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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결혼 3
-1970년대초
금순은 부엌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물을 잔뜩 먹은 빨래 덩어리는 금세라도 자신의 팔을 뚝 분질러버릴 것만 같이 무거워서 그녀는 은근히 겁이 났다.
'늙어서 그런 겐가?'
속으로 중얼거려 보던 그녀는 남몰래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 나이 벌써 서른하고도 다섯…….'
결혼 적령기는 진작에 흘러갔고, 노처녀 히스테리가 쌓인다는 이십대 후반도 옛날이야기로 만들어버린 지 오래인,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귀여운 자식 낳아 오순도순 살림을 일궈갈 꿈을 꾸기에도 아득히 늦어버린 '노파' 신세의, 나이 서른하고도 다섯!
금순은 저려오는 팔을 번갈아 주무르면서도 점점 가슴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오윌 하늘이 신록마냥 푸르르게 빛나는 것도, 마당 모서리에 자리를 튼 감나무 줄기마다에 반짝거리는 새순이 돋아나는 것까지도 공연히 서글픈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마음속으로는 울화통같기도 하고 애잔한 슬픔 같기도 한, 미묘한 물보라가 파도를 일으켜댔다. 빨래를 휘감고 있는 자신의 팔을 들여다보면서 그녀는 엉뚱하게도 피부가 하루하루 눈에 띄게 메말라가고 있다는 초조감에 휩싸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근래에 없던 초조감이었다. 가까운 몇 해, 서른을 넘기면서 지나보낸 수 개 성상 동안에도 거의 느껴보기 못하던 안타까움이었다. 스스로의 인생이 성냥불 삭아들 듯 까맣게 주저앉는 꼴을 문득문득 확인하는 일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도 더 아픈 쓰라림이기 때문이었다. 동생인 은순이 곧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 때문인가?
"팔도 아프지 않나? 그 무거운 빨래를 껴안고서 뭘 그리 섰노? 온통 세상 고민은 혼자서 다 하노란 표정일쎄에?"
그녀가 세 들어 사는 건물의 주인인 제중당약국 김 여사였다. 금순은 화들짝 제 정신을 차리면서 팔에서 막 흘러내리려던 찰나의 빨래들을 새로 챙겨들었다.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종종걸음을 치며 건물 옥상을 향해 내달았다.
"왜? 요새 동생 때문에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
제중당약국 김 여사의 말이 그녀의 꽁무니를 쫓으면서 따라왔다. 금순은 문득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동생?'
'동생 때문에 무척 신경을 쓰는 모양이지? 동생이 결혼을 서두르고 있으니 언니 입장에서 어찌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까? 아무리 노처녀 언니라 해도 바로 아래 동생이 시집을 가는 마당에 마음고생이 없을 수가 없겠지…….'
그러나 금순은 저절로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기분이었다. 약국 김 여사가 내 속을 그렇게 좋게 봐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었다. 직업도 없이, 마누라가 크게 약국을 열어 끌어다주는 돈으로 고급 승용차를 몰고다니며 헛짓만 떠벌이는 것으로 호가 난 사내, 도무지 왜 그런 남편과 평생을 한 집에서 살아가는지 도토 이해가 되지를 않는 제중당약국의 여 주인 김 여사, 아득한 옛날에 약대를 나온 그 쟁쟁한 여자가 자신을 그렇듯 호의적으로 봐줄 리는 없다는 사실을 금순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네 동생이랑 결혼 말이 난 그 남자는 직업도 없다며? 아, 그렇게 시퍼런 사내가 번듯한 직장 하나 없이 빌빌거린다는 게 말이나 될 법 한 일이냐? 뻔하지, 뻔해! 그 뭐냐, 노동운동인가 뭔가 한답시고 까불어대다가 직장에서 모가지 댕강 잘린 사내란 거야 세상천지가 다 아는 얘기인데, 그걸 그래 내게 숨기려고? 네가 요즘 바싹바싹 입술 타들어가게 고민하고 있는 이유를 내가 다 안다, 이것아!'
