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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미디어고등학교 후배들에게
2011.9.21 오후 2시20분
1. 현재 나의 위치.
안녕하세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후배 여러분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어젯밤 한숨도 못자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저는 연예인도 정치인도 아니고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인데 교장선생님께서 선배로서 조금이나마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여러 번 사양을 하다가 ‘이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제가 이 학교 운영위원인데 정말 임길영 교장선생님이하 여러 선생님들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불철주야 애쓰시는 걸 많이 봤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께서 계신다는 게 얼마나 여러분들은 행복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현재 서신동에 있는 ‘서전주새마을금고’에 전무로 재직하고 있으며 저희 서전주새마을금고는 거래회원 33,000여명 임직원 43명에 자산 1,540억 공제3,000억 원의 규모의 실무 책임자로 있습니다.
오늘 저의 강의를 듣고 여러분 마음속에 나는 저 선배보다 열배로 성공해서 먼 훗날 나도 저 자리에 서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다면 아마 이루어질 수 있을 겁니다.
B(birth)-탄생 와 D(death)-죽음 의 사이에는 C(choice)-선택 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을 선택을 했고 오늘날 영상미디어고등학교를 선택했으며 훌륭한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들도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들이 ‘어머님아버님 왜 나를 낳으셨나요.’하며 부모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부모님이 여러분을 선택한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부모님을 선택한 거라고 합니다. 우리가 선택을 했으면 선택한 것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 학교의 명예를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하고 훌륭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열정적이고 학생들을 위하여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교장선생님 이 계실 때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2.나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서 살아온 과정
저는 초등학교 때는 어려서 잘 모르겠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생활은 남과 다른 인생스토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그냥 남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면 이 자리에 설 일도 없게 되겠지만...
그럼 지금부터 저의 시작은 정말 초라했지만 누가 뭐래도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역경과 ,고난 , 성공 스토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새마을금고 전무가 된 것이 성공이 아니라 어려운 역경을 나 스스로 인생을 개척했다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들하고 비록 동떨어진 시대를 살아온 얘기라 세대차이가 난다고 생각이 들겠지만 ‘과거에는 저런 일도 있었구나.’라고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모악산 지나서 오봉산 밑에 백여리 대모라는 산골동네 호롱불 밑에서 3남3녀중 딸로서는 셋째 딸 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삼순이에요.
한때는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엄청 잘나갔어요.
시대가 시대인 만큼 부모님은 학교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셨고 제위로 언니 둘은 학업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만은 남자라고 서당에 보냈습니다.
저희부모님은 남존여비사상이 엄청 심하셔서 여자는 학교에도 안 보냈어요.
요즘 개그콘서트 보면 두 분 토론 이라는 코너에서 남하당 대표 박영진이 “여자가 할 거다 하면 소는 누가 키우느냐?”하는 내용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진짜 그랬어요.
그저 농촌에서 태어나서 부모님들처럼 농사짓다가 여자는 농촌으로 시집가고 농사짓고 살면 되는 그런 생각밖에 할 수가 없는 거죠. 그 시절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학교보내기를 권유하며 가정방문을 다녔을 때고 저한테도 학교입학을 권유하셨는데 저는 한마디로 “저 학교 못가요” 공부가 뭐여요?
하고 대문을 닫아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규 중학교도 못간 저는 초등학교 옆에 고등공민학교를 가게 됩니다. 고등공민학교는 등록금이 없는 대신 학생들이 학교에서 누에를 치고 뽕따고 돼지 키우고 봄에는 산에서 산나물을 뜯어 팔고, 모심기 보리 베기 등을 해서 돈을 벌어 학교를 운영하다보니 입학할 때 40명이던 학생이 졸업할 때는 11명이 됐어요.
학교에 가도 일만 시키고 집에 와도 어른들은 모두 새벽부터 들에 나가서 일하시고 해가 넘어가야 집에 오시니까 학교 갔다 오면 보리쌀 갈아서 밥하고 청소하고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해야만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지는 겁니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호롱불 밑에서 책 읽고, 보고 듣는 게 없으니까 아무런 희망도 꿈도 없었을 때 그래도 도시에서 봉사활동 하러 오신 선생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고등학교를 갈수 있다는데 ,워낙 시골이고 수업을 하기 힘든 환경 이다보니까 몇 년 동안 검정고시 합격생을 배출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은 검정고시 합격을 시키는 게 가장 큰 보람으로 알지만 봉사활동 몇 달 하시다가 취직하면 떠나버리고 하시니까 정말 우리들은 목표가 없었어요.
여러분들은 고등공민학교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요즘은 인터넷 강의도 있고 학원도 많아서 검정고시도 쉽게 합격한다고 하던데 예전에는 정말 어려웠어요.
