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_옥계선생 문집(文集) 서(序)
우리 동방에서 벼슬로 이름난 사람과 큰선비들 가운데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이를 어찌 한정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마음에서 나와 글로 남긴 것 가운데 성현들께서 이치를 밝힌 문장과 같은 것은 많이 만나볼 수 없다. 오직 우리 옥계(玉溪) 선생(先生)의 문장이 이러한 경지에 가깝다 할 것이다.
일찍이 주부자(朱夫子, 朱熹)께서 ‘이러한 것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으면, 반드시 이러한 문장이 밖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에 의거해 선생의 글을 살핌에 있어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을 소급해 찾아보면, 대개가 돈후(敦厚)한데 그 마음을 두었고, 순수하면서도 정미(精美)하고 명확(明確)했으며 조금도 경박하거나 잡된 기미가 문장에 섞여 있지 않았다. 선생께서 하늘로부터 타고난 바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학문을 통한 노력을 가해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고 수양하여 허명(虛明)한 진리의 본체를 지키셨고, 밖으로 성찰(省察)하여 웅수(應劑)할 때 이를 사용하여 이미 질박하고 참된 경지에 이르러 조금의 지나침이나 차질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 문장이 됨에 자연스럽게 그 조리(條理)가 분명하고 빛나며 아름답고도 시원스러울 뿐 아니라, 그 맛이 오래가며 음운(音韻)이 화평(和平)하였다. 따라서 억지로 붓을 들고 글을 지어 참신하고 기이합만을 추구하는 자들의 그저 비슷하게나 지은 글과는 달랐다.
이런 이유 때문에 효도하고 공손한 마음이 쌓여서 사장(辭章)이나 부모 봉양을 위한 상소문(上疏文) 가운데 드러나 보이는 것이 간절하고도 슬프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쌓여서 임금을 정성껏 인도하고 경계할 내용을 아뢴 글에서는 정성과 신의를 다하고 밝고 빛났으며, 진실하여 조금의 거짓도 없는 마음이 쌓여서 만사(輓詞)와 제문(祭文) 묘갈명(墓碣銘)과 행장(行狀)과 같은 저술로 드러났는데, 정확(正確)하고 전아(典雅)하며 무게가 있어 한 마디도 거짓이거나 칭찬에 넘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시(詩)나 편지와 같은 글이나 잡저(雜著)에서조차 마음의 바름을 얻고 정미(精微)한 뜻을 드러내 사물 이치의 가장 온당한 것을 모두 추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있는 순수합에 침잠한 것과 맞아 떨어졌으니 참으로 덕(德)을 지닌 분의 말씀이어서 진리의 본체에 밝아 이를 적용(適用)한 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께서는 저술(著述)을 즐기시지 않아 남긴 글이 많지 않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사람으로서 그만두기 어려운데서 나온 것이다. 사문(斯文) 정염(丁焰)이 일찍이 선생의 글을 초록(抄錄)해 약간 권(卷)을 만들어 이미 그것을 목판으로 새겼었는데, 불행하게도 난리 통에 불타 없어져 널리 반포하지 못함에 사림(士林)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선생의 손자 척(脊)이 개연(慨然)하게 문집을 중간(重刊)할 뜻을 품고 내게[鄭蘊]와 청하기를,
"저 의 할아버 지 문집 초록(抄錄)은 너 무 간략하옵니 댜 빠진 글들을 찾고 듣고 본 것을 보태주시고 나아가 서문도 써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나는 눈이 어두워져 글을 짓지 않은지가 몇 년이나 되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노군(盧君)이 오래도록 청을 그치지 않으니, 대개 사양할 수 없는 것이 그 사이에 있었다.
예전에 나의 선군자(先君子, 鄭惟明)께서 선생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시어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모셔서 선생으로부터 효도하고 공경하는 행실을 배웠고, 얻은 바가 있으셨다. 또한 선생의 전아(典雅)한 문장을 읊조려 항상 그 이치가 빼어나고 의리가 분명한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셨다. 나는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러할진대 끝내 한마디의 말도 납기지 않는다면 이는 노군(盧君)의 청에 허물을 끼칠 뿐 아니라 도리어 선군자(先君子)께서 일생동안 존모(尊慕)한 뜻을 저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초고(草稿)를 살펴 약간 수(首)를 더 꺼내서 문집 속에 넣었으나 감히 취하고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의 교화에 관련이 있는 것은 후학들에게 유익할 것이기에 그대로 두었다. 더 보충할 것이 없는 것은 그대로 두었으나, 너무 많다는 비난을 어찌 모면할 수 있겠는가.
아! 후세에서 이 문집을 보는 사람들은 한갓 그 문장만을 읽을 것이 아니라, 먼저 선생께서 마음 쓰신 본래의 뜻을 구해서 본다면,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날 것이며, 충성되고 신의 있는 행실이 힘쓰지 않아도 진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문집을 간행한 것이 어찌 세상 교화에 조금의 다행함이 없겠는가.
숭정 (崇禎) 5년(1632) 12월 기망(旣望)에 후학(後學) 정온(鄭蘊)은 삼가 쓰다.
정염(丁it晉) : 1524(중종 19)~1609(광해군 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군희(君卿), 호는 만헌(晩軒)이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난한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선되었다. 만년에 후진교육에 힘썼고, 80세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睦資)되었다.
정온(鄭羅) : 1569(선조 2)~1641(인조 19).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
(桐溪) • 고고자(鼓鼓子)이다. 정인홍(鄭仁弘)을 사사받아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 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허목(詐穆) • 조경(趙網) 등 기호납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混)一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 학통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