자신의 뒤통수에다 대고 약국 여 주인이 꼭 그렇게 힐난을 던져오는 것만 같아 금순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 탓에, 금순은 점점 더 빨래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제중당약국 김 여사가 자신을 그렇게 멸시하듯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물에 젖은 빨래는 아까보다도 한층 더 팔에다 압박을 가해왔다. 물론, 제중당약국 김 여사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따위야 애당초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금순 자신의 생각이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 동생 은순에 대한 감정이 어느샌가 살짝 변해있다는 점, 그런 것들이 그녀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대체 어딜 쏘다니느라 아직도 집구석엘 들어오지 않는 겐지 모르겠어……. 언니인 내가 제 빨래까지 몽땅 다 빨아서 이렇게 무겁게 받쳐들고 2층 옥상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금순은 물이 뚜욱 뚝 떨어지는 옷들을 하나씩 줄에다 내걸면서도 시종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월 봄날의 주말,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새 파란 여동생은 제 애인이랑 돌아다니느라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게다가 그 사내애랑 결혼식을 올리겠노란 소문을 동네방네 다 퍼뜨린 형편인데, 동생이 아무렇게나 내벗어 던진 속옷이나 주워서 빨아대고 있는 서른다섯 늙은 처녀가 바로 자기 자신이란 현실을 확인하자, 그만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마음이 콱 짓눌려버린 까닭이었다.
"니가 제일 큰 아희인데 우짜겠노. 사내자식 그트면야 장남이니 논 밭떼기 서너 마지기 다 팔아서라도 대도시로 나오겠지만, 니는 기집아 아이가? 그러고 또, 마실 안에 바라. 워느 집 딸년이 더 상급 학교로 공부할락고 가는고? 면장집 딸 말고는 다들 학교 끊어뿌리지 않는감."
근근이 다녔던 중학교를 마칠 무렵, 부모는 그녀를 불러 앉혀놓고서 일장연설을 펼쳐댔다. 금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었다. 반항감도 없었다.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좋았겠다' 따위의 쓰잘 데 없는 운명론을 떠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러려니' 여겼을 뿐이었다. '더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식의 소망을 품을 게재도 아니었고, 확연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억울한 구석이 있다' 싶은 자각을 느낄 정도도 아니었다. 이렇게 되어가는 것이 당연한 경로인 걸로만 인식했을 따름이었다. 재벌의 딸은 그에 알맞은 인생 경로가 있고, 면장집 딸 또한 그 식의 어떤 예정된 길이 있으며, 그렇고 그런 농사꾼의 딸에겐 또 그 나름의 나날이 마련되어 있으려니 믿을 뿐이었다. 또, 딸에게만이 아니라 아들에게도 그것은 매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권력과 돈을 가진 명문대가의 아들, 그만은 못하지만 그런대로 제법 살 만한 집의 아들, 가난하고 힘 없는 바닥 집안의 아들 사이에도 딸의 경우나 마찬가지의 변하지 않는 차별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금순은 조금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도시로 나왔다. 부잣집 자식들같이 유학으로가 아니라, 공장엘 다니기 위해서 큰 도시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금순아, 금순아!"
방직공장엘 다닌 지 서너 달 지나 처음으로 고향 마을에 갔을 때 또래가 비슷한 계집아이들은 떼서리로 몰려와 도시 얘기를 들려달라고 법석을 떨어댔다.
"첨에 공장에 들어갔을 때 워떻든, 느낌이?"
방 안에 주욱 둘러앉은 동네 계집애들은 눈을 반짝이며 금순을 쳐다보았었다. 금순은 무엇부터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마땅할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는 자신과 같은 '산업역군', '수출역군'들을 '공순이'로 얕잡아 부르는 줄도 알게 되었지만, 그 무렵에는 그런 사정도 알 리가 없던 나이였으므로, 그녀가 자신의 생활에 대해 열성을 기울여 설명하려고 노력한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출근한 날이 제일 기억에 나암떠라."
"우째서? 출근하는 날 무슨 일이 있었남?"
금순은 빙긋 웃으면서 아이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했었다. 또래 계집아이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일이 그녀로서는 그저 즐거워서이기도 했지만, 그 무렵은 방직공장 등에 '공순이'로 취직하는 것도 (훗날처럼 회사 정문에만 찾아가면 저절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빽'을 써야만 성사되는 사회였던 까닭이다.
