 전국 YFC 집회에 청소년들과 함께 참예하여 말씀과 찬양으로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찬양 사역 경험이 제 목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의 찬양사역은 제주도 서귀포 효돈교회에서 시무하면서도 계속되었다. 서귀포시의 모든 교회들에서 찬양사역자들(목회자, 평신도, 청년들)을 모집하여 ‘예수선교회“ 를 조직하고 매주 목요찬양집회를 했다. 찬양팀들과 함께 거리공연을 한 후, 집사님이 경영하는 시내 중심가의 동백예식장에서 찬양집회를 했다. 1980년도에 전자오르간, 풀룻, 드럼, 트럼펫, 키타 등의 악기를 준비하고 서귀포시민회관에서 집회도 많이 했다. 그리고 유명한 국내, 해외찬양팀과 복음가수들을 초청하여 서귀포시민회관이 만석이 되는 집회도 여러 차례했다. 그리고 복음화율이 5%도 안 되는 제주도에서 일반학교의 요청으로 찬양집회도 했다. 그때 엄청나게 많이 드는 비용은 100% 기독실업인들의 찬조로 감당했다. 짧은 4년의 기간이었지만, 많은 청소년 찬양사역자들을 길러냈고, 찬양목사도 배출되기도 했었다. 은혜로운 경험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보수적인 제주도 지역교회들로부터 복음성가를 부른다는 이유로 이단이라는 소리까지 들었고, 노회에서도 조사위원까지도 만들어졌었다. 그러면서도 찬양사역이 교회부흥을 가져온다는 것을 안 많은 목회자들로 인하여 제주도의 찬양사역은 열매를 맺었다.
이런 은혜로운 찬양사역으로 교회를 부흥시킨 경험이 있었기에, 작은 해남중앙교회를 찬양사역으로 부흥시키기 위해서, 큰 기대를 걸고 해남에서도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목포정명여고 합창단을 위시하여 당시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들을 초청하고, 군민회관을 대여하여 찬양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우리교인들을 포함한 30여 명의 숫자만 모였다. 벽에 부딪쳤다. ‘아, 해남은 안 되는구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계속하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박용덕집사(현재 본교회 장로)와 찬양사역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자체 앰프와 악기를 준비하고 찬양사역을 이어갔다.
우리교회 자체적으로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들(박종호. 장욱조 등) 과 찬양댄스 그룹들을 초청하여 주일 오전예배시간에 교회에서 찬양과 공연예배를 드렸고, 그리고 군민광장에서 주일 오후예배를 “거리예배”로 드리면서 예술공연에 볼모지인 해남에서 광장과 거리예술이 시작되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후 우리 해남중앙교회 주관으로 해남군민광장과 예술회관에서의 찬양과 공연을 계속해왔고, 우리교회의 영향으로 일반공연도 해남군민광장과 예술회관에서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우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찬양사역은 해남군기독교협의회, 해남군기독교목회자협의회, 해남군기독교교회협의회가 창립되고, 연합부흥대성회가 시작이 되면서 폭발하였다. 해남우슬실내체육관이 건립되고, 해남군기독교교회연합대부흥성회가 매해 체육관에서 열리게 되면서 유명한 목사님들과 연예인들, 복음찬양가수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하게 되었다. 교회차량이 없던 시절에, 해남교통 버스들을 전세 내어 해남군 200여 교회 성도들을 실어날려 실내체육관을 가득 채워 영적 열기가 가득한 연합부흥성회를 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주역이 되었다. 우리교회 자체 앰프를 설치하고, 강단을 만들고, 체육관 바닥에 은박지를 깔고, 3박 4일의 부흥집회가 끝나면 우리교회 성도들만 남아 뒤풀이 찬양을 하고, 모든 설치물들을 철거하고, 청소까지 뒷정리를 하고도 피곤한 줄 몰라 했을 정도로 기뻐하며 헌신했다. 그래서 해남중앙교회가 아니면 해남군 연합성회를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더 놀라운 역사는 우리 해남중앙교회 단독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찬양집회를 한다는 온누리교회 경배와 찬양팀 500여 명을 초청하여(하스데반선교사 인도) 해남우슬체육관을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메운 가운데 뜨거운 찬양과 율동이 있는 찬양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 일이었다. 그리고 경배와 찬양테이프 3장 묶음, 5천 개를 우리교회가 부담하여 무료로 참가자 전원에게 나누어 주는 찬양전도를 하였다. 그 집회는 해남은 물론 인근 군에서까지 참예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집회였다. 그후부터 해남도 찬양집회가 되는구나 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복음성가를 부르면 이단이라는 편견도 깨졌다. 그리고 교회마다 예배 전 찬양단이 만들어지고, 복음성가를 부르며 예배를 예배되게 하였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역사였다. 지금도 그 감격이 새롭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예배사역에서 찬양사역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다.