겨우 교과서 몇 권이 전부였거든요.
그때 저는 제 할머니 어머니께서 부뚜막에 조왕신이라고 하지요 , 매일 아침 새로 길어온 물을 한 종발 떠놓고 우리 아들 잘되게 해주세요. 우리 손자 잘되게 해주세요. 매일 손바닥을 비벼가면서 비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 딸들 잘되라는 말은 한 번도 없는 겁니다. 저는 그때 결심했어요.
엄마 내일부터는 제가 할게요. 하고 마음속으로 정말 간절히 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턴가 내 목표는 “검정고시 합격이다“하고 지금 현재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매일아침 어머니보다 일찍 일어나 공동우물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다가 물을 떠놓고 꼭 검정고시 합격하게 해주세요. 하고 매일 빌었어요.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밥을 하면서 단어를 외우고 통학 길을 걸어 다니면서 단어외우고 책을 보고하면서 매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러던 중3 검정고시 합격자 발표 날 어떻게 되었겠어요?
합격생은 단 한명 박 삼 순!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 이러다가 심장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 생애 그보다 감격스러운 적은 없었을 겁니다.
너무나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기에 더욱 감격스럽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인터넷 이 있어서 미리 알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전화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전기도 안 들올 때 오직 교육청에서 공문이 와야만 알 수 있었던 때라 너무 기쁘고 다른 친구들한테 미안하고 어떻게 표정관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여기계신 여러분들도 뭔가 목표를 확실히 가지고 간절히 청원하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로 검정고시만 합격했지 어디고등학교를 어떻게 가야할지 체력장이 있는 것도 모르고 주위에 고등학교 가는 친구도 없지 가족들도 자가 뭐하는지 관심도 없고 모두 만점 맞는 체력장도 2급을 받고 명문 여고에 지원했는데 물론 낙방이었지요.
명문 전주여고에 지원한 운동장에 많은 학생들 그리고 겨우 졸업생11명인 시골 학교의 나.전 그 순간 새로운 세상을 본거에요. 지금까지 난 시골에서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지금까지 난 무얼 한 건가 아! 여기에서 난 무너지는 건가. 저는 실망에 빠져서 중학교 때 선생님을 찾아가 처음으로 저의 미래에 대하여 얘기하며 얼마나 울었었는지 모릅니다.
검정고시과목인 네 과목만 공부를 했고 고입시험 과목 중 다른 과목은 아예 배운 게 없으니 고등학교는 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얼마나 울고불고 하니까 중학교 때 선생님께서 서점에서 단답형 총정리 문제지를 구입해서 후기 시험 때까지 같이 공부를 해보자 하셨고 문제하고 답만 외우는 식으로 공부를 하고 여상이 어떤 학교인지도 모르고 전주여상에 아마 간신이 턱걸이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꿈 많던 여고시절은 시작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더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시골학생이 전주로 나와 두 남동생을 데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생활을 하면서 수도시설은커녕 연탄조차 마음대로 땔 수 없던 어려운 환경에서 새벽밥해서 동생들 도시락에 콩나물 시루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새벽6시까지 학교에 가서 타자를 배우고 학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학교시설 또한 열악해서 한 학급 학생은 65명인데 타자기는 30대 이런 실정이다 보니 일주일에 타자 수업시간이 2시간이면 격주로 일주일에 한 시간씩 타자 수업을 해가지고는 도저히 타자급수를 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학원은 꿈도 못 꾸지요.
그래서 타자실을 새벽 6시에 개방했는데 타자실 문 앞에 줄을 서기위해 두 남동생 데리고 자취하면서 팔복동에서 남노송동까지 6시에 학교에 간다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 가지고는 할 수가 없어요.
제 아들은 대학졸업하고 직장 다니는데 지금도 아침마다 제가 6시30분에 깨워야 일어납니다. 제가 멀리 여행간 적 있었는데 출근을 못하고 9시까지 늦잠을 자니까 직장 상사가 집까지 데리러 왔대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지요.
그래서 누구보다도 먼저 급수를 따고 타자는 고 3때까지 만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고3때 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고3때 시골에서 농사짓고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빨리 취직을 해야 하는데 그때는 상업담당선생님이 추천을 해주셔야 취직이 되는 시대였어요.
저는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빽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고민 하다가 저희 시골에 감이 많았었습니다.
잘 익은 홍시 감을 일요일에 시골에 가서 따다가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저희 시골집에서 30분정도를 걸어 나와서 버스를 타고 전주에 와서 또 그걸 머리에 이고 학교근처 취업담당 선생님댁을 찾아가서 선생님께 말 한마디 못하고 눈도장만 찍고 온 기억이 납니다.
지금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웃음이 나옵니다.
어쩌면 꼭 취직을 해야만 한다는 절실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겠지요.