"취직이 되었닥 해서 다음 날부터 회사엘 안 갔나."
계집애들은 우르르 고개를 쳐들고 금순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공장 안엘 들어가니까 갑자기 귀가 황 막혀버리더라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더라."
"그기 무슨 소리고? 공장 안이 얼마나 시끄러울 긴데 왜 아뭇소리도 안 나더란 말이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안 들리더란 말이가? 그 참 이상도 하다, 늬 말은!"
공장 경험이 없는 애들이 금순의 말을 재빨리 알아들을 리는 만무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을 계집애들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즐거워서 흥에 겨웠다. 그만큼 그녀는 공장 생활이 스스로의 몸을 갉아 먹어가는 과정임도 눈치채지 못하는 채로 긴 세월을 소모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얼마나 큰 줄을 늬들은 모를 거다. 사람 귀는 말이제, 일정한 크기 이상 되는 소리는 듣지를 못 한다 카드라.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안 들리는 마당에, 어떻게 사람 말이 들리겠니? 기계 돌아가는 왱왱 소리에 귀가 그만 듣기를 멈춰버린 거야."
금순은 그 때부터 이십 년을 '공순이'로서 생활했다. 어린 나이 탓에 공장에 취직을 할 수가 없어서 남의 주민등본을 써서 방직회사에 들어간 이래로 지금의 서른다섯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렇게 살아온 것이었다.
그 동안 그녀는 부지런히 일하였다. 육교 난간에 나붙은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시청의 구호에 가장 적절하게 들어맞는 '공순이'로서 그녀는 빈틈없이 살아왔다. 새벽이면 잠에서 눈을 떠 일터로 나갔고, 17원 하던 라면이 300원으로 오르는 긴 세월 동안 줄곧 그것을 끓여먹으면서 저축을 해댔다. 아래로 셋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남동생들을 공부시켰고, 늙어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 구완도 빠짐없이 감당해냈다. 모두들 그녀를 두고 '현대판 심청'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금순을 두고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면서 입에 올려댔다. 심지어는 '굳세어라 금순아 카는 유행가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락고. 그게 다아 우리 마실에 금순이 그튼 이쁜 딸이 태어날 예언이었는 기라' 등의 화제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은 것은 병과 늙음뿐이었다. 그같은 칭송은 도무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점점 제월이 흘러 그녀가 이런저런 잔병치레로 앓는 소리를 일상사로 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이것아, 그러길래 내가 뭐라고 그랬노. 재산도 없고 외모도 볼픔 없어도 그저 마음씨 참한 청년 나타나면 퍼뜩 시집을 가라고 그러잖던! 내내 동생들 학교 마치믄 결혼허겠노락고 버텨쌓더니 인자 우짜겠노! 나이가 벌써 서른을 후딱 넘기뿌린는데!"
아버지가 줄담배를 피워물고 돌아앉아 있는 중에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중얼대는 말이었다. 금순은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부모들이 그러는 것은 늙은 딸 가진 입장이 되어 애간장이 타다보니 그렇게 핀잔 아닌 핀잔을 하시는 것이리라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남동생의 행태는 결코 용서할 수 없 는 섭섭함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아, 내가 어디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는 이야긴가? 남의 집에 살면서 어떻게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있겠느냐 이거지. 장차 번듯한 집 한 채 구할 때까지만 누나가 그냥 모시고 살아라는 거야. 아따 마, 그게 뭐 부모 모시는 겐가. 원래 살던 대로 그냥 사는 것이지."
대학 나와 회사에 취직해 있던 맏동생이 결혼을 하면서 그렇게 일갈을 해대던 무렵에야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삶이 어떤 형태로 진행되어 왔는가를 차가운 마음으로 돌이켜보게 되었다. 나이 서른을 넘긴 누나를 밀쳐내고, 중학교 문턱 구경만 간신히 하고 어언 십 년하고도 그 반 넘어 세월을 '공순이'로 살아온 누이를 제쳐두고 먼저 결혼식을 올린, 대학 나온 남동생이 당당하게 내뱉어댄 큰소리에 마침내 금순의 생각은 활짝 현실적으로 열린 것이었다.