5) 우리교회 복지사역
우리 해남중앙교회는 복지기관이 아닌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선교기관이기에 직접 복지기관을 설립하거나 위탁하여 복지사역을 하지 않았다. 물론 복지기관을 설립, 위탁하고, 유치원을 개설하자는 제안도 많았지만, 전문가가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교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국가가 하지 못하는 복지사각지대를 교회가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교회 복지사역은 기존의 일반복지(해남군의 복지기관 위탁복지,유치원, 학원 등)와 경쟁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 생각을 지켜왔다.
(1) 교회 공원묘지 운영
1996년 5월 13일(월), 황산면 호동리 산 34번지 3500여 평을 교회 묘지 구입했다. 100% 교인들의 묘지 헌금으로 구입하였다. IMF 직전이라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대로 떨어졌기에 말도 안 되게 2천 100여 만원으로 구입하였다. 지번은 임야로 되어 있지만, 밭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고, 마사토 토질이어서 묘지로 사용하기에 합당한 땅이었다. 저수지가 인접해 있고 멀리 고천암호수가 보이는 전경도 좋았다. 본 교회 전기엽권사님이 친척 땅을 소개해 처음엔 마을길을 통해서 운구차가 통행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놀랍게도 인근으로 2차선 도로가 새로 개설이 되어 이젠 마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묘지로 가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기적이요. 축복이었다. 해남중앙교회 묘지관리위원회가 관리하고 있는 해남중앙교회 공원묘지는 생장묘지와 화장묘지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교회 묘지는 우리 교우들은 물론 가족들에게 장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게 해주는 중요한 복지 사역이라고 본다.
(2) 요양원 예배사역
2006년 11월 1일(수)부터, 해남군 마산면 가나안요양병원(이사장 박영남장로) 강당에서 환우들을 모시고 매주 수요예배를 시작하였다. 이어 해남읍 신혜힐링센터, 옥천면 해남노인요양센터, 마산면 가나안요양원 예배를 매주 드리고 다양한 신앙적인
프로그램으로 입소하신 분들의 신앙을 도왔다. 특별히 믿음을 가진 입소자들이 너무 너무 좋아하셨다. 2020년부터 코로나로 인하여 잠시 중단되었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계속 되어져야 할 우리 해남중앙교회가 감당해야 할 복지와 복음사역이라고 본다.
(3) 해남중앙노인대학 사역
2010년부터 “해남중앙노인대학”을 개설하여 매주 어르신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였다. 노인대학 학장인 담임목사의 특강, 초청강사 특강, 노래교실, 한글교실, 성경반, 댄스반, 외부인의 다양한 공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봄과 가을이면 수학여행을 진행하여 어르신들의 바깥 나들이를 하도록 해드렸다. 물론 여기에도 많은 헌신자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2020년부터 코로나로 인하여 잠시 중단되었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계속 되어져야 할 복지와 복음사역이라고 본다.
