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노씨 문효공파세보 권지상 1995년 을해판 34-35쪽
1-풍천노씨 세계
송재부군이 지음
9대조 국자진사의 휘는 유이니 아들은 대상이요. 휘는 장용이며 그 아들 상서호부봉익의 휘는 준이니 수원사족 복창시부승 최득기 따님에게 장가들어 통의검교군기감 휘 정을 낳으니 이상은 모두 연천 사천 두 고을에서 살으셨고 산소 또한 이 고을에 있다.
정이 청도직장동정 김순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으니 정순에 추봉되어 판사재시가인 휘 서린이요. 차남은 개성목감직인 휘 덕린이며 여서는 승봉랑 판도좌랑인 박숭헌이다.
서린이 의안군 사족 봉악판소부시사 현지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의안군부인으로 개성에서 사시다가 철원으로 이사해서 사셨는데 4남 4녀를 낳으니 장남은 호군 천보요. 차남은 용구현령 휘 천계요. 3남은 낭장 천수요. 4남은 중정종부령 천익이며 장려는 별장 황지단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봉익령혜윤상호군 안윤의에게 출가하고 3녀는 중랑장 박문절에게 출가하고 4녀는 봉상군기소윤 송득인에게 출가하였다.
11월 초십일에 판사재가[서린] 본집에서 돌아가시니 철원에 장사지냈으며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이 경기부내에 들어오니 부인헌씨가 자녀와 가족을 데리고 농장을 찾아 청도군에서 사시다가 4월 4일에 서거하시어 본군에 장사지냈다. 덕린이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돈이고 딸은 중랑장 손국영에게 출가하였다.
천계는 밀양부 향족령동정 박연의 따님에게 장가드니 추화군부인인데 어머니 현씨를 따라 이사하여 농장이 있는 의안군부의 동쪽 곡목리에서 살며 1남을 낳으니 낭장 휘 흥길로 공민왕 20년(1371년) 2월 1일에 본집에서 서거하시어 본군부 동북쪽 백리산 동북록 동향에 장사지냈고 부인 박씨는 30년을 수절하다가 조선조 정종 3년(1400년) 8월 16일에 서거하시어 본 마을 신현산 남향에 장사지냈다.
휘 흥길은 여흥군 사족 봉익판도판서에 추봉된 민병익의 따님에게 장가드셨으며 우왕 원년(1375년)에 도병마사 이순을 따라가서 의주 성상소가 되고 기미년(1379년)에 도순문사 심덕부를 따라가서 평양 성상소가 되었으며 유영녹사에 종사한지 3년이 지나서 이미 본사로 돌아와 좌우위 낭장에 배수되었고 창원부 본리에 퇴거하여 1남 2녀를 낳으니 사정 휘 언이요. 장녀는 사정 김모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봉례랑 순모에게 출가하였다.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 천수를 즐겁게 사셨고 태종 3년(1403년) 3월 11일에 부인 민씨가 서거하시여본군의 남쪽 모삼리 초도 서록서향에 장사지냈고 세종 8년(1426년)11월 22일에 낭장이 본집에서 서거하시어 본군의 동가리 산리 소산 동록동향에 장사지냈다.
언은 김해사족 봉상군기소윤 김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백당의 녹사에 종사하였다. 계미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상을 마치고 이내 병들어 벼슬한지 백일 못되어 다시 종사하지 못하고 본 마을에 퇴거하였다가 정통 병인년(1446년)에 서거하시어 창원부 동면 불천토성산 남록에 장사지냈다. 김부인은 천순 3년(1459년)에 서거하시어 공으로 더불어 쌍분으로 장사지냈다.
3남 3녀를 낳았으니 1남은 장사랑 백동으로 사직 감극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2남은 곧 숙동이니 가정대부 전 예조참판이요.
3남은 수의교위 계동이니 사정 현면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1녀는 교도 홍여명에게 출가하였다. 3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치요, 차남은 순이니 김극중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나 어리고 3남 한과 2녀는 다 어리고 2녀는 부장 박수에게 출가하여 1남 2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며 3녀는 무과 사정 석효동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거본리의 아래에서 권루가 많으므로 불천묘갈문을 초록하여 고람토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