"그럼, 늬 말대로 친다면 그럼, 자기 집 없이 전세나 사글세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부모 모시고 살지 못하겠네?"
금순은 문득 목에 피가 솟구쳐오르는 느낌에 빠지면서 얼굴을 붉혔다. 남동생도 고분고분하게 물러설 리가 없었다.
"왜 남의 집 이야기를 해? 내가 어디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고 그랬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대로 지내자는 게 뭐가 이상해서? 전세방 살면 서글프니까 나중에 내집 산 뒤 번듯하게 모시고 한번 살아보자는 것도 잘못인가?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럼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갈 곳도 없겠네?"
금순은 눈을 부릅뜨고 남동생을 노려보았다. 내가 저런 애를 위하여 아까운 내 청춘을 다 흘려보냈다는 말인가 하는 분노가 순간적으로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그 말 아니냐? 언제, 도대체 언제, 늬가 과연 집을 산단 말이냐? 집이라고 생긴 건 모조리 1억원을 넘는데, 네 월급이 얼마 된다고 집을 사게 된다는 거야? 또, 늬가 집 살 때까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하고? 왜 부모님이 늬랑은 전세 살면 안 되고, 시집 못 간 누나랑은 사글세 살아도 되는지 어디 말해 봐라!"
이번에는 갓 시집 온 올케가 눈초리를 포르스름하게 고추세우면서 대들었다.
"이상도 해라, 언니는! 어째서 우리가 집을 살 수 없다는 거죠? 집값이 너무 올라서 단시간 내에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면 몰라도 영원히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우리는 언니랑은 달라요.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수입이 벌써 언니의 몇 배란 점을 명심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말이죠, 언니는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는 몸이잖아요? 혼자 살면서 부모님 좀 모시면 어때요? 우리가 모시려면 가족 수가 넘 많아서 얼마나 큰 집을 얻어야 하는데, 무슨 돈으로 그렇게 큰 집을 얻어요?"
결국은 이년저년 소리가 셋방 안을 회오리쳤고, 그처럼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나빠서야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으랴 하는 명분론을 내세우면서 그들은 횡 분가해 나가버렸다. 그 후로는 거의 연락이 끊기다시피 하면서 서로 지냈다. 평상시에는 소식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채로 각각 호구지책에 매달려 지냈다. 그들이 서로 만나는 경우는 설날 따위에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스쳐 만나는 때뿐이었다. 말이 좋아 누나와 오빠지간이지 실제로는 남이 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게다가, 그 아래의 두 남동생도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 태도를 취하는지 금순으로선 오로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두어 해를 두고 연이어 결혼을 한 남동생들은 맏형과 짜기라도 한 양 완전히 녹음기 그 자체였다. '집 한 칸 장만할 때까지만, 직장에서 일정하게 자리가 잡히면,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때……' 등등의 온갖 변명들을 수세미 얽듯 주렁주렁 달아대는 것이었다.
그런데 맏동생 때보다 더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아래 두 녀석들이 새로운 조건을 갖다붙인 점이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은 장남의 몫인데 왜 차남 삼남인 우리한테 그것을 강요하느냐, 우리가 부모님을 모시고 싶어해도 어른들 스스로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장남과 같이 살지 못하고 차남 삼남과 동거하면 남세스럽기 때문에 부모들이 우리와 같이 살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누나는 이해할 수 있느냐, 우리보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형하고 이야기해라, 골치 아프다!'
"너희들은 나보다도 더 젊고 배운 것도 훨씬 더 많은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들은 꽉 막혔니? 부모님은 형제자매들이 누구나 다 모실 의무가 있고, 또 권리도 있고 그렇지, 무슨 이유로 그것이 장남에게 떠맡겨진 짐으로 계산되어야 하는지 난 통 이해를 할 수가 없어 ! 그렇다고 장남이 모시려 드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대로 절벽이었다. '바윗덩어리와 대화를 나누어도 이보다는 나으리라' 싶을 정도로 캄캄했다. 금순은 절망했다. 이미 나이는 서른을 넘겼고, 중졸의 학력, '공순이' 생활로 멍든 몸에 피곤한 정신, 동생들 학비며 부모의 병 구완비를 대느라 모아놓은 금전도 없다는 점, 부모 봉양 등 가족적 문제에 관한 갈등으로 형제간의 마찰이 심화된 점 등등,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저 가시덩쿨로만 여겨진 탓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있는 여동생뿐이었다. 둘은 같은 여자인데다 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까닭에, 어지간해서 정면적 의견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사이였다. 자연히 금순으로선 여동생 은순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그런데 그 은순이 드디어 금순의 마음에 한 줄기 싸늘한 냉기를 던져온 것이었다. 오로지 믿을 구석이라곤 유일하게 여동생 은순뿐이었는데, 그 애마저도 금순의 가슴에 칼금을 그어버린 것이었다.