(4) 장학회 사역
정말로 감사한 일 가운데 하나는, 평생을 오직 믿음으로 홀로 사시다가 2007년 9월 4일(화) 소천하신 고처애 명예권사님께서 장학금 800만원을 교회에 기탁하심으로 해남중앙교회 장학회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우리교회가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5) 다문화가정 한글교실 사역
2006년부터 “다문화 가정 한글교실” 을 통해 매주 50여 명(필리핀, 베트남, 몽골, 중국, 캄보디아 등) 이주여성들에게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사역을 2008년 10월 24일까지 계속해오다가, 국가가 지원하는 “해남다문화센터(센터장 정광선 - 우리교회 안수집사)” 가 생기므로 교회의 한글교실 사역은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다문화가정 온 가족 친정보내기, 해남군번영회와 해남청년회와 공동사업으로 매년 1차씩 다문화가족 위로잔치를 베르사이유웨딩홀에서 개최하는데 지원하며 함께 했다.
(6) 까페 사역
2005년 4월 2일(토)에 교회 안이 아닌, 군청 앞 엠마오서점 2층 45평에 교회 까페 “마샘(마르지 않는 샘)” 개원하는 예배를 드렸다. 전세 4천만 원, 인테리어 3천만 원을 들여 운영하였다. 우리 해남중앙교회의 셀 목장 모임과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다른 교회 성도님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월급을 주는 직원을 두고 경영했다. 그러나 찻값은 받지 않고, 선교 헌금함을 두고 헌금하도록 하여 전액을 선교하는데 사용하였다. 직원의 월급은 교회예산으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까페문화가 형성되면서 주변의 민원이 생기면서 부딪쳐가면서까지 계속하지 않기로 하여 까페사역을 멈추었다.
(7) 기타 복지사역
이 외에도 희귀병 환자 병원비 지원, 장학금 지급, 어려운 교인 돕기, 소외 이웃돕기, 교회 행사 중 축의금이나 화환 대신 쌀을 받아 지원하는 일 등을 군청 복지과와 해남읍사무소, 학교를 통해서 기쁨으로 섬겼다. 노회 안의 미자립교회와 은퇴 목회자 후원(교회와 각 기관에서)과 어려운 교회건축과 사택건축을 위한 지원사역을 하였다.
6) 우리교회 성지순례와 해외 여행사역
(1) 성지순례
1996년 8월 19일(월) - 29일(목)까지 우리 해남중앙교회 1차 성지순례단 17명이 이집트 카이로, 시내산, 요르단, 이스라엘 예루살렘, 갈릴리, 가나, 로마와 바티칸의 성지들을 순례하므로 큰 감동과 함께, 성경속의 성지들을 더욱 깊이 보고 알게 되었다. 2005년 11월 2일(수) - 12일(토)까지, 21명이 제 2차 해남중앙교회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다. 이집트 카이로, 시내산, 요르단 페트라, 이스라엘 예루살렘, 갈릴리호수, 가나 등과 로마, 바티칸, 나폴리, 폼페이까지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다.
이후 3차 성지순례, 1차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계획은 했지만 실행되지 않은 점은 아쉽다. 그리고 2020년, 2021년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 이스라엘 성지순례” 를 계획하고, 일찍 예수님의 발자취를 순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산을 5천만 원을 세웠지만, 코로나로 인하여 무산된 점은 참 아쉬웠다. 그러나 3차 성지순례, 1차 소아시아 성지순례,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 이스라엘 성지순례도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본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더 큰 감동과 은혜가 넘치기를 바란다.
(2) 해외 여행사역
대한민국의 땅 끝에 위치한 청정지역 우리 해남,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자랑스러운 우리 해남이다. 그러나 수도권에서 가장 먼 해남인지라, 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먼저 서울특별시를 위시한 국내의 대도시, 문화유적지를 우리 성도님들은 물론 특별히 자라나는 아동부 어린아이들과 중고등부 청소년들, 그리고 청년들에게 큰 비전과 꿈을 같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국내 여행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어 해외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국내는 물론 더더욱이 해외여행이 요즘처럼 활성화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교회가 예산을 책정하고, 참여자들이 비용을 부담하여 먼저 국내 여행을 진행하였다.