어쨌든 취업담당 선생님 추천으로 인해 교보생명에 입사를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보험사들이 초창기여서 휴일도 없이 밤마다 9시 이전 퇴근은 꿈도 못 꾸고 모든 일이 수작업인 힘든 직장생활을 5년 정도 하다가 80년도에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그 당시는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시대였습니다. 우리 동창하나는 결혼을 안 하고 지금까지 은행을 다니는 친구도 있습니다.
결혼 적령기를 놓친 거지요.
어쩌면 저의 청소년 시절은 너무너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생활의 연속이어서 지금도 그 시절로 돌아가기는 너무 싫습니다.
그 후 직장 생활하는 남편과 결혼해서 결혼이란 편하고 좋은 것이구나 생각했는데 결혼3년만에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여러 사업에 실패하고 결혼13년 동안 월세 방을 전전하다가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이 서른넷에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하여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리고 나선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지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사무실을 개업했는데 남편이 여자가 사무실에 있으면 손님이 안 오는 거라며 저를 무시하는 겁니다. 실컷 공부는 제가 해서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정말 어이없지요.
그때만 해도 여자라고 운전면허도 못 따게 했었거든요.
저 여자라고 엄청 무시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당시 집근처에 새마을 금고가 생겼는데 개점한지2개월이 지나고 주부사원을 뽑는다고 남편이 거기나 가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밑바닥인 수금사원으로 들어가 월30만원을 받으며 매일 신규 고객을 유치하고 온 동네 사람을 우리금고 고객으로 만들겠다고 앞만 보며 무지 열심히 뛰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금고가 번창하게 되고 여러 지점이 생기고 지점장까지 하고 지점장을 할 때도 제가 지점이동을 하면 고객들의 예금이 100억 이상씩 이동을 했었습니다.
고객들이 저를 그만큼 신뢰를 하게 된 거지요.
고객들과의 신뢰도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영업부문에서 우수한 실적을 거양하여 해외연수로 유럽, 일본, 싱가폴, 베트남, 금강산 등등 여러 곳을 다녀왔고 나이 50에 전·상무 간부자격시험을 볼 때는 젊은 사람들에게 밀려 낙방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6개월 전부터 남모르게 틈틈이 준비하고 한 달 전에는 독서실을 접수하고 퇴근하면 바로 독서실에 들어가 새벽2시에 문 닫을 때까지 맨 마지막에 나오겠다고 결심하고 끝까지 남아서 공부한 결과 340명중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여 젊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었습니다.
제가 다른 자격 있는 남자들을 제치고 본점 실무책임자로 발탁을 할 때도 말들이 많았어요.
그래도 전북에서 가장 큰 금고이고 1000억이 넘는 금고 실무책임자를 어떻게 여자에게 맡기냐는 등... 2007년도에 상무로 승진할 때만 해도 이월 결손금이 40억 이상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본점 실무책임자로 와서 3년 만에 모두 정리하고 당기순이익이 연간 20억 정도 나고 있습니다.
저의 남편도 48세에 대학에 입학하여 시의원도 했고 지금은 겸임교수로 대학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대학에 못 간 것이 한이 되어 남편 대학졸업 시키고 딸, 아들 졸업 시킨 후 2007년도 내 나이 50살에 전주대학교 금융보험학과에 입학하여 1,2학년은 과수석하여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고 작년 8월에 한 학기 조기졸업까지 하게 됐습니다.
올해로 새마을금고에 근무한 게 20년이 되는데 엊그제 같고 20년 동안에 파란만장한 일들이 많이 있었지요. 금융위기로 2002년도에는 금고가 어려운 상황까지도 갔었지만 병사가 휴전선을 지키는 심정으로 오늘날 당기 순이익이 20억 이상 나는 그런 금고로 안정이 됐습니다.
이젠 직원으로서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왔고 마지막 남은 꿈이라면 후배직원들에게 튼튼한 직장을 만들어주고 주민들에게 좋은 이웃 같은 좋은 은행을 만들어주고 60세 퇴직하고 이사장까지는 한번 해보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습니다.
반드시 꿈은 이루어질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기계신 여러분들도 목표를 가지고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매진한다면 성공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목표를 확실히 가지고 대학에 진학한다면 매우 좋겠지만 남들이 대학에 가니까 그냥 간다는 그런 생각보다는 요즘은 고교졸업생들을 채용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보면 우선 취직하고 나서도 대학은 얼마든지 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방법이 경제적으로 훨씬 풍족하고 승진도 더 빨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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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세 가지 금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황금, 소금, 그리고 지금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했던 모든 부분은 결코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여러분들의 선배가 후배들에게 결코 좌절 하지 말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선배의 당부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두서없는 선배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신 여러분들과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교장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미디어고등학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