"뭐어? 어떻게 한닥고? 너, 금방 뭐락고 그랬노?"
금순은 너무나 놀라 미처 동생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조차도 없었다.
"나,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겠다고 설치지는 않겠어. 그렇지만…… 나, 좋은 사람 생겼단 말야……."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락고?"
금순은 그렇게 말하는 동생의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크게 부릅떴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직장에서 쫓겨나 지금은 해고자 복직실천협의회인가 하는 재야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는 청년, 비교적 깡마른 체구에 눈매가 날카로운 스물다섯 된 젊은이, 장차는 시골에서 몇 마지기의 논농사를 짓고 있는 어른을 모셔야 하는 외동아들, 명문대학을 다니다가 공장으로 들어가 일했다는 괴짜……. 그런 것들이 은순을 통해서 들은 남자의 모든 것이었다. '어떻게 그게 좋은 남자야? 앞으로 평생 동안 자기 아내 고생을 시킬 사람, 민주화 운동이란 미명하에 자신은 제 하고 싶은 대로 활개치며 살고 여자에게는 희생과 굴욕을 강요할 인물, 가난과 과격성 등 좋지 않은 조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골고루 갖춘 사람, 그런 위인이 도대체 어떻게 좋은 사람이야?' 금순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자기 동생 은순도 어느샌가 운동권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금순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는 한에는 어지간해선 잘살 수 없는 이 세상, 부정부패와 부도덕이 판을 치는 이 세상, 그런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운동권 사람들의 생각을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 금순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순은 또 생각했다. 설혹 은순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그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를 '좋은 남편감'이라고까지 장담할 수 있는가. 동생의 연애를 이해할 수 없는 금순은 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언니의 그같은 회의에도 아랑곳없이 은순은 그저 즐겁기만 한 표정이었다.
"나 말야, 언니. 아까도 말했지만…… 언니 제쳐두고 먼저 결혼식 올리지는 않겠어……."
금순이 발끈하며 동생에게 일갈했다.
"고맙구나, 서른다섯 노처녀인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지는 않겠다고 인심을 다 써주고!"
언니의 비꼼에도 은순은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금순은 이윽고 동생 은순이 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내놓는 폭탄선언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말야, 언니……. 그래서 말인데…… 그 사람이랑 의논을 했거든……. 언니보다 먼저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지만……."
"그래서?"
금순은 예상되는 은순의 발언을 막아보기라도 할 양으로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은순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린 결혼식은 않고…… 그냥…… 함께 살기로 했어……."
금순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열심히 언니 입장을 고려해서 그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니 만큼 '고맙다'고 해야 마땅할지, 아니면 직업도 없는 반정부 운동권 사람과 식도 올리지 않고 동거에 들어가겠다는 것을 '미쳤다'고 펄펄 뛰어야 당연할지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언니보다 먼저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고…… 그냥…… 함께 살기로 했어…….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은순의 말이 귓속을 뱅뱅 휘저어도는 것을 느끼면서 문득 금순은 방 안에 걸려있는 액자의 내용을 떠올렸다. 애인이 준 것이라며 은순이 애지중지 벽에 내건 시화였다.