장년부 성도님들은 버스를 대절하여 국내 여행지(제주, 경주, 부산, 강원도 등)을 여행하였다.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는 버스를 대절하여 여행하거나 조를 편성하여 기차로(서울, 경주, 강원도, 경상도, 부산 등) 여행을 하며 견문을 넓혀 갔다. 처음으로 시작하였을 때의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원들이 지금 50대가 되었는데도 기억한다. 노인대학과 함께, 우리교인들로만 봄, 가을 여행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어 왔다.
아래와 같이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진행하므로 앞서가는 교회가 되었다.
ㅇ 2011. 1. 26(수) - 29일(토) / 중국 상해 비전트립
아동부(14명). 중고등부(14명). 어른(19명). 총 47명 참석.
ㅇ 2012. 1. 17(화) - 20일(금) / 일본 비전트립(오사카. 교도. 고베. 나라)
아동부. 중고등부. 어른. 총 37명 참석.
ㅇ 2016. 8. 22(월) - 25일(목) / 중국 위해교회로 비전트립( 29명 참석)
ㅇ 2017. 6. 26(월) – 29일(목)까지 / 청년회 오사카 비전트립(23명 참석)
7) 두란노 해남 아버지학교와 어머니학교 사역
두란노 해남 아버지학교와 어머니학교가 아래와 같이 우리 해남중앙교회 본당에서 개최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세우고, 가정을 새롭게 세워가는 중요한 사역이었다.지금은 아쉽게도 중단이 되었지만, 다시 개교가 되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세우고, 자녀들을 믿음으로 세우며, 가정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새롭게 세워가기를 기도해본다.
ㅇ 2003.10. 4(토) / 해남 아버지학교 1기,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 10시. 4주간.
ㅇ 2004. 4. 3(토) / 해남 아버지학교 2기,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 10시. 4주간.
ㅇ 2004.10. 30(토) / 해남 아버지학교 3기,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 10시. 4주간.
ㅇ 2005. 3. 5(토) / 해남 아버지학교 4기,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 10시. 4주간.
ㅇ 2005. 11. 5(토) / 해남 아버지학교 5기,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 10시. 4주간.
ㅇ 2006. 6. 12(월) - 14일(수) / 해남 목회자 아버지학교 6기,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 10시. 4주간.
ㅇ 2006. 3. 11(토) / 해남 어머니학교 1기,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3시, 4주간.
ㅇ 2006. 11.11(토) / 해남 아버지학교 7기,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3시, 4주간.
5. 김대용목사의 해남군을 위한 사역
1) 해남군기독교 연합회 활동사역
1983년 해남중앙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같은 교단내의 모임은 있었으나 다른 교단과의 연합활동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해남군의 정치판이 막강한 대흥사의 영향 아래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기독교 교단이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해남군의 교세는 해남읍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장로회(기장)의 교세가 가장 강하였고, 다음으로 해남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예장합동)이 교세가 강하였다. 그리고 우리 해남중앙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예장 통합)은 교세가 약하였다. 문제는 사회참여를
부르짖으며 군사정권에 가장 저항을 많이 했던 진보적인 기장과 사회참여를 죄악시하는 보수적인 친정부 성향인 예장합동이 하나 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연합회도 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기장, 예장통합, 기감(기독교감리회) 만으로 “해남군기독교협의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연합활동을 하다가 기장측의 옥천교회와 삼일교회가 우리 예장통합측으로 옮겨오면서, 우리 예장통합측을 향한 기장측의 반발로 기독교교회협의회가 깨지고 말았다. 다시 연합활동을 복구하기 위해 먼저 목회자 연합활동을 시작하기로 하고 “해남군 기독교교회목회자협의회”를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여 창립을 시켰다. 그렇게 목회자 중심의 연합활동을 통해 친밀해지고, 군사독재권이 끝나고 민주화가 되면서, 오늘의 “해남군기독교교회협의회(해기협)”이 조직되게 되었고, 해남읍내교역자협의회도 조직이 되어 지금까지 교파를 초월하여 아름답게 연합사역을 하고 있다. 예장합동측 이진교회가 우리 교단으로 가입하면서 약간의 문제는 생겼으나, 잘 극복해냈다. 나는 이 모든 연합활동이 자리잡기까지 창립총무를 몇 년씩 역임한 후, 자리가 잡혔을 때, 비로소 상임대표회장이 되었고, 지금은 모든 연합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이렇게 연합회가 창립이 되고, 앞에 기록한 대로 연합부흥대성회가 시작이 되고, 연합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해남의 정치는 물론 영적 주도권이 대흥사에서 기독교로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가 초대 민선군수를 기독교인으로, 13명의 군의원 중 11명이 기독교인으로 당선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기득권을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연합활동은 교단을 초월하여 화기애애하게 지금도 너무나 잘 이루어지고 있다.
2) 해남군을 위한 활동사역
(1) 기독교 연합 활동
- 해남 YMCA / 재건위원회 위원. 이사 25년, 부이사장 4년, 현재 평생회원.
* 서귀포 YMCA 창립 초대총무. YWCA 창립 지도위원 역임.
- 해남읍 기독교 교역자협의회 / 창립 초대총무. 상임대표회장 3회 역임.
- 해남군 기독교 협의회(NCC) / 창립 초대총무. 상임대표회장 역임.
- 해남군 기독교 목회자협의회 / 창립 초대총무. 상임대표회장 역임.
- 해남군 기독교 교회협의회 / 창립 초대총무. 상임대표회장 역임.
- 해남읍 예비군중대 예비군 군종담당관(육군 제 1989부대. 1983-1998년)
* 제주도 예비군 군종담당관(제주도군사령부. 1980-1983년)
- 해남경찰서 경목회 / 경목위원. 총무. 경목실장 역임.(1992-2021년)
- 해남교도소 교정선교회 / 초대회장 역임.
* 해남교정위원회 부회장 역임.(2010-2013년)
- 국제월드비전 해남지부 / 창립위원. 지도위원 역임.(2017-2021년)
(2) 해남군 활동사역
- 해남민주화 사역 / 민주화를 위한 국민운동본부 해남지회 상임대표 역임.
해민련(해남민주연합회) 상임대표 역임
해남군 핵발전소 저지대책위 공동대표 역임
* 전교조 해남지부가 해남중앙교회당에서 창립 됨.
- 해남군청 활동 / 해남군 제 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 역임(1999-2003년)
해남군 직영 자원봉사센터 운영위원회 위원 역임(1999년)
* 해남군 직영 자원봉사센터 운영위원회 소장 역임(2000년)
해남군 자원봉사센터 위탁 받은 후 센터소장. 운영위원장
* 해남군민간복지재단 이사장 역임(2002-2016년)
* 자원봉사단체, 개인관리. 푸드뱅크. 목욕봉사 등
해남군 해남예술회관 기획위원 역임(2002년)
해남군 21세기 해남발전협의회 위원 역임(2000-2004년)
해남군 해군 교육사 유치위원 역임(2005년)
해남군 신활력사업 유치위원 역임(2005년)
해남군 대표축제 개발위원 역임 – 명량축제 선정(2005년)
해남군 지역사회 복지협의체 대표위원 역임(2007-2017년)
해남군 의정비 심의위원회 회장 역임(2007년)
해남보건소 이주여성한글교실 프로그램결연 대표 역임.(2008년)
해남군 생활보장심의회 위원 역임(2014년)
해남군 긴급복지지원 심의위원회 위원 역임(2013-2015년)
도민체전 해남군 준비위원 역임
- 해남동초등학교운영위원회 지역위원 역임.(2001년)
- 해남경찰서 마음놓고 학교가기 추진협의회 위원, 부위원장 역임.(2005년부터)
- 해남토론문화 형성을 위한 “해남포럼” 회원, 상임회장 역임.