아내의 사진을 보며
김해화
당신을 보내고 텅 빈 술집
서투른 소주에 쉽게 취해 돌아와
촛불을 켜면
겨울 신작로
가슴 시린 가로수 돌아간 저 모퉁이에서
반가이 웃으며 당신이 달려오고 있다
북새바람 모질게 불어
황토먼지 자욱이 일면 시골 정류소
오늘 우리 헤어진다 하여
뜨겁게 눈물 섞으며 맺은 가난한 사랑에
봄이 오지 않으랴 아내여
세상이 추워도 움츠리지 말자
차라리 돌아서서 하늘을 보고 말아도
성에 서린 차창에 기대어 입술을 깨물던 당신
전깃불을 켜면 환히 드러날 외로움
당신의 잠자리, 베갯잇에 묻어 있을
머리카락 몇 개, 가슴 가득한 설움을 출렁이며
안겨오던 그 몸짓이 남기고 간 은은한 체취
어둠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그리움
차라리
나는 촛불을 켠다 아내여
촛불을 켜면
깨어나는 당신의 사진
싸늘하게 얼어붙은 겨울 신작로
눈 쌓인 들판
그 겨울을 녹이며 우리가 손 잡고 달려가고 있다
우리들이 있다 아내여
가혹한 노동 속에서도 울지 않으리
울지 말자 아내여
그 시화가 떠오르자 금순은 은근히 얼굴이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동생의 동거 운운이 금방 실감으로 다가오면서, 머리카락이 베갯잇에 묻어있다느니, 안겨오던 그 몸짓이 남기고 간 은은한 체취라느니 식의 시를 적어바친 남자의 행동으로 보아, 두 사람의 연애가 실제로는 어떻게 발전해 있는가를 알 수 있을 듯해서였다.
금순은 할 말이 없어졌다. 남는 것은 고민뿐이었다. 동생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그것이 내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나…… 언니보다 먼저 결혼식을 올릴 생각은 없어…… 그냥…… 같이 살기로 했어…….'
금순은 그 생각에 몰두하느라 마냥 정신이 없었다. 제중당약국 김 여사가 옥상까지 따라붙은 줄도 그녀는 눈치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빨래를 어째 그리 마구 널어? 구겨지지 않고 마르게 걸어야지!"
금순은 김 여사의 목소리에 후딱 본정신을 되차렸다. 김 여사의 옆에는 마을금고 이사장 마누라 최 여사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로 서 있다. 그녀는 금순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쪼르르 쫓아와 귓속말을 건넸다.
"동생이 결혼을 졸라대서 요즘 속 썩지? 맏이는 다 그렇다니까. 특히 맏딸이야 뭐 희생양이지. 남동생 공부시키느라 학교도 변변히 못 다녀, 그러다보면 혼인 적령기 놓치는 것도 다반사지. 가족 생각하는 맏이다운 생각에 아차 내 인생은 낭떠러지로 굴러버린다니까. 내가 베푼 만큼 동생들이 잘 되어서 갚아주려니 기대하고 지금껏 선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누나 고생한 것 손톱만큼도 생각해주는 동생은 백에 하나도 없다니까!"
금순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최 여사를 바라보고 섰다. 최 여사가 웃으면서 금순의 팔을 잡아끌었다.
"좋은 혼처가 있어서 꼭 권해야겠어!"
금순은 솔깃 가슴이 떨리는 자신을 깨닫는다. 제중당약국 거실로 끌리듯 들어선 금순은 최 여사의 활기찬 음성 속으로 서서히 빨려들어갔다.
"아마 알 거야! 저기 왜 통닭 체인점 하는 박사장! 그 양반 아직 나이 오십도 안 되었는데다, 인품 훌륭하지, 고등학생 중학생 남매가 제 아버지 재혼을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하고, 사별한 부인과도 금실이 그렇게 좋았으니 아가씨한텐 더없이 잘해줄 것 뻔하지, 그만하면 좋잖아?"
금순은 머릿속으로 남동생들과 은순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렇게 오락가락하던 동생들의 모습은 최 여사의 날카로운 음성에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없는 집 맏딸로 태어나 그 동안 고생 많았지? 어쩌면 결혼 적령기를 놓친 게 전화위복일지도 몰라. 이젠 고생 털고 편안하게 살아보는 거야. 나이 든 남자가 여자한텐 훨씬 잘해준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최 여사가 슬그머니 금순의 손을 보듬어 안는다. 금순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새삼 처녀다운 부끄러움에 얼굴을 복숭아 빛으로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