- 해남희망원 입소자 심사위원(종교대표) 역임.
- 해남노인복종합지관 운영위원(2007년 – 2020년) / 감사장(2020년)
- 해남 색동어린이집 이사 역임(2016 – 2021년).
3) 김대용목사 방송사역
- 목포극동방송 FM 방송 설치를 위한 추진위원 역임
* 목포극동방송국 10분 설교 - 2001년 5월 12일(토)부터 시작
* 목포극동방송국 주일예배 설교(30분)
- CBS 목포방송국 해남지부장 역임
CBS 목포방송국 운영위원 역임
- CTS 목포방송국 해남지부장 역임
CTS 목포방송국 운영위원 역임
* CTS 목포방송국 주일예배 설교 방송.
4) 김대용목사 노회사역
- 제주노회 교육부 부장 역임
- 목포노회 해진시찰회 시찰장 3회 역임
- 목포노회 부장 역임 / 규칙부. 교육부. 공천부. 사회부
- 목포노회 임원 / 부회록서기. 회록서기. 부서기. 서기 2회. 부노회장
- 목포노회 69, 70회기 노회장 역임 / 1993. 10. 19. 목포성산교회당
- 목포서부유지재단 이사 역임
- 땅끝노회 해남시찰회 시찰장 2회 역임.
- 땅끝노회 부장 역임 / 정치부. 규칙부. 교육부. 공천부. 사회부. 선교부
- 땅끝노회 위원장 역임 / 교회동반성장위 12년. 교회개척전도위. 고시위.
재판국장. 기타 다수 특별위원장 역임.
- 땅끝노회 임원 / 7회기 부노회장 역임
- 땅끝노회 8회기 노회장 역임 / 2003. 10. 20. 완도중앙교회당
5) 김대용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사역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대 28회 참석. / 총회 공로패 받음.
- 총회 교회동반성장위원회 위원 4회 역임.
- 총회 교회동반성장위원회 정책위원장 5회 역임(정책위원 10년)
- 총회 커뮤니케이션 특별위원회 분과장 역임
- 총회 목사고시위원회 실행위원, 분과장 역임
- 총회 재판국원. 분과장 역임
- 총회 재심재판국장 역임.
- 총회 특별재심재판국원. 분과장 역임.
- 총회 장로교출판사 감사 역임.
- 총회 장로회복지재단 이사 역임.
- 총회 각부, 위원회 실행위원 및 분과장 다수 역임.
- 총회 300만 성도 운동본부 홍보대사 역임.(2009년)
6) 김대용목사의 경력
- 본적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 101번지
- 장로회신학대학원 목회과정(서울 광장동 소재) 졸업.
-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선교학석사(서울 충정로) 졸업.
- 미국 샌프란시스코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 서울 영광교회(서울 아현동 소재) 교육전도사 2년.
- 나주교회(전남 나주 소재) 전임전도사 2년.
- 곡성 입면교회(전남 곡성군 입면 소재) 담임전도사 1년.
- 양동제일교회(목포시 호남동 소재) 부목사 2년.
- 효돈교회(제주도 서귀포시 효돈동 소재) 2대 위임목사 4년.
- 해남중앙교회 1대 위임목사(1983. 9. - 2021. 12. 31. 38년 4개월)
7) 김대용목사의 가족(2021년 현재)
아내 지영신 사모(해남중앙교회 명예권사)
2녀 1남 / 큰 딸 김보미전도사. 사위 이영상목사 / 이하언. 이희명. 이 준.
작은 딸 김보라집사. 사위 신성헌안수집사 / 신주안. 신지아.
아들 김보람집사. 며느리 구현경집사 / 김산들. 김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